십자가의 도

매일성경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2 views
Notes
Transcript

Psalm 86:3–7 NKRV
3 주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종일 주께 부르짖나이다 4 주여 내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오니 주여 내 영혼을 기쁘게 하소서 5 주는 선하사 사죄하기를 즐거워하시며 주께 부르짖는 자에게 인자함이 후하심이니이다 6 여호와여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내가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7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께 부르짖으리니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리이다
찬송가: 461장 십자가를 질 수 있나
1 Corinthians 1:18–31 NKRV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30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31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전형상화 (말씀)
18-25절 교회 내 분쟁 문제를 계속 다루며 25절 하나님의 어리석음에 초점을 맞춘다. 철학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에 인간의 지혜를 덛붙이고자 한다.
그리스도인에게 인간의 철학은 필요없다. 철학은 사변적이며,제한적이고 오류가 가득한 인간의 통찰과 이해에 근거한다. 골로새서 2:8 “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인간의 지혜는 하나님을 낮추고 인간을 높인다.
18절: 고린도 교회의 신자들에게 바울이 십자가의 도를 말한다. 이것이 세상에서는 미련하게 여기는 것이지만 신자들에게는 구원을 이루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고 말한다.
십자가는 인간의 죄를 부수고 인간의 교만을 부순다. 죄로부터의, 교만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세상은 복음을 비웃는다. 경멸한다. 죄를 이야기 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조롱한다.
인간은 자신의 지혜로 피조물을 조물주로 예배하고 진리를 거짓말로 둔갑시킨다. 인간의 지혜는 언제나 하나님의 지혜 (십자가,복음)를 헛되게 한다.
인간의 지혜와 과학이 문명과 문화를 만들고 선용하면 유익하다. 그 부분은 감사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어디서와서 왜 살명 어디로 가는지 ,삶이 무엇이고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한 답은 설명하지 못한다.
18절:십자가는 단순하고 초라하다. 유대땅 시골 변방에서 온 한 청년이 예루살렘에서 동족들에게 모함을 받아 로마의 십자가형으로 죽은 아주 미련하고 황당하며 허무한 스토리이다. 그런데 그 청년은 성령으로 동정녀에게 나셨고, 십자가에서 죽어 무덤에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하나님이 되셨고 그것을 믿는자에게 죄에서 구원을 주신다는 것이다.
바울은 에덴에서 철학자들과 변론하며 다투었던 철학의 소용돌이를 잘 알고 있었고 그 사변적인 일에 헛됨을 잘 알고 있었다. 고린도전서 2:2 “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그리고 결심했다. ‘십자가의 도’만 전하기로 말이다. 문제는 인간의 지혜로는 십자가를 이해할 수가 없다. 제자들도 처음에는 예수님의 설명을 이해 못했다. (베드로의 태도를 보라) 모든 제자들도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 하신후 성령을 선물로 받은 후에야 이 모든일을 이해하고 알게 되었다.
19-20: 하나님의 지혜, 그 영속성, 이사야 29:14 “14 그러므로 내가 이 백성 중에 기이한 일 곧 기이하고 가장 기이한 일을 다시 행하리니 그들 중에서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려지리라” 질문을 가져와서 답을 한다. 요한계시록 17:14 “14 그들이 어린 양과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그들을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도 이기리로다”
잠언 14:12 “12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야고보서 3:17 “17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21-25절:하나님의 지혜,그 능력, 인간은 자신의 모든 추정하는 지혜로 하나님을 알 수 없었고,하나님과 인격적 관계를 갖기란 더욱 불가능하다. 인간의 지식과 철학이 늘수록 인간의 문제는 더욱 늘어난다. 하나님은 세상 지혜가 멍청하고 미련한 것으로 여기는 것을 사용해 세상 사람 중에 믿는 자들을 구원 하기로 하셨다.
전도는 선포이다. 변증과 설득이 아니다.
유대인(종교인)들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 (세상 이성적인 과학적인 지식인)은 지혜를 구했다. 그러나 이들 모두에게 복음은 꺼리는 것이 되거나 미련한 것이 되었다. 그러나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에게는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지혜이고 구원의 능력이 된다. 하나님의 어리석음과 약함이 사람보다 지헤롭고 강하다.
26-28절:하나님의 지혜, 그 역설, 바울은고린도 교회 신자들을 염두에 두고 이 구절을 섰다. 당시 성도는 유명하고,교육을 많이 받고, 부유하고, 힘이 있는 성도들이 거의 없었다.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자, 문벌 종은자가 많지 않은것을 기뻐해야 한다고 바울은 말한다. 하나님이 미련하고 약하고 천하고 멸시받고 없는 것들을 택하셔서 지혜있는자,강한자,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셨기 떄문이다. 마태복음 11:25 “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29-31절:하나님의 지혜. 그 목적,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구원받은 자들에게는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 (상실한 원의)이 되시기 위해서이다.
