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628 주일오후예배: 마가복음 1:15; 누가복음 17:20-21; 사도행전 28:31; 하이델베르크 123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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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마가복음 1:15; 누가복음 17:20-21; 사도행전 28:31 입니다. 제가 봉독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도 살아계셔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경청하시길 바랍니다.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함께 고백하겠습니다. 오늘은 하이델베르크 제48주일 123문을 함께 고백하겠습니다. 제가 질문하면 함께 고백하겠습니다.
제48주일 123문: 둘째 간구는 무엇입니까?
답: “나라이 임하옵소서”로,
이러한 간구입니다.
“주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를 통치하시사
우리가 점점 더 주님께 순종하게 하옵소서.
주님의 교회를 보존하시고
흥왕케 하옵시며,
마귀의 일들과
주님께 대항하여 스스로를 높이는 모든 세력들,
그리고 주님의 거룩한 말씀에 반대하는
모든 악한 의논들을
멸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나라가 온전히 이루어져
주께서 만유의 주가 되실 때까지 그리하옵소서.”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도 저희에게 오후 강단을 열어주시고,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밝게 비추어주시니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을 밝게 아는 것이 참으로 저희에게 복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교제하는 그 시간과 공간이 참으로 행복한 것처럼 이 강단은 저희와 교제하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복의 자리입니다. 저희가 무엇이길래 하나님과 만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이것을 기억하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반갑습니다. 주일 오후 강단에 나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지난 한 주 어떻게 보내셨는지요. 우리가 살아가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리고 사람을 만날 때 약속을 잡기도 하죠. 우리가 잡는 약속 중에는 일 때문인 것도 있고, 교제하기 위해서 약속을 잡기도 합니다. 그런데 만일 그 약속 중에 정말 기대되는 약속이 있다면 어떨까요? 내가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이거나 만났을 때마다 즐겁고 좋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거나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다가 시간이 딱 맞아 정말 오랜만에 보는 사람을 만나는 약속은 우리를 설레게 만듭니다.
그런데 이 모든 만남보다 우리를 언제나 반갑고 즐거운 마음으로 만나길 원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언제나 만나고 싶어하시며 우리와 교제하길 간절히 원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이 예배의 자리이며, 예배 때마다 그리스도로 인하여 성령님을 통해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우리의 예배를 삼위 하나님께서는 기쁘게 받으십니다. 우리를 너무나 만나고 싶어하시는 이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 마음속 깊이 뿌리박으며 오늘도 이 말씀의 자리로 함께 나아가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여러분에게 ‘나라’ 또는 ‘국가’는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익숙한 개념이자 오해하기 가장 쉬운 단어 하나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바로 ‘나라’입니다.
우리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를 두는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각자가 생각하는 ‘나라’라는 개념이 있을 것이고, 국가는 반드시 이래야 한다는 신념이 있을 수 있습니다. 세상의 정치학은 나라가 성립하기 위해 세 가지 필수 요소가 있다고 가르칩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첫째는 나라와 나라 간에 경계가 명확한 영토이며, 둘째는 그 땅에 거주하는 ‘국민’이며, 셋째는 통치권을 행사하는 ‘주권’입니다. 이 세 가지가 갖추어질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의 국가, 또는 공식적인 나라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역사를 보게 되면 이 나라라는 것에 얼마나 큰 가치가 있는지 알게 됩니다. 인류의 역사는 더 강력하고, 더 풍요로우며, 더 안전한 나라를 만들기 위한 피눈물 나는 투쟁의 역사였습니다. 인류 역사상 유래가 없을 정도의 대제국을 건설하였으며, 신약성경 시대였던 로마 제국은 강력한 군사력으로 ‘팍스 로마나’, 즉 로마의 평화를 외치며 영원한 제국을 꿈꿨고, 근대의 정치가들과 사상가들은 인간의 이성과 과학, 혹은 정치적 혁명을 통해 이 땅에 눈물도 고통도 없는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역사를 통해 과거를 볼 때 우리에게 증명하는 아주 잔인한 사실을 무엇입니까? 그 누구나 유토피아를 꿈꿨지만, 인간이 세운 그 어떤 찬란한 제국도 영원하지 못하였고, 인간의 계획과 사상으로 세우려 했던 낙원들은 예외 없이 또 다른 분쟁과 피비린내 나는 전쟁, 그리고 인간 소외라는 실낙원으로 귀결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최첨단 현대 국가들은 어떨까요? 과거보다 훨씬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졌고 기술은 엄청나게 진보했지만, 인간의 영혼은 그 어느 때보다 황폐하며, 여전히 만족을 하지 못하고, 분쟁과 전쟁은 여전히 끊이지 않으며, 죽음의 공포는 우리에게 언제나 위협을 가하고 있습니다. 왜 인간의 나라는 이토록 부서지기 쉽고 불완전할까요?
