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믿음

2026 새롭게하는교회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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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

시간이 되었습니다. 다같이 묵상기도 드리시므로 찬양예배를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전주가 끝나면
Hebrews 4:16 NKRV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아멘

찬양

찬양팀과 함께 기쁨으로 찬양하시겠습니다.

찬송

다함께 찬송가 542장 하시겠습니다.

기도

이 시간 우리를 대표해서 양윤경집사님이 기도하시겠습니다.

성경봉독

이 시간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신약성경 로마서4:13-25 말씀 입니다.신약.244페이지에 입니다.
다 찾으셨으면 교독 하겠습니다.
Romans 4:13–25 NKRV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상속자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파기되었느니라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특송

이 시간 2교구14구역 나오셔서 하나님께 찬양드리겠습니다.

말씀

【서론】
옛날 어느 마을에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당나귀 한 마리가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처음에 두 사람은 당나귀 등에 나란히 올라탔습니다.
그러자 지나가던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했습니다. "저런 짐승만도 못한 사람들! 조그만 당나귀 등골이 휘어지겠다." 그 말을 듣고 아버지가 얼른 내려 걸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다른 사람들이 혀를 찼습니다. "저 버릇없는 아들 좀 보게. 나이 든 아버지는 걷게 하고 자기가 타고 가다니." 놀란 아들이 내리고 아버지가 탔습니다.
사람들은 또 수군거렸습니다. "어른이 되어서 어린 자식을 걷게 하다니, 참 이기적인 아버지네." 결국 두 사람은 모두 내려 터벅터벅 걸었습니다.
이번에는 사람들이 비웃었습니다. "저 바보들 좀 봐. 멀쩡한 당나귀를 곁에 두고 땀을 뻘뻘 흘리며 걷고 있잖아!"
이야기의 끝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결국 사람들의 기준을 다 맞추려다 지친 부자(父子)는 끙끙대며 당나귀를 짊어지고 갔다고 합니다.
웃음이 나지만, 동시에 가슴을 찌르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자화상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잣대, 세상의 기준, 심지어 스스로 만든 규칙에 완벽하게 맞추려다 보면, 어느새 당나귀를 짊어지고 가는 것처럼 삶이 무겁고 지칩니다.
신앙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생각합니다.
내가 준비되어야 한다고, 내가 충분해야 한다고, 자격이 되어야 한다고. 좀 더 좋아지면 기도하겠다고, 좀 더 말씀을 알면 봉사하겠다고, 좀 더 믿음이 생기면 헌신하겠다고.
그런데 그 '좀 더'는 언제 옵니까? 그 '좀 더'를 기다리며 평생을 보낸 분도 계십니다. 이리저리 방식을 바꾸어 보아도, 스스로 충분하다고 느끼는 날은 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본질적으로, 율법의 기준 앞에서 완전해질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3장 23절에서 선언합니다.
(로마서 3:23)
Romans 3:23 NKRV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모든 사람입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내 안을 들여다보며 묻습니다.
'나는 충분한가? 나는 자격이 있는가?' 그런데 그 질문 앞에서 당당하게 '예'라고 대답할 수 있는 분이 이 자리에 계십니까?
우리는 압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리 자신을 다잡아도, 그 기준에 완전히 도달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을.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습니까? 내 공로가 아무것도 없는 이 자리에서, 흔들리고 의심하고 실패한 이 자리에서, 우리는 과연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습니까?
【대지 1】아브라함의 믿음으로의 여정
(로마서 4:13)
Romans 4:13 NKRV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바울은 13절에서 선언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고.
아브람이 자라난 집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호수아 24장 2절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여호수아 24:2)
Joshua 24:2 NKRV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옛적에 너희의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아브람의 가문은 우상을 섬기던 집안이었습니다. 그 집 선반에는 손으로 깎고 다듬은 신상들이 줄지어 서 있었을 것입니다.
흙으로 빚고, 나무로 깎고, 돌로 다듬은 신들. 아브람은 바로 그 집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하나님이 그를 부르셨습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창 12:1).
이 부르심의 근거가 무엇입니까? 아브람이 율법을 완벽하게 지켜서입니까? 그의 행위가 탁월해서입니까?
아닙니다.
성경 어디에도 하나님이 아브람의 공로를 보시고 부르셨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저 부르셨습니다.
일방적으로, 선제적으로, 아무 조건 없이.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믿음의 의'의 출발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더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아브람이 그 부르심에 어떻게 반응했느냐입니다. 창세기 12장 4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창세기 12:4)
Genesis 12:4 NKRV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고민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따져보았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갈 땅이 어디인지도 몰랐습니다. 히브리서 11장 8절은 이것을 이렇게 증언합니다.
(히브리서 11:8)
