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자유와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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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권리
[서론]
요즘 시대 사람들에게 자유란 거의 삶의 기본값처럼 여겨집니다.
그래서 오히려 자유가 얼마나 큰 가치인지 잘 깨닫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을 들여다보면 우리가 얼마나 많은 자유를 누리고 사는지 알수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선택의 자유를 누립니다.
무엇을 먹을지, 어떤 옷을 입을지, 어디에 살지, 어떤 직장을 선택할지 스스로 결정합니다.
불과 백년 전만해도 가문, 신분, 성별, 지역 때문에 선택할수 없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많은 영역에서 스스로 선택할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표현의 자유도 누립니다.
SNS에 자기 생각과 감정을 마음껏 표현할수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의 자유도 누립니다.
언제든지 예배드릴수 있고, 성경을 읽을 수 있고, 믿음을 표현할수 있습니다.
이런 자유가 당연해 보이지만, 그렇지 않은 나라들도 여전히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권리는 정말 소중한 가치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인간의 존엄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자유를 내 마음대로 할수 있는 권리로만 여기면 문제가 생길수 있다는 점입니다.
예전에 버스 앞 뒤 좌석에 앉은 사람들끼리 싸우는 영상을 본적이 있습니다.
앞좌석 사람이 의자를 너무 뒤로 제껴 뒷 사람과 다툼이 일어난 것입니다.
앞에 앉은 분은 내 자유고 권리라고 주장하고 뒤에 앉은 분은 불편을 왜 내가 감수해야하냐고 따집니다.
신앙의 영역도 그렇습니다.
예전에 코로나가 있을때 오프라인 예배를 강행한 교회들이 몇몇 있었습니다.
그들은 신앙의 자유와 권리를 누리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 교회 목사님도 코로나에 감염되어 피해를 주고 말았습니다.
어떻습니까?
자유와 권리는 우리가 지켜야만 하는 너무나 소중한 가치입니다.
하지만 때로는 내 자유와 권리가 누군가에게 피해와 상처를 줄수 있습니다.
그럼 성경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자유와 권리를 어떻게 행사하라고 말할까요?
[본론1]
먼저 오늘 말씀의 배경을 알아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2차 전도여행 기간중 고린도라는 도시에 도착합니다.
그곳에서 1년 6개월 이상을 머물며 고린도 교회를 세웁니다.
그때 만난 동역자들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입니다.
이 부부는 바울과 같은 천막 만드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 손으로 일을 하며 그곳에 머물렀습니다.
또한 안식일마다 회당에 들어가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여기에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 머물때 어떠한 후원이나 사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전도할때 비용이 왜 들지 않겠습니까?
먹고, 자고, 이동하고 사람도 만나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에도 비용이 들어갑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 모든 필요를 자기 손으로 일하며 감당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바울이 고린도를 떠난후 잘못된 소문이 돈 것입니다.
바울이 사역비를 받지 않은게 사도가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도는 예수님을 직접 만나고 가르침을 받은 제자를 의미합니다.
사도들은 많은 곳을 전도하며 돌아다녔기에 교회의 후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그 권리를 행사하지 않았기에 원래 그 권리가 없어서라고 여긴 것입니다.
이에 바울은 부득이하게 자신이 사도임을 변호합니다.
계속해서 질문들을 던지는데 대답은 모두 “그렇다”입니다.
그럼 바울이 사도인가 아닌가가 왜 중요할까요?
자기 자존심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사도의 권위가 무너지면 바울이 전한 복음의 권위도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자기 명예를 지키려고 사도임을 주장한게 아닙니다.
고린도 교회를 복음 위에 건강하게 세우기 위해서 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자신이 사도로서 마땅히 누릴 권리들이 있음을 설명합니다.
1절부터 14절까지 계속해서 질문과 예를 통해 자신의 권리를 말합니다.
