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의 바다에서 만난 폭풍 (2)_방탕한 선지자
Notes
Transcript
I. 본문 해설
I. 본문 해설
선지자 요나가 활동하던 시기는 호세아가 활동하던 시기와 거의 동시대인 북왕국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가 통치하던 시기였습니다.
단 4장에 불과한 요나서의 중요성은 분량에 비례하지 않습니다.
특히 이 요나서는 구속사적으로 선교적으로 매우 중요한 신학적 의미를 가진 예언서입니다.
그러나 이 작은 예언서는 연구자들사이에서 "요나서는 고래가 삼켜버렸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요나서를 읽는 사람들의 관심은 3일 동안 요나를 삼켰다가 토해낸 고래 이야기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예언서는 배타적인 이스라엘 중심주의 신학에서 창조주 하나님의 세계 선교 비전을 보여주는 중요한 책입니다.
또한 이 예언서의 중심 인물인 요나의 선교적 편협성과 그릇된 이스라엘 중심주의(이스라엘 센트리시즘)의 편견이 깨어지는 과정을 통해 온 우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전개를 영광스럽게 보여줍니다.
II. 절망의 바다에서 만난 폭풍
II. 절망의 바다에서 만난 폭풍
하나님은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당신의 말씀이 임하게 하심으로써 선지자로서 소명을 받게 하셨습니다(욘 1:1).
그렇게 임한 말씀의 명령은 이스라엘의 적국인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로 가서 그들에게 곧 임할 멸망, 멸망을 경고(선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A. 불순종하다.
A. 불순종하다.
첫째로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적국인 앗수르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것은 곧 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준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추측은 요나로 하여금 자신이 미워하는 원수의 나라를 어쩌면 하나님이 용서해 주실지도 모른다는 반감을 갖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산에서 욥바 항구로 내려갑니다.
이미 니느웨로 가는 북동쪽 육로 대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성경은 그 동기에 대해 흥미로운 묘사를 보탭니다.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
여기서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라는 표현이 두 번이나 반복됩니다.
이는 당시 중근동 지방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독특한 신관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지역 신(local god)의 개념입니다.
즉, 각 지역마다 그곳을 관장하고 있는 지역 신이 있어서 그 지역을 벗어나 다른 지역에 들어가면 또 다른 신에 의해서 지배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정착한 후 그토록 집요하게 이방신들을 섬겼던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즉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셨지만, 가나안 땅에서는 그 지역을 관할하여 풍요의 복을 주는 바알이나 아스다롯 같은 신이 따로 있었기에 하나님과 겸하여 그들도 섬기고자 했던 것입니다.
인생의 모든 곤궁함과 비참함의 원인은 하나님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됩니다.
요나는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지만 신학과 신앙에 있어서는 삼류였습니다.
그래서 요나 선지자는 이런 지역 신의 개념을 가지고 불순종의 길을 갔습니다.
그는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두 가지 강력한 심리적 편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선택받은 백성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는 오직 이스라엘에게만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방 민족들은 한결같이 쓰레기처럼 하찮았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버려져 멸망을 당해도 마땅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요나는 이런 심리적인 편견과 지역 신의 개념이라는 신학적 편견 때문에 선지자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대담함으로 불순종의 길을 갔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들에게는 예외 없이 사명이 있습니다.
인간은 세 번 태어난다고 합니다. 첫 번째로는 육신으로 태어나고, 두 번째로는 영혼이 다시 태어나며, 세 번째로는 사명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 은혜를 받은 신자에게는 두 가지 사명이 있습니다.
하나는 모든 성경 말씀에 기록된 대로 살아야 할 보편적인 사명이고, 또 하나는 자신이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이기 때문에 살아가야 할 자기만의 개별적인 사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영적인 은혜는 이 사명을 따라 순종하며 살 때 유지되고 더욱 풍성해집니다.
반대로 사명을 저버리고 불순종할 때 기왕에 주신 은혜는 서서히 고갈되고, 하나님과의 관계는 낯설어지고 거리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누릴 수가 없게 됩니다.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혹시 니느웨가 아닌 다시스로 가는 배표를 사기 위해 부두에 나와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이미 그 배에 올라 순풍에 득의양양하여 불순종의 길을 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주 작은 불순종은 점점 더 커다란 불순종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지금 자신을 돌아보라. 지금 불순종하고 있다면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처음 사랑할 때에 가졌던 사명의 자리로 돌아가라(계시록 2장 5절).
불순종은 커다란 불행의 원인입니다. 그러므로 불순종하지 말라.
불순종하였다면 회개하고 본래 주신 사명의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B. 환란을 당하다.
