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과 두려움을 이기는 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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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서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난 시간들을 통해 복음의 능력에 대해 함께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복음은 단지 예수 믿고 구원받는 처음 순간에만 필요한 소식이 아닙니다. 복음은 날마다 우리를 붙들고, 날마다 우리를 살리고, 날마다 우리를 새롭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복음은 죄를 이기게 합니다.
복음은 수치를 이기게 합니다.
복음은 우리를 귀중한 존재로 회복시켜 주셨다는 소식입니다. 그 복음의 은혜를 날마다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은 복음이 우리의 절망과 두려움을 이기게 하는 능력인 것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복음이 절망과 두려움을 느끼지 않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이 그것을 이기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절망과 두려움 가운데에 있는 이들에게 함부로 그것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그러한 감정은 우리가 거의 날마다 실제로 느끼는 것이고, 때로는 우리 삶을 삼켜버리는 능력이 있을 만큼 강력합니다. 어쩌면, 우리들은 절망과 두려움을 이길 능력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하박국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선지자입니다. 그러나 그도 두려워합니다. 그는 떨고 있습니다. 몸이 무너지는 것 같은 두려움을 경험합니다.
먼저 16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말미암아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썩이는 것이 내 뼈에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하박국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말씀은 편안한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유다 백성의 죄에 대한 심판이 임할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바벨론이 올라와 유다를 칠 것이고, 나라가 흔들리고, 삶의 터전이 무너질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 말씀을 들은 하박국의 반응이 무엇입니까?
“내 창자가 흔들렸다.”
“내 입술이 떨렸다.”
“썩이는 것이 내 뼈에 들어왔다.”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린다.”
이것은 단순히 마음이 조금 불안하다는 표현이 아닙니다. 온몸으로 두려움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마음만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몸이 반응합니다. 입술이 떨립니다. 뼈가 무너지는 것 같습니다. 자기 처소에 있으면서도 떨고 있습니다.
그는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을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고백합니다.
그런데, 그의 두려움이 변하였습니다. 16절과 17절 사이에서 하박국에게는 드라마틱한 심경의 변화가 있습니다.
두려움에 떨던 하박국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이 말씀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너무 아름다운 시처럼만 읽으면, 그 안에 담긴 고통의 무게를 놓치기 쉽습니다.
하박국이 말하는 것은 단순한 불편함이 아닙니다.
조금 부족한 상황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삶의 기반이 무너지는 상황입니다.
이것들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생계와 직결된 것들입니다.
무화과와 포도는 풍요와 기쁨을 상징합니다.
감람나무는 기름을 내는 나무입니다. 생활의 기본 자원입니다.
밭의 소출은 먹을 양식입니다.
양과 소는 재산이고, 생계이고, 미래입니다.
그러므로 17절은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내 삶을 지탱하던 모든 것이 사라질지라도.”
먹을 것이 사라집니다.
재산이 사라집니다.
미래의 안전이 사라집니다.
기쁨의 근거가 사라집니다.
내가 붙들고 있던 삶의 기반이 무너집니다.
돈을 잃을까 봐 두렵습니다.
건강을 잃을까 봐 두렵습니다.
사람을 잃을까 봐 두렵습니다.
인정받던 자리를 잃을까 봐 두렵습니다.
안정된 삶이 흔들릴까 봐 두렵습니다.
내가 계획한 미래가 무너질까 봐 두렵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절망적인 상황에 이르더라도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라고 고백합니다.
어떻게 두려움에 떨던 하박국이, 절망적인 상황이 오더라도 오히려 즐거워하고 기뻐하겠다는 고백을 하게 된 것입니까?
하박국서의 특징
사실 하박국서는 다른 예언서와는 다른 특별한 특징이 있습니다. 다른 예언서들은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선지자들에게 말씀하셨고, 선지자는 그 말씀을 선포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하박국은 그가 먼저 하나님께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질문에 답을 해주십니다.
그의 첫 번째 질문은 하나님의 백성이 불의를 행하고 있는데 왜 가만히 보고 계시냐는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을 일으키셔서 그들의 불의를 고치시겠다고 하십니다.
이에 두 번째 질문을 합니다. 어찌 하나님의 백성을 저 이방 민족에게 고통을 당하게 하십니까? 아무리 유다 백성이 패역했다고 하더라도, 이방민족인 바벨론 보다 더 악하겠습니까? 어찌 의인을 악인으로서 심판하실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이러한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이 2장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을 도구로 쓰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그 바벨론도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바로 바벨론을 사용하셔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신다는 말씀을 듣고서 그는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기서 멈추시지 아니하시고, 이스라엘을 다시 회복시키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3-15절의 말씀은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절망스럽고 두려운 상황에서 하나님이 그를 건져주실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하신 일과 하시는 일과 하실 일에 대한 소식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일하심을 믿었기 때문에, 절망스럽고 두려운 상황에서도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기 시작했습니다.
절망과 두려움에 삼킴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박국은 시선을 주어진 환경에 두지 않고, 그의 시선을 하나님께 두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위대하신 하나님이 자신들을 택하시고 사랑하시는 것을 믿었습니다.
