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but 약약
고린도전서 (SFC)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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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dout
22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23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고전9:22-23)
서론
서론
강강약약의 뜻?
강강약약의 뜻?
강강약약 샘플 1 - 가이드 러너
강강약약 샘플 1 - 가이드 러너
장애인 선수의 눈이 되어 함께 달리는 이 사람의 이름을 '가이드 러너(Guide Runner)'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아주 놀라운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이 가이드 러너들은 그냥 평범한 자원봉사자가 아닙니다. 혼자서 달리면 언제든 올림픽 메달을 따고도 남을 만큼, 압도적인 체력과 스피드를 가진 엘리트 마라톤 선수들입니다. 엄청난 ‘강자’들이죠.
그런데 이 경기에는 절대적인 규칙이 하나 있습니다. 아무리 가이드 러너의 힘이 넘쳐나도, 경기 중에 절대로 시각장애인 선수보다 단 한 발짝도 앞서 결승선을 통과하면 안 된다는 규칙입니다. 만약 가이드 러너가 먼저 들어가면? 그 팀은 즉시 실격입니다.
그는 더 빨리 달릴 수 있는 자신의 능력과 1등의 권리를 완전히 포기합니다. 그리고 오직 파트너의 보폭, 파트너의 호흡, 파트너의 속도에 철저히 맞춰서 달립니다. 자기 힘을 완벽하게 통제하며 스스로 약자가 되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파트너와 '함께 완주하기 위해서'입니다.
강강약약 샘플 2- 셰르파
강강약약 샘플 2- 셰르파
스포츠에만 이런 이들이 있는 게 아닙니다. 세계 최고봉인 히말라야 에베레스트를 오르는 산악인들 곁에는 항상 현지 길잡이인 '셰르파(Sherpa)'가 있습니다.
셰르파는 네팔에 사는 한 민족인데요, 고산 지대에 특화된 심장과 폐를 타고난 세계 최강의 등반가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산소통 없이도 히말라야를 날아다닙니다. 마음만 먹으면 외국의 유명 산악인들을 뒤로하고 혼자 정상에 훌쩍 올라가서 모든 영광을 독차지할 수 있는 압도적인 '힘'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셰르파는 결코 혼자 가지 않습니다. 초보 등반가의 느린 걸음걸이에 맞춰 자신의 속도를 늦춥니다. 등반가가 고산병에 걸리진 않을까 끊임없이 살피며, 그들의 무거운 짐을 대신 짊어지고 걸어갑니다. 셰르파의 목표는 '나 혼자 정상을 정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연약한 등반가를 살려서, 함께 정상에 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강강약약 샘플 3 - 이태석 신부
강강약약 샘플 3 - 이태석 신부
우리나라 역사에도 이런 아름다운 동행자가 있었습니다. 다큐멘터리 영화 《울지마 톤즈》의 주인공, 고(故) 이태석 신부님입니다.
이태석 신부님은 원래 의과대학을 졸업한 장래가 촉망되는 엘리트 의사였습니다. 한국에서 의사로 편안하게 살면서 부와 명예, 사회적 성공이라는 강력한 힘을 쥘 수 있는 '강자'의 조건이 다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모든 힘과 보장된 기득권을 미련 없이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고, 수십 년간 계속된 전쟁으로 상처투성이였던 아프리카 수단의 '톤즈'라는 마을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그는 단순히 의술을 베풀러 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손가락과 발가락이 문드러진 한센병 환자들의 상처를 아무렇지 않게 맨손으로 어루만졌고, 신발이 없어 상처 입은 그들의 기형적인 발 모양에 맞춰 손수 특수 가죽 신발을 디자인해 만들어 주었습니다. 밤새 고열에 시달리는 아이들의 가슴에 청진기를 대어 주었고, 전쟁의 공포로 얼어붙은 아이들의 마음을 녹이기 위해 악기를 가르치며 브라스 밴드를 만들었습니다.
의사 가운을 입고 서울의 세련된 병원에서 대접받는 삶 대신, 먼지 날리는 흙바닥 위에서 아픈 이들과 똑같이 먹고 자며 스스로 가난하고 약한 자가 된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약해진 이들의 눈높이에 자신을 완벽하게 맞추기 위해, 자신의 모든 스펙과 권리를 포기했습니다. 왜였을까요? 오직 고통받는 그 한 영혼을 살리고 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강한 이들이 약해지는 이유?
