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상이몽, 같은 식탁 다른 꿈, 하나의 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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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는 세대가 함께 둘러 앉았습니다.
지금까지 예배에 아이들이 주축이었다면 이제 조금 큰 아이들이 주축이 되는 예배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조금 특별한 방식으로 하나님 말씀 앞에 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2천년 전, 예수님 곁에는 열두 명의 제자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을 따랐고, 늘 같은 식탁에 앉아있었고, 같은 길을 걸었고 같은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참 재미있었던 것은 아무리 같은 식탁에 날마다 같이 앉아있었으나 앉아 있는 주님을 바라보면서도 그들이 꿈꾸는 예수님은 저다마 달랐다는것에 참 흥미로운 사실입니다.
어떤 제자는 예수님이 세상 앞에서 더 크게 드러나기를 원했고
어떤제자는 예수님이 불의한 세상을 힘으로 무너뜨려 주시기를 원했습니다.
어떤 제자는 예수님이 자기 계산 안에서 움직여 주시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의 제목이 “동상이몽” 입니다. 같은 자리에 있으나 다른 꿈을 꾸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의 식탁, 다른 꿈, 그러나 하나의 십자가.
오늘 우리는 세 사람을 만날 것입니다.
다대오의 답답한 마음이, 시몬의 타들어가는 불꽃이, 유다의 셈법이 곧 우리의 모습이고 이야기라는것을 오늘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저도 목사로 살아오면서 제 안에 이 세 사람이 다 있다는 것을 자주 봅니다. 설교를 준비하면서도 “주님, 이번에는 사람들이 좀 알아주면 좋겠습니다” 하는 다대오가 있습니다. 억울한 일을 만나면 “주님, 저 사람 좀 어떻게 해 주십시오” 하는 시몬이 올라옵니다. 교회 사역과 가정의 일정을 계산하다 보면 “주님, 이건 낭비 아닙니까?” 하는 유다가 제 안에서 고개를 듭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누구를 정죄하려고 이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들은 다대오의 목소리를 빌려 읽습니다. 남성들은 시몬의 목소리를 빌려 읽습니다. 여성들은 유다의 목소리를 빌려 읽습니다.
그러나 절대 오해하지 마십시오.
아이들이 다대오라는 뜻이 아닙니다.남성들이 시몬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여성들이 유다라는 뜻은 더더욱 아닙니다.
우리 모두 안에 다대오가 있습니다.우리 모두 안에 시몬이 있습니다.우리 모두 안에 유다가 있습니다.
우리는 같은 예배에 앉아도, 서로 다른 예수를 꿈꿀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꿈을 십자가 아래에서 하나로 새롭게 하십니다.
다대오:“주님, 왜 더 크게 보여주지 않으십니까?”
18 나는 너희를 고아처럼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19 조금 있으면, 세상이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20 그 날에 너희는, 내가 내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또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21 내 계명을 받아서 지키는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 사람을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드러낼 것이다.”
22 가룟 유다가 아닌 다른 유다가 물었다. “주님, 주님께서 우리에게는 자신을 드러내시고, 세상에는 드러내려고 하지 않으시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23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리하면 내 아버지께서 그 사람을 사랑하실 것이요, 내 아버지와 나는 그 사람에게로 가서 그 사람과 함께 살 것이다.
24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한다. 너희가 듣고 있는 이 말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
저는 다대오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저를 이렇게 부릅니다.
“가룟 유다가 아닌 유다.”
이름도 헷갈립니다. 사람들은 저를 잘 기억하지 못합니다.
베드로처럼 유명하지도 않습니다. 요한처럼 사랑받는 제자라고 불리지도 않습니다.
도마처럼 의심 많은 제자로 유명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밤, 저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주님, 왜 우리에게만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나타내지 않으십니까?”
솔직히 저는 예수님이 더 크게 드러나셨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이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면, 왜 세상이 모르게 하십니까?
왜 로마 황제 앞에 나타나지 않으십니까?
왜 예루살렘 성전 꼭대기에서 모든 사람이 보게 하지 않으십니까?
요즘 말로 하면 이런 마음입니다.
주님, 왜 라이브 방송 한 번 안 하세요?
왜 모두가 인정할 만한 증거를 보여주지 않으세요?
왜 악한 사람들 앞에서 “이 아이는 내 사람이다” 하고 공개적으로 말해 주지 않으세요?
학교에서 억울한 일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친구 관계가 힘들 때가 있습니다.
