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의 감격에 빠져라_예배의 영광과 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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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은 요한복음 사장 23절과 24절 두 절을 우리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아버지께 처음으로 예배하는 자들이 신라절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는데 아니면 당신이 예배하는 자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지.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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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신이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우리들이 교회나 혹은 그리스도인 개인의 문제를 상고할 때에 빠지기 쉬운 위험은 항상 자기 시대나 혹은 자기만의 경험을 중시한 나머지 동일한 고민을 하고 있는 옛 사람들이 어떻게 그 문제를 해결했고 그리고 어떻게 그 문제를 슬기롭게 극복해 나갔는지에 대해서 별로 생각하지 않고 씨름을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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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혈재상 비스마르크는 말하기를 지혜로운 사람은 역사를 통해서 배우고 미련한 사람은 경험을 통해서도 배운다고 했는데 신앙의 세계에서는 경험을 통해서라도 배우기만 하면 참 다행입니다. 경험을 통해서도 배우지를 못하니까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죠. 예배의 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이제 90년대 후반부로 들어서면서 이제 이 예배의 문제가 핫 이슈로 등장했습니다. 특별히 1995년 이후 96년, 97년도로 넘어오면서 이제 이 예배의 문제가 아주 굉장히 중요하게 이슈로 다루어지고 있고 지금도 역시 뜨거운 논란들이 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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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라고 하는 주제가 조국교회에서 이처럼 뜨거운 화제가 되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가 한 두 가지 정도 있는데, 중요한 이유가 한 두 가지 정도 있는데, 첫째,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 하면 교회 성장에 대한 지대한 관심들이 예배에 대한 관심을 촉진했다. 그런 말씀이죠. 다시말하면, 기존에 내려오는 예배가 뭐가 잘못되었는지는 정확히 진단하지 못했지만, 그러나 하여튼 이거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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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하면 성경을 상구하고 뭔가 개혁 신학과 이 복음주의적 정통주의에 빛에서 이런 문제들을 생각했다기보다는 실용주의적인 측면에서 교회가 성장하고 그리고 목회가 번창하는 데 있어서 예배가 minus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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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 때문에 이제 많은 교회들에서 예배를 뭔가 다른 것으로 대치해 보려는 시도들이 많이 수행되었고 그런 것들이 이제 예배에 대한 관심을 촉진했고 또 하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된 것은 열린 예배에 대한 관심이 진짜 이 예배에 대한 많은 갈등을 세대 간에 불러일으켰고 그래서 그러면은 어떤 예배가 참된 것이냐 그래서 급기야는 작년서부터는 이제 그런 열린 예배에 관한 문제들이 심심치 않게 총회까지 신학적인 검토를 해달라는 쪽으로 투신이 투서가 올라갔고 그리고 총회적인 답변이 수렴될 수 있을 정도로까지 그렇게 교회에서 핫 이슈로 등장했기 때문에 그런 것들에 힘입어서 예배라는 주제가 오늘날 조국 교회에서 상당히 중요한 관심사가 되고 있다. 이런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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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제 우리들이 모든 것이 그렇듯이 이 문제에 대해서도 고민할 때 우리들이 너무 상황 대응적으로만 보면은 안 된다고 하는 말씀이죠. 성경적으로 하면 된다. 그런데 사실 그 말이 굉장히 어렵다 이거죠. 왜냐하면은 이미 뭔가 교회적인 상황에 자기가 원하는 어떤 변화를 가하고 싶으면 그것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성경을 보기 때문에 그런 흩어진 성경 구절들을 찾아내서 자기 나름대로 자신의 목회의 방식들을 옹호하는 그러한 해석들을 해 놓는다 이거죠. 그런 식으로 출발을 하니까 성경적이라는 말 그 자체가 호소력이 없다는 얘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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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최대한 정직하게 편견을 버리고 성경이 이 예배의 문제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는지 무릎을 꿇고 귀를 기울인다면 우리는 그렇게 성경을 읽는 사람마다 도저히 합의할 수 없는 그 예배에 대한 견해를 성경 속에서 이끌어낼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 자세도 중요하다. 성경 자체를 연구하면서 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이제 또 하나 고려돼야 될 것은 뭐냐 하면 역사적인 흐름을 한번 생각해 보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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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우리의 예배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이 개혁주의의 예배가 어땠고 더 넘어가서 더 넘어가서 초대 교회의 예배가 어땠고 그리고 그 예배의 역사가 흘러오면서 어떻게 말씀이 사라지고 카톨릭화되어 갔고 그리고 어떻게 종교개혁자들이 그 예배를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하려고 몸부림을 쳤고 그들의 한계는 무엇이며 그리고 그것이 이제 그 이후에 복음주의적 정통주의에서는 어떻게 고백됐고 그리고 시대에는 어떻게 내려왔고 그리고 그런 것들이 이제 20세기에 와서 어떻게 변질됐고 그래서 지금 우리들이 이어받고 있는 이 예배의 이 모습들이 그런 역사적인 줄기에서 어떤 영향을 받아서 형성 어떤 것들이 뿌리를 가지고 있고 어떤 것들이 곁가지고 어떤 것들이 본질적이고 어떤 것들이 비본질적이고 어떤 것들이 성경에 뿌리를 둔 거고, 어떤 것들이 상황에 보조를 맞춘 것이냐 하는 문제들을 종합적으로 검증해가는 가운데 비교적 사실에 가깝고 성경에 가까운 예배에 대한 생각과 견해들이 나온다 이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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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제 문제는 뭐냐 하면 오늘날 예배 갱신에 대한 몸부림들이 많다고 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참 잘 알 수 있을 거예요. 문제는 뭐냐 하면은 생각하는 것들이 너무나 지금 제가 말한 것처럼 역사와 그다음에 또 성경과 그다음에 우리가 처해진 상황과 그다음에 우리의 예배가 확정되기까지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 그 수많은 가닥들과 이런 것들에 대한 입체적인 생각으로 예배의 문제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단선적인 사고를 가지고 예배의 문제를 생각한다. 이거죠. 그러한 맥락에서 예배의 갱신을 부르짖게 된 동기가 뭐냐 하면 교회 성장에 대한 열망과 예배에 대한 관심이 맞물려 있는 것이죠. 90년대는 조국교회에서 실험의 시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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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에 제자 훈련과 성경 강회가 특징이었다고 할 것 같으면은 90년대에는 수많은 프로그램이 교회에서 실현되던 시대였어요. 그래서 무슨 찬양 집회, 정동원 하여튼 다양한 문화사역을 비롯해서 다양한 것들이 교회를 휩쓸고 지나갔어요. 그러고 나서도 교회의 영적인 상태는 그리 만족스럽지를 않았어요. 그러면서 이제 찾게 된 또 하나의 단서가 무엇이냐 하면 이제 예배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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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 예배를 통해서 뭔가 교회에 새로운 생기를 불어넣고 그리고 그 예배가 예배를 뭔가 조직화하고 예배의 환경과 이런 모든 것들을 다 바꾸고 새롭게 해서 그래서 그 예배 속에 다양한 문화도 수용하고 그러면서 그 예배를 갱신해서 그래서 현대인들의 관심을 예배 속으로 집중시키고 그래서 그 예배라고 하는 프로그램을 통해서 무엇인가 교회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고 성장에 도움이 되는 도구로 사용하자라고 하는 그런 것이었거든요. 그런데 그런 출발 자체부터가 벌써 순수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운동들이 성경을 찾아간다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힘든 이야기다 이거죠. 그래서 우리들이 경계해야 될 것이 뭐냐 하면은 실용주의적인 성장주의에서 그런 모든 문제들을 바라보는 시야를 절제해야 된다. 이거죠. 그리고 무엇이 바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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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내려오는 전통들을 점검하고 그 전통들 중에 어떤 것들이 성서적인 뿌리를 두고 있는지 어떤 것들이 그렇지 못한지를 재음미하고 그리고 개혁을 해서 그래서 그 개혁을 통해서 예배라고 하는 행위, 예배라고 하는 이 행위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바른 위치에 정의되고 그리고 그것을 중심으로 목회와 그다음에 성도들과의 관계, 교회의 여러 가지 사역들이 그 예배와 상관관계를 이루면서 재배치되는 이러한 목회 구상 내지는 목회 질서의 재편들이 함께 동반되어서 교회 전체적인 모습이 성서적인 교회의 모습으로 갈 수 있도록 그렇게 만들어야 된다는 그거는 그렇게 해서 성장을 할 수 있느냐 안 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에요. 그렇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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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어차피 기업이 아니니까 이념 자체가 성장이라든지. 성공일 수는 없단 말이죠. 바르게 하는 것이어야 하죠. 그런 가닥에서 우리들이 이 문제를 살펴보려고 해요. 에이든 윌슨 토저라고 하는 미국의 작가는 기독교 사역의 최종적인 목표가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대해서 하나님을 향한 예배자들을 만드는 것이 기독교 사역의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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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복음을 전하는 것도 성경을 가르치는 것도 훈련을 시키고 상담을 하는 것도 모든 것도 결국은 하나님을 향해 무릎을 꿇은 훌륭한 예배자를 만드는 것이 이것이 우리 모든 기독교 사역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할 것 같으면 그렇게 사람들을 세우는 것이 예배자가 되는 것이 목표라고 할 것 같으면은 그러면 예배가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위치가 어떠하냐? 이 예배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이번 강의를 들으면서 여러분들이 깊이 가슴에 정리해야 될 이야기는 저는 지금 하나의 목회를 위한 패러다임으로서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서의 예배를 얘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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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죠.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이 아니라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들을 자기의 백성으로 부르시고 부르신 자기의 백성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동질성을 유지하면서 살아가게끔 만드는 그런 정확한 하나님의 방법이 바로 다름이 아니라 예배라고 하는 것이에요.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identity를 유지해 간다고 하는 것이에요. 이 대목이 굉장히 중요한 대목이에요. 대목이라 이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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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그걸 얘기하기 전에 그럼 지금 이 강연에서 계속해서 얘기하려고 하는 이 예배는 도대체 뭐냐라고 하는 것이죠. 우리는 오늘날 이제 이원론적인 신앙의 태도를 지나치게 경계한 나머지 예배에 있어서도 전 삶의 영역의 예배를 말하고 있어요. 그건 좋고 그리고 성경의 이상이죠. 맞아요. 성경 속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어요. 예를 들자면 로마사 12절에 이것이 너희가 드릴 영적 예벤이라고 했을 때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이세대를 본받지만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선하고 기뻐하시듯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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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이 예배가 사실 1시간 몇 분 동안 드리 이는 그 주일 예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성경은 여러 곳에서 전 삶의 예배화를 강조해요. 그리고 선지자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탄핵했던 가장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전 삶으로 드리는 예배가 좁은 의미로 하나님께 드리는 그 예배의 정신과 불일치했을 때 그래서 삶에서 무너져버린 예배의 관계를 좁은 의미의 예배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 제사를 통해서 보상해 보려고 하는 것들을 선지자들이 그렇게 탄핵한 거거든요. 그런 점에서 볼 때 성경은 예배로서의 전 포괄적인 삶을 강조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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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들이 지나치게 그 한쪽 면만을 보면서 마치 특별하게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서 이처럼 드리는 이 좁은 의미의 예배는 별로 중요하지가 않다거나 아니면 넓은 의미의 예배에 다 흡수되어 버릴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성경을 너무나 편견을 가지고 보는 거라 이거지. 그래서 제임스 파크는 자기의 책 속에서 이런 얘기를 해요.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가장 엄격한 성경의 견해로 돌아갔다고 믿어지는 청교도 시대에 대부분의 청교도들은 이 예배라고 하는 것을 1차적으로 좁은 의미에서 봤다. 하였습니다. 그걸 강조하고 있어요. 좁은 의미에서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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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여기서 얘기하면 예배 그러면 청교도들은 좁은 의미에서의 예배를 두 가지로 얘기했는데 하나는 public service 공적인 예배와 그다음에 private service 개인적인 예배예요. 개인적인 예배는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경건 생활로 나타났고 공적인 예배는 이렇게 함께 모여서 드리는 예배를 의미했는데 주로 청교도들이 특별한 토시가 없이 예배라고 이야기할 때에는 특별한 수식어가 없이 예배라고 얘기할 때는 거의 대부분의 경우가 public service 함께 교회의 지체들이 모두 모여서 드리는 이 공적인 예배를 의미하는 것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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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공적인 예배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들을 만나주시고 그래서 그 백성들에게 말씀하시고 그래서 그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독특성을 유지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중심적인 방법이었다는 것이죠. 물론 하나님께서는 예배 하나만을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적인 정체성을 유지해 오신 것은 아니에요. 다른 도구들도 많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이 사용하시기는 했지만, 메인이 되는 주된 방편은 아니었다라고 하는 것을 염두에 둬야 된다는 거죠. 이것을 가지고 제가 성경을 가지고 창세부터 논증을 해나가면 이 논증을 하다가 어느 시간이 다 갈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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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결론을 이야기하자면 뭐냐. 예배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만나주시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배우고 자기가 누구인지를 확인하고 관계를 확인하고 그 언약관계에 충성을 맹세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거룩한 독특성을 유지해 나가는 인간이 만들어낸 경험적인 방편이 아니라 하나님이 규정해 놓으신 선험적인 방편이다. 이거예요. 이거를 먼저 동의를 해야 돼요. 이거를 동의가 돼요. 이게 만약에 동의가 안 된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다시 정직하게 성경을 읽고 찾아보라 이거죠. 그러면 거기서 우리들은 어떤 사실들을 이끌어낼 수 있냐면 교회 역사 전체를 볼 수 있는 어떤 조망 하나를 얻을 수 있어요. 그 조망이 어떤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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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과 만나주시는 예배의 축복이 있고 그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가슴에 새기고 그렇게 하나님이 자기를 향한 뜻이 무엇인지를 새기는 그 시간에 자기가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깊이 감사하고 하나님의 그 언약의 말씀에 충성을 맹세하고 거룩한 생애를 지내기로 작심하는 살아있는 예배의 생활이 신앙의 중심 속에 없던 교회의 역사치고 하나님의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적이 없었다. 이런 얘기예요. 한번 제 얘기를 듣고 여러분들에게 마음에 깊이 와닿기를 바라는데 한번 여태까지 읽은 성경을 한번 사심 없이 제 얘기를 들으면서 조용히 한번 회상을 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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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실질적인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택하시죠. 그리고 그에게 나타나셔서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셨을 때 아브라함은 아직 자기의 후손들이 자기의 허리에 있었기 때문에 그는 개인적으로 꿀을 엎드려서 하나님을 경배했죠. 자손들이 태어났어요. 교문한 자손들이 태어났죠. 복장들의 역사가 이어졌어요. 그러고 나서 그들이 이제 애굽으로 들어가서 많은 무리들을 형성하게 되죠. 민족을 이루게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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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하나님이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모세를 부르셔서 그 모세로 하여금 하나님이 얼마나 어미로우신 분인지를 깨닫고 그 발 아래 엎드러지게 만드신 후에 하나님을 경배하는 마음으로 가득 찬 모세를 사용하셔서 이스라엘 백성의 해방자가 되게 하시죠.