바울은 교회에서 제공하는 후원으로 먹고 마실 권리가 있습니다.
베드로처럼 결혼한후 아내와 함께 선교지를 다닐수도 있구요.
왜냐하면 바울이 눈물과 기도로 고린도교회를 세웠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일상의 예로 설명합니다.
군인이 자기 비용으로 근무할까요?
포도를 심은 농부가 그 포도 열매를 먹는 것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양을 치는 목자가 그 양의 젖을 마시는 것도 당연하지 않습니까?
구약에서도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으로 생활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복음을 전하며 교회의 후원이나 사례를 받는 것은 정당한 권리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런 권리들을 누리지 않았습니다.
왜 일까요?
복음때문입니다.
당시 고린도에는 말잘하는 철학자, 사상가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돈을 받고 지식과 사상을 가르쳤습니다.
고린도 사람들은 그런 문화에 익숙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이 고린도 교회로부터 후원과 사례를 받게 되면 어떨까요?
사람들은 오해할수 있습니다.
“바울도 돈 벌려고 복음을 전하는구나”
“다른 철학자들처럼 말로 먹고 사는 사람이구나”
바울은 이런 오해를 만들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의 권리를 내려놓은 것입니다.
복음이 더 온전히 전해지도록 자신의 정당한 권리마저 사용하지 않은 것입니다.
바울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은 직업이 아니라 소명이기 때문입니다.
16절입니다.
바울에게 복음 전파는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그만두어도 되는 일이 아닙니다.
그는 복음에 빚진 사람, 복음에 붙잡힌 사람입니다.
그래서 바울에게 중요한 질문은 “복음으로 무엇을 얻을수 있을까?”
“내가 사역을 통해 어떤 대우를 받을수 있을까”가 아닙니다.
바울에게 중요한 질문은
“내가 어떻게하면 복음을 더 온전히 전할수 있을까?”
“내가 어떻게 하면 한 사람이라도 더 복음으로 들어오게 할수 있을까?”입니다.
물론 목회자들이 사례비를 받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바울은 그게 정당한 권리지만 자신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고린도라는 특수한 상황때문에 복음이 오해받지 않도록 그 권리를 스스로 내려놓은 것입니다.
실제로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게서는 후원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사역비를 받느냐 받지 않느냐 그 자체가 아닙니다.
사역비를 받는 것도 복음을 위한 일이 될수 있고,
사역비를 받지 않는 것도 복음을 위한 일이 될수 있습니다.
그것의 기준은 하나입니다.
“이것이 복음에 유익한가?”
“이것이 사람을 살리는가?”
“이것이 공동체를 세우는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사람들은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물론 자유와 권리는 매우 소중합니다.
우리는 정당한 권리를 함부로 빼앗겨서는 안됩니다.
불의한 일을 당했는데도 무조건 참고만 있으라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층간 소음때문에 고통받을수 있습니다.
이웃의 무례한 행동때문에 불편을 겪을수 있습니다.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 문제를 제기할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권리를 전혀 주장하지 못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한가지 더 깊은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내 자유와 권리를 어떤 목적을 위해 사용하고 있는가?”
“내 자유와 권리가 단지 내 유익만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복음을 위한 것인가?”
“내 자유와 권리가 공동체를 세우고 있는가? 아니면 누군가에게 걸림돌이 되고 있는가?”
바울은 권리가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누구보다 정당한 권리가 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는 복음을 위해 그 권리를 내려놓았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유입니다.
우리의 자유는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자유는 복음을 위해 내 권리마저 절제할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내게 정당한 권리가 있을때 나는 그 권리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내가 가진 자유와 권리는 복음을 드러내고 있습니까? 아니면 복음을 가리고 있습니까?”
[본론2]
그런데 바울은 단지 자기 권리를 내려놓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19절입니다.
19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몸이지만,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사람의 평가나 인정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나 집단에 속해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러한 자유를 내려놓는 것을 넘어 스스로 많은 사람의 종이 됩니다.