열심히 했는데 아무도 몰라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저는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진짜 계시면, 지금 딱 보여주시면 안 되나?”
그런데 예수님은 제 기대와 다르게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가겠다.” “아버지와 내가 너에게 와서 너와 함께 살겠다.”
주님은 세상을 압도하는 방식으로 오시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내 마음 안에 거처를 정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조금 실망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이제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사람들 앞에서 자랑거리로 만들기 전에, 내 안에 먼저 집을 지으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보여주기 위해 오시는 분이 아니라, 함께 살기 위해 오시는 분이십니다.
[질문]
어른들도 하나님이 좀 더 눈에 보이게 일해 주셨으면 할 때가 있지 않으세요?
일이 잘 풀리고, 사람들이 인정해 주고, 결과가 좋아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고 느낄 때가 있지 않으세요?
그런데 우리가 성적이 좋지 않아도, 무대에서 박수받지 못해도, 친구들에게 인기 있는 아이가 아니어도,
하나님이 우리 안에 조용히 함께 계신다는 것을 정말 믿어 주실 수 있나요?
하나님때문에 우리가 유명해지는 것보다 우리 안에 하나님이 거하시는 것을 더 기뻐해 주실 수 있나요?
[설교자]
다대오의 질문은 참 솔직합니다.
“주님, 왜 세상에는 드러내지 않으십니까?”
여기서 “드러내다”라는 말의 헬라어가 엠파니조, ἐμφανίζω입니다. 이 말은 보여주다, 나타내다, 알려지게 하다라는 뜻을 가집니다. 다대오는 예수님의 드러나심이 세상 앞에서 공개적이고 눈에 보이는 방식이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에서 그 드러나심을 “사랑하는 자 안에 거하시는 임재”로 설명하십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아버지와 내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함께하겠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거처”라는 말이 모네, μονή입니다. 이 단어는 요한복음 14장에서 하늘 아버지 집의 “거할 곳”과 신자 안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거처”를 함께 연결합니다.
이게 복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용해서 자신을 과시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거처를 정하십니다.
우리는 자꾸 묻습니다.
“주님, 저를 통해 좀 보여주세요.” 주님은 대답하십니다.
“아니다. 내가 먼저 네 안에 살겠다.”
짧게 말하면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보여주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라, 함께 살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2. 열심당원 시몬:“주님, 그 사람까지 사랑하라고요?”
12 그 무렵에 예수께서 기도하려고 산으로 떠나가서, 밤을 새우면서 하나님께 기도하셨다.
13 날이 밝을 때에, 예수께서 자기의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다. 그는 그들을 사도라고도 부르셨는데,
14 열둘은 베드로라고도 이름을 주신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과 빌립과 바돌로매와
15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열심당원이라고도 하는 시몬과
16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배반자가 된 가룟 유다이다.
12 그 무렵에 예수께서 기도하려고 산으로 떠나가서, 밤을 새우면서 하나님께 기도하셨다.
13 날이 밝을 때에, 예수께서 자기의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다. 그는 그들을 사도라고도 부르셨는데,
14 열둘은 베드로라고도 이름을 주신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과 빌립과 바돌로매와
15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열심당원이라고도 하는 시몬과
16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배반자가 된 가룟 유다이다.
27 그러나 내 말을 듣고 있는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너희의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 해 주고,
28 너희를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하고, 너희를 모욕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29 네 뺨을 치는 사람에게는 다른 쪽 뺨도 돌려대고, 네 겉옷을 빼앗는 사람에게는 속옷도 거절하지 말아라.
30 너에게 달라는 사람에게는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사람에게서 도로 찾으려고 하지 말아라.
31 너희는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여라.
32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하면, 그것이 너희에게 무슨 장한 일이 되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네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한다.
33 너희를 좋게 대하여 주는 사람들에게만 너희가 좋게 대하면, 그것이 너희에게 무슨 장한 일이 되겠느냐? 죄인들도 그만한 일은 한다.
34 도로 받을 생각으로 남에게 꾸어 주면, 그것이 너희에게 무슨 장한 일이 되겠느냐? 죄인들도 고스란히 되받을 요량으로 죄인들에게 꾸어 준다.
35 그러나 너희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좋게 대하여 주고, 또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어라. 그리하면 너희는 큰 상을 받을 것이요, 더없이 높으신 분의 아들이 될 것이다. 그분은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과 악한 사람들에게도 인자하시다.