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나타나셨고 그들을 해방시키고자 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애굽에 있던 이스라엘의 장로와 모든 사람들이 고개 숙여서 하나님을 경배하며 예배했죠. 그리고 그들을 구출해내와서 그리고 광야의 교회가 형성되었을 때 그들은 신앙이라고는 그 신앙이 구약의 신앙의 모태가 될 수 있을 것인가가 의심되어질 정도의 신앙이었을 거예요.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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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0년 동안이나 애굽 땅에 있었고, 우상과 결탁하기를 좋아하는 그 사람들이 애굽에서 그 선진 문화를 흠모하면서 어떻게 지냈을 거라는 것은 너무나 뻔하잖아요. 그런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뭔가 제사와 그리고 종교적인 관습들을 유지했다고 하더라도 그 신앙이 정말 얼마나 투명하고 그 하나님께서 그 후에 계시해 주실 여호와의 신앙에 그 전통을 수립할 수 있었는지는 우리 거기에 대해서는 대단히 회의적이다. 그러던 인간들을 불러내어서 제일 먼저 홍해를 건넌 다음에 시내산에 도착하게 하죠. 거기에서 약 11개월 동안 머무르면서 애굽에 있었던 구습들을 모두 털어내고 그리고 거기서 율법을 수여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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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을 수여받을 때에 율법에서 대부분을 차지하는 중요한 규례가 뭐에 대한 규례였죠? 그렇죠. 제사에 대한 의식법의 규례였어요. 그 규례들 가운데서도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뭐죠? 이렇게 하면 연락되리라. 이렇게 하면 연락될 수 없다. 연락될 수 없다. 라고 하는 것은 거의 절망적인 선언이었어요. 그러면서 거기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방법을 배우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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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유리하면서 마지막에 가나안에 들어갈 때까지 혹은 들어간 이후에라도 하나님께서 수시로 이스라엘 백성들과 만나주시는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엎드려 하나님을 경배하고 만난 그곳에서 하나님께선 친히 말씀하시고 말씀하시고 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와 같은 인간들을 선택해 주신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해서 감격하고 그런 거룩한 하나님께 선택받은 자기와 같은 인간들이 하나님의 백성 되었다고 하는 사실에 감격하면서 그러면서 피를 뿌리면서 백성들에게 율법을 낭독하는 사람을 향해서 아멘 아멘 합니다. 무슨 뜻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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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을 위해서라면 피를 뿌리고 죽기까지 충성을 다하겠습니다라고 하는 헌신이라고 합니다. 그거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른 이방의 백성들과 구별되는 독특한 정체성을 유지해 왔던 거예요. 유지해왔던겁니다. 그리고 그 전통이 이제 신약으로 넘어갑니다. 신약으로 넘어가면서 아주 확연한 예배 공동체가 되는 것은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통해서 이제 확연한 예배 공동체가 성립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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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들이 모여서 함께 하나님을 찬미하고 기도하는 자리에 하나님이 오시고 그리고 오시되 설교자의 말씀을 통해서 역사하고 그리고 거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약시대에 느꼈던 것보다도 더 생생한 실재를 중보자이신 그리스도 예술을 통해서 느끼면서 그러면서 신앙적인 정체성을 유지해 갔던 거예요.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온 거죠. 이것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내리는 결론 하나는 이거예요. 예배라고 하는 것은 결코 교회의 성장을 위해서 제자 훈련도 해봤고 찬양 집회도 해봤고 총동원 중일도 해봤고 뭐도 해봤고 뭐도 해봤으니까 이제는 이번에는 예배를 한번 해보자. 그런 것은 아니라는 얘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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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예배가 그것이 공적인 예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의 독특성을 유지하면서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가장 중심적인 방편이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날 교회 조국 교회의 현실이 어떠냐 그거는 비천하죠. 여러분 시간이 없어서 실험을 안 해보겠는데요. 실험일보다 많아요. 여기에 모인 여러분 가운데 대부분은 어제 주일 예배를 드렸는데 성경 어디를 설계했는지 기억하지 못합니다. 통계에 의하면 5%만이 기억을 합니다. 그게 지난주에 일어난 일이 아니라 늘 있는 일이잖아요. 지난주 주일날 예배에서 정말 여러분들은 아주 분명하게 나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그럴 수 있다면 대단히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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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하여튼 제일 고통스러운 게 신앙생활 하고 나서 제가 변화받은 다음에 느낀 게 예배였어요. 왜냐하면, 저는 부교육자 생활하면서 공적인 예배에 참석하면서 특히 주일 예배, 주일 난 예배에 참석하면서 아주 확신 있게 오늘은 주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말씀하셨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예배를 한 번도 못 드렸어요. 하는 예배를 드리고 나면은 분노하거나 가슴이 아프거나 둘 중에 하나예요. 그러면 저는 정직한 양심으로 예배라고 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11시에 예배인데 아니 극장 구경을 가도 15분 전에 가서 팝콘을 먹으면서 기다리던데 그렇지 않아요. 왜? 중간에 보면 재미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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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예배는 15분 전에 와서 기다리는 사람은 손으로 꼽을 정도예요. 10분 전에 오고 5분 전이 러시아에 와요. 그리고 11시가 돼서 서두르지도 않아요. 아무리 복음의 시대라고 하더라도 그렇게 하면 되겠어요. 어떻게? 앉아요. 앉아서 예배를 드리는데 웃기는 게 말이에요. 예배를 끝내는 것이 정해진 시간에 끝내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목표예요. 그래서 그 목표가 성취가 안 되면 어떻게 하죠? 그런데 성취가 안 돼요? 안 되게 생겼어요. 그럼 어떻게 돼요? 찬송가화 382장 1절만 부르고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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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하고 이제 시작하는데 65분의 그 교회는 예배를 마치는데 순서를 세어보니까 23가지예요. 23가지. 그런데 그게 어떻게 그렇게 맞춰지는지 기적인데 하여튼 그 순서가 빠짐없이 다 수행되면서 65분에 끝나는데 봄, 여름, 가을, 겨울 실수한 적도 없어요. 깨끗이 65분. 그리고 예배를 드리는데 사람들이 예배를 드린다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 죄송해요. 뭘 드리는 게 있어요? 자, 늦게 왔으니 몸을 들였어요. 헌금을 많이 냈어요. 물질도 안 들였지. 마음이 있어요. 마음도 안 들였지. 뭘 드렸다는 거야? 도대체 뭘 뭘 드렸는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와가지고 예배를 드리는데 이거는 예배를 드리는 게 아니라 예배를 견디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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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를 견디는데 예배 견디는데 다른 시간은 그래도 견디기가 좀 괜찮아요. 일어났다 앉았다고 찬송도 부르고 또 성가대가 한국수 한다니까 또 앉아서 이렇게 한번 보기도 하고 그런데 예배 견디기의 극치는 설교 견디기예요. 설교견디기. 그 견디는 방법들 수없이 고안해냈죠. 와가지고 우선 성경을 읽고 그다음에 설교가 시작하면 그다음에 주보를 보는 거예요. 그걸 읽고 앉았어요. 그래서 설교가 그렇게 금방 끝나나 항상 계속 재미없을수록 길잖아요. 뭘 그냥 뭐 표현해? 아니 주보 다 나왔는데 빨간 펜 들고 틀린 글자 골침은 뭐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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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시간이 안 가면 뒤집어가지고 감사원금 얼마 들어왔나 보고 200만 원 들어왔네. 감사원금 낸 사람 또 명단까지 주보에 덮잖아. 세계에 유례가 없어요. 그런 주보는 그렇게 해놓고, 한번 세 보는 거야. 200만 원이 들어왔는데 가로로 몇 명, 세로로 몇 명 곱하기 해서 200만 원을 나눠보는 거야. 그래도 안 끝나죠. 그러는 사람 그 다음에 또 옆에 있는 사람하고 쪽지를 써서 주보를 주고받는 사람 그리고 또 뭐 핸드폰은 핸드폰을 왜 켜놓고 예배당에 들어와요? 왜? 그거를 또 주머니에다가 넣고 밖으로 뛰는 사람 그런 사람 졸다가 성경치 떨어뜨리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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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방위 교육이에요. 민방위 교육 민방위 교육이 자매들은 가보질 않아서 모르죠. 참가시켜달라고 하면 아마 해줄 수 있을 거예요. 한번 가보라고. 민방위 대원들 뭔지 잘 알죠? 민방위 교육 제일 먼저 가면 우선 구석진 자리가 어딘가부터 찾아요. 신문 들고 가서 쓰고 자는 거예요. 중고등학교 때 대머리 부서진 교장 선생님이 거 길긴 또 왜 길어? 조회 시간에 그렇게 뉴주얼 고주얼 말씀하시는데 뭐 기억을 해요. 담임 선생님도 구두로 땅 파면서 하나도 못 기억하세요. 그러니까 통계가 나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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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신학교 교수가 조사를 했는데 한국에 있는 복음주의적인 교회들을 내서 예배 끝나고 나오는 사람을 저기 마당에서 앙케이트를 했어요. 지금 예배 드렸습니까? 오늘 목사님이 성경 어디를 설계했습니까? 그랬더니, 이 인간들이 100명 인간 중에서 95명의 인간은 모른다고 대답을 한 거예요. 다섯 명의 사람만 안다고 대답을 한 거예요. 그것도 하루 후에 전화로 확인해 보니까 두 사람은 하루 사이에 잊어버렸다는 거예요. 안심하다고 안심하니까 그게 예매예요. 하나님을 만나요. 만나긴 뭘 만나요? 만날 걸 기대는 하고 와요. 기대는 무슨 기대예요? 그래서 내 평생 소원 200분 빨리 끝나고 집에 갔으면 그러고 교회 꾸역꾸역 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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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에서 절반 이상은 구약을 설계했는지 신약을 설계했는지도 생각이 안 난대요. 그랬니? 그게 교회일 수 있어요. 그러니까 어떻게 돼요?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에요. 그냥 나 좋은 대로 살아가는 거예요. 하나님이 왕이시라고 그러는데 그건 괜히 입바른 소리지. 왕은 왕인데 입헌군주국의 왕, 외국 사절들 왔을 때 밥이나 먹어주는 그런 왕. 그러나 뒷방 노인네 취급하는 거지. 결국 맨날 무슨 하나님이 우리의 왕이고 왕의 왕처럼 대접을 해야지 왕이 얘기하는데 무슨 얘기 했는지도 모르는 게 말이 되냐 이거예요. 그런 식으로 하면서 예배들이 다 곤두박질 치면서 무너져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예배드리자 그러면 스트레스를 받는 거예요. 솔직히 얘기해 보라고요.
34:03
제 말에 대해서 아니오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래도 어떤 의미에서 행복한 사람이에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거기를 아니오라고 말을 못하는 거예요. 예배해 드리자 그러면 막 스트레스를 받는 거예요. 그리고 우리는 또 하나의 예배 우상주의적인 성격이 있어가지고 뭘 하든지 예배 졸업식이면 그냥 졸업식 하면 되잖아요. 예배하고 그다음에 졸업식 무슨 회의를 한다? 그 회의하면 되잖아요. 예배드리고 회의. 그런데 관심은 예배가 아니라 회의예요. 그러면 뻔하잖아요. 설교하라고 부탁을 해놓고, 10분만 해주십시오. 왜 그렇게 하냐? 이거예요. 무슨 예배를 그렇게 뭐든지 할 때마다 그렇게 예배를 드려야 돼요.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합니다.
35:00
그래서 이 세리머니와 월십이 완전히 다 뒤엉켜서 그런 식으로 왜 그렇게 하느냐 이거예요. 그런 상황에서 이제 고통스러운 거예요. 그러니까 예배가 하나도 기쁘고 즐겁지를 않은 거예요. 그러니까 어떻게 해요? 인간이 얼마나 교묘한지 보세요. 예배가 그렇게 재미가 없고 예배의 기쁨이 없는 거예요.
35:31
그러면은 그 성경과 역사를 보면서 어떻게 그 딱딱한 형식 속에서 그 수많은 믿음의 조상들은 이 예배의 영광 예배 속에서 그렇게 어떻게 그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감격하고 그렇게 신령한 기쁨을 맛볼 수 있었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identity를 유지할 수 있었는가를 생각을 하면서 뭐가 잘못됐는지를 성경과 역사의 잣대를 통해서 우리 자신을 점검해야 되는데 그게 아니라 재미없으니까 재미있는 요소를 예배 속에 끌어들이자 그 예배소에 그렇게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돼? 요즘 교회당을 가봐야 이게 교회당인지 말이죠. 이게 무슨 공연장인지 구분이 되냐는 얘기예요. 그리고 막 엄청난 트럭으로 실어다 놔도 모자랄 그런 어마어마한 악기들 악기는 막 이렇게 놓고 사람 찬성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들 부수는데 불만 끄고 번쩍거리는 영락없는 나이트클럽이에요.
36:32
실제로 그런 걸 또 다 알잖아. 예배가 아니라 이제는 공연을 위한 최장으로 바뀌고 있다는 얘기예요. 이런것들은 개혁주의적이고 전통적이지도 않을 뿐 전통적이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성경적이지도 않고 그리고 실제 적용의 면에 있어서도 우리에게 교회의 거룩성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백성들로서의 identity를 회복하게 만들어주는 데 기여하지 못한다. 얘기예요. 그리고 그런 식으로 도입을 하는 거예요. 그렇게 해가지고 예배를 독특하게 변형시켜가지고, 예배 시간에 드라마를 해버리고 설교를 치워버린다든지 말이죠. 그런 식으로 해가지고 영상을 동원해가지고 그렇게 사람들을 즐겁게 한다든지 아니면 열렬한 찬양으로 사람들이 열광 속에 들어가게 만든다든지 이런 식의 시도들이 이루어지고 있는 거거든요.
37:32
그런데 그렇게 사람들을 자극을 해가지고 뭐를 얻어낼 수 있는 얘기예요? 그 열렬히 그렇게 찬양을 해서 마지막 얻는 게 뭐예요? 뭐냐고? 성경 어디에서 그렇게 열렬하게 찬성을 열광주의적으로 찬성을 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identity를 회복하는 거라고 어디 성경에서 그런 걸 가리키냐. 그러는 가운데서 기독교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는 지적인 전통들이 철저하게 유린당하는 거예요. 생각이 없는 사람들로 모두 말하자면, 변화되어 갑니다.
38:11
이런 속에서 교회는 수많은 방법들을 동원하고 예배의 틀이나 이런 것들을 바꿔보려고 애를 썼지만은 그러나 바뀐 것이 뭐가 있느냐 교회의 영성은 점점 쇠퇴해 가고 있고 교회에서는 점점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서 회심을 경험한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사라져가고 있다는 거죠. 이제는 정말 아무 교회든지 출석하기만 하면은 한참 다니면 기독교가 무엇인지 정체를 알 수 있느냐라는 질문에 대해서 목회자의 양심으로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 없는 상황에까지 가게 되었다는 얘기예요. Clearly the time. 그래서 시에츠 다드라고 하는 신학자는 그의 기념비적인 작품인 사도적 캐리그마라는 그 책 속에서 사도적 캐리그마와 그 발전이라고 하는 그 책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39:08
사도들이 와서 오늘날 예배드리는 걸 보면 기절초포가 날 것이다. 자기들이 이 땅에 남기려고 했던 교회는 이런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문제들을 타개해 나가야 되잖아요. 여기에는 우리들이 굉장히 입체적인 입체적인 접근이 필요해요. 그래서 예배를 생각할 때 우리들이 그냥 아무렇게나 한 시대에 그냥 우리가 편한 걸로 이렇게 드리자.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해야죠. 몇 가지 원칙이 있는데, 우선 첫째는 뭐냐 하면은 성서적이어야 돼요. 성경을 성경의 역사와 성경의 진리를 깊이 탐구해서 그래서 성경에 가장 가까운 그런 예배의 정신을 갖고 그 형태를 가진 그런 예배해야 된다. 이거죠. 그리고 또 두 번째는 뭐냐 하면 보편적이어야 돼요. 보편적 보편적이어야 돼요.
40:07
보편적이어야 된다는 것은 무슨 얘기냐 하면 여기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릴 때에 하나님의 백성 중에 일원임을 느끼면서 예배를 드릴 수 있었는데, 저기에 갔더니,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이런 식이 돼서는 이게 예배의 보편성의 원칙에 위배되는 거라는 얘기예요. 그렇잖아요. 장로 교인이라고 할지라도 감리교에 가서 예배를 드리면서도 확연히 이거는 하나님과의 만남을 가져다주는 예배 속으로 내가 들어와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어야지 이게 워낙 파격이 되어버린 나머지 이것도 예배인가 이런 혼돈을 가질 수 있으면 안 돼. 가는 교회마다 다 중구난방으로 틀린 그런 것들이 예배의 원칙이 아니라는 거죠. 세 번째는 고백적이어야 된다는 거죠.
40:55
그래서 예배 속에는 단지 차갑게 의식으로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차가운 의식 속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온 회중들이 하나님 앞에 자신의 신앙을 자신의 죄악을 고백하면서 자기들이 알고 있는 그 하나님을 고백하는 형태의 예배가 돼야 된다는 거죠.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는 그 예배가 회중적이어야 된다는 거예요. 회중적. 그래서 이 회중적이라는 말은 카톨릭을 대항하는 이야기죠. 카톨릭의 예배는 사제적인 예배죠. 그런데 그게 이제 서방 교회의 전통인데 동방 교회에서는 또 좀 달랐어요. 어쨌든 그렇고 그런데 어쨌든지 간에 교회가 말하자면은 회중적이어야 된다. 이거죠. 이게 사제적이 아니라 회중적이어야 된다. 그것이 신약 성경의 정신에 어울리는 것이다. 이거죠.
41:48
그래서 이런 아주 종합적인 접근이 필요하고 그리고 이러한 예배의 형태를 확정짓는 데 있어서 신학적인 고려, 문화적인 고려, 역사적인 고려, 전통적인 고려 이런 것들이 모두 함께 생각되어지면서 그러면서 무언가 거기에서 합당한 그런 예배의 형태들이 탄생돼야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나는 이런 게 좋다. 그리고 그렇게 그렇게 끌어가는 그런 것들은 지각 있는 기독교 사회학자가 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조건 고수하거나 무조건 타파하자는 것이 아니라 뭔가 입체적인 전망을 가지고 그거를 모두 알면서 그렇게 진단하면서 뭔가 예배의 회복을 우리들이 바라봐야 된다. 이거죠.
42:36
그렇다고 볼 때에 그러면 이제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예배에 대해서 그런 모든 것들을 고찰해 나가면서 궁극적으로 꿈꾸는 것이 뭐냐 하면 예배에는 영광이 있다는 거예요. 예배영광. 그러니까 이 예배는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들을 가르치시고 자기의 백성들을 자기 백성답게 세우시는 자기의 백성답게 세우시는 아주 중요한 방편이라 이거예요. 그리고 주된 방편이라니까 주된 방편 거기에 굉장히 놀라운 영광이 있는 거예요. 신앙생활 속에서 신앙의 경험 속에서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만큼 영광스러운 일이 어디에 있겠어요?
43:28
그래서 Martin Lloyd Jones 목사님은 팔복을 강의하면서 그 팔복 중에서 최고의 지고의 복이 마음이 청결한 자들에게 주시는 복인데 그것은 하나님을 뵈 없는 복이다. 이번 강연의 특성상 이제 이런 모든 문제들을 다룸에 있어서 저는 급소를 먼저 치고 싶다. 급소를. 그러면 이런 모든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 이거죠. 예배의 갱신을 한참 열띠게 토론을 하길래 이 목회자는 뭔가 이 고통스러운 예배 상황에 대해서 깊은 아픔을 느끼고 있구나. 뭔가 기대가 된다. 그렇게 생각했더니, 나중에 알고 보니까 열변을 토하고 나더니, 마지막 이야기하는 게 뭐냐.
