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602 수요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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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팔을 네 입에 댈지어다 원수가 독수리처럼 여호와의 집에 덮치리니 이는 그들이 내 언약을 어기며 내 율법을 범함이로다
2 그들이 장차 내게 부르짖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우리 이스라엘이 주를 아나이다 하리라
3 이스라엘이 이미 선을 버렸으니 원수가 그를 따를 것이라
4 그들이 왕들을 세웠으나 내게서 난 것이 아니며 그들이 지도자들을 세웠으나 내가 모르는 바이며 그들이 또 그 은, 금으로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었나니 결국은 파괴되고 말리라
5 사마리아여 네 송아지는 버려졌느니라 내 진노가 무리를 향하여 타오르나니 그들이 어느 때에야 무죄하겠느냐
6 이것은 이스라엘에서 나고 장인이 만든 것이라 참 신이 아니니 사마리아의 송아지가 산산조각이 나리라
7 그들이 바람을 심고 광풍을 거둘 것이라 심은 것이 줄기가 없으며 이삭은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요 혹시 맺을지라도 이방 사람이 삼키리라
8 이스라엘은 이미 삼켜졌은즉 이제 여러 나라 가운데에 있는 것이 즐겨 쓰지 아니하는 그릇 같도다
9 그들이 홀로 떨어진 들나귀처럼 앗수르로 갔고 에브라임이 값 주고 사랑하는 자들을 얻었도다
10 그들이 여러 나라에게 값을 주었을지라도 이제 내가 그들을 모으리니 그들은 지도자의 임금이 지워 준 짐으로 말미암아 쇠하기 시작하리라
11 에브라임은 죄를 위하여 제단을 많이 만들더니 그 제단이 그에게 범죄하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12 내가 그를 위하여 내 율법을 만 가지로 기록하였으나 그들은 이상한 것으로 여기도다
13 그들이 내게 고기를 제물로 드리고 먹을지라도 여호와는 그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이제 그들의 죄악을 기억하여 그 죄를 벌하리니 그들은 애굽으로 다시 가리라
14 이스라엘은 자기를 지으신 이를 잊어버리고 왕궁들을 세웠으며 유다는 견고한 성읍을 많이 쌓았으나 내가 그 성읍들에 불을 보내어 그 성들을 삼키게 하리라
들어가며
들어가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일수록 빠지기 쉬운 함정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잘 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오래 다니고, 예배를 꾸준히 드리고, 여러 섬김의 자리를 지켜 온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과 가까운 사람이다."
"나는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다."
물론 그런 확신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확신이 내 삶을 돌아보는 일을 멈추게 만들 때, 신앙은 매우 위험한 자리에 서게 됩니다.
오늘 본문인 호세아 8장은 바로 그런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입술로 "나의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를 아나이다"(호 8:2)라고 외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제단을 많이 쌓았습니다. 제사를 열심히 드렸습니다. 종교 활동에도 누구보다 열심이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님을 잘 섬기는 백성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예배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드리는 제물을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심지어 그들이 쌓은 수많은 제단이 오히려 죄를 짓게 하는 제단이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분명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안다고 말했지만, 실제 삶에서는 하나님을 버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입술로는 하나님을 찾았지만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있었고,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자신들의 힘과 방법을 더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호세아 8장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종교적인 열심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는 신앙과 실제로 하나님을 아는 삶이 얼마나 다른 것인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 함께 묵상하기를 원합니다.
본문의 배경
본문의 제자인 호세아는 주전 8세기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한 예언자였습니다. 그가 사역하던 시기는 여로보암 2세가 통치하던 때였습니다. 당시 북이스라엘은 역사상 가장 번영하던 시기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영토는 넓어졌고 무역은 활발했습니다. 경제는 성장했고 사람들은 풍요로운 삶을 누렸습니다.
하지만 그 번영은 겉모습일 뿐이었습니다.
