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의 공동생활_형제 교정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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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공해주신 소스 자료를 바탕으로, **'성도의 공동생활과 형제 교정'**이라는 주제를 1시간 분량의 강연이나 세미나 형식으로 정리해 드립니다. 이 정리는 성경적 형제 교정의 정신, 방법, 그리고 이를 가능하게 하는 사랑의 원리를 담고 있습니다.
[강연안] 그리스도의 몸을 온전케 하는 은혜의 도구: 형제 교정
[강연안] 그리스도의 몸을 온전케 하는 은혜의 도구: 형제 교정
본문 말씀: 마태복음 18:15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1. 서론: 왜 우리에게 '형제 교정'이 필요한가? (10분)
1. 서론: 왜 우리에게 '형제 교정'이 필요한가? (10분)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의 몸이며 우리가 받은 구원은 완전하지만, 우리 안에는 여전히 부패한 본성이 남아 있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오류에 빠질 수도 있고 죄를 지을 수도 있습니다.교회의 본질과 인간의 부패성:
하나님께서는 강단의 목회자를 통한 목양으로 성도를 온전케 하시지만, 동시에 성도들 간에 사랑과 진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상호 교정'을 통해 교회를 온전케 하십니다.온전케 하시는 두 가지 통로:
형제가 죄를 범했을 때 사랑과 진리 안에서 그를 바로잡아 주는 상호작용을 의미합니다.형제 교정의 정의:
2. 형제 교정의 첫 번째 정신: 형제를 '깨우치는 것' (15분)
2. 형제 교정의 첫 번째 정신: 형제를 '깨우치는 것' (15분)
인간의 잘못된 행동은 우연이 아니라 깊이 배어있는 '본성'에서 나옵니다. 진정한 변화는 겉모양의 변화가 아니라 그 사람 안에 자리 잡은 '죄된 본성'이 '신령한 본성'으로 바뀌는 것입니다.행동 너머의 본성을 변화시키는 일:
인간은 스스로 타인의 본성을 바꿀 수 없습니다. 오직 내 안에 들어온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만 본성의 변화가 일어납니다.성령과 진리의 역사:
형제 교정은 공개적인 석상이 아니라 '은밀히' 만나 사랑으로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이는 내가 형제를 직접 고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가르쳐 줌으로써 그가 하나님께 깨우침을 받도록 돕는 계기를 제공하는 것입니다.깨우침의 방법 (은밀함과 사랑):
오늘날 교회는 성경적 교정 대신 가십과 비난으로 형제의 평판을 깎아내리며 교회를 더럽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정하는 자는 반드시 자신도 진리를 사랑하고 온전해지기를 사모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오늘날의 비극:
3. 형제 교정의 두 번째 정신: 형제를 '고치는 것' (15분)
3. 형제 교정의 두 번째 정신: 형제를 '고치는 것' (15분)
형제 교정의 목적은 정죄나 징벌이 아니라, 형제를 영생 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하여 풍성한 삶을 살게 하는 데 있습니다.인격적인 회복의 지향:
물리적인 힘이나 비인격적인 압박은 겉모양만 바꿀 뿐 본성을 고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간음한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인격적으로 스스로 깨닫고 하나님 앞에 서게 해야 합니다.비인격적 압제 거부:
까리따스(Caritas) 사랑과 '죄의 객관화':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의 '하나님 형상'이라는 영원한 아름다움을 보시기에 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영원히 사랑하십니다.죄와 죄인을 분리함:
사랑하는 남자가 죽은 토끼(죄)를 들고 있다면 그 토끼는 혐오스럽지만 남자에 대한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토끼를 버리면 해결되는 것입니다.죽은 토끼의 예화:
진실한 아가페(까리따스) 사랑이 있으면 형제와 죄를 분리해서 볼 수 있습니다. 죄는 미워하되, 그 죄로 인해 고통받는 영혼은 긍휼히 여기며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사랑의 눈:
4. 실천적 지침: 교정을 주고받는 자세 (15분)
4. 실천적 지침: 교정을 주고받는 자세 (15분)
권고를 하는 자의 자세:
자신도 같은 죄인임을 기억하며 겸손해야 합니다.
형제의 오류를 자신의 아픔처럼 느끼며 그리스도 때문에 눈물 흘리는 마음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권고를 받는 자의 자세 (섭리 신앙):
형제가 잘못을 지적할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잘 듣고 자신을 돌아보는 것입니다.경청과 성찰: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 하는 무례한 비난 속에도 하나님이 나를 깨닫게 하시려는 '진실의 유리 구슬'이 있을 수 있습니다. 무례함(오물)은 씻어내고 그 안의 진실(구슬)을 찾아 회계의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비난 속의 진실 찾기:
사람의 비난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보좌 앞으로 나아가 하나님께 직접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옳다 하시면 사람의 비난은 상관없으며, 잘못이 있다면 철저히 회개하면 됩니다.하나님 앞에 서기:
5. 결론: 십자가의 길과 교회의 온전함 (5분)
5. 결론: 십자가의 길과 교회의 온전함 (5분)
원수를 사랑으로 갚고 비난을 기도로 갚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그것이 바로 예수의 죽음을 짊어지고 예수의 형상을 닮아가는 성화의 길입니다.십자가의 길:
형제의 죄를 보고 정죄하기보다 그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고 인내할 때, 교회는 비로소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몸으로 세워집니다.공동체의 회복:
우리는 사랑을 받은 자들로서 그 사랑을 가지고 형제에게 나아가야 합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형제를 온전케 하는 일에 자신을 드리는 성도가 됩시다.마지막 권면:
기도 제목:
우리 영혼 안의 무지와 어둠이 물러가고 진리의 빛 가운데 살게 하소서.
형제의 죄를 정죄하기보다 사랑으로 함께 아파하며 교회를 온전케 하는 자가 되게 하소서.
제공해주신 소스 자료를 바탕으로 소그룹 성경 공부를 위해 바로 사용하실 수 있는 성경 공부 활동지를 만들었습니다. 이 활동지는 형제 교정의 성경적 의미와 실천적 태도를 깊이 있게 묵상하도록 돕습니다.
[소그룹 활동지] 그리스도의 몸을 온전케 하는 사랑의 권면: 형제 교정
[소그룹 활동지] 그리스도의 몸을 온전케 하는 사랑의 권면: 형제 교정
본문 말씀: 마태복음 18:15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1. 마음 열기 (Ice Break)
1. 마음 열기 (Ice Break)
최근 누군가로부터 나의 잘못에 대해 조언이나 지적을 들었을 때, 혹은 내가 누군가에게 조언을 해야 했던 상황에서 느꼈던 감정은 어떠했나요? (예: 당혹감, 고마움, 두려움 등)
2. 말씀 깊이 읽기 (Observation & Interpretation)
2. 말씀 깊이 읽기 (Observation & Interpretation)
Q1. 성경이 말하는 '형제 교정'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인가요?
Q1. 성경이 말하는 '형제 교정'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인가요?
죄를 지은 형제를 정죄하거나 징벌하는 것이 목적일까요,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을까요? (마 18:15 후반부 참조)힌트:
Q2. 소스에 따르면, 사람의 행동이 변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먼저 바뀌어야 하나요? 그리고 그것을 바꾸실 수 있는 분은 누구입니까?
Q2. 소스에 따르면, 사람의 행동이 변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먼저 바뀌어야 하나요? 그리고 그것을 바꾸실 수 있는 분은 누구입니까?
왜 인간의 비인격적인 압제나 완력으로는 사람을 진정으로 고칠 수 없는지 이야기해 봅시다.나눔:
Q3. '까리따스(Caritas)의 사랑'은 죄와 형제를 어떻게 바라보게 하나요? '죽은 토끼' 예화를 통해 설명해 보세요.
Q3. '까리따스(Caritas)의 사랑'은 죄와 형제를 어떻게 바라보게 하나요? '죽은 토끼' 예화를 통해 설명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영원히 사랑하실 수 있는 이유는 우리 안에 무엇이 남아 있기 때문인가요?생각해보기:
3. 삶으로 응답하기 (Application)
3. 삶으로 응답하기 (Application)
Q4. 누군가의 잘못을 보았을 때, 성경적인 '형제 교정' 대신 우리가 흔히 저지르는 잘못된 태도는 무엇인가요?
Q4. 누군가의 잘못을 보았을 때, 성경적인 '형제 교정' 대신 우리가 흔히 저지르는 잘못된 태도는 무엇인가요?
나는 형제의 아픔을 나의 것처럼 느끼며 은밀히 권고합니까, 아니면 가십거리로 삼아 평판을 깎아내리며 교회를 어지럽힙니까?자기 성찰:
Q5. 만약 누군가 나를 무례하게 비난하거나 공격할 때, '섭리 신앙'을 가진 성도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나요?
Q5. 만약 누군가 나를 무례하게 비난하거나 공격할 때, '섭리 신앙'을 가진 성도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나요?
'오물(똥물) 속의 유리 구슬' 예화를 바탕으로, 비난 속에서도 하나님이 주시는 진실을 찾는 법을 나누어 봅시다.실천 비결:
4. 실천과 기도 (Action & Prayer)
4. 실천과 기도 (Action & Prayer)
현재 내가 미워하거나 정죄하고 있는 지체가 있다면, 그 사람과 그 사람이 지은 '죄'를 분리해서 보기로 결단합시다. 이번 주에 그를 위해 먼저 골방에서 눈물로 기도하는 시간을 가집시다.실천 과제:
함께 기도하기:
내 안에 형제를 향한 뜨거운 을 부어 주셔서, 정죄 대신 긍휼의 마음을 갖게 하소서.까리따스의 사랑
형제의 권고를 들을 때 겸손히 자신을 성찰하며, 오직 반응하는 성숙함을 주소서.하나님 앞에서(Coram Deo)
우리 소그룹과 교회가 서로를 온전케 하는 상호 교정을 통해 으로 세워지게 하소서.그리스도의 온전한 몸
[인도자 참고 사항]
형제 교정은 '나나 잘하자'는 식의 사랑 결핍이나, 무조건적인 정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을 사랑하기 때문에 짊어지는 **'십자가의 길'**임을 강조해 주세요.핵심 강조:
비난 속의 진실을 찾는 훈련은 사람 앞이 아닌 하나님 보좌 앞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안내해 주세요.주의 사항:
08 성도의 공동생활 성도의 공동생활과 형제교정 2 - YouTube
https://www.youtube.com/watch?v=QWMQh0uTTHs
Transcript:
(00:01) [음악] 하나님의 말씀은 마태복음 18장 15절 신약성경 30쪽입니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내 형제를 얻은 것이요.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내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내가 내 형제를 얻은 것이요.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사랑과 은혜가 많으신 하나님. 오늘도 예배는 시작되었고 저희는 주님 앞에 모였나이다. 이제 저희들이 주님의 말씀을
(01:07) 기다립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도 말씀을 우리에게 들려 주시고이 말씀을들을 때에 우리의 지성이 깨어나게 하시고 올해 기다렸던 신랑의 음성을들은 신부처럼 우리의 마음이 주님의 음성에 뛰게 하옵소서. 아멘. 우리의 지성을 명민하게 하시고 우리의 마음을 순수하게 하시며 우리의 정신을 쇠락하게 하셔서이 하나님의 말씀을들을 때에 우리들의 온 몸과 영혼이 진리를 알고 깨닫기에 적합하도록 저희를 도와주시옵소서. 어느 말씀을 듣는 가운데 세상의 염려와 근심과 애착으로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게 하시고 실증과 지루함으로 주님의 말씀의 유익을 얻지 못하고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없게 하시며 졸음과 육체의 피곤함으로
(02:13)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주님을 만나지 못하는 이들이 없도록 성령님께서 굽어 살펴 주옵소서. 아멘.이 모든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벌써 여러 주가 지났습니다만는 지난번에 형제의 교정 첫 번째 시간을 하나님 말씀을 전하면서 여러분들에게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의 몸이고 우리가 받은 구원은 완전하지만 여전히 부패한 본성이 남아 있는 인간들이 모인 곳이기 때문에 우리는 오류에 빠질 수도 있고 또 죄를 지을 수도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이제이 교회를 온전케 하는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03:16) 강단의 목회자를 통해서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 주시고 또 여러분들을 목양함으로 온전케 하지만 또 성도들은 주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마음으로 성도들을 스스로 온전케 하는 상호작용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사랑과 진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형제 교정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면 형제 교정의 정신은 무엇일까요?이 이 형제 교정의 정신은 우리에게 특별히 두 가지로 설명될 수 있는데 첫째는 형제를 깨우치는 것입니다. 형제를 깨우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많은 행동들 이것들은 우리의 본성으로부터 비롯됩니다. 허리가 많이 아파서 치료하러 갔는데
(04:22) 엎드리라 그래서 오통을 벗고 이제 엎드렸더니 치료하는 분이 내 등을 이렇게 보면서 하는 말이 왼쪽으로 칼잠을 주무시는군요. 나 깜짝 놀랬어요. 내가 왼쪽으로 칼잠 자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그래서 왼쪽으로 칼잠을 하도 잡기 때문에이 어깨가 틀어졌다는 거죠. 그것이 계속해서 허리와 등이 아픈 한 원인이 된다는 거죠. 언제부터 이런 버릇이 생겨났는지 전 모르겠는데 지금도 이렇게 대자로 누워서 자는 것보다는 이렇게 오그리고 한쪽에 이렇게 칼잠을 자는 것이 참 편안해 편안해집니다. 왜 그러는지 잘 모르겠는데 아마도 이게 우리의 가정사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이 됩니다. 옛날에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05:28) 아버님이 사업을 크게 하시고 집안이 조금 여유가 있었지만은 사업에 망하고 이런 후에 아주 콧구멍만은 조금만 방해서 8식구까지 잡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에는 온 가족의 의무 사항이 칼잠이에요. 왜냐하면 그 퍼질러서 자서는 도저히 그 여덟 식구가 그 작은 방에서 잘 수가 없어요. 그래서 잠을 잘 때에는 똑바로 누워서 자는 것이 아니라 그 아랫목을 향해서 발을 뻗고 모두 부채꼴로 잤습니다. 어, 칼잠을 각기 자게 되는데 이제 자다가 소변이 마르서 밖에 나와서 소변을 보고 들어가면 옆에 누워 자던 식구가 칼잠에서 똑바로 잠을 자기 시작하면 내 자리가 없어지는 거죠.