44:23
따라서 얘기하는 게 교회를 다 뜯어서 인테리어를 다시 하고 조명을 고치고 그리고 천연배를 보강하고 보컬팀들을 만들게 됩니다. 이거는 희망이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는 그런 문제들을 그렇게 접근하지 말고 그러면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것들이 뭐냐? 어떻게 해야지만 그 예배가 영광을 회복할 수 있느냐 그거예요. 그것에 대한 대답이 가장 명확한 대답이 오늘 우리가 읽을 성경 본문 속에 나와 있는데, 그것이 바로 다름이 아닌 예수님이 수가산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과 함께 대화하시는 가운데 말씀하셨던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니 예배하는 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시니라. 하나님은 이렇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느니라 하는 그 말씀이에요.
45:23
그래서 이제 여기에서 이 구절만큼 신약에서 예배에 대한 정확한 지적을 해주는 명시적인 성경 구절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이 문제에 대해서 존 맥아더는 말하기를 당시에 이 사마리아 사람들은 여러분들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사마리아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유대인과 단절돼 있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들만의 사마리아 오경을 가지고 그리고 모세가 축복을 선포했던 그리심산을 중심으로 그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독특한 예배 생활을 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그 예배 생활은 어떤 것이었냐 하면 지적인 요소가 결핍된 아주 열광적인 예배였다고 해요.
46:14
반면에 유대인들의 예배,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드리는 이 예배는 열정은 없고 차가운 지식만 있는 예배였어요. 양자를 겨냥하면서 예수님께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거예요.
46:35
여기에서 우리들이 예배의 형태라든지 이런 모든 것들은 역사와 여러 가지 요인, 성경과 여러 가지 많은 요인들을 고려하면서 다시 생각해봐야 될 문제이지만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예배가 예배되게 하는 그래서 예배가 예배되어서 그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을 만나주시고 그래서 그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독특성을 유지하면서 살아갈 수 있게 만들어주는 그 예배가 되기 위한 가장 본질적인 두 요소를 만나는데 그것이 바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진이라고 하는 말씀에서 요약이 되는 거예요.
47:16
그런데 이 구절도 사실은 제가 신학교 가서 희랍어 성경 자체를 보기 전까지는 교회에서 수없이 설교도 듣고 성경도 공부했는데 그냥 신령과 진정으로 그러니까 이거는 하나의 신령 그러면 세속되지 않게 거룩하게 떠들지도 말고 이렇게 좀 신령하게 그렇게 드리라는 거고, 진정이니까. 그거는 그냥 건성으로 드리지 말고 진심으로 드려라 그렇게 해석을 이해를 했어요. 또 그렇게 배웠고 그러니까 예배는 좀 딱딱해 보여도 좀 거룩하고 세속적이지 않고 그리고 나올 때도 이렇게 넥타이 메고 이렇게 하고 나오고 그러는 거고, 그다음에 건성으로 드리지 말고 진심으로 예배를 드려야 된다. 그런 정도 알았거든요. 그런데 가보니까 사실은 그런 뜻은 전혀 없어요. 이 속에.
48:16
희랍법 원문에 의하면 이것은 영과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영과 진리 안에서. 그러면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린다고 하는 것이 무슨 의미냐? 바로 그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외의 영광을 회복하기 위해서 다시 되찾아야 할 본질적인 요소가 이거죠. 정직하게 성경을 찬찬히 읽어보면 우리는 예수님의 짧은 이 대담 속에서 이런 중요한 암시를 찾아낼 수 있어요. 하나님은 이렇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는 양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지니라. 무슨 얘기냐 하면 하나님이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는데 어떻게 예배하는 사람을 찾는다고요? 이렇게 예배하는 사람을 찾는데 이렇게라고 하는 예배의 방식을 뒤에서 보여주는데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하는 사람을 찾으신다.
49:15
그럼 그걸 뒤집어서 이야기를 해보면 이런 논리가 성립하잖아요. 하나님은 저렇게 예배하는 사람은 안 찾으신다. 그 얘기하면 꼭 이렇게라는 방식을 따라야 한다. 이거죠. 그러니까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하는 예배가 아닌 다른 방식의 예배이면은 하나님을 만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거예요. 그거예요. 그러니까 이들이 굉장히 사마리아 사람들이 열렬하게 하나님을 예배했지만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가 그들이 예배 속에서 지향하고 있는 예배의 방식이 이렇게의 그 예배의 방식이 아니었다는 거죠. 또 유대인들의 예배도 역시 마찬가지고 말이죠. 그러면 이제 이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이냐 이런 얘기죠. 그러면 여기서 얘기하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한다는 것이 무엇이냐?
50:11
여기에서 우리들은 예배를 예배되게 하는 본질적인 두 가지 요소를 먼저 발견하게 되는데 첫째는 영이라는 문제이고 두 번째는 진리라는 문제예요. 자 우선 그럼 하나씩 더듬어 봅시다. 0이라는 이 문제는 그러면 예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한 요소를 의미하는데 이거는 무엇이겠는가? 0 안에서 들인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죠.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살아계신 하나님과는 무한한 질적인 차이가 있어요. 비록 하나님을 더듬어 알 수 있는 종교적인 씨앗이 인간 속에 남아 있다고 할지라도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을 찾기는 불가능해요.
51:01
그럴 때에 그러한 인간에게 오셔서 하나님을 경험하게 해 주시고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체험을 통해서 알게 해 주시고 진리를 우리의 마음속에 확연하게 생각나게 만들어 주셔서 하나님이 어떤 성품을 가진 어떤 존재이며 그러한 성품을 가지신 그분이 우리에게 어떤 삶을 요구하시는지를 깨닫도록 만들어주시는 역할을 하시는 분이 있는데, 그분이 바로 성령님, 성령님입니다. 성령님입니다. 이 성능과 진리 이 문제는 말이죠. 성경의 화두이고 특별히 가톨릭화된 교회를 새롭게 회복할 때 종교 개혁자들의 모든 전 생애의 신학 작업의 화두였어요.
51:59
이게 성경과 진리 이 두 개가 화두였다고 합니다. 말씀과 이런 거죠. 그러니까 퀘이커 교도 같은 사람들은 말이죠. 예배 속에 어떤 질서나 이런 것들. 보다는 조용히 하나님을 명상하는 가운데 내재적인 내적인 조명을 통해서 우리를 이렇게 감동시키시고 역사하시는 그런 하나님을 기대하는 성령 하나님을 기대하는 거죠. 그래서 누구든지 성령에 감동이 있는 사람은 일어나서 설교도 하고 기도도 하고 그러는 거예요. 그러나 종교 개혁자들의 생각은 달랐어요. 어떻게 달랐냐 하면 성령과 성령이 인간에게 역사하시는데 성령은 홀로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그 말씀을 통해서 역사하신다는 소위 얘기하는 라틴어로 꿈 베르보의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씀과 함께 역사하십니다.
52:59
통상적으로라는 말을 꼭 붙였어요. 통상적으로 성령님은 거의 모든 경우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역사를 하신다. 그것이 이제 후대의 청교도들에게도 넘어가게 되면은 오행 같은 사람들한테 와 가지고는 더 엄격한 견해가 돼요. 그래서 어떻게 되냐면 말씀으로 말씀을 가지고 역사하시지 않는 성령의 역사는 우리들이 신뢰할 수 없다. 그게 종교 개혁자들이 이 카톨릭 교회에서 개신교회를 세우고 사도적인 전통을 신학적인 전통을 다시 세워서 이 땅에 교회 본연의 모습을 만들어 놓은 두 개의 중요한 화두였다고요. 그 두 화두가 예배 속에서 만나는 거예요. 예배속에서. 예배 속에서 만나는 거예요. 그러면 말이죠. 우리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거죠.
53:56
그렇게 예배 속에서 두 화두가 만나는데 그러면 이제 이 성령의 문제를 우리들이 어떻게 생각해야 될 것이냐. 이 두 개를 제가 따로 나누어서 설명하지만 그러나 이 두 개가 따로 떨어진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거죠. 절대 안 된다. 이거죠.
54:11
그런 약점을 가지고 있는 오늘날의 예배 현장이 뭐냐 하면은 그 오순절적인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의 약점이 뭔가 성령을 향해서 열려 있고 체험에 대해서 열려 있고 그런 것들에 대한 간절한 구함도 있고 본받을 점이 많은데 단 문제는 뭐냐 하면은 교회로 하여금 사도적인 신앙을 회복하게 만들었던 이 개혁신앙의 두 화두, 즉 성령과 예배의 문제에 있어서 성령님이 말씀을 통해서 함께 역사하신다고 하는 이 강한 신앙을 붙들지 못했기 때문에 성경의 진리를 그 신앙의 표준으로 삼고 그것들을 집요하게 추적해서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그들이 그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무엇을 말하는지 전달하는 것을 예배에 있어서 가장 중심적인 과제로 삼지 않고 있는데, 문제가 있기 때문에 그것이 주관적으로 흘러가는 거죠.
55:14
그렇게 하고 본다면은 그러면 이제 예배에 있어서 이 성령의 요소를 이제 우리들이 어떻게 다루어야 될 것인가? 우선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성령님은 땅에 있는 이 인간이 하늘에 있는 거룩한 하나님의 성품을 경험하고 그리고 우둔한 인간의 지성을 열어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에 깊은 의미를 터득하고 깨달아서 그 깨달음의 과정을 통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마음이 자신에게 부어지도록 만드시는 하나님이에요. 성년님이 바로 그런 하나님이세요. 그리고 성령님이 그렇게 역사하실 때 예배 속에는 우선 제일 먼저 나타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체험의 요소가 예배 속에서 나타난다는 거죠. 그런데 오늘 여러분에게 묻고 싶어요.
56:07
최근에 여러분 예배를 드리면서 깊은 감동을 받고 그냥 시집살이 서러워서 운 거 직장 잘려서 운 거 그런 거 말고 어? 예배 속에서 이전에 예배드리기 전에는 미처 가슴에 다가오지 않던 하나님의 성품이나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행동 중에 어떤 진리를 깨닫고 그것이 커다란 간격으로 밀려왔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만나는 감격 속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예배드린 최근의 경험이 언제야? 이 체험의 요소가 왜 중요하냐면요.
56:57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조나단 에드워드가 이야기했듯이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사물을 지각하고 분별할 수 있는 두 가지 기능을 주셨어요. 하나는 뭐냐 하면 사실을 인식하는 지적인 기능이고 또 하나는 어떤 것을 볼 때에 좋다. 싫다 하는 그래서 마음이 기울어지거나 반감을 갖게 하는 정서적인 작용을 우리에게 주셔서 그것을 가지고 사물을 분별하게 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느끼는 것이 없고 경험되는 것이 없는데 그런 진리를 위해서 목숨을 걸고 산다.
57:45
만나는 만남의 경험이 없는 이름 모를 그 하나님을 위해서 이름을 모른다고 하는 것은 진짜 이름을 모른다는 게 아니라 그 이름이 경험되지 않는 그분을 위해서 진실하게 사려고 노력을 한다든지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고난을 받는다든지 하는 것들은 가능하지도 않거니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동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에요. 그렇기 때문에 이 체험의 문제도 말이죠. 체험을 너무나 체험적인 것들을 강조하면서 교회가 많이 망가졌거든요. 솔직히 말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 한국 우리나라 교회 역사를 보면 그런 문제들을 너무 많이 낳잖아요. 기도원에 가면 방황 가르켜 줄 테니까는 따라 하라고 따라서 하는 방안이 어떻게 그게 방언이에요.
58:42
그런 식으로 말하자면은 하는 그런 거 이런 체험들이 가져오는 많은 문제들을 알았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체험에 대한 두려움이 생겼기 때문에 뭔가 우리에게 체험되어지는 것은 위험하고 값싸고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체험은 경계해야 된다라고 하는 이 심리가 예배에 있어서 참된 자유를 많이 뺏어갑니다. 신앙생활 전반에 있어서 이런 것들이 체험적이 되는 것, 감정적이 되는 것에 대한 지나친 경계가 잘못하면 성령님을 훼방하는 데까지로 나간다. 성령님을 훼방하는 데까지로 나간다. 그래서 말이죠. 이런 문제를 우리들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들이 항상 이 문제에 있어서 균형을 잡아야 돼요.
59:39
그래서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이것은 자네 정말 그 길을 가려나의 제5장을 보면은 장문의 논문이 한 편 실려 있는데, 거기에 보면은 이 체험의 문제를 가지고 교회사에서 얼마나 방황을 하고 성경적인 중심선이 어떤가 하는 문제가 나와요. 그럼 그쪽을 참고하시고 그럼 이제 결론을 이제 계속 얘기를 진행하겠어요. 성령님이 오심으로써 예배는 말로만 듣던 그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는 거죠. 그런데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 있느냐 이거죠. 예배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 하나님을 경배함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에요. 영화롭게 하는 거죠.
01:00:31
그렇게 하나님을 경배함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인데 하나님이 이 공적인 예배를 통해서 받으시는 영광이 개인적인 예배를 통해서 받으시는 영광보다 매우 크다는 사실을 청교도들은 누차 지적했어요? 그 사람들이 얼마나 본질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는데. 조지 스윈록 같은 청교도는 뭘 얘기하냐면은 이렇게 얘기했어요. 그러니까 이게 까딱 잘못하면 오늘날 교회 성장주의자들에 의해서 오해받을 수도 있는 대목인데 잘 들어보세요. 하나님은 많은 수의 백성들이 예배할수록 더 많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오늘날 성장주의자들이 얘기를 들으면 귀가 솔깃하겠지. 그렇죠? 그런데 그 사람의 마음속에는 사실 그런 게 있었던 것은 아니에요. 그럼 뭐냐 이거죠. 아니 당연하잖아요. 우리가 너무 새가경을 쓰고 볼 거 없어요.
01:01:31
이 땅에 온전한 부흥이 와서 물이 바다를 덮은 것 같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충만해져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실현되면 그 마지막 모습은 어떤 모습이에요? 사람들이 모든 사람들이 예배 정신으로 살아가고 정해진 예배 시간이 되면 모든 사람들이 열렬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학교에 진심으로 무릎을 꿇고 성령해 주시는 은혜를 통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대면하고 거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신 것을 한없이 감격하고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면 그대로 살겠습니다라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충성하며 그 말씀을 쫓아서 살겠노라고 맹세하고 어두운 세상으로 나가는 그 예배의 그림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온 그 그림 아닙니까?
01:02:29
그러니까 그 청교도가 많은 사람이 많이 모일수록 하나님 이 영광을 받으신다고 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거예요. 교인이 이만큼인데 다른 사람들은 다 놀러 가고, 낚시질 가고 구경 가고, 노래방 가고 단란주점 가버리고 여기 한 7명이 모여서 제일 열하게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물론 그들의 자리도 오셔요. 그거보다는 그런 사람들이 모두 회신하고 변화받아서 교회에 나와서 예배 시간에 공부 적극적인 예배 시간에 전심으로 그리워하던 하나님께 경배하는 그거를 통해서도 영광을 받으신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아요. 수량주의나 물량주의하고는 관계가 없는 거예요. 그리고 그것이 기독교, 기독교 선교의 궁극적인 열매예요. 그 예배의 모습이 그 예배의 모습이 그대로 삶으로 이어질 것이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기억해야 될 것은 말이죠.
01:03:25
성렴의 문제를 논의하면서 우리들이 함께 기억해야 될 것은 삶을 능가하는 예배도 없고 예배를 능가하는 삶도 없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 영적인 잔재주꾼들은 많이 늘어나고 있지만 영적인 거목이 될 만한 사람들이 나타나지 않는 가장 그 궁극적 가장 중요한 원인이 뭐냐 하면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예배를 경험한 사람들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신학교 문제를 가지고 많이 떠드는데 해결 방안 하나예요.
01:04:00
가장 중요한 건 뭐냐 하면은 채플 시간 유일신학교 채플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경험하고 진리를 진리답게 외치는 것이 무엇이고 그러한 사람들의 삶이 무엇인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예배와 설교의 그 전형을 자기들이 그 실천 신학의 현장에서 경험할 때 그때 신학이 다시 세워지는 거예요. 솔직히 이런저런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신앙의 힘만큼 위대하지 못할 점이 많아요. 한번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고 신앙이 올바르게 들어가면 그 지식으로 쌓아 올린 것들은 우르르 무너지는 경우가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역사의 그런 예가 너무나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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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몇 가지로 나간 것 같습니다마는 예배 속에서 성령님이 함께하실 때에는 그 예배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궁극적으로는 예배의 목표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인데 목적이 그 목적에 도달하는 목표는 뭐냐 하면은 하나님과의 만남이에요. 이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이에요. 이런 것들을 간과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있었던 가장 커다란 문제가 뭐냐 하면 뇌물 개념의 예배의 문제였어요. 뇌물 개념의 예배의 문제. 뇌물 개념의 예배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니까 그러니까 그 하나님과의 만남이 불가능해지는 거예요. 하나님 인격적인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뇌물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은 주는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그것을 주느냐 그런 것들은 뇌물에 있어서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요.