바로 이때, 2천 년 전 유대 땅 베들레헴의 낮고 천한 말구유에 한 아기가 태어나셨고, 그분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온 세상을 향해 청천벽력 같이 외치신 첫 한 마디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읽은 마가복음 1장 15절입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예수님은 세상의 정치가들처럼 군대를 모으거나 영토를 점령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도 ‘나라’가 왔다고 선포하셨습니다. 도대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하나님 나라’는 어떤 나라일까요? 영토도 없고, 눈에 보이는 수도도 없는 나라가 어떻게 나라일 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 나라의 참된 본질을 깨닫고, 이를 통해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과 연결되는지, 그리고 성령님을 통해 어떻게 우리의 일상 속에서 가장 구체적인 그리스도의 통치로 나타나는지, 특별히 그것이 성찬의 식탁에서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미리 맛보는지를 알고, 마침내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 어떻게 온 우주적으로 하나님 나라가 완성이 되는지를 깨닫고자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대망하는 교회라는 제목으로 종말론 말씀을 선포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우리가 생각하는 나라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의 차이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앞에서 말했듯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생각하는 나라의 개념과는 달라 보입니다. 우리는 ‘나라’라고 한다면 잘 먹고 잘 사는 풍요가 있거나 모든 사람에게 공정하게 기회가 주어지는 평등이 있는 나라가 좋은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역사 속에서 많은 철학자와 사상가들이 ‘나라’가 무엇인지, 어떤 나라가 좋은 나라인지를 주장했습니다. 대표적으로 근대 정치학의 기초를 놓은 토마스 홉스는 인간의 본성이 너무나 악하여 가만두면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으로 서로를 잡아먹고 피비린내가 날 것이기에, 인간들이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강력한 군주에게 권력을 주는 계약을 맺고, 그 군주의 거대한 힘과 공포에 의해 통제되어 인간 사회를 유지하게 만드는 ‘기계적이고 영토적인 통치 체제’가 바로 국가라고 말했습니다.
고대부터 오늘날 이르기까지 인간의 위대한 사상가들이 내린 결론의 공통점은 그들이 말하는 나라, 국가, 심지어 천국이라 할 수 있는 유토피아는 예외 없이 ‘명확한 국경선이라는 공간’, ‘인간을 통제하는 법과 제도’, 그리고 ‘인간의 노력과 혁명’이라는 이 삼각 구조 안에 갇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오늘 마가복음 1장은 우리가 그동안 생각했던 ‘나라’와는 전혀 다른, 오히려 사상가들이 내놓았던 이 삼각 구조를 단숨에 박살 내버립니다. 우선 마가복음 1장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직전에 대하여 가장 먼저 알려주고 있습니다. 1-13절에서 가장 핵심적인 단어는 ‘광야’입니다.
