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이 얼굴을 만날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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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이 얼굴을 만날때

창세기 33:1–11 NKSV
1 야곱이 고개를 들어 보니, 에서가 장정 사백 명을 거느리고 오고 있었다. 야곱은, 아이들을 레아와 라헬과 두 여종에게 나누어서 맡기고, 2 두 여종과 그들에게서 난 아이들은 앞에 세우고, 레아와 그에게서 난 아이들은 그 뒤에 세우고, 라헬과 요셉은 맨 뒤에 세워서 따라오게 하였다. 3 야곱은 맨 앞으로 나가서 형에게로 가까이 가면서, 일곱 번이나 땅에 엎드려 절을 하였다. 4 그러자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끌어안았다. 에서는 두 팔을 벌려, 야곱의 목을 끌어안고서, 입을 맞추고, 둘은 함께 울었다. 5 에서가 고개를 들어, 여인들과 아이들을 보면서 물었다. “네가 데리고 온 이 사람들은 누구냐?” 야곱이 대답하였다. “이것들은 하나님이 형님의 못난 아우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들입니다.” 6 그러자 두 여종과 그들에게서 난 아이들이 앞으로 나와서, 엎드려 절을 하였다. 7 다음에는 레아와 그에게서 난 아이들이 앞으로 나와서, 엎드려 절을 하였다. 마지막으로 요셉과 라헬이 나와서, 그들도 엎드려 절을 하였다. 8 에서가 물었다. “내가 오는 길에 만난 가축 떼는 모두 웬 것이냐?” 야곱이 대답하였다. “형님께 은혜를 입고 싶어서, 가지고 온 것입니다.” 9 에서가 말하였다. “아우야, 나는 넉넉하다. 너의 것은 네가 가져라.” 10 야곱이 말하였다. “아닙니다, 형님, 형님께서 저를 좋게 보시면, 제가 드리는 이 선물을 받아 주십시오. 형님께서 저를 이렇게 너그럽게 맞아 주시니, 형님의 얼굴을 뵙는 것이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듯합니다. 11 하나님이 저에게 은혜를 베푸시므로, 제가 가진 것도 이렇게 넉넉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제가 형님께 가지고 온 이 선물을 기꺼이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야곱이 간곡히 권하므로, 에서는 그 선물을 받았다.
며칠전 한 청년과 2시간 가까이 상담 통화를 했습니다. 상담을 요청한 이유는 몸과 마음이 심하게 망가졌다며 상담을 요청했습니다.
6살때부터 자신에게 있었던 처절한 삶의 이야기들을 들려주기 시작했습니다.
말로 다할 수 없었던 상처, 괴로운 이야기들 그로 인해 생긴 자신의 잘못된 태도, 몸의 질병 등
어찌보면 모든 이야기가 실패요 아픔이요 정상적으로 살기 너무 힘들다는 이유들이었습니다.
통화를 하는 내내 저는 고민을 동시에 했습니다.
이 아이에게 내가 무슨 말을 해 줄 수 있을까. 이렇게 큰 어려움을 겪었고 여전히 그로 인해 평범하지 않은 길을 가는 이 친구에게 어떤 조언을 해 줄 수 있을까하며 이야기를 들으면서 딴 생각을 했습니다.
드디어 그의 말이 끝나고 제가 한 말은 “그래서 지금은 어때?”였습니다.
청년이 무엇이라고 말했을까요.
"목사님, 그런데 이상하게요. 제가 제 처절함을 솔직하게 다 말하고 나니까, 그리고 더 이상 저를 과대평가하지 않게 되니까... 이제 좀 괜찮아진 것 같아요."
저는 그 말을 들으며 가만히 있었습니다. 무어라 더 보탤 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더 좋게 보이려 애쓰는 것을 멈추고,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는 것. 한국 사회의 우리에게 그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요.
요즘 다양한 모임을 관리하면서 30대, 40대를 살아내고 있는 분들의 얼굴을 봅니다. 청년의 자리에 서 있는 분들, 장년의 자리에 서 있는 분들의 얼굴을 봅니다. 그 얼굴들에는 말하지 못한 마음들이 너무 많이 담겨 있습니다.
직장에서의 무력감, 가정에서의 외로움, 자녀에 대한 미안함, 부모에 대한 부담,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 다 말하면 무너질 것 같아서, 말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사회학자 김찬호 선생님은 우리 시대를 "모멸감의 시대"라고 부르셨습니다. 일상 곳곳에서 우리는 작은 모멸들을 견디며 살아갑니다. 그러면서 점점 자기 자신과도 멀어집니다.
오늘 본문 속의 야곱이 꼭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가 어떻게 자기 자신과, 하나님과, 그리고 형과 화해하게 되었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이 아침, 우리는 그 화해의 자리에 함께 서 보려 합니다.

