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 황제 스펄전의 목사론 07
스펄전의 목사론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2 viewsNotes
Transcript
파트 2 목회자와 성장
파트 2 목회자와 성장
06 목회자와 침체
06 목회자와 침체
대부분의 목회자에게 일시적인 침체가 찾아온다.
대부분의 목회자에게 일시적인 침체가 찾아온다.
다윗도 가열되는 전투 와중에 피곤했다고 기록된 말씀처럼 주님의 모든 종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에게는 일시적인 집체가 찾아옵니다. 보통 때는 식하다가도 가끔 낭망하기 마련입니다. 강한 자도 늘 강건한 것이 아니고 지혜로운 자도 늘 충한 것이 아닙니다. 용감한 사람도 늘 육명한 것이 아니며 즐거워하는 사람도 늘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세월이도 노세한 티가 별로 안 나는 철인들도 곳곳에 있을지 모르지만 철도 분명히 녹이슬게 말을립니다. 한명 평범한 사람들로 말하자면 하나님은 그들이 뭔지 불과하다는 것을 아시며 그들에게는 그 사실을 깨우쳐 주십니다.
또 자신도 영혼의 깊은 침체가 무엇을 뜻하는지 쓰라린 경험을 통해 배웠고 시시대때로 침체를 겪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이 문제에 대한 제 생각을 말씀드리면 몇몇 분께는 큰 위로가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젊은 분들은 한동안 우울한 기분에 사로잡혀도 뭔가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하지 않고 슬픔을 겪는 분들은 찬란한 태양이 눈부시게 비추는 것 같은 사람도 늘 빛 가운데로만 걸어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도록 말입니다. 전부는 아니어도 대부분의 목회자들에게 무서운 침체의 때가 찾아왔다는 사실을 입증하는데는 타고난 목회자들의 온갖 전기를 다 인용할 필요도 없습니다. 루토의 생애만 살펴봐도 수천 가지 예를 드는 것만큼 충분할 것입니다.
루터는 결코 나약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위대한 영혼은 환이의 천국에 이른 적도 많지만 절망의 끝자락에 선 경우도 그만큼 많았습니다. 그는 인정할 때도 비반을 면치 못했습니다. 마지막 잠드는 순간까지도 지친 어린 아이처럼 눕혔습니다. 다른 일을 더들은 대신 하나님이 왜 이러한 일들을 허락하시는지 그 이유를 곰곰히 생각해 봅시다. 왜 빛의 자녀들이 때때로 짙은 어둠 속에를 걷습니까? 왜 새벽을 알리는 사자들이때로 치흙 같은 밤 속에 처합니까?
1.왜 목회자가 영적인에 빠졌는가?
1.왜 목회자가 영적인에 빠졌는가?
목회자도 연약한 사람이다.
목회자도 연약한 사람이다.
우선 그들도 사람이 아닙니까? 사람이기 때문에 그들은 연약함에 둘러싸여 있고 슬픔을 상속받습니다.
외경에 나오는 한 지혜자의 말은 참으로 명언입니다. 인간이면 누구나 고생하기 마련이고 여자의 뱃속에서 태어나는 날부터 만물의 어머니에게로 돌아가는 날까지 아담의 자손들이지는 멍는 무겁다. 그들이 생각하는 것이나 그들이 마음속으로 두려워하는 것은 마지막날 죽음 앞에서의 불안이다. 영광의 왕자에 앉은 자부터 땅바닥이나 제더미에 쭈그리고 앉은 자에게 이르기까지 왕의 옷을 입고 왕관을 쓴 자부터 누더기를 걸친 사람의 이르기까지 인생은 분노와 시기, 고난과 불안, 죽음의 공포와 원 그리고 싸움일 뿐이다. 밤에 자리에 누워서 쉴 때에도 잠은 새로운 근심을 더해 줄 뿐이다.
잠들고서도 잠 것 같지 않게 대냐 감시받는 것 같이 악몽에 시달리면서 싸움터에서 도망치는 사람과 같이 환상에 쫓겨다니다가 구조를 받을 순간에 깨어나서 그 공포가였음을 알고 놀란다. 사람으로부터 짐승에 이르기까지 무명에게 어 벌이 아 벌이 있지만 죄인들은 일곱의 벌을 받을 것이니 외경 집회서 40장 1에서 8절 우리는 이러한 대부분의 어려움에서 어 은혜로 보호받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많은 은혜를 누리지 못함으로써 막을 수 있는 겪게 됩니다. 구속의 섭리 아래에서도 우리는 연약함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약속된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에 실 필요가 없을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때로 침체에 빠지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성도들은이 세상에서 권한받도록 작정되었습니다. 목회자들은 다른 이들보다 고난의 몫이 더 클 것입니다. 주님의 권난 받는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는 법을 배워서 양떼를 돌보는데 합당한 목자가 될 수 있도록 말입니다. 하나님은 육체에서 분리된 영혼들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도록 보내셨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영혼들은 육체를 입고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천사들을 복음전도자로 삼으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천사들은 그들의 고귀한 속성 때문에 무지한 인간들에게 긍휼를 품기에는 합당치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대리석처럼 감정 없는 사람들을 어 빚으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무정한 본성은 우리의 연약함을 비웃고 우리의 부족함을 조롱하는 것에 불과할 것입니다. 인간도 인간다운 감정을 가진 인간을 전지하신 하나님은 당신의 은혜의 그릇으로 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눈물과 어려운 상황들과 낙심이 있는 것입니다. >>
목회자도 대부분 육체적 정신적으로 어딘가 병들어 있다.
