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회개와 변화는 행동으로 입증됩니다

강해설교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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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 393, 337, 270 성경 본문: 창세기 44장 18-34절 (설교 시간: 10분 분량)

[서론: 회개의 착각 – 말뿐인 후회인가, 방향의 전환인가?]

우리는 종종 '회개'라는 단어를 심각하게 오해하곤 합니다. 그저 하나님 앞에서 눈물 몇 방울 흘리며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라고 입술로 고백하는 고백의 행위나, 내가 지은 죄에 대해 잠시 부끄러움과 후회를 느끼는 감정 상태를 회개라고 착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회개의 시작일 뿐, 회개의 전부는 아닙니다.
[간단한 일상 예화]
자동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길을 잘못 들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내비게이션에서 "경로를 이탈했습니다"라는 경고음이 울릴 때, 운전자가 운전대를 그대로 쥔 채 "아, 길을 잘못 들었네, 어쩌지?" 하고만 있으면 됩니까? 안되죠. 그것은 진정으로 돌이킨 것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돌이키기 위해서는 방향을 지시하는 네비를 따라서 다음 인터체인지에서 차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 반대 방향으로 핸들 꺽고 돌아서 가야되겠죠. 이 모습이 저는 회개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회심과 회개의 차이를 모를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는 '회심(Conversion)'과 '회개(Repentance)'의 성경적 차이를 명확히 기억해야 합니다. 회심이 하나님을 향해 마음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돌이키는 내면의 주권적 변화, 즉 내 삶의 주권이 내가 아니라 주님께 있음을 고백하는 정체성의 개혁입니다. 회개는 그 돌이킨 마음이 삶의 구조와 선택, 그리고 구체적인 행동의 변화로 열매 맺는 전인격적인 돌이킴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7장 21절에서 겉모습만 화려한 종교인들을 향해 이렇게 엄중하게 선포하셨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구체적인 삶의 열매와 순종이 없는 회개는 자기를 속이는 종교적 위안에 불과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유다의 모습은 진정한 회개와 변화가 어떻게 우리의 실제적인 '행동'으로 입증되는지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거울입니다.

[본론: 유다의 변화 – 빼앗던 손에서 대속하는 삶으로]

애굽의 총리로 형들 앞에 서 있는 요셉은 형들의 내면이 정말로 변화되었는지, 그들의 영혼에 진실함이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가장 아픈 곳을 건드리는 마지막 시험을 던졌습니다. 바로 은잔 도둑으로 몰린 베냐민만 종으로 삼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너희 남은 자들은 평안히 너희 아버지에게로 올라가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1. 과거의 태도에서 완전히 돌아서다

유다는 총리 앞에서 베냐민을 잃게 될 때 아버지가 받게 될 치명적인 고통을 정직하게 대변합니다. 본문 30절과 31절 말씀을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함께 읽겠습니다.
“아버지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하나로 묶여 있거늘 이제 내가 주의 종 내 아버지에게 돌아갈 때에 아이가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아버지가 아이의 없음을 보고 죽으리니 이같이 되면 종들이 주의 종 우리 아버지가 흰 머리로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함이니이다”
이 고백을 22년 전 과거 유다의 태도와 비교해 보겠습니다. 과거의 유다와 형들은 창세기 37장에서 채색옷을 입은 동생 요셉을 시기하여 그의 옷을 벗기고 구덩이에 빠뜨려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유다는 오히려 자신들의 손에 피를 묻히는 것을 꺼려합니다. 그리곤 이렇게 제안을 하죠. "그를 죽이고 그의 피를 숨겨둔들 무엇이 유익할까, 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고 우리 손을 그에게 대지 말자"라며 동생을 이집트 노예로 팔아넘깁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의 손에 죽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인신매매를 주도했던 잔인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때의 유다는 동생의 생명을 빼앗는 일에 앞장섰고, 그 일로 인해 아버지 야곱이 평생 흘려야 할 피눈물 나는 슬픔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던 철저한 자기중심적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유다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는 이제 철저히 ‘아버지의 관점’에서 상황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유다는 총리 앞에서 변론하는 동안 ‘아버지’라는 단어를 무려 14회나 반복합니다. 또한 동생 베냐민을 ‘아이’라고 7회나 부르며, 과거 요셉에게 향했던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과 라헬을 향한 존중을 그대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동생의 생명을 짓밟고 아버지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던 자가, 이제는 동생의 생명을 보호하고 아버지의 슬픔을 막아서는 자로 완전히 전환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핸들을 꺾어 방향을 트는 진짜 회개의 역사입니다.

2. 책임과 자기희생의 결단

유다의 변화는 감정적인 호소에서 멈추지 않고, 자신의 전 생애를 내던지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아갑니다. 본문 33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제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 보내소서”
유다는 이제 확고한 결단을 내립니다. 베냐민 대신 자신이 죄인이 되어 이집트의 평생 종이 되겠다는 자청입니다. 과거에는 동생을 팔아 은 20개를 취했던 탐욕으로 가득찼던 유다가, 이제는 동생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자유와 인생 전체를 ‘몸값’으로 내어놓습니다. 야곱은 과거에도 지금도 베냐민에게 재해가 미칠까 염려하며 슬퍼했습니다. 이제 유다는 이제 그 막내를 잃고 대성통곡하며 죽어갈 '아버지'에게 재앙이 미칠까 두려워하며 자기 자신을 제물로 던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유다가 보여주는 이 자기희생적이고 모습에서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장차 유다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셔서, 죄인인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친히 자신의 목숨을 대속물로 내어주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보입니다. 그러나 이 창세기 44장에서 보여주는 유다의 모습은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사적 예표임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마가복음 10장 45절에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우리는 철저한 죄의 종이었고 사탄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는 자들이었으나, 아무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의 못박히셨고, 무덤이라는 깊은 구덩이에 3일 동안 갇히심으로 죽음으로 우리의 죄 값을 완벽하게 치러주셨습니다. 유다가 베냐민을 대신하여 종이 되겠다고 나선 그 희생의 자리가, 바로 우리를 대신하여 물과 피를 쏟으신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선명하게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적용: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증명되는 회개의 열매]