(06:26) 그 이런 생활이 얼마 동안 계속되는 동안에 생겨난 습관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고 전 똑바로 누워서 자면은 허리가 너무 아픕니다. 그래서 칼잠을 자 침대 끝에서 오그리고 칼잠을 왼쪽으로 자야지만 편한데 그런 잠의 잠버릇이 오랫동안 계속되는 동안에이 몸 전체가 틀어지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죠. 우리의 어떤 행동은 우연히 나오는 것은 없습니다. 대부분이 모두 그 본성에 깊이 베어서 그래서 흘러나오게 마련이라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형제가 진정으로 변화되어서 그리스도의 몸에 아름다운 지체가 되기 위해서는 그의 행동이 변하는 거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고 그러한 잘못된 행동이 나오게 되었던 그의 본성이 바뀌어야 되는 것이죠.
(07:28) 그런데 그 본성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 안에 들어와 있는 자연이에요. 이게 본성에 대한 철학적 정의에요. 인간 안에 들어와 있는 또 다른 자연이에요. 자연이라고 하는 말은 무슨 뜻이냐면 원래 스스로 그렇게 있는 것이다. 이거죠. 사실 기독교적인 시각에서 보면이 자연이라는 말이 말도 안 되는 거죠. 원래 그렇게 있는게 어디어요? 하나님이 다 만드신 거죠. 그죠? 음. 그런데 어쨌든 자연이 그런 뜻이에요. 그러니까 본성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 안에 들어와 있는 또 다른 자연이에요. 자연은 원래 그렇게 스스로 있기를 좋아해요. 그런 성격이 자연이에요. 그리고 일관성이 있죠. 이런게 본성이에요.
(08:16) 그러니까이 본성이 바뀌기 전에는 그 사람의 행동이나 이런 것들이 절대로 바뀌지 않는다라고 하는 것이죠. 그러면 우리 인간이 과연 우리 잘못된 형제의 본성을 이렇게 바꿔 놓을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는가? 없어요. 목회자도 그걸 못 하는데 어떻게 여러분이 감히 형제에게 그거를 할 수 있겠어요? 되지도 않잖아요. 여러분 자녀들 여러분들이 못 고치는 거 보면은 얼마나 무능한지 알잖아요. 이게 안 되는 거죠. 이렇게 쉽게 되는게 아니에요. 그러면이 자연적인 본성은 어떻게 바뀌느냐 이거죠? 자연적인 본성이 또 다른 종류의 자연적인 본성으로 바뀔 수 있죠. 불신자들의 경우에 이런 경우에 이런 경우에는 자연적인 본성이 또 다른 본성으로 바뀌어요.
(09:10) 근데 이런 경우에도 역시 뭔가 지식의 빛이 들어오게 돼요. 예를 들자면 불신자인데 늘 낭비하면서 살았어요. 그러다 엄청나게 고생을 했어요. 집안이 망해서 거렁 거뱅이가 되다시피 했는데 믿고 누군가 찾아갔더니 심한 모욕을 주어서 일을 악물고 결심하게 됐어요. 야, 돈 없으면 다 아무것도 아니구나. 그리고 그다음에는 아주 지독한 짠도리가 되는 이런 본성적인 변화 같은 거 있을 수 있잖아요. 언제나 이런 경우에 지식에 빛이 들어오게 되는 거예요. 그니까이 영적인 원리하고 자연적인 원리하고 유사한 점이 상당히 많아. 그런 본성의 빛도 결국은 성령의 빛이기 때문에 그런 거죠.
(09:59) 그런데 이제 신자들의 경우에는 이러한 그 본성의 변화가 단순한 본성의 변화가 아니라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던 본성이 변화되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죄를 사랑하던 본성이 변화되어서 죄를 미워하고이 이렇게 거짓을 좋아하던 본성이 변하여서 진리를 사랑하고 하는 이러한 변화는 그 하나님 하나님의 성의 역사, 진리를 사용하시는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은 이렇게 고쳐지지가 않는 것이에요. 그런데이 성령께서 우리의 자연적인 본이 성령께서 우리의 자연처럼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죄된 본성을 신령한 본성으로 변화시킬 때에 그때에 형제가 전에는 죄를 지으면서 살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이 본성이 변화되면은 죄보다는 하나님의 신령한 말씀을 사랑하고 자기보다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11:06) 하는 이런 삶을 살게 되는데 이것을 가르쳐서 본성의 신령한 변화라고 부르는 거예요.이 본성의 신령한 변화는 성령님이 저자예요. 성령님만이 인간의이 타락한 본성을 바꾸어서 신령한 본성으로 고칠 수가 있는 것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신령한 본성으로 사람을 고치실 때에 하나님께서 홀로 행하지 아니하시고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인간의 본성을 고치시는 거예요. 근데 인간의 본성을 진리의 말씀으로 고치신다고 하는 것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진리의 말씀으로 그를 고치시는 것이 아니에요. 무슨 뜻이냐면 여러분들이 아무리 성경을 배고 잠을 많이 잔다고 하더라도 여러분 머릿속에 성경이 들어가지 않고 성경으로 도배를 한 방바닥에서 여러분들이 이불을 덮고 잔다고 하더라도 여러분들이 절대로 거룩해 주지 않아요. 그건 여러분
(12:10) 밖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에요. 우리의 본성을 신령하게 변화시키는 것은 내 밖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내 안에 들어온 하나님의 말씀이에요. 내 안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내가 그 말씀을 듣고 깨닫는 일이 있어야 하고 깨닫는 그 일은 누군가가 그를 깨우쳐 줄 때에 깨닫게 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된다라고 하는 것이에요. 그러면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형제 교정의 정신이 형제를 깨우치는 것이라고 할 때에 그것은 결국 내가 형제의 죄를 보면서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에게 다가가서 이것은 잘못되었으니 고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라고 사랑으로 그것도 모든 사람이 보는 공개적인 석상에서가 아니라 은밀히 그를 만나서 이렇게 천천히 가르쳐 주는 그것 것은 그를 직접적으로 내가 고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렇게 참된 것을 그에게 가르쳐 주어서 그로
(13:16) 하여금 진리의 말씀이 생각나게 해서 하나님께 깨우침을 받게 하는 그것이 형제 교정의 목적이라고 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오늘날 이런 형제의 교정이 안 일어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겠는지 잘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에 이렇게 많은 성도들이 올바로 형제를 교정하기만 한다면 형제가 잘 모르고 범죄했을 때 은밀히 찾아가서 그 형제에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것은 잘못되는데 내 마음이 너무 아프니 네가이 죄에 벗어나기 위해서 우리가 함께 기도하자.이는이 이 이번에는이 사람이 저 사람을 다음에는 저 사람이이 사람을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려는 작용이 교회 안에서 일어난다고 생각을 해 보라 이거죠.
(14:10) 그러면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얼마나 빨리 하나가 되어갈지 그래서 점점 더 한 사람 한 사람이 온전해져서 그래서 교회의 몸이 온전하게 될지 한번 생각해 보라 이거죠. 근데 오늘날은 사실 이런 성경적 형제 교정과는 거리가 멀어요. 누가 뭘 잘못했다 그러면 아파하며 그를 위해 기도하다가 그 사람을 만나기보다는 기도하기는 그냥 옆에 있는 지체 찾아가서 이것을 하나의 말하자면은 가십거리로 삼는 거예요. 아무게 집사 있지. 그 인간도 아니구만. 그리고 씹기 시작하는 거죠. 어 그랬대. 그러면서 이제 들떠 가지고 그 거기다 말에 말을 보태. 확인되지도 않은 잘못된 사실들이 말의 말을 부풀리면서 늘어나요.
(15:01) 화재거리가 돼서 그것들이 막 돌아다니는 거예요. 그러면서 교회를 더럽히는 거예요. 마지막 날에 모두 하나님이 심판하셔 뿐만이 아니죠. 그러한 것들이 자기 자신에게 대한 것일 경우에 이해 관계에 관련될 경우에는 이미 다른 사람에게 그 형제의 이야기를 할 때에는 그 형제에 대한 아주 깊은 미워하는 감정을 가지고 그의 평판을 깎아내리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감히 그를 찾아가서 네가 이것은 잘못됐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사랑하는 마음이나 혹은 용기가 없어요. 그리고는 돌아다니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다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니까 어떤 형제가 잘못에 빠지게 되면 자기가 잘못됐다는 사실을 제일 나중에 소문을 통해서 알게 되는 거죠.
(15:52) 이것이 오늘날의 형편 아니에요.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교회의 분열과 성도들과의 다툼 그리고 사랑을 받아야 할 교회에서 정죄를 당하고 용서를 받아야 할 교회에서 오히려 미움을 당하면서 그렇게 자기 회복의 길로부터 멀어지는이 교회의 비참한 형편들은 바로 이런 참된 성경적 형제 교전을 통해서 필요한 지체들이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에요. 그러기 때문에 형제를 교정해 줄 수 있기 위해서는 교정해 주는 사람 자신이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해요. 자기는 개차반으로 살다가 어느 한 순간에 딱 보니까 어느 형제가 뭘 잘못했어. 그래서 그 얘기 다가가 그래서 너 그러지 마라고 얘기해.
(16:40) 이때 이미 벌써 자신 속에 우월감과 자기 의가 꽉 찬 거예요. 그래요. 그래 지금은 그에게 그에게 그런 잘못을 지적하면서 이야기해 주는데이 사람에게는 자기 자신을 깊이 성찰하고 그리고 그 형제가 진리를 통해서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의 온전한 몸이 되어가기를 원하는 사모하는 마음이 없어요. 자신도 무엇인가 온전해지려고 하는 그런 마음이 없어요. 아주 쉽게 얘기하면 형제의 죄를 보고 열을 받은 거예요. 그런 사람에게 우린 말할 수 있어요. 너나 잘하세요. 너나 잘하세요. 너나 잘하세요. 진의 진리에 대한 사랑이 없고 온전한 삶을 살고자 하는 사모함이 없는데 그 형제의 잘못을 보고 자기가 무슨 자격으로 가서 똑바로 하라고 이야기할 수 있느냐 이거 교만이고 허위고 위선이에요.
