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발과 아비가일(교회와 헌금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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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 하나님이 정하신 드림의 기준
들어가는 말 ― 하나님이 정하신 드림의 기준
오늘은 맥추감사주일입니다. 한 해의 절반을 지나며,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는 날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절기에 얼마를 드리라고 하셨을까요. 신명기 16장 17절에 답이 있습니다.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드릴지니라.” 액수가 없습니다. 비율도 없습니다.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받은 만큼, 할 수 있는 만큼. 이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기준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이와 똑같은 말이 나옵니다. 다윗이 나발이라는 부자에게 보낸 부탁입니다. “네 손에 있는 대로 네 종들과 네 아들 다윗에게 주기를 원하노라”(8절). 힘대로. 손에 있는 대로. 같은 말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붙들고 본문의 세 사람을 만나 보겠습니다. 다윗과 나발과 아비가일입니다. 이 세 사람 안에 교회가 무엇인지, 그리고 성도가 어떤 사람인지가 담겨 있습니다.
대지 1. 다윗은 익숙한 자리로 돌아가 섬겼습니다
대지 1. 다윗은 익숙한 자리로 돌아가 섬겼습니다
본문은 사무엘의 죽음으로 시작합니다(1절).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준 선지자, 다윗의 든든한 울타리가 사라진 것입니다. 그 슬픔의 시간에 다윗은 어디로 갔습니까. 광야로 내려갔습니다.
왜 광야였을까요. 광야는 다윗에게 고향 같은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본래 들에서 아버지의 양을 치던 목자였습니다(삼상 16:11). 사자나 곰이 새끼 양을 물어가면 쫓아가서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 내던 사람입니다(삼상 17:34~35). 가장 힘든 시간에, 다윗은 가장 익숙하고 그리운 자리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무엇을 했습니까. 자기가 가장 잘하는 일을 했습니다. 나발의 종들이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 사람들이 우리를 매우 선대하였으므로 우리가 다치거나 잃은 것이 없었으니 우리가 양을 지키는 동안에 그들이 우리와 함께 있어 밤낮 우리에게 담이 되었음이라” (삼상 25:15~16)
“밤낮 우리에게 담이 되었음이라.” 어린 시절 아버지의 양을 지키던 그 솜씨로, 이제는 그 동네의 양 떼와 목자들을 지켜 준 것입니다. 누가 시켰습니까. 아닙니다. 돈을 받기로 약속했습니까. 아닙니다. 그 동네에 그 일이 꼭 필요했고, 다윗이 그 일을 할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가 이렇게 세워집니다. 하나님이 한 사람에게 주신 재능과, 한 동네의 필요가 만나는 자리. 거기에 교회가 세워집니다. 우리 교회가 이 자리에 서 있는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 동네를 마음에 두시고, 사람을 준비시키시고, 보내신 것입니다.
[적용 자리― 처음사랑교회가 이 지역에 세워지고 지금의 자리로 인도된 이야기를 짧게 나눠 주시면, ‘교회는 이렇게 세워진다’는 말씀이 성도들 자신의 이야기가 됩니다.]
대지 2. 나발은 받은 것을 세어 보지 않았습니다
대지 2. 나발은 받은 것을 세어 보지 않았습니다
그 동네에 나발이라는 큰 부자가 있었습니다. 양이 삼천 마리, 염소가 천 마리였습니다. 마침 양털 깎는 날이었습니다. 양털 깎는 날은 목장의 추석 같은 날입니다. 일 년 기른 양의 털을 거두는 잔칫날이라, 손님이 오면 후하게 대접하고 가난한 사람도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않는 날이었습니다.
그날 다윗이 사람을 보냅니다. 부탁이 참 겸손합니다. 자신을 “네 아들 다윗”이라 낮추고, 얼마를 달라고 정하지도 않았습니다. “네 손에 있는 대로.” 그런데 나발의 대답을 보십시오.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냐 요즈음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내가 어찌 내 떡과 물과 내 양 털 깎는 자를 위하여 잡은 고기를 가져다가 어디서 왔는지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주겠느냐” (삼상 25:10~11)
“다윗이 누구냐.” 나발이 정말 몰라서 한 말일까요. 아닙니다. 다윗은 “네 소년들에게 물으면 그들이 네게 말하리라”(8절)고까지 했습니다. 물어보면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발은 묻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람 마음이 그렇습니다. 주고 싶지 않은 마음이 먼저 생기면, 안 줘도 되는 이유는 저절로 만들어집니다. “저 사람이 누군지 어떻게 알아. 요즘 도망친 종들이 많다던데.” 핑계가 술술 나옵니다. 그리고 받은 것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습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누군가에게 서운한 마음이 한번 들면, 그 사람에게 받은 고마운 일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고 서운했던 일만 줄줄이 떠오릅니다.
나발의 말을 오늘 우리 말로 바꾸면 이렇게 됩니다. “교회가 나한테 해 준 게 뭐가 있어?”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이런 마음이 문득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나발처럼 그 마음을 그냥 따라가면 안 됩니다. 멈추어 서서, 한번 세어 보아야 합니다. 정말 받은 것이 없는지 말입니다.
한번 세어 봅시다. 병원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병원비를 냅니다. 그런데 큰 병에 걸려 보면 압니다. 내가 낸 돈으로는 어림도 없는 치료를 받습니다. 학교도 그렇습니다. 등록금을 내지만, 학생 한 사람을 가르치는 데 들어가는 돈은 그보다 훨씬 큽니다. 세상에는 이렇게 내는 것보다 받는 것이 훨씬 큰 곳들이 있습니다.
