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로 눈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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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dout
S : 바울이 예루살렘의 천부장 영내에서 사람들에게 히브리말로 전하는 변명과 그 결과
Q: 바울이 예루살렘의 천부장 영내에서 사람들에게 히브리말로 전하는 변명과 그 결과는 무엇이었는가?
바울은 예수의 도를 박해하다가 다메섹에서 직접 예수를 만남으로 인해, 예수의 도를 전할 수 밖에 없다고 변명했다.
바울의 변명을 듣고 무리는 분노하게 되었고, 천부장은 심문하려고 하였으나 바울이 로마 시민권을 가졌다는 것을 발견하고 두려워했다.
요즘 내 눈을 사로잡는 것은 무엇인가?
전쟁이 어느정도 소강상태가 되니, 지진으로 온 세상이 소란스럽다.
베네수엘라에서는 2천 600명이 죽고 5만여명이 실종되었고, 필리핀에서는 100여명이 죽고 부상자가 수천명에 이른다.
가난한 국가의 현실로 인해 구조작업 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는 상황이 마음아프다. 생각 날 때마다 기도와 모금이 필요하다.
최근 일련의 사건을 통해, 내 눈이 약자를 향해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힘과 능력이 있다면, 마음껏 돕고 돌보고 격려하고 싶은 마음이다.
보는 것은 사는 것이다
눈은 방향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다.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어떻게 사느냐?가 결정된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바울은 새로운 것을 보았고, 새로운 삶을 살았다. 바울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역시 새로운 것을 보고, 새로운 삶을 다시 용기 백배하여 살아내게 되기를 축원한다.
[본론]
천부장의 영내에서 히브리 말로 바울의 자신의 눈이 달라졌던 여정을 설명한다. 그곳은 ‘다메섹’ 이었다.
바울은 다메섹 이전과 이후로 정체성이 완전히 변했다.
다메섹 이전의 바울
다메섹 이전의 바울
3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4 내가 이 도를 박해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바울은 당시 아테네와 알렉산드리아와 버금가는 도시였던 튀르키에 남부에 있던 다소 출신이었다. 태어나면서 로마 시민권자였던 것을 볼 때, 굉장한 명문 가문이었다.
10대 때 예루살렘으로 유학, 유명한 랍비 가말리엘 문하에서 수학했던 수재였다. 신학적 지식으로 충만했고, 정서적 신앙에 대해 누구보다 열정적이었으며, 도덕적으로는 흠이 없다고 여겨졌다(Jared Byas, Love Matters More: How Fighting to Be Right Keeps Us from Loving Like Jesus(Grand Rapids, MI: Zondervan, 2020), 15쪽.)
살아있는 권력
유대 종교 지도자에게 공식적인 위임을 받아 기독교인들을 투옥할 권한을 가진 살아있는 권력 이었다.
다메섹 이전의 바울은 정말 잘 나갔던 사람이었다.
다메섹 이후의 바울
다메섹 이후의 바울
내가 땅에 엎드러져...
… 사람들의 손에 끌려 다메섹에 들어갔노라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무기력한 도망자
다메섹 이후 바울은 땅에 엎드러지고, 보지 못해 안내를 받아야 했고, 죽이려는 사람을 피해 쫓겨 다녔다.
다메섹 이전 vs 이후
다메섹 이전 vs 이후
여러분은 다메섹 이전과 이후의 바울 중 어느쪽이 더 좋은가? 여러분은 둘 중 어디에 속하고 싶은가?
진솔한 추구미
솔직한 내면은, 다메섹 이전을 추구한다. 성공의 모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다메섹 이전의 바울이 되기를 꿈꾼다. 성공한 바울의 뒷꿈치라도 닮고 싶어서 매일 발버둥친다. 그의 권력, 그의 능력, 그의 힘과 지위를 가지고 싶다.
악한 욕망
말끔하게 차려 입고, 에스코트를 받으며 멋진 차에서 내려, 많은 사람의 부러움과 존경을 받으며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내일을 꿈꾼다. 문 닫은 백화점에서 프라이빗하게 쇼핑하는 멋진 나를 꿈꾼다.
선한 욕망
고통 받는 자들을 위해 마음껏 후원할 수 있는 재력과 소외 받은 약자를 돕고 섬기는 제단이나 센터를 건립하려고 한다.
악한 욕망이든 선한 욕망이든, 다메섹 이전을 추구하는 왜곡된 신앙이다.
욕망을 건너다
모든 성도는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듯, 다메섹을 건넜다.
욕망의 자유자
더 이상 욕망의 노예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주도적,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판단할 수 자유자이다.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고, 욕망을 사로잡아 복종시키는 자유자이다.
그게 바로 ‘성도’다
자유자 바울은 다메섹 이후에 그 이전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
똥 덩어리
다메섹 이전에 추구했던 모든 욕망이 ‘똥 덩어리’라는 뜻이다.
바울이 다메섹 이전의 모든 것을 ‘똥 덩어리’로 여길 수 있었던 이유를 우리도 발견해야 한다.
6 가는 중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부터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치매
7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8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9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에게 말씀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태양 보다 예수
바울이 다메섹 이전의 욕망을 버릴 수 있었던 것은 ‘강렬한 태양 보다 더 강열한 예수’ 때문이었다.
강렬한 태양은 눈을 멀게 하지만, 강렬한 예수는 어두웠던 영안의 눈을 밝히신다.
예수를 보면 닫혔던 영안의 눈이 열린다. 진짜가 무엇인지, 무엇이 더 고결한지 알 수 있다.
