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계획 속에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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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본문: 사도행전 9장 1-19절

"나는 정말 변한 게 맞을까?"

우리는 밤에 침대에 누워 SNS 피드를 내리다가 문득 마음이 쿵 내려앉거나 씁쓸해진 적이 있을 것입니다. 요새 보면 SNS 속 세상의 그리스도인들은 다들 참 대단해 보입니다. "예수님을 만나 삶이 완전히 뒤집어졌다"며 눈물 흘리는 격정적인 간증, 뜨겁게 해외 선교를 다녀온 사진, 은혜가 넘쳐나는 사역의 현장들로 가득합니다. 온통 특별하고 극적인 변화들의 연속입니다.
그런데 정작 그 피드를 보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면 어떤가요? 매주 교회는 오고 예배 자리에 앉아는 있는데, 내 삶에는 아무런 기적도, 대단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특히 어릴 때부터 부모님의 손을 잡고 자연스럽게 교회 안에서 자란 청년들은 더욱 그렇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거꾸러졌다는 사울 같은 드라마틱한 사건도 없고, 그저 한 주간 고단하고 평범한 일상을 살아낼 뿐입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 이런 무거운 의문이 고개를 듭니다. ‘나는 정말 회심한 사람이 맞나? 나는 왜 저들처럼 뜨겁지 못하지? 나는 그저 습관적으로 교회를 왔다 갔다 하는 종교인에 불과한 건가?’ 다른 이들의 특별함과 비교되면서 내 신앙은 초라하고 무기력해 보이고, ‘왜 나는 이 모양일까’ 하는 영적 조급함이 우리를 짓누르곤 합니다.

사울에게 찾아온 영적 맹인의 시간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울은 우리만큼이나, 아니 우리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특별하고 대단한 종교적 열심’을 가졌던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긴다고 확신하며 위대한 율법적 성과를 향해 질주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예루살렘 감옥에 집어넣는 혹독한 박해를 손수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왜 그토록 살기등등하게 열심을 부렸을까요? 사울에게는 확고한 신학적 신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유대교의 거룩함을 수호하기 위해 율법의 말씀을 철저히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사울은 구약 성경 신명기 21장 23절의 말씀을 믿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이 말씀에 근거해 볼 때, 로마의 가장 수치스러운 사형 틀인 ‘나무(십자가)’에 달려 비참하게 죽은 나사렛 예수는 절대로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일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는 그저 율법의 저주를 받아 죽은 범죄자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가 부활하셨고 그분이 구원자라고 주장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선포는, 유대 사회를 더럽히는 신성모독이요 불경한 죄악이었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땅을 정결케 하겠다는 종교적 의무감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는 뛰어난 학식과 가문의 배경, 로마 시민권까지 가졌으니 그의 모든 행보와 열정은 세상이 보기에 대단하고 화려해 보였습니다.
그렇게 사울은 대제사장에게 권한을 위임받아, 사마리아를 넘어 저 멀리 흩어져 복음을 전하던 다메섹의 성도들을 잡으러 가고 있었습니다. 가문과 종교의 이름으로 자신의 열심을 완벽하게 증명하려던 그 순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의 삶을 뚫고 들어오셨습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강렬한 빛이 그를 둘러 비추었고, 사울은 땅에 엎드러졌습니다. 그때 하늘에서 거대한 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4절)
사울은 눈이 멀어 앞이 보이지 않는 공포 속에서 부르짖었습니다.
“주여 누구시니이까” (5절)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5절)
이 만남과 대화는 사울의 전 세계관을 뒤흔드는 처참한 깨어짐의 고백이 되었습니다. 율법의 저주를 받아 죽은 줄 알았던 예수가 살아계셔서 영광의 빛으로 자신을 압도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예수 믿는 연약한 성도들을 박해한 것이 곧 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님 자신을 박해한 것임을 알게 하셨습니다.
결국 사울은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는 ‘철저한 영적 무력함’의 자리에 갇히게 됩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줄 알았으나 실상은 하나님의 아들을 대적했던 영적 맹인이었음을 십자가 앞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원래 그는 다메섹에 도착하여 그리스도인들을 조사하고 체포하는 당당한 권력자로 군림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단 한 걸음도 걷지 못하여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가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참된 변화의 시작은 무언가 내가 화려한 영웅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가진 얄팍한 의로움과 종교적 확신이 십자가 복음 앞에 철저히 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 앞에 엎드리게 되고 나 자신의 영적 무력함과 비참함을 직면하는 눈먼 사흘간의 고독한 시간 속에 있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진짜 변화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특별한 계획과 주권

