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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 화려한 풍요 뒤에 감춰진 영적 파산]
[1편: 화려한 풍요 뒤에 감춰진 영적 파산]
(훅) 우리가 통장 잔고가 늘어나고 삶이 안정되어 갈 때, 과연 우리의 영혼도 함께 평안하고 안전할까요? 3천 년 전 북이스라엘은 역사상 유례없는 눈부신 물질적 풍요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속마음은 무섭게 썩어 들어가고 있었죠. 화려한 경제적 번영 뒤에 감춰진 끔찍한 영적 파산의 현실, 과연 그 시대와 사람들에게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걸까요?
(내용) 호세아 8장부터 10장까지의 기록을 보면, 이스라엘은 겉보기에는 열매가 주렁주렁 열린 무성한 포도나무 같았습니다. 경제가 번영할수록 그들은 하나님께 감사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들을 부유하게 해줄 우상 제단과 화려한 돌기둥을 더 많이 세웠습니다. 돈이 신이 되어버린 사회 속에서, 은을 받고 죄 없는 의인을 팔아넘기며 신발 한 켤레 값에 가난한 자의 목숨을 짓밟는 끔찍한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타인의 고통을 조롱하고 양심이 완전히 마비되어버린 이 모습, 어딘가 익숙하지 않으신가요? 물질의 풍요 속에서 생명을 경시하고 타인의 아픔에 눈감아버리는 오늘날 우리의 씁쓸한 시대상과 너무나도 닮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비극의 원인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기 때문이라고 탄식하십니다. 말씀이라는 절대적인 기준이 무너지니, 이 땅에 서로를 불쌍히 여기는 인애마저 말라버린 것입니다. 그들이 그토록 자랑하고 애지중지하며 의지하던 사마리아 벧엘의 화려한 금송아지는 결국 적국 앗수르 왕에게 조공으로 바쳐지는 끔찍한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권력을 쥐고 흔들던 이스라엘의 왕조차 거센 물결 위의 거품처럼 허무하고 무기력하게 멸망할 것입니다. 풍요로울수록 마음이 나누어져 양다리를 걸치고 거짓 맹세를 남발하던 위선된 마음. 그들은 목이 뻣뻣하게 굳어 우상을 향해 달려갔고, 진리를 분간하지 못한 채 거짓의 길로 휩쓸려 떠내려가고 말았습니다.
(강한 메시지) 하지만 여러분, 이토록 무섭고 준엄한 심판의 경고 속에 감춰진 하나님의 진짜 마음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것은 우리를 멸망시키려는 무자비한 저주가 아니라, "제발 늦기 전에 내게로 돌아오라"며 피눈물로 부르시는 마지막 사랑의 기회입니다. 자녀를 포기하지 않는 부모가 회초리를 들기 전 흘리는 그 애타는 눈물의 경고가, 오늘 여러분의 귓가에는 들리십니까?
[2편: 변명과 합리화의 갑옷을 벗어라]
[2편: 변명과 합리화의 갑옷을 벗어라]
(훅) 부모님이나 선생님에게 크게 혼이 날 때, 여러분의 입에서 가장 먼저 튀어나오는 말은 과연 무엇인가요? "아니, 그게 아니고요. 사실은 이만저만해서 그랬어요." 혹시 습관적으로 내 억울함과 변명부터 늘어놓고 있지는 않으신가요? 하나님 앞에 선 우리의 모습도 이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도대체 왜 우리는 나의 잘못을 깨끗하게 인정하지 못하는 걸까요?
(내용) 혼이 날 때 우리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정당한 이유를 대고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철저히 혼나는 사람의 이기적인 입장일 뿐입니다. 우리가 놓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사실은 바로 '혼을 내는 대상과의 위치와 관계'입니다. 모르는 사람이 나를 지적했다면 상황을 설명하고 변명하는 것이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나를 사랑하는 부모나 올바른 길로 인도하려는 선생님 앞이라면 다릅니다. 먼저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라고 나를 낮추고 인정하는 것이 관계의 기본입니다. 끝까지 변명하려 드는 태도는, 나를 바른길로 돌이키려는 의로운 훈계와 사랑의 과정을 철저히 거부하는 교만입니다. "당신이 내 상황을 잘 몰라서 그러는데, 제대로 알고나 혼내세요"라고 대드는 것과 같습니다.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 그랬습니다. 진리가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병든 세상 속에서, 그들은 말씀을 따라 살지 않으면서도 끊임없이 자신들의 상황과 풍요를 합리화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잘못했다'고 시인하면 곧바로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고 보상해야 한다는 두려움 때문에, 누구도 먼저 사과하지 않는 끔찍한 단절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심지어 가족 간에도 먼저 용서를 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잘잘못을 따지는 재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악을 고발하시는 이유는 벌을 주기 위함이 아니라, 십자가의 은혜로 관계를 회복하기 위함입니다. 변명과 합리화의 두꺼운 갑옷을 벗어 던지고, 전능자 앞에 엎드려 내 연약함을 정직하게 시인하는 것. 그것이 바로 생명으로 나아가는 좁은 길입니다.
(강한 메시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낱낱이 입증해서 가차 없이 벌하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나를 용서해 주세요"라고 고백하는 바로 그 순간, 우리를 감싸 안으시는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인애'가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 앞에서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고 계십니까, 아니면 겸손하게 엎드려 긍휼과 은혜를 구하고 계십니까?