1. 야곱이라는 사람 — 도망쳐 온 이십 년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잠시 그 앞에 있었던 이야기를 돌아봐야 합니다.
야곱은 본래 "발뒤꿈치를 잡은 자"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히브리어로 '야아콥(יַעֲקֹב)'은 '발뒤꿈치(עָקֵב, 아케브)'에서 온 말인데, 비유적으로는 '속이는 자, 가로채는 자'라는 뉘앙스를 품고 있습니다. 이름이 곧 운명이 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형 에서의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으로 가로챘고, 아버지 이삭을 속여 형의 축복을 빼앗았습니다. 그리고 형이 자기를 죽이려 한다는 말을 듣고 도망쳤습니다.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거기서 그는 이십 년을 살았습니다.
이십 년이라는 시간이 어떤 시간이었을까요. 본문은 그 시간을 화려한 성공의 시간으로 그리지 않습니다. 야곱은 라반에게 속고, 또 속고, 또 속았습니다. 자기가 누군가를 속였던 그 죄가, 그대로 자기에게 돌아왔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가족을 이루고 가축을 늘리며 큰 재산을 모았지만,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의 내면 깊은 곳에는 풀리지 않은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형 에서. 자기가 속였던 형. 자기를 죽이려 했던 형. 이십 년 동안 등 뒤에 짊어지고 다닌 죄책감.
소설가 박완서 선생님이 한 인터뷰에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도망쳐 온 자리가 점점 더 또렷해진다." 젊어서는 잊을 수 있었던 것들이, 어느 순간부터 자꾸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외면해 왔던 자기 자신의 얼굴이, 거울 속에서 점점 또렷해집니다.
야곱에게도 그런 때가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제 네 본토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는 그 부르심을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평생 도망쳐 왔던 그 자리로, 이제는 돌아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돌아가는 길목에서, 야곱은 한 강을 건너야 했습니다. 얍복 강입니다.