36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저는 시몬입니다. 사람들은 저를 열심당원 시몬이라고 불렀습니다.
제 안에는 열심이 있었습니다. 나라를 향한 열심. 정의를 향한 열심.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열심.
저는 세상이 얼마나 거칠고 불공평한지 압니다. 힘없는 사람은 밀립니다.
말이 안 통하는 사람에게는 강하게 말해야 합니다. 내 가족을 지키려면, 내 자리를 지키려면, 내 신념을 지키려면 물러서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해 주어라.”
“너희를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하여라.” “너희를 모욕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저는 그 말씀을 듣고 마음이 막혔습니다.
주님, 원수를 사랑하라고요? 저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고요?
나를 무시한 사람, 내 가족을 힘들게 한 사람, 내 인생을 짓밟은 사람을 위해서요?
그건 지는 것 아닙니까? 그건 너무 약한 것 아닙니까? 그건 정의를 포기하는 것 아닙니까?
예수님을 따라다닐때 심지어 저는 마태와 같은 식탁에도 앉았습니다. 그 매국노같은 놈과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조금씩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비겁해지라고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더 어려운 싸움으로 저를 부르신 것이었습니다.
칼을 드는 싸움보다 어려운 싸움. 화를 내는 싸움보다 어려운 싸움. 상대방을 이기는 싸움보다 훨씬 어려운 싸움.
내 안의 미움을 십자가 앞에 내려놓는 싸움입니다.
저는 원수를 향해 칼을 들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 그 칼이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아내에게. 아이들에게. 교회 안의 형제에게.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에게.
나는 정의를 말했지만, 누군가는 내 옆에서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옳은 말을 한다고 했지만, 누군가는 내 말에 마음을 베이고 있었습니다.
주님이 제게 물으시는 것 같았습니다.
“시몬아, 네 열심은 사랑이 되었느냐? 아니면 칼이 되었느냐?”
[질문]
[질문]
오늘 집으로 돌아가서 조용히 물어보고 싶습니다.
내가 옳다고 말할 때, 당신은 사랑받는다고 느꼈습니까? 아니면 공격받는다고 느꼈습니까?
내가 가족을 지킨다고 했을 때, 아이들은 안전하다고 느꼈습니까? 아니면 긴장하고 눈치를 보았습니까?
내가 진리를 말한다고 했을 때, 내 말 속에 예수님의 온유함도 있었습니까? 아니면 내 자존심만 있었습니까?
오늘 이 대답들 다 못듣더라도 이 질문을 피하지 않겠습니다.
“내 열심은 사랑이 되었는가, 아니면 무기가 되었는가?”
[설교자]
열심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있어야 합니다.
정의를 향한 열심도 필요합니다. 가정을 지키려는 열심도 귀합니다.
문제는 열심이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을 때입니다.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은 열심은 쉽게 칼이 됩니다.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은 확신은 쉽게 폭력이 됩니다.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은 정의감은 가까운 사람을 찌릅니다.
예수님은 시몬에게 열심을 버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열심을 십자가 아래에 내려놓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공동체가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 안에는 세리 마태도 있었습니다. 로마의 세금 체계와 연결된 사람입니다.
그리고 시몬도 있었습니다. 로마 지배 아래 끓어오르던 분노와 열심의 이름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 둘이 같은 식탁에 앉았습니다.
예수님은 둘 중 하나를 쫓아내지 않으셨습니다. 둘 다 십자가 앞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러므로 원수 사랑은 감상적인 말이 아닙니다. 원수 사랑은 내 신념을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원수 사랑은 내 신념보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더 신뢰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기도는 이것입니다.
“주님, 내 열심을 없애지 마십시오. 그러나 내 열심이 칼이 되지 않게 하십시오. 내 열심이 사랑이 되게 하십시오.”
3. 가룟 유다 :“주님, 300데나리온인데요?”
3. 가룟 유다 :“주님, 300데나리온인데요?”
1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가셨다. 그 곳은 예수께서 죽은 사람 가운데에 살리신 나사로가 사는 곳이다.
2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는데, 마르다는 시중을 들고 있었고, 나사로는 식탁에서 예수와 함께 음식을 먹고 있는 사람 가운데 끼여 있었다.
3 그 때에 마리아가 매우 값진 순 나드 향유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았다.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 찼다.
4 예수의 제자 가운데 하나이며 장차 예수를 넘겨줄 가룟 유다가 말하였다.