사울이 스스로 눈을 뜨려고 발버둥 치거나 자신의 어떠한 자격을 증명해서 변화된 것이 아닙니다. 사울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캄캄한 어둠 속에 엎드려 있을 때, 교회의 주권자이신 예수님은 이미 그를 향한 ‘특별한 구원의 계획’을 가동하고 계셨습니다. 인간의 회심과 정체성의 개혁은 오직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시선은 이제 다메섹에서 묵묵히 말씀과 기도로 자리를 지키던 신실한 제자, 아나니아에게로 향합니다. 주님은 환상 중에 아나니아를 부르셔서 당혹스러운 명령을 내리십니다. ‘직가’라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 머물고 있는 다소 사람 사울을 찾아가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라는 지시였습니다.
아나니아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거부감을 표현했습니다. 사울이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들에게 얼마나 큰 해를 끼쳤는지, 그리고 지금 다메섹에 온 이유도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잡아 가두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온 교회가 다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를 찾아가는 것은 호랑이 굴로 걸어 들어가는 것과 같은 극심한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의 두려움과 대적자의 완악함을 뛰어넘는 강력한 주권적 계획을 선포하셨습니다. 우리 본문 15절과 16절을 다 함께 읽겠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예수님은 교회를 멸하려던 그 악한 원수를, 당신의 이름을 열방에 전할 ‘택한 나의 그릇’으로 삼으셨다고 선언하십니다. 여기서 ‘그릇’이란 토기장이의 주권에 의해 빚어지는 도구를 뜻합니다. 그릇은 스스로 무엇을 담을지 결정할 주권이 없습니다. 오직 만든 주인의 손에 붙들려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결정됩니다.
사울은 이전까지 자기 뜻과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세상의 방향대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창조주이신 예수님은 주권적인 은혜로 그의 인생 방향을 꺾으셨고, 이제는 사울이라는 그릇 속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을 가득 채워 당신의 소유로 쓰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주님이 예비하신 그 쓰임 받음의 길은 세상이 말하는 화려한 성공의 무대가 아니었습니다. 16절 말씀처럼, 그는 이제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할지’를 마주하는 삶으로 부름받았습니다. 이전에 성도들을 핍박했던 자가, 이제는 예수의 이름 때문에 스스로 핍박을 견뎌내며 복음을 전하는 거룩한 용사로 개혁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당신의 특별한 계획과 주권으로 은혜의 통로인 아나니아를 보내어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을 벗겨내셨고, 그를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셨습니다. 눈이 열린 사울이 가장 먼저 행한 일은 즉시 회당으로 나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시다”라고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20, 22절). 결국 회심과 변화의 주권은 사울의 자격에 있지 않았습니다. 대적자까지도 거룩한 그릇으로 바꾸어 내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압도적인 은혜에 있는 것입니다.

막막함 속에서도 기도합시다

우리는 예수를 알게 되었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내 삶이 전혀 변하지 않는 것 같아 막막하고, 내 신앙이 껍데기만 남은 종교인처럼 느껴져 괴로울 때가 있습니다. 무언가 내 삶에 주님처럼 살아가야 하는 마음은 있지만 진전은 없고, 여전히 제자리 걸음을 하며 막막한 현실을 살아갈 때, 그때 우리가 찾아가 엎드려야 할 자리는 어디일까요? 주님은 두려워하는 아나니아에게 사울의 현재 상태를 이렇게 증언하셨습니다.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11절)
함께 고백합시다! "막막함 속에서도 기도합시다"
사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 자신이 평생 쌓아 올린 열심이 도리어 하나님의 아들을 찌르는 참혹한 죄악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앞은 보이지 않고 인생의 모든 토대가 흔들리는 극심한 막막함 속에서, 사울은 사흘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않으며 오직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주님,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그는 어둠 속에서 오직 성령의 도우심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만을 붙들고 매달렸던 것입니다.
저 또한 고등학교 시절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만나고 회심하는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하지만 회심 이후에도 제 삶의 구체적인 변화는 금방 눈에 띄게 나타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여전히 넘어지고 실패하는 제 모습을 보며 낙심할 때마다, 사울이 그 캄캄한 사흘 동안 엎드렸던 것처럼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뿐이었습니다. 눈앞이 가려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영적인 진전이 없어 보일 때에도, 오직 무한하신 사랑 십자가 앞에서 용서를 구하고 바라보며 끊임없이 무릎을 꿇었습니다.
처절한 그 기도의 자리에서 주님의 말씀을 구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저를 변화시키시는 것은 주님이셨습니다. 이제는 진리를 선포하는 복음을 증거하는 목사로 세워주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대단한 자격이 있거나 무언가를 잘해서 이 자리에 선 것이 아닙니다. 오직 죄인을 거룩한 그릇으로 부르신 주님의 전적인 은혜이며, 그분의 특별한 계획 속에서 저를 오래 참음으로 변화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저를 계속해서 기도의 자리로 부르셨습니다.
또한 주님은 제가 흔들릴 때마다 기도의 자리에서 동역자들을 보내어 영적인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학창 시절의 친구들을 통해, 교회의 집사님들과 장로님들의 손길을 통해 저를 붙드셨고, 앞서 걸어가신 신실한 목회자 선배님들을 통해 말씀의 바른 길을 걷게 하셨습니다. 또한 무엇보다 인생의 가장 소중한 배우자를 만나 사명의 길을 신실하게 다시 걸어갈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이들 모두가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 속에서 저를 돕기 위해 파송된 ‘아나니아’와 같은 축복의 통로들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내 삶이 변화되지 않는 것 같아 조급하고 "내가 정말 그리스도인답게 살고 있는가" 혼란스러울 때, 다른 사람들의 신앙과 삶을 비교하며 낙심하지 말고 말씀 앞에 엎드려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를 시작하십시오. "주님, 제 영적인 눈을 열어 주옵소서. 내 감정이나 느낌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의 말씀을 보게 하옵소서." 정직하게 내 무능함을 고백하며 기도할 때, 성령께서 우리 영혼의 비늘을 벗겨주시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밝히 깨닫게 하실 줄 믿습니다.
또한 주님은 기도하는 동역자들 통해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은 교회의 지지와 도움과 기도 없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반드시 기도하는 자들을 통해, 교회와 주님을 섬기는자들을 통해, 택함 받은 그릇을 세우십니다. 신앙의 성숙과 변화는 혼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함께 이루어져 갑니다. 교회는 함께 지어져가고 세워져갑니다. 모이기에 힘쓰고 함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고 함께 예수님을 따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서로 신앙의 어려움들을 나누고 교제하며 진실한 마음으로 함께 높여주고 세워줍니다!
그 시작이 언제나 기도였습니다! 모이기에 힘쓰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고 병든자를 고치시며 귀신들린자를 쫓아내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다면 보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십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를 그대로 내버려두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능력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살게 하십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착한 일을 실천하고 복음을 증거하는 공동체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런 믿음으로 함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 귀한 청년회가 예배가 살아나고, 함께 신실하게 섬기며, 나만을 위해 살던 이기적인 마음들과 생각들을 버리고 서로의 생명을 살리고 위로하며 사랑하는 놀랍게 변하는 청년회는 함께하는 기도로 되는 줄 믿습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못하실 것이 없으십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면 반드시 놀랍게 변화시켜주실 것입니다!

