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평을 넘어 은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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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은 누구나 “공평”이라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내가 열심히 일한 만큼 대우받기를 원하고, 노력한 만큼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누군가 나보다 적게 일하고도 나와 같은 대우를 받는 것을 보면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이 솔직한 우리의 모습입니다.
  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회사에서 성과급을 지급하는데 직원들 사이에서 큰 불만이 터져나왔습니다. 한 직원은 1년 내내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습니다. 야근도 마다하지 않았고, 주말에도 출근하며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런데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우리 부서 신입사원이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성과급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런 말들이 돌기 시작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열심히 일한 사람이 더 많이 받아야 하는 거 아니야?”, “이제 갓 입사한 신입사원이랑 같은 성과급은 너무한 것 아닙니까?”
  여러분이 만약 원래 회사에서 일하던 저 사람이라면 어떨 것 같으십니까? 아마 화가 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어쩌면 화가 나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릴 때부터 노력한 만큼 얻고, 수고한 만큼 보상받아야 한다는 원리를 배우며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상식으로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 이야기를 하십니다. 12시간 일한 사람과 1시간 일한 사람이 같은 임금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아침 일찍부터 땀 흘리며 일한 사람과 해가 지기 직전에서야 와서 잠깐 일한 사람이 똑같은 돈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저기서 일한 사람이라면 어떠시겠습니까?
  아마 “그건 너무 불공평한 것 아닙니까?”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먼저 온 품꾼들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화가 났고, 주인에게 불평했습니다. 12시간 동안 뙤약볕 아래에서 땀 흘리며 일했는데, 고작 1시간 일한 사람과 똑같은 임금을 받았다면 누구라도 마음이 상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히려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이 이상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잘 생각해야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단순히 노동자의 임금 문제를 말씀하시려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임금 제도가 옳은지, 어떻게 임금을 지불해야 공평한 것인지 가르치시려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포도원 품꾼들에 대한 비유를 드신 이유는, 이 비유를 통해 하나님나라가 어떤 곳인지 알려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나라에 대해 말씀하시기 시작하신 이유는 바로 제자들 때문이었습니다. 본문 바로 앞인 19장 27절에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이 말은 ‘어떤 선한 일을 해야 영생을 얻습니까?’라고 묻던 부자 청년에게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고 예수님께서 답하신 것을 듣고 베드로가 한 말입니다. “저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왔는데, 그렇다면 우리가 얻을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무엇을 받게 됩니까?”라고 물은 것입니다.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이야기가 오늘 본문인 포도원 품꾼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이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나라가 우리의 계산과 얼마나 다른지, 그리고 그 나라가 왜 공평을 넘어 은혜로 움직이는 나라인지 함께 살펴보아, 은혜에 감사하며 나아가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의 비유는 포도원에 필요한 품꾼을 구하러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을 소개하면서 시작합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의 노동 시간은 해가 뜨는 시간인 아침 6시부터 해가 지는 시간인 오후 6시까지였습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시간은 우리가 사용하는 시간과 조금 다른데, 우리가 사용하는 시간으로 바꾸려면 여섯 시간을 더하면 됩니다. 그러니까 주인은 이른 아침과 오전 9시, 정오, 오후 3시, 오후 5시에 포도원에서 일할 품꾼을 구하기 위해 직접 장터로 나간 것입니다.
  농장의 주인이 일꾼들을 찾기 위해 직접 장터로 나가는 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시대에는 매일 일하고 그 품삯으로 하루를 살아가는 가난한 노동자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인이 직접 나가지 않아도 얼마든지 품꾼들을 소개받을 수 있었고, 보통은 청지기를 보내서 품꾼을 고용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포도원 주인은 이른 아침 직접 품꾼을 구하기 위해 집을 나섰습니다. 그리고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인 한 데나리온을 주기로 계약을 하고, 품꾼들을 포도원으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 주인은 3시간 뒤에 다시 장터로 나가 놀고 있는 사람을 보고 품삯을 상당히 줄테니 포도원으로 가서 일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3시간 뒤에도, 3시간 뒤에도 나가서 아직도 그 자리에서 놀고 있는 자들을, 아무도 불러서 일을 맡기지 않는 자들을 포도원으로 보내 일을 시켰습니다.