01:05:51
실제로 거래 관계가 이루어졌느냐 안 이루어졌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거죠. 예 그런 거죠. 그런 것들의 대표적인 예가 우가르 신화 같은 데 보면은 중동 지방에 있었던 고대 중근동 지방의 신광들을 엿볼 수 있게 만드는 내용들이 굉장히 많이 나와요. 그 신화들을 볼 것 같으면은 그들이 상상하고 있는 신이라고 하는 것은 모두 무언가를 얻어먹고 싶어서 걸근 데는 모두 이 걸기 들린 신들이에요. 그래서 우리 조상들이 섬겼던 신들도 그렇잖아요. 그 신들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뭐예요? 제삿밥이에요. 제삿밥. 제사법이에요. 그래서 그거를 잘 해주면 기분이 좋고 그걸 잘 안 해주면 심통을 부린다 이거죠. 그런데 그 심통 부리는 것도 어떤 도덕적인 일관성은 없어요.
01:06:48
그러니까 우리 조상들은 그런 신들로부터 복을 받는다라고 하는 그런 개념은 없어요. 집터를 파놓고 기초공사를 하고 돼지머리를 놓고 절하는 그 수많은 건축업자들과 건물주들의 기대 속에서 무슨 터줏대감의 복을 받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이거 먹고 좀 잠자코 가만히 있어라 라고 하는 하나의 뇌물성 선심성 내지는 뇌물성 제사예요. 그런데 성령님이 그 속에 오셔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실재를 느끼고 그분을 경험하게 하는 체험적인 요소가 사라질 경우에는 필연적으로 예배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없는 상태에서 이런 비인격적인 뇌물형 예배로 바뀌어 간다 얘기예요. 예를 들면 이런 얘기 하나요? 교회에서 가끔 보면 교인들 중에 교회 못 나온다고 목회자한테 통보하는 사람들 있죠. 거기다님 다음 주일에는 제가 못 나옵니다. 그러세요.
01:07:47
너무 바쁘신 모양이군요. 알았습니다. 그런데 나 왔어요. 얼마 어떻게 못 나오신다든지 나왔어요. 왠지 주일날 안 나오면 일주일 내내 찝찝해서요. 그게 뇌무령이지 뭐예요? 진리가 그립다든지 하나님을 만나야 되겠다든지 그런 일편단심으로 나온 게 아니라 도장 찍고 가자. 그런 생각으로 나온 거예요. 그리고 어떤 그릇된 이 살아가는 자신의 삶에 대한 적절한 보상 의식을 가지고 있는 그런 것들이 정말 올바른 것이냐라는 거죠. 이건 벌써 이미 전통이 굉장히 오래된 거예요. 그것과 함께 인제 그 대두되는 것이 그 히브리 저 히브리 사람들의 성경 구약성경에서 말이죠. 얘기하는 그 소위 얘기하는 리브 패턴이라는 거예요. 리브라는 말은 히브리 말로 다툰다는 뜻이거든요. 리브 패턴이에요.
01:08:43
리브 패턴이 뭐냐 하면은 선지자가 하나님을 대신해서 말씀하고 그리고 가상적인 이스라엘 백성들과 말하자면, 논쟁하는 장면이 넌 나를 버렸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리가 언제 주님을 버렸습니까? 너희들이 내가 너희를 사랑했으나, 너희들은 나를 버렸고 그리고 나를 진심으로 경배하지 않았다. 이스라엘 백성들 우리가 언제 하나님께 제사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절기를 따라서 소를 들이고 양을 들이고 예물을 들였고 하나님을 섬기는 데 빠진 적이 없었습니다. 마음 전부를 내게 들이지 않는 것은 내게 들인 것이 아니다. 그러면서 이제 결론이 끝나는 겁니다.
01:09:17
그러니까 제사를 두고 하나님이 그 제사를 향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기대하시는 그 수준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엄청나게 다른 건데 그렇게 다르게 만들어진 이유가 무엇 때문이냐면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화를 형성하고 있었던 고대 중근동 종교 속에 흐르고 있는 뇌물, 뇌물적인 예배관과 자꾸 융합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결국은 말이죠. 이거 보세요.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을 본받지 말라고 아무리 목에 피가 나오도록 얘기를 해도 소용이 없어요. 소귀의 경 읽기라고. 그렇다고 할 것 같으면 목소리 큰 사람이 있던 시대에 교회가 순결했게요. 소용없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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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세상을 본받지 말라고 한다고 해서 그 본받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 속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아니면 누릴 수 없는 그 something이 들어가지 않으면은 그러면은 그들 모두 다 세상 속에 그 사람들이 다 세상에서 이렇게 취한 사람들인데 아직 때도 안 벗겨졌어. 아직까지도 세상의 트라이드만 세상으로 돌아갈 이런 부패성과 이런 것들이 강력하게 남아있는 사람들이에요. 그런 것들을 억제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독특성을 유지하게 하는 것이 무엇이에요? 그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예배 속에서 끊임없이 만나고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해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 이런 것들을 끊임없이 remind하지 않냐 하면 그리고 다시 자기가 재체험되지 아니하면은 그러면은 필연적으로 자기들도 그런 세상 속의 일원이 되어가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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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어가고 흘러가버리는 거예요. 그게 오늘날 우리에게 나타나는 모습 아니에요. 9일날 교회 나오는 거 빼놓으면 불신자와 구별이 되느냐 아니고 대문에 교피 하나 붙어 있는 거 빼놓으면 차이 나는 게 없다. 이런 문제들이 바로 뭐냐 하면 예배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 협상이다. 그게 뭐냐? 성령의 역사가 심각하게 결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배 중에 결핍되고 있는 거죠. 또 하나 이제 여기서 생각해봐야 될 것은 뭐냐 하면 성령이 예배 중에 역사하시는 것과 함께 관련되어서 생각할 것은 뭐냐 하면 예배에 있어서 단순성과 자율성이에요. 단순성과 자율성. 예배는 항상 두 가지 쪽으로 흘러가려고 항상 애를 썼어요.
01:11:58
기회가 있으면 하나는 의식 쪽으로 가려고 애를 쓰고 또 한쪽으로는 어떻게 해요? 이런 의식을 모두 타파하면서 아까 이야기하는 내적인 광명과 은밀하고 신비한 체험 같은 것들로 가려고 하는 경향성, 이 양쪽으로 가려는 경향성들이 늘 있었다고 그럽니다. 그런 그런 요소들이 언제든지 있었는데, 그게 결국은 로마 카톨릭의 복제 말이죠. 복제. 이 사제들의 이 복제가 7세기경에 거의 확장이 되는데 그런데 그 복제 제복 제복 이거 사제들의 이 옷이 그 어디서 따온 거냐 하면은 로마 관리들의 복장이에요. 그러니까 세상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를 혼돈한 거죠. 그리고 그런 것들을 가지고 격식을 갖추고 위엄을 갖추는 거예요.
01:12:57
그러니까는 천주교 교회당은 이렇게 짓는 법이 없어요. 우선 어떻게 되죠? 난방비가 많이 들어가더라도 높아요. 그리고 요즘은 작은 교회당도 생기는데 높아요. 그리고 고딕식을 선호하죠. 그렇죠? 그리고 굉장히 웅장하게 지어요. 그리고 제단을 아주 높이 놓고 그리고 이 사이의 거리를 멀리 띄워놓고 단을 여러 개 만들고 그리고 만들죠. 그렇게 엄청나게 높이 만들어 놓는 것이 사실은 경제적으로도 합당하지 않고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의 기능에도 부합하지 않잖아요. 이건 뭐라고 뭐라고 말하면 성당에 가면 막 울리잖아요. 그렇게 만들어 놓는 가장 커다란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권위에요. 권위. 거기에 들어온 사람들이 자신이 왜소함을 즉시 느끼게 만들어버리려면 거기에서 길을 제압하는 겁니다. 길을 제압하는 겁니다.
01:13:53
그런데 이제 그런 것들이 결국은 뭐냐 하면은 의식적으로 할 글을 흘러가려고 하는 것이 있고 또 하나는 뭐냐 하면은 의식으로 안 가. 의식으로 가려는 게 아니고 또 하나는 말하자면, 그런 어떤 틀 자체를 완전히 부인하면서 그러면서 그런 틀 자체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막 자유롭게 가는 거예요. 그래서 그냥 한잔 막 찬성하다가 주님이 말씀하신 분 있으면 일어나서 말씀하십시오. 그러면 다 죽겠어. 내게 말씀하시기를 그중에 몇 프로가 진짜 주님의 말씀인지 신뢰하시겠어요? 그런 식으로 갔던 거죠. 예 그런데 오늘날 우리 개신교 속에서는 지금 이쪽으로 가는 경향성도 많이 있지만 소위 얘기하는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교회라고 하는 곳에 있어서는 이쪽으로 가는 경향들이 굉장히 많은 거예요. 그게 결국 뭐예요?
01:14:50
종교계 업자들이 다 두드려 놓고 치운 것들 도로 가지고 다 올라가는 겁니다. 성경 펴놓고. 그다음에 여기다 촛불도 7개 켜놓고 그것도 키려면 진짜 촛불 끼지 가짜 촛불 켜놓고 말이지 여기도 켜놓고 말이지 그리고 막 이상한 색으로 누른 거 가운 입고 말이지 무슨 누가 그럴 때 어느 전어사냐 목사냐 그 가운에다가 그 퍼런 걸 왜 둘러요? 그랬는데 금 목사님 대답을 가요. 멋있잖아. 이게 뭐예요? 그게 생각이 어떻게 가운을 입으면 입어도 좋고 안 입어도 좋은데 왜 입는지 안 입으면 왜 안 입어야 하는지 좀 그런 거를 역사적인 맥락을 생각을 하면서 입든지 안 입든지 아무거나 걸치고 그 외에 또 하얀 가운 입고 왜 하얀 가운 입고 여름에 시원하게 나요. 그렇게 되면 안 된다.
01:15:52
그런데 그 성경이 오시게 되는 신약 시대가 지향하고 있는 이 예배는 단순과 자유예요. 그런데 그런 문제들을 우리들이 어떻게 봐야 되냐면은 이 예배가 아주 단순하고 자유로워야 된다는 거죠. 그렇다고 해서 제가 얘기하는 것처럼 지금 아까 얘기한 것처럼 그렇게 아무것도 없고 그냥 무슨 요즘 그런 예배들 유행하잖아. 막 찬양팀들 나와서 막 찬양하고 그리고 아무 때나 쑥 나와가지고, 성경 읽고 설경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안 되거든요. 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한 예배의 형태로 모였을 때 전파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교회의 전통이라고 했죠.
01:16:43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는 그 순간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경배하고자 하는 그 자리에서 선포되는 그런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 이거죠. 그런데 그 예배에서 자유형 틀은 인정한다는 거예요. 틀은 인정해요. 그런데 그 틀은 절대적인 것은 아니에요. 절대적인 것은 아니되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런 몇 가지 원칙이 있어요. 보편적이어야 하고 회중적이어야 하고 고백적이어야 하고 성서적이어야 하고 그렇게 있어야지 나는 예배 시간에 찬성 많이 할 거야. 왜? 좋아하니까 그런 식으로 나는 설교는 짧게 할 거야. 왜? 못하니까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난 다른 사람들 기도 안 시킬 거야. 왜? 엉뚱하게 하니까 그런 식으로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01:17:41
그게 즉흥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그런 거를 다 검토하면서 예배의 역사를 쭉 보면서 그 갈래를 쭉 보면서 어떤 시대의 예배가 이게 성경적이 아니었고 그다음에 이런 순서로 바뀌고 나니까 어떤 문제가 왔는지 이런 것들을 쭉 검토하면서 작성하되 시대에 따라서 문화에 따라서 약간씩은 다를 수가 있겠죠. 그러나 문제는 뭐냐면 근본적인 정신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어떤 틀을 가져야 돼. 여기에 대해서 크게 두 방향으로 견해들이 나뉘는데 한 견해는 성경이 명시하고 있는 형태만 예배 속으로 들어와야 된다는 것과 또 어떤 사람들은 성경이 금하고 있지 않은 모든 것은 들어와도 된다고 하는 거죠. 사실 후자는 상당히 위험한 거죠. 그런 얘기죠. 그래서 그런 틀을 만드는 거예요. 보니까 어떤 교단 같은 데 보면은 주보에 공동 기도라고 나와요. 공동 기도라고 나와.
01:18:40
그렇게 해놓고, 모든 사람들이 교동문을 하고 난 다음에 그 기도를 같이 읽는 거예요. 이게 종교 개혁자들이 죽어도 반대했던 게 이거거든요. 그 왜 그런 것들을 아무런 역사적인 그것도 없이 자기네 하고 싶은 기도를 작성을 해서 같이 모두 하는 왜 그런 식으로 그렇게 자의적으로 선택하느냐 역사를 보고 그런 것들을 이렇게 공식적으로 정해진 것 심지어는 설계도 써가지고 올라가는 것들을 반대했던 사람들이에요. 그런 사람들의 그런 반대가 무엇 때문에? 있냐면 가톨릭의 포말리즘에 대한 경계이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 보면 성경의 자유로운 역사에 대한 역사를 재현할지도 모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들이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성경을 향해서 개방성 있게 열어놓도록 만들었던 거예요. 그러면 그러면 그런 속에서 예배의 기본적인 순서가 있고 그리고 그것들이 단순해야 된다는 거죠. 그게 뭐 수십 가지씩 있고 그러는 거 아니라는 얘기죠. 예배가 단순해져야죠.
01:19:40
그래서 어느 교파에 속한 사람, 이건 딱 들어왔을 때 이건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라고 확연하게 동의할 수 있는 그런 보편적이고 그런 단순한 형태의 예배가 되어야 된다라고 하는 것이죠. 이게 순서가 너무나 많고 복잡하다가 보면 결국은 그것들을 기계적으로 따라가려고 따르지 않을 수 없는 그런 문제들이 생겨나는 건 아니에요. 그렇죠? 그렇게 되면 안 된다. 가장 기본적인 게 찬양. 기도 말씀 그리고 맨 처음에 예배의 부름 마지막에 헌금 그리고 하나님 앞에 하는 축도, 신앙, 고백 이런 것들이 하나의 큰 틀을 형성하는 거예요. 조금씩은 견해를 다룰 수 있지만은 그러나 지금 우리들이 들인 이런 형태가 나는 가장 신약의 지지를 받으면서도 그러면서도 보편성이 있는 예배 형태요. 그 성령의 역사를 가로막지 않는 단순한 형태라고 생각한다. 이거죠.
01:20:34
그다음에 이제 성령의 역사와 함께 고려돼야 되는 것이 뭐냐 하면은 자유함이에요. 자유함. 어떻게 예배가 65분에 끝날 수는 있을 거예요. 끝날 수는 있는데, 그게 어떻게 목표가 될 수 있느냐. 그게 어떻게 목표가 될 수 있느냐. 그게 말이 되냐 이거예요. 아니 찬송을 부르다가 난 그래서 찬송을 미리 정하는 것에 대해서도 나는 별로 그렇게 썩 좋아하잖아. 그 일주일 전에 주보에다 박았는데 낼 필요가 뭐 있느냐. 맨날 똑같은 예배인데 그런데 그거를 뭐로 그 주보를 만들어서 그렇게 하느냐 이거죠. 그래서 예배를 뜨게 되면 찬송을 부르는 거죠. 찬송도 아무거나 자기 기분에 따라서 우울하면 그저 단조조에 가락도 부르고 기분 좋으면 맨날 박수 치는 거 부르고 그렇게 자기 기분에 따라서 흘러가면 안 되잖아요. 기본적인 예배 속에 그런 흐름이 있는 거예요.
01:21:32
우선 제일 먼저 하나님의 위엄과 삼일체 하나님의 거룩과 영광을 찬성하면서 세상 속에서 흐트러졌던 우리의 시선을 모으죠. 그리고 모으고 모은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 우리가 가능하면 참회의 찬성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거예요. 주위를 고백을 하고 그리고 그러한 참회하는 죄인들을 받아주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의 능력과 십자가의 중보적 성격을 하나님 앞에 찬송하는 그거를 통해서 우리 죄인이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안기는 감격을 노래하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런 하나님을 위해서 헌신되게 살고자 하는 찬송을 하는 이런 것들이 하나의 절대적으로 fix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러나 하나의 커다란 예배의 흐름을 터는 찬송의 내용이다라는 거죠. 찬송을 부르는데 회개의 찬송을 부르는데 온 회중들이 마음이 녹아내리면서 그 찬송 속에서 계속 그 하나님을 묵상하면서 들어가는 거예요. 한 장 더 부르면 어때요? 두 장 더 부르면 어때요?
01:22:29
막 예배가 이렇게 늦게 끝나냐고. 투덜대우면서 가면서 뭐 하는 거야? 밥 먹고 다 방에 가서 차 마시는데 뭐 그렇게 급해요? 나는 늘 강조하는 거야. 그렇게 급하면 짧게 예배드리는 대로 가봐라 이거야. 새로 와야 되잖아요. 그런 면에서 물론 규모는 있어야 되겠죠. 그냥 설계자가 예배 인도자가 자기 혼자 도취해서 오늘은 찬성 30곡뿐으로 죽도를 마치겠습니까? 안 되겠죠. 규모는 있어야 되는데 그래도 자유함을 해치지 않는 것이어야 되지 않는 거죠. 그리고 그다음에 이제 우리나라 전통에서는 꼭 주일날이건 대표 기도를 장로님들이 대개 하시거나 장로님이 없는 교회든 제집들이 하는데 사실은 더 바람직하게 말하자면은 이 전통은 목회자가 목회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이 얘기를 들으면서 우리도 기도 오래 해야 되겠구나.