지혜: 성도들은 자신의 지혜를 대체하는 하나님의 지혜를 받는다.이는 즉각적이고 점진적이다. 고린도후서 4:6 “6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 에베소서 1:17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베드로후서 3:18 “18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옮음에 참여한다. 로마서 4:5 “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빌립보서 3:9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거룩함: 신자는 구별되고 거룩하게 된다. 성숙은 죄의 빈도가 줄어든다. 썩지 않는 씨를 받는다. 그리스도에게 고린도후서 3:18 “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갈라디아서 5:22–23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구원함: 속량 구속을 받는다. 에베소서 1:14 “14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베드로전서 1:18–19 “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형상화 - 십자가 앞에서 드러나는 우리의 현실
고린도전서 1장에서 바울이 다루고 있는 문제는 단순한 지식 논쟁이 아닙니다. 어제 본문에서 살펴보았듯이 고린도 교회 안에는 분쟁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에게 속했는지를 자랑했습니다.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했다”고 말했습니다. 겉으로는 신앙의 언어를 사용했지만, 실제로는 세상의 방식으로 교회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십자가보다 사람의 능력과 말재주와 지혜를 더 크게 보았습니다. 복음보다 지도자의 매력, 십자가보다 인간적 영향력, 하나님의 은혜보다 자신이 속한 집단의 우월성을 자랑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의 시선을 다시 십자가로 돌립니다. 교회의 분쟁은 결국 십자가를 잊어버릴 때 생깁니다. 십자가를 붙들면 자랑할 것이 없어지는데, 십자가를 놓치면 사람은 반드시 자기 자랑을 붙듭니다.
오늘 우리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입술로는 십자가를 말하지만, 실제 삶에서는 여전히 세상의 지혜를 의지할 때가 많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능력 있는 사람, 말 잘하는 사람, 배경 좋은 사람, 영향력 있는 사람을 더 중요하게 여길 때가 있습니다. 신앙의 깊이보다 사회적 성공을 더 크게 보고, 십자가의 겸손보다 세상의 탁월함을 더 부러워할 때가 있습니다.
물론 인간의 지혜와 학문과 과학이 무조건 악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일반은총의 영역 안에서 인간의 지식과 기술은 유익하게 사용될 수 있습니다. 의학은 생명을 살리고, 과학은 삶을 편리하게 하며, 문명은 사회를 질서 있게 세우는 데 기여합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감사히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인간의 지혜가 하나님을 대신하려 할 때입니다. 인간의 이성이 자신을 절대화하고,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려 할 때 그것은 더 이상 지혜가 아니라 교만이 됩니다.
현대인은 많은 것을 압니다. 정보는 넘쳐납니다. 지식은 빠르게 확장됩니다. 그러나 인간은 여전히 자기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인간은 왜 사는지,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죽음 이후에는 무엇이 있는지에 대해 확실한 답을 주지 못합니다. 사람은 점점 더 많은 정보를 갖게 되었지만, 반드시 더 지혜로워진 것은 아닙니다. 더 많은 기술을 가졌지만, 더 거룩해진 것도 아닙니다. 더 많은 선택지를 가졌지만, 더 자유로워진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의 지혜는 때로 하나님을 낮추고 인간을 높입니다. 죄를 죄라고 부르지 못하게 하고(다른 기호,생각), 회개를 낡은 종교적 언어처럼 여기게 합니다. 십자가를 불편하게 만들고, 복음을 시대에 뒤떨어진 이야기로 취급하게 합니다. 세상은 십자가를 미련하게 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를 인정하면 인간의 자존심을 무너뜨리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인간에게 “너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선함, 인간의 가능성, 인간의 공로를 근본적으로 부정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십자가를 부담스러워하는 이유입니다. 십자가는 단지 위로의 상징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먼저 우리의 죄를 폭로합니다. 인간본성의 전적부패를 폭로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무능한 죄인인지를 드러냅니다. 십자가 앞에서는 누구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지식인도, 종교인도, 도덕적인 사람도, 성공한 사람도, 오래 신앙생활한 사람도 자기 의를 내세울 수 없습니다.
오늘 유대인은 표적을 구했습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능력과 확실한 종교적 증거를 원했습니다. 헬라인은 지혜를 구했습니다. 그들은 이성적으로 납득할 수 있고 철학적으로 세련된 설명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게 하셨습니다.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었지만,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였습니다.