거친 광야를 지나며 황무지와 같은 벌판에서 한 줄기 피어난 아름다운 꽃 한송이와 같이 하나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다른 광야의 황량함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그 아름다운 꽃 한송이에 집중하기 시작했더니, 마음에 기쁨과 즐거움이 샘솟았습니다.
하박국은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무화과나무가 다시 무성해졌으므로 기뻐하리라.”
“포도나무에 다시 열매가 생겼으므로 즐거워하리라.”
“감람나무에 다시 소출이 생겼으므로 감사하리라.”
“외양간에 다시 소가 가득해졌으므로 찬양하리라.”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17절의 현실은 아직 바뀌지 않았습니다.
무화과나무는 여전히 무성하지 못합니다.
포도나무에는 여전히 열매가 없습니다.
감람나무에는 여전히 소출이 없습니다.
밭에는 여전히 먹을 것이 없습니다.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박국은 말합니다.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라.”
상황이 바뀐 것이 아닙니다.
환경이 회복된 것이 아닙니다.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닙니다.
바뀐 것은 하박국의 기쁨의 근거입니다.
“나의 기쁨은 그것들이 아니다.
나의 기쁨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라.
나는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복음은 단지 좋은 일이 생기게 하는 능력이 아닙니다.
복음은 좋은 일이 없어도 하나님 안에서 무너지지 않게 하는 능력입니다.
복음은 단지 문제를 해결해 주는 능력이 아닙니다.
복음은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도 하나님을 기뻐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복음은 단지 우리에게 환경의 회복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우리 기쁨의 뿌리를 환경에서 하나님께로 옮기는 능력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가진 것이 있어야 기뻐할 수 있다.”
“네가 성공해야 기뻐할 수 있다.”
“네가 건강해야 기뻐할 수 있다.”
“네 자녀가 잘되어야 기뻐할 수 있다.”
“네 형편이 풀려야 기뻐할 수 있다.”
물론 그런 것들이 있으면 감사하고 기쁩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에게 더 깊은 기쁨을 줍니다.
“네가 가진 것이 흔들려도, 하나님은 흔들리지 않는다.”
“네 상황은 변해도, 하나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
“네 삶에 열매가 없어 보일 때도,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구원은 사라지지 않는다.”
하박국은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한다고 고백합니다.
우리는 이 고백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더 분명하게 이해합니다.
하박국이 바라본 구원의 하나님을 우리는 십자가와 부활 안에서 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기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우리의 수치를 짊어지셨습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심판을 대신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믿는 성도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가진 것을 잃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구원은 잃을 수 없다.
내 상황은 흔들릴 수 있다.
그러나 십자가와 부활로 확증된 하나님의 사랑은 흔들리지 않는다.
내 마음은 두려울 수 있다.
그러나 두려움이 나의 마지막 주인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주인이시다.
하박국의 고백은 단순히 감정적인 위로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의 두려움과 절망은 사라지고, 소망이 피어났습니다.
그는 다시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하박국은 “내가 강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내가 견딜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내가 이겨낼 것이다”라고 자기 확신을 붙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말합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힘이 아니라 주님의 힘입니다.
나의 의지가 아니라 주님의 붙드심입니다.
나의 담대함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말합니다.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여기서 하나님은 하박국에게 평지를 약속하지 않으십니다.
쉬운 길을 약속하지 않으십니다.
장애물 없는 길을 약속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높은 곳”을 다니게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높은 곳은 쉬운 길이 아닙니다.
험한 길입니다.
가파른 길입니다.
발을 잘못 디디면 넘어질 수 있는 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십니다.
험한 산길에서도 미끄러지지 않게 하십니다.
위태로운 길에서도 걷게 하십니다.
두려운 현실 속에서도 다시 걸어가게 하십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복음은 우리를 시련 없는 인생으로 데려가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시련 속에서도 다시 걷는 사람으로 세웁니다.
복음은 우리를 두려움 없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두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며 한 걸음 더 걷는 사람으로 만듭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복음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너의 힘으로 견디는 것이 아니다.”
“너의 의지로 버티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너를 붙드신다.”
“성령께서 너를 도우신다.”
“아버지께서 너를 버리지 않으신다.”
우리의 발은 약합니다.
그러나 주께서 우리의 발을 붙드십니다.
우리의 길은 험합니다.
그러나 주께서 우리를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은 두렵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우리의 힘이 되십니다.
맺는말: 비록 없을지라도
맺는말: 비록 없을지라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인생에도 “비록”의 순간이 찾아옵니다.
비록 건강이 흔들릴지라도,
비록 경제가 어려워질지라도,
비록 자녀의 길이 내 뜻대로 되지 않을지라도,
비록 관계가 아프고, 미래가 불안하고, 마음이 떨릴지라도,
복음을 붙든 성도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비록”보다 크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없을지라도”보다 크신 구원의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붙들어야 할 고백은 이것입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내 힘이 약해질 때, 주님이 나의 힘이십니다.
내 마음이 떨릴 때, 주님이 나의 힘이십니다.
내 삶의 기반이 흔들릴 때, 주님이 나의 힘이십니다.
내가 다시 걸을 수 없다고 느낄 때, 주님이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십니다.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