2. 얍복 강에서 — 자기 자신과의 씨름

창세기 32장의 한밤중을 우리는 함께 떠올려 봅니다.
야곱은 가족과 모든 소유를 강 건너편으로 보내고, 홀로 남았습니다. 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창세기 32:24 “24 뒤에 홀로 남았는데, 어떤 이가 나타나 야곱을 붙잡고 동이 틀 때까지 씨름을 하였다.”
여기서 '씨름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아바크(אָבַק)'입니다. 이 단어가 흥미로운 것은, '먼지(אָבָק, 아바크)'와 같은 어근에서 왔다는 점입니다. 즉, 먼지가 풀풀 일도록 격렬하게 엉겨붙는 몸싸움입니다. 그저 잠시 다투는 것이 아닙니다. 밤새도록, 온몸을 다해, 서로의 무게를 견뎌야 하는 그런 씨름입니다.
야곱은 그날 밤 누구와 씨름한 것일까요?
본문은 '어떤 사람'이라고만 말합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그가 천사였다고 말합니다
호세아 12:4 “4 야곱은 천사와 싸워서 이기자, 울면서 은총을 간구하였다. 하나님은 베델에서 그를 만나시고, 거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야곱 자신은 새벽이 되어서야 그가 하나님이셨음을 깨닫습니다. 그런데 신학자들은 이 장면을 또 다른 차원에서 읽기도 합니다. 이 씨름은 야곱이 자기 자신과 벌이는 씨름이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이십 년 동안 외면해 온 자기. 속이는 자였던 자기. 도망쳐 온 자기. 그 자기와 정면으로 마주해야 하는 밤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동시에 자기 자신과의 만남이었습니다.
씨름 끝에 그 어떤 사람이 야곱에게 묻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 질문은 단순한 질문이 아닙니다. 야곱은 일찍이 아버지 이삭이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나는 에서입니다"라고 거짓말을 했던 사람입니다.
창세기 27:19 “19 야곱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저는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입니다.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하였습니다. 이제 일어나 앉으셔서, 제가 사냥하여 온 고기를 잡수시고, 저에게 마음껏 축복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창세기 27:24 “24 이삭은 다짐하였다. “네가 정말로 나의 아들 에서냐?” 야곱이 대답하였다. “예, 그렇습니다.””
그 거짓말이 그의 평생을 결정지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다시, 같은 질문이 그에게 옵니다.
창세기 32:27 (NKSV)
27  그가 야곱에게 물었다.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이 대답하였다. “야곱입니다.”
이번에 야곱은 무엇이라고 답합니까? "야곱입니다."
그는 처음으로, 자기 자신의 이름을 정직하게 말합니다. "나는 야곱입니다. 발뒤꿈치를 잡은 자, 속이는 자, 가로채는 자, 그게 바로 나입니다." 자기 자신을 더 이상 위장하지 않는, 그 정직한 한 마디.
그리고 바로 그때, 새 이름이 주어집니다. "
창세기 32:28 “28 그 사람이 말하였다. “네가 하나님과도 겨루어 이겼고, 사람과도 겨루어 이겼으니, 이제 네 이름은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다.””
자기 자신을 정직하게 인정한 순간, 새로운 이름이 옵니다. 새로운 정체성이 옵니다.
그러나 그 새 이름과 함께, 야곱은 평생 절뚝거리며 살게 될 상처도 함께 받습니다. 그 어떤 사람이 야곱의 환도뼈를 쳤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더 이상 예전처럼 걸을 수 없게 됩니다.
저는 이 장면이 참 깊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과 마주한 사람은, 상처 없이 그 자리를 떠날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과 정직하게 마주한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언가가 깨지고, 무언가가 부서지고, 그러면서 무언가가 새로 만들어집니다.
문학평론가 신형철 선생님은 어느 글에서 이렇게 쓰셨습니다. "상처는 우리를 부수지만, 동시에 우리를 깊게 만든다." 야곱의 절뚝거림은 그의 약함의 표시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과 마주했다는 표시이고, 자기 자신과 화해했다는 표시입니다.
그 청년이 제게 했던 말이 다시 떠오릅니다. "제 처절함을 솔직하게 다 말하고 나니까, 이제 좀 괜찮아진 것 같아요." 자기 자신과 정직하게 마주한 사람의 얼굴은, 이상하게도 평안합니다. 부서졌는데, 평안합니다.

마침내 형의 얼굴 앞에서

이제 우리는 비로소 오늘의 본문 앞에 섭니다.
날이 밝았습니다. 야곱은 절뚝거리며 강을 건넙니다. 그리고 저 멀리, 형 에서가 사백 명의 사람을 거느리고 오는 것을 봅니다. 이십 년을 미루어 왔던 그 만남이, 마침내 눈앞에 와 있습니다.
본문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창세기 33:1–4 “1 야곱이 고개를 들어 보니, 에서가 장정 사백 명을 거느리고 오고 있었다. 야곱은, 아이들을 레아와 라헬과 두 여종에게 나누어서 맡기고, 2 두 여종과 그들에게서 난 아이들은 앞에 세우고, 레아와 그에게서 난 아이들은 그 뒤에 세우고, 라헬과 요셉은 맨 뒤에 세워서 따라오게 하였다. 3 야곱은 맨 앞으로 나가서 형에게로 가까이 가면서, 일곱 번이나 땅에 엎드려 절을 하였다. 4 그러자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끌어안았다. 에서는 두 팔을 벌려, 야곱의 목을 끌어안고서, 입을 맞추고, 둘은 함께 울었다.” , 새번역
본문의 한 장면 한 장면이 마치 잘 그려진 그림 같습니다. 천천히 들여다봅시다.