나는 특별한 계획 속에 택함 받은 그릇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성령으로 영적인 눈을 뜬 사울은 이제 자신이 ‘예수님의 특별한 계획’ 속에 있는 택한 그릇임을 확신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환경을 탓하거나 사람의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고, 부르신 자리에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담대히 선포하는 위대한 사명자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행복한 청년 여러분, 우리는 무언가 드라마틱하고 화려한 신앙의 기준을 만들어놓고,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나의 평범한 일상을 보며 스스로를 정죄할 때가 참 많습니다. "나는 이래서 안 되고 저래서 은혜가 없다"며 신앙의 문턱을 스스로 높이고 낙심합니다. 그러나 결코 낙심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대단해 보이지 않는 여러분의 지극히 평범한 일상 속에 이미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계획을 두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매일 출근하는 직장, 땀 흘려 공부하는 캠퍼스, 운동하고 취미를 즐기는 그 평범한 일상의 무대가 바로 토기장이이신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배치하신 거룩한 예루살렘이요 다메섹입니다. 여러분들 안에는 예수님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 여러분들은 있습니다. 구원의 길을 책임지시는 부활의 주님이 함께 하시니 안전합니다. 그러니 일상에서 가르쳐주신 말씀들을 믿고 행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특별한 계획 속에 여러분들은 귀한 보배를 담은 그릇입니다. 함께 고백할까요? “하나님은 나를 일상이라는 무대 위 특별한 계획 속에서 택하신 거룩한 그릇입니다.”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담겨져 있기 때문니다.”
여러분이 일상에서 행하는 진실한 말 한마디, 손해를 보더라도 정직하게 행하는 행동, 연약한 지체를 향해 베푸는 환대와 자비를 통해, 세상은 "저 사람의 삶에는 확실히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이 있구나"라는 위대한 변화를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변화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여러분의 삶을 변화시키시며, 그 변화된 삶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하실 것입니다!
이번 한 주간, 다른 이들의 특별함에 치여 조급해하지 말고, 나를 특별한 계획 속에 택한 그릇으로 부르신 주님의 주권을 온전히 신뢰하십시오. 매일의 삶 속에서 말씀과 기도로 영적인 눈을 번쩍 떠서, 나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통치를 대면하고, 주님의 택한 그릇답게 당당하고 거룩하게 승리하는 행복한 청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찬양 - 내 앞에 주어진 (A1- A2-B-A2-B-C-D)
[함께 기도]
막막한 신앙생활 가운데 비교되거나 낙심할 때, 기도하겠습니다. 주님만을 의지하겠습니다. 나를 주권적으로 택하신 예수님의 특별한 계획을 믿습니다! 저를 거룩한 그릇으로 변화시켜 주옵소서! 내 안에 주님이 가득하여 생명을 전하는 거룩한 그릇으로 사용하여 주옵소서!
함께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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