(17:41) 위선이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누차 우리에게 권고하셨어요? 판단하지 말아라. 판단하지 말아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의 마음속에 사랑이 들 수가 없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목표 자체는 나도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 형제에게 그것을 깨우쳐 주는 거예요. 깊이 깨우쳐 주는 거. 그래서 그 형제로 하여금 깨우침을 받도록 만들어 주는 거예. 그래서 결국은 그 형제를 내 앞에 세우는 것이 아니라 진리이신 하나님 앞에 세워서 나의 깨우침은 계기가 되었을 뿐이고 그리고 그를 진리이신 하나님 앞에 세워서 그래서 결국은 참 진리이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해 주는 것.
(18:40) 그래서 그의 본성이 진리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은혜를 통해서 변화되도록 만들어 주는 것. 그래서 교회가 온전하게 되는 것 그것이 형제 교정의 정신이어야 한다라고 하는 것이죠. 신이어야 한다라고 하는 거죠. 신이어야 한다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까 그다음에 형제들이 어떤 태도를 보이냐면 나서지 말자. 잘 들으세요. 오늘이 말씀을 특별히 말씀의 은혜 깨나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오늘 큰 찔림을 받으면서 들으라이 얘기. 예. 나서지 말자. 뭔가 그래도 잘 해 보려고 교회에서 그러면 늘 상처를 받더라. 요번에는 너나 잘해서 잘하세요가 아니라 나나 잘할게요. 그러는 거.
(19:33) 그 이것은 뭐냐면 현저한 사랑의 결핍이에요. 현저한 사랑의 결핍이에요. 그렇게 해서 형제들이 오류에 빠지고 잘못되어 가고 있는데 아무것도 안 하고 자기의 신앙만 보존한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성도가 되었는데도 일체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 말을들을 수 있는 직분이나 혹은 다른 사람들에게 비난을들을 염려가 있는 직분 이런 것들은 전혀 맡으려고 하지 않고 그리고 영광과 박수를 받는 그런 것이나 맡으려고 해요. 심지어는 이것도 싫고 저것도 싫고 그냥 교회에 와서 나 필요한 거 얻어 가지고 나가겠다 그러는데 그는 정신적으로 이미 교회의 이원이 아니에요. 그런 사람이 건강한 신앙을 가지고 있을는 전혀 없어요.
(20:31) 정직하게 그대들의 가슴에 손을 얹고 물어보라 이거죠. 교회를 부패 식당처럼 생각하고 와서 자기에게 필요한 것들을 얻어먹고 돌아가는 그 사람의 신앙이 정말 건강할 수 있겠느냐? 그 속에 정말 까리따스의 사랑이 있느냐 얘기예요. 까리따스의 사랑이 있다면 그것은 자기의 느낌이지 까리따스의 사랑이 있으면 반드시 보이는 형제들을 향한 사랑이 그 안에 있는 거예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공동체의 지평 속에서만 확인되는 겁니다. 보이는 형제들을 향한 사랑이 없는데 그 사람 마음속에 있다고 자부하는 까리따스의 사랑이 실제 있을 수가 있느냐 얘기예요. 그러면 형제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 형제가 죄를 범했는데 오류에 빠졌는데 지식의 빛이 없어서 어둠 가운데 있는데 예 근데 그 형제를 보고 그래서 그 형제의 영혼히 고통을 받고 있는데 내가 그 형제를 뭔가 도와줬다가 싫은 소리나 들으면 난 그거 싫다.
(21:30) 난 나서지 않겠다. 예. 그리고 자기를 보존하는데 이게 자기 사랑이지 공동체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 나는 여러분들이 정말이 교회를 아는 사람인지 묻고 싶어요. 정말 묻고 싶어요.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향한 지순한 사랑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도 사랑은 느낌에 달린 것이 아니라 실제 문제예요. 실제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라 얘기들. 응. 월드컵 축구할 때 애국자 아닌 사람이 있으면 한번 손 들어 보라 그래요. 대한민국 할 때 그때 그때만 애국자지. 감정적 애국자예요. 아 진짜 나라를 사랑하고 애국을 하는 사람은 탈세도 하지 말고 어 그저 축구 경기할 때만 가서 대한민국하고 지면은 뭐 소주병이고 콜라병이고 집어던지고 오는 그런 사람이 그게 무슨 놈 애국자냐 이거. 나 그런
(22:32) 사람 대한민국 가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그 잘 생각을 해야 된다이 내가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내가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을 가지고 있고 그 사랑이 참된 것이라면 반드시 교회를 향한 사랑과 지체를 향한 말할 수 없는 사랑이 있는 거예요. 그게 없으면 적에 없는 거지. 적에 있다고 느낌이 오는데 이게 없기예요. 그거는 정확한 성경의 증언이에요. 심지어는 많은 사람들이 모인 공개 석상에서 그 집단적으로 교회를 비난하고 어느 특정한 형제를 지목해서 모욕을 주고 하는데 쓰레기에요. 성도가 아니라 얘기.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참고 인내해 준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러신다고 생각해서 안 돼요.
(23:35) 마지막 날에 그대들의 그 지각 없는 행동과 오만하기 짝이 없는 그 하나님 앞에 무신론적인 행동들이 모두 기록이 될 것이에요. 교회는 여러분들을 가둘 유치장도 없고 창과 칼도 없어요. 교회에 있는 무기는 사랑밖에 없어요. 근데 여러분들이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아서 그 사랑에 굴복하지 않아. 그래서 여러분들이 교회를 아프게 해. 그럼 목회자를 비롯해 모든 교회는 그대들이 찌르면 찔림을 당할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잊지 말고 기억하세요. 반드시 하나님이 그대들의 영혼에 갚으셔요. 이미 그대들의 영혼에 고통이 시작되고 있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대들이 찔르는 그 찔림은 찔름은 다른 사람들을 향한 찌름이 아니라 그대들의 몸을 찌른 것이에요.
(24:23) 나는 단 한 번이라도 성령님께서 그대들의 마음에 오셔서 여러분들이 그런 행동을 통해서 주님이 얼마나 아파하시는지를 깊이 느낄 수 있다면 여러분들은 자기를 철저하게 미워하게 될 거예요. 회개할 거예요. 거짓과 위선, 교만과 가식,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기에는 매우 인색하거나 형식적인 말로 스스로 죄인이라고 말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향해하는 하나님도 행하시지 않는 엄격함으로 정죄하고 미워하려고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몸에 끊임없이 상체기를내는 거예요. 귀를 기울이고 들어보세요.
(25:30) 내가 어찌하여 나를 찌르느냐 하는 주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나요? 너무 이기적이에요. 그리고 무엇인가 무거운 십자가는지지 않으려고 하는 거죠. 이러한 모든 영적인 악화된 상황들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이 아름다운 교회를 온전케 하는 은혜의 도구인 형제 교정의 유산을 사라지게 만들었어요. 지금이라도 우리는 이것들을 회복하여야 합니다. 겸손하고 일체의 사랑으로 하나가 되려는 마음으로 형제의 오류와 죄악을 자신의 것처럼 생각하며 정죄하고 미워하기 전에 그것 때문에 아파하시는 그리스도 때문에 눈물 흘리는 마음으로 교회를 온전해하고 하고 고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라고 하는 것이죠.
(26:31) 그것을 위해서 깨우치는 것이에요. 두 번째 정신은 고치는 것이에요.이 고치는 것은 자신이 고치는 것이 아니라 깨우침을 통해서 그에게 감화를 주시는 성령님이 그를 고치시는 것이죠. 근데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자신이 겸손하게 성령님의 도구가 되려고 하지 아니하고 폭과 비인격적인 압재로 그 형제를 고치고자 하는 것이죠. 그것들은 매우 잘못된 것들이고 그렇게 해서 그 형제가 교정되지 않을 것이며 교정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형식상의 교정일 뿐이지 그 형제의 본성을 그러한 비인격적인 방법이 고쳐 놓지 못해요. 그래서 필요한 것이 뭐냐면은 인격적인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들려온 여인에게서
(27:34) 이러한 태도를 보여 주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이제이 여인을 두고 예수님께 여쭤 보았습니다. 모세의 율법에는이 여자를 돌로 치라고 되어 있는데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만약에 아니다. 용서해 주어라 하면은 율법을 어기는 것이 되고 돌로 쳐 죽여 버려라고 하면 평소에 예수님이 가르치시던 사랑과 용서의 계명에 위반되는 것이죠. 어떠한 경우에도 예수님은 비난을 피할 수 없게 되는 거죠. 그런데 예수님께서는이 둘 사이에 기가 막힌 조화점을 찾아내셨어요. 돌로 철랄 율법을 지키는 명령이었죠. 그런데 너희 중에 죄가 없는 사람이 돌로 쳐라. 사람들은 양심에 깊이 찔림을 받으면서 돌멩이를 내려놓고 모두 돌아갔어요.
(28:35) 그 부분을 읽을 때마다 여러분들은 이렇게 생각하죠. 야,이 사람들이 얼마나 완악한 인간들인가? 그 여인이 비록 죄를 범했다고 할지라도 용서하고 긍휼히 여겨 주어야지 어떻게 도를 들고 나타날까? 근데 나는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보다는 그 완악한 유대인들이 훨씬 순한 사람들이라고 믿어요. 그들은 도를 버리고 양심의 깊은 찔림을 받으며 도를 버리고 예수님 곁을 떠났어요. 요즘은 오히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 그러면 던지는 사람들이 나타난다는 거죠. 다 가고 예수님 혼자 남으셨어요. 예수님은 그 여자를 돌로 치실 수가 있었죠. 왜? 예수님은 죄 없으신 분이시니까.
(29:22)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여자에게 말씀하셨어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무슨 뜻이죠? 그러면 우리는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죄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 된다는 것이에요? 예.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이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교회 안에서 함께 젖붙여진 형제들 속에 일어나는 수많은 죄에 대해선 어떻게 해야 된다는 것이죠?이 이 모든 교회 안에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젖붙여진 신자들은 그 신분 자체가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이에요. 그들은 예수님께로부터 어떤 선언을 받은 사람들이냐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은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선언을 받은 사람이에요.
(30:25) 형제 교정의 목적은 형제를 참으로 영생의 영생 안에서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고 참으로 돌이켜 풍성한 삶을 살게 하는 것이 형제 교정의 목표이지 그를 정죄해서 모든 성도들에게 본떼를 보여 주는 것 그것이 형제 교정의 유일한 목적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죠. 혹시 그를 그의 죄가 이러한 것이라고 선언을 하고 그를 징계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결코 육체적인 징계이고 그를 모욕하는 징계가 아니라 그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드러내는 정당한 징계예요. 그래서 오히려 사람들이 그 형제가 못된 인간이라고 하는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형제는 하나님 앞에 우리들이 사랑해야 할 사람이지만 그가 선택한 죄는 매우 악한 것이라고 하는 것을 모든 성도들 앞에 보여 주는 것이에요.
(31:27) 그렇게 해서 그로 하여금 모든 성도들로 하여금 죄에 대해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갖는 대신 그 죄로 말미암아서 고통을 얻게 된 그 형제는 용서하고 회복해서 교회의 공동체 속에 들어와 다시 그리스도를 향한 지순의 사랑을 가지고 살아가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을 고치려고 하는 하나님의 계획이에요. 그래서 형제를 교정하는 그 방식은 인격적이 되어야 된다라고 하는 것이죠.이 이 인격적이라고 하는 말 자체는 뭐냐면 스스로 깨닫게 하여 계기는 제공해 주지만 스스로 깨닫게 하여 자신을 하나님 앞에 세우고 돌이키게 하는 그것이 바로 인격적인 방법이에요.