보십시오. 세상의 나라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많은 사상가들이 주장했던 안전한 도시와 제도에서 시작하고, 강력한 권력에서 시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어디에서 시작합니까? 아무런 국경선도 없고, 성벽도 없고, 인간의 제도도 존재하지 않는 척박한 ‘광야’에서 시작됩니다. 왜 그럴까요? 광야는 과거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와 함께 출애굽하여 오직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통치를 받았던 하나님의 통치의 가장 근원적인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광야에는 먹을 것도, 잘 곳도 없으며, 심지어 낮에는 뙤약볕이고, 밤에는 얼어붙을 것 같은 추위가 찾아옵니다. 여기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무려 40년 동안 이 광야에서 생활하였습니다. 이들에게 유일한 의지 대상, 그리고 도움을 받을 수 있었던 대상은 오직 하나님 뿐이었습니다. 광야 생활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다스림이 무엇인지를 가장 뼛속 깊이 새길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마가복음 1장은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눈 여겨 보시면 아시겠지만 1장 2절의 관주를 보면 이사야가 아닌 말라기 선지자의 말입니다. 왜 마가복음을 쓴 마가는 선지자 이사야의 글이라고 하면서 말라기 선지자의 글을 인용한 것일까요? 이사야 말씀은 3절인데 말입니다. 그것은 바로 이사야 말씀 아래에서 말라기 말씀을 읽어나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3절에서 마가는 이사야 40장 3절 말씀을 인용하는데요. 이사야 40장의 맥락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포로생활에서 자유롭게 하실 것이고 해방받은 백성 위에 왕이 되셔서 통치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왕이 오실 길을 예비하는 전령을 먼저 보내신다는 예언적, 종말론적인 말씀입니다. 이사야는 ‘제2의 출애굽’, 즉 하나님의 종말론적 구원을 선포했는데, 마가는 바로 그 광야에서 시작되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왕의 길을 예비하는 자가 세례 요한이며, 광야에서 세례 요한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며 회개하게 만들면서 더 완전한 세례, 더 완전한 죄 사함을 이루실 왕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왕이 등장하셔서 그 광야에서 사탄의 머리를 밟고 사탄의 모든 시험을 이기심으로써, 그 새 출애굽의 구원이 예수님에게로 온전히 넘겨져 역동하며 폭발한 사건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15절의 선언입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이렇게 15절 앞 본문을 보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단순히 ‘나라’가 왔다 정도가 아닌, 이전에는 그 누구도 이루지 못했던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 왕국을 완성시킬 것이라는 아주 위대한 선언으로 다가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선포는 세상의 모든 정치 철학을 뒤흔드는 위대한 선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공간도, 어떤 제도도, 어떤 정치도 아닌, 바로 사건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철학자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영토를 국경선으로 긋고 보여줄 수 있는 고정된 장소가 아닙니다. 그리고 인간의 혁명으로 건설하는 유토피아도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주권과 왕권적 통치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인간 역사 속에 오심으로써 격력하게 뚫고 들어오는 ‘역동적인 구원 사건’ 그 자체입니다. 바로 공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라는 것입니다. 단어로 치면 명사가 아니라 동사라는 뜻입니다.
나아가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인 누가복음 17장에서 바리새인들은 철저히 세상의 철학자들과 같은 시각으로 예수님께 질문을 던졌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이들은 눈에 보이는 징조, 즉 로마 군대가 이 땅에서 쫓겨나고 다윗의 옛 영토가 회복되는 가시적이고 공간적인 나라를 구했던 것입니다. 물론 구약에서 이스라엘이라는 하나의 가시적인 나라가 있긴 했습니다. 선지자들이 다윗의 나라나 후손이 올 것에 대해서도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구약의 이스라엘조차도 가장 중심은 ‘하나님의 통치’에 있었습니다. 가시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통치가 얼마나 복되고 아름다운 것인지를 나타내신 것이지, 거기에 국한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진정한 목자로서 이스라엘을 통치한 다윗만 보더라도 다윗이 하나님의 말씀에 신실하게 따르며 통치할 때 이스라엘이 영광스러웠습니다. 성찬이 보이는 말씀으로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가리키는 표인 것처럼 다윗의 통치는 하나님의 통치를 가리킵니다. 그렇기에 이스라엘 영토, 또는 다윗의 왕직이 하나님의 통치를 담보하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통치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공간이나 영토로 하나님 나라를 국한시켜 보며 징조를 구하던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기대하는 답변이 아닌 생각지도 못한 답을 주십니다.