목회자도 대부분 육체적 정신적으로 어딘가 병들어 있다.
더 나아가 우리 대부분의 육체적으로 어딘가는 병들어 있습니다. 물론 하루도 병상에 누워가 본 적 본 기억이 없다고 말하는 정정한 노인도 여기저기서 볼 수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대다수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어떤 형태로든지 연약함으로 괴로움을 겪습니다.
특정한 신체 질환 특히 소화 기관이나 간이나 비장과 관련된 질환은 낙심의원이 됩니다. 아무리 신체적인 영향을 극복하려고 발포등쳐도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때와 상황 있게 마련입니다. 정신적 질병에 대해서도 완전히 정사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 조금씩은 다 균형을 잃은 상태가 아닙니까? 어떤 분들은 천상적으로 약간 우울한 기질이 있어 봅니다. 그런 분들은 우울한 기질이 몸에 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언제한 정신을 갖고 있고 순간 원칙으로 자신을 다스기는 하지만 긍정적인 면은 잘 있고 부정적인 면만 잘 기억하는 분들을 말입니다. 그런 분들은 예수인처럼 이렇게 노래할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음악은 탄식과 신앙품. 의 노래는 눈물의 쪽 뼈와 가족까지 다 타 들어가네. 이러한 연약함이 하나님께 특별히 쓰임받는 일에 걸림돌 걸음돌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자 당신의 지혜로 목회자에게 특별한 성김의 길을 가기 위한 필요 조건으로 주신 것일지도 모릅니다. 어떤 식물은 늪에서 자는 덕분에 또 어떤 식물은 응달해서 권식하는 덕분에 약용 성분이 생깁니다. 햇빛뿐 아니라 달빛도 받아야 귀한 열매가 맺칠 수 있습니다. 배에는 두뿐만 아니라 바다에 씻는 모래 주머니도 필요합니다. 마차가 내리막기를 달릴 때 바퀴가 마찰력을 받는 것은 장애가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는 고통으로 인해 영혼을 구해내는 지혜가 크게 발달할 수도 있습니다. 고통이 없었다면 그런 지혜도 웃속의 사자처럼 잠들어 있었겠지만 말입니다. 어떤 일은 날개가 부러지지 않았다면 금속에서 길을 잃었을 것입니다. 지금 불리의 감남나무 가지를 물고 방주로 가는 길을 알려주는 채론 비기 같은 이들조차도 말입니다. 그러나 몸과 마음 어딘가의 영혼을 지체시키는 침체시키는 원인이 있다면 어둠의 순간에 심령이 그런 원인에 불복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네개의 경우 정말 놀라운 정문. 만일 목회자의 내면 생활을 기록할 수 있다면 사람들도 역시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어떤 목회자들은 어떻게 얼굴에 미술을 띄고 사역을 계속할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들은 늘 은혜로 승리하고 순교자만큼 인내합니다. 몸이 아닌 영혼 주의 불길이 타올라 그 타는 모습이 눈에 보일뿐 그들은 순교자들 못지 않게 존경받아 마땅한 살아 있는 순교자들입니다. 레미야 같은 이들의 사역도 이사야 같은 이들의 사역만큼이나 하나님이 기뻐하심 기뻐받으십니다. 요나도 니누엘성 사람들이 충분히 꼈듯이 하나님의 참된 선지자입니다. 저는 자 저는 자도 멸시하지 마십시오. 말씀에 저는 자도 그 재물을 취할 것이며라고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몸은 비로 피곤하나 끝까지 쫓아가는 기도원의 선명사 같은 사람들을 우러러 보십시오. 은매가 부드러운 레가 아름다운 라에보다 더 많은 자녀를 낳았습니다.
한나의 슬픔은 분인나의 자랑보다 거룩했습니다. 간고를 많이 겪으신 주님도 애토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있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은혜가 기듯 눈물 흘리는 이들을 주님과 다른 시간으로 보는 사람은 없어야 합니다. 우린 질그릇의 복음에 봄을 담고 있습니다. 질그릇에 여유저기 흠집 있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목회 사역을 하다 보면 영적 침체에 노출되기 마련이다.
목회 사역을 하다 보면 영적 침체에 노출되기 마련이다.
사역을 진지하게 감당하다 보면 영적 침체라는 공격에 노출되기 마련입니다. 맡겨진 영혼들이라는 무거운 짐을지다 보면 때때로 번지 구덩이에 주저 앉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사람들의 회심에 대한 열렬한 소망이 완전히 충족되지 못하면 목자의 영혼은 근심과 낙심에 빠집니다.
