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자의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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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8:1-13
고전 8:1-13
오늘은 ‘강한자의 책임’이라는 제목으로 말씀 나누겠습니다. 특별히 부부에게 있어서, 아기가 생기면 부모의 삶은 많은 것들이 바뀝니다. 결혼을 해도 단둘이만 지내는 것과, 아이가 태어나면 삶의 모습들이 많이 바뀌지요. 아기가 생기기전에는요, 둘이서 먹을만한 맛있는 것도 먹고, 매운 것도 먹고 짠것도 먹고 먹고 싶은 것을 먹었다면요, 아이가 생기면요, 메뉴 자체가 바뀌는거죠. 국은 싱겁게 끊여야 하고, 반찬도 자극적이지 않게 하고, 식당도 갈 때 아이가먹을 수 있는 데로 골라야 하는거에요. 내가 먹고 싶은 것이 있어도 아이 때문에 그것을 바꾸는 거죠.
그런데 만약에 부모가 그 일때문에 억울해 할까요? 내가 쟤 때문에 먹고 싶은 것을 못 먹는다 불평할까요? 대부분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게 그냥 자연스럽습니다. 아이가 먹을 수 있는 것에 나도 맞추는 것이 당연해지는거에요. 왜요? 그게 부모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더 강하고, 내가 더 감당할 수 있고, 내가 사랑으로 자연스럽게 그렇게 해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뭐 많은 것들도 그렇지요, 아이가 태어나면 아이의 생활패턴에 맞출 수 밖에 없고, 완전 아이 때는, 걔가 잠자면 조용히 지내야 되고, 냅두고 나갈 수도 있고, 아이의 생활패턴에 부모가 맞추는거죠.
이게 쉬운 일입니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내가 충분히 더 할 수 있는 사람인데, 내 자유가 있는 사람인데, 그걸 내려놓는 겁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합니까? 아이가 약하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아직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위해 자기 자신을 기꺼이 제한하는 것 — 그게 부모라는 자리입니다.
여러분, 저는 이게 참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강하다는 것이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약한 사람 곁에서 그 사람을 위해 자기를 내려놓을 수 있는 것 — 그게 진짜 강함이라는 거예요.
\오늘 새벽 본문인 고린도전서 8장에서 바울이 딱 이 이야기를 합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믿음이 강한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신학적으로도 분명했고,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어요. 그런데 바울이 이들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이 가진 그 강함과 자유를 지금 어디에 쓰고 있습니까? 내가 할 수 있다는 것과, 내가 해야 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라고 말합니다.
1대지 — 강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묻다 (1–6절)
1대지 — 강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묻다 (1–6절)
"지식은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덕을 세운다"
1절을 보겠습니다.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바울이 첫 문장부터 굉장히 강하게 치고 들어옵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한다고요.
여기서 배경을 잠깐 이해해야 합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두 부류의 성도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믿음이 강한 자들이고, 하나는 믿음이 약한 자들입니다. 당시 고린도는 우상 신전이 즐비한 도시였어요. 시장에서 파는 고기들이 대부분 우상에게 제물로 드려졌다가 나온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고기를 사 먹으려면 우상 제물을 먹어야 하는 상황인 거예요.
믿음이 강한 자들은 어떻게 생각했겠습니까. "우상이 뭐가 있어? 신은 하나님 한 분뿐인데. 그 고기가 우상 앞에 놓였다 왔다고 해서 뭐가 달라져? 그냥 고기지." 신학적으로 맞는 말입니다. 4절에서 바울도 인정합니다. "우상은 세상에 아무것도 아니며 하나님은 한 분뿐이시니라."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가 뭐였냐면, 그 지식이 그들을 교만하게 만들었다는 겁니다.
여러분, 아는 것이 많아지면 어떻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까?
자기도 모르게 모르는 사람이 답답해 보이기 시작합니다. "저것도 몰라?" 하는 마음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오래 믿은 사람이 새로 믿은 사람을 볼 때, "저 정도 믿음이면 그것도 못 해?" 이런 마음이 들기 시작하는 거예요. 지식이 쌓일수록 겸손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내 기준이 높아져서 다른 사람이 작아 보이는 겁니다.
바울이 바로 그걸 지적하는 겁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한다고요.
그런데 2절에서 바울이 더 충격적인 말을 합니다.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내가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 아직 모르는 겁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진짜 아는 것은 무엇이냐는 거예요. 3절을 보면 바울이 답을 줍니다.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이 알아주시느니라." 내가 하나님을 얼마나 많이 아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아시느냐 — 그게 진짜 지식의 기준이라는 겁니다.
여러분, 이게 완전히 방향을 뒤집는 말입니다. 우리는 보통 내가 얼마나 많이 아느냐로 신앙의 깊이를 측정합니다. 성경을 얼마나 많이 알고, 신학적으로 얼마나 정확하고. 그런데 바울은 방향을 돌립니다. 내가 아는 것보다, 하나님께 알려지는 것이 먼저라고요. 그리고 하나님께 알려지는 길이 무엇이냐 —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1대지의 핵심은 이겁니다.
고린도의 강한 자들은 지식이 많았습니다. 우상에 대해서도 알고, 하나님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 지식이 그들을 진짜 강하게 만든 게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지식이 형제를 내려다보게 만들고, 자기 자유만 주장하게 만들었습니다.