오늘 우리도 유대인처럼 표적을 구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제 삶에 눈에 보이는 증거를 주세요. 문제가 해결되면 믿겠습니다. 길이 열리면 순종하겠습니다. 기적이 보이면 따르겠습니다.” 또 헬라인처럼 지혜를 구할 때도 있습니다. “내가 이해되어야 믿겠습니다. 내 판단에 맞아야 받아들이겠습니다. 내 경험과 이성에 맞아야 순종하겠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우리의 조건 앞에 서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판단 받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를 판단하고 구원하기 위해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이해해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눈을 열어 주실 때 십자가가 하나님의 지혜임을 알게 됩니다. 제자들도 처음에는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고난을 막으려 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실패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성령을 받은 후에야 그들은 십자가가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문제는 지식이 부족한 것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근본 문제는 영적 눈이 어두운 것입니다. 십자가를 보면서도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지혜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을 들으면서도 여전히 자신을 의지하고, 말씀을 배우면서도 여전히 세상의 방식으로 살고,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자기 자랑을 붙들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바로 그랬습니다. 그들은 은사가 많았습니다. 말도 잘했고 지식도 풍성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정신은 희미했습니다. 그래서 분쟁이 생겼습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은혜를 자랑하지 않고 자기 사람, 자기 지식, 자기 은사를 자랑했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비극입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이 은혜를 잊어버리면, 은혜의 공동체 안에서도 세상의 질서가 반복됩니다.
오늘 교회도 십자가를 잃어버리면 세상과 다를 바 없어집니다. 누가 더 영향력 있는가, 누가 더 인정받는가, 누가 더 많이 아는가, 누가 더 오래 있었는가, 누가 더 헌신했는가를 가지고 비교하고 자랑하게 됩니다. 그러나 십자가 앞에서는 그런 자랑이 무너집니다. 십자가는 우리 모두가 은혜 아니면 설 수 없는 사람임을 보여 줍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말합니다.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세상적으로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않았고, 능한 자가 많지 않았고,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런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왜 입니까?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도 깊은 위로이자 동시에 강한 책망입니다. 위로인 이유는 하나님께서 약한 자, 미련한 자, 없는 자, 멸시 받는 자를 부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이 주목하지 않는 사람을 주목하십니다. 세상이 가능성 없다고 여기는 사람을 은혜로 붙드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책망인 이유는 우리가 여전히 스스로 강한 자가 되려고 하고, 있는 자가 되려고 하며, 자랑할 만한 사람이 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는 무엇을 자랑하고 있는가?” 내 지식입니까? 내 신앙 경력입니까? 내 헌신입니까? 내 직분입니까? 내 교회 안에서의 위치입니까? 내가 옳다는 확신입니까?
십자가는 그 모든 자랑을 내려놓게 합니다. 그리고 오직 주 안에서 자랑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재형상화- 십자가의 지혜로 다시 빚어지는 삶
그렇다면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어떻게 새롭게 살아야 합니까?
첫째, 우리는 인간의 지혜를 절대화하지 말고 십자가의 지혜 앞에 복종해야 합니다.
인간의 지혜는 필요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지혜는 구원의 길이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이성은 귀하지만, 죄로 인해 어두워진 이성입니다. 인간의 경험은 유익하지만, 제한적이고 불완전한 경험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세상의 지혜를 무시하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의 지혜를 하나님의 말씀 아래 두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지식과 학문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궁극적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최종 기준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심판 하셨고, 동시에 죄인을 구원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함께 드러났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보다 더 깊은 지혜는 없습니다.
성도는 어떤 문제를 바라볼 때 먼저 십자가의 관점으로 보아야 합니다. 사람을 볼 때도 십자가로 보아야 합니다. 교회를 볼 때도 십자가로 보아야 합니다. 갈등을 볼 때도 십자가로 보아야 합니다. 십자가 없이 사람을 보면 판단하게 됩니다. 십자가 없이 교회를 보면 실망하게 됩니다. 십자가 없이 갈등을 보면 내 의만 주장하게 됩니다. 그러나 십자가로 보면 나도 은혜가 필요한 죄인이고, 상대도 은혜가 필요한 죄인임을 알게 됩니다.
둘째, 우리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은 여전히 십자가를 미련하게 봅니다. 죄를 말하는 것을 불편해하고, 회개를 말하는 것을 낡은 것으로 여기며,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의 길이라고 말하는 것을 배타적이라고 비판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사람에게 인정받기 위해 주어진 메시지가 아닙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죄인을 살리기 위해 주신 구원의 능력입니다.
전도는 단순한 설득 기술이 아닙니다. 전도는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친절하게 설명해야 합니다. 상대를 존중해야 합니다. 질문에 성실히 답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우리의 말재주가 아닙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우리의 논리적 완성도가 아닙니다. 구원은 십자가의 복음을 통해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을 작게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듣기 편하게 만들기 위해 죄를 빼고, 심판을 빼고, 회개를 빼고, 십자가를 장식품처럼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는 불편합니다. 그러나 그 불편함 속에 구원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자존심을 깨뜨립니다. 그러나 그 깨어짐 속에 참된 자유가 있습니다.