강한 이들이 약해지는 이유?
여러분, 가이드 러너와 셰르파, 그리고 이태석 신부님은 세상의 기준에서 엄청난 실력과 자격, 힘을 가진 '강자'들입니다. 그런데 왜 그들은 자기의 힘을 자랑하거나 휘두르지 않고, 스스로 느려지고, 스스로 약해지며, 스스로 기득권을 내려놓는 길을 선택했을까요?
정답은 하나입니다. "그 사람을 얻기 위해서, 그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본론
본론
내가 약한자 된 것은…
내가 약한자 된 것은…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에는 바로 이 '가이드 러너'와 '셰르파', 그리고 '이태석 신부님'처럼 살았다고 고백하는 한 남자가 등장합니다.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뭐라고 고백하는지 22절과 23절을 함께 읽어봅시다.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고전 9:22-23)
여러분, 사실 이 고백이 쓰인 배경에는 고린도 교회 안의 아주 시끄러운 갈등이 있었습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에는 "나는 지식도 많고 믿음도 강해! 그러니까 우상 신전에 차려진 고기 정도는 내 마음대로 자유롭게 먹어도 아무 상관 없어!"라고 주장하는 스스로 '강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똑똑함과 자유를 뽐내며 교만한 태도를 취했습니다.
반면, 믿음이 아직 연약하고 사회적으로도 가난해서 늘 주눅 들어 있던 '약한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며 큰 상처를 받고 시험에 들었습니다.
이때 바울은 누구의 편에 섰을까요? 바울은 원래 대단한 '스펙'을 가진 강자였습니다. 로마 시민권을 가졌고, 당대 최고 학부에서 공부한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습니다. "우상 고기 먹어도 아무 문제 없다"는 신학적 지식도 누구보다 완벽했습니다. 사도로서 사람들에게 대접받고, 재정적 후원을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법적인 '권리'도 차고 넘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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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바울은 그 똑똑한 지식과 사도로서의 권리를 다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실제 삶 속에서 진짜 약자들의 수준으로 내려갔습니다. 대접받는 자리를 포기하고, 밤낮으로 가죽을 만지며 거칠고 냄새나는 텐트를 만드는 고된 노동의 자리로 내려갔습니다. 당장 먹을 것과 입을 것이 부족해 굶주리고 헐벗으며 몸소 연약함을 겪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사도인 자신을 향해 "저 사람은 왜 저렇게 가난하고 약해 보이냐?"라고 비웃고 무시해도 묵묵히 참았습니다.
바울이 바보라서, 진짜 힘이 없어서 비굴해진 것일까요? 아닙니다! 바울은 "변하지 않는 복음의 핵심"에 대해서는 그 어떤 권력자 앞에서도 목숨을 걸고 절대 타협하지 않는 무서운 강자였습니다. 하지만 복음의 진리 외에 "중요하지 않은 문제(무엇을 먹고 마실지, 어떤 권리를 누릴지 등)에 있어서는 영혼들을 얻기 위해 깃털처럼 유연하게 나를 다 맞출 수 있는 진짜 자유"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혼자서 영적 마라톤을 질주해 1등으로 골인하는 잘난 영웅이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믿음이 연약해서 낙오할 것 같은 그 한 영혼의 손을 잡고, 그 사람의 보폭에 맞춰 하나님 나라의 결승선까지 함께 들어가고 싶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가이드 러너: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가이드 러너: 예수 그리스도
어떻게 바울은 이런 삶을 살 수 있었을까요? 사람은 누구나 조금만 힘이 생겨도 자랑하고 싶고, 남들보다 앞서 나가 군림하고 싶은 법인데 말이죠.