  코로나가 한참일 때 뉴스를 보는데, 오늘 비유처럼 품꾼에 관한 내용을 하나 보게 되었습니다.
  기자가 해가 뜨기 한참 전인 오전 4시에 인력사무소가 밀집한 사거리에 나갔습니다. 이른 시간에도 불구하고 이미 그 거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을 인터뷰 하는데 오래 전부터 공사장에 가서 일하려고 해도 일거리가 별로 없다고 말합니다. 안그래도 힘든데 코로나 때문에 일거리가 더 줄어서 확실하게 일을 잡으려면 새벽 3시에는 나와서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인력사무소 앞에서 줄을 서고 일거리를 구하지만, 보통 1/3정도는 결국 일거리를 구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우리나라의 이런 상황과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의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일하고 싶은 사람들이 넘쳐났지만, 몇몇은 일거리를 얻지 못해서 거리에서 그냥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포도원 주인은 참 이상했습니다. 이른 아침에 장터에 나가 포도원에서 일할 품꾼을 찾았습니다. 언제입니까? 이른 아침입니다. 이른 아침은 일거리를 구하러 나온 품꾼들이 아주 많이 있는 시간입니다. 그러니까 일이 시작되기 전에 내가 필요한 만큼 품꾼들을 얼마든지 다 데리고 갈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주인은 이른 아침부터 시작해서 다섯 번이나 장터에 나가 사람을 계속 고용합니다. 하루의 노동시간인 12시간 중에서 11시간이 흘렀는데 그 때에도 장터에 나가서, 이제는 가서 일을 제대로 하지도 못할 사람들을 더 고용했습니다. 지금 이 비유를 듣는 제자들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런 행동을 주인이 보였다는 것입니다.
  주인의 행동이 이해는 되지 않지만 그렇게 하루가 지났고, 이제 포도원 주인이 품꾼들에게 임금을 지불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품꾼을 부르러 나갈 때는 주인이 직접 나갔지만, 이제 주인은 청지기를 시켜 품꾼들에게 품삯을 지불하기 시작합니다. 8절 말씀입니다.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일반적인 경우라면 먼저 와서 일한 사람에게 먼저 품삯을 지불해야 합니다. 하지만 주인은 청지기에게 나중에 온 사람부터 시작해서 먼저 온 사람은 마지막에 품삯을 주라고 말합니다. 마지막에 온 사람, 그러니까 1시간 일한 사람이 가장 먼저 품삯을 받았는데 한 데나리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가장 먼저 와서 12시간을 일한 사람도 한 데나리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노동 규칙이든지 오늘날의 노동 규칙이든지 이것은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뒤에 와서 일한 사람이 특별한 기술이 있어서 고부가 가치의 일을 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지금 포도원에서 일한 노동자의 임금이라는 것은 노동 시간에 비례해서 주는 것이 맞지 않습니까? 같은 종류의 일을 1시간 일한 사람과 12시간 일한 사람이 같은 품삯을 받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입니다. 공평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다시 8절 말씀으로 돌아와서, 주인은 왜 청지기에게 임금 지불 순서를 바꾸어서 늦게 온 사람부터 역순으로 주게 한 것입니까? 단순합니다. 제일 먼저 와서 일한 사람들이 그 모든 것을 보라는 것입니다. 만약 일반적인 순서를 따라 먼저 온 사람에게 임금을 주었다면, 그는 한 데나리온을 받고 기분 좋게 집으로 갔을 것입니다. 약속된 시간동안 일을 했고, 약속된 임금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인은 먼저 온 사람에게 마지막으로 임금을 주어서, 자신보다 훨씬 적게 일한 사람이 한 데나리온을 받아가는 것을 보게 했습니다. 이것을 본 먼저 온 품꾼은 자연스럽게 기대하게 됩니다. 무엇을 기대합니까? ‘저 사람이 한 데나리온을 받았으니 나는 그것보다는 많이 받겠구나’라는 기대입니다. 자신은 12시간을 일했는데, 1시간 일한 사람이 한 데나리온을 받아가니 그런 기대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처음 온 사람들의 기대는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열 두배의 일을 했지만 열 두배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몇 배의 임금을 받을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그들도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받았습니다. 물론 그들이 처음 주인과 약속한 임금은 한 데나리온이 맞지만, 더 받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무너졌을 때 이들은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12절 말씀입니다.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먼저 온 자들의 불만이 무엇입니까? 일단 나중 온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은 오전 6시부터 시작하여 오후 6시까지 무려 12시간을 무더위 속에서 일했는데 한 데나리온을 받았으니 나중 온 사람들은 1/12 데나리온을 받는 것이 맞다는 겁니다. 그러니 주인이 그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준 것은 부당하는 것입니다.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주인이 나중 온 자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서 한 데나리온을 주었으면, 종일 수고하고 더위를 견딘 자신에게도 은혜를 베풀어서 더 많이 주어야 하는데, 1시간 일한 자들과 동등하게 대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은혜를 베풀려면 똑같이 은혜를 베풀어 주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입니다. 