예수로 눈 멀다
예수로 눈 멀다
예수로 눈이 멀어야 다메섹 이전의 것에 관심이 빼앗기지 않는다.
예수로 눈이 먼 다메섹 이후의 이야기를 들은 예루살렘 백성은 분노했다.
22 이 말하는 것까지 그들이 듣다가 소리 질러 이르되 이러한 자는 세상에서 없애 버리자 살려 둘 자가 아니라 하여
23 떠들며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리니
다메섹 이전을 쫓아 살아가는 이들에게, 다메섹 이후의 고백은 분노를 일으킨다.
성도는 십자가라는 다메섹에서 예수의 빛으로 눈이 먼 자들이다.
더 이상 이생의 자랑, 안목의 정욕, 육체의 정욕에 사로잡히지 않는 자 말이다.
성도에게 중요한 가치는 찬란한 세상의 영광보다 더 찬란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결론]
여러분의 삶이 녹녹치 않고, 버겁고, 수고스럽다는 것 안다. 그런 여러분의 삶을 응원한다.
말로만 응원하지 않고 삶으로 응원하고자 지지난 목요일 삼성 반도체 공장에 중량 설비 일일 아르바이트를 하러 갔다.
가는 날이 장날이든지, 아니면 내가 일을 몰고 다니는지 모르겠지만, 아침 6시 40분에 집결지에 도착해서, 밤 10시에 공장에서 나왔다. 정말 그곳이 그런 곳인지 몰랐다. 오전 근무 6시간, 오후 근무 7시간 동안 화장실 한번 가지 못했고, 물 한모금 먹는 것도 너무 버거웠다. 잔업만 무려 5시간이었다.
더 충격적인건 반도체 공장 안에는 핸드폰 조차 가지고 갈 수 없었고, 무슨 일을 하러 간지도 모르는 아내는 하루 종일 연락이 안 되어서 장기 밀매에 팔려 간 줄 알고 112에 신고를 하기 직전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핸드폰은 부재중 전화와 불안한 카톡 천지였고, 아내에게 전화를 하자 마자 대성통곡을 했다. 하루 종일 지옥을 맛보았다며 통곡하는 소리가 함께 차를 타고 있던 사람들에게까지 다 들릴 정도였다.
다음날도 일하러 가려고 했는데, 예상 밖의 근무 시간과 환경, 아내의 만류로 가지 않았다. 하루치 급여가 들어왔는데, 잔업 수당이 8만원이었다. 아무래도 이상해서 아르바이트를 모집하던 대표에게 잔업 수당이 어떻게 계산 된 건지 문자로 보내라고 했다. 그 즉시 대표는 전화했다.
10시까지 잔업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고, 작업 업체가 일일 노동자들이 너무 고생해서 1시간 더 잔업 수당을 지불하겠다고 했다는 이야기까지 했다. 그런데, 어떻게 8만원이냐고 물었더니 당황하는 듯이 이래저래 변명하더니 정확한 정황을 알아보겠다며 전화를 끊었고, 금방 다시 전화가 왔다. 5시간 잔업, 너무 수고해서 저녁 식사 1만원 포함해서 11만원이면 되겠냐며 회유했다.
그런데, 뭔가 말이 맞지 않았다. 분명, 업체에서 너무 수고해서 1시간을 추가해 준다고 본인 입으로 말했기 때문이다. 그럼 잔업 6시간으로해 13만원이어야 하지 않는가! 다시 설명하고 이야기 했더니던, 아주 수월하게 13만원을 추가 지불해 주겠다고 했다. 그 때, 나랑 같이 작업하던 60대 중반의 일일 노동자 분들인 5명이 더 있었다. 그들도 똑같이 계산하라고 했다. 그리고 그 대표에게, 제발 노동자 만원 빼앗으려고 그렇게 애쓰면서 살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나는 그쪽 업체에 블랙리스트가 되었다. 다시 지원했더니 바로 안 된다고 연락이 왔다.
아내와 나에게 그 시간은 육체와 정신의 지옥 같은 시간이었지만, 그 시간을 통해 참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내 안에 감추어져 있던 마음이 다시 꿈틀거리는 것을 발견했다. 삼성이라는 거대한 자본주의에서 노동자를 보호하고 싶은 정의로운 마음이 꿈틀거린다. 슬프게도 노동자는 10만원이면 간도 쓸게도 내어 놓는다. 그걸 악용하는 거대 자본주의에서 삶을 위해 수고하는 노동자를 보호하는 일을 하려고 한다. 그건 나중에 다시 나누겠다.
무의미함과 유의미함
오늘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 노동이 우리 부부에게 미치는 무의미함과 유의미함이다.
무의미함은 한 때 잘나가던 목사로 안전화를 신고, 각반을 하고, 3M 장갑을 착용하고 눈치 밥을 먹어야 하는 그 자리에 있다는 것에 대한 남들의 평가, 시선, 체면, 궁색, 수치, 절망, 두려움 따위는 더 이상 우리에게 무의미하다.
유의미함은 그 시간을 통해 약자를 돌보고, 돕고, 돕게 될 것에 대한 소망을 꿈꾸게 되었다는 것에서 유의미하다.
왜냐하면, 이미 우리는 다메섹을 건너 예수로 눈 먼 자들이기 때문이다.
예수로 눈 멀면 다메섹 이전의 모든 것은 무의미함을, 다메섹 이후의 모든 것이 유의미함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데이처치여! 예수로 눈 먼 자들이 되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