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를 위한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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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모두를 위한 예수님
제목: 모두를 위한 예수님
본문: 마태복음 9장 9-13절
본문: 마태복음 9장 9-13절
찬송: 309장 목마른 내 영혼
찬송: 309장 목마른 내 영혼
말씀의 문을 열며: 모든 사람을 품는 '하늘과 밥'의 은혜
말씀의 문을 열며: 모든 사람을 품는 '하늘과 밥'의 은혜
하나님이 창조하신 하늘은 그 누구도 독점할 수 없습니다. 부유한 자의 하늘이 따로 없고, 가난한 자의 하늘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하늘은 모든 사람을 향해 아무런 조건 없이 그 푸르른 가슴을 열어줍니다. 우리가 매일 입으로 모시는 생명의 밥 역시 모든 사람의 것이어야 합니다. 세상에 태어난 존재라면 그가 누구이든 굶주리지 않고 밥을 먹을 권리가 있습니다. 하늘과 밥, 이것은 하나님께서 온 인류에게 차별 없이 베푸시는 가장 공평하고 근원적인 생명의 선물입니다.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소개해 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바로 이 하늘처럼 모두에게 열려 있고, 밥처럼 함께 나누는 마태의 식탁을 닮았습니다. 주님의 구원은 결코 세련된 이들이나 도덕적인 의인들, 혹은 종교적인 스펙을 쌓은 특정 계층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주님이 가지고 오신 하나님 나라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허물 많은 온 세상 모든 사람을 위해 이 땅에 임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 속에서 자격 없는 자를 향해 펼치시는 주님의 거대한 식탁을 마주하게 됩니다. 이 식탁의 풍경을 통해, 우리 영혼을 향해 흐르는 한결같은 사랑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찾아온 예순님과 뒤 따른 마태 (마 9:9-10)
찾아온 예순님과 뒤 따른 마태 (마 9:9-10)
본문의 이야기는 당시 갈릴리 지역에서 가장 멸시받던 한 사람, 세관에 앉아 있던 레위 마태를 부르시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마태를 향해 눈길을 고정하시고 "나를 따르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짧고 강력한 초대 앞에 마태는 아무런 군말 없이 즉각 일어나 예수를 따랐습니다.
일생 동안 동족의 차가운 눈총과 멸시만을 견디며 침묵 속에 돈을 세던 마태의 영혼에, 주님의 음성은 깊은 어둠을 뚫고 들어오는 새벽빛과 같았습니다. 세관이라는 견고한 울타리, 그 안전하고도 탐욕스러운 자리를 단숨에 박차고 일어난 이 즉각적인 순종은 마태가 얼만 영적으로 갈급한 심령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당시 마태가 일했던 가버나움의 세관 자리는 로마 정부의 막강한 권력을 등에 업고 동족의 고혈을 짜내어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탐욕스러운 자리였습니다. 마태는 세상의 물질을 쥐었으나 영혼은 철저히 파산한 채 고립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마태는 더는 세상의 부귀영화가 부럽지 않았습니다. 구원의 은혜가, 주님이 가져오신 하나님 나라의 신비가 마태의 온 삶을 지배하던 세상의 욕망과 기쁨을 단숨에 압도해 버린 것입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이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떠났던 것보다 마태의 떠남이 더 파격적이었던 이유는, 로마가 부여한 세관원이라는 기득권은 한번 자리를 털고 일어나면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는 영구적인 결단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참된 생명의 가치 앞에, 그가 그토록 움켜쥐려 했던 금과 은은 순식간에 그 빛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 감격을 이기지 못한 마태는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여 일생일대의 거대한 잔치를 열었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누군가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여 함께 식사를 나눈다는 것은 단순히 음식을 먹는 행위 그 이상이었습니다. 그것은 서로 우정의 언약을 맺는 것이며, 상대방의 존재와 가치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인정하겠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를 통해 두 사람 사이에 있는 사회적 거리를 완전히 지워졌습니다. 따라서 마태가 베푼 잔치의 자리는 세상이 그어놓은 모든 신분 정결의 경계선이 무너져 내리는 파격의 현장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이 가득한 그 식탁에 기꺼이 누우셨을 때, 주님은 온 동네 사람들을 향해 행동으로 선포하고 계셨습니다. "나는 이들의 친구가 되기 위해 왔다."
