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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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안다는 것

호세아 5:15–6:6 “15 나는 이제 내 곳으로 돌아간다. 그들이 지은 죄를 다 뉘우치고, 나를 찾을 때까지 기다리겠다. 환난을 당할 때에는, 그들이 애타게 나를 찾아 나설 것이다.” 1 이제 주님께로 돌아가자. 주님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다시 싸매어 주시고, 우리에게 상처를 내셨으나 다시 아물게 하신다. 2 이틀 뒤에 우리를 다시 살려 주시고, 사흘 만에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실 것이니, 우리가 주님 앞에서 살 것이다. 3 우리가 주님을 알자. 애써 주님을 알자. 새벽마다 여명이 오듯이 주님께서도 그처럼 어김없이 오시고, 해마다 쏟아지는 가을비처럼 오시고, 땅을 적시는 봄비처럼 오신다. 4 “에브라임아, 내가 너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유다야, 내가 너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나를 사랑하는 너희의 마음은 아침 안개와 같고, 덧없이 사라지는 이슬과 같구나. 5 그래서 내가 예언자들을 보내어 너희를 산산조각 나게 하였으며, 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로 너희를 죽였고, 나의 심판이 너희 위에서 번개처럼 빛났다. 6 내가 바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랑이지, 제사가 아니다. 불살라 바치는 제사보다는 너희가 나 하나님을 알기를 더 바란다.”
시편 50:7–15 “7 “내 백성아, 들어라. 내가 말한다. 이스라엘아, 내가 너희에게 경고하겠다. 나는 하나님, 너희의 하나님이다. 8 나는 너희가 바친 제물을 두고 너희를 탓하지는 않는다. 너희는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나에게 늘 번제를 바쳤다. 9 너희 집에 있는 수소나 너희 가축우리에 있는 숫염소가 내게는 필요 없다. 10 숲 속의 뭇 짐승이 다 나의 것이요, 수많은 산짐승이 모두 나의 것이 아니더냐? 11 산에 있는 저 모든 새도 내가 다 알고 있고, 들에서 움직이는 저 모든 생물도 다 내 품 안에 있다. 12 내가 배고프다고 한들, 너희에게 달라고 하겠느냐? 온 누리와 거기 가득한 것이 모두 나의 것이 아니더냐? 13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숫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 14 감사제사를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의 서원한 것을 가장 높으신 분에게 갚아라. 15 그리고 재난의 날에 나를 불러라. 내가 너를 구하여 줄 것이요, 너는 나에게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다.””
로마서 4:13–25 “13 아브라함이나 그 자손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 곧 그들이 세상을 물려받을 상속자가 되리라는 것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14 율법을 의지하는 사람들이 상속자가 된다면, 믿음은 무의미한 것이 되고, 약속은 헛된 것이 됩니다. 15 율법은 진노를 불러옵니다.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습니다. 16 이런 까닭에, 이 약속은 믿음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 약속을 은혜로 주셔서 이것을 그의 모든 후손에게도, 곧 율법으로 사는 사람들에게만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지닌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에게도 보장하시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우리 모두의 조상입니다. 17 이것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함과 같습니다. 이 약속은, 그가 믿은 하나님, 다시 말하면, 죽은 사람들을 살리시며 없는 것들을 불러내어 있는 것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보장하신 것입니다. 18 아브라함은 희망이 사라진 때에도 바라면서 믿었으므로 “너의 자손이 이와 같이 많아질 것이다”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19 그는 나이가 백 세가 되어서, 자기 몸이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고, 또한 사라의 태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줄 알면서도, 그는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20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믿음이 굳세어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21 그는, 하나님께서 스스로 약속하신 바를 능히 이루실 것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22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보시고 “그를 의롭다고 여겨 주셨습니다.” 23 “그가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다” 하는 말은, 아브라함만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 아니라, 24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여겨 주실 우리, 곧 우리 주 예수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을 믿는 우리까지도 위한 것입니다. 25 예수는 우리의 범죄 때문에 죽임을 당하셨고,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살아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생활에서 가장 익숙하지만 어쩌면 가장 낯선 말이 있습니다. 바로 “나는 하나님을 안다”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 말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사용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다라는 표현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안다라고 말할 때에는 이런 신앙의 조건때문에 말을 합니다. 예배를 드리고, 성경을 읽고, 찬양을 부르고, 교회의 언어가 익숙하고, 신앙의 표현을 잘 할때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있다 생각합니다. 어떤 기도문장이 은혜롭게 들리는지 알고, 어떤 태도가 경건하게 보이는 것인지도 잘 압니다. 그런데 오늘 호세아의 말씀은 우리의 이 익숙한 표현앞에 우리를 멈춰 세웁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정말 하나님을 잘 아는가? 너는 하나님에 대해 알고 있는가 하나님을 알고 있는가?