01:23:28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그런데 그 전통을 보면은 종교 개혁자들이 목회 기도를 할 때 스코틀랜드에서 종교 개혁을 하던 John Knox의 목회 기도가 45분씩이나 계속되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아요. 중간에 45분 기다렸다면 어떻게 되겠어? 다시 교회 나오나 봐라.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오늘날 그런 사람처럼 그렇게 강하게 성령의 간섭을 받으면서 깊은 감동 속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무슨 이게 대표 기도하는 시간이 무슨 자기 무슨 일장 연설하는 시간처럼 말이지 올라와가지고 평소에 하고 싶은 걸 다 하는데 목회자에게 불만이 있으면 하나님 교회가 병들어가고 있습니다. 살려주시옵소서. 그래서 파문을 일으키는 교회들이 엄청나게 많아요. 자유항이 주어야 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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뭡니까? 설교를 하러 올라갔는데 규칙은 없지만, 한 45분 하면 되겠지. 그리고 올라갔는데 하나님이 강력하게 붙잡으셔서 계속 말씀하시는데 지금 여기서 쏟아놓지 않으면 이 하나님이 안 기뻐하실 것 같고, 주체할 수 없을 것 같을 때에는 설계 더 들어야지 뭘 빨리 갈라 그래요? 그렇지 않아요? 그냥 하는 거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데 한 십 몇 년 전에 그 설교를 하러 올라왔는데 그냥 저는 원고 없는 설교를 선호하니까 설교를 했다. 그런데 설교하러 올라갈 때 분명히 7시 20분을 보고 올라왔거든요. 설교 끝나고 내려와서 구두끈을 매달아 보니까 11시 40분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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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부비고 시계를 다시 봤더니, 틀림없이 11시 40분이에요. 그러니까 4시간, 20분짜리 예배를 드린 거예요. 설교는 거의 4시간을 한 것 같아요. 그런데 미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사람들이 설교를 듣는 거예요. 왜 누구를 위해서 설교를 그만두냐 이거죠.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 성경 본문을 통해서 충분히 말씀하셨다 생각될 때까지 자유롭게 설교를 그래서 그러면 또 어떨 때 일찍 끝나는 때도 있어요. 11시에 예배가 시작됐는데 12시 10분밖에 안 됐는데 끝나는 때도 있어요. 그거는 왜 짧으니까 짧게 다 된 거예요. 만족스러울 때도 있고 대부분 만족스럽지가 않죠. 그런 거죠. 성령이 역사하시면 그런 자유함이 있는 거 아니에요.
01:26:30
그렇잖아요. 그것이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이지 틀 속에 탁 박혀서 나오는 것이 어떻게 그게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예배일 수가 있느냐 성령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에 이런 예배의 특성들이 예배의 기본적인 것들이 무너져 가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때요? 정해진 시간에 시작하고 정해진 시간에 시작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어도 될 거예요. 종침을 시작하니까. 그러나 끝나는 것이 언제든지 간에 똑같은 시간에 맞춘다. 그것이 목표다. 성령의 역사 자체를 인정하지 않거나 배제하고 그 예배의 작업들을 해나가는 것입니다. 누구를 위한 예외냐입니다. 그리고 마치 예배가 말하자면, 그런 의무를 완수하는 것처럼 생각되는 거죠.
01:27:23
그렇게 해가지고 그렇게 졸고 주부 떨어뜨리고 성경책 떨어뜨리고 삐삐 들고 뛰고 그러고는 예배 끝나고 나서 사람들이 조회당을 막 빠져나가는 거예요. 천천히 나가면 어때? 천천히? 아니 좀 하나님 만났으면 만나고 앉아서 주님과의 만남을 좀 한번 되새겨보면서 기도도 하든지 못 만났으면 억울해서 회개를 하든지 아니 좀 그렇게 하면서 천천히 나가면 어때? 이게 무슨 민방위 교육 끝나고 나가는 사람들은 그냥 그냥 와 밀고 막 그냥 당기고 난리 버거져 그러고 나서 막 교회를 막 쏟아져 나가는 거예요. 그렇게 5분 일찍 2분 3분 일찍 끝나려고 찬송가 1절만 부르자고 그리고 내 뛰는 사람들이 다 그다음에 주일날 하는 일들이 다 시시겁게 하는 일들이에요. 놀러 가거나 쇼핑 가거나 테레비 앞에 파자마 바람으로 앉았거나 식당으로 밥 먹으러 가거나 맨 그런 거거든요.
01:28:21
여전도의 임원들, 남전도의 임원들은 예배 시간에 노트 꺼내놓고 앉아가지고, 예배 끝나고 회의할 때 뭘 의논해야 될지 그런 거나 적고 안 적고 말이지 그런 상황에서 무슨 영광이 있냐 이 얘기는 그렇게 해놓고, 밖으로 나가는데 그중에서 95%가 어딜 설계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에요.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 내가 그 말씀대로 살게 해달라고 흐르는 눈물을 주먹으로 훔치면서 세상을 가도 그 세상이 변할까 말까인데 성경 본무도 기억하지 못하고 가는 그 사람들에 의해서 세상 밥이에요. 밥이라고. 예 배 시간에 그렇게 우울해 보이던 사람들이 끝나고 나면 너무 행복한 거예요.
01:29:08
성경의 역사가 예배에 갈피갈피했으면은 그래서 예배드릴 때는 스펄턴의 충고와 마찬가지로 설교자뿐만 아니라 모든 회중들이 찬양을 부르면서 오늘 이 찬양 가운데 성령님이 오셔서 우리에게 당신의 성품을 생각나게 해주시지 않으면 우리에게 부르는 사냥이 아무것도 아닙니다. 설교를 하면서 씨족일관 말 잘한다. 설교 참 대단한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잘못된 사람들 하나님이 붙잡아 주시지 않으면 우리의 이 예외 현장이 웃음거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설교의 갈피갈피 성령님이 역사하시기를 흔적이 기원하는 그 설교자 뒤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그것이 시종일관 유지되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것이 유지되지 않고는 이 성령님이 역사하시는 그러한 예배가 회복될 수 없는 이게 심각하다는 거죠. 그런데 내가 막 묻고 싶은 게 그거야.
01:30:06
예배를 위해서 기도해 본 적 있어요? 이번 주에 예배 정말 나라는 배우 없게 해달라고 기도해 본 적이 있는데, 이 문제 안에 열렬하게 예배를 위해서 모여서 기도하는 그 기도회가 있어. 그런 기도회가 있느냐고.
01:30:25
열렬하게 기억 있어봐야 예배 들어가기 3분 전에 목사님들하고 장사님하고 손잡고 도와달라고 그러는 그런 기도 말고 열렬하게 이번 예배에 하나님의 백성들의 성패가 달린 것처럼 우리 신앙의 성패가 달린 것처럼 주님이 찾아와 주시지 않으면 우리가 너무나 슬픈 백성이 될 것처럼 그렇게 애절하게 주의 성령이 오셔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모르는 인간들에게 당신의 살아계심과 엄유함과 영광을 보여주시고 죄 가운데 있어서 상한 심령을 가진 사람들에게 성령께서 오셔서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위로와 사랑을 전달해 달라고 간절하게 누가 애원한 한번 가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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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성가대를 잘한다며 10억짜리 파이프를 들여냈다며 누구나 설교를 잘한다며 교회에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만나주시면 성경을 다시 써야 된다고. 오늘날의 예배는 어떤 점에서는 예배드릴수록 하나님을 모욕하는 배교에 가까운 예배예요. 구약시대 같았으면 다 돌에 맞아 죽었을 거예요. 정신 바짝 차리라고. 성령님이 안 계시니까 백성들이 교만해집니다. 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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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백성들은 시시때때로 성령님이 임하셔서 편하게 그들의 마음을 진리로 녹이셔서 자기가 누구인지 분수를 깨닫게 하지 않으면 잡초와 같이 교만히 고개를 들고 옛 본성들이 제멋대로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도록 자기를 충동질하는 게 이게 옛 사람의 흔적을 여전히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정직한 모습이다. 이거죠. 뭐 더 많은 이야기가 있으면 생각하겠습니다.
두 번째 요소가 무엇인고 하니? 진리입니다. 진리. 이 진리가 무엇이냐? 하나님의 말씀이죠. 아주 쉽게 얘기하면 하나님의 말씀이에요. 하나님의 말씀 중에서도 특별히 우리들이 강조해야 될 것은 복음진리예요. 그리고 복음진리에 기초한 하나님의 말씀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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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씀이냐 하면 성경 속에 흐르고 있는 두드러진 복음의 진리가 하나님의 교회에서 예배의 가장 중요한 본질적인 요소로 회복되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죠. 그런데 이게 지금 되고 있느냐 이거죠. 어느 교회에서 성가대 지휘자하고 교역자하고 대판 싸우는 거야. 뭐냐 하면 성가대 지휘자는 찬양이 설교보다 위라는 거야. 교역자에는 또 참을 수가 없죠. 설교가 찬양보다 위다. 그러니까는 실제로 교회당 보면은 이 뒤에다가 성가대상 만들어 놓은 교회 있죠. 굉장히 신학적으로 중대한 의미를 가진 작업이에요. 그런 것들이. 그럼 왜 설교가 찬송이 설교보다 위라고 주장하는 이유가 뭐냐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찬성은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 드린다고 보고 설교는 인간이 인간에게 말한다고 보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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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당연히 양자 중에 한 자가 양자 중에 한 편이 하나님이 포함되어 있는 그 행위가 우등한 행위라고 하는 사실은 우리들이 논리적으로 부인할 수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해석을 해내는 거예요. 그런데 그거는 전혀 성경을 모르고 역사를 잘못 읽은 방식 무슨 말이죠? 저는 나중에 말씀드리겠지만, 성가대에 대해서는 저는 회의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어요. 왜냐하면은 성가대는 오늘날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성가대의 모습은 20세기 후에 미국의 영향에서 온 거예요. 성가대가 생겨나기 시작한 것은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에 서서히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오늘날 우리 개신교의 성가대의 효시라고 보기는 어려워요. 왜냐하면, 그것이 가톨릭에서 쭉 전승돼 내려오다가 그러다가 종교 개혁이 일어나면서 다 뒤집어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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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성령으로 돌아오고 찬송도 공교한 그런 연주, 악기 이런 요소들이 다 빠져나가요. 다 빠져나가고 청교도 시절에는 음악적인 요소를 아예 이 교회 속에 도입하지 않는 엄격한 그런 무악기 예배를 드리게 되죠. 그런 가운데서 우리가 나온 이것은 사실 구약하고는 더더욱 상관이 없고 그리고 신약에는 머상가다에 대한 이야기가 없으니까 그리고 로마 카톨릭의 전통하고도 또 상관이 없어요. 또 논리적으로도 만약에 로마 카톨릭에서 그걸 보고 배웠다 그러면 또 더 말이 안 되잖아요. 우리는 로마 카톨릭의 후예가 아니라 종교 개혁자들의 후예니까 그런 거거든요. 그래서 솔직하게 말하자면은 오늘날 이 개신교 성가대의 이러한 모형은 20세기 이후의 미국의 영향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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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20세기 후에 생겨난 그런 미국에서 생겨난 그런 성가대 운동 이런 것들은 결국은 뭘 가지고 있냐면은 예배 속에 그때 항상 한창 유행하던 감상 문화를 가지고 들어오는 거예요. 감상. 쉽게 얘기하면 자신들이 할 수 없는 찬양을 사람들로 하게 하고 고품질의 찬양을 하고 자신들은 그것을 감상하는 그래서 참여자의 입장에서 감상자의 입장의 위치를 예배 속에서 잠깐 갖는 그런 것들로 돌아가는 거거든요. 그런데 그런 것들이 결국은 종교개혁 시대 이전에 종교개혁 시대 이전에 그 가톨릭에서 교회의 음악을 그렇게 중시하고 있던 때의 그런 모습으로 다시 돌아가는 그런 현상을 보이고 있지 않아요. 그런데 이런 것들은 옳지 않다 이거죠. 그런데 왜 옳지 않은지는 나중에 얘기했습니다. 우선 우선적인 요소는 뭐냐 하면 이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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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종교 개혁자들의 신념을 회복해야 된다는 것이 설교가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냐 여기에 대해서 마틴 루터는 그렇다고 말했어요.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고 있는 한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지점이죠. 그 말이 무서운 거예요. 뒤집으면 만약에 설교가 성경을 설교하지 않으면 그건 우리는 순종할 필요도 없고 지킬 필요도 없고 지키면 안 된다. 그런 결론이 되는 거예요. 그리고 이제 Calvin에 의해서 와서는 그것이 좀 더 정교하게 다듬어지게 되죠. 그래서 어떻게 말을 하냐면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이 설교가 성경을 설교하는 한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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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성경의 권위는 원천적인 하나님의 말씀이고 설교의 권위는 거기에 종속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렇게 이게 뭐 말은 다르지만은 비슷한 입장이에요. 그게 철저한 신념이었어요. 철저한 신념이었어요. 그러니까 종교 개혁자들과 청교도에 이르는 그 라인 속에서는 지적인 기반이 없는 사람들이 목사가 된다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것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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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적으로 훈련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전하고 정확하게 분변해 내어서 그래서 그 진리를 전문적으로 해석하고 해석해서 쏟아져 나온 그 설교가 성도들에게 외쳐질 때에 그들이 듣는 그 진리가 성경의 원천적인 권위를 원천적인 권위인 그 성경이 하고자 하는 내용을 그대로 일관성 있게 전달해 주는 설교여야 한다고 봤던 거죠. 그들은 굉장한 지상인들이었습니다. 오늘날처럼 이렇게 무슨 불만 봐도 받으면 누구든지 강단으로 돌격 앞으로 하는 이런 거는 아니었다. 이건 아니었다. 이건 오늘날의 이 지적인 기반의 취약은 두고두고 문제가 됩니다. 두고 그런데 어쨌든 그런 것이었어요. 그러면 이제 이것을 성경에서 어떤 근거를 찾을 수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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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렇게 생각하시면 돼요. 아까 저는 여러분들에게 이런 걸 상기시켰어요. 예배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고. 그 목표는 하나님과 만나는 것이다. 말씀을 드렸어요. 그러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찾아오셔서 만나주시는 그 예배의 현장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찾아오셔서 만나주시는 그 예배의 현장에서 있었던 정점 하나님과의 만남이 최고도로 달한 정점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그 체험이 뭐냐 하면은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들에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하나님을 할 말씀이 없으신 때에는 자기의 백성을 찾아오시는 법이 없어요. 찾아오시면 반드시 말씀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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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때에는 하나님이 행동을 통해서 메시지를 보여주어서 말씀하시는 경우도 있고 어떤 때는 아예 명시적으로 받아서 적어서 낭독을 해줘라 이렇게 요구하시는 경우도 있고 어떤 때는 하나님께서 빽빽한 구름 가운데서 우뢰와 같은 목소리로 말씀하시는 경우도 있었고, 어떤 때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온 하나님의 종이 그 하나님께로부터 들은 음성을 자기의 백성들에게 전달해주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가 서로 충돌을 일으키는 것은 아닙니다. 모두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니까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한 진리의 회복은 예배 속에서 불가능한 거예요. 예배 속에서 불가능한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 여기서 우리들이 굉장히 중요한 문제를 만나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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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뭐냐 하면은 성령이 오시는 문제는 우리들이 자신을 정결케 하고 주님이 오시기를 간절히 소망하는데 종교 개혁자들의 확신에 의하면 예배 중에 성도들이 누릴 수 있는 성령의 임하심과 축복은 말씀과 함께 임하시는 성령이라는 것이 두 화두였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설교가 하나님의 진리를 반 진리를 대언하지 못하는 상황이 됐을 경우에는 실질적으로 예배 회복은 힘들다는 결론이 나와요. 하나님의 진리를 대언하지 않으니까 성령의 역사가 예배 중에 임하지를 않는 그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에 대한 체험도 결핍돼 있는 거예요. 아무리 해도 안 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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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어떻게 하면 흔히들은 문제는 뭐예요? 설교 시간에 성경은 읽는데 어디를 설교해도 다 비슷비슷해요. 문제는 뭐예요? 성경을 파고들어가면서 그것을 해석을 하려는 노력이 안 보인다 이거예요. 이미 좀 과장해서 말하면 어떤 사람들이 어떤 설교자의 경우에는 일주일 동안 이렇게 생활하면서 요즘 교인들이 기도를 하나도 안 하는데 이 사람들이 기도 안 해도 되겠나? 기도에 대해서 설교를 해야지 이미 정해졌어요. 뭐라고? 아 예화는 뭘 들고 야 그 아무개 기차 지도 언제 많이 일어났는데 그거 해야지 그래놓고 그걸 어울리는 예화에 어울리는 본문이 어디 있나 참 이미 벌써 시작서부터 성경은 해석될 가능성이 거의 없는 거예요.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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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벌써 자기가 하고 싶은 얘기가 있으니까. 그러니까 이 설교자는 상황으로부터는 얘기를 들었는데 성경을 통해서 상황을 가지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성경 속에서 만나질 않았기 때문에 해석을 위한 탐구적인 활동이 없이 나오는 거예요. 그러고 나서 얘기를 하는 거예요. 창세기를 읽고 기도에 대해서 설교하든지 계시록을 읽고 기도에 대해서 설교하든지 본문만 다를 뿐이지 내용은 거의 대동소이에요. 그러니까 설교를 수없이 들었다 그러는 교인들이 아무것도 몰라요. 멘탕이에요. 멘탕 아무것도 몰라. 설교를 들었다 그러는데 아무것도 몰라요.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에요? 이 설계를 들으면서 마음속에서는 끊임없이 성경과의 상호작용이 일어나야 되거든요. 그런데 상관이 없어요.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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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그 하고 싶은 얘기는 이미 주제가 정해진 거고, 되기도 했는데 그러니까 성경 본문은 기억을 못 하는 거예요. 신약인지 구약인지도 모른다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되는 예배 속에서는 영광이 회복될 수가 없는 것이에요. 그걸 기억을 해야 된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우리 몇 가닥으로 이 이야기를 할 수 있는데, 말이죠. 세 가닥 정도를 우리 가닥을 잡아서 얘기를 해보도록 합시다.