회심을 기대했던 이들이 돌아서고 경건한 이들이 미즈해지고 신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남용하고 죄인들이 더 담대하게 죄를 짓는 모습을 보면 좌절하여 땅에 주저 않고도 남을 만하지 않습니까? 주님 나라는 우리의 뜻대로 임하지 않고 주님의 거룩한 이름은 우리 바람대로 거룩히 여김을 받지 못합니다. 이런 일들 때문에 우리는 우울러 마땅합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전하는 것을 믿지 않고 하나님의 전능하신 팔을 나타나지 않는데 어떻게 애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모든 정신적인 수고는 우리를 지치고 우울하게 만들기 쉽습니다.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수고는 정신적인 수고 이상입니다. 그것은 심령의 수고요. 우리의 가장 깊은 영혼의 노고입니다. 주일 저녁만 되면 생명이 우리에게서 완전히 떠난 것처럼 기진맥진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 영혼을 성도들에게 전부 쏟고 나면 우리는 마치 어린아이라도 깨뜨릴 수 있는 빈질 그릇이 된 것 같습니다. 아마도 우리가 바울을 더욱 닮아 순고하게 영혼을 돌아돌봄 돌본다면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는 말씀의 뜻을 더 잘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해 생명을 온전히 바치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자 특권입니다. 우리는 썩지 않게 잘 보관된 미라가 아니라 산 희생제물로서 받쳐줄 운명으로 살아야 합니다.
자신을 잘 보전하고 자기 육신을 돌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소진하고 하나님 손에 다 쓰여져 없어져야 합니다. 신실한 목회자로 영적인 수고를 아끼지 않다 보면 때때로 기진맥진한 상태에 이르게 될 이르는데 그때는 영혼과 육신이 전부 쇠악해집니다. 고하는 모세의 팔도 피곤해졌고 바울도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라고 외쳤습니다. 세례요한조차도 일시적인 침체를 겪은 것으로 보이며 사도들도 한 때는 놀랄며 심히 두려워했습니다. >>
목회자는 교회에서도 고독한 사람일 수밖에 없다.
목회자는 교회에서도 고독한 사람일 수밖에 없다.
교회에서의 우리의 위치도 이러한 침체에 한목 거듭니다. 사역할 준비를 충분히 갖춘 목회자는 대게 다른 사람들 위해 홀로선 고독한 영혼입니다.
목회자가 아무리 아끼는 성도라서도 목회자만이 가진 생각과 근심과 유혹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일반 사병들 사이에서는 전우길이 서로 어깨를 맞대고 함께 걷지만 장교는 계급이 올라갈수록 그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의 수가 적어집니다. 경졸은 많지만 대위는 좋고 대령은 더 적으며 최고 사령관은 한 명뿐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에서도 주님이 지도자로 세우신 사람은 가장 탁월한 사람만큼이나 고독한 사람이 되기 마련입니다. 탄곡대교와 같은 목자들은 장음하게 홀로 우뚝서서 하나님이 그들의 지독한 고독을 위로하실 때 오직 그분과만 대화를 나눕니다. 다른 이들 위에 웃뚝서 신령한 것들을 더 가까이 접하는 하나님의 사람들 역시 약할 때는 사람들의 위로를 받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안에서의 주님과 같이 그들은 주위에 잠들어 있는 성도들에게서 위로를 찾아보지만 화사입니다. 가장 친한 벗들이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면서 그런 적은 어 무리조차 아 그런 적은 무리조차 자신에게 무심한 것에 상심하여 더욱 무거운 짐에 짓눌리며 또다시 은밀한 고통의 자리로 돌아옵니다. 만군의 여호와를 향한 열심히 남들을 능가하는 영혼만이 겪는 그 고독은 겪어본 사람이 아니면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한 고독은 남들이 보면 미쳤다고 할까 봐 감히 드러내지는 못하지만 헛속깊이 불같이 타오르는 열심 때문에 숨길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고독을 느끼는 사람은 오직 하나님 앞에서만 안식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보낸신 것은 주님이 사람의 심중에 있는 약함을 아신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바울과 같은 사람은 어울릴 만한 벗을 찾을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바나바나 실라 혹은 누가는 히말라 산맥의 정상과도 같은 이방인의 사도와 견주기에는 너무 낮은 복음이었습니다. 제가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면 많은 목회자가 느낄 이러한 고독은 침체를 가져오는 중요한 요인입니다. 하나님이 더우신다면 목회자들끼리 모여서 동병상년의 마음으로 경건한 교재를 나누는 것도 이러한 덫을 피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
목회자가 책상에 너무 오래 앉아서 지낸 습관도 한 원인이다.
목회자가 책상에 너무 오래 앉아서 지낸 습관도 한 원인이다.
체질 쪽으로 앉아서 지낸 습관도 우울증을 일으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떤 울중에 해보라는 책에서 울중에 이와 같은 언의 한 장을 하려 합니다. 그는 근거로 제시한 수많은 저자 중 한 명의 그를 인용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학생들은 자신의 모음을 소홀리한다.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현장을 잘 돌본다. 화가는 자신의 화필를 잘 씻고 대장애는 자신의 망치와 모루와 노를 잘 관리한다. 농부는 증기를 손질하고 손도끼가 무어지면 잘 가라는다. 사냥꾼은 매나 사냥 말이나 개따이를 특히 주에서 돌본다. 악기 자는 현학께 주를 미웠다 불었다 한다. 그런데 학자들만이 자신들이 매일 사용하는 도구를 소홀이 한다.