여로보암 2세가 죽은 후 북이스라엘은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약 20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여섯 명의 왕이 바뀌었고, 그 가운데 네 명은 암살로 생을 마쳤습니다. 나라 안에서는 권력 다툼이 끊이지 않았고, 나라 밖에서는 앗수르 제국이 점점 세력을 넓혀 오고 있었습니다. 결국 북이스라엘은 주전 722년 앗수르에 의해 멸망하게 됩니다.
호세아는 바로 그 멸망 직전의 시대를 살아간 사람입니다. 겉으로는 화려해 보였지만 속은 이미 무너져 가고 있던 시대, 사람들은 평안하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심판이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시던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보신 북이스라엘의 가장 큰 문제는 종교가 없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누구보다 종교적이었습니다. 제사를 드렸고 절기를 지켰으며 하나님을 찾는다고 말했습니다.
문제는 그들의 종교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신앙에서 벗어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북이스라엘이 남유다와 갈라졌던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북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여로보암 1세는 백성들이 예배를 드리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세우고 백성들에게 그곳에서 예배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금송아지를 가리켜 "이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의 신이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를 버리고 완전히 다른 신을 섬긴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여호와를 섬긴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금하신 형상을 만들어 하나님을 대신하게 했고, 결국 그 예배는 시간이 흐르면서 가나안의 바알 숭배와 뒤섞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호세아 시대의 이스라엘은 여전히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이 아닌 자신들이 만들어 낸 신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입술로는 하나님을 찾았지만 삶으로는 하나님을 떠나 있었던 것입니다.
호세아 8장은 바로 그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탄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예배와 정치, 그들의 삶 전체를 보시며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나를 안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나를 버렸다고 말입니다.
이제 본문은 왜 하나님께서 그들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는지, 왜 그들이 쌓은 제단이 오히려 죄를 짓게 하는 제단이 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는 것과 실제로 하나님을 아는 삶 사이에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본문 강해
본문 강해
첫째, 입술은 가까우나 삶은 멀어진 백성 (1-3절)
첫째, 입술은 가까우나 삶은 멀어진 백성 (1-3절)
본문은 매우 긴박한 경고로 시작됩니다.
"나팔을 네 입에 댈지어다 원수가 독수리 같이 여호와의 집에 덮치리니 이는 그들이 내 언약을 어기며 내 율법을 범함이로다"(호 8:1).
고대 이스라엘에서 나팔은 전쟁이 임박했을 때 부는 경보였습니다. 적이 가까이 왔다는 신호였고, 백성들에게 준비하라는 외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호세아에게 그 나팔을 불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원수가 독수리처럼 덮쳐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독수리는 북이스라엘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앗수르를 가리킵니다. 하늘에서 먹이를 노리다가 순식간에 급강하하는 독수리처럼, 앗수르의 침략이 곧 임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재앙의 이유를 한마디로 정리하십니다.
"그들이 내 언약을 어기며 내 율법을 범함이로다."
문제의 핵심은 군사력이 부족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경제가 약해서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2절은 더욱 충격적입니다.
"그들이 장차 내게 부르짖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우리 이스라엘이 주를 아나이다 하리라."
심판이 눈앞에 다가오자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어보면 신앙적인 표현으로 가득합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를 아나이다."
특별히 여기서 "안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야다'입니다. 이 단어는 단순히 어떤 정보를 알고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부부가 서로를 알듯이 깊고 친밀한 관계 속에서 아는 것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즉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잘 압니다."
"우리는 주님과 가까운 관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고백을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이 이미 선을 버렸으니 원수가 그를 따를 것이라."
이스라엘은 입술로는 하나님을 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삶은 이미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한 길에서 떠나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고백했지만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친밀하다고 말했지만 실제 삶은 하나님과 멀어져 있었습니다.
고백과 삶 사이에 깊은 틈이 벌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호세아 시대의 이스라엘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훗날 예수님께서도 당시 종교 지도자들을 향해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마 15:8).