하루 종일 일한 자신들에게는 공정의 원칙대로 한 데나리온을 주고, 늦게 와서 1시간 일한 자들에게는 은혜의 원칙을 적용하니 이것은 좀 아니라는 것입니다.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저 사람이 한 데나리온 받았으면 나한테는 더 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그렇게 따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을 너무 잘 알고 있어서 먼저 온 사람을 향해 비판의 마음을 가집니다. ‘아니 원래 한 데나리온을 받기로 하고 일했고, 그렇게 받았으면 된 것이지 뭐가 그리 불만인거야’ 이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여러분이 저 상황에 처해 있다고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라면 과연 주인을 원망하지 않을 수 있으시겠습니까? 제가 만약 저런 상황에 처했다면 저는 저 품꾼들보다 더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화내고 불평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온갖 원망이라는 원망은 다 하고, 뒤에서 호박씨 까뜻이 포도원 주인을 욕하고 비난했을 것입니다.
  “아니 내가 새벽부터 나와서 12시간을 뙤약볕에서 더위를 견디면서 일했는데, 해 다 질 때 와서 1시간 일한 사람에게 일당으로 10만원을 줬으면 나에게는 120만원을 줘야지. 120만원은 솔직히 너무 많으니까 적어도 30만원 정도는 줄 수 있는거 아냐?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라면서 엄청 욕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먼저 온 품꾼의 불평에 곧이어 주인이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13-14절 말씀입니다.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포도원 주인은 자신이 잘못한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원래 한 데나리온을 일당으로 주기로 약속하고 일을 시켰기 때문입니다. 계약대로 했다는 것입니다. 주인이 자신의 돈으로 나중 온 사람에게 한 데나리온을 준 것은 주인의 뜻인데, 내가 선한 일을 했다고 악하게 보는 품꾼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먼저 온 품꾼의 마음에 완전히 공감이 되지만, 그들이 주인을 부당한 사람으로 여긴 것은 잘못된 일이라는 것을 주인의 말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주인은 먼저 온 사람들과의 계약에 따라 어김 없이 공정하게 임금을 지불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먼저 온 자들이 불평한 것은 주인이 자신들에게 부당하게 한 것이 아니라, 1시간만 일한 나중 온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었기 때문입니다. 즉 먼저 온 자들은 자신들의 시기심 때문에,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공정성이라는 그 원리 때문에, 자신이 가진 기준과 다르게 행동하는 주인을 부당한 사람으로 간주하고 원망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단순히 포도원에서 있었던 일을 예로 들어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비유는 사람들의 노동문제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나라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에 대해 알려주시려고 이 비유를 말씀하셨기 때문에, 비유 속 포도원 주인은 천국 주인이신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처음 고용되어 온 품꾼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왜 이 사람들의 불평을 이렇게 길게 말씀하신 것입니까? 처음 고용되어 온 품꾼은 자신들이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고, 또 공로의식을 가지고 있던 유대인들과 종교지도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누구보다 먼저 하나님의 언약을 받았고, 율법을 받았으며,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보다 자신의 공로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하나님나라는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가르쳐주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 비유를 통해서 알 수 있는 하나님나라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하나님나라에서 중요한 것은 누가 먼저 부름받았느냐, 누가 얼마나 일을 많이 했느냐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나라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얼마나 했는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은혜를 베푸셨는가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은혜는 단순히 마지막에 온 사람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셨다는 사실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비유를 자세히 보시면 예수님께서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해서 보여주시는 분이 있습니다. 바로 포도원 주인입니다.