루카누스가 바틀이 끊어질 정도로 세게 꼬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한 말은 참으로 명언이다. 한 자세로 계속 앉아서 제를 뚫어져라 본다든지 팬으로 끊임없이 쓰는 일은 그 자체로 도면 아주 힘든 일 일일입니다. 근데 거기다 방기도 잘 안 되고 오랫동안 운동도 하지 않고 온갖 근심으로 마음이 무겁기까지 해보십시오. 그러면 절망감이 끓는 수처럼 솟구치기 알맞은 조건은 다 갖춘 셈입니다. 안개가 짙게 끼는 계절은 짙은 안개가 운겨 있을 때 악친나는 숲에서 빗방울이 떨어지고 낙엽이 진흙 속에 밟힐 때에는 특히 그렇습니다. 천성적으로 새처럼 교한 사람도 이런 자살 중동 일으키는 상황이 매년 대풀이 되면 견디기 어려울 것입니다.
창밖에서는 자연히 건강과 기쁨을 주겠다 손짓하는데도 그는 소재를 감옥삼아 책을 간수삼아 지낼 것입니다. 히스 겉목 사이로 벌별벌 벌벌들의 융되는 소리 숲속에서 삼들기가 후르 울고 온갖 새들이 지적인 소리 소리 새차게 흐르는 진물이 졸조 흐른 소리 돌가지를 스친 산들 바람 소리이 모든 것을 입고 사는 사람이라면 마음속에 잊어버리고 영혼이 점점 진려간다 해도 전혀 이상할게 없습니다. 하루만 산 하루만 산 위에서 말목에들이 마시거나 몇 시간만 그늘지고 조용한 떠나무 밤 밤나무 숲속에서 산차기만 해도 반쯤 죽은듯한 수고하는 목회자들이 머릿속에 머릿속에 거미줄 걷어낸 듯 맑아질 것입니다.
바다의 공기를 한껏 들이마시거나 벗은 바람을 맞으며 걸으면 영혼의 은혜가 임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온 몸의 산소는 공급될 것입니다. 그것은 내 다음으로 좋은 일입니다. 공기가 무거우면 마음도 무거운 법 바람도 부러워도 절망감은 날아간다. 고살리 산토끼 신물송호 전나무 다람지 달마지꽃 재비꽃 농장 갓 건초 한기나는 흙 열매이 모든 것이 삼심기 이쟁 환자에게는 좋은 가장 좋은 양이고 쇠악가지 사람에게는 가장 확실한 강당제이며 지친 사람들에게는 최고의 원기 회복제입니다. 기회가 없다거나 느껴지는다는 이유로 여러분이 좋은 지료법을 무시하고 스스로 제 무덤을 팝니다.
2. 언제 목회자가 영적 침체에 빠지기 쉬운가
2. 언제 목회자가 영적 침체에 빠지기 쉬운가
제가 경험한 바로는 침체에 빠지기 가장 쉬운 때는 몇 가지 경우로 요약해 볼 수 있습니다.
큰 성공을 거두고 난 후 영적 침체에 빠지기 쉽다.
큰 성공을 거두고 난 후 영적 침체에 빠지기 쉽다.
그중 첫 번째로 큰 성공을 거두었을 때입니다. 오래 품어왔던 소망이 드디어 이루어졌을 때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크게 영광을 받으시고 큰 승리를 거두었을 때 우리는 약해지기 쉽습니다. 특별한 은총이 임하면 우리 영혼히 하늘 높이 솟고쳐 황홀경을 맛보며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즐거워할 것 같이 생각되지만 되게 그와는 정반대입니다. 주님은 좀처럼 당신의 용사들이 승리에 도취되도록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주님은 그런 시험에 견딜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을 아심으로 그들의 자네 괴로움을 섞으십니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온 뒤 바알의 선지자들이 죽임을 당하고 매마른 땅 위에 비가 쏟아진 뒤에 엘리야를 보십시오. 자기 만족의 풍악소리도 승리의 옷을 입은 정복자의 개손 행렬도 없습니다. 그는 이세벨에게 달아났 이세벨에게서 달아났습니다. 그리고는 얼마 전에 격렬한 환이의 모습과는 딴판으로 완전히 침체되어 죽기를 간고합니다. 온 세상의 지배자였던 카이사르도 고통의 순간에 아픈 소녀처럼 울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죽음을 결코 알지 못한 인간은 무덤 속에 안식을 동경합니다. 가난한 인간의 인간 분석은 하늘의 승리가 가져다 주는 부담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 반작용이 반드시 뒤따릅니다.
기쁨이나 흥분이 지나치면 뒤에 이어 침체라는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고난이 지적되는 동안에는 힘이 공급되는 것이 그 상황에 합당합니다. 그러나 고난이 끝나면 천성적인 연약함이 고개를 듭니다. 야곱은 은밀히 하나님께 붙들려 온 밤을 씨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름이 끝나고 아침이 되자 너무 교만하지 않도록 다리를 절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지만 자기를지는 사탄의 사자인 육체의 가시가 필현적으로 뒷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간은 순전한 행복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경건한 이들도조차 자기 분수를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은밀한 낮추심을 경험하지 않으면 이마의 월계가는 음매화를 두를 자격이 없습니다.
부흥해들 떠 있고 인기 우줄하고 영혼들을 많이 구원했다고 기고만장했을 때 은혜로운 자비의 징계가 강한 동풍으로 허형의 배를 깨뜨려 만세 완설 위에 우리를 알몸으로 비참하게 난파시키지 않는다면 우리는 바람에 나는 교와 같을 것입니다. >>
큰일을 이루기 전에 영적 침체에 빠지기 쉽다.
