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를 회복시키는 능력

복음의 능력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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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복음은 능력이 있습니다. 복음은 우리를 사망과 저주로부터 구원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복음은 죄와 수치로부터 우리를 회복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복음은 두려움을 이기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는 한 주 보내셨나요?
여기까지만 보아도 복음은 얼마나 귀하고 복된 것입니까? 오늘도 그 귀한 복음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능력을 한 가지 더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것은 관계를 회복시키는 능력입니다.
관계를 회복시킨다는 것은 우리가 함께, 공동체로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함께” 혹은 “공동체”가 의미가 없다면, 관계 그리고 관계의 회복은 그리 중요한 것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먼저 우리는 우리가 관계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요즘 금요찬양예배에서 창세기 강해를 하고 있습니다.
먼저 창세기 1장에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여섯 째 날에 “하나님의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시면서 먼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유일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을 복수형으로 언급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이해합니다. 성경은 참 놀랍습니다. 창세기에서부터 하나님은 당신의 삼위일체를 강조하셨고,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당신이 하나님이심을 알리시고, 또 보혜사 성령님을 말씀하심으로써, 삼위일체의 비밀을 드러내 보여주셨습니다.
삼위일체는 하나님은 한 분이시면서 또한 공동체적이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이해하기 힘든 신비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진리인 것이지요.
바로 그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고 하셨습니다. 그 말은 개개인 인격을 창조하시지만, 그 사람을 홀로 두지 아니하시고, 공동체로 지내게 하시겠다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아담을 지으시고 하나님은 스스로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홀로지내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그리고, 하와를 만드심으로 가족을 이루셨고, 또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말씀하시면서 공동체로 사랑의 관계 속에 살아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는 너무나 소중한 것입니다.
부부관계, 부모와 자녀의 관계, 형제관계, 교회의 지체, 직장의 동료 등 모든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중요합니다.
우리는 그 관계 속에서만 진정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산 속에 혼자 들어가서 도를 닦아서 진정한 사람이 된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 신이 된다고도 하지 않습니다.
물론, 산 위에 있는 기도원이 비성경적이라고 말씀을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도 때로는 홀로 기도하셨고, 산 위에서 기도하시기도 하셨습니다. 기도원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되면, 반드시 산 아래 동네로 내려와야 합니다. 거기서 사람들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야만 합니다.
그런데, 창세기에서부터 사람은 참된 사람, 창조의 목적, 인간의 의미로부터 멀어졌습니다.
먼저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렸습니다. 하나님을 우리의 주인이자 아버지, 왕으로 인정하기를 싫어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가 왕이 되고자 했고, 이어서 우리 중에 누군가 혹은 무엇인가를 하나님을 대신하여 왕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철저히 하나님과의 관계를 외면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고 나자, 우리 사람들 사이의 관계도 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랑의 관계였어야 할 형제의 관계가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형인 가인이 동생 아우를 죽이고 만 것이지요.
어떤 분들은 그것은 특별한 경우에 한정된 것이고, 보통은 사람들이 사랑하며 살지 않느냐고 반문하시기도 합니다. 네. 맞습니다.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언제나 제한적이었습니다. 내가 중심이 되어서 나의 기준에 맞는 사람 혹은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에 대해서 사랑을 베푸는 관계 속에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러한 관계는 언제든지 깨질 수 있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나와 다른 것을 발견한다든지 혹은 나를 사랑하는 것이 식어버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사랑이 변하고 식어가게 됩니다.
예전에 한국 광고에서 유행했던 문장이 있었지요. “사랑은 움직이는 것야” 한 가지 브랜드를 고집하지 말고 새로운 브랜드를 사랑하라는 교묘한 회유책이었죠. 그것은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기호, 그냥 좋아하는 수준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6:32–35 “32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 33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만을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34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꾸어 주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그만큼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꾸어 주느니라 35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그렇습니다. 원래 하나님은 서로 사랑하며 살도록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사랑으로 아름다운 관계를 맺으며 살도록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죄로 인하여 타락하면서 사랑도 타락해버렸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내 감정에 따르는 것이 사랑이라고 사랑을 왜곡한 것입니다.
부부의 세계인가 하는 드리마가 있더라구요. 저는 안보았지만, 거기서 이런 대사가 있었나 봅니다. “사랑에 빠진게 죄는 아니잖아!” 자신의 불륜 관계를 합리화시키기 위해 내뱉는 대사인 것 같습니다. 그 태도는 자신의 감정과 사랑을 동일시하는 오류에 빠진 것입니다. 사랑을 그렇게 감정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얄팍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것은 감정 덩어리인 인간 혹은 동물의 수준으로까지 사랑을 끌어내린 것입니다. 사랑과 욕망을 구분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렇게 왜곡된 사랑으로 인하여 끼리끼리를 만들어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왕따시키고 괴롭히는 세상에 진정한 사랑이 나타났습니다.
오늘 11절과 12절에서는 왜곡된 사랑. 즉 자기중심적으로 자기 입맛에 맞는 사랑이 보여준 세상의 아픔을 보여주었습니다. 서로 무시하고 미워하고 정죄하고 싸우고 나누어지는 세상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13절에서 진정한 사랑을 말합니다.
바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죄인을 위하여 자신의 피를 흘리셨습니다.
에베소서 2:3–5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4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이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우리를 본래 진정한 사람으로 회복시키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셨을 뿐만 아니라, 사랑 안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회복시키신 것입니다.
쇠렌 키에르케고어 “사랑의 역사”
우리는 상대방을 사랑하기 위해서
온전한 인간을 찾아야만 한다고 합니다.
반면 그리스도교는 당신이 눈으로 보는 그 사람을 무한히 사랑하는 그런 완전한 인간 존재에 관해 말합니다.
우리는 완전한 대상을 찾기 위해 위를 바라보려 합니다.
그러나 완전하신 그리스도는 땅을 내려다 보셨고,
자신의 눈으로 본 인간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 분이 보여주신 완전하고 원래의 사랑이 복음에 나타났습니다. 죄인과 원수를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내어주고 피를 흘리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분의 보혈로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것을 선포하는데 그치지 않습니다.
에베소서 2:18 “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함께 하나님께 나아가게 한다고 합니다. 공동체를 회복시키신 것입니다.