호세아가 말하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단순한 종교적 정보로 아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어로 “알다”라는 말은 “야다”라고 성경에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야다”라는 단어는 성경에 900번 넘게 사용되어지고 의미 또한 40여가지 의미로 해석되어 집니다. 야다라는 의미는 단순한 정보지식으로 안다는 것을 넘어섭니다. 경험으로 안다는 것이고, 관계 안에서 안다는 것이고, 삶을 걸고 참여함으로 아는 것입니다. 부부가 서로를 아는 친밀한 앎을 표현할때도 이 단어가 사용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도 하나님을 안다라고 말하는 그 정도 수준의 앎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말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내가 누구인지 완전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애 앞에서 내 삶이 다시 빚어지는 것입니다. 예능 프로그램에 “아는 형님”이라고 있습니다. 게스트들이 초대되어서 자신의 몇가지 특징들을 소개합니다. 연애인끼리 만나는 시간인데도 의외로 그시간에 서로가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 꽤나 있습니다. 우리도 그 연예인들을 왠만큼 잘 알고 있잖아요. 그런데 그 프로그램에서는 그 정도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사람의 웃음뒤에 있었던 외로움, 화려함 뒤에 숨겨졌던 상처, 그 사람이 붙들고 살아가는 깊은 갈망들을 그 시간에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하나님을 안다라는 말은 역설적으로 나를 아는가?로 다시 말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일은 언제나 나를 아는 일과 연결됩니다. 내가 얼마나 쉽게 하나님을 이용하려 하는지, 내가 얼마나 자주 경건을 나의 의의 옷으로 걸치고 다니는지, 내가 얼마나 감사하지 않는 종교를 신앙이라고 부르는지 모르고 있다면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면서도 하나님을 모를 수 있습니다.
파스칼의 말이 우리에게 깊은 통찰을 줍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자신을 의인이라 여기는 죄인, 그리고 자신을 죄인이라 여기는 의인”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자신을 의인이라 여기는 죄인입니까, 아니면 자신을 죄인으로 알고 하나님의 인애를 붙드는 의인입니까.
첫번째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자기를 모르는 신앙은 하나님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호세아 시대 북이스라엘은 겉으로 보기에는 종교가 사라진 사회가 아니었습니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움을 누리고 있었고, 종교적으로도 제사가 풍성했고 절기따라 종교축제도 성실하게 행하여지고 있었습니다. 나름대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니님이 자신들 만큼은 버리지 않으셨다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하나님께 이렇게 풍족하게 제사를 드리고 있으니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 유지되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종교 한 가운데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호세아 6:6 “내가 바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랑이지, 제사가 아니다. 불살라 바치는 제사보다는 너희가 나 하나님을 알기를 더 바란다.”
이 말씀은 제사를 폐기해 버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갑자기 예배가 싫어졌다는 것도 아닙니다.
구약시대의 제사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유일한 은혜의 통로였습니다. 그 제사를 통해서 죄인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고, 깨어진 관계를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제사 없이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찾을 수 없는 유일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호세아 5:15 “15 나는 이제 내 곳으로 돌아간다. 그들이 지은 죄를 다 뉘우치고, 나를 찾을 때까지 기다리겠다. 환난을 당할 때에는, 그들이 애타게 나를 찾아 나설 것이다.””
하나님이 그 제사에 계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예배가 하나님의 자리가 아니다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의 자리로 돌아가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백성들이 드리던 그 제사에 행위는 풍성했고 열정은 넘쳤지만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심각한 종교혼합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한번도 하나님을 버렸다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들은 하나님도 섬겼고, 바알도 섬겼던 것이었습니다. 바알은 어떤신입니까? 가나안세계에서 풍요와 생산의 신이었습니다. 농사, 곡식, 포도주와 다산과 번영을 약속하는 신이었습니다. 비가 오고 땅이 열매를 맺고 가축이 번성하는 일은 바알의 능력과 연결했습니다. 농경사회에서 바알은 매우 현실적인 신이었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 자녀의 문제, 번영의 문제와 맞닿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바알처럼 대했습니다. 거룩한 주님으로 사랑으로 섬긴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풍요를 보장해 주는 신적인 장치로 섬겼습니다. 하나님을 내 삶의 안전과 번영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종교적 힘으로 생각했습니다. 사실 이 시대에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은 계속 그래 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십계명 첫 계명에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들을 섬기지 못한다”라고 못을 박았던 것입니다.