오늘을 살아가는 행복한 성도 여러분, 우리의 회개는 유다처럼 구체적인 행동과 삶의 열매로 입증되고 있습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감상적인 눈물이나 관념적인 후회가 아닌, 구습을 청산하는 실제적인 삶의 변화가 진정한 회개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가장 먼저 외치신 복음이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4장 17절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또한 예수님의 길을 예비했던 세례 요한 역시 마태복음 3장 8절에서 참된 복음의 본질을 향해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예수님을 만나 참된 회심을 경험했던 세리장 삭개오의 이야기를 깊이 묵상해 보십시오. 그는 이웃의 세금을 과하게 거두어 재산을 모았던 탐욕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의 이름을 불러주시고 그의 집에 거하십니다. 그리고 그는 변화되었습니다. 그렇게 삭개오는 입술로만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누가복음 19장 8절에서 그는 즉각적인 행동의 변화로 회개를 입증했습니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예수님께서는 삭개오의 이 구체적인 삶의 청산과 행함을 보시고 나서야 9절에서 비로소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라고 구원을 선언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모시고 삶의 방향을 바꾸었다면, 회심하였다면, 우리의 일상에는 반드시 유다와 같고 삭개오와 같은 회개의 따른 변화가 나타납니다! ‘책임'있는 행동이 나타납니다. 종교적 생활이 아닌 인격적 신앙생활이 드러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저의 행동을 고치겠습니다! 고치기 위해서 이 시간에 노력하겠습니다. 라고 적극적인 태도가 드러나야 합니다. 우리는 그저 주님 용서해주세요! 하고 마음에 위안을 얻은 것으로, 안일하게 그 뒤의 삶은 나는 모르겠습니다. 라고 종교적 수면을 취하는 것태도를 버려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회개하고 돌이키게 하시는 이도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가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 돌이키기를 애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그 은혜를 통과하는 자는 자기희생적인 삶이 드러납니다. 이제 내 삶의 변화는 곧 다른 이들의 어려움을 보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마음을 닮고 그 삶의 태도가 변화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본질은 합당한 열매입니다! 그러니 내 주변에 억울하게 고통받는 이웃의 무거운 짐을 대신 지고, 공동체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여기며, 나를 희생해서 다른 이의 생명을 살려내는 구체적인 순종이 나타납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회개의 증거가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비전: 하나 된 공동체(교회)를 위한 우리의 태도]

그렇다면 오늘 깨어지고 분열되기 쉬운 이 시대 속에서, 우리 행복한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으로 하나 된 공동체가 되려면 우리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요? 유다의 결단은 오늘 우리에게 교회가 나아가야 할 거룩한 비전을 제시합니다.
첫째는, 비난이 아닌 책임을 지는 태도입니다. 요셉의 계략으로 인해 막내 베냐민의 자루에서 은잔이 발견되었을 때, 형들은 베냐민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너 때문에 우리까지 다 망하게 생겼다"라며 발을 빼거나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일제히 자신들의 옷을 찢고 짐을 나귀에 싣고 성으로 돌아왔습니다. 유다는 공동체의 문제를 '남의 죄'가 아니라 '우리의 책임'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교회가 하나 되는 비결은 잘못한 자를 찾아내 비판하는 데 있지 않고, 유다처럼 그 형제의 짐을 대신 지는 책임감에 있습니다.
둘째는, 자신을 매어주는 연합의 태도입니다.
유다는 아버지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하나로 묶여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교회는 세상의 사교 집단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그분의 보혈로 묶인 거룩한 생명 공동체입니다. 옆에 있는 지체의 무너짐이 곧 나의 무너짐이고, 이 땅 다음 세대 자녀들의 갈급함이 바로 내 영혼의 갈급함이라는 영적 연합의 가치를 깨달을 때, 우리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강력한 하나님 나라의 처소가 될 것입니다.

[결론: 말뿐인 신앙의 자리에서 이제 일어서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형제에 대한 깊은 긍휼과 깨어진 가정을 책임지려 했던 유다의 용기 있는 자기희생의 행동이, 결국 야곱의 가문 공동체 전체를 완전히 살리고 세워내었습니다. 냉정하게 형들을 시험하던 요셉의 마음을 눈물로 녹인 것은 화려한 말이나 가식적인 눈물방울이 아니라, "내가 동생 대신 노예가 되겠습니다"라고 선포했던 유다의 책임있는 자기희생적 행동이었습니다.
말뿐인 신앙의 자리에서 이제 일어나십시오. 과거의 이기적인 행동과 위선을 십자가 앞에 완전히 못 박으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 마음은 주님이 주시고 믿음을 더하시고 의지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나를 희생하여 공동체와 다음 세대를 살리는 '행동하는 회개'는 예수안에 있을 때 일어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사랑의 공동체로 세워가는 신실한 주의 종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다 함께 합심하여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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