왜 일까요?
더 많은 사람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얻는다’는 의미는 사람을 자기 편으로 만든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복음을 믿도록 낮아져서 섬긴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의 관심사는 오직 한 사람이라도 더 복음을 듣고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할때는 유대인처럼 되었습니다.
그들의 문화와 전통을 존중했습니다.
반면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에게는 유대인의 관습을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약한 사람에게는 그들을 업신여기지 않고 그들의 자리까지 내려갔습니다.
바울이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진리를 바꾸었다는 게 아닙니다.
바울은 복음의 본질을 타협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신을 낮춘 것입니다.
진리는 양보할수 없지만, 자기 방식은 내려놓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자유입니다.
우리는 보통 자유를 “내 마음대로 할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말하고, 내가 편한대로 행동하고, 내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전혀 다른 자유를 보여줍니다.
바울에게 자유는 자기 마음대로 사는 능력이 아닙니다.
사랑하기 위해 자신을 낮출수 있는 능력입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종이 될수 있는 능력입니다.
이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기 권리를 내려놓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입니다.
권리를 내려놓는 것은 내가 받을 것을 받지 않는 일입니다.
하지만 종이 되는 것은 상대의 자리까지 내려가는 일입니다.
상대의 언어를 배우고, 상대의 형편을 이해하고, 상대의 연약함을 품는 일입니다.
하지만 복음은 바로 이런 방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왔습니다.
예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하늘의 모든 영광을 고집하지 않으시고 포기하셨습니다.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심지어 죄인의 자리까지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셨습니다.
바울이 모든 사람의 종이 된 것은 예수님을 닮은 삶때문입니다.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기꺼이 포기하는 삶입니다.
기꺼이 낮아지고, 자신을 내어주는 삶입니다.
2호선 합정역 근처에 양화진이라는 외국인 선교사 묘역이 있습니다.
그곳에 가면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온 많은 선교사님들이 묻혀 있습니다.
그중에 윌리엄 제임스 홀과 로제타 셔우드 홀 가족이 있습니다.
윌리엄 제임스 홀은 캐나다에서 온 의료 선교사였습니다.
그는 조선에 와서 의료선교를 하다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남편을 잃은 아내 로제타홀도 의사였습니다.
그녀는 큰 슬픔을 겪었지만 평생 조선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남편이 다하지 못한 사역을 이어갔습니다.
병든 사람들을 돌보았고, 최초의 한국 여자의사도 세웠습니다.
어린이와 장애인을 위한 학교도 세웠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남편뿐만 아니라 어린 딸도 이 땅에 묻어야 했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제자였던 최초의 한국 여자의사도 빨리 떠나보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아들 셔우드 홀도 의사가 되어 평생 한국의 결핵 퇴치 운동에 헌신했습니다.
이 가족의 삶을 보면 그들은 단지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포기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조선 사람들이 되어 그들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기꺼이 낮아졌고, 기꺼이 섬겼고, 기꺼이 이 땅의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었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한 모든 사람의 종이 되는 삶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자유와 권리 너무나 소중한 가치입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거기서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그 자유를 무엇을 위해 사용하고 있습니까?
그 권리를 어떤 마음으로 사용하고 있습니까?
바울은 사도로서 누릴 권리를 복음을 위해 기꺼이 내려놓았습니다.
더 나아가 많은 사람을 얻기 위해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런 삶이 비참한 삶인가요?
복음을 믿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이 자유가 참된 자유입니다.
내 마음대로 사는 능력이 아니라 포기할수 있는 능력입니다.
사랑하기 위해 낮출수 있는 능력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우리는 이번 한주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내 자유와 권리를 먼저 주장하기보다 상대방의 형편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가정과 교회, 일터에서, 이웃과의 관계에서 낮아져 보십시오.
그 낮아짐을 통해 복음이 더 선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