큰일을 이루기 전에 영적 침체에 빠지기 쉽다.
큰일을 이루기 전에 그와 같은 침체는 아주 흔한 일입니다. 우리 앞에 놓인 어려움을 바라보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습니다. 반악 자손들은 우리 앞에 버티고 있고 우리는 그들 앞에서 우리가 보기에도 메뚜기 때 같습니다. 게다가 가나안의 성들은 성백이 하늘에 닿았는데 어 우리가 무엇이기에 그 성들을 함락시키길 바라겠습니까? 당장이라도 무기를 내던지고 주행당을 치고 싶은 심정입니다. 니누에는 큰 성입니다.
우리는 그 성에 떠들썩한 군중과 대면하느니 차라리 다시스로 도망가고 싶습니다. 우리는 이미 생각하기도 싫은 곳에서 멀리멀리 우리를 조용히 실어다 줄 배가지 물색합니다. 무서운 풍락 외에는 아무것도 우리의 비급한 발걸음을 어 막지 않습니다. 제가 처음 런던에서 사역하게 되었을 때 바로 그런 일을 겪었습니다. 저는 너무 큰 성공에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목회의 길이 활짝 열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것 때문에 윽이 양냥하기는 커녕 오히려 끝모를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습니다. 그 속에서 저는 긍휼히 여기소서 다윗의 회계신 시편 51편을 내용으로 하는 라틴어 성가라고 탄식했습니다.
저 높은 곳에 영광이라고 찬양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제가 어떻게 감히 그 많은 양떼를 계속 이끌어 가겠습니까? 어디 외딴 마을에 들어가든지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상관 오지에 홀로 살 곳을 마련하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런데서라면 제게 필요한 일들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바로 그때 제 평생에 사의 윤곽이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것이 어떤 모습으로 펼쳐질 두려웠습니다. 믿음이 부족했던 건 아니었습니다. 다만 좀 겁이 났고 제 자신이 그 사역에 합당치 못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주님이 은혜로운 섭리로 저를 위해 예비하신 그 사역이 두렵게 느껴졌습니다.
제 자신이 어린아이 같이 느껴져서 일어나 산들을 쳐서 부스러기로 만들며 산들로 겨갑게 하라고 이사야 41장 15절에서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으니 겁이 났습니다. 주님이 제 목회에 더 큰 복을 예배하실 때마다 이런 침체가 찾아왔습니다. 은혜의 담비가 쏟아지기 직전에는 먹구름이 잔 뜯기는 법입니다. 침체는 이제 제게 마치 주님의 풍성한 축복이 가까이 오고 있음을 알리는 거친 옷을 입은 선지자 세례 요한처럼 느껴집니다. 저보다 훨씬 탁월한 분들도 그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릇은 문질로 닦아야 주님이 쓰시기에 합당해집니다. 성령의 세례를 받기 전에 고난의 세례가 먼저 있습니다. 며칠 굶으면 잔치상에서 더 뱉어지게 먹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종 모세가 양을 치며 홀로 경건히 기다리는 중에 광야 한가운데 나타나십니다. 광야는 가나안으로 가는 길입니다. 낮은 골짜기는 높은 산으로 이어집니다. 패배는 승리를 예비합니다. 까마귀가 기르기보다 먼저 방주 밖으로 내보내 줍니다. 가장 어두운 밤은 새벽에 오기 직전에 찾아옵니다. 선원들은 파도에 휩쓸려 깊은 곳으로 곤두박치를 쳤다가 다시 다다가 다음 파도에는 하늘 높이 솟구입니다. 그렇게 예관장이 다 놓고 나서야 비로소 바라는 한구에 닿게 됩니다. >>
끊임없이 계속해서 사역하다 보면 영적 침체에 빠지기 쉽다.
끊임없이 계속해서 사역하다 보면 영적 침체에 빠지기 쉽다.
끊임없이 계속해서 일하다 보면 그 같은 괴로움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활을 계속 잡아당기면 끊어질 위험이 생깁니다. 몸에 수면이 필요한 것처럼 정신에도 휴식이 필요합니다. 안식일은 우리가 수고한 날이나니 다른 날을 잡아 쉬지 않으면 탈진하고 말 것입니다. 땅도 때때로 묶혀두어 안심을 지내야 하는 것처럼 무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는 따로 산적한 곳에 와서 잠깐 쉬어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것은 지혜와 긍휼어 나온 말씀이었습니다. 이게 웬 말씀입니까? 사람들은 쓰러져가고 백성들은 산 위에묵 없는 양들처럼 헤매는데 말입니다. 예수님이 싫하고 말씀하시리다니요. 서기관들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악한 악한 때처럼 양떼를 잡아 찍고 있는데 제자들을 한적한 곳으로 되어가시더니요.