  주인은 하루 종일 장터를 찾아다닙니다. 이른 아침에도, 9시에도, 정오에도, 3시에도, 심지어 하루 일이 거의 끝나가는 오후 5시에도 장터로 나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포도원에 일할 사람이 부족해서였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주인은 이른 아침에도 필요한 사람을 충분히 데려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장터를 찾아갑니다. 왜냐하면 아직까지 아무도 불러주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게으른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6절과 7절을 보시면 주인이 오후 5시에도 장터에 있는 사람들을 보고서는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고 묻자, 그들은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습니다”라고 답합니다. 그들은 일하기 싫어서 놀고 있던 사람들이 아니라, 일하고 싶어도 아무도 불러주지 않았던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아마 하루 종일 마음이 무거웠을 것입니다. “오늘도 빈손으로 집에 가야하나”, “가족들에게 뭐라고 말하지”, “오늘도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사주지 못하는구나” 이런 생각들로 가득찬 끔찍한 하루를 보냈을 것입니다.
  참담한 심정으로 장터에 있던 사람들에게 주인이 먼저 다가가서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복음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나라입니다. 하나님은 자격 있는 사람만 찾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세상이 외면한 사람도 찾아가시는 분입니다. 아무도 불러주지 않는 사람도 먼저 찾아가시는 분입니다. 아무 쓸모가 없다고 여겨지는 사람에게도 다시 기회를 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나라는 공평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나라입니다. 하나님나라는 사람이 세운 기준이나 상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언제나 앞서는 나라인 것입니다.
  바로 이런 하나님나라의 원리를 예수님께서 한 문장으로 정리해 주십니다. 16절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이 말씀은 단순히 순서가 뒤바뀐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나라에서는 사람이 생각하는 기준이 통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백성이기 때문에 당연히 하나님나라에서 가장 앞자리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누구보다 먼저 부름 받았고, 누구보다 율법을 잘 알고 있었고, 누구보다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먼저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 생각이 너희를 나중되게 할 수도 있다”고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나라는 공로로 들어가는 나라가 아니라 은혜로 들어가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어느새 나도 모르게 비교하기 시작합니다.
  “나는 교회를 오래 다녔는데”, “나는 저 사람보다 더 많이 봉사했는데”, “나는 저 사람보다 더 헌신했는데”, “나는 평생 교회를 위해 살아왔는데”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우리의 시선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에게 향하게 됩니다. 먼저 온 품꾼들도 그랬습니다. 주인은 자신과 약속한 것을 어긴 적이 없습니다. 주인이 그를 속인 적도 없습니다. 그는 처음 약속한 한 데나리온을 그대로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불평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이 받은 은혜보다 다른 사람이 받은 은혜를 더 크게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내게 베푸신 은혜보다 다른 사람에게 베푸신 은혜를 더 크게 보기 시작하면 불평하게 됩니다. 반대로 하나님께서 내게 베푸신 은혜를 바라보면 감사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나라를 살아가는 성도는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은혜 받는 것을 시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저 사람에게도 은혜 베푸셨음을 함께 기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내가 경쟁해서 얻는 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값없이 베푸시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우리 안에도 먼저 온 품꾼의 마음이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쌓아 온 신앙의 연수와 봉사와 헌신을 하나님 앞에서 내세우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오늘 예수님은 우리에게 다시 한 번 말씀하십니다. 먼저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중 될 수도 있고, 나중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먼저 될 수도 있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내가 얼마나 오래 믿었는가’가 아니라,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받아들이는 겸손한 마음입니다. 내가 먼저 왔든 나중에 왔든, 하나님께서 내게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고, 다른 사람에게 베푸신 은혜도 함께 기뻐하기를 소망합니다. 그렇게 공평이라는 우리의 기준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더 크게 바라보며 살아가는, 공평을 넘어 은혜로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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