B. 환란을 당하다.
둘째로 요나는 환란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요나 한 사람의 불순종 때문이었습니다.
요나는 니느웨 대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아마도 얼마 동안은 득의양양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잠시 후 바다에는 큰 폭풍이 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불순종의 길을 가고 있는 요나를 찾으셨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에 큰 폭풍이 일어나 배가 거의 깨지게 된지라
여기서 우리말 번역 성경에서 "여호와께서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라고 번역된 부분을 히브리어 성경에서 직역하면 "여호와께서 큰 바람을 바다를 향해 발사하시" 가 됩니다.
세상 모든 바다가 아니라 요나가 타고 있는 배가 있는 바다에만 폭풍이 일어났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이 바로 요나였기 때문입니다.
선원들은 큰 폭풍으로 배가 난파당할 위기에 처하자 여기에서 벗어나고자 온갖 노력을 다하였습니다.
그들은 거센 폭풍을 견디다 못해 귀중한 화물까지 바다에 던져버렸습니다.
이처럼 사명을 버리고 불순종한 사람은 환란을 받습니다.
그런데 환란을 당한 사람은 요나 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 배에 함께 탔던 모든 사람들이 생사를 오가는 환란을 함께 겪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주신 축복의 약속이 있습니다.
그것은"...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는 약속이었습니다(창세기 12장 3절).
하나님의 자녀는 이런 방식으로 자신과 관계를 맺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 때문에 복의 근원이 되는 것이 사명입니다.
요나 또한 하나님의 자녀였습니다.
그러나 불순종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자 만민에게 복을 받게 하는 사람이 아니라 민폐를 끼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고난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죄와 상관없이 애매히 당하는 고난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어 할 때 그분을 거스르는 세상으로부터 고난과 시련을 만납니다.
이런 고난은 상을 받을 고난입니다.
또 하나는 자신의 죄 때문에 당하는 고난입니다.
이는 자신의 불순종과 죄악 때문에 고난을 당하게 되는 고난이니 이는 상 받을 일이 없는 고난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환란을 당할 때 자신의 처지가 욥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사람은 극소수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의 죄와 불순종 때문에 환란을 만납니다.
그러나 충분한 자기 반성과 성찰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죄 때문에 환란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뜻밖의 환란을 만나거나 고난이 연속될 때 신자는 마땅히 자신의 삶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어디서 은혜로부터 미끄러져 시험 속으로 굴러 떨어지게 되었는지,
무엇 때문에 시험에 떨어져 사명을 떠나 불순종하게 되었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는 즉시 방향 없이 달려가는 삶을 멈추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회개 하여야 합니다.
그렇치 않으면 환란은 계속될 것이며,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살아가는 심령의 고통은 더할 것이며,
곤고한 영혼은 끊임없이 방황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마음은 하나님의 사명을 내팽개 치고 정신은 갈피를 잡지 못하는 혼란 가운데서 이리저리 쓸려 헤매게 됩니다.
이렇게 환란을 만나 시험에 들게 되면 지성은 분별력이 떨어지게 되고, 감정은 죄의 유혹에 이끌리게 되며, 의지는 전부 다 쉽게 굴복하게 됩니다.
C. 징계를 당하다.
C. 징계를 당하다.
셋째로 요나가 징계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요나가 승선한 다시스 행 배가 폭풍을 만나고, 선원들이 죽음의 위기를 겪으며 고생한 것은 그의 불순종에 대한 대가였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요나가 취한 행동에 대해 성경은 말합니다.
…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이방신을 섬기던 뱃사공들조차 자기의 신들의 이름을 부르며 구원을 호소하였건만, 선지자라는 작자 배 밑층에서 깊이 잠들었으니 이는 육신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죄악에 빠진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환란을 불러온 장본인인 요나를 향하여 마치 포위망을 좁혀 오듯이 그를 찾으셨습니다.
마침내 선원들은 이 아픔이 누구로 말미암은 것인지 따져보기로 했습니다.
왜냐하면 노련한 뱃사공의 경험으로 볼 때 이 시기에 폭풍, 특별한 폭풍은 일상적인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제비를 뽑아 그 재앙이 누구로 말미암은 것인지를 알아보기로 했습니다.
당첨자는 요나였습니다.
...네 생업이 무엇이며 네가 어디서 왔으며 네 나라가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 하니
"네 생업이 무엇이며(사명) 네가 어디서 왔으며 네 나라가 어디며(장소)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소속)"라고 질문 공세를 퍼붓는 뱃사람들에게 마침내 요나는 자기가 누군지를 밝힙니다.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하고
요나는 먼저 자신이 히브리 사람이라고 밝힙니다. 이는 자신의 정체성의 우선순위를 말합니다.