열심히 사람이 항상 절박한 피를 어떻게 이렇게 철저하게 등한시할 수 있는 비난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그렇게 어리석게 헛소리하도록 내버려 주십시오. 주님은 당신의 종들을 발전시켜서 이스라엘의 등불로 꺼트리실만큼 어리석지 않습니다. 휴직 시간은 낭비한 시간이 아닙니다. 그 시간은 신선한 힘을 회복하는 효율적인 시간입니다. 여러분 풀 베는 사람을 보십시오. 해가지기 전에 많은 풀을 변하는데도 잠시 예수는 멈춥니다. 름방기에서 그럴까요? 이고 숲돌를 쳐다 싹쓱싹을 내며 나수 위아래로 갈기 시작합니다. 대평가의 그지 없는 음악 소리 아닙니까? 귀중한씨가 그렇게 난비다니요 낮으로 그런 소리가 소리나 내고 있을 동안에 풀을 얼마나 많이 더 뵐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그 연장을 갖고 있었습니다.
다시 힘을 모아 반대 불다시 힘을 모아 낮하기 그와 마찬가지로 정신은 약간의 휴식을 통해 선한 일을 더 힘쓰기 위한 준비를 합니다. 어부는 그물을 손질해 합니다. 우리도 이따금시 정신적으로 마무된 부분을 수리하고 앞으로의 사역을 위해 자신을 재정비해야 합니다. 노예선의 노예들처럼 휠도 없이 매일 노를 젖는 따위의 일은 유원한 인간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물리방은 끝없이 돌고 둡니다만 우린 잠시 멈추고 간간히 쉬합니다. 쉬없이 앞으로 다 날리기만 한다면 숨이 차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아침을 날른 짐승주처도 가끔씩 풀어 놓아야 합니다.
바다도 밀가 썰을 때는 잠시 숨을 고릅니다. 땅도 겨울처에는 안식을 취합니다. 하나님이 사신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도 휴식을 취하지 않으면 세악해지고 등잔을 다듬지 않으면 시작해지며 원기를 회복하지 않으면 금방 들고 합니다. 가끔 휴가를 보내는 것도 지웁니다. 때때로 일을 적게 하함으로써 결국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제충년도 없이 계속 일하는 것은이 무거운 허동을 위해서 해방된 영혼에 어울립니다. 그렇지만 우리가이 육신의 장막 안에 있는 동안은 가끔씩이를 멈추 거룩한 쉼과 경건한 휴식을 취함으로 주님을 섬겨 잠시 일의 군례에서 벗어나는 것은 양심적으로 거리낄 일이 아닙니다.
적절한 대슈을 취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자 의무라는 것을 다른 이들의 경험에서 배우십시오.
때로 한 방의 결정타로 영적 침체에 빠지기도 한다.
때로 한 방의 결정타로 영적 침체에 빠지기도 한다.
때로는 단 한 방의 결정타가 목회자를 침체에 빠뜨기도 합니다. 가장 믿었던 형제가 배신자가 되기도 합니다. 유다 같은이는 자기를 믿어주는 일을 대적해 그 발꿈치를 듭니다. 그러면 그 순간 목회자의 마음은 무너져 내립니다. 우리는 모든 육신의 팔에 의지하기가 너무 쉽습니다. 우리의 많은 슬픔은 바로 그런 경향에서 비롯됩니다. 아끼고 사랑하는 지체가 시험에 넘어져서 그리스도라는 그 거룩한 이름을 거룩하신 이름을 더럽힐 때도 마찬가지로 타격이 큽니다.
이보다 더 나쁜 일은 없습니다. 이런 일이 생기면 목회자는 어느 인적 없는 곳으로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거기에서라면 영원히 숨어서 하나님을 모욕하는 불신자들의 조롱을 더 이상 듣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10년 동안 수고하는 것보다 반역자 아히도벨이나 배도자 데마와 같은 이에게 몇 시간 수월을 겪는 것이 우리의 수명을 더 단축시킵니다. 반목, 분열 비방, 어린석은 빛난따위도 경건한 이들을 뼈를 찌르는 이들을 뼈를 찌르는 칼같이 무수히 쓰러뜨려왔습니다. 거친말은 마음이 여린이들에게 날카라운 상처를 냅니다. 탁월한 많은 목회자는 뛰어난 영성 때문에 이런 일에 매우 민감합니다.
그들은 이런 험한 세상에서 살기에는 너무 예민합니다. 밝길질 한 번에 마른 꿈쩍도 않겠지만 멀쩡한 목사님은 죽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 영혼은 경험을 통해 영적인 전투에서 불가피한 이런 거친 공격에 견딜 수 있을만큼 강인해집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이런 일들에 크게 흔들리고 어둠의 공포에 휩싸여 뒤로 물러나게 됩니다. 참된 목회자에게는 고난이 많은데다가 배운망덕한 신자들 때문에 겪는 고난은 원수로 자처하는 자들의 거친 공격보다 더 견디기 어렵습니다. 마음 편하게 조용한 삶을 살고 싶은 분은 목회를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분이 목회를 하면 금방 진절리를 치며 도망갈 것입니다.
서리 뮤지컬 참사 직후 제가 겪은 것과 같은 무시무시한 공포를 겪은 분은 아마 별로 없을 것입니다. 저는 엄청난 불행의 무게도 무게의 한도 끝도 없이 짓눌렸습니다. 동료와 공포와 죽음이 밤낮으로 제 앞에 놓여 있어서 사는 것조차 짐스러웠습니다. 그때 저는 슬픔 속에서 이렇게 노했습니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생각은 고통만 가중시킬뿐 내 영은 시들고 내 마음은 피폐피하고 낙심되도다. 그러다 그러다 어느 순간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라는 말씀이 제 영혼의 은혜롭게 적용함으로써 그 공포의 악몽에서 깨어났습니다. 주님의 종들은 어떤 고난을 겪더라도 예수님은 여전히 높임을 받으신다는 사실이 제게 다시 이성과 평안을 회복하게 해 주었습니다.