(32:17) 그리고 이것이 인격적인 방법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안에 형제를 향한 사랑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없는 사람들은 지식이 있어도 형제를 교정할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 모든 형제의 교정은 그리스도를 대신해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를 향한 진실한 사랑 안에서 형제를 교정할 수 있는 것이죠. 그런 사랑이 인격적인 사랑이 되어서 그래서 스스로 돌이키게 하는 것이죠. 그러나 그 일이 쉬운 일인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 일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에요. 살리 우리는 교회 안에서 그릇 행하는 지체들을 참고 견디면서 고쳐 주다가 국가의 권력 같은 것들이 부러울 때가 얼마나 많은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
(33:08) 그릇 행하고 교회를 아프게 하는데도 그를 제재할 수 있는 세속적인 권력이나 수단을 교회에 주신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교회에게 주신 권한은 영적이고 신령한 것이기 때문에 신령한 방법으로 그를 고치려고 하고 복음적인 방법으로 그를 돌이키려고 해요. 그러나 그것은 많은 인내와 고난을 필요로 하는 거죠. 그래서 어느 한 지체가 잘못 행하고 있는데 완력으로 제압해 버리고 교회에서 쫓아내 버리면 단숨의 해결이 되는데 그 영혼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어 영적으로 그리스도에게 끊어지는 것 같은 죽음을 막기 위해서 그 형제를 형제의 잘못과 오류에서 돌이켜 그를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온 교회가 인내하면서 기도하면서 기다려요.
(34:02) 여러분들이 그런 사랑을 받으면서 지금 거미줄 같은 신앙이나마 붙들고 사는 사람들이 된 거예요. 근데 그것을 기억하고 자기의 분수를 아는 사람들은 너무나 소수해요. 자기는 예전에 그렇게 더러운 죄에 빠져서 허거리면서 살다가 주님 붙잡고 일어났는데 자기보다는 훨씬 나은 사람인데도 그의 죄를 보고 진노하며 부르 떨어요. 그리고 그것이 마치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의 표지인 것처럼 생각해요. 그를 그의 허물을 덮고 용서해서 그를 세우려고 하는 많은 사람들의 노력을 우유부단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한 탁월한 사모함이 없다는 비난거리로 삼아요. 교만이 돼요.
(34:51) 육적 의없심에 넘치는 그것은 진실한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에서 오는 거룩함에 대한 갈망과는 틀린 거예요. 나는 여러분들에게 깊이 권하고 싶어요. 깊이 권하고 싶어요.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겸손해요. 그리고 주님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은 지체들로부터 고난을 받고 괴로움을 받을 때에도 자신이 괴로움을 받을지언정 자신의 괴로움을 해소하기 위해서 다른 지체들에게 상처를 주거나 교회를 아프게 하는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해요. 그래서 때로는 여러분들이 보기에 그 사람이 무력해 보일 수 있고 그리고 여러분들이 혈기를 부릴 때에 그 사람들이 여러분의 밥처럼 보일 수 있어요. 그러나 바로 그 순간에 여러분들이 그렇게 행동하는 그 자리에서 주님은 불꽃 같은 눈동자로 여러분들의 지각고 육적인 행동,
(35:58) 다락한 본성에 따르는 혈기 충만한 행동을 지켜보고 계셔요. 여러분들은 거룩한 그리스도의 몸에 똥을 끼얹고 있는 중이에요. 하나님이 결코 그냥 넘어가지 않으셔요. 그리스도의 피로 갑주고 사신 교회 이런 일들이 얼마나 자주 일어나는지 몰라요.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십자가에 주셔서 그 피로 사신 교회. 연약하고 부족하기 때문에 때로는 오류에 빠지고 그릇된 태도를 지니고 때로 심지어는 죄에 빠질 때가 있다고 하더라도 교회에 위탁하신 성령 안에서 서로 용서하고 고치고 사랑하고 그래서 나뿐만 아니라 모든 지체들이 손에 손을 잡고 빛으로 빛으로 나오기를 바라는 것이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예수의 마음인데
(37:01) 여러분 그렇게 살지 않을 때가 너무 많아요. 너무 많아요. 만약에 우리의 눈꺼풀이 벗겨져서 우리의 그런 혈기적인 행동 그리고 형제의 오류나 죄를 보면서 자신의 오류와 죄는 새카맣게 잃어버리는 그리고 충만한 육적인 혈기로 그를 정제하고 공개적인 석상에서 모욕을 하고 소문에 소문을 내면서 그의 평판을 깎아내려서 그로 하여금 교회에서 많은 지체들에게 손가락질을 받게 하는 그런 일들에 동참하는 여러분들의 죄가 형제를 향한 죄가 아니라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얼굴에 똥을 끼었는 행동이라고 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기나 합니까? 정말이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의 몸이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 형제 한 사람 한
(38:07) 사람의 형상이 있고 여러분들이 쓰레기처럼 여기는 형제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 안에 예수의 형상이 있으니 그들을 향한 여러분의 욕설과 모욕 평판을 깎아내리는 무모함과 그리고 그에 대한 지각 없는 비성적인 비난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존엄한 얼굴에 똥물을 뿌리는 거예요. 이미 그런 행동을 하는 그 사람의 영혼에는 하나님의 깊은 영적인 어두움이 내려 있고 그리고 그가 무릎을 꿇를 때 그는 절벽에 선 것 같은 기도의 단절을 경험하게 될 것이에요. 신자의 마음 안에 사랑이 사라지고 나면 그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것이에요. 하나님이 사랑이시니 내 안에 사랑이 사라질 때 그분과의 교통도 끊어지고 하나님이 성도를 묶어 주신 교통의 본질이 사랑이니 그 사랑이 사라질 때
(39:11) 나에게는 형제도 없는 것이에요. 어느째쯤이면은 사랑하는 여러분들이 지각이 생겨서 교회를 향한 주님의 마음을 알고 정말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젖붙쳐진 한줌에 한 한 점의 살이 된 것을 그렇게 기뻐하고 한 마디에 뼈가 된 것을 그렇게 좋아하며 형제들의 오류와 잘못을 버는 그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을 여러분의 것으로 받아들이며 그 형제를 온전케 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이 될지 모르겠어요. 모르겠어요.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삼이 하나님의 마음을 전수받는
(40:15) 것이에요. 그것이 신앙의 본질이에요. 지식이 좀 모자라도 학식이 좀 부족해도 그렇게 하나님의 마음을 진리의 말씀 통해서 전달을 받게 될 때에 우리의이 지성과 마음 안에는 잊혀질 수 없는 불망의 감화력이 생기게 되는 거예요. 그거를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들은 그가 비록 지식이 좀 부족하고 아는 것이 모자라고 훈련이 덜됐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셔. 형제를 원망하고 교회를 원망하고 사람들을 향하여 불평하는 동안 여러분들의 소중한 인생은 빠른 살같이 흘러요. 일생을 교회 다녔는데 한 번도 예수의 마음으로 교회를 섬긴 적이 없어요. 원망과 미움, 질타와 분노 이런 것들로 가득 차서 인생을 사는 것이요.
(41:21) 차라리 세상으로 뛰쳐나갔다 통하고 돌아오는 당자가 훨씬 더 빨리 성화될 거예요. 회개해야 돼요. 회개하요. 그래서 형제의 오류와 죄악에 빠질 때에도 그 형제를 향해서 인격적인 사랑을 가지고 그를 돌이키게 해야 하는 것이에요. 근데 그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죠.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아름다움을 발견할 때 사랑이 계속 생겨나죠. 그리고 미움이라고 하는 것은 추한 것을 발견하게 될 때 혐오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그렇게 아름다운 것을 발견해서 사랑하게 될 때와 추한 것을 발견해서 미워하게 될 때에이 두 가지 사랑과 미움이라는 극당적인 감정 중간 대역이 있어요. 이게
(42:29) 뭐냐면 실증과 권예요. 실증과 권.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미워하게 되면 하나님을 미워하게 되면 여러분들의 지성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일에 이미 실패한 것이죠. 형제들을 바라보면서 아름다운 것을 계속해서 발견을 하면 그 형제를 계속 사랑할 수 있게 돼요. 부족한 것과 잘못된 것들이 보여도 그 형제를 사랑하게 되는 거죠. 하나님의 성도를 향한 사랑은 영원히 계속되는 불변하는 사랑이에요. 그러면 여러분들이 이렇게 묻고 싶을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 안에 있는 아름다움을 발견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건데 그러면 하나님도 우리를 사랑하신다면은 우리에게 아름다운 것이 있는 겁니까라고 말이죠. 실제로 어느
(43:34) 선교사님이 나한테 그런 질문을 했어요. 그래서 내가 대답을 했어요. 맞습니다. 우리 안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게 되는 아름다움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 선교사님하고 대화는이 정도에서 끝났지만 조금 더 이성적인 사람은 한 번 더 질문을 하고 싶을 거예요. 어떻해? 그러면 내가 목사님께 여줍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잠시 사랑한다면 그래도 우리에게 아름다운게 조금이라도 있을테니까 이해가 되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사랑은 일시적인 사랑이 아니라 어떤 사랑? 영원한 사랑인데 그러면 그 사랑이 영원하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영원한 종류의 아름다움이 있어야 된다는 결론 아니에요.
(44:31) 그렇게 묻고 싶을 거예요. 그러면 여러분 생각하기에 목사님은 대답할 말이 없을 거다. 그렇게 생각을 할 거예요. 근데 나는 대답을 하겠어요. 넓게는 인간 안에 좁게는 구원받은 신자 안에 영원한 아름다움이 있어요. 영원한 아름다움이 있어요. 그래서 그 아름다움 때문에 하나님이 성도를 영원히 사랑하시는 거예요. 영원히 사랑하신 그러면 오늘 여러분들은 지적인 충격을 받을 거예요. 아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타락하고 맨날 쓰레기 같은 죄인이라고 말씀하시더니 어떻게 인간 안에 그런 하나님도 심취하실 만한 영원한 아름다움이 있을 수 있습니까?
(45:37) 이거요. 근데 있다 얘기 뭐예요? 우리 안에 있는 우리의 영혼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에요. 이거는 하나님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잘 들으세요. 하나님이 우리 성도를 보면서 어떤 아름다움을 영원히 발견하시기 때문에 영원히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그렇게 사랑하실 수밖에 없도록 우리 안에서 발견되는 그 영원한 아름다움은 하나님 자신이세요. 그래서 그 사랑이 이렇게 하나님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그래서 고대의 교부들은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신이라고 불렀어요. 그래서 그 유명한 데이피케이션의 교리가 바로 그거예요. 우리가 점점 신이 되어 간다고 생각했던 거. 예.
(46:37) 그들이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고 생각한 건 아니에요. 근데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 그 자체가 신적인 거예요. 그 그것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형상이기 때문에 영원한 거예요. 근데 그것이 자꾸 더러운 것에 묻는 거예요. 그 묻어도 그것은 표상이에요. 하나님은 실제적으로 우리 안에 있는 당신 자신의 형상을 보는 겁니다. 그 당신 자신이 영원한 것처럼 당신의 형상도 영원해. 당신 자신의 아름다움, 사미와 함께 바라보시면서 아름다움을 느끼시는 것처럼 성도를 바라보면서 아름다움을 느끼시는 거예요. 그래서 그를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거예요. 하나님이 그렇게 생각하는데 여러분들이 왜 형제에게서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지 않느냐 얘기예요.
(47:25) 우리의 오류와 죄를 우리가 잘 볼 수 있겠어요? 하나님이 잘 볼 수 있겠어요? 그대들이 형제에게서 발견하는 죄와 오류는 이미 하나님에 의해서는 훨씬 더 오래 전에 파악됐어요. 그런데도 하나님이 그 죄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을 사랑하셔요. 그 얘기 무슨 뜻이냐면 그렇게 죄를 짓고 오류에 빠졌는데도 여전히 그 사람 안에 나의 아름다움이 있다. 하나님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자기는 그 형제 속에 있는 그 하나님도 바라보시는 명백한 아름다움이 안 보여. 그 안 보이는 이유는 뭐냐면은 사랑이었기 때문에 안 보이는 거라. 그 아름다움 때문에 사랑하게 되지만 사랑의 눈으로 봐야지만 그 아름다움이 또 보이는 것이니 아름다움과 사랑은 서로를 불러일으키는 거죠.