5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지 않고, 왜 이렇게 낭비하는가?”
6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사람을 생각해서가 아니다. 그는 도둑이어서 돈자루를 맡아 가지고 있으면서, 거기에 든 것을 훔쳐내곤 하였기 때문이다.)
7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대로 두어라. 그는 나의 장사 날에 쓰려고 간직한 것을 쓴 것이다.
8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지만, 나는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
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는, 자기가 이 세상을 떠나서 아버지께로 가야 할 때가 된 것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
2 저녁을 먹을 때에, 악마가 이미 시몬 가룟의 아들 유다의 마음 속에 예수를 팔아 넘길 생각을 불어넣었다.
3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것을 아시고,
4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서,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셨다.
5 그리고 대야에 물을 담아다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른 수건으로 닦아주셨다.
2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마음이 괴로우셔서, 환히 드러내어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 넘길 것이다.”
22 제자들은 예수께서, 누구를 두고 하시는 말씀인지 몰라서, 서로 바라다보았다.
23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 곧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바로 예수의 품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24 시몬 베드로가 그에게 고갯짓을 하여, 누구를 두고 하시는 말씀인지 여쭈어 보라고 하였다.
25 그 제자가 예수의 가슴에 바싹 기대어 “주님, 그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다.
26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이 빵조각을 적셔서 주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다.” 그리고 그 빵조각을 적셔서 시몬 가룟의 아들 유다에게 주셨다.
27 그가 빵조각을 받자,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다. 그 때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할 일을 어서 하여라.”
28 그러나 거기 앉아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아무도, 예수께서 그에게 무슨 뜻으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를 알지 못하였다.
29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자루를 맡고 있으므로, 예수께서 그에게 명절에 그 일행이 쓸 물건을 사라고 하셨거나, 또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엇을 주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생각하였다.
30 유다는 그 빵조각을 받고 나서, 곧 나갔다. 때는 밤이었다.
저는 유다입니다. 가룟 유다입니다.
저는 제자들의 돈궤를 맡았습니다. 그 말은 한때 제가 신뢰받는 사람이었다는 뜻입니다.
공동체가 움직이려면 돈이 필요합니다. 밥도 먹어야 합니다.
길을 가려면 준비도 해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도우려면 재정도 있어야 합니다.
저는 계산했습니다. 오늘 얼마가 들어왔는지. 내일 얼마가 필요한지. 무엇을 아껴야 하는지.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지.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제 안에서 계산이 사랑보다 빨라졌습니다.
마리아가 향유를 가져왔을 때, 집 안에 향기가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향기를 맡지 못했습니다. 저는 숫자를 보았습니다.
300데나리온.
저 향유는 거의 1년 치 품삯이었습니다. 그 돈이면 할 수 있는 일이 많았습니다.
가난한 사람도 도울 수 있었습니다. 공동체 살림도 넉넉해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말했습니다. “왜 이렇게 낭비하는가?”
말은 맞았습니다. 논리도 있었습니다. 명분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 안에는 사랑이 없었습니다.
저는 가난한 사람을 말했지만, 사실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낭비를 말했지만, 사실 예수님의 죽음을 보지 못했습니다.
저는 가격은 알았지만, 가치를 몰랐습니다.
마리아는 향유를 쏟았습니다. 저는 마음을 닫았습니다.
마리아의 향기는 집 안에 가득 찼고, 제 마음에는 어둠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질문]
[질문]
우리도 묻고 싶습니다.
내가 가정을 위해 계획한다고 했을 때, 가족들은 사랑을 느꼈습니까, 아니면 통제를 느꼈습니까?
내가 아이의 미래를 위해 말한다고 했을 때, 아이는 격려를 들었습니까, 아니면 불안을 들었습니까?
내가 살림을 지키고, 예산을 지키고, 일정을 지킨다고 하면서 혹시 우리 집에서 향유의 향기를 사라지게 하지는 않았습니까?
우리 집에는 가계부만 남아 있습니까? 아니면 사랑의 향기도 남아 있습니까?
오늘 주님 앞에서 묻습니다.
“나는 가격은 아는데, 가치를 잃어버린 사람은 아닙니까?”
[설교자]
요한복음 12장은 유다를 아주 냉정하게 보여 줍니다.