20절 하반절부터 21절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목사님께 누가복음 설교를 들으신 분들은 이 예수님의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아실 겁니다. 여기서 “너희 안에 있느니라”는 말씀은 단순한 인간 마음속의 명상이나 신비주의적 평화가 아닙니다. 이 말씀을 우리가 볼 때 우리의 심령이나 마음에 하나님 나라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이 예수님 말씀의 진정한 뜻은 “너희의 도달 범위 안에”, 이들이 손 닿을 수 있는 거리, 즉 “너희 한가운데 이미 와 있다”는 뜻입니다.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영토로서의 국가, 또는 어떤 공간적인 의미의 나라만을 생각하던 바리새인들이 둘러싸고 있는 그 가운데에 바로 하나님 나라의 실체가 서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그 바리새인들 가운데 서서 바로 자신이 하나님 나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고대 교회의 위대한 교부인 오리게네스는 이 놀라운 진리를 한 단어로 요약했습니다. 바로 인격이신 하나님 나라라고 말입니다.
인간의 생각이나 철학은 나라를 제도와 시스템으로 이해합니다. 가시적인 영토, 어떤 공간적인 나라, 그리고 정치나 제도를 나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인격이 하나님 나라라고 선포합니다! 예수님께서 계신 곳에 하나님의 완벽한 통치가 실현되기에, 예수님께서 걸어가시는 것 자체가 하나님 나라의 확장입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뻗으시면 사탄의 결박이 풀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면 죄 사함이 일어나는 그 인격적인 조우와 만남 자체가 곧 하나님 나라라는 거대한 사건입니다.
위대한 네덜란드 신학자인 스킬더는 이것을 두고 ‘언약 역사’의 성취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첫 아담에게 이 땅을 경작하고 다스리라는 ‘문화적 사명’과 ‘왕적 직분’을 맡기셨습니다. 그러나 첫 아담은 실패했고, 온 창조 세계는 죄와 사망의 통치 아래 종노릇하며 신음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둘째 아담’이자 ‘참된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패한 아담의 직분을 온전한 순종과 십자가의 고난으로 회복하셨습니다.
보십시오. 오늘 읽은 마가복음 1장 15절 앞인 14절을 보면 세례 요한이 잡힌 후에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등장하십니다. 우리가 이것을 보면 단순히 이제 세례 요한에서 예수님으로 세대 교체가 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지만, 이것은 세대 교체를 넘어서서 구속사적 ‘때가 찬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15절을 보면 “때가 찼다”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것은 때가 왔다는 의미를 넘어서서 이 세상에 군림하는 공중 권세 잡은 사탄의 통치가 이젠 완전히 종료되고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가 왔다는 예수님의 선언입니다. 이전까지는 죄의 권세가 세상을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죄에 의하여 고통받고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자 죄악의 통치는 완전히 끝나고, 하나님의 통치가 완성되었습니다. 21절부터 보면 예수님께 귀신을 쫓으시고 많은 병든 사람들을 고치시는 장면들이 등장합니다. 마가는 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뒤에 전혀 상관 없는 것 같은 이러한 장면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일까요? 보통 나라를 이야기하면 국경이나 정책 같은 것들을 말하는 것이 상식입니다. 그런데 마가는 그런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고 예수님의 사역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죄의 통치를 예수님께서 끊으시고, 자신이 진정한 이 땅의 통치자임을 대대적으로 선포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냥 전과 똑같이 함께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작정이 무르익은 이전까지 없었던 결정적 타이밍이 도래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도덕적 수양을 쌓거나 어떤 세상의 정치적 시스템을 개조하거나, 뛰어난 이념의 혁명을 일으켜 아래로부터 바벨탑처럼 쌓아 올리는 나라가 아닙니다. 세상 나라는 공간과 제도로 통치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 나라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을 통해 위로부터 역사 속에 단번에 침투해 들어온 은혜의 사건입니다. 우리가 이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대면할 때, 우리는 진정한 하나님 나라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 자체이시라면, 그분이 부활하시고 하늘로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지금, 이 땅의 하나님 나라는 어떻게 전개되는 것일까요? 이 땅에 예수님께서 계셨을 때에는 그분이 걸어가시는 그 모든 곳이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 계시지 않는 지금은 그럼 버려진 것일까요?