Hebrews 11:8 NKRV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습니다. 목적지도 모르고, 그저 부르신 분을 신뢰하여 일어선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본질입니다. 믿음은 모든 것이 확인된 후에 발을 내딛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확인되지 않은 것을 말씀하신 분을 신뢰하여 일어서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갈 곳을 알고 출발한 것이 아니라, 부르신 하나님을 알고 출발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여정이 '믿음의 여정'으로 불리는 이유입니다.
그 여정의 시작은 아브람의 준비가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이었습니다. 그 여정의 동력은 아브람의 확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이었습니다.
17절 하반부와 18절에서 바울은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이렇게 서술합니다.
Romans 4:17–18 NKRV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이 표현을 잠시 붙들어 보십시오.
인간의 모든 가능성이 닫힌 자리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라는 것.
이것이 아브라함 여정의 본질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여정은 아브람 스스로가 시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찾아오심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 앉아 계신 여러분의 믿음은 어디서 시작되었습니까?
내가 결심해서입니까? 내가 충분히 준비되어서입니까? 우리가 처음 하나님을 믿게 되던 그 순간을 기억하십니까?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도 부르시는 음성을 따라 일어섰던 그 자리. 그것이 믿음의 시작이 아니었습니까?
그 기억이 있는 분들은 자유할 수 있습니다. 율법에서의 자유,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 완벽하지 않아도 아바 아버지께서 우리를 돌보신다는 그 자유가 있을 줄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대지 2】율법이 아닌 믿음으로 드러나는 그의 삶
(로마서 4:14)
Romans 4:14 NKRV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상속자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파기되었느니라
바울은 14절에서 단호하게 말합니다. 만약 율법을 지킨 자들이 상속자라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진다고.
이것은 단순한 신학적 명제가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실제 삶이 이것을 생생하게 증명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창세기 15장에서 밤하늘의 별을 보여주시며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에 아브람이 믿었고, 하나님은 이것을 의로 여기셨습니다. 약속은 분명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렀습니다.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도 사래에게는 아직 자녀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사라가 먼저 제안합니다.
(창세기 16:2)
Genesis 16:2 NKRV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아브람은 사래의 말을 들었습니다. 여종 하갈을 취했습니다.
여기서 잠깐 멈춰야 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불신앙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고대 근동의 관습에서 여종을 통한 대리 출산은 합법적이고 일반적인 방법이었습니다.
어쩌면 아브람은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는 현명한 방법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기다림을 포기한 자리에서 나온 결정이었습니다.
이것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내가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것, 내 힘으로 결과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 이것이 예수님 시대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율법적 사고방식의 본질입니다.
하갈을 취한 그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이스마엘이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약속의 성취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갈과 사래 사이에 갈등이 생겼고, 가정에 상처가 쌓였습니다. 나의 힘, 나의 열심만으로 나아가는 일은 진노를 이루게 할 뿐입니다.
율법은 죄를 드러낼 수는 있어도, 약속을 성취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실패한 아브람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창세기 17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꿔 주셨습니다. '많은 민족의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할례를 명하셨습니다. 이 육체적 할례는 단순한 의식이 아닙니다.
자신의 몸에 새겨진 상처를 볼 때마다, 나의 힘이 끊어진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을 기억하게 하는 표입니다. 마음의 할례, 곧 믿음을 육체에 새기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할례의 상처를 몸에 지니고, 아브라함이라는 새 이름을 받았으면서도, 사라의 나이 구십 세가 되자 아브라함은 엎드려 웃었습니다.
(창세기 17:17)
Genesis 17:17 NKRV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
이것이 인간입니다. 아무리 약속을 받고, 아무리 이름이 바뀌고, 아무리 할례를 받아도, 눈앞의 현실 앞에서 흔들리는 것이 우리 인간의 본모습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자리, 인간의 모든 가능성이 완전히 소멸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신실하심으로 일하셨습니다.
(로마서 4:16)
Romans 4:16 NKRV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16절의 말씀처럼, 약속은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라함의 완전한 믿음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흔들리는 인간을 끝까지 붙드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 위에 세워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19세기 영국의 목사 찰스 스펄전은 평생 극심한 우울증과 씨름했습니다.
