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수치를 이기는 능력

복음의 능력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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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복음의 능력 시리즈 설교 두 번째입니다. 지난 주에 복음은 지속적으로 우리에게 선포되어야 한다고 말씀을 나눴습니다. 왜냐하면, 그 복음은 우리의 신분을 바꾼 구원뿐만 아니라, 우리의 죄와 죄가 맺는 나쁜 열매로부터 날마다 구원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날마다 복음을 선포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와 기쁨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은 복음의 능력 중에서 죄와 수치를 이기는 능력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죄와 수치는 우리로 하여금 자유와 기쁨과 풍성한 삶을 사는 것을 방해하는 주된 요소입니다.
이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우리는 계속해서 이 죄와 수치로 인하여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시간이 흐르면 죄와 수치가 없어지는 것 같으나, 그것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잠시 잠복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특정한 상황이 되면, 또 다시 나타나 자신을 괴롭게 하는 것이 죄와 수치입니다.
대상포진이라는 질병을 잘 아실 것입니다. 저도 대상포진을 앓아봤기 때문에 그 통증이 얼마나 큰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 질병은 치료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우리 몸 속에 수두 바이러스 숨어 있다가 면역이 떨어지면 나타나서 통증을 유발한다고 합니다.
죄와 수치는 이것과 같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하나님 나라에 이르렀을 때에 완전히 치유될 것입니다.
이 땅에서 육신의 옷을 입고 있는 중에는 그 죄와 수치가 계속해서 우리를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
대상포진이 나타나게 되면 72시간 내에 항바이러스 약을 복용해야지만, 대상포진 후에 만성이 되는 신경통을 예방하는데 중요하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여전이 이 땅에서 죄와 수치로 때때로 고난을 당하게 되겠지만, 우리는 그 순간 또 다시 복음을 자신에게 선포해야만 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왜 죄와 수치에 대해서 복음이 치료제가 되는지를 오늘 에피소드를 통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죄와 수치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죄는 빗나간 것을 의미합니다. 올바른 길에서 벗어난 것이고, 과녁을 빗나간 것입니다. 특히 성경에서는 죄란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지 않고, 사람인 자신이 주인이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자기가 주인이 되어,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무시하고 자신의 뜻과 생각대로 살아가는 것을 죄라고 합니다.
이러한 죄는 두 가지 열매를 맺습니다. 첫 번째는 죄책감입니다. 두 번째는 수치입니다.

죄책감은 죄에 대해서 책임을 느끼는 태도입니다.

사람이라면 죄책감을 누구나 느끼게 됩니다. 죄책감의 올바른 기능은 그 죄를 회개하고 돌이키게 합니다. 그러나, 죄책감이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면, 수치심으로 발전합니다.