입술은 하나님을 향하고 있지만 마음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는 것, 신앙의 언어는 익숙하지만 삶의 방향은 하나님과 멀어져 있는 것, 이것이 하나님께서 가장 안타까워하셨던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 우리도 경계해야 할 신앙의 함정입니다.
교회를 오래 다니고, 예배에 익숙해지고, 하나님에 대한 많은 지식을 갖게 될수록 우리는 어느 순간 "나는 하나님을 안다"는 확신 속에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우리의 고백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입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호세아 8장은 바로 그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는 것과 실제로 하나님을 아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는 것입니다.
둘째, 내가 세운 권력, 내가 만든 신 (4-6절)
둘째, 내가 세운 권력, 내가 만든 신 (4-6절)
4절은 왜 그들의 신앙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졌는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문제를 두 가지로 지적하십니다.
"그들이 왕들을 세웠으나 내게서 난 것이 아니며 그들이 지도자들을 세웠으나 내가 모르는 바이며 그들이 또 그 은, 금으로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었나니 결국은 파괴되고 말리라"(호 8:4).
첫째는 정치의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묻지 않고 자기들 마음대로 왕을 세웠습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여로보암 2세 이후 북이스라엘은 극심한 혼란을 겪었습니다. 왕이 칼로 권력을 잡았다가 또 다른 칼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왕들은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자신의 힘과 정치적 계산을 의지했습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했지만, 정작 나라의 중요한 결정은 하나님 없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왕들을 세웠으나 내게서 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말했지만 실제 삶의 결정권은 하나님께 드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둘째는 예배의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은과 금으로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5절과 6절은 그것을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사마리아여 네 송아지는 버려졌느니라..."
"이것은 이스라엘에서 나고 장인이 만든 것이라 참 신이 아니니 사마리아의 송아지가 산산조각이 나리라."
여기서 말하는 사마리아의 송아지는 사람이 손으로 만든 형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향해 아주 단순하면서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장인이 만든 것이라 참 신이 아니니."
사람이 만든 것은 결코 하나님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라는 이름을 버린 적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송아지를 세워 놓고도 자신들이 여호와를 예배한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하나님이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들이 만들어 낸 하나님이었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원하는 모습으로 빚어낸 하나님, 자기들이 통제할 수 있는 하나님, 자기들의 욕심과 계획에 맞춰 놓은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이것이 우상숭배의 본질입니다.
우상숭배는 단지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내 생각에 맞게 바꾸고, 하나님을 내 계획에 맞게 이용하며, 하나님을 내가 다룰 수 있는 존재로 끌어내리는 것 역시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내가 만든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 장면을 보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출애굽기 32장을 떠올리게 됩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있는 동안 백성들은 아론에게 금송아지를 만들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송아지 앞에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놀랍게도 그들은 금송아지가 자신들을 구원했다고 믿은 것이 아닙니다. 애굽에서 구원하신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을 자신들이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형상으로 바꾸어 버린 것입니다.
결국 호세아 시대에 북이스라엘이 하고 있던 일도 똑같았습니다.
시내산 아래에서 범했던 죄가 수백 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대로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기보다 자신이 원하는 모습의 하나님을 만들어 섬기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죄를 향해 호세아를 통해 엄중하게 경고하고 계신 것입니다.
셋째, 바람을 심고 다른 것을 의지한 백성 (7-10절)
셋째, 바람을 심고 다른 것을 의지한 백성 (7-10절)
이제 하나님은 그들의 삶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한 문장으로 선언하십니다.
"그들이 바람을 심고 광풍을 거둘 것이라"(호 8:7).
이것은 무서운 말씀입니다.
농부는 심은 것을 거둡니다. 밀을 심으면 밀을 거두고, 보리를 심으면 보리를 거둡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바람을 심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바람은 붙잡을 수 없는 것입니다. 남는 것도 없습니다. 즉 그들은 헛된 것에 인생을 쏟아붓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정치, 하나님을 떠난 예배, 하나님을 떠난 선택들에 자신들의 모든 것을 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바람을 심으면 바람 정도를 거두는 것이 아니라 광풍을 거두게 된다는 것입니다.