수천 명이 모이는 메트로폴리탄 태버내클의 강단에 서는 사람이, 집에 돌아오면 며칠씩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날들이 반복되었습니다.
그는 이런 고백을 남겼다고 전해집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설교하지만, 어두운 밤이 오면 하나님이 계신지조차 느껴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압니다. 내 믿음이 하나님을 붙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붙들고 계신다는 것을." 스펄전은 자신의 흔들리는 믿음을 보지 않았습니다. 그 믿음에도 불구하고 신실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이런 마음이 드신 적 있으십니까? '나는 믿음이 너무 약해. 이런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을까.' 기도하다가 딴생각이 나고, 예배드리다가 마음이 흔들리고, 말씀을 읽어도 은혜가 느껴지지 않는 날들.
아브라함도 그랬습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완전한 믿음의 결과가 아니었습니다. 이삭은 인간의 가능성이 완전히 끝난 자리에서 일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의 결과였습니다.
내 방법으로 앞질러가다 실패하고, 흔들리고, 의심하는 우리를 끝까지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 이것이 오늘 우리가 붙들어야 할 약속입니다.
【대지 3】오직 믿음으로
(로마서 4:23)
Romans 4:23 NKRV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바울은 23절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아브라함에 관한 이 모든 기록이 아브라함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그것은 우리를 위한 것이라고.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과거의 역사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이삭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삭은 아브라함의 공로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흔들리고, 의심하고, 인간적 방법으로 앞질러갔다가 실패했던 그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주신 선물이었습니다. 그곳에 아브라함의 공로가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온전히 하나님의 일하심과 하나님의 신실하심만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창세기 21장과 22장을 나란히 놓고 보면, 신기한 장면이 펼쳐집니다. 사라가 이스마엘을 내쫓으라고 요구했을 때,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창세기 21:11)
Genesis 21:11 NKRV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그 일이 매우 근심이 되었더니
히브리어 원문을 직역하면 "그 일이 아브라함의 눈에 매우 나빠 보였다"입니다. '매우(מְאֹד)'라는 강조어까지 붙어 있습니다.
이스마엘은 자신의 방법으로, 자신의 결정으로 낳은 아들이었습니다.
자신의 힘을 상징하는 아들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아브라함 자신의 흔적이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내보내는 일이 그토록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시자 아브라함은 어떻게 했습니까? 창세기 21장 14절입니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근심했지만 일어섰습니다.
이제 창세기 22장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명하셨습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 22:2).
첫째는 이미 밖에 내보냈는데, 이제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후손 이삭을 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떠하셨겠습니까?
그런데 놀라운 것은, 22장 어디에도 아브라함이 근심했다는 표현이 없다는 것입니다.
21장에서는 그 일이 아브라함의 눈에 매우 나빠 보였다고 했는데, 22장에서는 근심의 흔적이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3절입니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21장과 토씨 하나 다르지 않은, 완전히 동일한 히브리어 표현입니다.
두 장면을 나란히 놓아보십시오.
이스마엘 — 근심하였다, 그러나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이삭 — 근심의 흔적조차 없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왜 이런 차이가 생겼습니까?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방법으로, 아브라함의 힘으로 낳은 아들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아브라함의 것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보낼 때 근심이 따랐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닫힌 그 자리에서, 오직 하나님이 주신 아들이었습니다.
내 것이 없는 자리에는 근심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자리에는 오직 순종만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9절은 이 아브라함의 내면을 이렇게 밝힙니다.
(히브리서 11:19)
Hebrews 11:19 NKRV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아브라함은 이삭이 죽어도 하나님이 다시 살리실 것을 믿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이것이 로마서 4장 17절에서 바울이 말한 그 믿음이고,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선물 받은 믿음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모리아 산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 할 때, 하나님은 숫양 한 마리를 준비하셨습니다. 창세기 22장 14절에서 아브라함은 그 산의 이름을 '여호와 이레', 즉 '여호와께서 준비하신다'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그 모리아 산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예표였습니다.
