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이런 사랑을 할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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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어떻게 이런 사랑을 할수 있을까?
본문: 고전13:1-13
주제: 사랑은 은사가 아닌 신앙의 본질이며, 사랑은 감정이 아닌 삶의 방식이다
[서론]
예전에 함께 교회를 다니던 권사님 한분이 들려주신 이야기입니다.
자기한테 딸이 하나 있는데 그 딸이 어릴적 사고를 당한 일이 있었답니다.
오토바이 옆에서 딸아이가 놀다가 머리카락이 오토바이 바퀴에 끼었답니다.
그걸 모르고 오토바이가 출발을 해버렸습니다.
그걸 옆에서 직접 목격했답니다.
그때 얼마나 놀랐던지 바지에 똥을 싸버리셨데요.
그때 저는 모성애가 어떤 것인지 조금이나마 짐작할수 있었습니다.
모성애는 참 강력한 사랑의 힘입니다.
부모가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줄만큼 강력합니다.
사실 사랑에는 여러 종류와 모양이 있습니다.
최고의 기독교 사상가인 c.s.루이스는 인간의 사랑을 네가지로 설명합니다.
애정, 우정, 에로스, 자비입니다.
애정이란 가장 가까운 관계에서 생겨나는 사랑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부모가 자식에게 가지는 사랑입니다.
우정은 같은 관심과 방향을 함께 바라보는 친구 사이의 사랑입니다.
에로스는 남녀 사이에서 일어나는 사랑입니다.
이러한 사랑들은 모두 하나님의 귀한 선물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랑을 통해 위로받고, 기쁨을 누리고,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런 사랑들은 언제든지 왜곡될수 있습니다.
사랑에 눈이 멀면 그 사랑이 신이 됩니다.
그리고 사랑이 신이 되면 그 사랑에 모든 것을 맹목적으로 헌신하게 됩니다.
부모의 사랑이 자녀에 대한 집착이 될수 있습니다.
우정이 편가르기가 될수 있습니다.
남녀간의 사랑이 욕망과 지배로 변질될수 있습니다.
그래서 c.s.루이스는 이런 의미에서 중요한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지만, 사랑이 곧 하나님은 아니다.”
오늘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은 어떤 사랑이어야 할까요?
[본론1]
오늘 말씀은 성경에서 ‘사랑장’으로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입니다.
사랑에 대해 너무나 아름답게 말하고 있어 안 믿는 사람들에게도 유명한 장입니다.
해외에서는 결혼식때 이 말씀을 자주 낭독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본래 이 말씀은 개인적인 사랑만을 위해 주어진 말씀이 아닙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성도들이 서로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가르쳐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먼저 바울이 이 사랑에 대해 말하게 되었는지 그 맥락을 살펴봐야 합니다.
12장과 14장을 읽어보면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은사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간에 13장 사랑장이 끼어 있습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바울은 은사를 말하다가 갑자기 사랑 이야기를 꺼낸게 아닙니다.
은사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 사랑을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고린도교회는 은사가 매우 풍성한 교회였습니다.
은사란 헬라어로 ‘카리스마’인데 은혜라는 ‘카리스’에서 온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각 사람에게 주신 특별한 선물이 바로 은사입니다.
12장 7-10절입니다.
지혜의 은사, 지식의 은사, 믿음의 은사, 병고치는 은사, 기적 행함의 은사, 예언의 은사, 영분별의 은사, 방언의 은사, 방언통역의 은사가 있습니다.
이런 은사들이 고린도 교회 안에 풍성하게 나타났습니다.
물론 이런 은사만 있는게 아닙니다.
로마서 12장에 보면 섬기는 은사, 권면하고 봉사하는 은사들도 있습니다.
교회마다 은사가 다른 법입니다.
그럼 우리는 어떤 은사를 가지고 있습니까?
어떠 은사를 사모하고 있습니까?
저도 목회자다보니 이 중에 몇가지 은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각 교회에 필요한 은사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은사를 사모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닙니다.
은사가 교회 공동체를 세우는데 있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교회의 문제는 성도들이 자신들의 은사를 서로 비교하며 경쟁한다는 것입니다.
“병고치는 내 은사가 방언하는 너의 은사보다 더 뛰어난 은사야.”
“하나님이 날 더 인정하시는 거야”
“내가 가진 은사가 더 영적인 은사야.”
그러니 교회가 연합하기보다 더 분열되는 것입니다.