더욱이 우리가 한번 주목해볼 부분은 예수님과 제자들, 즉 예수님과 사도들 간의 메세지의 차이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 이렇게 사복음서 전체에서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말씀들이 나옵니다. 신약 성경에서 ‘하나님 나라’, 혹은 ‘하늘 나라’라는 말은 총 122번이 쓰였습니다. 그중 무려 99번은 마태, 마가, 누가복음이라는 공관 복음서에서 사용되며, 그중에서도 90번은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에 해당합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굉장히 강조하셨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마땅히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어받은 사도들과 교회의 가르침에서 ‘하나님 나라’라는 단어가 엄청 많이 등장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스승의 말을 인용하면서 가르쳐야 권위가 생겨서 사람들을 설득시킬 수도 있을텐데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부활 이후, 즉 사도행전 이후의 말씀들을 보면 우리가 통계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 하나님 나라라는 말이 사용되는 것이 현저하게 낮아졌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신약에서 총 122번입니다. 이 중 공관복음 99번을 빼면 23번이 나머지에서 신약성경에서 사용됩니다. 마태, 마가, 누가 이렇게 3권만 해도 99번인데, 나머지 24권의 신약에서는 23번 밖에 사용되지 않습니다. 1권에 1번도 채 되지 않는 숫자입니다. 왜 이토록 사도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수받고, 또 교회에게 전수해야 할 책임이 있는데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엄청 희박하게 말한 것일까요? 사도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다같이 까먹은 것일까요? 제가 자주 깜빡하고 잊어버리는데, 마치 저처럼 사도들 모두가 까먹기라고 한 것일까요? 심지어 사도들이 복음을 변질시킨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도들이야 말로 하나님 나라의 실체, 그리고 본질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꿰뚫어 봤기 때문에 사도들은 하나님 나라라는 말을 쓰지 않은 것입니다. 오늘 함께 읽은 사도행전 28장 31절에서 누가복음을 쓴 누가가 사도행전의 바울의 선교를 두고 이렇게 요약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보십시오. 누가는 ‘하나님 나라’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같은 선상에 놓고 묶어서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것과 예수님에 대해서 가르치는 것이 같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 이후의 교회가 하는 복음 선포는 ‘하나님 나라 선포’에서 ‘예수님 선포’, 다른 말로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으로 필연적이고 유기적인 전환을 맞이했습니다. 누구보다 예수님 가까이서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받은 사도들이 하나 같이 하나님 나라에서 예수님에게로 복음 메세지가 전환이 자연스럽게 된 것이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이후의 신약성경을 보시면 잘 아실 겁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엄청나게 많이 이야기하지만, 하나님 나라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굉장히 드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곧 하나님 나라 자체이시라면, 부활하셔서 만왕의 왕으로 등극하신 그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 나라를 가장 정확하고 온전하게 전파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이 ‘하나님 나라’라는 단어 대신 ‘예수 그리스도’, ‘주님’이라는 단어를 서신서에서 수백 번에 걸쳐 굉장히 강조한 이유는, 자신의 스승의 가르침을 잊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곧 하나님 나라의 명확한 이름임을 온 천하에 공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통치는 승천하시기 전 한번만으로 끝난 일회성이 아닙니다. 하늘 보좌에 앉으셔서 좌정하시는 왕께서 자신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을 통해 오늘 저와 여러분, 그리고 우리 교회를 모든 시간 속에서 그 통치를 매일 구체적인 실재로 전개하며 이루어 나가십니다.