(48:21) 아름다움 때문에 사랑하게 되고 사랑의 눈으로 보이기 때 보기 때문에 아름다움이 발견되는 거죠.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사람은 사랑하게 될 것이고 사랑하는 사람은 아름다운 것을 더욱더 찾게 될 것이니 아름다움은 사랑을 부르고 사랑은 아름다움을 부르는 거죠. 그렇게 해서 발전에 나아가는 사랑이 발전에 나아가는 여기에서 우리는 까리따스의 사랑 안에 있는 죄의 객관화 현상을 현상에 관한 교리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죠. 그것은 뭐냐면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있으면 형제를 반드시 사랑하게 되고 형제를 진실로 사랑하게 되면 그러면 형제가 죄를 지었을 때에도 죄 때문에 그 형제가 싫어지거나 미워지지는 않는다 얘기요.
(49:24) 싫어지거나 미워지진 않는데요.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신기하게도 그 죄와 죄의 그 죄와 죄의 주인인 형제가 사실은 하나이거든요. 왜냐면 모든 죄는 그 죄를 지은 사람이 선택한 거예요. 선택하지 않았더라면 그 사람이 죄를 지은 사람일 수가 없는 거죠. 칼을 들고 은행에 들어가서 돈 내놔. 그랬더니 은행 직원들이 벌벌 떨면서 돈을 쏴 줬어요. 그래서 그걸 손에 들고 뛰어나왔어요. 자기가 그 죄를 선택한 거죠. 그래서 그 사람은 은행 강도가 된 거예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전혀 그럴 의지가 없는데 뒤에다가 칼을 대면서 은행으로 들어가라 그랬어요. 그리고 그다음에는 들어갔더니 아무도 없는 은행의 금고에 문을 열고 열으라 그랬어요.
(50:24) 그 타위에 의해서 열었어요. 돈을 훔쳐 가지고 가라 그랬더니 난 싫다. 나는 이런 도둑질 하기 싫다 그랬어요. 그랬더니이 사람이 금고에서 돈을 꺼내서 그 사람 손에다가 테이프로 붙여 줬어요. 그리고 그다음에 칼을 겨놓으면서 빨리 도망가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 그랬어요. 그래서 그 사람이 은행을 튀어서 돈을 달고 도망을 갔어요. 그 현상으로 볼 때는 돈을 가지고 몸에 지니고 은행에서 뛰쳐나온 거는 아까 얘기한 그 강도나이 사람이나 똑같아. 그런데이 사람은 죄를 지은 사람이 아니에요. 왜? 의지가 그걸 선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기뻐하는 의지로 그것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강요된 것이기 때문에 그건 죄가 아니라 누구도 그걸 증벌하지 않아요.
(51:09) 하나님은 더더욱 마찬가지죠. 모든 그 사람 안에 있는 죄는 그 사람이 선택해서 그 사람과 한 덩어리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자연적인 본성만을 가지고는 사람들이 사람들이 어떤 죄와 오류에 빠지게 될 때 그 둘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이 자연적인 본성으로는 불가능한 거. 그래서 어떻게 돼요? 그렇게 좋다고 결혼한 아내가 지겹게 미워지는 거예요. 왜냐하면은 그 사람이 지은 죄가 있고 그 사람의 잘못 행한 것이 있어요. 그것을 보면서 나는 추하다고 생각해. 근데 그 아내 옛날에 사랑했던 아내와 이게 분리가 안 되는 거죠. 자연적인 사랑에는 이런 분리가 힘들어요. 심지어는 자기 뱃속으로 낳은 자식도 미울 때가 있는 거죠.
(52:04) 왜 그렇게 게으르고 말을 안 듣느냐 이게. 말을 안 듣고 게으른 것은 잘못이지만 우리 아들은 사랑스럽지 그렇게 안 된다 얘기. 응. 까리따스의 사랑이 없는데 나에게 상처를 주게 한 부모의 죄는 믿지만 우리 부모님은 너무 사랑스러워.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 거예요. 그런 일이 일어나면은 가정이 이렇게 깨뜨려지고 고통하지 않지요. 분명히 알아. 아내와의 관계를 포기할 수 없다고 아는데 싫어. 왜냐면 분리가 안 된다 이거. 부모와의 관계를 끊어 버릴 수 없다고 생각되는데 근데 하나가 될 수 없어. 만약에 아버지가 나에게 상처를 주고 엄마가 나에게 고통을 준 것과 엄마 아빠가 분리가 된다고 할 것 같으면 아 그것만 미워하고 눈에 보이는 엄마 아빠는 사랑하면 되잖아.
(52:54) 그럼 가족에 상처가 있을 리가 없잖아요. 근데 그런 분리 현상이 본성적인 사랑 속에서 안 일어난다 얘기예요. 더 좀 하고 싶지만 진도를 나가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까리따스의 사랑 안에 있는 죄의 객관화 현상이에요. 이것을 여러분들에게 좀 더 이해하기 쉽도록 이미 몇 년 전에 한번 설교한 예화이긴 하지만 다시 한번 여러분들에게 예로 들어 드리겠습니다. 이거보다 적합한 이해는 없으리라고 생각됩니다. 남녀가 사랑에 깊이 빠졌어요. 그래서이 여자가 남자를 아주 뜨겁게 사랑해요. 그랬더니 그래서 둘이 만나기로 했어요. 그래서 서로 사랑한다고 고백했고 이제 결혼까지 하기로 약속을 했고 그 한마디로 사랑에 깊이 빠져서 정신을 못 차리는 사이가 된 거예요.
(53:50) 근데이 남자가 그 여자하고 고속도로 옆에서 만나기로 했어요. 그랬더니 멀리서 차를 타고가 보니까 진짜 고속도로 옆에 자기가 사랑하는 남성이 예쁜 양복을 입고 머리도 말끔하게 그 그 단장을 하고 그리고 헌칠한 키에 아주 그냥 나을 할데 없이 깨끗한 모습으로 정말 사랑스러운 모습으로서 있는 거예요. 그런데 멀리서 보니까 손에 뭔가 허역고 뻘 걸 하나를 들고 있는 거예요. 그래 가지고 차에서 내려서 보니까이 여자가이 남자가 그 고속도로 옆에서 그 저 차에 치어 죽은 그 토끼를 들고 손에 들고 있는 거예요. 그래 그냥 트럭이 밟고 지나가면서 산에서 내려온 그 토끼를 그 밟고 지나갔어요.
(54:42) 그래 가지고 내장이 다 터져 가지고 막 피가 콸콸 흐르는 거예요. 머리까지 으깨어진 그 토끼를 귀 두 개를 들고서 있는 거예요. 그 왜 왜 저러고 있냐 그랬더니이 남자가 토끼 당을 워낙 좋아해. 그래서 그 고속도로에서 치워 죽은 산토끼를 버리고 가는게 아까워서 데이트를 하고 나서 가서 이거 껍질을 다 벗겨서 그래서 토끼탕을 해 먹을 그걸 들고 있는 거예요.이 여자가 내리는 거예요. 근데이 여자는 정말 동물 에워가요. 동물 에어가요. 이게 보는 그 순간에 그리고 징그러운 건 참 보지 못하고 코피가 흘러도 자기 손으로 닦지 못할 정도로 심약한 여성인데 또 사랑에 빠지면 그렇게 일부러 연약하게 보이려고 하는 본성도 있잖아요. 예.
(55:27) 집에서는 그 쥐꼬리 돌리고 놀면서도 형제 만나면 파리만 나타나도 뭐 그 죽을 듯이 뭐 그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 있잖아요. 다 한 때 그러는 거예요. 그게 나타나는 남성이 묻는 거예요. 빨리 와라. 응. 우리는 항상 만나면은 뜨겁게 끌어안놨잖아. 빨리 와.이 여자가 안 가는 거죠.이 남자가 생각을 하는 거야. 아, 저 사람 마음이 편했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구나. 그 문제는 그 여자에게서 사랑이 식은 것이 아니에요. 문제는 여자는이 남자를 끊임없이 사랑해. 지금도 너무 사랑하고. 그리고 그 품에 가서 안겨. 그래서 사랑을 나누고 싶어.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이 남자가 들고 있는이 토끼예요.
(56:18) 그 토끼를 들고 있는 걸 보는 그 순간에 저 자식은 인간도 아니구나 하고 어저께까지 잠시 전까지 뜨겁게 보고 싶고 사랑하던 마음이 사라질 수 있어요? 사라질 수 없잖아요. 왜냐면 토끼와이 사람에 대한 느낌과 사랑과 미움이 철저하게 분리된 거예요. 문제는 뭐냐면 이걸 버리기만 하면 된다 이거야. 아무 문제 없다. 이걸 버리기만 하면 그러면 그 사람에게로 달려가서 안길 수 있는 거죠. 문제는이 사람은 끊임없이 사랑하는데이 사랑하는 여자의 본성에 그 피가 흐르는 토끼를 들고 있는 그 남자의 품에 안길 수가 없는 거예요. 이게 바로 죄의 객관나 현상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깨달았어도 사랑이 식으면 형제 안에 있는 죄와 형제 자신이 분리가 안 돼 보여요.
(57:12) 자기도 쓰레기 같은 죄인이면서 쓰레기라고 정죄를 하는 거죠. 희망이 없다고 이야기를 하는 거예. 근데 사랑으로 꽉 차게 되면은 그게 분리되어서 보이는 거예요. 잘 들어 보세요. 이게 예수님이이 세상에 있는 죄인을 바라보시는 마음이야. 예수님이 당신의 손으로 잘 가르치시고 훈련시키신 제자들을 이제 어 마태복음 10장에서 사도로 파송하셔요. 파송하실 때 예수님의 심경에 대해서 그것이 열린 교회의 설설립의 정신이 됐는데 9장에서 뭐라 그러시냐면 이렇게 표현하시죠. 예수께서 백성을 보시고 어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민망이 여기시니 이건 히라버 단어의 뜻으로 말하자면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다라고 하는 것이죠.
(58:08) 이렇게 뭐 잘 못 볼 걸고 가서 민망했다는 뜻이 아니라 잘못된 번역이에요.이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다. 그런 뜻이에요.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가슴이 미어지는 것처럼 혹은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프셨으니이는 저희가 목자 이른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함이라.데 근데 유리 유리하고 고생한다라고 번역된 이것이 우리말로는 다 능동태예요. 근데 사실은 잘못된 번역입니다. 전적으로 잘못된 번역이에요. 히라버 성경에는이 두 가지가 하나는 괴롭힘을 당하며 또 어 그 내동댕이 처지며 이렇게 나온다 이거. 이것이 그 문법상으로 현재 완료 분사 남성 복수 형태예요. 수동태예요.
(59:05) 현재 완료 남성 분사 수동태 복수 형태라요. 그 무슨 뜻이냐면 지금 그 일이 계속 일어나고 있는 중이고 자신이 스스로 유리하고 고생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그를 내동댕이 치고 누군가가 그를 찌르고 괴롭게 했기 때문에 그 고통을 그냥 당하고 있는 그런 모습이 수동태예요. 근데 사실은 이게 진실입니까? 진실 아니라고 나는 생각해요. 그렇게 그들이 목자 이름같이 유리하고 고생하고 그러는데 죄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 아니에요. 그 죄와 그 죄의 결과로 말미암아서 무능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되는 것 아니에요. 그래서 그거를 치료하기 위해서 사도들을 보내면서 병든 것과 연약한 것들을 고칠 수 있는 권능을 주시고 복음을 전파하게 하시고 그 성령과 성령의 능력과 말씀, 진리 그 두 개를 주시는 거예요.
(1:00:01) 그 두 개의 도구를 가지고 그들을 죄의 억압에서 끌러내는 거예요. 이게 바로 선교고 이게 바로 교회가 있는 이유라 얘기죠. 그때에 그 사도들을 파송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뭐냐면은 목자일은 양같이 그 고생 그 내동댕이 처지고 그리고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 그 예수님의 마음이에요. 그렇게 예수님이 생각하실 수 있었던 이유는 뭐냐면 예수님 안에 있는 아가페의 사랑이 그 사람들을 그렇게 보게 만든 거예요. 물론 그들이 죄를 선택했어요. 여러분들이 인생을 곤고하게 살면 다 이유가 있어요. 여러분 자신이 선택하는 거야. 이렇게 곤고하게 사는 이유가 있는 거예요. 근데 그렇게 곤고하게 사는데 그 자신이 죄를 선택한 거예요.