진짜 강함은 어디서 옵니까.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 그리고 그 앎이 사랑으로 이어지는 데서 옵니다. 사랑은 덕을 세운다고 했습니다. 내 옆에 있는 사람을 세우는 사람 — 그 사람이 진짜 강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이 알아주시는 우리의 삶이 되길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2대지 — 형제를 위해 먹지 않겠다 (7–13절)
2대지 — 형제를 위해 먹지 않겠다 (7–13절)
"할 수 있지만, 하지 않겠다"
7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이 지식은 사람마다 가지지 못하여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 더러워지느니라"
1대지에서 봤듯이, 강한 자들의 지식은 맞습니다.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중요한 말을 합니다. 이 지식은 사람마다 가지지 못한다고요.
고린도 교회 안에 있는 어떤 성도들은, 예전에 우상을 섬기다가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우상 제물이라는 말 자체가 아직도 무겁습니다. 오랫동안 그 앞에서 절하고, 두려워하고, 섬겨왔으니까요. 머리로는 이제 우상이 아무것도 아닌 줄 알아도, 그 고기를 먹으려고 하면 마음이 찜찜합니다. 양심이 불편한 거예요.
강한 자들이 아무렇지 않게 그 고기를 먹는 걸 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저 사람도 먹으니까 나도 먹어야 하나 싶어서 먹는데, 마음이 불편합니다. 양심이 더러워지는 겁니다. 7절 마지막에 그렇게 나옵니다.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 더러워진다고요.
9절을 보겠습니다.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거리끼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바울이 강한 자들에게 직접 말합니다. 너희의 자유가 약한 자에게 걸림돌이 될 수 있다고요.
여러분, 이게 핵심입니다. 강한 자들이 잘못한 게 아닙니다. 그들이 틀린 게 아니에요. 그런데 그 자유로운 행동이 옆에 있는 약한 형제에게 상처가 됩니다. 쓰러지게 만듭니다. 바울은 그걸 문제 삼는 겁니다.
10절을 보면 더 구체적으로 나옵니다.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신전에서 음식을 먹는 걸 약한 자가 보면, 그 사람도 담대해져서 먹게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사람은 양심이 불편한 채로 먹는 겁니다. 그러면 12절에서 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형제의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이게 얼마나 강한 말입니까. 내가 틀리지 않았는데, 내가 자유롭게 행동했을 뿐인데 — 그게 그리스도를 향한 죄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13절에서 바울이 결론을 내립니다.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여러분, 이 한 문장이 오늘 설교 전체의 핵심입니다.
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합니다. 평생이에요. 내가 먹을 수 있는 자유가 있는데, 그 자유를 포기하겠다는 겁니다. 왜요? 형제가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이게 보통 결단이 아닙니다. 내가 틀리지 않았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건데, 그걸 영원히 안 하겠다는 거잖아요. 강한 자가 자기 권리를 완전히 내려놓는 겁니다. 형제 하나를 지키기 위해서요.
오늘 도입부에서 부모 이야기를 나눴는데요. 아이 때문에 싱겁게 먹고, 아이 때문에 잠을 못 자고, 아이 때문에 내 페이스를 다 바꾸는 부모. 그 부모가 아이에게 뭐라고 불평합니까? "나는 이거 먹을 수 있는데 너 때문에 못 먹잖아." 그렇게 따지지 않습니다. 그냥 자연스럽게 내려놓습니다. 왜요? 아이가 약하고, 내가 강하기 때문에요. 강한 자가 먼저 맞춰주는 겁니다.
바울이 말하는 강한 자의 책임이 바로 이겁니다. 내가 할 수 있다는 것, 내게 자유가 있다는 것 — 그게 내가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강한 사람일수록, 더 많이 아는 사람일수록, 약한 형제를 위해 자기를 내려놓을 책임이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 오늘 하루를 시작하면서 한 가지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 중에, 내 자유 중에, 형제가 걸려 넘어질 수 있는 것이 있지는 않습니까? 나는 아무렇지 않은데, 옆에 있는 사람은 그 때문에 마음이 무너질 수 있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강한 자의 책임은 그 자리에서 "할 수 있지만, 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그 결단이 있는 그렇게 살아가는 하루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문
하나님 오늘도 변함없는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주님의 말씀 앞에 서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지식은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덕을 세운다는 말씀 앞에 우리의 삶을 돌아봅니다. 우리가 알고 있다는 것, 할 수 있다는 것, 자유롭다는 것 그것이 우리를 높이는데 쓰였는지, 아니면 형제를, 나보다 약한자를 세우는데 사용했는지 돌아보게 하시고, 내 지식이 옆 사람을 내려다본다든지, 내 자유가 형제의 마음을 상하게 한 일이 있다면 용서하여 주옵소서,
오늘 우리가 살아가며 내가 만나는 사람들 앞에서 강한 자의 책임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할 수 있지만 그를 위해 내려놓으며, 자유보다 형제가 더 소중하다는 것을 분명히 알며 이 진리 앞에 오늘 하루 살아가도록 도와주옵소서,
이 새벽 하나님께 지혜와 능력을 구합니다. 세상으로 나아가는 우리의 발걸음을 붙들어 주시고 모든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옵소서, 거룩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