광풍은 모든 것을 휩쓸어 버리는 폭풍입니다. 결국 그들이 의지했던 것들이 오히려 그들의 삶을 무너뜨리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자기 손으로 신을 만들고, 자기 힘으로 나라를 세우며, 자기 지혜로 미래를 준비하려 했지만 그 모든 노력의 끝에는 파멸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위기가 찾아왔을 때 누구를 의지했을까요?
안타깝게도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9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들이 홀로 떨어진 들나귀 같이 앗수르로 갔고 에브라임이 값 주고 사랑하는 자들을 얻었도다."
여기서 들나귀는 무리에서 떨어져 혼자 방황하는 짐승을 가리킵니다. 방향도 없고 보호해 줄 존재도 없이 광야를 떠도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스라엘의 모습을 그렇게 보신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앗수르에게 달려갔습니다. 살아남기 위해 조공을 바치고, 돈을 주며, 정치적 동맹을 맺으려 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붙잡은 대상이 결국 자신들을 삼켜 버릴 나라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켜 주실 수 있었지만 그들은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힘을 더 신뢰했습니다. 하나님보다 강대국을 더 믿었습니다. 하나님보다 세상의 방법을 더 안전하다고 여겼습니다.
이것이 북이스라엘의 두 번째 죄였습니다.
첫 번째 죄가 하나님을 자기 손으로 만들어 버린 죄였다면, 두 번째 죄는 하나님 대신 다른 것을 의지한 죄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버렸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하나님보다 앗수르를 더 믿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10절에서 그들이 돈을 주고 사들인 그 동맹조차 그들을 구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하나님 대신 붙드는 것은 결국 구원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안전하다고 생각하며 붙들었던 그것이 우리를 짓누르는 짐이 되고, 우리가 의지했던 그것이 우리를 무너뜨리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호세아 8장은 계속해서 같은 사실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결국 두 가지 길을 걷게 됩니다. 하나님을 자기 생각에 맞게 만들어 버리거나, 하나님 대신 다른 것을 의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두 길의 끝에는 언제나 같은 결과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 없는 안전은 결국 안전이 아니며, 하나님 없는 성공은 결국 우리를 지켜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넷째, 많은 제단이 도리어 죄가 되다 (11-13절)
넷째, 많은 제단이 도리어 죄가 되다 (11-13절)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북이스라엘의 문제는 하나님을 떠났으면서도 예배를 드리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어느 때보다 종교적으로 열심이었습니다. 하나님 대신 우상을 의지했고, 하나님 대신 강대국을 붙들었지만, 동시에 제단도 계속 쌓고 제사도 계속 드렸습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하나님은 그들의 신앙이 얼마나 심각하게 어그러져 있는지를 말씀하십니다.
11절입니다.
"에브라임은 죄를 위하여 제단을 많이 만들더니 그 제단이 그에게 범죄하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이 말씀에는 매우 아이러니한 반전이 담겨 있습니다.
원래 제단은 죄를 해결하기 위한 곳이었습니다. 죄인이 하나님께 나아가 용서를 구하고 회복을 경험하는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지금 그 제단이 오히려 죄를 짓게 하는 도구가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죄를 해결하려고 쌓은 제단이 죄를 만들어 내는 제단이 된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문제는 제단의 숫자가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그 제단이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가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식이 아니라 자기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예배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는 관심이 없었고, 자기들이 만족할 수 있는 종교생활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12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를 위하여 내 율법을 만 가지로 기록하였으나 그들은 이상한 것으로 여기노라."
하나님은 이미 당신의 뜻을 충분히 알려 주셨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예배해야 하는지, 무엇을 기뻐하시고 무엇을 싫어하시는지 말씀으로 분명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그 말씀을 낯선 것으로 여겼습니다. 자기 삶과 상관없는 것으로 취급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뒤로 밀어 두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방식의 예배만 계속 늘려 갔습니다.