이에 바울은 12장에서 분명히 말합니다.
은사의 차이는 우열의 차이가 아니라 역할의 차이입니다.
눈이 손보다 높지 않고, 머리가 발을 무시할수 없습니다 .
교회 안의 모든 지체는 서로 필요합니다.
12장 31절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더 큰 은사를 열심히 구하십시오. 이제 내가 가장 좋은 길을 여러분에게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바울은 ‘더 큰 은사’를 열심히 구하라고 말합니다.
‘더 큰 은사’는 단수형이 아니라 복수형입니다.
어떤 것이 더 큰 은사일까요?
더 신비로운 은사일까요?
더 사람들 눈에 띄는 은사일까요?
아닙니다.
바울이 말하는 더 큰 은사란 공동체를 더 잘 세워주는 은사입니다.
나만을 위한 은사가 아닌 형제 자매를 세워주고 교회를 유익하게 하는 은사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 은사들이 반드시 걸어가야 할 가장 좋은 길을 보여줍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은사중 하나가 아닙니다.
사랑은 모든 은사를 바르게 사용하는 길입니다.
방언도 사랑으로 해야 하고, 예언도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제가 대학교 다닐때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래서 어떤 자매가 자신은 사랑의 은사를 받았다고 이야기했더니 다른 자매도 그렇게 말하더라구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보니 그게 연애를 위한 통로가 되었던 기억이 납니다.
물론 우리는 사랑을 구해야 합니다.
하지만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사랑이란 단순한 감정이나 특별한 은사가 아닙니다.
사랑은 모든 은사에 동반되어야 하는 신앙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이나 꾕가리일뿐이라고 말합니다.
천사의 말을 할수 있다면 얼마나 놀라운 은사입니까?
얼마나 부러운 은사입니까?
하지만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시끄러운 소리에 불과할 뿐입니다.
심지어 엄청난 예언을 하고,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고, 산을 옮길만한 큰 믿음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면 엄청난 믿음입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대단한 능력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말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왜일까요?
은사의 목적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은사를 주신 이유는 나를 자랑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은사를 주신 이유는 교회 공동체를 건강하게 세우시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사랑이 없는 은사는 자기 자랑거리가 됩니다.
은혜의 통로가 되어야할 은사가 교만의 재료로 쓰이게 됩니다.
공동체를 세워야할 은사가 공동체를 갈라놓는 이유가 됩니다.
심지어 엄청난 헌신을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3절입니다.
“내가 내 모든 소유를 나누어줄지라도, 내가 자랑삼아 내 몸을 넘겨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는 아무런 이로움이 없습니다.”
모든 재산을 나누어주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자기 몸을 내어주는 순교같은 것도 엄청난 헌신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헌신도 사랑없이 할수 있기 때문입니다.
구제도 자기 이름을 남기기 위해 할수 있습니다.
봉사도 인정받기 위해 할수 있습니다.
희생도 사람들의 박수를 얻기 위해 할수 있습니다.
과거 로마시대에도 엄청난 돈을 기부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이름을 건물이나 기념비에 남기고 싶어하는 마음으로 기부한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자신의 명예를 남기기 위해 헌신한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도 그럴 위험이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봉사하고, 헌금하고, 섬길 때에도 내 안에 이름을 남기고 싶은 마음이 섞일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알아주었으면 하는 마음, 인정받고 싶은 마음, 내가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받고 싶어하는 마음이 들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왜 이 일을 하고 있는가?”
“나는 정말 사랑으로 섬기고 있는가”
“나는 이 은사와 헌신을 통해 주님을 드러내는가? 아니면 나 자신을 드러내고 있는가?”
사랑이 없으면 은사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본론2]
그럼 바울이 말하는 사랑이란 어떤 사랑일까요?
우리는 흔히 사랑을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사랑을 감정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사랑을 삶의 방식과 태도라고 말합니다.
4-7절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사랑을 추상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마음이 뜨겁다” 정도의 감정이 아닙니다.
사랑은 오래 참는 것입니다.
사랑은 친절한 것입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은 자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은 자기 유익만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은 쉽게 성내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은 상대의 잘못을 마음에 쌓아두지 않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랑은 말로만 증명되는 게 아닙니다.
사랑은 사람을 대하는 태도 속에서 드러납니다.
사랑은 가까운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가에서 드러납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많은 은사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고, 지식도 풍성했습니다.