"야곱 자신은 그들의 앞에 서서 나아가는데"

야곱은 자기 가족 뒤에 숨지 않습니다. 자기를 가장 안전한 자리에 두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맨 앞에 세웁니다. 만약 에서가 여전히 분노에 차 있다면, 그 분노가 가장 먼저 닿을 자리에, 야곱이 섭니다.
이것은 이십 년 전의 야곱이 결코 할 수 없었던 일입니다. 이십 년 전의 야곱은 형을 피해 도망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얍복 강에서 자기 자신과 화해한 야곱은, 이제 자기 책임을 자기가 집니다. 도망치지 않습니다. 숨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을 앞에 세웁니다.
자기 자신과 화해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행동입니다. 자기 자신을 받아들인 사람만이, 자기 책임을 정직하게 질 수 있습니다.

"일곱 번 땅에 엎드려서 절을 하였다"

여기서 '엎드려 절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샤하(שָׁחָה)'입니다. 단순히 인사로 고개를 숙이는 것이 아니라, 온몸을 땅에 던지는 절입니다. 고대 근동에서 왕에게 바치는 가장 깊은 경배의 자세입니다. 그것을 야곱은 형 앞에서, 일곱 번 합니다.
'일곱'이라는 숫자는 성경에서 완전함을 의미합니다. 야곱은 형 앞에서 완전한 항복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형님, 내가 잘못했습니다. 내가 빼앗았던 그 자리를, 이제 형님께 돌려드립니다. 형님이 형입니다. 내가 동생입니다."
이십 년 전, 야곱이 가로채려 했던 것이 바로 형의 자리였습니다. 장자권. 축복권. 그런데 이제 야곱은 그 자리를, 일곱 번 절하며 형에게 돌려드립니다.
그리고 보십시오. 자기를 낮춘 사람만이, 진짜로 자기 자리에 설 수 있습니다. 이상한 역설입니다.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아 안고, 목을 끌어안고서, 입을 맞추었다"

이 장면이 본문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리입니다.
야곱은 일곱 번 절하며 다가갑니다. 그런데 에서는 어떻게 합니까? 달려옵니다. 그리고 동생을 끌어안고,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춥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함께 웁니다.
이십 년의 원망이, 이십 년의 분노가, 이십 년의 그리움이, 그 한순간에 다 풀립니다. 형도 동생도, 함께 웁니다.
저는 이 장면을 읽을 때마다 누가복음 15장의 탕자 비유가 겹쳐 보입니다. 아버지가 멀리서 아들을 보고 달려와서,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는 그 장면
누가복음 15:20 “20 그는 일어나서,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먼 거리에 있는데, 그의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서, 달려가 그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같은 단어, 같은 구조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창세기 33장의 이 장면을 마음에 두고 그 비유를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에서의 품은 곧 하나님 아버지의 품의 그림자입니다. 그래서 곧이어 야곱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창세기 33:10 “10 야곱이 말하였다. “아닙니다, 형님, 형님께서 저를 좋게 보시면, 제가 드리는 이 선물을 받아 주십시오. 형님께서 저를 이렇게 너그럽게 맞아 주시니, 형님의 얼굴을 뵙는 것이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듯합니다.” 새번역
이것이 오늘 본문에서 가장 깊은 한 마디입니다. "형님의 얼굴이, 하나님의 얼굴 같습니다."

