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운전대를 쥐려는 치명적 착각
Notes
Transcript
경배와 찬양(20분): 브리스가 찬양팀
예배를 위한 통송기도:
대표기도: OOO 권사님
(※ 반주 잠잠 멘트X 기도시작)
찬양: (※ 짧으면서도 깊은 임재 찬양)
① 사랑해요 목소리 높여
환영: 수요예배에 나오신 성도님 한 분, 한 분을 축복합니다.
광고:
① 주보를 참고하시겠습니다.
②
③ (헌금이 있을 시 기도)
성경봉독: 다같이 일어나셔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교독하겠습니다.
1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2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설교(30분):
오늘 설교 전, 한 가지 장면을 그려보려고 합니다.
차를 몰고 낯선 곳을 찾아갈 때, 우리는 내비게이션을 켭니다. 그 작은 기계는 길을 다 알고 있어요. 어디서 막히는지, 어디에 사고가 났는지, 어디로 돌아가야 빠른지 훤히 알고 있어요. 그런데 운전을 하다 보면 이런 마음이 슬그머니 올라올 때가 있는데요. "아니, 이 길이 더 빠른데. 내가 여길 좀 아는데.” 그러고는 안내를 무시하고 핸들을 내 마음대로 꺾어버립니다. 그 끝이 어떻습니까? 길을 잃고, 시간은 더 걸리고, 마음은 더 불안해집니다. 저는 이러한 불안을 잘 알아요. 부교역자로 있으면서 어디 장례가 있거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때마다 운전을 하게 되는데요. 그때마다 이쪽으로 가야 한다. 저쪽으로 가야 한다고 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분명 나는 네비를 켜고 가는데, 이 길을 잘 아신다는 거죠. 그럴 때 불안합니다. 담임목사님보다 장례식장에 늦게 도착하면 안되거든요. 분명히 더 잘 아는 안내자가 있는데, 내가 운전대를 쥐겠다고 고집을 부린 결과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런 모습은 운전할 때만 있지 않습니다. 아주 오래전, 에덴동산에서 똑같이 벌어졌는데요. 우리는 흔히 아담과 하와의 죄를 가볍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먹음직스러운 과일 하나 못 참고 따먹은 것” 정도로 말이죠. 그런데 정말 그게 다였을까요? 오늘 본문 속으로 들어가, 그 사건의 진짜 정체를 함께 살펴 보겠습니다.
첫째, 운전대를 넘보게 하는 속삭임 — "그 한마디쯤이야"라는 착각입니다
첫째, 운전대를 넘보게 하는 속삭임 — "그 한마디쯤이야"라는 착각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뱀이 하와에게 처음 던진 말을 보십시오.
1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그런데 하나님이 정말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는 다 먹되, 단 하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만 먹지 말라" 하셨습니다. 넘치도록 베푸신 말씀이었어요. 그런데 뱀은 그 말씀을 아주 살짝 비틉니다. "다 먹되 하나만”을, “다 먹지 말라더냐"로 바꿔버립니다. 하나님을 마치 인색하고 억압하는 분처럼 슬쩍 그려놓은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어요. 성경은 이 뱀을 "간교하다”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이 말은 본래 양날의 칼 같은 단어입니다. '눈치가 빠르고 똑똑하다'는 좋은 뜻으로도 쓰이거든요. 그 똑똑함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다만 사탄이 그 약고 똑똑한 성향을 이용한 거지요. 그리고 뱀은 한 걸음 더 나갑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죽으리라” 하신 그 말씀을, 부정하는 말 하나만 슬쩍 앞에 붙여서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로 정반대로 뒤집어 버린 겁니다.
성도 여러분, 보십시오. 사탄은 하나님 말씀을 통째로 부정하지 않아요. 그렇게 하면 우리가 금방 알아챌 테니까… 대신 살짝 비틀고, 살짝 의심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이 정말 그렇게까지 말씀하셨을까?" 바로 그 작은 의심 한 방울이, 우리가 운전대를 넘보게 만드는 첫걸음이 되는 겁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을까요? 처음부터 크게 무너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 정도쯤이야", "한 번쯤이야", "이런 건 괜찮겠지.” 그 작은 한마디에서 시작됩니다. 말씀을 슬쩍 비트는 그 한마디쯤이야, 하는 착각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는 것이죠.