바울이 이렇게 기꺼이 약해질 수 있었던 진짜 이유는, 자기 인생의 완벽한 가이드 러너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바로 이 땅에 찾아오신 하나님의 '성육신', 즉 가장 완벽한 가이드 러너이셨습니다. 온 우주를 창조하신 전능한 하나님이, 죄와 사망이라는 영적 고산병에 걸려 죽어가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모든 권리와 왕관을 다 내려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저 하늘 보좌에 높이 앉아 우리를 향해 "왜 이렇게 못 뛰냐? 빨리 뛰어와라!" 하고 다그치지 않으셨습니다. 직접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가 겪는 슬픔, 아픔, 배고픔의 수준으로 완전히 내려오셨습니다. 연약한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주셨고, 상처받은 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무릎을 꿇으셨습니다. 그리고 결국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가장 무력한 약자의 모습으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이 힘이 없어서 십자가에서 못 박히셨나요? 아닙니다. 천군천사를 불러 로마 군대를 단숨에 쓸어버릴 힘이 있으셨지만, 우리와 발걸음을 맞추고 우리를 살리기 위해 그 무한한 신성의 힘을 주머니 속에 꾹꾹 눌러 담으신 것입니다. 바울은 그 십자가 사랑을 깊이 경험했기에, 자기도 이 땅에서 예수님처럼 다른 영혼들의 가이드 러너로 살겠다고 결단할 수 있었습니다.
“함께” 완주하는 삶
“함께” 완주하는 삶
오늘 본문 23절에서 바울은 아주 의미심장한 고백을 덧붙입니다.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고전 9:23)
여기서 "복음에 참여하고자 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이것은 단순히 "나중에 나 혼자 구원받아 천국 상급을 독차지하겠다"는 이기적인 목표가 아닙니다.
그 뜻은 바로 "하나님이 주실 마지막 영광과 구원의 축복을, 내가 살려낸 고린도 교회의 연약한 친구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는 고백입니다. 바울은 하나님 나라의 결승선에 혼자 헐떡이며 들어가 상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가이드 러너가 되어 손잡고 끝까지 함께 달려온 그 약한 형제자매들과 함께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결승선을 넘길 원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청소년 여러분, 오늘날 세상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강약약강'의 삶을 요구합니다. 우리가 가진 것을 무기 삼아 힘을 기르고, 나보다 조금이라도 약하거나 어리숙한 친구들을 무시하고 짓밟으며 앞서 나가라고 은근히 속삭입니다. SNS에서, 교실에서 보이지 않는 서열을 나누고 약한 친구들을 소외시키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만듭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진짜 멋진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바로 예수님처럼, 바울처럼, 복음을 위해 내 권리와 자존심을 내려놓고 친구의 보폭에 맞춰줄 줄 아는 사람입니다.
공부를 잘하는 강함이 있나요? 시험 기간에 힘들어하는 친구에게 "나 공부해야 하니까 방해하지 마"라며 혼자 앞서 달리는 것이 아니라,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 가이드 러너가 되어주십시오.
학교에서 인기가 많고 성격이 밝은 힘을 가졌나요? 소외되고 외롭게 혼자 걷고 있는 친구 곁으로 다가가 그 친구의 무거운 마음의 짐을 대신 들어주는 셰르파가 되어주십시오. 기꺼이 내 평판과 무리 속에서의 서열을 내려놓고, 그 외로운 친구의 친구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결론
결론
여러분, 세상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강해져라. 남보다 앞서가라. 너의 힘과 권리를 마음껏 누리고 자랑해라."
그러나 오늘 성경이 말하는 진짜 강함은 전혀 다른 방향을 가리킵니다. 진짜 강자는 내 힘을 자랑하고 휘두르는 사람이 아니라, 연약한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기꺼이 내 힘을 스스로 통제하며 약해질 줄 아는 사람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미 완벽한 본보기가 있습니다. 온 우주의 창조주이시면서도, 죄로 가득한 우리의 눈높이에 맞추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내려오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다그치지 않으셨고, 홀로 저 멀리 앞서가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아픔과 슬픔의 무게를 고스란히 짊어지시고, 결국 십자가에서 가장 연약한 모습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바울이 평생 자기를 무시하는 사람들 앞에서도 묵묵히 자기를 낮출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예수님의 사랑이 자기 마음에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이번 한 주간, 우리의 교실과 학원, 그리고 가정으로 돌아갈 때 이 질문을 마음에 품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내가 가진 힘을 나 자신을 뽐내기 위해 쓰고 있는가, 아니면 친구를 살리기 위해 쓰고 있는가?"
복음의 진리 앞에서는 타협하지 않는 단단한 강자가 되고, 상처받고 외로운 친구들 앞에서는 한없이 부드럽게 나를 맞추어주는 진짜 멋진 '강강약약'의 사람이 되길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