(1:00:49) 그것이 그것이 객관적인 사실이에요. 근데 예수님이 아가페 사랑으로 꽉 차서 보이니까 꽉 차보 꽉 차시니까 그들의 죄와 그들이 비록 죄를 선택했다고 할지라도 그 죄의 결과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그 영혼이 영혼들이 이렇게 분리되어서 보이는 거예요. 그렇게 고통당하고 있는 그 영혼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는 거예요. 예수님 자신의 형상이 있는 거예요. 그까 당신을 사랑하듯이 그 사람을 사랑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그 말씀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방식이 바로 그거예요. 하나님 자신이 예수님이 그렇게 사랑하시는 것은 예수님 자신을 사랑하시는 겁니다.
(1:01:36) 그러니까 그 나누어져 보이는 거예요. 똑같이 성도들이 그 하나님 앞에 진실한 참여와 깨뜨려지므로 아가페의 사랑 앞으로 나아가 그래서 그 사랑 앞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감화를 받아요. 그리고 그것에 깨뜨려져요. 그리고는 자기와 같은 죄인을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삼위,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 자신의 이런 절망적인 죄를 용서하고 고치시기 위해서 하늘의 영광을 돌리고이 세상에 내려오신 성자 예수의 그 놀라운 사랑 앞에 신이 깨뜨려지는 거예요. 그리고 눈물을 흘리는 겁니다. 응. 보배 피를 흘리니 죄인 받으소 [음악] 눈물
(1:02:44) 그러면 까리따스의 사랑이 충만하게 자기 안에 에 기들어 그때 형제를 다 보는 절대 미워지지 않아요. 가슴 아프긴 해요. 자기도 인간이니까 미워지지 않아. 왜냐면 아 죄가 이렇게 분리되어서 보이는 거예요. 조금 더 나아가겠습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을 향해서도 마찬가지예요. 그게 뭐냐면은 자기 자신을 향해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나는데 내가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잖아요. 그러면 미워해야 할 자기와 사랑해야 할 자기가 도시 구분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뭐냐면은 내 안에 역사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죄니라. 그걸 핑계를 대는 것이 아니라 어 죄와 영합하는 나의이 자는 미워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새로운
(1:03:50) 본성은 내가 사랑하게 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하나님을 향한 까리따스의 사랑의 효과예요. 그런 까리따스의 사랑이 가득하게 되면 형제의 죄와 오류가 분명히 있고 그것을 향해서는 미움과 적게심이 불타는데 그것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는이 지체는 사랑스러워 보이는 거예. 그래서 그를 그에게서 계속 그가 그렇게 죄를 지었는데도 여전히 그 죄에도 불구하고 그 형제의 안에 있는 영원한 하나님 형상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역설적으로 오류를 저짓고 죄 가운데 빠지면 빠질수록 그 사람 안에 있는 그 사람 자신도 알지 못하는 그 하나님의 아름다운 형상에 대한 사랑이 생겨나게 되는 겁니다.
(1:04:43) 그래서 그걸 사랑하게 되는 거예. 저의 경험을 통해서이 진리를 깨닫게 되었을 때 저는 살아온 지난 모든 날들이 짐승처럼 여겨졌어요. 얼마나 내가 굉을 교회를 섬기는 목자로 살면서도 사실은 교회를 아프게 하면서 살았는 그리고 나를 미워하거나 나의 평탄을 깎아내리는 사람들을 내가 마음속으로 미워하고 똑같이 행동하는 그 사이에 목자의 나 자신이 그리스도의 몸을 얼마나 많이 상책기 내었을까? 그리고 괜찮의 시간을 지냈어요. 그러면서 개피 깨달았어요.
(1:05:47) 아, 우리가 진리를 찾아가는 그 구도의 길이라고 하는 것은 얼마나 많은 길인가? 나에게 고통이 없었더라면 이런 진리의 깊은 내밀스러운 사실들을 그 교리들을 내가 숙고했을 리가 없고 그렇지 않았더라면은 내가 깨달을 수 없었는데 그러고 나서 눈을 들어 보니까 예전에 나처럼 사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너무나 많은 거예요. 너무나 많은 거. 응. 그러면 여러분 가운데 이성적이신 어떤 분들은 이렇게 질문할 거예요. 그럼 목사님 그러면 그렇게 형제의 죄와 형제 자신이 분리되어 보이지 않으면 진짜 까리따스의 사랑이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말할 수
(1:06:51)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많은 증거를 댈 수 있지만 시간상 여러분들의 피부에 와닿는 한 가지 증거를 대고 그다음으로 넘어가겠습니다. 형제의 형제에게서 오류와 잘못을 발견해요. 그런데 형제에서 오류와 잘못을 발견했는데 그것 때문에 형제의 아름다움이 발견이 안 돼. 그래서 사랑하지 않게 돼. 그 아름다움을 발견하지 않는 것도 의지의 선택이에요. 있는데도 발견하지 않겠다고 딱 선택하는 거야. 그까 자신이 책임을지는 거죠. 근데 아름다움을 발견하지 않아요. 알아가려고 하지 않는다 이거죠. 그런데 그 그래서 형제의 형제의 죄와 오류가 형제와 나뉘어지지 않아. 그래서 완전히 한 덩어리가 돼.
(1:07:45) 그러니까 당연히 그 형제를 그 죄 때문에 미워하거나 싫어할 수밖에 없죠. 겉으로는 뭐 사랑하기 때문에 뭐 한다고 그러지만은 다 그 개소리고 진짜로 마음속에 그 사람이 그것 때문에 형제를 향한 진실한 사랑이 없다 이게 까리따스의 사랑이 없는 거라 이거죠. 증명을 해 볼까요? 그렇게 형제의 오류를 발견하게 될 때 그 오류와 죄가 형제 사랑을 가로막고 있을 때 그 사람의 마음속에 십자가의 감격은 사람 함께 사라져요. 없어요. 있을 수 없어요. 절대 없습니다. 없어요. 만약에 십자가 사랑의 감과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인 경험,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인 신앙의 감화가 살아 있으면 잠시 그 형제를 바라보면서 죄와 오류가 그 형제와 분리가 안 됐기 때문에 형제를 미워하고 정죄하다가도
(1:08:48) 다시 그 십자가의 감격이 만약에 있다면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도 그것을 뉘우치고 다시 사랑으로 돌아오게 되는 거예요. 사랑함으로 돌아오게 되는 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은 똑같은 위치에 도달하게 됐어요. 근데 그 교리를 딱 깨닫고 나서 그 깨닫게 깨닫기 많은 고통이 있었죠. 정말 많은 고통이 있었어요. 정말 많은 교통 고통이 있었어요. 그랬는데 그 교리를 깊이 깨닫고 나게 됐을 때 모든 진리의 효과가 그러하듯이 오랜 세월 동안 언제나 그 줄에 얼매이곤 했던 내 영혼에 하나님이 자유를 주셨어요. 자유를 주셨어요.
(1:09:51) 그리고 한동안 나에게 그렇게 고통을 주었던 사람들이 정말 스스로 생각해도 의심이 될 정도로 사랑스러워지는 절대로 밉지가 않은 그런데 그들이 잘못하고 있는 오류에 대해서는 정말 싫어요. 그런 아주 또렷한 분리의 현상이 생겨나게 되면서 사실은 마태복음 9장도 내가 새로운 각도에서 이해를 하게 된 겁니다. 아, 그 마음이었구나.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이론적으로론 몰라도 살면서 경험해 왔던 거예요. 그 어느 청년 지체가 요번에 가정 시리즈 설교 들으면서도 그런 얘기를 해요. 왜냐면 왜 청년들이 여기서 설교를 사는데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설교를 들으면서 그렇게 펑펑 우냐의 얘기예요? 응.
(1:10:46) 신랑도 없는데. 응. 그 이해가 안 가잖아요. 더 이해가 안 건 그 몇 주 후에요. 이혼을 생각하는 그대 얘기를 설교를 했어요. 그 시집도 안 간 그 장가도 안 간 애들한테. 그런데 또 펑펑 우는 거예요. 아니 결혼도 안 했는데 왜 이혼에 대해서 설교하는데 그렇게 울어요? 여러분 무슨 소린지 알죠? 그거이 남편에게 복중하라 설교할 때지 엄마 생각하고 지금 우는 거예요. 그렇게 했더라면 그렇게 안 됐을 텐데. 그리고 엄마 생각하면서 우는 거예요. 이혼에 대해서 생각하니까 자기 엄마 아빠 생각하면서 이렇게 길이 있는데 왜 우리 엄마 아빠는 그렇게 살았을까? 그리고 뼈저리게 우는 거예요.
(1:11:29) 그게 다 그 부모들이 만들어낸 상처의 흔적들이에요. 응. 왜 이혼하면 안 돼? 응. 그 그렇게 우는 거예요. 그렇게 그렇게 물어는 거예요. 그러고 나니까 어떻게 되냐면은 자기 그렇게이 이원하고 갈라섰기 때문에 엄마고 아빠고 다 인간이라고 생각지도 않아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걸 깨닫는 순간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그 놀라운 사랑을 깨닫는 순간에 무슨 마음이 떠오르냐면은 우리 엄마 아빠가 젊은 시절에 이러한 지식의 빛 가운데 살았더라. 죄인을 용서하시고 우리 가정을 사랑하시고 그리고 실패한 자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어두운 영혼의 빛을 주기를 즐거워하시는 그 하나님의 참 사랑을 알았더라면 절대로
(1:12:37) 우리 부모들이 그렇게 우리에게 상처를 주고 헤어지지 않을 텐데라고 생각되니까 이번에는 나에게 상처를 준 엄마 아빠가 미운게 아니라 그 빛 아래 살지 못했던 그 엄마 아빠가 피해자라는 생각이 들더라는 거예요. 그러면서 그렇게 불쌍한 마음이 들 때에 그때에이 마음속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생각이 났는 그러니 형제를 보면서 그 오류와 잘못이 있는데 그것은 그 사람 이야기가 옳를지 몰라요. 근데 그것이 형제와 분리되지 않는 것은 자기 안에 까리타스의 사랑이 없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그 태도를 고치지 않을 때 이미 죄를 지적하는 그 사람의 마음 속에서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인 경험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죠. 음.
(1:13:37) 사라지고 있는 거예. 저는 여러분과 꼭 같이 회심하고 그리고 32여년이 넘는 세월을 고도의 길을 걸어왔어요. 주님을 깊이 만나고 내가 설교자로 부름을 받은 그 이전의 삶은 무지와 오리로 가득차 있다고 하더라도 그 이후의 삶에도 부족한 부분이 많았지만 그때부터 본격적인 성화의 시기였다고 하더라도 이미 18년 가까운 세월을 지나왔어요. 그 과정을 통해서 깊이 깨달은 것이 있어요. 나도 그렇게 살지 못할 때가 많지만 그러나 우리는 매일 한편으로는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펑펑 울고 또 한편으로는
(1:14:42) 거룩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랑 앞에서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펑펑 우는 그 끊임없는 참매와 그리고 부활의 감격 그것 없이는 우리가 참된 성화의 길을 걸어갈 수 없다는 것이 저의 결론이에요. 오늘 가슴에 손을 얹고 그대들이 교회를 대하며 살아왔던 회심 이후의 날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형제를 향해서 대했던 여러분들의 많은 태도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세요. 가슴에 손을 얹고 정말 교회에 오류가 있을 때 지체들에게 죄가 있을 때 여러분 안에 까리따스의 사랑이 있어서 그것들이 객관적으로 분리되어 보였는가? 그래서 죄는 미워하고 오류는 싫어했으나 함께 그리스도 예수께
(1:15:46) 젖붙여진 그리스도의 몸인 지체들은 뜨겁게 사랑하는가? 그들의 오류와 죄가 그들을 사랑하는 것을 막을 수 없으리 많지. 그렇게 사랑했는가? 또 그렇게 사랑하려고 최소한 애를 쓰며 그렇게 살아왔는가를 봐야 된다 이거죠. 그렇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예요. 하나님의 은혜만이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거죠. 하나님의 은혜만 이것을 가능하게 그래서 형제를 교정하려고 하는 사람은 교정을 받는 사람보다 더 많은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해요. 그래서 그 사랑으로 자신이 사랑의 감화를 깊이 받아서 그 사랑 때문에 형제의 죄가 형제 자신과 분리되어서 죄는 미워하고 혐오해서 교회를 정결케 하지만 형제는 뜨겁게 사랑하게 됩니다.