요나는 자신의 소속이 가장 중요한 가치이자 정체성이었습니다.
요나는 자신의 민족이 신앙보다 더 중요했기에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을 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자신의 생업을 밝히며 사명을 말합니다.
요나의 정체성은 근본적으로 다 바뀌지는 않았지만 신앙에 있어서 하나님에 대한 관점이 바뀝니다.
일종의 신앙 고백과 같은 요나의 이 진술은 의미심장합니다.
환란의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이 고백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전 존재를 건 묵직한 고백이었습니다.
나는 이 구절이 요나의 새로운 신앙 고백이며, 그의 신학적인 전환(Theological Conversion)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이전의 요나에게 하나님은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우주적인 창조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시스로 도망가며 하나님의 얼굴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지금 낯선 곳에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어마무시한 폭풍의 경험을 통해 자신이 어디로 도망을 쳐도 여호와의 얼굴(face of Yahweh)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그릇된 신학 편견들 칠흑같이 어둡던 요나의 지성에 한 줄기 빛이 눈부시게 들어왔습니다.
그것은 마치 사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고 회심하는 것과 비슷한 신학적이고 철학적인 큰 전환이었습니다.
“아, 하나님은 이스라엘 한 지역을 관장하시는 그런 지역 신이 아니시구나.
바다와 육지를 모두 그분이 지으셨으며, 비록 하늘에 계시지만 온 세상과 우주를 통치하시는 여호와구나!
이제 나는 그분의 얼굴을 피할 수 없으며, 그분을 경외하지 않을 수 없구나.”
그러나 바다는 요나의 그러한 심경의 변화를 아는지 모르는지 점점 더 흉흉해지고 있었습니다.
난파를 당할 위기에 놓인 큰 폭풍이 자기로 말미암아 시작되었으니 자신이 그 배에서 사라져야지만 폭풍이 멈출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뱃사람들은 어찌하든지 요나를 살리고자 힘써 노를 저어 배를 육지로 돌리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일은 불가능하였으니 요나를 찾으시는 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깊이를 알 수 없이 출렁거리는 검푸른 바다에 던져졌고, 그러자 바다는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잠잠해졌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잠시 희미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보게 됩니다.
대속입니다. 예수님과는 질적으로 다른 면이 있지만 요나는 자신의 불순종으로 일어난 폭풍의 분노를 감당하겠다는 것입니다.
요나는 물에 던져져 죽을 뻔 했지만 예수님은 실제로 죽으셨고 온 세상의 죄의 짐을 짊어 지셨습니다.
요나는 예수님의 예표의 한 부분입니다. 요나가 할 수 없었던 것을 예수님께서 담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요나보다 크신 분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폭풍의 분노는 반항하는 선지자를 향하여 하나님의 분노를 제대로 표현했습니다.
선지자가 폭풍 속에 던져진 후 분노도 누그러졌습니다.
뱃사람들은 여기에서 조금 전의 폭풍의 분노보다 더 놀라운 경외심이 생깁니다.
그 사람들이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하였더라
뱃사람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사용합니다.
여호와는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구원하시는 언약의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뱃사람들이 단순히 폭풍에 대한 두려움으로 일시적인 종교적 회심을 경험한 것이 아닙니다.
폭풍이 멈춘 상태에서 요나 선지자의 지역신이라 여겼던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심을 알게 된 것입니다.
뱃사람들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믿음의 시작점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요나의 이방인들을 향한 반선교적인 태도가 오히려 이방인들을 회심하게 하는 역사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제 요나는 물고기 뱃속으로 들어가 이 일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불순종하여 선지자의 사명을 버리고 멀리 도망갔던 요나에게 그가 탄 배로 하여금 폭풍을 만나는 정도에 그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받을 징계가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큰 물고기에게 삼켜졌고, 요나는 그 속에서 밤낮 3일 동안 있었습니다. (요나서 1장 17절)
이것은 당신의 말씀에 불순종한 요나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였습니다.
불순종하여 욥바로 내려갔다가 배를 타고 배 밑층으로 내려갔다가 이제는 바다에 던져져 물고기 뱃속에서 바다 깊은 곳으로 내려갑니다.
사람이 근본적으로 바뀌려면 완전한 실패를 통해 자신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어떻게 물고기에게 통째로 삼켜져서 3일 동안이나 죽지 않고 생존할 수 있었을까?