이 수치심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비하와 부정인 것입니다. 자존감을 잃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수치심으로 인하여 자존감을 잃어 버리면, 두 가지 태도를 나타냅니다. 하나는 회피입니다. 사람을 만나지 않으려는 모습니다. 다른 하나는 공격입니다. 자신에 대해서 무슨 말만 들리면 발끈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 두 가지 수치심이 가져오는 결과로서의 태도는 결국 관계를 무너뜨리는 핵심 요인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여인은 사람들이 공공연히 죄인이라고 부르던 여인입니다.
37절에서는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다고 표현하고 있고, 39절에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새인이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라고 생각합니다.
분명히 그 여인은 죄를 범했습니다. 성경적 맥락에서 “죄를 지은 여인”이라는 표현은 매춘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매춘이라는 죄가 단지 그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라, 돈으로 성을 사려는 남성으로부터 시작하여, 그 여인이 매춘으로만 먹고 살 수 있는 상황을 돌보지 않은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아주 복합적인 죄의 결과물이지요. 그러나, 오늘 여기서는 그 구조를 다루기 보다는, 그 여인도 그 구조 속에서 죄를 저지른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넘어가려고 합니다.
그 여인은 자신의 죄에 대해서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죄책감은 그 죄를 돌이키고 회개하여 다른 삶을 살게 하도록 올바르게 작용하지 못하고, 그 여인이 수치심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의 손가락질 속에서 그 여인은 함부로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다닐 수 없었습니다. 특히 유대교의 지도자였던 바리새인들은 그 여인들과 말을 나눈다든지 옷이라도 스치는 것을 극도로 혐오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여인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혐오, 즉 수치심으로 인하여 삶이 망가진 자였습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를 비롯하여 사회의 어느 누구도 이 여인을 가까이 하려고 하지 않았고, 이 여인의 수치를 씻어주기를 거절하였습니다. 오히려, 그 여인을 더 비하하고 저주하며 수치심을 더욱 심화시켰을 뿐입니다.
그 여인이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어떤 성경학자들은 그 여인이 이미 예수님을 만난적이 있고, 그 때에 예수님께 죄사함을 받았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 은혜에 감사하여 오늘 그 귀한 향유를 가지고 온 것이라고 해석하지요. 그러나, 그런 일이 있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다만, 오늘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는 명확한 것은 그 여인이 예수님을 특별하게 대했다는 것입니다. 그 여인에게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매우 특별한 선생이었습니다. 그 예수님이 평소에 보여주신 죄인과 세리의 친구였던 것에 대한 감사가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날에도 한 번도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우리 마음에 위로가 되는 말이나 행동을 보이는 분이 있으면 만나고 싶고 찾아가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은 마음이 있듯이, 그 여인도 예수님이 랍비로서 보여주신 가르침과 죄인을 품어주시는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을 동경했을 것입니다.
감히 바리새인처럼 그 분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지는 못했지만, 그 분이 계신곳으로 찾아가 자신의 진심을 다해 자신의 눈물, 수치심으로 겪은 눈물, 거절당하고 외면당한 설움으로 흘리는 눈물로서 예수님의 발을 닦습니다. 그리고, 여인에게 가장 소중한 머리털로 예수님의 그 먼지로 더렵혀진 발을 닦습니다. 그리고, 미리 준비한 귀한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었습니다.
옆에 있던 바리새인이 생각합니다. 예수가 선지자라면 그 여인이 죄인인 것을 알았을 것이고, 그 여인이 자신의 몸에 손을 대었다는 사실로 인하여 분노하고 그 여인을 쫓아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여인의 수치심을 더욱 강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바리새인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아니 그 바리새인뿐만 아니라, 그 여인을 외면하고 거절했던 모든 사람들, 그 여인을 자신의 성적인 쾌락을 위하여 이용만 하던 이들과 다른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바리새인과 제자들과 많은 사람 앞에서 그 여인이 행한 것을 칭찬하십니다. 그곳에 있던 많은 사람들은 그 여인의 행동을 비난하고 정죄하고 수치를 더했으나, 예수님은 오히려 그 상황을 역전시키셨습니다. 그 여인의 행동이 귀하다고 인정하여 주심으로 그녀의 수치를 덜어주셨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예수님은 그 여인을 향하여 선포하십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단지 그녀의 행동을 칭찬하심으로 그 상황에서 그녀를 조금 높여주는 것으로 끝내신 것이 아니라, 그녀가 가지고 있던 수치심의 근원, 그녀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주신 것입니다. 너의 죄가 사함을 받았도다.
그 죄사함에 대한 믿음, 그 믿음이 그녀를 구원하였다고 합니다. 평생 그녀를 따라다니던 수치심, 그 수치심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들을 피해다녔던 고단한 인생에서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이제 너를 정죄하고 수치심을 더하던 세상 속에서 평안을 누리라고 축복해주십니다.
우리의 죄를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가면, 그분은 우리의 죄로 인하여 우리를 정죄하고 심판하여 수치심을 더하시고 자존감을 무너뜨리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십니다. 어떻게 사하십니까? 오늘 여인의 죄를 사하신 것도 엿장수 맘대로 그냥 사해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하실 일, 바로 십자가 위에서 쏟으실 그 보혈로서 그 여인의 죄를 사하신 것입니다.
주님 앞에 수치스러운 마음으로 설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의 죄된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보혈, 바로 그 복음을 다시 기억합니다. 예수님의 공로로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함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보잘 것없는 죄인이 아니라, 이제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속에서 평안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죄와 수치가 우리를 괴롭게 하는 방식은 늘 비슷합니다.
죄는 먼저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 네 마음대로 해도 된다. 이것쯤은 괜찮다.”
그런데 우리가 죄를 짓고 나면, 죄는 태도를 바꿉니다. 이제 우리를 유혹하던 죄가 우리를 고발합니다.
“너는 끝났다.” “너 같은 사람이 무슨 그리스도인이냐.” “너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자격이 없다.” “너는 여전히 더러운 사람이다.”
죄는 처음에는 달콤하게 유혹하지만, 나중에는 잔인하게 정죄합니다. 이것이 죄의 방식입니다. 이것이 수치심의 방식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전혀 다르게 말합니다.
복음은 우리의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복음은 죄를 대충 넘어가지 않습니다. 복음은 우리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적당히 위로하는 말이 아닙니다.
복음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의 죄는 실제다. 너의 부끄러움도 실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도 실제다. 그 보혈이 너의 죄보다 크다. 그 은혜가 너의 수치보다 깊다.”
예수님은 그 여인을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이 말씀은 그 여인에게만 주어진 말씀이 아닙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오는 모든 죄인에게 주시는 복음의 선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수치심 때문에 숨지 마십시오. 죄책감 때문에 주님에게서 도망가지 마십시오.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예수님께 나아가는 길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사람들은 우리의 과거를 기억할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우리의 실패를 붙들고 있을지 모릅니다. 심지어 우리 자신도 우리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의 죄를 담당하였다.” “내가 너의 수치를 짊어졌다.” “내가 십자가에서 너를 대신하여 부끄러움을 당하였다.” “그러므로 너는 더 이상 수치의 사람이 아니라, 은혜의 사람이다.” “너는 더 이상 버림받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다.”
성도 여러분,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복음은 죄를 부정하는 능력이 아닙니다. 복음은 죄를 인정하면서도, 그 죄가 우리 인생의 마지막 말이 되지 못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복음은 우리의 수치를 감추는 능력이 아닙니다. 복음은 그 수치를 십자가 앞으로 가져가게 하고, 그 자리에서 주님의 은혜로 덮어주시는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다시 복음을 붙드십시오.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이 복음의 선언이 오늘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 다시 들리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죄와 수치가 다시 우리를 찾아올 때마다, 우리도 다시 이 복음을 우리 자신에게 선포하기를 바랍니다.
이 복음의 능력으로 죄와 수치를 이기고, 주님이 주시는 참된 평안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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