(1:16:43) 오히려 오류가 있고 죄가 있기 때문에 그 형제를 뜨겁게 사랑하게 되는 그런 까리따스의 사랑의 세계를 여러분도 경험해야 합니다. 그러면 이제 형제로부터 이러한 교정을 위한 권고를 받을 때 그 권고를 받는 형제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라고 하는 것이죠. 우선 첫째는 그렇게 형제가 자기를 불러내어서 자기의 잘못을 지적해 줄 때에 그는 그가 해야 될 첫 번째 의무는 잘 듣는 것입니다. 그리고 듣는 과정을 통해서 자신을 성찰하는 것이죠. 물론 바람직한 것은 죄를 지은 나를 교정해 주기 위해서 다가오는 형제가 나보다 신앙이 뛰어나고
(1:17:48) 나와 죄를 분리해서 생각할 정도로 사랑이 충만하고 자신도 이미 이러한 것들을 극복하면서 살아간 신앙의 선배 어느 모로보나 존경 갈 만하고 하고 그리고 말로 자기를 설득하는데 논리도 당할 수 없을 정도로 친밀해서 그래서 무릎이 무릎을 꿇지 않을 수가 없어요. 이런 방식으로 나를 교정해 준다면 행복하겠지만 이런 일들은 일생 살면서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만 염두해 두시기 바랍니다. 그래가지죠. 일어나지 않아. 형제들이 그런 마음을 가지고 다가와서 나를 권고하는 사람도 있지요. 특히 목회자들의 경우에는 그렇게 될 수가 있겠죠. 그러나 때로는 그렇게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나에 대한 추후의 사랑도 없이 네가 이런 죄를 지었는데 그러고도
(1:18:52) 네가이 교회에 남아 있을 수 있느냐라고 전면적으로 손가락질하고 심지어는 빨리 잘못했다고 너 빌지 않으면 내가 폭로해 버리겠다고 공갈도 쳐요. 그리고 죄를 지은 우리 앞에서 형제가 교만할 대로 교만해진 거죠.지가 지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내가 다 아는데 이번에는 자기 의에 꽉 쳐서 형제를 기회라고 생각하고 짓밟는 거죠. 그때에도 들어야 해요. 들어야 해요. 그러면 그런 모욕적인 순간에 그것을 듣게 만드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느냐? 그것은 뭐냐면 섭리를 믿는 신앙에서 나온 다윗이 압살롬의 반란을 당해서 도망을 갈 때 베냐민 지파의 시무이라는 인간이 그 다윗에게 욕지거를 하면서 비난을 퍼보었어요. 바울의 집안을 망하게
(1:19:56) 하더니 네가 행한 그대로 하나님 앞에 보복을 당하는구나. 그러면서 쓰레기 같은 욕을 퍼부었어요. 그때 스르아의 아들 장군 아비세가 왕에게 얘기했어요. 저 개 같은 놈을 가만두겠습니까? 내가 죽여 버리겠습니다. 다윗이 하지 마라. 하나님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일어나는 일은 없다. 하나님이 나를 욕하도록 하나님이 저를 내버려 두셨는데 내가 왜 그걸 맡겠느냐? 내버려둬라. 그리고 당했어요. 그 사람의 말이 진실이기 때문에 사 그 다윗이 그렇게 당한 겁니까? 언제 다윗이 왕이 되겠다 그랬어요? 하나님이 부르셨지. 언제 사울을 망하게 해 달라 그랬어요? 어떻하든지 사울과 함께 살고 싶어 했어요.
(1:20:48) 사랑했어요. 사울은 자기를 죽이려고 칼을 그 자을 풀었지만 자기는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는데도 사울을 살려주고 그 아들까지도 사랑해서 그 은혜를 베풀었어요. 언제 그랬어요? 그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잖아요. 근데 다윗은 인간의 그런 잘못된 비난 속에서 뭔가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하고자 하시는 진실을 찾고 싶었던 거예요. 오해하지 말고 잘 들으세요. 여러분들을 사랑하는 사람은 여러분들을 사랑하긴 하지만 어느 정도는 여러분들의 결점에 대해서 눈이 멀 수 있어요. 여러분들의 결점에 대해서 가장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사람은 여러분들을 미워하는 사람이에요. 미워하는 사람이 그들에겐 콩풀이 없어요.
(1:21:40) 다만 여러분들을 미워하기 때문에 어 사실은 정확하게 발견하지만 그것을 해석할 때에 악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어요. 악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어요. 악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어요. 그러나 그 악의적인 해석은 개의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나를 미워하는 사람들 통해서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볼 수 없었던 나의 부족한 부분들을 보게 해 주신다고 생각을 해야 돼요. 이것도 깨닫고 나니까 정말 살아온 날들이 짐승 같았어요. 나는 누가 나를 비난하는 것은 정말 견디지 못했거든요. 지금도 참 약해요. 며칠씩 잠을 못 자요. 근데 깨닫게 된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면은 그들이 나를 미워하기 때문에 하는 비난이 100% 맞을 가능성은 99% 없어요.
(1:22:36) 그런데 그들이 비난하는 과정을 통해서 깊이 숙고해 보면은 분명히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나를 한 번도 충고해 주지 않았던 그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던 나의 오류를 발견하게 되는 거예. 그것으로 만족을 해야 돼요. 근데 어 괴롭고 굉장히 힘든데요. 할 수 없어요. 이미 일어나는 일인데 어떻게 막을 수가 있겠어요? 그 대신 그가 나에게 전달해 준 나의 부족한 부분들은 진실이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진실이라는 이유 때문에 나에 대해서 무래하게 행동하고 버릇없게 행동하고 나를 모욕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소문을 퍼트려서 내 평판을 깎아내리고 나를 향한 사랑이 일체없이 나에게 칼을 겨놓었던 그것에 대해선 하나님이 공정하게 심판하시죠.
(1:23:32)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길을 걸어가는 거죠. 걸어가는 그러니까 그렇게 보면 형제가 우리를 교정해 주려고 할 때 그의 미성숙으로 인해서 아주 불선하고 오만한 태도로 우리에게 도전하며 우리를 고치려고 한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태도를 문제삼치 말고 그를 통해 섭리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깨닫게 하시려고 하는 그 진실의 실체에 우리가 접근해야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여야 되는 거예. 이때에 우리 자신이 스스로 보호받고 그러한 무례한 태도로 우리를 공격하는 그런 오만한 우리의 지체들을 보존하는 방법이 하나 있어요.
(1:24:22) 그것이 뭐냐하면은 일단 사람들이 나를 비난하면 흥분하지 말고 분노하지 말고 정히 객관적으로 들으세요. 그것도 보통의 절제가 필요한 것 아니죠. 사실이 아닌 이야기들이 지금 막 쏟아져 나오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참으세요. 그리고 정히 귀를 기울이세요. 그러면 그쪽에서 막 그 미워하고 교만한 마음이 있으니까 그 입에서 똥물처럼 쏟아져 나오는 거예요. 근데 그 속에 구슬이 가끔 들어 있다. 이거 진실이라는 구슬이에요. 똥물은 개의하지 말고 다 들어요. 그리고 물을 부어 그리고 그 속에서 진실의 구수를 찾아내요. 그리고 맞다. 저 형제의 비난은 과장됐고 의도는 잘못됐고 나를 세우려고 하는 사랑의 마음은 추어도 없지만 이거는 정말 사실이었다.
(1:25:23) 그걸 찾아내는 거예요. 그러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되냐면은 누군가에게 비난을 받을 때 분노하면서 난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펄펄 뛰는 것도 그렇게 만들지 못하고 그 사람을 향한 미움만을 촉발시켜요. 또 누가 이야기했을 때 손발의 힘이 다 풀어지면서 이제는 나는 끝났다. 진짜 나는 그런 인간인가 봐 하는 것도 이것도 바보 같은 짓이라 이거죠. 그렇게 하면서 사는 사람은 사람 앞에서 사는 사람이지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이 아니에. 다 비난을 듣고 종이 들어요. 그리고 마음이 움직이지 마. 그 남의 얘기 듣는 것처럼 그냥 종이 들어요. 흥분하지 말고. 그리고는 보좌 앞에 나아가.
(1:26:11) 그리고 그것을 모두 쏟아놓고 이번에는 하나님께 직접 물어봐요. 그냥 다 얘기해. 아무게가 나에게 이러 이러한 것들은 잘못된 것이라고 비난을 퍼붓는데 나는 아무래도 그 비난이 수긍이 안 되는데 하나님도 나를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아니면은 잘못이 있기는 있는데 그 정도는 아닙니까? 아니면 그 형제가 나한테 지적해 준 건 약과고 그 형제도 알지 못하는 더 많은 죄의 뿌리가 나에게 있습니까? 그리고 진실하게 묻으면 물으면은 100% 응답이 와요. 예외적인 경우는 없어요. 자기가 기도 안 하면 몰라. 그러나 마음을 쏟아붓고 기도하면은 100% 응답이 와요. 확실하게 응답이 와요.
(1:26:57) 그러면은 응답이 오는데 그 응답이 때로는 그 형제가 다 맞다. 그러면 그 형제를 미워할 수 없죠. 그 하나님을 대신해서 나를 건져 준 사람인데 그 사람 이야기가 하나도 안 맞다. 그래도 그 형제를 미워할 수 없죠. 왜냐하면 그렇게 분별력이 없는 사람이 내 형제니 차라리 불쌍히 여겨야 될 사람이죠.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하나님이 나를 옳다고 하는데 자기가 나를 비난하며 다니면서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나를 비난거리가 되게 한들 나에게 그것이 무슨 상관이지? 난 어차피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인데요. 아멘. 세 번째가 가장 가능성이 많은데 깊이 기도해 보면 형제가 똥물처럼 무례하게 퍼부었는데 그 속에서 유리구슬 같은 진실이 있는 거예요.
(1:27:54)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걸 못 받고 또 내 마음이 상할까 봐 참아 이야기를 못 해 줬는데 그 형제는 사랑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대담하게 똥물 속에 구슬을 섞어서 터해 놓은 거예요. 그럼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해요. 그 맑은 물로 똥은 씻어내고 유리구를 그을 찾아내는 그러면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비춰보는 거야. 모든 비난을 다 동의할 순 없지만 아 나에게 이런 잘못이 있었기 때문에 저들에게 비난의 근거를 제공했구나.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 앞에 잘못한 것이었구나. 그리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 형제가 자기도 거의 발견할 수 없는 그 은밀한 오류에서 나를 건져내는 거예요.
(1:28:44) 그러니까 그 형 그러면서 어떻게 돼요?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깊이 참회하면 하나님이 은혜를 부어 주셔요. 그리 그 은혜는 사랑의 감화야. 그래서 하나님이 나 같은 죄인을 그래도 용서해 주시는구하는 것을 깨닫게 되면 십자가의 감격이 와. 그러면 그 형제가 나를 지적하는 과정에서 취했던 아주 오만하고 불선한 태도를 보면서도 그 형제 안에 있는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그 형제의 나를 향한 불손하고 더러운 태도를 나누어서 생각하게 되는 거예요. 그 형제를 사랑하게 되는 거예요. 형제를 사랑하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서 깊이 사랑하게 됩니다. 어떤 이유든지간에 누구를 미워하는 것은 자신의 영혼을 억압하는 것이며 누군가와 화해하지 못하고 사랑의 일치를 이루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영혼의 족세를 채우는 것이에요.