우선 첫째, 가닥은 뭐냐 하면 설교자 자신의 철저한 갱신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힌 설교자가 없이 예배가 영광을 회복한다라고 하는 것은 이론적으로나 실제적으로나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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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의 영광을 누렸던 교회 시대에는 예외 없이 그런 예배의 중심에 누가 있었냐 하면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깊이 사랑하고 그 말씀을 아는 지식에 온 삶과 정신이 붙들린 설교자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거죠. 설교자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뭐예요? 아까 그거예요. 전구다마를 갈면 무슨 소용이 있냐? 무대를 바꿔놓으면 무슨 소용이 있고 알록달록한 거 걸치고 나오면 무슨 소용이 있냐? 호박에다 줄긋나고 수박이 있냐. 그 사람이 나와서 그 얘기하는데 무슨 불빛을 받든지 무슨 강당에 올라가든지 뭘 가지고 얘기하든지 마찬가지지 그렇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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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서 뭔가 새로운 것을 느낀다면 그것은 현혹된 것이지. 진리가 진짜 그렇게 시킨 게 아니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어떤 문제가 생겨나냐 하면 설교를 통해서 예배 속에서 하나님과 만나는 선명한 신앙의 체험이 없으니까 목양의 관계가 성립을 안 하는 거예요. 대다수의 교인들이 존경하는 목회자가 없어요. 기특하게 생각하는 목회자는 가끔 있는데, 존경하는 목회자가 없어. 심지어는 6개월 교회에 다닌 어떤 사람이 자기 교회에 담임 목사님 이름을 몰라요. 왜 그런 일들이 생겨나게 돼? 그러면서 기독교회의 면면이 흐르고 있는 기독교 신앙 전승의 규칙이 깨지는 거예요. 잘 들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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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기독교 신앙 전승의 규칙이 뭐냐? 그거는 뭐냐 하면은 처음서부터 이 구약의 야웨 종교 그리고 이 신약 시대에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이 기독교 신앙의 이 기전은 말이죠. 이거는 이제 전승되는 거 아니에요. 계속해서 전해지는 거 아니에요. 그렇죠? 사람을 통해서 사람에게 전수되어지는 거 아니에요. 자손을 통해서 전수되는 거 아니에요. 그런데 이 전수되어지는 것이 전수되는데 이런 신앙은 말이죠. 각자 자기가 알아서 믿으면서 신앙생활하게 되어 있는 것은 처음부터 구약 종교도 아니고 신약 종교도 아니에요. 뭐냐? 큰 스승을 통해서 전수받게끔 되어 있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전승의 줄기예요. 그런데 이 명백한 성경의 증거들은 몰라요. 여러분 아브라함 없이 족장들의 신앙을 생각할 수 있어요.
01:47:17
모세가 없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을 생각할 수 있느냐고요. 물론 모세 없이도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어요.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은 생각할 수 없어요. 하나님이 그렇게 사람을 사용하셔서 자기를 아는 지식을 전하시고 자기를 섬기는 도리를 알리시고 하는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종을 통해서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통해서 그것을 전승시키는 전인적인 교육, 토탈 에듀케이션이 하나님께서 전하고 싶으셨던 방식이라 이거죠. 여호수아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의 유일신 신앙의 마지막 불꽃을 받게 되죠. 사무엘이 없이 이스라엘 사사시대의 신앙의 갱신을 얘기할 수 있느냐고요. 행실을 얘기할 수 있느냐고요. 다윗 없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의 영향을 얘기할 수 있느냐고요.
01:48:13
선지자들과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의 종들의 사역을 제외해 놓고 각자 알아서 믿는 신앙을 우리들이 찾을 수 있느냐 이거죠.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공생의 3년 반 동안은 죽도록 일하시면서 마지막 맺어놓으신 열매가 무엇이었어요? 오순절 성령이 임하시면은 거목과 같이 진리의 사람들로 변한 그 12사람의 사도들을 남겨놓고 여수님 돌아가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 사람들을 통해서 그 거목과 같은 사람들을 통해서 그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개종하고 예수를 믿게 되었어요. 그 사람, 그 사도들 뒤를 이어서 교회가 누구의 영향을 받았어요? 속사도 교부들의 영향을 받았어요. 그들에 의해서 사상적으로 기독교가 박해를 받을 때 사상적으로 변증하고 핍박 속에서 교회를 지키면서 말씀과 함께 순교하고 순전한 교리의 도를 지켜나간 거예요. 변증가들과. 그다음에 교부들로 이어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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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후에 종교 개혁자들이 나타나서 마틴 루터와 그다음에 존 켈빈의 영향을 제외하고 그 사람들을 제외해 놓고 종교 개혁을 이야기할 수 있느냐고요. 그리고 그 이후로 이어지는 걸출한 청교도들과 그 후예들을 제외해 놓고 얘기할 수 있느냐. 존경하고 깊이 신뢰하는 스승이 없이 배운 신앙 생활은 제조업체 없이 유통일자도 기록되지 않은 채 통용되고 있는 이름 모를 식품과 비슷하다고 그래서 이 기독교 신앙 자체가 어떻게 보면 도제신앙이에요. 도제신앙 예수님이 말씀하시잖아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하라. 너희를 쉬게 하이라. 내 멍에는 쉽게 가벼우니 나와 함께 멍에를 메고 나의 멍에를 함께 메우고 그리고 배운다.
01:50:12
그 문맥 자체가 그 시대의 도제 생활에서 따온 거예요. 그러니까 스승의 문하에 들어가서 함께 먹고 마시면서 스승의 일을 거들면서 배우는 거. 그것이 멍에를 함께 매는 거예요. 그게 학습 관계에 있는 거라고요. 그런 것들을 그런 것들이 기독교 신앙에 전승되어 놓는 방식이고 예수님도 정확하게 그 방식을 따라서 자기의 제자들에게 참된 신앙을 전승시키셨던 거예요. 성령에 오심으로써 장엄하게 마무리가 됐습니다. 또 나는 신학생들이건 누구건 말죠? 자기가 깊이 흠모하는 영적인 인물이 없는 사람들은 난 신뢰하지 않아요. 한 사람 중에 없는 걸 어떻게 합니까? 죽은 사람 있잖아요. 죽은 사람. 역사 속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살다가 갔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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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자기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보다 더 훌륭하게 산 사람이 교회 역사 2천년에 없겠느냐고요. 찾아보라고요. 산 사람 중에 없으면 죽은 사람이잖아요. 그런 목양의 관계 자체가 성립을 안 하는 거예요. 이 진리의 요소가 예배 속에서 진리의 요소가 회복되지 않으니까 이게 성립을 안 하는 거예요. 결국은 근본적으로 회복돼야 될 것이 뭐냐 하면 강단의 회복 없이는 예외 회복이 불가능한 거예요. 예외 회복한다. 그래 봐야 맨 앰프 들여놓고 스피커 고치고 조명 바꾸고 무대처럼 만들고 그런 것밖에는 갱신할 게 없는 거예요. 내용이 갱신이 안 되니까. 그럴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주 분명하게 우리들이 여기서 알아야 될 것은 말씀이 회복돼야 된다는 거죠. 그리고 종교개혁 속에서 말이죠.
01:52:07
가장 중요한 특징이 뭐냐 하면 아까 두 화두를 회복했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그 한 화두가 진리의 문제예요. 진리의 문제. 그러니까 무엇이 참된 진리냐. 그리고 오늘 우리들에게 통용되고 있는 신앙의 모든 표준들이 성경에 기초한 것이냐. 이것이 바로 개혁신학자들이 던졌던 가장 중요한 질문이에요. 그래서 그들은 종교 개혁이 시작되자마자 제일 먼저 시도한 것이 뭐냐 하면 구약에 있어서 히브리어 성경 39권으로 된 그 성경 이외에 모든 외경들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배척합니다. 배척한 거죠. 교부들의 가르침을 깊이 존중했지만, 맹목적적으로 교부들을 추종한 사람들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서 교부들을 본 사람들이었어요. 진리를 회복하는 것이 그들에게서는 가장 중요한 화두였어요.
01:53:05
그러니까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의 종들이었어요. 그들에게는 그 하나님과의 만남이라고 하는 장엄한 거룩의 체험이 있는데, 그 체험을 마틴 루터나 존 칼빈이나 사상서를 읽다가 사상 속에서 새로운 사상을 고취받은 인문주의자들이 아니라 그런 요소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근본적으로 그들의 삶과 사역의 방향을 바꿔놓게 만들었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진리의 복음과 만나는 진리 체험이었어요. 그것이 그들을 완전히 바꿔놓은 거예요.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에 메인 사람들이 된 거예요. 그리고 진리와 함께 죽고 사는 사람이 된 거예요.
01:53:50
우리들이 얼핏 생각할 때는 종교 개혁자 칼빈이 제네바에서 선교를 했다고 할 것 같으면 개혁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으니까 파리 대학에서 총장 취임사 할 때의 개혁 신앙을 고취시키는 연설문을 써줬다가 지명수배를 수배를 받고 도망을 하잖아요. 벌써 그때는 천재적인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그런 와중에서 그 사람이 개혁신앙을 가지고 있으니까 얼마나 카톨릭에 한이 맺혔겠어요. 자기를 죽이려고 했는데 그러니까 그런 개혁사상을 고취시키기 위해서 일평생 헌신했을 것 같잖아요. 제네바에서의 실제 그의 사역의 일지를 보면은 그는 개혁사상을 고취시키는 데 열을 낸 게 아니에요. 뭘 하냐면 우리는 그가 로마서만 설교했을 것 같죠. 아니에요. 구약을 많이 설교했어요. 특히 신명기를 200번 이상이나 설교를 했어요. 200회 이상이나 설교를 했습니다.
01:54:48
그 성경을 골고루, 구석구석 다 설교를 한 거예요. 그리고 성경 몇 권 빼놓고 그가 주석을 다 쓴 그 열정을 모아서도 알 수 있잖아요. 그들에게 가지고 있었던 신앙이 뭐예요? 솔라 스크립츄라 토타 스크립츄라 솔라 피데 그러니까 오직 성경으로서 모든 성경으로서 그리고 오직 믿음으로서 그래서 그 성경 말씀을 아주 깊이 성찰하고 그것을 철저하게 해석해서 그래서 성경에 담겨진 참된 의미를 전달하는 것을 자신의 설교사에게 가장 큰 영광이라고 생각하라고 그런 사람들의 입장에서 한번 우리들이 오늘 목회 사역의 동기를 비춰볼 것이 필요하다 이거죠. 교회를 어떻게 만들어야 되겠다? 크게 만들어야 되겠다. 내가 가지고 있는 이 꿈을 이 교회를 통해서 구현하고야 말 거야. 이런 것들이 종교교학자들이 보기에는 얼마나 바보 같고, 어리숙한 것인가? 어리숙하게 생각되겠나 한번 보라 이거죠.
01:55:47
하나님의 설교자들에게 있어서 유일한 소망은 무엇이냐면 하나님의 진리를 통해서 이 백성들을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알게 하기 위해서 정교한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온 지성과 정서와 의지를 동원해서 영혼들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가지고 그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가장 정확하게 전달해주는 것이 그것이 말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의 종들에게 기대하는 가장 중요한 사역이었어요. 그래서 어느 청에다가 그런 얘기를 했어요. 오늘날 설교자가 누구냐 라고 묻는다면 난 이렇게 말하고 싶다.
01:56:24
그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피 뿌리고 죽어간 위대한 선지자들과 신약에서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며 고난을 받던 사도들의 후예로라 그렇기 때문에 목회에 있어서 설교 사역이라고 하는 것은 심방, 전도, 행정, 여러 가지 많은 사역들과 어깨를 겨룰 수 있는 또 하나의 사역이 아니에요. 이제 우리들이 여기에서 우선 한 가닥은 이 설교자가 정직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된다. 설교의 강단의 회복이 없이는 결코 예배의 회복은 요원하다. 그 얘기고요. 두 번째 이제 우리들이 하나 여기서 고려해야 될 것은 뭐냐 하면은 이 교회의 예외 시간에 악기를 사용하는 문제예요.
01:57:17
악기를 사용하는 문제인데 영국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청교도들의 경우에는 일체 악기를 사용하지 않았어요. 제가 알고 있는 기억으로는 악기가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카톨릭에서도 10세기가 훨씬 지나서의 일이에요. 오르간이 들어온 게 11세기 이후의 일이고 성가대가 음을 맞춰서 화음으로 부르는 것들도 벌써 훨씬 더 후의 전통이에요. 그런데 그런데 청교도들의 경우에는 미국으로 건너간 청교도들은 아주 단호하게 악기 사용을 거부했죠. 그리고 그 악기를 철저히 배격했어요. 그럼 어떻게 하냐? 그냥 같이 회중으로 찬양을 부르는 악기 없이 찬영을 부르는 거죠.
01:58:07
그리고 심지어는 문맹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선창자가 한 절을 부르면 같이 하고 그다음에 두 절을 부르면 또 따라하고 하는 그런 식의 찬양을 하면서 예배를 드렸고 가능하면 성경 시편에 나와 있는 가사를 가지고 찬송하려고 애를 많이 썼습니다. 성가대는 물론 없었고요. 그런데 이제 저는 그 문제를 전적으로 찬동하지는 않아요. 왜냐하면, 그들의 문맥 자체가 영국의 국교의 예배에 어떤 반항하는 것 쪽으로 많이 나왔기 때문에 지나치게 옆으로 튀겨나간 반작용일 수도 있는 거죠. 그래서 그들이 가정에서는 악기를 많이 사용했고 그리고 음악을 굉장히 사랑하던 사람들이었어요.
01:58:54
예를 들면은 그 청교도의 기수라고 해서는 올리버 크롬웰 같은 사람들도 얼마나 음악을 좋아했는지 자기 딸이 결혼할 때에는 40명으로 만든 오케스트라를 만들어 가지고 연주할 정도로 그렇게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데 예배에 있어서만큼은 철저하게 이제 이런 것들을 배격했던 거죠.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아세요? 좀 과하긴 했지만, 그러나 과하긴 했지만, 여러분들이 한번 그들이 생각하고 겨냥하고 있는 그 진심은 좀 이해할 필요가 있어요. 그 진심이 무엇 때문이었냐 하면은 예배의 시간은 도취하는 시간이 아니라 우리가 전심으로 하나님을 경배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이 오셔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시간이 예배의 절정이다라고 보았던 거예요. 그들의 생각에 의하면 이런 거예요. 예배는 하나의 산으로 올라가는 것과 같은 거야. 그래서 예배에 구름이 있고 기도가 있고 찬양이 있고 하면서 이렇게 절정을 향해서 올라가는 거죠.