그리스도의 구체적인 통치는 우리의 관념이나 종교적 감상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냥 “아 우리 예수님이 통치하고 계시는구나”하는 그런 생각에만 갇혀 있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17장 전반부를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실족하게 하지 말 것, 용서할 것, 그리고 겨자씨만 한 믿음과 ‘무익한 종’의 자세에 대해 가르치셨습니다. 즉, 하나님 나라 백성이 이 땅에서 살아가야 할 지극히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말씀에 따른 태도를 말씀하신 후에 오늘 읽은 바리새인들의 질문이 나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통치는 우리의 주권을 내어드리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나의 시간, 나의 재정, 나의 자녀의 경영권을 왕이신 그리스도의 말씀 앞에 철저히 굴복시키는 구체적인 순종이 일어납니다. 그리스도가 다스리시기 때문에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우리의 모든 방향성이 바뀌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에서 마가는 누구의 통치를 따를 것이냐는 질문을 던지기도 합니다. 죄의 다스림을 받을 것이냐, 왕이신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받을 것이냐라고 말입니다. 왕이신 그리스도께 우리의 모든 주권을 내어드리는 것이 그리스도의 구체적인 통치입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의 통치는 교회의 직분 회복으로 나타납니다. 앞에서 말한 네덜란드 신학자인 스킬더가 바로 이것을 말했습니다. 목사, 장로, 집사라는 교회의 직분자도 해당되지만, 모든 성도가 직분자입니다. 성도는 월요일 아침 일터의 현장에서, 정직과 성실함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대행하는 거룩한 직분자로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의 통치가 우리의 모든 영역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세상의 가치관을 따른 관계를 거절하고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랑과 정의의 관계로 형성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구체적인 통치입니다. 사람을 미워하고, 이웃을 짓밟고 올라가려는 세상의 논리를 거부하고, 십자가의 사랑으로 나에게 상처 준 자를 구체적으로 용서하며 소외된 이웃에게 손을 뻗을 때, 바로 이 때 세상은 바리새인 한가운데 서 계셨던 그리스도와 같이 우리 한가운데 임한 왕의 다스림을 목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모든 주권을 내어드리는 것, 직분의 회복, 그리고 사랑과 정의의 삶을 실천하는 이것이 그리스도의 통치가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하나님 나라이신 그리스도의 통치를 우리가 경험하는 자리는 바로 이 주일 예배 안에서 가장 직접적이고도 정확하게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가시적인 것으로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전예배 때 있었던 ‘성찬’입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육신은 지금 하늘 지성소 보좌에 계십니다. 그리고 땅에 있는 교회는 ‘성령의 내주하심’을 받았습니다. 하늘과 땅 사이에는 건너갈 수 없는 거대한 공간적 간격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이 간격을 매꾸고 하늘과 땅을 이어 하나로 결합시키는 신비가 어디서 일어납니까? 바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는 성찬에서 일어납니다!
