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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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제목: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본문: 고린도후서 4장 7-18절
본문: 고린도후서 4장 7-18절
찬송: 490장 주여 지난밤 내 꿈에
찬송: 490장 주여 지난밤 내 꿈에
말씀의 문을 열며
말씀의 문을 열며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면 그 믿음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요?
흔히 예수 믿는 사람이 보일 수 있는 증거 중 하나는 삶이 거의 망한 사람인데 ‘교회를 나와 예수 믿고 잘됐다’ 이것도 증거일 수 있습니다. 요셉을 생각 해보면 노예, 죄수의 신분에 있다가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어서 그렇게 출세를 한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예수 믿어서 잘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예수님 믿는 사람만 잘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과 상관없이 잘되는 사람도 더 많습니다. 세상에 다 망했는데 절에 다니면서 갑자기 잘 되어서 평생 우상숭배하면서 사는 사람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반대로 그럭저럭 잘 살았는데 교회를 다니다 설교를 듣고 말씀을 읽고 믿어지다보니 지금처럼 살면 안되겠다고 결심을 했습니다. 이후로 믿음대로 살겠다 하다가 그 순간부터 사업이 막히고, 거래처가 끊어저 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도 사업에 실패한 사람도 있습니다. 인생이 형통하다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증거이기도 하지만, 절대적이지는 않습니다.
기적을 경험하는 것도 믿음이 있다는 증거 중에 하나입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13장을 보면 마귀가 주는 기적도 있습니다.
제가 오래 전에 본적이 있는 다큐멘터리 이야기입니다. 아프리카에 어떤 사람이 배가 너무나 아픈데 병원에 갈 형편이 안되어서 마을 추장을 찾아갑니다. 그 추장이 무당이었는데, 자기가 믿는 신에게 기도를 하고 예식을 치루니까 아픈 사람의 통증이 무당에게 옮겨지고, 땀을 펄펄흘리다가 욱 하더니 무당 입에서 까만 돌덩이가 뱉어 졌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병이 나았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기적은 우리만 일어나는게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방 종교에도 있고, 마귀도 기적을 흉내 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적도 예수 믿는 절대 증거는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절대 증거는 우리가 잘되고 기적을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증거는 마음에 소망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을 믿으면 진짜 소망이 생깁니다. 그래서 낙심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낙심은 답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낙심은 죽을 사람이나 하는 것이며 소망이 없는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분명한 소망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게 됨으로 천국에 들어갈 그 소망이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헛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죄인이었고, 이 세상이 전부이고 끝일 줄 알았고, 죄의 노예로 살아야 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느날 일방적으로 선택하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듭났고 아직 이 땅을 살아가고 있지만, 천국 시민권자로 우리를 삼아 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가져야 할 분명한 삶의 모습은 천국을 바라보며 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가장 이상적인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가장 큰 특징은 낙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낙심하지 않았다고 해서 편안한 삶을 산 것은 아닙니다. 엄청난 고난 가운데 살았습니다. 예수님만 버리고 전하지 않으면 되는데 예수님을 버리지 못하고 예수님을 전하면 안 된다는 사명을 가지고 사느라 그는 모든 걸 잃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낙망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더 큰 것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우리’라는 표현을 계속해서 사용합니다. 고린도 교회나 본인이나 그리고 오늘 예배하는 저와 여러분, 즉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되는가를 바울은 강조하고 싶어서 그런 것입니다.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바울은 절대로 낙심해서도 안 되고 낙심할 수 없는 이유에 대하여 논리적으로 두 가지를 딱 제시합니다.
본문 16절을 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낙심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두 개의 세계관을 가지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영과 육, 이 세상과 하나님의 나라, 그리고 사람도 이 두 개의 세계 겉 사람과 속사람으로 나눴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겉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겉껍데기인 우리의 육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용모, 학벌, 가문 등이 다 겉사람입니다. 우리는 바울은 그런 겉사람이 아주 화려해했던 인물임을 잘 압니다. 가문이나 로마 시민권이나 그리고 그의 학문이나 등등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자기의 겉사람이 예수님 만나 가지고 자꾸만 사라지고 부패되고 망가지고 쇠퇴해져 갔습니다. 나이도 들어가고 몸은 병 들어 갔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렇게 되면 절망하고 낙심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모든 상황 속에서도 전혀 낙심하지 않습니다. 나이가 들어가고, 겉사람이 후패해지며, 육체는 날로 쇠퇴해 가는데도 바울이 낙심하지 않는 이유는 바로 그의 ‘속사람’이 날마다 새로워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월의 흐름 속에 이 육신의 몸을 벗어던지는 날, 내 영혼을 담고 있던 ‘진짜 나’는 주님을 대면하여 만나게 될 것입니다. 바울에게는 내 안에 살아 숨 쉬는 ‘거듭난 부활의 영’, 곧 참된 자아가 있었습니다. 핍박이 거세어지고 날이 갈수록 늙고 쇠퇴해질지라도, 그의 속사람은 도리어 강건해지고 새로워지며 더욱 확실해졌습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다가오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는 결국 흙으로 돌아갈 것이기에, 시간이 흐를수록 두려워지고 왜소해지며 힘이 빠지고 검버섯이 피어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있는 속사람은 예수님을 만날 그날을 기대하기에, 날마다 기쁨으로 새로워지고 영적인 새 힘을 얻습니다. 바울은 바로 이 소망이 있었기에 "나는 결코 낙심할 수 없다"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기다리면 소망으로 꽉 차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일입니다. 당시 목포 시내 초등학교 사는데 6학년들의 수학여행이 큰 유행이었습니다. 본래 수학여행은 중고등학생들이나 가는 것이었지만, 어찌 된 일인지 갑자기 초등학생들도 가는 분위기가 형성되었습니다. 제가 다니던 학교도 드디어 1박 2일로 수학여행을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아들이 섬에 살다가 목포로 전학을 와서 수학여행을 가게 되니까 어머니가 나이키 운동화를 사주셨습니다. 그 운동화를 수학여행 때 신으려고 아껴서 놨습니다. 저녁 때마다 새 운동화를 신었다 벗었다를 반복하는데, 시간이 가질 않았습니다.