그러니 제단이 많아질수록 죄도 많아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준이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 결과가 13절에 나타납니다.
"그들이 내게 고기를 드려 제물로 삼아 먹을지라도 여호와는 그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제물이 부족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예배의 횟수가 적어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예배 자체를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예배 속에 하나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이미 오래전에 이 진리를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6).
사무엘도 사울에게 같은 말씀을 전했습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라"(삼상 15:22).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것은 제단의 숫자가 아닙니다. 예배의 형식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것은 그분을 향한 사랑과 순종입니다.
아무리 많은 예배를 드려도 하나님을 향한 순종이 없다면 그 예배는 껍데기만 남게 됩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 예배는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됩니다.
다섯째, 자기를 지으신 이를 잊어버린 것 (14절)
다섯째, 자기를 지으신 이를 잊어버린 것 (14절)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그들의 모든 문제의 뿌리가 무엇인지를 말씀하십니다.
14절입니다.
"이스라엘은 자기를 지으신 이를 잊어버리고 궁궐을 많이 세웠으며 유다는 견고한 성읍을 많이 쌓았으나 내가 그 성읍들에 불을 보내어 그 성들을 삼키게 하리라."
지금까지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여러 죄를 지적하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묻지 않고 왕을 세웠습니다.
자기 손으로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하나님보다 앗수르를 의지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기들이 원하는 방식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마지막에 이 모든 죄의 뿌리를 한마디로 정리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자기를 지으신 이를 잊어버리고."
여기서 "잊어버리고"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샤카흐'입니다. 단순히 잠시 생각이 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마음에서 밀어내고 삶에서 지워 버렸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존재를 몰랐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말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제 삶에서는 하나님을 더 이상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부터 모든 문제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 대신 자기 손으로 궁궐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대신 자기 능력을 신뢰했습니다. 하나님 대신 자신이 만든 안전장치를 붙들었습니다.
자기를 만드신 분을 잊어버리자 자기 인생을 자기가 책임지려 했고, 자기 미래를 자기가 지키려 했고, 자기 안전을 자기가 마련하려 했습니다.
결국 앞에서 살펴본 모든 죄가 여기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자기 생각에 맞게 만들었던 것도,
하나님 대신 강대국을 의지했던 것도,
예배를 자기중심적으로 드렸던 것도,
모두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기억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호세아 8장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잊어버리면 결코 비어 있는 상태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잊으면 반드시 다른 것으로 그 자리를 채우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돈으로 채웁니다.
어떤 사람은 성공으로 채웁니다.
어떤 사람은 인간관계로 채웁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능력과 경험으로 채웁니다.
이스라엘은 우상과 강대국과 견고한 성읍으로 그 자리를 채우려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 성읍들에 불을 보내어 그 성들을 삼키게 하리라."
사람이 만든 것은 결국 사람을 지켜 줄 수 없습니다.
사람이 의지하는 것은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고,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안전이 되십니다.
그래서 호세아 8장은 단순히 우상숭배를 책망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신앙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기억하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억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순종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순종의 삶 속에서 참된 예배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오늘 우리에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호세아 8장은 북이스라엘의 이야기로 끝나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의 신앙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먼저 우리는 입술의 고백과 삶의 방향이 일치하는 신앙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나의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를 아나이다"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들의 고백은 신앙적인 언어로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신 것은 입술의 고백이 아니라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안다고 말했지만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다른 것을 더 의지하며 살아갔습니다.
오늘 우리도 예배의 자리에서는 하나님이 나의 전부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삶의 현장에서는 하나님보다 돈을 더 의지하고, 하나님보다 사람의 평가를 더 중요하게 여기고, 하나님보다 내 계획을 더 붙들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참된 신앙은 입술의 고백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삶의 방향이 하나님을 향할 때 비로소 그 고백은 진실한 신앙이 됩니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을 내 생각대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가장 깊고 위험한 유혹입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이름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자기들이 원하는 모습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자기들이 이해할 수 있는 하나님, 자기들이 통제할 수 있는 하나님, 자기들의 욕심을 채워 주는 하나님을 만들어 놓고 그 앞에 절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같은 실수를 할 수 있습니다.