그런 끔찍한 재난이 여러분에게 일어난다면 하나님이 구원해 주시기를 인내함으로 소망하며 조용히 기다리십시오.
고난이 겹칠 때 영적 침체에 빠지기 쉽다.
고난이 겹칠 때 영적 침체에 빠지기 쉽다.
고난이 겹칠 때 욥의 사자들처럼 어 낙심되는 일이 계속 이어질 때 영혼히 나쁜 소식에 동요를 일으키는 동안에 낙심은 마음의 평안을 온통 빼앗아 갑니다. 낙수물도 계속 떨어지면 바위를 달게 합니다. 담대한 마음도 권난이 계속되면 불안을 느낍니다. 경제적으로도 어려운데 설상가상으로 아내가 아프다든가 아이를 잃는다고 해봅시다. 성도들이 매몰을 내뱉는 것 돈보자라. 집사님들은 반대를 일삼고 교인들은 냉담하다고 해봅시다.
그러면 우리는 야곱처럼이는 다 나를 롭게 함이로다라고 부르짖기 딱 닮았습니다. 다윗이 시글락으로 돌아가 성은 불타고 재산은 도둑들은 끌려가고 부하들은 자기를 돌로 쳐 죽이려는 모습을 보았을 때 우리는 다윗이 그 하나님 여호와를 힘 있고 용기를 얻었더라라는 말씀을 읽게 됩니다. 다윗이 그렇게 한 것은 참만 다행이었습니다. 만일 다윗이 산자의 땅에서 주님의 선하심을 보리라고 믿지 않았더라면 그는 곧 쇠잔해졌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난이 겹치면 그 무게가 가중되는 법입니다. 고난은 여럿시 서로 합세의 도적대처럼 우리의 위로를 무자비하게 파괴합니다. 파도가 계속 밀려오면 수영을 아무리 잘해도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두 바다가 만나는 곳에서는 아무리 튼튼한 배라도 상하게 마련입니다. 고난이 주기적으로 멈추기라도 한다면 영혼은 영혼도 대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난이 우박 쏟아지듯이 갑자기 너무 많이 찾아오면 새파랗게 질리게 됩니다. 낙타 위에 짐을 계속 얹으면 결국 낙타 등이 풀어집니다. 그 마지막 짐이 우리 등에 얹혀질 때 잠시 자포자기 상태에 빠지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
영문도 모르는 영적 침체가 찾아오기도 한다.
영문도 모르는 영적 침체가 찾아오기도 한다.
영문도 모르는 침체가 우리에게 찾아오기도 합니다. 그러면 극복하기가 더 어려워집니다.이 없는 침체는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도 없고 다윗의 아름다운 수금 소리로도 추천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정체 없고 형원할 수 없으며 눈앞에 캄캄한 절망과 싸우느니 차라리 안겨워 싸우는 것이 낫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자기 연민조차 불가능합니다. 명백한 이유도 없이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너무 터문이 없고 심지어 악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서 분명히 고통을 당합니다. 이와 같은 우울한 기분을 비는 사람이 있다면 딱 한 시간만 그 고통을 느껴 보십시오. 웃음에서 깨어나 현민의 정 연민의 정품될 것입니다. 굳중심으로 이런 무기감을 덜쳐 버릴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기력을 온통 잃었을 때는 아무 어디에서 그런 결심이 생겨나겠습니까? 그런 경우에는 의사와 목사가 힘을 합쳐도 속수 무척입니다.
소무의 문을 닫아고 우리 영혼을 움치며 감옥에 가둬놓는 그 불과사 이한 새비장을 열어치려면 하나님의 손이 필요합니다. 그 손을 볼 때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이렇게 외치게 됩니다. 찬송할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 하나님이 아버지시요 모든 유례 하나님이시며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 하나님께 받은 위로서 모든 환난 중에 있는 능히 위로하게 하신 이루시로다. 모든 위 하나님께서는 이런 능력을 갖고 계십니다. 간미로운 만각의 해독세로 가슴을 짓누르는 그 해로운 곳에서 우리 마음을 깨끗하게 깨끗게 하시도다. 은배던 예수님이 손잡아 주실 때까지 바다에 가자습니다.