호세아가 비판한 것은 제사의 양, 예배의 양이 부족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드려진 제물의 품질이 나빠서도 아니었습니다.
시편 50:7–9 “7 “내 백성아, 들어라. 내가 말한다. 이스라엘아, 내가 너희에게 경고하겠다. 나는 하나님, 너희의 하나님이다. 8 나는 너희가 바친 제물을 두고 너희를 탓하지는 않는다. 너희는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나에게 늘 번제를 바쳤다. 9 너희 집에 있는 수소나 너희 가축우리에 있는 숫염소가 내게는 필요 없다.”
시편 50:14 “14 감사제사를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의 서원한 것을 가장 높으신 분에게 갚아라.”
하나님은 단 한가지를 요구했습니다. 감사로 나에게 제사를 드려라 입니다.
예언자들의 오랜 외침입니다. -예배는 있지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신앙 -예배는 있지만 이웃을 향한 사랑이 없는 신앙 -율례(말씀)은 있지만 삶은 하나님을 잊은 신앙
우리가 좋은 신앙이라고 말하는 척도는 어떤 것입니까. 성실한 주일성수, 십일조, 봉사, 헌신, 직분, 성실한 교회생활… 이것들은 참 귀한 것들입니다. 안하는 것 보다는 나을 수 있겠죠. 그러나 호세아가 묻는 것은 이것이 하나님이 요구한 것인가?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을 사랑해서 응답으로 한 일들인가? 아니면 내가 괜찮은 신앙인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은 자기확신인가?
제가 영업비밀을 하나 알려드릴까요. 교회에서 직분자들 대상을 뽑잖아요. 장로후보, 안수집사 후보, 권사 후보 이 후보의 자격으로 올라가는 정량적인 수치, 조건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부교역자들이 며칠밤을 세워가며 만드는 통계자료가 있는데 주일출석율, 십일조 횟수, 헌금횟수, 새벽기도 출석, 봉사 참여율, 교회학교 봉사회수… 이 통계기준을 가지고 후보 자격을 검정합니다. 그래서 오래 묵은 안수집사님들 중 장로를 희망하는 분들은 장로임직하는 해가 돌아오면 한해동안 정말 열심히 참여합니다. 통계표를 통과하기 위해서.
이 모든 것들, 제사가 자기 의를 증명하는 도구가 될 때에는 하나님과 아무 상관없는 일이 됩니다.
아무리 헌금을 많이 하고 주일 양복을 입고 그자리를 지킨다 한들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감사함으로 하지 않았다면 헛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하나님을 정말 정말 사랑하고 감사해 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다면 그것도 자기위선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잘 안다면 내 마음의 진실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내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만큼 나아가는 것입니다. 더도 덜도 말고 말이지요.
두번째는 죄를 아는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합니다.
호세아에게 충격적인 명령이 떨어집니다. 바로 거리에 있는 여인과 결혼하는 것입니다. 결혼은 사랑의 약속으로 함께 하는 것이잖아요. 호세아가 없는 시간동안 이 여인은 결혼전처럼 거리에서 자신이 하던 일을 합니다. 호세아 입장에서는 얼마나 큰 배신입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데, 결혼한 사람이 있는데 거리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도 다니는거에요. 그런데도 호세아는 결혼관계를 유지합니다. 약속때문에요. 마치 이스라엘도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약속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이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다른 신을 찾고, 배반하고, 뛰쳐 나갑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절대 포기하지 않습니다. “나는 너를 포기하지 않는다”
호세아 6:1–2 “1 이제 주님께로 돌아가자. 주님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다시 싸매어 주시고, 우리에게 상처를 내셨으나 다시 아물게 하신다. 2 이틀 뒤에 우리를 다시 살려 주시고, 사흘 만에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실 것이니, 우리가 주님 앞에서 살 것이다.”
하나님께 돌아가자,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시고, 자비를 베푸시고, 긍휼을 베푸시고, 인자하셔서 다시 은혜르 주실 것이다. 이것이 바로 “헤세드”입니다.
“헤세드”는 우리말로 인애, 자비, 긍휼, 인자, 은혜등으로 번역됩니다. 한마디로 딱 잘라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분명한것은 감정을 말하는 단어가 아닙니다. 동정을 나타내는 말도 아닙니다. 헤세드는 언약안에서 끝까지 붙드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관계를 포기하지 않는 신실함입니다.
죄를 드러내지만 죄인을 버리지 않는 사랑입니다.