얼굴 : 마주한다는 것의 신비

여기서 우리는 잠시 멈춰서 '얼굴'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합니다.
본문에서 '얼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파님(פָּנִים)'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가 본문에 여러 번 반복됩니다. 야곱은 이미 얍복 강에서 그곳의 이름을 '브니엘(פְּנִיאֵל)' —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 — 이라고 지었습니다
창세기 32:30 “30 야곱은 “내가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뵙고도, 목숨이 이렇게 붙어 있구나!” 하면서,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내가 하나님을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고 고백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 형 앞에서 그는 다시 말합니다. "형님의 얼굴이, 하나님의 얼굴 같습니다."
유대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평생에 걸쳐 '얼굴'에 대해 사유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타자의 얼굴은 나에게 윤리를 명령한다. 얼굴은 '나를 죽이지 말라'고 말한다."
누군가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한 사람은, 더 이상 그 사람을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얼굴은 우리에게 책임을 가져옵니다.
이십 년 동안 야곱이 외면해 왔던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형의 얼굴이었습니다. 자기 자신의 얼굴이었습니다. 그리고 사실은, 하나님의 얼굴이었습니다. 이 세 얼굴은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얼굴을 외면한 사람은, 타인의 얼굴도, 하나님의 얼굴도 마주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얍복 강에서 야곱은 마침내 자기 얼굴을 마주합니다. 그리고 그 자기 얼굴은 동시에 하나님의 얼굴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만남이 그를, 마침내 형의 얼굴 앞에 설 수 있게 합니다.
자기와의 화해, 하나님과의 화해, 그리고 타자와의 화해. 이 셋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하나가 일어나면 다른 둘도 일어납니다. 하나가 막히면 다른 둘도 막힙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기도가 우리 마음에 들려옵니다. 요한복음 17장의 대제사장 기도입니다.
요한복음 17:21–22 “21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어서 우리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 그래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여 주십시오. 22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영광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인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 새번역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두고 마지막으로 기도하신 것은, 제자들이 '하나(헬라어 ἕν, 헨)'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 '헨'은 단순히 의견이 같다는 것이 아닙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있는 그 깊은 연합을 가리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이신 것처럼, 우리도 하나가 되는 것.
야곱과 에서의 그 포옹은, 어쩌면 예수님께서 기도하셨던 그 '하나 됨'의 작은 그림자였습니다. 자기 자신과 화해한 두 사람이, 하나님 안에서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 그것이 복음입니다.

다시, 우리의 자리로

이 본문을 묵상하면서 저는 오늘 우리의 자리를 생각합니다.
30대, 40대를 살아내고 있는 분들의 얼굴을 다시 봅니다. 그 얼굴들 뒤에 숨어 있는, 말하지 못한 마음들을 생각합니다.
어쩌면 우리도 야곱처럼 도망쳐 온 사람들인지 모릅니다. 어느 시절의 자기 자신으로부터, 어느 관계로부터, 어느 상처로부터, 어느 책임으로부터. 그 도망쳐 온 자리들이 우리 안에 쌓여 있습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본문은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돌아갈 수 있다고. 마주할 수 있다고. 화해할 수 있다고.
그 화해는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그것은 한밤중에 홀로 남는 것에서부터 시작될지 모릅니다. 모든 소유와 모든 가면을 강 건너편으로 보내고, 홀로 남아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는 그 질문 앞에 정직하게 서는 것. "저는 야곱입니다. 속이는 자였습니다. 도망쳤습니다. 그런데도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렇게 자기를 정직하게 말하는 것.
그러면 그 정직함 속에서, 하나님께서 새 이름을 주십니다. 그리고 어쩌면 평생 절뚝거리며 살아야 할 상처도 함께 주십니다. 그러나 그 절뚝거림은 부끄러움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마주했다는, 자기 자신과 화해했다는 흔적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우리는 미루어 왔던 누군가의 얼굴 앞에 설 수 있게 됩니다. 가족이든, 친구든, 동료든. 일곱 번 엎드려 절할 수 있게 됩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 그 한 마디를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가 예상하지 못했던 그 사람의 품이, 우리를 끌어안을지도 모릅니다.
에서와 야곱같이 형과 저는 쌍동이로 자라왔습니다. 쌍동이이지만 항상 형의 선택이 항상 우선인 생활을 청년때까지 하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다보니 마음속에 형을 사랑하기때문에 형에게 그 서운함의 방향이 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향해 깊이 방황 길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몇해전 가족의 일을 결정할때 말할 수 없는 서운함이 살아오면서 살아졌다고 했던 그 서운함이 송두리째 몰려와서 한동안 연락도 하지 않고 만나지도 않고 살아왔습니다.
친척 결혼식에 가야하는데, 형도 올텐데…어떻게 얼굴을 보지. 그래서 형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몇년만에 처음이었습니다. “형 미안해, 내가 너무 형을 사랑해서 서운함도 컸던 것 같애. 완전히 내 마음이 해결 된 것은 아니지만 편안하게 얼굴을 보면 좋겠다” 그리고 만나서 얼굴을 보고 끌어안고 인사를 했습니다.
오늘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마음이 참 어려웠습니다.