둘째, 운전대를 쥐려는 진짜 욕심 — "내가 왕이 되겠다"는 착각입니다
둘째, 운전대를 쥐려는 진짜 욕심 — "내가 왕이 되겠다"는 착각입니다
자, 그러면 뱀의 유혹, 그 한복판에는 무엇이 있었을까요. 뱀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성도 여러분, 여기가 핵심이에요. 문제는 배고픔이 아니었습니다. 단순이 저 과일 먹고 싶다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과 같이 되어” — 바로 이것이었죠.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있는데요. 뱀이 말한 "하나님과 같이”의 그 '하나님'은, 본문 앞부분에 나오는 참 되신 하나님과는 미묘하게 다른 결을 가진 표현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하와는 '참 하나님처럼’ 높아지는 줄로 알았는데, 실제로는 속아서 엉뚱한 자리로 끌려 내려간 거에요. 그래서 나중에 하와가 뭐라고 합니까.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뭐했다… ‘속았다’는 겁니다. 높아진 게 아니라 속아서 떨어졌다는 거에요.
그리고 "선악을 안다”는 이 말도 그냥 지식을 얻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옛날에 선과 악을 판단하고 다스리는 일은 왕이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처럼 되어 선악을 알게 된다”는 건, 곧 "네가 왕의 자리에 앉으라"는 말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그 왕좌에서 끌어내리고, 내가 그 자리에 앉겠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선악과 사건은 식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건 반역이에요. 한 가지 비유를 들어보겠습니다.
모든 신하가 왕 앞에 엎드려 있는데, 혼자 일어서서 말해요. “내가 왜 당신한테 절을 해야 합니까. 당신이 나한테 절하시오”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반역이라고 부릅니다. 마찬가집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겠다" 하는 것 — 성경은 그걸 ‘죄’라고 부릅니다. 이것이 원죄의 본질인 것이죠.
그렇다면 우리가 왜 예수님을 잘 믿지 못합니까? 왜 자꾸 주님께 다 맡기지 못합니까. 바로 여기에 답이 있습니다. 내 인생의 결정권이 나에게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내 인생은 내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 깊은 곳에, "내가 왕이 되겠다”는 그 옛날의 착각이 여전히 살아 있는 겁니다.
네비게이션이 잘못된 길이라 그렇게 말하는데도 이전 기억만 믿고 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 길이 이제 없어졌는지도 모르고 말이죠. 또는 새로운 길이 생겼는지도 모르고 말입니다.
셋째, 운전대를 쥔 자의 끝 — "이제 자유롭다"는 착각입니다
셋째, 운전대를 쥔 자의 끝 — "이제 자유롭다"는 착각입니다
그러면 운전대를 쥔 사람은 정말 자유로워졌을까요. 뱀은 분명히 약속했습니다. "눈이 밝아질 것이다.” 그런데 보세요. 아담과 하와가 그 열매를 먹고 정말 눈이 밝아졌습니다. 그런데 그 밝아진 눈으로 처음 본 것이 뭐에요? 자기들의 벌거벗은 몸이었습니다. 부끄러움이었어요. 자유가 아니라 수치가, 평안이 아니라 두려움이 찾아온 겁니다.
여기에 성경의 깊은 묘미가 하나 숨어 있는데요. 3:1에 나오는 뱀의 그 '간교함’을 가리키는 말과, 2:25에 나오는 인간의 '벌거벗음’을 가리키는 말이, 그 발음이 서로 닮아 있습니다. 3:1의 간교함은 ‘아룸’이라 발음하고, 2:25에 나오는 벌거벗음은 ‘아롬’이라고 발음하거든요.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 교활한 속삭임을 따라간 끝이 결국 부끄러움이더라. 뱀은 우리가 얻을 것만 말했지, 잃을 것은 끝내 감추었던 거에요.