우리가 성찬의 떡을 입에 넣고 포도주를 마시는 아주 구체적으로 물질적인 행위를 할 때, 성령님께서는 땅에 있는 우리를 영적으로 들어 올려, 하늘 보좌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데리고 가십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리는 생명 그 자체이신 예수님의 육신과 실재적으로 연합하게 하십니다. 하늘과 땅이라는 거대한 간격이 존재하지만, 성령님과 성찬을 통해 우리가 예수님의 통치를 받아 완벽한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성찬은 장차 다시 오실 그리스도의 재림을 미리 역사 속에서 우리 앞당겨 보는 것이기도 합니다. 마태복음 26장 29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성찬을 제정하시며 이 식탁이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에서 이루어질 종말론적 잔치와 직결되어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마십니다. 우리가 떼는 이 떡과 나누는 잔이 바로 그 영원한 잔치의 완벽한 예고편입니다. 우리가 성찬의 신탁에 앉을 때, 우리는 역사 저너머 종말 때에 일어날 ‘어린 양의 혼인 잔치’와 하나님 나라의 완성된 식탁을 바로 지금 오늘 여기로 미리 맛보는 것입니다. 세상의 식탁에는 차별과 계급이 존재하지만, 주님의 식탁에는 빈부귀천이 무너지고 오직 그리스도의 보혈 아래에서 모두가 한 형제로서 한 떡을 떼는 거룩한 가족, 즉 ‘성도의 교제’를 이룹니다. 우리는 이 식탁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왕과 주님이시며, 우리의 생명이심을 가장 기쁘게 고백합니다.
따라서 성령님의 구체적인 통치를 받고 성찬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맛보며 살아가는 성도들은 소망을 가지며 이 땅을 살아갑니다. 우리는 비록 오늘 성찬을 통해 하늘을 경험하고 맛보지만, 예배당 문을 나서면 여전히 죄와 질병, 그리고 슬픔과 절망이 가득한 세상의 한복판을 걸어가야 합니다. ‘이미’와 ‘아직’의 이 치열한 긴장 관계 속에서 우리는 세상에 저항하기 위해 몸부림치며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언제 해소가 됩니까?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입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이고 영원한 완성입니다. 재림은 결코 이 세상을 파괴하거나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저번에 설교했듯 우리의 몸, 이 세상, 그리고 이 세상에 있는 물질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그분의 몸된 교회의 지체들이 마침내 완전히 한 몸이 되는 충만함과 완성입니다.
종말과 천국은 이 물질세계를 다 불태워 없애버리고 영혼만 쏙 빼내어 허공으로 날아가는 영지주의적 도피가 아닙니다. 창세기 1장의 아름다웠던 하나님의 창조 세계가,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 본래의 영광을 회복하고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변모하는 우주적이고 물질적인 완벽한 회복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이전 것을 완전히 뒤엎는 혁명이 아니라 이 땅에 남아있는 죄의 뿌리를 뽑는 개혁입니다. 빌립보서 3:21 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여기에서 바울이 말한 것처럼 우리의 낮은 몸이 자신의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는 육신의 부활이 그리스도의 재림 때 일어날 것입니다. 눈물과 애통이 사라지는 이유는 세상이 다 없어지고 소멸하여 아무것도 없는 허무로 돌아갔기 때문이 아니라, 만물의 주권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친히 강림하셔서 우리의 모든 눈물을 닦아주시고, 죄의 모든 흔적과 사망의 권세를 영원히 멸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통치가 있는 곳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세상은 여전히 우리에게 더 안락한 인간의 나라를 만들어보자고 끊임 없이 속삭입니다. 좋은 나라, 행복한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 어떤 정치 제도가 있어야 한다, 이런 사람이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라고 한순간도 쉬지 않고 우리에게 이야기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잘 아실 것입니다. 그 어떤 영토도, 그 어떤 정치 제도도, 그 어떤 지도자도 모든 이에게 만족할만한 존재는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리고 그 끝은 언제나 파멸과 붕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전혀 다른 나라,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 나라는 저 멀리 떨어진 공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을 통해 우리 역사에 침투한 강력한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구속 사역입니다. 사도들이 서신서에서 하나님 나라에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단어를 바꾸어 선포했던 것처럼 그 나라의 명확한 이름은 곧 모든 주권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나라는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의 주권을 예수님께 내어드리게 하고,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예수님의 공의를 대행하는 직분자로 살아가게 만들고, 사랑의 관계로 나타나는 구체적인 통치입니다. 더욱이 그 나라는 성찬의 빵과 포도주를 통해 매주 우리의 몸으로 미리 맛보고 참여하는 생생한 식탁으로 경험합니다. 그리고 그 나라는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재림의 날, 우리의 신령한 몸의 부활과 이 피조 세계 전체의 온전한 회복을 통해 우주적으로 완성될 나라입니다.