유다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지 않고 왜 이렇게 낭비하느냐”고 말했을 때, 요한은 그 속마음을 설명합니다. 그가 가난한 사람을 생각해서 말한 것이 아니라, 돈궤를 맡고 있으면서 훔쳤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유다는 처음부터 멀리 있던 사람이 아닙니다. 가까이 있던 사람입니다. 말씀을 들은 사람입니다. 기적을 본 사람입니다.
돈궤를 맡을 만큼 신뢰받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조금씩 식었습니다.
계산이 사랑을 이기기 시작했습니다. 효율이 경배를 판단하기 시작했습니다. 가격이 가치를 삼키기 시작했습니다.
마리아의 향유는 300데나리온이었습니다. 당시 300데나리온은 노동자의 거의 1년 품삯에 해당하는 큰돈으로 이해됩니다.
그러니 유다의 말이 완전히 말도 안 되는 말은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계산이 틀렸다는 것이 아닙니다. 계산이 전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조슈아 헤셸은 『God in Search of Man』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What we lack is not a will to believe but a will to wonder.”
우리말로 옮기면,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믿으려는 의지가 아니라 경이로워하려는 의지”라는 뜻입니다.
유다가 잃어버린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경이로움. 예배의 감각.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아보는 마음.
유다는 300데나리온을 계산했습니다. 그러나 자기 앞에 계신 분의 가치를 계산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
아이의 성적은 계산하는데 아이의 마음은 못 봅니다. 가정의 예산은 계산하는데 가족의 외로움은 못 봅니다.
교회의 효율은 계산하는데 성도의 눈물은 못 봅니다. 예배 시간은 계산하는데 주님의 임재는 놓칩니다.
계산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계산이 주인이 되면 사랑은 향기를 잃습니다.
짧게 말하면 이것입니다.
유다는 가격을 알았지만, 가치를 잃었습니다. 마리아는 가격을 넘어서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결론]
[결론]
자, 이제 세 사람이 한 식탁에 있습니다.
다대오가 있습니다. “주님, 왜 더 크게 보여주지 않으십니까?”
시몬이 있습니다. “주님, 그 사람까지 사랑하라고요?”
유다가 있습니다. “주님, 300데나리온인데요?”
이 세 질문이 낯설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다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다대오가 있습니다. 옳다는 이유로 날카로워지는 시몬이 있습니다.
계산하다가 사랑을 놓치는 유다가 있습니다.
우리는 같은 예배에 앉아도, 서로 다른 예수를 꿈꿀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나를 증명해 주는 예수를 원합니다. 어떤 사람은 내 원수를 꺾어 주는 예수를 원합니다.
어떤 사람은 내 계산 안에서 움직이는 예수를 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의 꿈을 그대로 만족시키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꿈을 십자가 아래에서 새롭게 하러 오신 분입니다.
다대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살겠다.”
시몬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유다가 있는 그 식탁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요한복음 13장은 유다가 배반의 마음을 품은 식탁에서 예수님이 일어나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고, 이후 유다가 밤으로 나갔다고 증언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방식입니다.
보여 달라는 제자에게는 거처가 되어 주시고, 싸우려는 제자에게는 원수 사랑을 가르치시고, 계산하는 제자 앞에서는 말없이 수건을 두르십니다.
그리고 십자가로 가십니다.
십자가는 다대오의 답답함을 품습니다. 십자가는 시몬의 분노를 품습니다. 십자가는 유다의 냉랭함까지 드러냅니다.
하지만 십자가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새롭게 부릅니다.
더 이상 나를 증명하려고 살지 말라고. 더 이상 칼을 들고 살지 말라고. 더 이상 사랑을 계산만 하며 살지 말라고.
오늘 집으로 돌아가실 때, 서로를 심문하지 마십시오. “너 오늘 설교 들었지?” 하지 마십시오.
대신 이렇게 말해 보십시오.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내 안에 있는 다대오를 봤어.”
“내 안에 있는 시몬을 봤어.”
“내 안에 있는 유다를 봤어.”
“미안해. 그리고 같이 십자가 앞으로 가자.”
오늘의 한 문장을 붙들고 가십시오.
우리는 같은 예배에 앉아도, 서로 다른 예수를 꿈꿀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꿈을 십자가 아래에서 하나로 새롭게 하십니다.
같은 식탁, 다른 꿈. 그러나 하나의 십자가.
그 십자가 아래에서 우리 가정이 다시 하나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가 다시 하나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열심이 사랑이 되고, 우리의 계산이 경배가 되고,
우리의 답답함이 임재의 기쁨으로 바뀌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