성도 여러분, 운전대를 쥐면 자유로울 줄 알았는데, 도리어 평생 불안에 묶입니다. 우리 삶을 한번 돌아봅시다. 우리는 더 많이 쥐려고 합니다. 노후를 내 손으로 더 철저히 대비하려 하고, 자녀의 앞길을 내 뜻대로 더 단단히 붙들려고 해요. 그런데 신기해요. 더 꽉 쥐려고 할수록, 불안은 줄어들기는커녕 더 커집니다. 내 손에 쥔 것이 많아질수록, 그것을 잃을까 봐 더 떨게 됩니다. 운전대는 우리에게 결코 평안을 주지 못합니다. 이것이 죄가 우리 인생에 남긴 깊은 자국입니다.
마치며
마치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한 가지 길을 따라왔습니다. "그 한마디쯤이야” 하는 작은 속삭임에서 시작해서, "내가 왕이 되겠다”는 욕심으로 나아가고, 마침내 "이제 자유롭다”는 거짓 약속에 이르는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의 끝은 자유가 아니라 수치였고, 평안이 아니라 불안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이 시대를 볼까요? 우리가 어릴 적… 자랄 때는, 내 뜻보다 부모의 뜻, 어른의 뜻, 공동체의 뜻을 먼저 생각하라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한 세대가 지나는 사이에, 세상의 공기가 완전히 바뀌었어요. 지금은 "내 인생은 내 것”, "내가 알아서 결정한다”는 말이 아주 당연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가만 보면, 창세기 3장의 그 유혹이 이제는 온 세상의 공기가 되어버린 거에요. 그러니 우리 자녀들, 손주들을 정죄하기 전에, 먼저 그들을 위해 무릎 꿇고 기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시대의 공기를 마시며 살아가는 다음 세대를 위해서 말이죠.
그러면 이 치명적인 착각에서 우리는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을까요? 여기에 복음이 있습니다. 보십시오. 운전대를 쥐려다 모든 것을 망가뜨린 우리와는 정반대로 사신 한 분이 계세요. 예수님이십니다. 첫 사람 아담은 하나님의 자리를 탐냈지만, 둘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님은 끝까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운전대를 단 한 번도 빼앗지 않으셨어요.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그 예수님이 우리가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반역의 값을, 십자가에서 대신 다 치르셨다는 겁니다.
사실 하나님은 이미 그 옛날 에덴에서, 인간이 무너진 바로 그 자리에서 약속을 주셨습니다. "여자의 후손이 네 머리를 상하게 하리라." 우리가 죄로 모든 것을 망가뜨린 그 자리에, 하나님이 먼저 구원의 약속을 심어두신 겁니다. 우리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어요.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라, 우리가 찾아낸 것이 아니라, 그분이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복음입니다. 내가 갚을 수 없는 빚을 그분이 갚으셨고, 내가 끊을 수 없는 죄의 사슬을 그분이 끊으셨습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그 무거운 운전대를 내려놓읍시다. 평생 내가 쥐고 떨었던 그 핸들을, 길을 다 아시는 참 주인이신 주님께 다시 내어드립시다. 내가 왕이 되겠다고 했던 그 교만한 마음을 오늘 회개하고, 다시 주님의 다스림 안으로 들어갑시다. 그때 비로소 우리가 선 그 자리가, 불안의 자리가 아니라 평안의 자리, 하나님 나라가 되는 겁니다.
이제 우리, 이 고백을 담아 함께 찬양하기를 원합니다.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을 주님 앞에 내려놓는, 그 깊은 고백의 찬양으로 나아가겠습니다.
새김찬양: 내가 주인 삼은
새김기도: 주님, 제 마음을 열어 주셔서 말씀을 따를 수 있도록 성령님 역사해 달라고 기도하시겠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하나님의 계획을 알고, 그 계획이 나를 통하여 이뤄지는 것은 복 중의 복입니다. 가장 최고의 복으로… 항상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옵소서. 현재 나에게 일어난 일이 이해되지 않고, 나에게 주어진 책임이 크다 느낄 때… 우연이 아니라, 계획 가운데 일어났고 주어졌다는 것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계획하신… 나를 굽어살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겠습니다.
개인기도하시다가 자유롭게 귀가하시겠습니다.
우리 주의 이름 크게 한 번 부르시고 기도하겠습니다.
다같이 주님 가르쳐주신 기도로 수요예배를 마치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 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