드디어 내일 아침이면 수학여행을 떠나는데, 잠이 오질 않았습니다. 제 인생에 그렇게 긴 밤은 처음이었습니다. 아침에 어머니가 깨우지도 않았는데 눈을 뜨고 밥을 먹는둥 마는둥 하고 학교에 내가 제일 빨라 가야지하고 갔는데,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안개가 낀 아침이었는데 그 학교길을 걸어서 학교 도착했더니 절반이 와 있었습니다. 내가 1등으로 도착한 줄 알았는데 이미 절반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소망이 생기고 기쁜 일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시간이 참 느리게 가는 것 같습니다. 우리 속사람이 그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님을 만날 그 날을 소망하면서, 날로 날로 새롭게 그 날을 기대하고 꿈꾸면서 겉사람 때문에 낙망하지 말고 살아가시를 축복합니다.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본문 17절에 바울은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라고 말합니다.
바울의 삶에는 참으로 많은 환난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닥친 그 모든 고난을 언제나 ‘상대적’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면,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마흔에서 하나를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습니다. 세 번은 태장으로 맞았고, 한 번은 돌에 맞았으며, 세 번이나 배가 파선되어 일주일 동안 밤낮을 깊은 바다에서 표류했습니다. 그 외에도 강도, 동족, 이방인의 위협 등 셀 수 없는 무수한 환난을 겪었습니다.
인간의 몸으로 이 엄청난 고통들을 어떻게 견뎠을 가히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바울이 낙심하지 않았던 것은 그 고통이 견딜 만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장차 하나님 앞에 서는 날 받게 될 ‘영원한 영광의 상급’과 비교해 보니, 이 땅의 고난은 지극히 작고 가벼운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산삼을 발견한 심마니가 100년 된 산삼 열 뿌리를 캐냈습니다. 깊은 산속에서 “심봤다!” 하고 외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비록 지금은 깊은 산속에서 굶주리며 고생하고 있고, 이 험한 산을 내려가는 길도 아득하고 힘들겠지만, 이 산삼을 가져다 팔면 몰라보게 나아질 가정형편을 생각할 때 심마니의 마음은 어떠하겠습니까? 지금 당하는 고생과 고난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소망이 그 고통을 압도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장차 얻게 될 하늘의 소망과 천국의 꿈을 진정으로 바라본다면, 이 땅에서 당하는 고난과 환난, 시련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가볍고 작은 것에 불과합니다. 바울은 지금 우리에게 이 위대한 영적 비밀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낙심하지 않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은 단순히 “하나님이 우리의 문제를 다 해결해 주신다”는 달콤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막연하게 “힘을 내라”고 위로하는 것도 아닙니다. 본문 8절과 9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주님을 신실하게 믿어도, 하나님이 살아 계심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에는 여전히 사방으로 욱여싸는 원수들과 문제들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이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태도가 있습니다. “너희가 정말 나를 믿는다면, 천국의 소망을 품고 산다면, 비록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할지라도 결코 싸이지 않는 자처럼 당당하게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방에 원수들이 욱여쌀 때, 하나님이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그들을 당장 다 쓰러뜨려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유익이고 능력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마귀가 진짜 무서워하는 성도는 환경은 여전히 사방으로 욱여싸여 있지만,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욱여쌈을 당하지 않은 자처럼 하나님을 신뢰하며 당당하게 걸어가는 성도입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마귀는 우리를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어 도망치고 마는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내 뜻대로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만 믿는 신앙이 아닙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여전히 주님을 신뢰하고 예수님을 붙잡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픔과 어려움을 절대 모르시는 분이 아닙니다. 다 알고 계십니다. 다만 지금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믿음으로 이 시간을 견디고 이겨내라는 것입니다.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는 자처럼 당당하십시오. 날마다 답답한 일을 만나도 그 일 때문에 무너지거나 절망하지 마십시오. 무슨 일이 있어도 주님의 손을 잡고 다시 일어서십시오. 그것이 진짜 믿음이며, 우리가 이렇게 살아낼 때 하나님께서 최고의 영광을 받으시는 줄로 믿습니다.
말씀의 문을 닫으며
말씀의 문을 닫으며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는 달콤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무작정 참라고 하는 억지 소리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소망이 천국에 있기 때문에 잘 생각해 봐서 낙심할 이유가 없지 않냐이 말입니다.
잠언 24장 16절은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 보시는 의인은 ‘몇 번 넘어졌느냐 몇 번 실패했느냐’를 보지 아니하시고 ‘지금 이 상태에서 어디에 있느냐’ 그걸 보신다는 것입니다. 악인은 단 한 번의 문제도 꼬꾸라지지만 의인은 일곱 번의 고난과 시련과 핍박 속에서도 끝내 일어나는 사람입니다. 믿음을 지키며 천국에 가는 것은 어쩌면 너덜너덜해진 채로 걸어가는 고된 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너덜너덜 해지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흔적을 우리의 몸에 지니고 사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의 흔적이 있다는 것은 곧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에게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을 소망으로 품고 살아갈 때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절대로 낙심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가 저와 여러분을 위해 예비되어 있습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그 날까지 사방의 욱여쌈 속에서도 날마다 당당하게 이기며 걸어가는 우리 중앙교회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