주님이 새롭게 하신 내가 귀하다면, 주님이 새롭게 하신 사랑의 관계도 중요합니다.

우리들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은 것을 왜 안타깝게 여기지 않습니까? 왜 그것을 그냥 내버려 두시려고 합니까? 그리스도의 보혈로 이루신 진정한 사랑과 하나됨을 왜 우습게 여기고 내 생각으로 내 기준으로 무너뜨리려고 하고, 무너진 관계를 무시하고 내버려 둔다는 말입니까?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받아주신 사랑이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가 북클럽을 하면서 처음에 읽었던 책 노희송 목사님이 지은 “마음 디톡스”에서 노희송 목사님은 우리가 구속적 경험을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어도 다시 받아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의 죄가 씻겼다는 것을 알고 경험해야 합니다. 우리가 회개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꾸짖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받아주십니다. 그것이 구속적 경험입니다. 복음의 능력입니다. 죄와 수치를 날마다 씻어주시는 복음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 그런 구속적 사랑을 나누어 다른 사람이 구속적 경험을 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과 사마리아 여인, 세리와 이방인들에게 조건 없는 구속적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에서 장발장은 성당에서 은쟁반을 훔쳤습니다. 그가 붙잡혀 왔을 때에 미리엘 주교는 왜 은촛대는 가져가지 않았느냐고 말하며 오히려 은촛대까지 줍니다.
이것이 구속적 사랑의 경험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품어주는 것. 물론 그의 죄를 은근슬쩍 넘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장발장의 형편을 이해하고 보듬고 사랑을 베풀어주었습니다. 이후 장발장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됩니다.
우리 관계 속에서 그런 구속적 사랑의 경험이 많아 져야 합니다. 복음을 스스로에게 선포할 때, 우리는 성령의 능력으로 그런 사랑을 알고 그런 사랑을 베풀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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