수백 년이 흐른 뒤, 동일한 모리아 산 위에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그 성전 밖 골고다 언덕에서, 하나님은 이번에는 숫양이 아니라 자신의 독생자를 내어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렸을 때 하나님이 막으셨지만,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을 드리실 때는 아무도 막지 않았습니다.
(로마서 8:32)
Romans 8:32 NKRV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모리아 산의 이야기는 골고다에서 완성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예표했던 그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안에서 실체로 드러났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완전히 믿으셨기 때문에, 그 믿음의 의가 오늘 우리에게 전가되었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25절에서 선언하는 복음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로마서 4:25)
Romans 4:25 NKRV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내줌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살아나셨습니다. 이 두 사건이 우리 구원의 전부입니다. 우리가 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를 위해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받은 것처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바울이 23절에서 말한 것처럼, 이것은 아브라함만을 위한 기록이 아닙니다. 바로 오늘 이 자리에 앉아 계신 여러분을 위한 선언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선물 앞에서 우리가 무엇을 내세울 수 있겠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선물 앞에서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입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이미 완전히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흔들리는 믿음 위에서가 아니라, 결코 흔들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 위에서. 율법으로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이것이 복음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에서 내려놓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까? 어쩌면 그것은 내가 내 힘으로 이루어낸 것이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거기에 내 흔적이 있고, 내 공로가 있기 때문에 내려놓기가 그토록 어려운 것입니다.
이스마엘 앞에서 근심했던 아브라함처럼. 그러나 내 것이 없는 자리에서 하나님이 일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처럼 근심하면서도 아침에 일찍이 일어설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입혀진 증거입니다.
오늘 이 예배의 자리에 나오신 여러분이 바로 그 믿음의 자리에 서 있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결론】
아브라함의 여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되었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우상을 섬기던 집에서 부르심 받은 아브람도, 하갈을 취하며 앞질러갔던 아브라함도, 이삭 앞에서 아침에 일찍이 일어섰던 아브라함도, 그 모든 자리에서 일하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내세울 공로가 있습니까? 부끄러울 정도로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완전히 믿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완전히 믿으셨기 때문에, 그 믿음이 오늘 우리에게 전가되었습니다.
(로마서 4:25)
Romans 4:25 NKRV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우리는 율법이 아닌, 오직 믿음으로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그 자리에서, 아침에 일찍이 일어서는 그 한 걸음을 하나님은 기다리십니다. 그 한 걸음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조차 오늘도 하나님이 먼저 우리에게 선물로 주심을 믿고,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가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의 아버지 하나님,
내가 충분히 준비되어야만, 자격이 있어야만 주님 앞에 설 수 있다고 착각하며 내 힘과 열심으로 무언가를 증명하려 했던 어리석음을 주님앞에서 회개합니다.
아무 공로 없는 아브람을 먼저 찾아와 부르셨듯이, 자격 없는 우리를 선제적인 은혜로 안아주시니 감사합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해 주저앉고 싶을 때에도,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온전히 신뢰하게 하옵소서.
주님, 여전히 내 방법과 힘으로 움켜쥐고 있는나의 능력이 있다면 이 시간 십자가 앞에 내려놓기 원합니다.
나의 얄팍한 계획이 실패한 자리, 인간의 가능성이 완전히 닫힌 그 자리에서부터 새롭게 일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비록 현실 앞에서 마음이 흔들릴지라도, 아브라함처럼 근심을 떨치고 아침 일찍이 일어서는 순종의 걸음을 걷게 하옵소서.
모리아 산에서 멈추지 않고 골고다 언덕까지 나아가, 아낌없이 독생자를 내어주신 그 크신 사랑을 찬양합니다.
우리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완전한 의를 선물로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제는 스스로를 옭아매는 율법의 짐을 벗고, 오직 주님이 주신 믿음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게 하옵소서.
결코 흔들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약속 위에 굳게 서서, 매일의 삶을 은혜로 채워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영원한 의가 되시며 생명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찬송

다함께 찬송가 540장 하시겠습니다.

광고

김세곤목사님께서 교회생활 안내해 주시겠습니다.

찬송

다함께 찬송가 310장 하시겠습니다.

축도

김세곤 목사님께서 나오셔서 축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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