01:59:53
그 절정에서는 구름이 빽빽히 있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임재가 거기에 있는 거예요. 그 한없는 두려움 속에서 떨리고 있었고,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 육체와 영혼이 완전히 굴복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엄위 앞에 엎드려진 상태에서 너희는 들을 지니라 하며 하나님 말씀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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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가 하나님과의 만남의 경험이 이루어지는 절정이 그때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의식이 어떻겠느냐 그들이 하나님과 만남을 여러 번 경험을 가지면 가질수록 그들은 하나님과 만나는 현장에서 울려 퍼지는 우레와 천둥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든지 번갯불이 어느 각도로 때린다는 것들을 주목한다든지 아니면 그렇게 하나님이 임하실 때의 땅을 어떤 일이 일어나고 우리에게 어떤 체험이 일어난다든지 이런 것들이 그들의 경외심의 발로가 아니라 그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분부를 정확히 듣고 그리고 주님이 사라지고 난 다음에도 여전히 그 말씀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고 그 말씀을 자신의 삶의 가치로 삼아서 하나님을 향해서 바치는 충성스러운 경외심을 그 말씀을 실천하는 일에 들이면서 살아가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만나는 현장에서 경험했던 일들이라는 얘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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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그러면 그것이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될 것이냐 그것이 어떻게 적용될 것이냐 그것은 바로 우리가 이 예배 속에서 아까 성령님이 오셔서 우리를 정서적으로 우리를 감화시키셔서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느낄 수 있게 해주셔야 된다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그런데 조심해야 될 것은 그러한 느낌과 체험이 예배의 추구점이 되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런 느낌, 그런 것들이 그 체험의 추구점이 되면 안 된다는 거죠. 예를 들면은 찬양을 인도하되 뜨겁고 열렬하게 인도해야 되겠다라는 것들이 그런 게 목표가 되면 안 된다. 기도를 하되 어떻게 하면 이 사람들을 막 다 끓어오르는 기도로 만들까 그런 것들 전부 다 다 위험할 뿐만 아니라 아주 말하자면은 천박한 것이다. 이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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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성령이 임해서 역사가 일어나면 감당할 수 없는 통성 기도가 터져 나올 수도 있고 모두 데굴데굴 구르면서 죽도를 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어요. 그런경우가 조나단 에드워드가 1941년에 설교한 엔필드에서 설교하는 진노하신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죄인들이라고 이 사람은 청교도들 중에서도 예외적인 사람이었어요. 청교도들은 철저한 무원고 설교주의자였거든요. 요만한 메모 쪽지를 가지고 올라가는 것에 대해서도 굉장히 못마땅하게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그들이 그러면서 올라가가지고 그들은 대개 설교를 3중 구조를 가지고 설교를 했는데 첫째, 구조가 뭐냐 하면 교리를 밝히는 거예요. 내가 여기서 진술하고자 하는 교리가 이거다. 그다음에 두 번째 본문의 진리를 밝히는 거예요. 왜 여기서 내가 이 진리를 끌어낼 수 있었냐 하면 성경 본문이 이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그럼 논증해 가는 거죠. 그리고 그다음에 마지막에는 application이에요. 그들의 삶을 향해서 적응하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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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청교자들의 경험은 1번과 2번의 대목을 말할 때에는 천천히 얘기를 하고 적용의 대목에 가서는 아주 열렬하게 설교를 했다고 그래요. 그렇게 살아도 되겠느냐 이런 식으로 설교를 하면서 적용하는 거죠. 그들의 설교 전체적인 구조는 뭐냐 하면 아주 단순하고 명료하고 간단했어요. 그리고 풍부한 비유와 예화들을 들으면서 본문을 누비면서 흘러갔다 이거죠. 그러니까 대단해요. 토마스 셰퍼드 같은 사람의 설계집을 보면 열처녀의 비유 하나를 가지고 650페이지가 될 정도로 깨알 같은 설계집을 냈고 토마스 멘턴 같은 사람은 시편 119편 한 장을 가지고 제가 볼 때는 약 3년 반을 설교할 정도의 길이의 설교를 남겼어요. 한 번 설교해야 한 시간 반 내지 두 시간 하는 걸로 치고 대단한 사람들 있잖아요. 그걸 보면서 그 청교도들이 그런 정신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걸 아주 같지 않게 생각해요. 꼬장꼬장하고 말이죠.
02:04:18
좁쌀 아니 좁쌀 영감처럼 파고 들어가고 말이지 희랍어 토씨 하나 가지고 막 논증을 하면서 들어가고 그러니까 깨알 같고, 숲을 볼 줄 모르는 근시안적인 인간들이라고 그러는데 그거 아니에요. 절대 숲을 볼 줄 모르는 게 아니라 그만큼 그들은 하나님의 성경 본문에 대한 탁월한 경외심을 가지고 있었던 거예요. 그러면서 논증한 거죠.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예배에 의해서 사람들이 진리를 통해서 성령이 오시고 그래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이루어지면 울고불고 할 수도 있고 큰 역사가 일어날 수도 있어요.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드는 예외적인 설교 원고를 가지고 가서 한 손에 등불을 들고 그리고 근시안이었거든요. 이게 되고 읽은 거예요. 3분의 1밖에 안 읽었는데 폭탄 떨어지는 것 같은 역사가 다 뒤집어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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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서 사회 보던 사람이 에드워드 목사의 바짓가락을 붙들고 살려달라고 애원을 하면서 그래도 하나님은 자비하시지 않습니까? 당신이 어떻게 좀 해보라고 말이죠. 그럴 정도였어요. 하도 답답하니까 그러지 마라. 아직 설교가 많이 남았으니까 정신 좀 차려요. 그래도 그게 통제가 안 된 거예요. 그 설교 전문이 아직까지도 남아 있어요. 역사적으로. 그런 사람이었거든요. 그러니까 청교도들의 생각은 이거예요. 뭐냐 하면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성령의 큰 은혜를 받으면 열광적이 될 수도 있는데, 그것 없이 그 열광을 목표로 하는 것은 신학적으로 잘못되고 매우 위험하고 그건 이교도들에 열광하는 예배라는 거죠. 그런 점에서 예배 시간에 오케스트라를 동원한다든지 장엄한 성가대면 성가대 하는 것을 나는 죄라고까지는 생각을 안 해요. 그런데 안 하는 것이 나는 훨씬 낫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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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파 예배의 정신에 부합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죠. 그런데 그렇게 해서 수많은 사람들의 성가대들을 세워가지고 혈론 찬양을 하게 하고 엄청난 악기를 동원해 가지고 말이죠. 정신이 완전히 쑥 빠지도록 사람을 열광시켜서 만들고 이러는 거 말죠. 막 찬송을 부르다가 쓰러지는 거 하고 그런 것들은 모두 개혁주의와 청교도의 전통이 아니라 이거예요. 정서적으로 그런 식으로 자극하려는 천박한 시도들은 그거는 아주 굉장히 영성을 해치는 잘못된 거예요. 경건을 해치는 그런 것들이 다 파괴돼야 된다는 거죠. 거룩하고 예배가 엄숙하게 들이대야 된다는 거죠. 예배 시간에 막 그런 것들이 성령 안에서 자유처럼 느껴지지만 그건 옳지 않아요. 행주여천은 예배 시간에 막 울고 그러면 진정시켜요. 조용히 해요. 끝나고 다 끝나고 울어요. 다 끝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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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할 얘기가 많은데 그럼 지금 그가 울고 있는 이유가 설교 중에 뒤집어질지도 모르잖아요. 진리를 오해하고 그럴 수도 있으니까. 그러니까 그런 정신 속에서 정서적으로 뭔가를 자극하려는 그런 시도들을 버려야 된다. 이거죠. 심지어 어느 교회 갔더니, 마이크가 이렇게 목소리가 나와요. 그런데 이상하게 축도 할 시간이 되니까. 갑자기 마이크가 변했어요. 지금은 그러니까 지금은 지금은 지금은 지금은 이게 뭔 그렇게 커다란 그렇게 해서 감성을 받았다고 칩시다. 그럼 뭐해요? 그게 그걸 뭘 하는 거예요? 진리가 와서 움직이는 감정이 아니면 천박하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보세요. 그런 것들이 요소들이 얼마나 많이 들어와 있는지 한번 보라 이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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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것들을 걷어내지 않고는 하나님의 진리에 선명한 이 표준이 살지 않는다는 거예요. 오늘 표현은 어때요? 기도는 열렬히 산성은 뜨겁게 설교는 간단하게 부산은 자기의 싸움, 자기와의 싸움이 아니면 안 되는 거예요.
그다음에 마지막 세 번째 가닥을 얘기하겠어요? 그건 뭐냐? 이 문제는 무엇과 관련되어 있냐면은 진리의 요소가 예배 속에서 회복되기 위해서는 우선 첫째, 중요한 것은 우선 첫째는 인간을 이렇게 정서적으로 자극하는 인위적인 요소들이 제거되어야 한다라고 하는 거예요. 무슨 말씀인지 알죠? 제거되어야 한다는 거고, 두 번째는 뭐냐 하면 강단에서 아주 선명하고 분명한 설교가 울려 퍼져야 된다는 거죠.
02:08:59
그러니까 벌써 여기에서 설교하는 설교자 자신이 어떤 교회의 성장의 성장이라는 목표에 마음을 뺏기고 매료되어 있기 시작하면은 강단은 벌써 타협하고 나요. 그렇게 돼서는 안 되는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아주 전문가가 되어서 성경을 다룰 줄을 알아야 되는 그리고 진리에 대한 확고한 체험과 하나님을 아는 풍부한 지식이 있어서 진리를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해석해내고 그 속에 그것들을 그의 풍부한 인격적인 경험이 담고 그것이 성경이지만 그것이 자신을 통해서 자신의 피 속에서 우러나온 제3의 또 다른 언어이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돼야 된다는 거죠. 그러니까 특별한 사람들이 요구되는 거예요.
02:09:50
그래서 이제 마지막 요소는 뭐냐 하면 그런 것들이 돼야 되고 또 하나는 뭐냐 하면 아까 말한 것처럼 한 시간 내내 예배를 드리고 뭘 들었는지를 모르는 이 돌덩어리 같은 사람들을 그냥 내버려 두는 상태에서는 이게 안 된다는 거죠. 오늘날 지금요. 교회가 교육을 시켜야 된다는 것으로 굉장히 열광을 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실제로 종교개혁자들이나 청교도들에게로 가보면 물론 그들에게도 교육이 있었어요. 그런데 교육이 지금 우리처럼 이렇게 복잡하지 않았어요. 요새는 오래된 교회 좀 다닌다 그러면 이게 도대체 학창시절로 다시 돌아가는 건지 교회생활로 돌아가는 건지 분간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코스 위에 코스 코스 위에 또 코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천리만리 성경공부의 길을 계속 걸어가야 됩니다.
02:10:41
그러면 왜 그렇게 교회는 그렇게 수없이 많은 성경 공부들을 만들어내고 색별 성경 공부, 교류별 성경 공부 그다음에 무슨 미혼? 여성을 위한 성경 공부, 재혼자들을 위한 성경 공부, 노인네들을 위한 성경 공부, 심지어는 임신부들을 위한 성경 공부 뭐 새내기 신혼부부들을 위한 결혼본부 그다음에 헌내기들을 위한 성경공부 이런 것들을 그게 계속 만들어야 되는 백수들을 위한 성경공부, 직장인들을 위한 성경공부 그런 일들이 왜 생겨나요? 그 중요한 이유가 뭔지 아세요? 설교가 교육적인 기능을 잃은 거예요. 그게 문제예요. 한 주에 3편을 설교를 든는다고 합시다. 수요 예배하고 주일 전역하고 주일날 그러면 1년이면은 150편이고 금요 예배까지 참석한다 그러면 200편을 듣는 거거든요.
02:11:38
그러면은 200편을 듣고 그다음에 20년은 신앙생활을 했으면 어떻게 된 거예요? 4천 편을 들은 거거든요. 한편, 설교에 평균 1시간씩만 했다. 그러면은 8시간 근무한다고 치고 500일을 출근해서 설교만 들어도 500일을 들어야 되는데 휴일 뺀다고 할 것 같으면 최소한도 1년 8개월 이상 설교만 들어도 다 들을 수 없을 정도의 분량을 20년 동안에 듣는 거예요. 그런데 멀죠. 그러니까 내가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어요. 설교를 들은 것이 성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하는 성도들이 얼마나 있을까요? 너무나 소수라고 그 가장 커다란 원인이 다른 것도 있지만 중요한 건 설교가 교육적 기능을 잃은 거예요.
02:12:27
저는 종교 개혁자들의 예배 신학을 검토하면서 냉정하게 그들의 종교 개혁자들의 예배의 신학을 검토해 보면은 그들이 생각하는 그 예배는 하나님을 향한 의식적인 면보다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교육하는 교육적인 비중이 훨씬 컸다고 말해야지만 정직한 답이에요.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경배를 받으신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러면 그 설교의 기능이 뭐냐? 칼빈은 그 설교의 기능이 곧 디모데에서 이야기하는 성경의 기능을 그대로 전수받는다고 본 거예요. 어떻게?
02:13:08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는 그래서 어떻게 하냐면 종교 개혁자들보다도 오히려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설교는 청교도들에 의해서 훨씬 더 풍부하게 설계되는데 그들에게 보면 오늘날 모여서 성경 공부하는 주제들이 전부 다 설교 속으로 들어가요. 설교 속으로 들어가면 미혼 여성들의 경건 생활을 위해서 결혼한 아빠들의 경건 생활을 위해서 이런 것들은 사실 오늘날 책 제목에서나 읽을 수 있는 그런 것들 아닌 여가 생활에 대해서 이런 주제들을 가지고 풍부하게 성경 진리들이라는 그러니까 성경 속에서 거의 모든 교훈들을 발견할 수 있는 거예요. 그게 사실 우리들의 신앙 고백 아니에요. 모든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삶과 신앙과 모든 행위에 필요한 모든 진리가 이 속에 다 있다. 이 성경이면 충분하다라고 하는 것이 우리의 고백 아니에요.
02:14:07
설교가 그런 교육적인 기능을 잃어버리는 거예요. 그 가장 커다란 원인이 아까 말씀드린 설교가 설교되지 못하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지금 세 번째로, 말씀드리려고 하는 건데 이해의 분위기가 안 돼 있는 거예요. 무슨 말씀인지 아세요? 사람들이 이해하려는 노력이 없이 멍하니 앉아서 예배 시간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거예요. 이런 것들을 도와주는 요소가 뭐냐 하면은 여러 가지 있는데, 우선 첫째는 설교자의 주제가 분명하지 않은 산만한 설교 방식 그러면서도 사람들에게 가슴에 와닿지 않는 설교 말이죠. 우선 설교할 때부터 목소리부터 변하잖아요. 보통 때는 그랬니 저랬니? 이러다 그래야 합니다. 그런 것에서 벌써 사람들은 그것이 자기의 현실과 동떨어진 것을 느끼게 되는 거예요. 또 하나는 뭐냐하면, 설교자들이 이해하려는 태도가 없는 회중들을 교육시키지 않고 그대로 버려둔 채로 방치한 채로 설교하는 거야.
02:15:07
민방위 교육 강사들이 그러하듯이 말이죠. 그래야 되겠느냐? 아니 내가 말하는데 내가 말할 때 내 얘기를 안 들어도 괜찮은데 지금 내가 누구를 얘기하는데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말씀하시는데 저 사람이 안 듣는다 이거예요. 정신차려 당신 안 듣냐 어 당신이 지금 이 설교를 나의 말이라고 생각하면은 당신 안 들어도 되고 벌떡 일어나도 되고 나한테 돌멩이를 던져도 되지만 하나님의 말씀인데 당신 지금 일어나느냐 당신이 지금 이렇게 부주의한 태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느냐 당신이 그럴 수가 있느냐 그게 나무를 해야 되잖아요. 뒤도 고쳐야죠. 뭐가 무서워서 못해요. 왜 그걸 내버려 두느냐고 조는 사람들 말이지. 이런 사람들 언제든지 있었어요. 그런 사람들은 사도시대 때부터 계속 있었다고 진짜예요. 그들의 원조가 유두고에요.
02:16:06
유씨 집안이 각성해요. 그런 사람들이 있어서 언제든지 있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엄히 견착해서 깨워야 돼요. 위필드의 일화가 있잖아요. 설교를 하는데 저기서 자는 거예요. 자지 말라고 우리 같았으면 글에 쓰지 뭐 내려갔어요. 설교 중이네. 너 일어나버려. 당신이 지금 하나님 믿는 사람이네. 지금 나 위필드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 자리에 오셔서 말씀하시는데 당신이 그따위 태도를 취할 수가 있느냐 올라와서 설교를 했는데 그 사람이 그날 하나님 크게 만나고 영적인 변화의 역사를 경험했다는 거 아니에요.
02:17:05
그러니까 그렇게 되면 안 된다는 얘기예요. 그렇게 되면 안 된다는 얘기죠. 그래서 그런 것들을 가르쳐야 돼요. 정신 똑바로 차리고 늦게. 그렇기 때문에 청교도들이 원고 없는 설교를 옹호했던 이유가 무엇 때문이냐면은 그들은 원고 없는 설교의 신봉자들이었어요. 철저했어요. 원고 없는 설교를 하는 방식이 대개 세 가지였는데 하나는 조그만 메모 쪽지를 가지고 올라와서 가닥만 가지고 올라오는 건데 이거 굉장히 못마땅하게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그 서신 같은 데 보면 청교도들이 자기의 자손들이나 친척들에게 동기관들에게 그런 거 하지 말라. 영국에는 영국 청교도들 중에서는 그런 식으로 설교하는 사람 없다. 경고한 얘기들이 많이 나와요.
02:17:53
그러면 그다음에는 어떻게 했냐 그러면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는데, 한 부류의 사람들은 설교할 것들을 얼개를 만들어 놓고 깊이 명상하고 성경의 진리를 깊이 파악한 다음에 올라와서 그대로 설교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설교하기 전에 그것을 원고를 완벽하게 써놓고 완전히 외워가지고 올라오는 사람들이에요. 그리고 그들의 말씀을 위한 노력이 얼마나 강했어. 그렇게 노력을 하게 된 두 요인이 있었는데, 그중에 한 요인은 성령께서 자유롭게 역사하실 수 있도록 기회를 드리는 거예요. 왜? 성령이 자기 원고 준비한 그 수준에 매여야 할 필요는 없잖아요. 그렇죠? 그리고 그중에 또 하나의 중요한 요인이 지금 말씀드리려고 하는 거예요. 그 요인이 뭐냐 하면은 원고가 없이 설교해야지만 청중을 장악할 수 있다는 거예요. 이게 저의 실현이에요. 원가가 없이 설교를 해야지만 이렇게 청중을 장악할 수 있다. 이거죠.