셋째, 우리는 약함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선택의 은혜를 자랑해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자신을 비하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적으로 대단한 사람들만 부르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미련한 자, 약한 자, 천한 자, 멸시 받는 자, 없는 자를 택하셔서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의 약함 때문에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부족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부족함을 아는 사람이 은혜를 의지합니다. 자신의 약함을 아는 사람이 십자가를 붙듭니다. 자신의 무능함을 아는 사람이 기도합니다.
문제는 약함이 아니라 교만입니다. 문제는 부족함이 아니라 자기 의입니다. 하나님은 약한 사람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스스로 강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십자가의 은혜를 붙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약함 중에도 낙심하지 말고, 오히려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주님, 저는 약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나의 지혜가 되십니다. 저는 의롭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나의 의가 되십니다. 저는 거룩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나를 거룩하게 하십니다. 저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나의 구속이 되십니다.”
넷째, 우리는 모든 자랑을 그리스도께 돌려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장의 결론은 분명합니다.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이것이 십자가의 도가 우리 삶에 만들어 내는 가장 중요한 변화입니다. 십자가를 아는 사람은 자기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깊이 붙든 사람은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지 않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구원받은 사람은 남을 쉽게 판단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가진 모든 것이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믿게 된 것도 은혜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알게 된 것도 은혜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넘어지지 않고 여기까지 온 것도 은혜입니다. 내가 조금이라도 변화되었다면 그것도 은혜입니다. 내가 죄를 미워하게 되었다면 그것도 은혜입니다. 내가 말씀을 사모하게 되었다면 그것도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를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내가 높아지는 삶이 아니라, 십자가가 높아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내 지혜를 관철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분쟁은 대개 자기 자랑에서 시작됩니다. 내가 옳다, 내가 더 안다, 내가 더 헌신했다, 내가 더 오래 있었다, 내가 더 많이 희생했다는 마음에서 갈등이 깊어집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우리를 낮춥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네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중요한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이 중요한가?” “네 자존심을 지키는 것이 중요한가, 복음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중요한가?” “네 말이 이기는 것이 중요한가, 십자가의 사랑이 나타나는 것이 중요한가?”
십자가의 지혜로 다시 빚어진 사람은 다르게 반응합니다. 억울할 때도 자기 의에 갇히지 않습니다. 인정받지 못할 때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약함이 드러날 때도 숨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충분한 은혜를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다섯째,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네 가지 은혜를 붙들어야 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를 붙드는 복음의 기초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지혜가 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스스로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습니다. 이제 성도는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인생을 해석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의로움이 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내세울 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십니다. 우리의 의는 우리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정죄감에 묶여 살 필요가 없습니다. 동시에 자기 의로 남을 판단할 수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거룩함이 되십니다. 성도는 이미 하나님께 구별된 사람이며, 동시에 날마다 거룩하게 빚어져 가는 사람입니다. 성화는 자기 힘으로 완성하는 도덕적 개선이 아닙니다. 성화는 성령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켜 가시는 은혜의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와 싸우되 절망하지 않습니다. 넘어질 때 회개하고, 다시 십자가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함, 곧 속량이 되십니다. 우리는 은이나 금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구속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소속은 더 이상 죄와 세상과 죽음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사신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결론적 적용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십자가는 세상이 보기에는 미련합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십자가는 세상이 보기에는 약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 죄와 사망을 이기신 하나님의 강함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세상이 보기에는 실패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하나님은 죄인을 구원하시는 영원한 승리를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십자가로 돌아가야 합니다. 교회가 분쟁할 때도 십자가로 돌아가야 합니다. 마음에 교만이 올라올 때도 십자가로 돌아가야 합니다. 세상의 지혜가 더 크게 보일 때도 십자가로 돌아가야 합니다. 자신의 약함 때문에 낙심할 때도 십자가로 돌아가야 합니다.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십자가 안에서 우리는 부족할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지혜가 되시고, 의로움이 되시고, 거룩함이 되시고, 구원함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고백은 이것이어야 합니다.
“주님, 나의 지혜를 내려놓고 십자가의 지혜를 붙들게 하소서. 나의 의를 내려놓고 그리스도의 의를 의지하게 하소서. 나의 자랑을 내려놓고 오직 주 안에서 자랑하게 하소서. 세상이 미련하다 하는 십자가를 나의 생명과 능력으로 붙들게 하소서.”
십자가의 도는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 십자가의 능력이 우리의 교만을 꺾고, 우리의 분쟁을 멈추게 하며, 우리의 삶을 다시 그리스도 중심으로 세우기를 바랍니다.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
Earn an accredited degree from Redemption Seminary with Log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