하지만 그 은사를 가지고 서로 비교하고, 시기하고, 자랑하고, 교만해졌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랑을 말하면서 사실상 고린도교회의 모습을 거꾸로 비추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는데, 고린도교회는 서로 시기했습니다.
사랑은 자랑하지 않는데, 고린도교회는 자기 은사를 자랑했습니다.
사랑은 교만하지 않는데, 고린도교회는 자신이 더 영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랑은 자기 유익만을 구하지 않는데, 고린도교회는 자기 자유와 권리만 앞세웠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단지 좋은 감정이 아닙니다.
사랑은 공동체 안에서 나를 낮추고, 상대를 세워주며, 함께 주님의 몸을 이루어가는 삶의 방식과 태도입니다.
물론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랑이 모든 것을 덮어주고 참는다고 해서, 불의한 일까지 모른 척하며 넘어가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죄를 방치하는게 아닙니다.
사랑은 불의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덮어버리는 것도 아닙니다.
사랑은 진리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다만 사랑은 진리를 말할때에도 사람을 무너뜨리기 위해 말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진리를 붙들면서도 사람을 살립니다.
사랑은 잘못을 외면하지 않지만, 사람을 쉽게 포기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어렵습니다.
오래 참아주는 게 쉽습니까?
늘 친절하게 대하는게 쉽습니까?
시기하지 않는게 쉽습니까?
내 유익보다 상대의 유익을 먼저 생각하는게 쉽습니까?
부부사이에도 쉽지 않습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쉽지 않습니다.
교회 안의 성도들 사이에도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랑하고 싶지만 자주 조급합니다.
섬기고 싶지만 인정받고 싶어합니다.
참아주고 싶지만 금방 서운해합니다.
덮어주고 싶지만 자꾸 기억하고 계산합니다.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상대방이 내 뜻대로 움직여 주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런 사랑을 할수 있을까요?
우리의 의지와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자기 중심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쉽게 나를 먼저 생각합니다.
내 감정, 내 상처, 내 권리, 내 인정, 내 유익을 먼저 붙듭니다.
그러다보니 헌신과 봉사조차도 내 유익을 위한 것으로 변질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바울은 이 사랑을 말하면서 예수님을 깊이 묵상하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이런 예수님의 사랑은 십자가에서 가장 온전히 드러났습니다.
예수님은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배신하고, 조롱하고, 못박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생명을 지키기보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은 단순히 “우리도 착하게 살자”가 아닙니다.
이 사랑은 예수님을 통해 먼저 우리가 받은 사랑입니다.
우리가 만들어낼수 있는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떻게 한번에 이런 사랑을 할수 있겠습니까?
처음부터 예수님처럼 오래 참고, 예수님처럼 친절하고, 얘수님처럼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 사람이 될수 있겠습니까?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계속해서 예수님을 바라보면, 조금씩 그 분을 닮아가게 됩니다.
미국 소설가 나다니엘 호손이 쓴 ‘큰 바위 얼굴’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주인공 어니스트는 마을 산에 있는 큰 바위 얼굴을 바라보며 자랍니다.
마을에는 언젠가 그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위대한 인물이 나타날 것이라는 전설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성공한 사업가, 용맹한 군인, 유명한 정치가가 나타날때마다 그 사람이 큰 바위 얼굴의 주인공이 아닐까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그 얼굴과 달랐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른뒤 사람들은 깨닫게 됩니다.
평생 큰 바위 얼굴을 바라보며 진실하고 겸손하게 살아온 어니스트 자신이 어느새 그 얼굴을 닮아 있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바라보는 것을 닮아갑니다.
돈을 바라보면 돈을 닮아갑니다.
성공을 바라보면 성공의 가치관을 닮아갑니다.
상처를 바라보면 상처입은 사람처럼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바라보면 예수님을 닮아갑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도 처음부터 완전한 사랑을 할수는 없습니다.
어쩌면 영원히 도달하지 못할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날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달라질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래참으심을 바라보면 우리도 조금 더 참을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친절하심을 바라보면 우리도 조금 더 따뜻해질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 우리도 조금 더 자기 유익을 내려놓을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감정이 아닙니다.
사랑은 예수님을 바라보며 배워가는 삶의 방식입니다.
사랑은 내 힘으로 만들어내는 성품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받은 사람이 예수님을 바라보며 조금씩 닮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사랑으로 부름받았습니다.
사랑은 은사가 아니라 신앙의 본질입니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의 방식입니다.
이런 사랑을 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