02:18:51
여기서 내가 지금 이 강의안을 들고 고개를 박고 이렇게 해서 강의를 하면은 여러분 강의 들으면서 그런 생각 들어요. 빨리빨리 넘어가지. 그런 생각 들 거예요. 이렇게 하는 거죠. 그래서 청교도들은 여기서 나오는 목소리뿐만 아니라 표정, 그다음에 이 몸짓, 그다음에 이 주먹 쥐는 거 이 모든 것들이 전부 다 신적인 언어라고 생각을 한 거예요. 그래서 뭔가 설교를 하다가 고개를 탁 떨구고 시선을 떨어뜨리면서 낙심하는 표정을 지으면 깊은 실망을 바디랭귀로 표현하는 겁니다. 그리고 뭔가 어쩔 수 없는 확신, 우리도 저항할 수 없는 확신 손을 높이 들고 주먹을 불끈 쥐면 그런 확신을 의미하는 그래서 스펄전의 설교학 책을 보면 몸짓을 어떻게 하라는 게 굉장히 자세하게 우리 보면 굉장히 웃기죠.
02:19:43
지금 보면 하나님의 사랑일 때는 이렇게 하고 확신일 때는 이렇게 하고 어찌 할 수 없을 때는 이렇게 하고 아니 과장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나온다니까요. 한 죄인이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그런데 이제 그것이 또 간절히 필요했던 이유 중의 하나는 그 당시에는 확성기가 없었기 때문에 그런 몸집이 동반 되어야지만 잠깐 들릴 듯 들릴 듯 끊어지는 그 언어들이 그 동작을 보면서 이어질 수 있잖아요. 그래서 결국 마지막 노리는 건 뭐냐 하면 수만 명의 사람이 모여 있어도 전부 다 자신을 향해서 집중하게 하고 설계를 하는 거예요. 위필드 같은 사람들이 그런데 증인이잖아요. 그 사람이 보통 많이 모일 때는 3만 명씩 모아놓고 설교했다고 해요.
02:20:35
육성으로 벤자민 프랭클린이 과학자적인 기질을 발휘해서 그 설교자가 큰 소리로 외치면 어디까지 들리냐 그랬더니, 1.65km 바깥에서 선명하게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대요. 이건 엄청난 거성이었죠. 그러니까 그 3만 명씩 모여서 설교를 하는데 설교가 끝나고 나면 모든 교인들이 그랬대. 위필드 목사님이 나만 쳐다보면서 설교했다. 그리고 옆에 있는 애가 아니야. 날 봤는데 그게 뭐냐면 장악하는 거예요. 이렇게. 완전히 당하다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예배 시간에는 예배 시간에 나쁜 게 우리 교인도 잘 들어야 돼요. 시선을 딴 데 주고 있는 거예요. 어디를 쳐다보고 싶어요. 어디를 쳐다보느냐.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나타났을 때는 그 찬란한 영광 때문에 고개를 들 수 없었지만 나 설교자는 그게 아니거든요. 아무리 쳐다봐도 죽을 염려 없고 눈 멀 염려가 전혀 없어요.
02:21:35
하나님의 말씀이 전달될 때 고개를 숙이고 있느냐 이거죠. 언젠가 한번 여기서 내려갈 거예요. 그래서 당신 어디를 쳐다보고 있느냐 하나님 말씀하시는데 여기서 시선을 둘 어디가 있는지 나는 궁금해요. 내가 자기를 쳐다보고 설교를 하는데 쟤는 왜 나를 안 쳐다보냐. 그래서 예배 시간에 필기하는 건 난 반대예요. 두 가지 이유인데 필기해도 집에 가서 안 봐. 필기할 필요가 없어요. 이만한 수첩에다가 이해가 안 가는 거 아주 중요한 교리 그런 것만 간단간단하게 메모하면서 설계를 듣는 거예요. 전부다. 똑바른 자세를 딱 서서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쭉 듣는 거예요. 그러면서 살아계신 하나님 말씀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보라고요.
02:22:35
설교자가 설교를 한다고요. 그래서 설교자는 그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사로잡혀서 설교를 해야 될 거 아니에요. 설교를 한다고요. 그러면 설교자는 단지 녹음기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온몸에 흐르는 전류가 있어요. 어떤 때는 설교자가 설교하면서 그 진리를 말하면서 흐느껴 울어요. 어떤 때는 그 설교자가 설교하면서 가슴 깊이 막 터져오르는 감격과 복받치는 환희 속에서 얼굴이 시뻘개져요. 그런 것 그렇지 않으면 또 이렇게 막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은 그런 슬픔과 아픔을 경험하게 돼요. 그런 것들이 이 온 육체에 전부 다 다 배어 나오는 거예요. 그거를 보지 않고 그게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주의를 집중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 이게 말이 되느냐 이거죠. 깊이.
02:23:32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오늘날의 교회의 상황이 그런 걸 안 가르친다는 얘기예요. 가장 커다란 이유가 무엇 때문이에요? 설교자가. 이렇게 청중들을 장악하고 그리고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들과 더불어 의사를 소통할 수 있는 충만한 말씀의 사람이 되지 못하는 것이 가장 커다란 문제다예요. 그리고 또 하나 문제는 뭐냐 하면은 문제가 많아요.
02:24:01
악기를 들여놓고 막 교회 의자를 고급으로 바꾸고 뭐 이러는 것들은 현대리에 걸고 막 무대 뜯어 고치는 데는 돈을 억수로 들이면서 설교하러 올라가면 여러분 그러면 지지지직을 환풍기는 덜컹덜컹 덜컹 의자는 삐그덕 삐그덕 삐그덕 거리고 뒤에서 온풍기는 부르릉 하고 돌아가고 그거는 벌써 그 교회가 이해를 중심으로 하는 그런 영혼의 변화에 초점을 맞춘 목회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종교 개혁자들이 말씀과 성경의 역사의 관계를 설명할 때 이런 정교한 성경적인 교리를 가지고 있었던 거예요.
02:24:43
그게 뭐냐면 성령님이 말씀을 사용하신다고 하는 것은 성경을 들고 사람을 때릴 때 귀신이 나간다든지 그런 교리가 아니라 성령이 성경의 진리를 사용하셔서 나타나시고 역사하신다고 하는 것은 반드시 그 사이에 객관적으로 선포된 하나님의 진리와 그것을 understanding 이해하고 오성에 눈을 뜨는 각성을 하고 이해를 하게 되는 그 영혼의 이해의 작용이 있는 그 사이에 성령이 개입하신다라고 하는 교리를 가지고 있었던 거예요. 그것이 없으면은 아무리 말씀과 성령을 이야기해도 그것은 굉장히 미신적인 결의에 불과하다 이거죠. 어느 목사님이 실제로 설교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능력 있는 줄 아네. 왜 그러냐면 귀신 들린 애들한테는 이 성경으로 뒤통수 치면 끝이래요.
02:25:38
이 개혁자들이 얘기한 말씀의 능력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는 그게 아니거든요. 속삭이듯이 이야기를 해도 사람들 마음속에 육성처럼 깊이 파고드는 그런 분위기가 돼야 된다는 거죠. 그리고 그런 데 있어서는 투자를 아끼지를 말아야 되는 거죠. 그렇게 해야지만 어떻게 방해받지 않고 전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할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전에 지하실에 교회에 있을 때 일어난 일인데 어느 자매 하나가 예배 시간에 처음 교회 수요예배에 참석해서 장세기 18장에 하나님 말씀하시기 그런 걸 찾아본 거예요. 흔히 그럴 수 있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막 찾다가 깜짝 놀랐대. 천둥 치는 소리가 나요.
02:26:25
자기 척척 넘기는 소리만 내려면 조용한 가운데 왜냐하면은 하나님의 말씀은 결국은 바르게 설교하면 설교할수록 논리를 가져야 될 거 아니에요. 그럼 논리가 전달되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이해가 되지 않고는 전달이 안 되는 거예요. 그 이해의 과정에 성령이 역사하시면 그런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는 거예요. 마틴 루터 주석의 서문을 읽던 어더스 게이터가 해서 그걸 읽던 요한 웨슬레가 그 교리를 깨닫는 가운데 성경이 임하시면서 오늘날 우리에게 알려진 웨슬레가 된 것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거 아니에요. 그렇잖아요. 이해라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니까 성령이 오시는 것은 우리 마음대로 어떻게 시간표를 만들 수는 없어요.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뭐가 있어요?
02:27:16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거기에 성령님이 오셨을 때에 그 성령님이 역사하실 수 있도록 우리가 충분히 사람들에게 이해를 시키는 것까지는 우리의 모든 지성과 사랑을 모두 동원해서 그래서 그 이해를 시켜야 되는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는 설교자의 설교도 논리적이고 쉽고 평이하고 그들의 수준에 맞게끔 되어야 되겠지만, 듣는 회중들의 입장에서는 집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려고 하는 의지를 가져야 된다. 이거죠.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깨닫는 것이 없이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는 어떠한 변화도 기대할 수 없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충동적인 순간의 변화에 불과하지 견고하게 거룩한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서 성결한 삶이 심겨진다라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거예요.
02:28:04
여러분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오래도록 뿌리 깊은 희망을 가지고 정말 진실해지려고 애를 쓰고 거룩한 삶을 사려고 애를 쓰고 조그만 양심의 가책에도 괴로워하고 그러는 사람 본 적이 있느냐 이거죠. 성결하고 거룩한 사람을 본 적이 있느냐 이따금 돌아와서 펑펑 울고 길길이 뛰는 냄비 같은 교인들은 만나지만 그런 것이 거룩한 삶을 창출해 주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러다가 보니까 무슨 문제가 일어나냐 하면 이 설교는 수없이 많은데 무슨 문제가 일어나냐 하면 기독교 사상이 세워지질 않는 거예요.
02:28:44
기독교 사상이 세워져서 뭔가 삶과 세계와 자신의 인생을 입체적으로 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단면적인 것은 면 하나만 있으면 되지만 입체적이기 위해서 여섯 면이 있어야지만 입체적이 된다고 그러면은 보다 풍부한 하나님의 진리를 아는 지식들이 주제적으로 성경별로 그런 것들이 쌓여가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채워져야지만 그런 사상가가 나오잖아요. 정확한 진리의 말씀이 가르쳐지고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말씀이 그 영혼들에게 성령으로 강력히 역사하셔서 깨닫는 그 영혼의 어떤 변화의 역사를 일으킬 때 그 영혼들 속에 참된 변화의 작용들이 일어나고 그 영혼의 변화가 일어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근본적으로 고쳐지고 그리고 자신의 영혼들이 치유되고 고쳐지는 변화의 역사들이 일어나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서 기독교 사상이 세워져 가는 거죠. 결론 안 냈겠어요?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
02:29:44
우리의 기도는 두 가지로 압축이 되는 거예요. 우선 첫째는 뭐냐 하면 우리 조국 교회의 예배에 있어서 사라져가고 있는 이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 깊은 애통을 가져야 된다. 이거죠. 정말 사람들이 이 예배를 통해서 참회를 경험하고 있습니까?
02:30:02
성령님이 정말 그 예배 중에 오셔서 그들이 하나님 앞에 앞에 정말 얼마나 끔찍한 죄인들이고 그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분이고 그분이 자기와 같은 죄인들을 하나님의 백성 삼기 위해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 얼마나 놀랍고 감격스러운 사건인지를 깨닫고 그 앞에 펑펑 우는 신앙의 감격이 있느냐 얘기 그런 것들이 모두 사라져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나는 이 예배에 놀라운 감격들이 초보적인 신앙의 표지라고 생각을 한다면, 그러고는 마음이 부요해져서 아무것도 없으면서도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하나님과의 만남에 대한 장엄한 성령의 체험을 사소한 인간의 지푸라기와 같은 지식들과 바꾸면서 그러면서 잘 믿는 교인인 척하면서 살아가는 그 교만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이 오늘날 우리 예배의 현장이 아니에요.
02:31:01
그래서 우리는 단지 성경적으로 잘 설교하는 거 가지고 만족할 수 없는 그 위에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부어져서 죄인들의 신념을 찔러 쪼개는 하나님의 말씀에 풍성한 역사가 나타나고 어디서도 깨트려지지 않던 흉악무도한 죄인들이 권능으로 가득 찬 실리 앞에 엎드려지는 그래서 자기의 죄를 쏟아 넣고 아버지 앞에 항복하는 그런 역사가 예배 중에 나타나야 된대요. 그리고 두 번째로, 우리들이 기억해야 될 것은 이제는 말이죠. 이제는 이 사마리아인들처럼 열광하면서 드렸던 이런 식의 예배, 깨닫는 것도 없고 참된 진리를 하는 지식도 없으면서 전통을 따라드리는 예배에 만족하는 이 우월주의적인 신앙들이 반드시 청산되게 된다예요.
02:31:49
그리고는 속히 회복돼야 될 것은 무엇이냐 하면 정말 하나님의 진리의 복음이 어디서든지 선명하게 선포되고 그리고 하나님의 진리에 사로잡힌 불꽃과 같은 설교자들이 조국 교회에 많이 나와서 그들에 의해서 장악된 예배의 강단을 통해서 풍부하게 하나님이 임하셔서 당신의 거룩을 드러내시는 그런 역사들이 예배 현장에서 나타나는 것 말고 이 교회가 그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독특성을 회복하는 길이 무엇이겠느냐는 것이죠.
기도하겠습니다. 그래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우리 시간에 잠깐 동안 같이 기도할 때 우리 조국교회 두 가지를 위해서 기도하였습니다.
02:32:39
첫째는 하나님 우리에게는 죄를 책망하고 사람들을 중생케 하고 주의 영광을 드러내는 찬란한 예배에 있어서 성령의 영광이 필요합니다. 주여 회복시켜주시고 진리의 말씀을 저희들에게 회복시켜 줄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사람들을 세워주시옵소서. 강단이 진리로 돌아가도록 도와주셔서 예배의 영광을 우리에게 돌려주시옵소서. 우리 같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였습니다. 살아계신 아버지 하나님 오늘 이 시간에도 살아계신 아버지 하나님 오늘 이 시간에도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빌고 원하옵나이다.
02:33:18
살아계신 아버지 하나님이여 오늘 이 시간에도 역사해 주시고 아버지 하나님이여 조국의 교회를 기억해주시옵소서 아버지 하나님 제 성령의 역사가 사라져가고 아버지 하나님의 영의 놀라운 역사들이 사라져가므로 아버지 하나님이여 교회가 메마르고 아버지 하나님이여 진리를 하는 지식들이 아버지 하나님의 성경에 대한 차가운 지식으로 대치되고 있는 이때에 아버지 하나님의 성품을 경험하게 해주시는 성령 하나님의 놀란 나온 역사가 저희들에게 회복되어야 되겠고 그리하여 예배의 영광이 영안에서 회복되는 역사가 일어나야 되겠사옵나이다.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이여 이 시간에도 간과하고 기도하오니 하나님 아버지여 역사해 주시고 은혜를 내려주시기를 간절히 빌고 오늘 옵나이다. 자비로우신 아버지 하나님이여. 오늘도 우리에게 일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아버지 하나님이여. 주의 진리가 사라져간 아버지 하나님이여.
02:34:15
이 핍자란 강단을 주님 기억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진리의 말씀이 사라져간 조국교회의 강단에 아버지 하나님이여 생명수가 없는 이때에 아버지 하나님이 기억해 주시고 아버지 하나님이여 역사해 주시기를 간절히 빌고 원하옵나이다.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이여 그리하여서 진리의 종들을 주님이 새롭게 세워주시고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의 종들을 새롭게 일으켜 세워주셔서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에 종들을 세워주셔서 그래서 그 모든 종들이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을 재현하고 증거할 때에 아버지 하나님이며 그들의 증거는 한 조각의 구름이지만 그 구름 속에 낙뢰를 바르시고 천둥을 바라셔서 아버지 하나님 척박한 이 땅 메마른 대지 위에 의의 빗줄기를 폭우와 같이 내리시게 하실 분은 하나님이시오니 아버지 하나님이여 이런 일들을 조국의 교회의 강산에 물대어 흐르게 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빌고 원하나이다.
02:35:08
그리하여 모든 영혼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그 영혼들 모두 주님을 인하여서 새로워지고 아버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위대하고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서 우리 주님 한번 바라보는 조국의 교회로 변화되도록 역사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빌 권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진정한 주의 백성들로 회복시키시고 아버지 하나님이 그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아버지 하나님이여 정말로 복음으로 이 강단들을 회복시켜주시기를 간절히 빌고 원합니다. 아버지 하나님이여 조국의 교회의 신학교들을 기억해 주셔서 이런 말씀의 사람들을 새롭게 세워주시고 그리할 하여 진리의 사람들로 세워주시기를 간절히 빌고 원하옵나이다. 살아계신 아버지 하나님 여의 시간에도 역사하여 주시고 그래서 이들 모두가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고 이 영혼들 하나하나가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의 사람들 진리의 사람들로 세워질 수 있도록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를 내려주시고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빌고 원하옵나이다.
02:36:05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 시간에도 조국의 교회의 연약한 부분들을 치료하시고 고쳐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아버지 하나님의 이 땅에 주의 나라가 오게 하는 진실한 도구들이 될 수 있도록 하나님 아버지 역사해 주시고 은혜를 내려주시기를 간절히 빌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이 시간에도 역사해 주시고 아버지 하나님표 저희들을 새롭게 주시옵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