헤세드는 하나님이 하신 약속때문에 하나님이 인간에게 먼저 보여주시는 사랑입니다. 사람의 사랑은 언제나 흔들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끝까지 지켜 내십니다. 하나님은 호세아를 통해서 이 사랑을 피와 눈물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역설이 생겼습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알면 알수록 하나님의 인애, 사랑을 깊이 알게 됩니다. 우리는 신앙적 환상이 깨져야 합니다. 나는 생각보다 선하지 않다. 나는 생각보다 순수하지 않다. 나는 생각보다 쉽게 하나님을 떠난다. 이것을 인정해야 하나님의 은혜가 참으로 크게 다가옵니다. 반대로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죠. 내가 이만큼이나 했는데 하나님은 이것밖에 안하시는가?
지난주 우리가 아이들과 나눴던 마태복음 9장 마태를 부르신 설교에서도 이 내용의 연장이됩니다.
마태를 누구나 다 죄인으로 여겼고 그렇게 알고 있고 공동체 밖으로 밀어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태 뿐만 아니라 죄인의 동료들을 몽땅 초대해서 함께 식탁을 나눕니다. 예수님은 바리세인들의 지적과 달리 죄를 가벽게 여기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죄를 가장 깊이 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죄를 격리하고 정죄하지 않고 죄인을 부르시고 그 죄를 다루셨습니다. 죄를 설명하면서 훈계하지 않고 죄인의 식탁에 앉아서 하나님의 자비를 보여 주셨습니다.
9장에서 나타나는 또 다른 사건도 마찬가지 입니다. 12년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야기입니다. 정결볍에 의하면 혈루증을 앓고 있는 사람은 부정한 사람입니다. 접촉하게 되면 그 사람도 부정한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그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율법의 관점에서보면 예수님은 부정해져야 합니다. 그러나 복음적 관점에서 그 여인은 깨끗해집니다. 율법은 죄앞에서 멈추지만 복음은 예수님은 죄인의 손을 잡아 주시고 회복시켜 주십니다.
몇주동안 계속 연락오며 어려움을 상담하던 젊은 목사님이 있습니다. 너무도 심한 스트레스로 병이 들었는데 병원에 가도 무슨 병인지 모릅니다. 몸이 갑자기 어지럽고 구토가 나고 의욕이 상실되고… 그러다가 정말 죽을 것 같아서 어느 병원을 찾아갔는데 의사가 마음과 정신적 어려움으로 생긴 병으로 진단을 내려 주었고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지 알려 주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그제서야 마음이 홀가분해졌습니다. 이 스트레스에서 벗어나야 내가 살 수 있구나 확신하는 순간 용기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내 상황, 나의 죄 나의 어려움, 나의 병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나아갈 때 하나님은 친히 우리를 치료하시고 만져 주십니다. 그래서
은혜는 자기 진실의 바닥에서 만나는 선물인것입니다.
바울이 로마서4장에서 결론을 말합니다. 로마 공동체에는 유대인 그리스도인과 이방인그리스도인이 함께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과 할례를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표지로 받아들였고 이방인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하나님의 백성안으로 들아왔습니다.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이방인들도 유대인의 율법과 할례로 유대인의 표지를 가져야 하는가? 바울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율법때문이 아니다. 아브라함이 의롭다함을 받은 것은 율법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아브라함도 사실 하나님을 잘 몰랐습니다. 그래서 중간 중간 엉뚱한 짓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분명하게 알고 붙든것이 있는데 하나님이 하신 약속입니다.
아브라함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하나님의 헤세드를 붙들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지식적으로 잘 알고 성경을 잘 아는 것을 보고 믿음이라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신뢰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호세아 6:6 “6 내가 바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랑이지, 제사가 아니다. 불살라 바치는 제사보다는 너희가 나 하나님을 알기를 더 바란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하나님을 향한 변함없는 사랑! 우리의 모든 예배 행위가운데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감사가 담길때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제물이 됩니다.
아이가 놀다가 무릎이 깨져서 피가 납니다. 아이가 이거 다 딱고 피멈추게하고 깨끗하게하고 울음을 멈추고 집에가야지 생각합니까? 깨진채로 피나는채로 옷이 찢겨진 채로 울면서 집으로 뛰어 들어갑니다. 이것이 복음이거든요. 호세아가 절규합니다.
“이제 주님께 돌아가자” “피나는 상처가지고 부끄러운 죄 가지고” 주님께 돌아가자. 주님이 싸매주실것이다. 주님이 고쳐주실것이다. 주님이 용서해 주실것이다. 이 사실을 아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나의 가장 진실한 밑바닥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이 하나님을 아는 사람입니다. 한주간 나의 가장 진실함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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