교회는 어떻습니까. 매 주일 생명의 말씀이 선포됩니다. 아플 때 심방과 기도가 찾아옵니다. 자녀들이 믿음 안에서 자랍니다. 결혼식과 장례식, 인생의 가장 기쁘고 가장 무거운 순간마다 교회가 함께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 위에, 돈으로는 도무지 계산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복음입니다. 영원한 생명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헌금과 이것을 저울에 달 수 있겠습니까.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교회는 헌금을 받으려고 복음을 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도의 드림이 없으면 이 일을 계속할 수 없습니다. 다윗의 육백 명도 먹어야 그 동네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잔칫날에, “손에 있는 대로” 나누어 달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무리한 부탁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나발은 세어 보지도 않고 거절했습니다.
[적용 자리― 처음사랑교회가 성도들의 드림으로 감당해 온 일들(예배, 다음 세대, 심방, 새 예배당)을 한두 가지만 구체적으로 언급해 주시면, ‘세어 보는 일’이 성도들의 실제 경험이 됩니다.]
대지 3. 아비가일은 덮어 주고, 드릴 줄 알았습니다
대지 3. 아비가일은 덮어 주고, 드릴 줄 알았습니다
나발의 거절로 온 집안이 칼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때 아내 아비가일이 나섭니다. 이 여인에게서 두 가지를 배우십시오.
첫째, 아비가일은 덮어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남편이 저지른 일입니다. “당신이 벌인 일이니 당신이 해결하라”고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비가일은 바가지를 긁지도, 등을 돌리지도 않았습니다. 다윗 앞에 엎드려 이렇게 말합니다.
“내 주여 원하건대 이 죄악을 나 곧 내게로 돌리시고 여종에게 주의 귀에 말하게 하시고 이 여종의 말을 들으소서” (삼상 25:24)
“이 죄악을 나 곧 내게로 돌리시고.” 자기가 하지도 않은 잘못을 자기 것으로 짊어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이 성도의 모습입니다. 가정에서, 교회에서, 누군가의 잘못이 보일 때 그것을 들추고 소문내는 것이 아니라 덮어 주고 수습하는 것입니다. 배우자의 약점, 자녀의 약점을 밖에 이야기하고 다니지 마십시오. 성경은 말씀합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 4:8). 물론 덮는다는 것은 모른 척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아비가일은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누구보다 발 빠르게 해결했습니다. 다만 들추지 않고, 짊어졌을 뿐입니다.
둘째, 아비가일은 드릴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나발이 어떤 부자였습니까. 양과 염소가 사천 마리였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수십억대 재산을 가진, 그 동네에서 제일가는 부자였습니다. 그 나발이 자기 잔치는 “왕의 잔치와 같은 잔치”로 벌였습니다(36절). 자기가 먹고 마시는 데는 아낌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양 떼를 밤낮 지켜 준 사람들의 한 끼 식사는 아까워했습니다.
아비가일은 달랐습니다. 소식을 듣자마자 “급히” 예물을 준비합니다.
“아비가일이 급히 떡 이백 덩이와 포도주 두 가죽 부대와 잡아서 요리한 양 다섯 마리와 볶은 곡식 다섯 세아와 건포도 백 송이와 무화과 뭉치 이백 개를 가져다가 나귀들에게 싣고” (삼상 25:18)
떡과 포도주와 양고기와 곡식과 건포도와 무화과. 딱 육백 명이 한 끼를 나눌 만한 분량입니다. 나발의 살림에는 조금도 무리가 없는, 그러나 마음이 가득 담긴 예물이었습니다. 다윗이 구한 것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네 손에 있는 대로.” 나발은 그 한 끼를 아까워했고, 아비가일은 같은 집 살림에서 그 한 끼를 기쁨으로 드렸습니다. 문제는 언제나 액수가 아니라 마음입니다.
그 예물이 무엇을 이루었는지 보십시오. 다윗이 아비가일에게 말합니다.
“오늘 너를 보내어 나를 영접하게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또 네 지혜를 칭찬할지며 또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오늘 내가 피를 흘릴 것과 친히 복수하는 것을 네가 막았느니라” (삼상 25:32~33)
한 집안이 살았습니다. 다윗의 손에 피가 묻지 않았습니다. 손에 있는 대로 드린 한 끼가, 하나님의 손에서 이렇게 크게 쓰였습니다.
[적용 자리― 누군가의 허물을 덮어 주었을 때 관계가 회복되었던 경험, 혹은 작은 드림이 생각보다 크게 쓰였던 경험을 짧게 나누시면 이 대지가 삶에 닿습니다. 특정 인물이 드러나지 않도록 일반화해 주십시오.]
결론 ― 세어 보십시오, 그리고 드리십시오
결론 ― 세어 보십시오, 그리고 드리십시오
오늘 세 사람을 보았습니다. 다윗은 가장 익숙한 자리로 돌아가 동네를 섬겼습니다. 교회가 그렇게 세워집니다. 나발은 받은 것을 세어 보지도 않은 채 “해 준 게 뭐냐”고 물었습니다. 그 마음은 우리에게도 찾아옵니다. 그리고 아비가일은 허물을 덮어 주고, 손에 있는 대로 드렸습니다.
맥추절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하시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신 16:17). “네 손에 있는 대로”(삼상 25:8). 지난 반년, 받은 은혜를 한번 세어 보십시오. 세어 보면 보입니다. 보이면 드리게 됩니다.
나발처럼 세어 보지도 않고 움켜쥐는 사람이 아니라, 아비가일처럼 세어 보고, 알아보고, 기쁨으로 드리는 사람이 되십시오. 여러분이 손에 있는 대로 드린 그 예물을, 하나님은 한 영혼을 살리고 한 동네를 섬기는 당신의 일에 크게 쓰실 것입니다. 이 맥추절에 우리 모두가 그 복된 자리에 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