마귀는 주님의 권능으로 권능의 말씀으로 나오라고 명령하실 때까지 불쌍한 아이들을 괴롭히고 못살게 굽니다. 무서운 두려움에 괴롭을 당하고 견딜 악몽이 가히 눌릴 때 우리는 의와 태양이 의의 태양이 떠올라 우리의 어둠에서 비롯된 불행들이 쫓겨나길 바랍니다. 그의 어떤 것도 영혼의 양못 전내지 못합니다. 울증에 대한 책을 쓴 티몰시 로저스와 간미로운 찬송을 쓴 사이먼 브라머니은 주님이 영혼을 빛 영혼의 빛을 가둬가 거둬가시면 사람의 도움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 것인지를 자신의 각자의 경우를 통해 보여주었습니다. 왕이신 예수님의 종들이 왜 그렇게 자주 사망치망을 적에 건너야 하는지를 물으신다면 해담은 그리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이는 이는 그이는이 모든 일은 주님의 성 역사를 초진하는 축진하는 방법입니다. 그 사실은이 말씀 속에 약되어 있습니다.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하나님이 도구를 사용하시더라도 도구의 본질적인 연약함은 분명히 드러납니다. 위대한 장신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할 영광과 즐거움도 나누지 않습니다. 인간은 자신을 비우고 나서야 성령으로 체험을 받습니다. 자신을 광 광풍에 휩쓸리는 낙엽을 인식해야 비로소 진리의 모든 대적에게 노선벽처럼 강인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꾼이 자존심을 게된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끊임없이 성공하고 그 속에서 기쁨이 시들지 않으면 우리의 연약한 정신은 그것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제 정신을 차리려면 우리의 포도주에 물이 섞여 있어야 합니다. 제가 본 바로는 주님이 사람들 앞에서 높이신 사람들은 결코 자신을 높여 마귀의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되게 은밀한 연단을 겪거나 나름대로의 십자가를 졌습니다. 하나님은이 에스겔을 통해서 아 에스겔을 계속해서 인자야라고 부르시지 않습니까? 에스겔이 영광의 극치를 맛보는 와중에도 타원한 영광을 또렷이 바라보는 그 순간에도 인자야라는 말씀이 귀에 들려와 그의 심령을 깨웁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않았다면 그의 심령은 자신에게 주어진 영예에 도취되었을 것입니다. 침체는 바로 우리 그렇게 우리를 겸비케 하면서도 유익이 되는 메시지를 우리 귀에 속삭입니다.
침체는 우리가 더덥고 연약하며 넘어지기 쉬운 인간에 불과다는 사실을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종들이 모든 일에 낙심할 때도 영광을 받으십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다시 일으키실 때 그들은 하나님을 찬송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티클 속에서 엎드려져 있을 때조차도 그들의 믿음은 하나님께 찬양을 가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그만큼 더 감미롭게 전하며 그분의 사랑 속에서 그만큼 더 굳게 세워집니다. 하나님의 종들이이 그릇에서 저 그릇으로 비워져서 자신의 허망함과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을 더없음을 깨닫지 못했다면 몇몇 나의 지긋하신 설교자들과 같이 성숙한 분들을 배출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풀무불과 망치로 망치와 줄로 인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이 땅에서 우리의 삶이 고난으로 점철된만큼 하늘에서의 축복은 그만큼 충만할 것입니다. 우리가 역경의 학교에서 훈련받은만큼이 땅은 더욱 깊게 이름게 될 것입니다. >>
영적 침체로 낙심하지 말라.
영적 침체로 낙심하지 말라.
영혼의 고통으로 심하지 말라는 것이 지혜가 가르쳐주는 교훈입니다. 고통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고 목회의 일상적인 경험으로 받아들이십시오. 침체의 강도가 평소보다 세다고 자신을 이제 쓸모없는 존재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믿음을 버리지 마십시오. 믿음에는 큰 상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원수가 여러분의 목을 밟고 있다 하더라도 일어나 원수를 물리칠 것을 기대하십시오.
현재의 짐을 과거의 죄와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함께 하나님께 내려놓으십시오. 그분께서는 성도들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하루 단위로 아니 시간 단위로 사십시오. 기분이나 감정을 믿지 마십시오. 어마어마한 흥분보다 겨자시만한 믿음에 더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갈 때와 같은 인간의 도움에 기대 기대지 마십시오.들이 벗들이 여러분을 실망시킬 때 놀라지 마십시오. 세상은 우리를 실망시킵니다. 사람에게 한결 같음을 기대하지 마십시오. 사람에게서 실망할 염려 없이 기대해도 좋은 것은 변덕분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여러분을 따르던 사람들이 다른 스승에게 가버려도 놀라지 마십시오.
그들이 여러분과 같이 있 있었을 때도 그들이 여러분이 가진 전부는 아니었듯이 그들이 떠나도 모든 것이 다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촛불이 타고 있을 때 온 힘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십시오. 그러면 촛불이 꺼져도 회할 일이 적을 것입니다.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에 만족하십시오. 그것이야말로 여러분의 참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무익함을 자각하는 것이 고통스럽다면 주님 없이도 스스로 충만해지기를 꿈꾼 것에 대해 자신을 꾸짖으십시오. 지금 누리는 상급에 크게 연연하지 마십시오.이 세상에서 주어진 약속의 보증에 감사하면서 장차 누림 누릴 기쁨을 바라보십시오. 눈에 보이는 결과가 없어도 몇 배나 더 열심히 계속 하나님을 섬기십시오.
햇빛이 비치면 바보라도 좁은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귀한 믿음의 지혜가 있었 속에서도 정확하게 길을 찾아갈 수 있습니다. 지혜는 위대한 인도자이신 하나님의 손을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기부터 천국까지 가는 동안 더 거친 비바람이 몰아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언약의 머리이신 주님이 예배하신 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라고 명하신 길에서 조금 더 빛나가지 맙시다. 좋든 싫든 강단은 우리의 망대요 목회는 우리의 싸움입니다. 하나님의 낯을 뵙지 못할 때라도 그분의 날개 그늘 아래 있음을 믿으십시오. >> 아멘. >> 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