그리고 지금 예수님과 함께 마태의 집에서 식사를 하는 죄인들은 평생 정죄와 비난의 낙인 속에서 성전 뜰조차 밟지 못했던 아주 비천한 사람들과 율법에서 부정하다 이야기한 나병환자와 혈루증 환자 등이었습니다. 중한 죄를 지은 자들이 아니라 당시 유대 사회에서 사람들이 꺼려하고 그 존재가 부정당하는 사람들이 오늘 예수님과 함께 한 식탁에서 식사를 한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실수 (마 9:11)
바리새인의 실수 (마 9:11)
그러나 이 아름답고 따뜻한 은혜의 식탁을 바라보며 분노하는 눈길이 있었습니다. 바로 종교적 순결을 생명처럼 여기던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제자들을 붙들고 날카롭게 비난합니다.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11)
그들의 눈에는 예수님의 이 파격적인 행보가 종교적 정결 규례를 무너뜨리는 부정한 행위로 보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언제나 자신들은 흠 없고 의로운 존재로 여기며, 자신들이 세워놓은 율법적 기준으로 타인을 판단하고 배제하는 배타성에 갇혀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의로움을 가지고 천국에 들어가고자 했습니다. 천국은 모든 이들의 것이 아니라 자신들처럼 율법일 잘 지키는 자들의 것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이 모든 이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천국은 모든 이들을 위해 열려 있으며 모든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가게 하기 위해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5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빌 3:5-6)였지만, 예수를 아는 것 외에는 다 필요가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사도로 살아가고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천국을 말할 수 있는 것이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다”(고전 15:10b)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바울이 이룬 업적과 바울의 배경을 살펴보면 그를 뛰어 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누구도 바리새인처럼 자신의 의를 자랑할 수도 없고, 누구도 정죄할 수 없는 죄인들이며,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가 필요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과 이 시대의 많은 사람이 이것을 인정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종합병원 대기실의 풍경을 한번 떠올려 보십시오. 그곳에는 참으로 많은 환자들이 앉아 있습니다. 접수 창구에서부터 진료실 앞까지, 각양각색의 아픔과 상처를 가진 이들이 초조하게 자신의 순서를 기다립니다. 우리는 그들을 보며 ‘어디가 아플까’ 안타까운 생각은 할 수 있지만, 그 환자의 병이 얼마나 깊은지, 과거에 어떻게 살다 아프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설령 안다 해도 "왜 건강을 안 챙겼느냐"고 다그칠 자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 역시 의사의 치료가 시급한 시한부 환자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바리새인들은 자신이 의사인 줄 착각하고 다른 환자를 정죄했습니다. 자기 영혼의 치명적인 죄의 질병은 보지 못한 채, 다른 아픈 이들을 고발한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의 거룩한 빛 아래서 정직하게 보면, 이 자리에 서 있는 저를 포함한 우리 모두는 그저 영혼의 치료자이신 예수님 앞에 줄 서 있는 동일한 환자일 뿐입니다. 우리가 가진 알량한 의로움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그저 주님의 은혜가, 하나님의 무한하신 긍휼이 임하기를 간절히 바라야만 합니다.
우리 모두를 위해 오신 의사 예수님 (마 9:12-13)
우리 모두를 위해 오신 의사 예수님 (마 9:12-13)
비난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예수님은 선포하십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12)
의사가 환자가 가득한 병원에 있어야 하듯이, 영혼의 의사이신 예수님은 고통과 신음이 있는 인생들의 삶 깊은 곳으로 친히 찾아오셨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스스로 건강하다고 착각하여 영적 교만과 자만이라는 단단한 갑옷을 입은 자들 뿐만 아니라 자신의 비참한 환부와 죄의 질병을 정직하게 대면하고 아파하는 병자들을 위해 오셨습니다.