[3편: 기경하라,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
[3편: 기경하라,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
(훅) 신약 성경에는 도저히 믿기 힘든 충격적인 비유가 하나 등장합니다. 자그마치 8천억 원이라는 천문학적인 빚을 조건 없이 탕감받은 사람이, 정작 자신에게 겨우 백만 원을 빚진 동료의 목을 조르고 감옥에 가둬버린 이야기입니다. 참으로 뻔뻔하고 배은망덕한 이 끔찍한 이야기가, 설마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자신의 진짜 모습일 거라고 생각해보신 적 있으신가요?
(내용) 호세아 10장 12절은 우리에게 세 가지 강력한 행동을 요구합니다. "심으라, 거두라, 기경하라." 너희를 위하여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며, 굳어진 묵은 땅을 갈아엎으라는 엄중한 명령입니다. 이스라엘은 본래 타작하기를 좋아하는 암소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이웃에게 축복을 흘려보내야 했습니다. 추수하는 농부가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않듯, 풍요로울수록 넉넉히 나누는 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풍요를 누리기 위해 이웃을 속이고 철저히 세상의 탐욕스러운 방식을 따랐습니다. 8천억 원의 빚을 탕감받고도 작은 빚을 진 이웃을 용서하지 못한 성경 속 비유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은 농사의 순서가 뒤바뀐 듯한 이 긴급한 선포를 통해 당장 공의를 심으라고 촉구하십니다. 전쟁의 나팔 소리가 들려오는 절박한 위기 앞에서 지체할 시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받은 그 엄청난 은혜를 기억한다면, 주변 사람들에게 나의 억울함을 호소하며 악착같이 데나리온을 받아내려는 길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참회란 변명이 아니라, 나를 위해 의의 씨앗을 심고 굳은 마음을 기경하는 치열한 영적 훈련입니다. 악을 심으면 필연적으로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전쟁과 파괴라는 끔찍한 참상이 닥쳐옵니다. 세상의 거짓된 방식과 나의 힘을 신뢰하는 어리석음을 내려놓으십시오. 지금 당장 하나님의 방식으로 돌이키지 않는다면, 우리가 그토록 의지하던 모든 요새는 모래성처럼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강한 메시지)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선지자의 이 피 끓는 간절한 외침이 들리십니까? 지금 당장 우리가 십자가 앞에 엎드려 잘못을 시인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메마른 우리 영혼에 공의를 소낙비처럼 쏟아부어 주실 것입니다. 당신의 삶의 밭에는 지금 세상의 거짓을 심고 계십니까, 아니면 썩어지는 밀알처럼 하나님의 거룩한 공의를 눈물로 심고 계십니까?
[4편: 묵은 땅을 갈아엎는 평화의 기도]
[4편: 묵은 땅을 갈아엎는 평화의 기도]
(훅) '주여, 나를 당신의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언젠가 한 번쯤은 눈물로 간절히 불러보았을 이 아름다운 기도문이, 언제부턴가 우리 입술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린 것은 아닐까요?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심겠다던 우리의 다짐은 다 어디로 가고, 우리는 왜 이토록 서로를 날카롭게 찌르는 차가운 심판자가 되어버린 것일까요?
(내용) 오늘날 한국 교회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은 어떠한가요? 교회가 영적인 풍요를 누리기보다는 안타깝게도 세속화와 정치화의 늪에 빠져, 세상보다 더 날카롭게 이념과 편 가르기에 앞장서는 도를 넘은 현실을 마주합니다. '평화의 기도'가 무색하게도, 이제 우리는 미움이 있는 곳에서 십자가를 지기보다 내 권리를 당당하게 주장합니다. 다툼이 있는 곳에서는 용서하기보다 시시비비를 가리는 매서운 판단자가 되고, 분열이 있는 곳에서는 일치를 구하기보다 내가 어느 편에 서야 유리할지를 철저히 계산합니다. 억울함은 비싼 변호사를 사서 해결하고, 절망과 어두움은 심리학의 언어로 포장하며, 타인의 슬픔은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며 철저히 외면해버리는 끔찍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는다는 십자가의 진리는, 오직 불길에 뛰어드는 소방관들에게만 요구되는 이상한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빛과 소금의 사명을 잃고 사람들의 발에 밟히는 맛 잃은 소금이 되어버린 우리. 신약의 히브리서가 경고하듯, 우리는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의 사슬을 끊어내고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만 합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내면의 굳은 땅을 기경할 때 비로소 우리는 회복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었다면, 그 열매는 거창한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내 곁에 있는 타인을 향한 깊은 동정과 연민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심었다고 말하면서도 용서가 없다면 그것은 철저히 악을 심은 것입니다. 지난 한 주간 누군가를 향해 '인간도 못 된 사람'이라며 정죄하고 손가락질했습니까? 아니면 '참으로 불쌍하고 가여운 영혼'이라며 남몰래 눈물로 기도해 주었습니까? 이 뼈아픈 질문 앞에 정직하게 마주 서십시오. 타인의 아픔에 함께 아파하는 긍휼의 마음, 그것이 바로 무너진 일상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강한 메시지) 나의 참된 변화를 갈망하며 굳어버린 심령의 밭을 갈아엎을 거룩한 용기를 주님께 구하십시오. 나를 합리화하던 변명을 멈추고 내가 먼저 낮아져 십자가의 공의를 눈물로 심을 때,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 삶과 이 땅 위에 멈추지 않는 은혜와 인애의 열매를 풍성히 거두게 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체하지 말고 오늘 당장 당신의 묵은 땅을 기경하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