이 신비한 이야기에 대한 가장 사실에 근접한 가설은 향유 고래와 같은 대형 어종에게 삼킨 바 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향유 고래는 수컷이 최대 18-21미터까지 자라고, 암컷은 16-18m까지 자라는데, 몸무게는 수컷이 35-74톤, 암컷은 20-36톤에 도달한다고 합니다.
그것이 가장 좋아하는 먹이 중 하나가 대왕 오징어인데, 이것을 잡기 위해 수심 2200미터에서 3천 미터까지 내려가 사냥을 한다고 합니다.
향유 고래의 목구멍은 사람을 통째로 삼킬 수 있으리만치 넉넉히 큽니다.
문제는 요나가 그 물고기 안에 있었던 장소입니다.
만일 그가 위 속으로 빨려들어갔으면 호흡이 불가능했을 것임은 물론이거니와 독한 산성의 위액에게 신체가 녹아버렸을 것이라는 점에는 모든 학자들이 동의합니다.
가장 유력한 가설은 작은 방만한 크기의 후두부 (hypopharynx) , 여기 후두부에 이렇게 우리가 뭐 먹다가 밥풀 걸리는 지점 있죠?
그곳의 크기가 거의 작은 방만합니다.
그래요, 거기에 갇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거기서 그는 향유 고래가 바다 위로 가끔 올라올 때마다 공기를 공급받으면서 생존했을 것으로 믿어집니다.
이러한 후두부 생존의 가설은 물고기 속에서 드렸던 요나의 기도 내용과도 부합합니다.
물이 나를 영혼까지 둘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워싸고 바다 풀이 내 머리를 감쌌나이다
비록 숨은 쉴 수 있었다고 할지라도, 끊임없이 물과 해초가 넘어 들어오는 그 물고기 후두부에서 자신이 물고기의 목구멍으로 넘겨지지 않도록, 또한 밖으로 토해지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지탱해야 하는 일은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요나는 풍랑을 통해 깨닫게 된 신학적인 충격과 거기서 비롯된 자신의 죄악에 대한 인식으로 고통하며 회개하였습니다.
그 고통스러운 징계 속에서 요나는 진정한 회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요나는 합당한 징계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사명을 팽개쳐 버리고 미친 망아지처럼 날뛰던 요나의 광기 어린 반역에 대해 하나님은 더 크고 웅장한 스케일로 징계를 하셨습니다.
요나는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6절)라고 고백합니다.
이는 자신이 유죄 선고를 받았고 자신의 죄와 반항 때문에 영원히 갇혔으며 스스로 그 문을 열거나 빚을 갚을 길이 없음을 고백합니다.
그는 징계 속에서 큰 고난을 받았고,
물고기 속에서 부르짖어 기도하였으며,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요나에게 물고기 속에서의 3일은 물고기 바깥에서 죽는 것만도 못한 극한의 공포와 고통의 연속이었을 것입니다.
순간의 불순종은 달콤하고, 잠시 사명을 버리는 것은 가볍고 쉽습니다.
그러나 그 대가로 주어지는 징계는 그 달콤함과 가볍고 쉬움을 능가합니다.
17세기 청교도 신학자 존 오웬(1676-1683)은 신자가 징계를 받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리는 특권이라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친자녀가 아니라 사생아였다면 그분은 우리를 징계하지 않고 버려두셨을 것입니다.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가장 두려운 심판은 내버려 두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상숭배자들과 동성애자들에 대해 말하면서 하나님의 내버려두심이 무서운 심판임을 경고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또한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신자들의 결국은 징계를 받는 것입니다.
그것은 매우 고통스러워서 마치 곰의 쓸개를 생으로 씹는 것과 같으니 결코 반복하고 싶지 않은 경험입니다.
지금 당신은 혹시 하나님의 징계 아래에 있지 않습니까?
저녁에 눈을 감으면 아침에 이 세상에서 눈을 다시 뜨고 싶지 않을 정도로 고통 가운데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당신을 징계하신다는 것은 아직 당신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징계 크기는 당신을 향한 사랑의 크기에 비례합니다.
사랑하실수록 엄히 징계하여 당신이 하나님께 순종하며 사명을 따라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당신이 아직 징계 아래 있지 않다고 할지라도 안심하지 마십시오.
지금 불순종의 길을 가고 있다면 곧 징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사명을 버리고 니느웨가 아닌 다시스로 가고 있다면 조만간 고통스러운 징계가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그를 경외하고, 그 사랑 안에서 친밀함을 누리는 행복을 무엇과도 바꾸지 마십시오.
D. 회개를 하다.
D. 회개를 하다.
넷째로 요나는 회개를 하였습니다.