내 계획을 항상 허락해 주시는 하나님, 내가 원하는 것만 주시는 하나님, 나에게 순종을 요구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하나님은 성경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내가 만들어 낸 우상일 뿐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을 내 생각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가는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는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위기 앞에서 하나님께로 가지 않았습니다. 앗수르에게 달려갔습니다. 그들은 강대국이 자신들을 지켜 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비슷한 유혹 속에 살아갑니다.
돈을 의지하고, 사람을 의지하고, 자신의 능력과 경험을 의지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는 것은 결국 우리를 지켜 주지 못합니다.
이스라엘이 값을 치러 얻은 동맹이 결국 그들을 구하지 못했던 것처럼,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나의 문제를 해결하실 분은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하나님은 호세아 13장 4절에서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느니라"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자는 하나님뿐이십니다.
우리의 인도자는 하나님뿐이십니다.
우리의 삶을 붙들고 계시는 분도 하나님뿐이십니다.
이 사실을 마음 깊이 붙드는 사람의 삶은 달라집니다.
더 이상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며 살지 않습니다. 나의 가치는 사람과의 비교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지으신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람의 인정과 평가에 매여 살아가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 자신을 꾸미거나 거짓된 모습으로 살아갈 필요도 없습니다. 내가 기쁘게 해야 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 앞에 머리를 숙이며 살아가는 인생과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살아가는 인생은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사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구원자로 붙드는 사람은 다른 것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사람은 참된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호세아 8장은 우리에게 한 가지를 가르쳐 줍니다.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며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모든 것의 출발은 14절의 한 단어로 다시 돌아갑니다.
"이스라엘은 자기를 지으신 이를 잊어버리고."
결국 이스라엘의 모든 문제는 하나님을 잊어버린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자 자기 손으로 신을 만들었고, 하나님을 잊어버리자 다른 것을 의지했으며, 하나님을 잊어버리자 예배마저 자기중심적으로 변질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회복의 시작도 같은 자리에서 이루어집니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다시 기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다시 모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너진 신앙을 회복하는 첫걸음입니다.
호세아 8장은 분명 무거운 심판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호세아서가 심판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떠났던 백성,
자기 손으로 신을 만들었던 백성,
다른 것을 의지했던 백성,
하나님을 잊어버렸던 백성을 향해 하나님은 호세아서 마지막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들의 반역을 고치고 기쁘게 그들을 사랑하리니"(호 14:4).
참 놀라운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죄라고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심판을 선언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은 끝까지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호세아가 자신을 배신하고 떠난 고멜을 끝내 포기하지 않고 다시 찾아갔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죄 가운데 있는 백성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실패보다 크고,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죄보다 깊습니다.
돌아오기만 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다시 품어 주십니다.
사실 우리가 쌓아 올린 수많은 제단이 죄의 제단이 되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제단이 부족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예배가 부족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 중심에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회복의 길은 복잡하지 않습니다.
내가 만든 신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던 것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다시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북이스라엘 백성이 알지 못했던 놀라운 은혜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참된 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단번에 드려진 완전한 제물이 되셔서 우리의 죄를 영원히 담당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내 노력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내 손으로 새로운 제단을 쌓을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십자가의 은혜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돌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들으며 우리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송아지가 무엇인지 돌아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고 있는 것은 없는지,
하나님보다 더 소중하게 붙들고 있는 것은 없는지,
하나님 자리에 놓여 있는 것은 없는지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 한 분만을 다시 우리 삶의 중심에 모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자리,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기억하는 자리,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자리로 돌아가기를 바랍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의 예배는 다시 살아나게 되고, 우리의 신앙은 다시 회복되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참된 예배가 시작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