(1:29:41) 아무리 우리가 진리의 말씀을 듣고 그리스도 예수께 달려가려고 애쓰는 욕망이 우리에게 있다고 할지라도 두 손에 착고를 두 발의 착골를 묶고 손에 수갑을 채우고 어떻게 그리스도 예수를 향해 다름질 할 수 있겠습니까? 미움의 줄을 묻고 원망의 줄을 묻고 어떻게 우리가 교회를 치료하고 세상에 나아가서 그리스도를 싫어하고 대적하는 사람들을 사랑으로 끌어안고 눈물로 적셔 그들의 영혼을 하나님께로 불러드릴 수가 있겠느냐이 얘기예요. 성화라고 하는 것은 바로이 불가능해 보이는 그 길을 걸어가는 거예요. 누구도이 길을 못 걷는 사람을 우리는 정제하지 않아요. 그러나이 길을 걷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을 우리는 확신해요.
(1:30:33) 진리는 그것을 따라서 살고 실천해 볼 때에 진리가 진리라는 것을 입증하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 거기에 대한 확신이 생겨나게 되는 거예. 그리고 그 속에서 하나님과의 평화와 자유를 누리게 되는 거죠. 잘 듣는 거예요. 두 번째는 돌이키는 것이에요. 죄를 회개하고 거기로부터 돌이키는 것이에요. 형제가 나에게 어떤 식으로 비난을 퍼붓고 무례하게 행했든지간에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하나님 앞에 나를 비춰보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깊이 자신을 성찰할 때 만약에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래서 내 안에 어떤 죄가 발견된다면 우리는 개별적인 죄와 그 개별적인 죄를 가능하게 했던 뿌리가 되는 총체적인 죄에 대해서 깊이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서야 됩니다.
(1:31:29) 어차피 우리는 사람에게 깨우침을 받지만 사람 앞에 서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서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목회자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지체도 우리들에게 주신 것인데 우리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지체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고 우리를 미워하고 반감을 품은 지체들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에요. 만약에 미움을 복수로 갚고 원망을 미움으로 보복한다면 교회의 공동체는 다 찢어지고 마지막에 상처를 받는 것은 그리스도 자신이고 또 우리 자신의 영혼일 거예요. 형제가 오류에 빠져서 우리를 미워하고 비난한다고 할지라도 거기에서 우리들이 사랑으로 인내하면 그 형제의 오물은 우리 안에 모두 갖추어 버리고 그리고 우리는 그 오물 속에서 진실의 유리 구슬들을 찾아내는 것으로서 일단 되는 것이죠.
(1:32:24) 우리에게서 더 이상 그 오물과 더러운 것들이 전파되어지지 아니하고 공동체는 더 이상 피해를 보지 않게 돼요. 근데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공동체가 고통을 받든 더럽혀지든 말든 자신의 육체의 혈기대로 이에 대해서 대응하면서 교회는 큰 소동에 휩싸이게 되고 나중에는 두 사람이 누가 옳은지 그런지와는 상관없이 교회는 큰 상처를 받게 되고 나중에 누가 진실인지를 밝혀내게 되었지만 그때는 이미 교회가 받은 상처가 너무나 커서 진실을 규명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리고 만다 이거죠. 우리가 그렇게 인생을 살아온 것이에요. 그래서 돌이켜야 되는 것이에요.
(1:33:09) 결국은 우리 모두가 온전하게 되기를 사모해야 됩니다. 나만 예수 믿고 온전케 될뿐만 아니라 나의 사랑하는 지체들도 온전케 되고 나만 하나님을 향한 지순의 사랑으로 살아갈뿐만 아니라 내 지체들도 자기 사랑을 꺾고 사랑으로 가득해져서 우리 모두가 그 예수의 사랑 안에서 온전케 되어지고 머리이신 그분이 우리같이 쓰레기와 방불한 인간들을 그 피로 용서하셔서 당신의 몸에 젖붙이신 것처럼 나를 사랑하실뿐만 아니라 또 저 지체를 사랑하고 무엇보다도 교회의 온전함을 사모하셔서 당신을 다내어 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나는 깨뜨려지고 지체들은 세워지고 나는 주님 앞에 죽임을 당하고 그리스도는 우리 지체 안에 사시고
(1:34:14) 그래서 나는 깨어지고 제체들에게는 유익이 돌아가는 그래서 결국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 모든 고난을 하나님을 향한 가리따스의 사랑으로 잘 감당하면서 걸어가는 그 길. 그게 십자가의 길이야. 조롱하는 소리와 세상 유혹 속에도 주의 순결한 신부가 되리라. 내 생명 주님께 드리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아름다울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인간들을 위해서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1:35:19) 자신들도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을 그 쓰레기 같은 죄인들의 영혼 속에서 찾아내시고 그들도 싫어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히려 그들 안에 있는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들을 영원히 사랑하셨습니다. 나를 바로 그 사랑이 구해서 그 수많은 죄악의 길에서 불러 그리스도 예수의 몸이 지체가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신앙이 계어했을 때에는이 사랑 때문에 매일 울었고이 사랑 때문에 밥을 먹을 수가 없었고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랑 때문에 희망이 없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예수의 사랑을 전하면서 살았고 고난도 이기고 슬픔도 이기며 그분의 손을 꼭 잡고 핍박도 견디고 시련도 인내하면서 인생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1:36:22) 그리고 우리 안에 주님을 아는 지식의 빛도 함께 자라왔고 주님을 향한 사랑도 함께 자라왔습니다. 나만 하나님이 그렇게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내 눈에 쓰레기 같이 보이는 내 지체들 아무리 사랑으로 권해도 돌이키지 않고 죄를 사랑하는 나의 사랑하는 지체들도 하나님이 지금도 그렇게 그 아름다움을 보시고 사랑하셔 그래서 오늘도 보좌 5편에서 그를 위해 기도하셔 그분이 버리지 않는 지체를 우리가 어떻게 버릴 수 있겠습 그분이 사랑하신 지체를 우리가 어떻게 더럽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그러한 길을 걸어가는 동안에 우리들은 마음에 많은 고통과 괴로움을 당해. 원수를 사랑으로 갚고 그리고 보복을 은혜로 갚아요.
(1:37:24) 비난을 칭찬으로 되돌려 주고 우리를 향한 박해를 기도로 갚을 때 우리는 마땅히 그렇게 살아야 할 삶과 살 수 없는 우리 자신의 부패함 사이에서 많은 고통을 당해요. 십자가를 생각하며 그 고통을 매일매일 당한다면 하나님께서 날마다 우리의 영혼 안에서 예수의 죽음을 짊어지게 하셔서 우리의 포악한 성품은 죽게 하시고 그래서 우리에게서 당신 자신은 충만히 사셔서 그래서 우리도 몰랐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들 눈에는 우리의 모습 속에 예수의 형상이 보이게 만들어 주셔요. 그래서 우리의 삶과 그리고 우리 안에 있는 주님의 형상이 일체가 되어서 우리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지체들이 생겨나게 고난의 형벌을 같은 것 괴로움을 치고
(1:38:28) 교회를 위해서 그리고 우리의 성화가 성전적으로 그리스도를 통해 교회에 연합되기 위해서 지체의 성화를 위해서 또한 애써온 우리의 많은 고난받은 날들이 우리를 점점 좀 손길한 신자로 만들어 가요. 만들어가 그 안에서 우리는 우리 안에 매일매일 사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의 감격을 누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을 바라보게 됩니다. 교회 안에 많은 지체들이 있어요. 오늘도이 설교를 들으면서 이방의 언어처럼 낯선 눈빛으로이 설교를 듣고 있는 수많은 여러분 곁에 있는 지체를 보세요. 그들은 이런 사랑을 받아본 경험이 없다 이요. 없다. 그러니까 교회 안에서 그렇게 가식이 판치는 거예요.
(1:39:30) 왜? 자기의 죄, 자기를 사랑한다는 확신이 안 되니까 자기의 결정과 죄를 감히 형제들 앞에 고백을 못 하는 거예요. 그런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찬지예요. 우리는 우리가 받은 생애적인 하나님의 은혜 그리고 주님을 만난 그 놀라운 감격을 자랑해. 왜 그런 걸 주셨어요? 왜 남이 보지 못한 은혜의 세계를 보게 하셨고 남들이 받지 못한 십자가의 사랑을 우리에게 알게 하신 이유가 무엇 때문이에요? 우리들이 그것을 밤깊도록 동산 안에서 누리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이것을 주신 것이 아니라 너희는이 사랑을 가지고 형제들에게 나아가라. 너희는이 사랑을 가지고 나의 사랑을 모르는이 세상의 나아가 나 예수 그리스도의 분신이 되어라.
(1:40:24) 그래서이 세상에 보내신 거예요. 그러면 사랑을 더 많이 받은 사람들이 더 많이 고난을 당하고 더 많이 참고 그리고 더 많이 견디고 그리고 더 많이 용서하고 더 많이 베풀고 더 많이 자기를 버려야 해요. 사람들은 기억하지 않을 거예요. 부당한 형제의 비난을 받으며 그 형제를 미워하지 않기 위해서 골방에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가슴마리를 하며 저를 사랑하게 해 달라고 미련하게 복음에 순종하며 예수의 본을 따르기 위해 지냈던 밤새운 수많은 날들 고통을 받으면서도 보복을 하기 전에 교회가 당할 상처를 생각하면서 그를 무조건 용서하게 해달라고 가슴 말씀 아파서 하나님 앞에 십자가를 붙들고 울던 그 모든 괴로움 사람은 누구도 기억할 수 없을 거예요.
(1:41:26) 그러나 우리 주님의 마음에는 모든 기억하고 계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옳은 사람의 편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편이에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편이에요. 사랑 없이 옳은 사람이 아니라 그릇되었다고 할지라도 참여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편이에요. 그렇게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는 돌이킨 죄인들을 책망할 것이 없는 교만한 의인보다 훨씬 기뻐할 것이며 결국은 그런 교정을 통해서 자기를 고친 사람들이 더 많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으로 위로를 삼으세요. 주님으로 위로를 삼으세요. 제가 사람들로부터 고통을 당하거나 외로울 때마다 가슴에 손을 얹고 부르는 찬송이 있어요.
(1:42:20) 이 이 세상의 친구들 [음악] 나를 버려도 날 사랑하는이는 [음악] 어찌 예술세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칠네. [음악] 온 천지는 변에도 날 버리지. 네.
(1:43:23) 아멘. 아멘.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의 아름다움이 영원하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를 향해 불변하는 사랑으로 영원히 사랑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이 그런 사랑으로 우리가 오류에서 고쳐져서 온전한 예수의 몸에 한 지체가 되기를 사모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외로가 되지 않습니까? 그리스도께 피하는 사람들, 그의 십자가의 그늘 아래 숨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사랑하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이 시간에 우리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 우리 안에 있는 많은 무지의 어둠움들 우리의 영혼 안에 기드여 있는
(1:44:27) 절망적인 어두움들을 하나님 물러가게 해 주시고 그래서 우리를이 세상에 많은 재물 없어도 좋으니 하나님 우리의 손을 이끌어 빛 가운데로 데려가셔서 우리를 그 잘라는 하는 빛 가운데 살도록 하나님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우리를 새롭게 해 주시옵소서. 그래서 우리의 인생이 속히 지나가는데 점점 더 온전한 신자가 되어가고 우리가 살아 있으므로 우리의 교회가 그리스도 예수의 아름다운 몸이 되어가도록 하나님 우리를 도와달라고 우리 같이 한번 지난 날에 우리의 죄를 회개하며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자비하시고 사랑이 만드는신 아버지 하나님. 오늘이 시간에도 간구하고 기도합니다. 주여 은혜를 내려 주시옵소서.
(1:45:22) 자비하신 아버지 오늘도 도와주시고 하나님 은혜를 내려 주시옵소서. 지 않 살아 있는 많은 날 동안 이렇게 하나님 [음악] 기도하겠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님의 교통하심이 사랑하는 어린 자녀들 위해
(1:46:27) 이제로부터 영원히 함께 있어지다. 아멘. [음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