큰 물고기 후두부에서 밤낮 3일을 보내며 하나님께 눈물로 부르짖으며 회개했습니다.
요나는 이 끔찍한 환란과 징계의 과정을 통해 자신이 여호와의 성전에서 쫓겨나는 것 같은 버림받음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그러한 경험을 통해 믿음의 손으로 하나님을 붙잡았고, 결코 놓지 않았습니다.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신자의 영혼이 가장 순수해지는 때가 두 번 있습니다.
한 번은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할 때이고, 또 한 번은 온 마음을 다해 진심으로 회개할 때입니다.
하나님은 진심으로 회개하는 자를 향해 어떠한 앙심도 품지 아니하시며 언제나 기쁘게 용서하시고 회개의 눈물에 보혈의 피로 응답하사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십니다.
요나는 두 번이나 주의 성전을 바라본다고 고백합니다.
주의 성전은 속죄소가 있는 곳입니다.
속죄소에 뿌려진 피가 속죄소 안에 담긴 십계명의 두 돌판을 덮음으로 십계명의 정죄로부터 우리를 보호합니다.
이 그림이 우리에게 복음을 알려 줍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값비싼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덮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위대한 영적 거인들은 한결같이 죄의 용서를 통해 그분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는 고백이 있습니다(딤전 1:15).
도대체 누가 완전한 사람이겠는가?
그러나 하나님께 회개를 경험한 사람이라면 누가 완전한 순종의 삶을 살고 싶지 않겠습니까?
“회개하다”라고 번역된 동사는 신약 그리스어에서 크게 두 가지 단어가 사용됩니다.
하나는 " 메타 멜로 마이” 이고 또 하나는" 메타 노에 오"라는 단어입니다.
전자는 "(감정적으로 후회하다, 뉘우치다)"라는 뜻으로 번역됩니다.
후자는 "뒤에, 후에, 다시"를 뜻하는 "메타"라는 전치사와 "생각하다, (지성으로)판단하다.” 의 뜻을 가진 " 노에 오"라는 동사의 합성어입니다.
원래 고전 그리스어에서는 이 단어에 “회개하다”라는 뜻이 없었는데, 기독교권으로 들어오면서 신약 성경에 기록된 코이네 그리스 방언에서 이런 의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원래 “메타 노에 오”라는 단어는 플라톤 철학에서 감각적인 자연 세계가 전부인 줄 알았던 인간이 천상의 이데아의 세계가 있음을 알게 되는 지성의 변화,곧 체관(intuition),인투이션에 도달하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지성의 벼락을 맞는 것과 같은 진리의 경험을 통해서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우주관, 인생관, 그리고 가치관을 갖게 되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지성, 감정, 의지의 변화를 모두 포괄하는 전인격적 개념이지만, 특별히 지성의 변화에 방점이 찍혀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한 거예요.
아무리 커다란 감정의 물결이 휘몰아치고 의지의 용감한 결단이 뒤따른다고 할지라도 지성의 뚜렷한 변화가 없다면 그것은 진정한 회개가 아닙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에게 세례를 주었던 암브로시우스(Aurelius Ambrosius c.340-397)는 자신의 회개론(De Paenitentia) 제2권에서 "죄를 반복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회개가 아니다=죄를 반복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회개가 아니다.”(Non est Paenitentia, si quae peccata non repetit) .
회개할 때 인간은 한 순간에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 죄와 용서, 사랑과 거룩함에 대해 예전에 없던 뛰어난 인식을 갖게 됩니다.
이러한 인식 안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신비"(misterium unionis cum Cristo) , 그때 자신이 회개한 죄가 마치 스스로 토해버린 구정물처럼 느끼게 되고, 예전에 사랑하던 것들이 모두 배설물처럼 느껴지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름다움(beauty of God)을 드러내시는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는 사실에 눈 뜨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구원받은 것. 다음으로 고귀한 선물은 지식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그 성품의 빛 아래서 회개함으로 반복적으로 회심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회개를 통해 영적인 세계의 지평을 넓혀가는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은혜(인자하심, 헤세드)를 보았습니다.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모든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III. 적용과 결론.
III. 적용과 결론.
우리는 정죄 받아 마땅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구원할 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려고 무한한 희생을 치러 우리를 구원하셨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불순종의 길을 갔다면 더 늦기 전에 회개합시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이웃을 우리와 함께 환란 가운데로 몰아넣지 맙시다.
징계를 당하고 있다면 생사를 걸고 하나님께 용서를 비십시오.
자신이 먼지처럼 무가치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재 위에 엎드린 마음으로 회개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중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반드시 용서하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