세상의 훌륭한 의사가 고통에 신음하는 환자의 상태를 보고 찌푸리거나 추궁하지 않듯, 주님은 우리에게 청진기를 대실 때 우리가 과거에 얼마나 부끄러운 삶을 살았는지, 어떤 수치와 실수를 저질렀는지 결코 따져 묻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절박함 그 자체가 예수님의 치료가 필요함을 말하는 것들입니다.
과거의 낙인을 찍어 평생 동안 격리하고 정죄하는 냉혹한 세상의 방식과 달리, 의사이신 예수님은 우리가 주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그 순간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여주시고, 우리의 심령이 새로이 거듭나게 해주십니다. 그리고 이후로는 영원히 죄악의 고통으로부터 자유한 삶을 살라고 말씀하여 주십니다. 예수님이 이같은 은혜를 베풀어 주실 수 있는 이유는 우리의 의로움이 아닌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본문 13절에서 호세아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하여 바리새인들의 형식적인 종교 체계를 무너뜨리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긍휼(헤세드)을 원하고 제사(뒤시아)를 원하지 아니하노라."(13a)
하나님이 정말 원하시는 것은 자신의 경건함을 증명해 보이려는 알량하고 빈 껍데기뿐인 종교적 의식(뒤시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격 없는 자의 모든 수치와 아픈 과거를 온전히 덮어버리고 다시 살려내시는 하나님 자신의 신실하고 한결같은 사랑, 즉 '헤세드'의 은혜가 어떻게 하면 우리 모두에게 잘 전달되게 할 수 있을까 입니다.
제사는 인간이 하나님께 무언가를 바쳐 자격을 획득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긍휼은 아무런 조건 없이 찢어진 상처 위에 쏟아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치료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푸른 하늘을 우리 모두에게 똑같이 허락하신 것처럼, 예수님은 우리 모두의 과거의 허물을 십자가의 보혈과 한결같은 사랑으로 완전히 덮어주시는 영혼의 진정한 의사가 되어 주셨습니다. 이 예수님이 우리 모두를 위해 이 땅에 오셨음을 믿으시기를 축복합니다.
말씀의 문을 닫으며: 구주의 긍휼을 끝까지 붙잡는 삶
말씀의 문을 닫으며: 구주의 긍휼을 끝까지 붙잡는 삶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중앙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에게는 영혼의 의사이신 예수님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치료할 수 없는 연약한 병자일 뿐이며, 주님의 전적인 긍휼이 없이는 단 한 순간도 온전히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이 땅의 모든 아프고 소외된 영혼을 위해 오셨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랑은 종교적으로 완벽한 자격을 갖춘 특별한 사람들만을 위한 좁은 울타리가 아닙니다. 그 사랑은 조건이 없으며, 차별이 없고, 우리의 수치스러운 모든 과거를 아낌없이 덮어주시는 온전하고 따뜻한 하늘의 환대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 모두 스스로 선하고 괜찮은 사람인 척 감추고 있었던 우리 마음의 연약한 포장들을 다 내려놓고, 우리의 유일한 치료자이신 예수님을 온전히 믿고 따릅시다. 날마다 주님의 한결같은 은혜에 우리 영혼을 온전히 내맡기며, 우리 삶에 참된 평안과 소망을 부어주시는 주님의 신실한 제자가 되어 믿음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는 우리 중앙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거둠의 기도
거둠의 기도
참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의 모든 과거와 허물을 온전한 사랑으로 감싸 주시는 주님의 따뜻한 은혜를 마주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세상살이에 지치고 상한 마음에 하늘의 위로를 더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설 수 없는 연약한 존재이오니, 날마다 영혼의 의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따스한 만지심을 경험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자격 없는 우리 모두를 위해 이 땅에 찾아와 주신 구주 예수님의 긍휼을 끝까지 붙잡고, 날마다 주님과 함께 소망의 길을 걷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영혼의 진정한 치료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