사회 속에서 — 복음적 삶의 모양

로마서 13장은 사회 속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삶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본문이 다다르는 마지막 자리가 어디입니까?
로마서 13:8 “8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다 이룬 것입니다.” , 새번역)
복음적 삶이란 결국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자기 자신과 화해하지 못한 사람에게서는 흘러나오지 않습니다. 자기를 미워하면서 이웃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자기를 받아들이지 못하면서 타인을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아버지…녹음, 스스로를 용서, 잘 했다.
야곱이 형 에서를 끌어안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먼저 얍복 강에서 자기 자신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가 먼저 하나님의 얼굴 앞에 섰기 때문입니다. 개인의 변화 없이 사회의 변화는 없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개인의 변화는 결코 개인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것은 반드시 관계로, 공동체로, 사회로 흘러갑니다.
우리 사회에는 야곱과 에서 같은 관계들이 너무 많습니다. 세대와 세대 사이에, 남자와 여자 사이에, 가진 자와 없는 자 사이에, 진보와 보수 사이에. 그 사이에는 풀리지 않은 이십 년의 원망이 쌓여 있습니다.
그 모든 자리에서, 누군가는 먼저 자기 자신과 화해해야 합니다. 누군가는 먼저 절뚝거리는 다리로 강을 건너야 합니다. 누군가는 먼저 일곱 번 엎드려 절해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자리입니다. 화해는 우리에게서 시작됩니다. 십자가의 자리에서 자기를 비우신 그분의 제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마지막에서 야곱은 형에게 말합니다.
창세기 33:10 “10 야곱이 말하였다. “아닙니다, 형님, 형님께서 저를 좋게 보시면, 제가 드리는 이 선물을 받아 주십시오. 형님께서 저를 이렇게 너그럽게 맞아 주시니, 형님의 얼굴을 뵙는 것이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듯합니다.”
이십 년의 어둠이 지나고, 마침내 그 아침의 빛 속에서 야곱은 형의 얼굴에서 하나님을 봅니다. 그리고 그것을 본 야곱의 얼굴에서도, 분명히 하나님의 얼굴이 비치고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이 아침, 우리도 그런 빛 속에 함께 서 있기를 바랍니다. 자기 자신과 화해한 얼굴, 하나님과 마주한 얼굴, 그리고 누군가의 얼굴 앞에 정직하게 설 수 있는 얼굴. 그 얼굴들이 모이는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기도

하나님, 우리에게도 야곱처럼 도망쳐 온 자리가 있습니다. 이십 년이든, 삼십 년이든, 평생이든.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마음들이, 우리 안에 쌓여 있습니다.
하나님, 정말로 우리가 그 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정말로 우리가 우리 자신과 마주할 수 있을까요. 정말로 우리가 절뚝거리는 다리로, 그 강을 건널 수 있을까요.
그런데 하나님, 야곱이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그럴 수 있다고, 믿어 보겠습니다.
오늘 이 아침, 홀로 남는 시간을 우리에게 허락하여 주십시오. "네 이름이 무엇이냐"는 그 질문 앞에 정직하게 서게 하여 주십시오. 정직하게 우리의 이름을 말할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 이름을, 우리도 듣게 하여 주십시오.
그리고 우리가 미루어 왔던 그 얼굴 앞에 설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일곱 번 엎드려 절할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그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하여 주십시오.
우리의 작은 화해가, 우리의 가정과 일터와 이 사회 속에서, 조금씩이라도 하나님의 나라를 비추게 하여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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