이 위대한 나라의 시민권이 바로 저와 여러분, 그리고 교회에게 삼위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겠습니까? 먼저는 우리의 삶의 가장 구체적인 자리에서 왕의 주권을 인정해야 합니다. 내 지갑을 열 때, 직장에서 상사와 부하 직원, 동료를 대할 때, 내 완악한 고집이 튀어나올 때,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의 통치 앞에 무릎 꿇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둘째, 성찬을 받는 마음으로 일상을 성찬적 삶으로 채워야 합니다. 성찬에서 한 떡을 뗴며 우리가 차별 없이 하나가 되었던 것처럼 세상에 나가 사람을 차별하지 말고 주님의 사랑으로 품어야 합니다. 주님의 살과 피를 받아 죽어있던 우리가 새 생명을 얻은 것처럼 우리의 삶을 이웃을 위해 살과 피를 내어주는 축복의 떡이 되어야 합니다.
셋째, 마라타나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세상의 절망적인 뉴스와 환경에 좌절할 필요 없습니다.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공포에 떠는 그 어떤 것에 우리는 일희일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속삭이는 것에 우리는 함몰되어선 안 됩니다. 우리에게는 마침내 임할 영원한 승리의 완성의 날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의 깊은 감옥 안, 차디찬 쇠사슬에 매임 속에서도, 심지어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그가 침착하게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담대히, 거침없이 선포하였던 것처럼, 그 영광스러운 생명력이 오늘 예배하며 왕되신 주님을 마주하는 모든 성도들의 삶 위에 성령님께서 충만하게 임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를 대망하는 교회입니다.
오늘 이 종말론 말씀을 기억하시며 하나님 나라이신 그리스도의 통치가 이 땅에 임하길 소망하면서 마라타나 신앙으로 왕의 오실길을 예비하는 모든 사자가 되시는 우리 새순교회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기도하겠습니다.
이 시간 오늘 말씀을 놓고 함께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어떤 영토나 공간이 아니라 예수님이십니다. 이 예수님의 통치가 하나님 나라입니다. 우리 각자가 생각하는 좋은 나라, 좋은 국가상이 있을 겁니다. 그러나 이 모든 우리의 생각을 내려놓고 말씀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를 우리는 소망해야 합니다.
이 시간 함께 기도합시다. 우리에게 참된 하나님 나라로 임하신 예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립시다. 어떤 통치자보다도 어떤 정치 제도보다도 우리를 참으로 만족시킬 왕은 예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가장 좋은 나라인 하나님 나라를 알려주신 예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면 좋겠습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통치가 우리의 모든 영역에서 나타나도록 기도합시다. 하나님 나라를 대망하는 교회는 왕의 주권을 인정하고, 사랑과 정의의 관계를 형성하고, 마라나타 신앙으로 살아갑니다. 이러한 삶을 사는 우리 교회가 되도록 함께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도 저희에게 말씀을 주시고,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 알게 하시니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 자체이십니다. 예수님의 통치가 이 땅 가운데 이루어지길 소망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를 대망하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저희의 모든 삶의 영역 속에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길 간절히 소망하는 교회가 되게 하시고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와 같이 죄에는 저항하고, 말씀에는 순종하는 저희가 되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저희에게 성찬을 주심으로 그리스도의 통치가 무엇인지 가장 밝게 알려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이 성찬을 뗄 때마다 재림 때에 있을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소망하며 기쁘게 받는 저희가 되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말씀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