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을 이기는 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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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서론
복음의 능력 시리즈 설교를 계속 진행 중입니다.
이제 오늘과 다음 주면 복음의 능력 시리즈를 마무리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복음의 능력은 우리의 삶을 회복시키고, 풍성하고 복된 삶을 살게 하는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복음은 단지 죽은 후에 천국 가게 하는 소식만이 아닙니다. 복음은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복음은 무너진 우리를 다시 일으키고, 깨어진 우리를 다시 회복시키며, 잃어버린 소망을 다시 붙들게 하는 능력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복음의 능력이 우리가 살펴본 모든 문제를 사전에 예방해 주는 백신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복음을 믿는다고 해서 수치심을 전혀 경험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복음을 믿는다고 해서 두려운 상황을 만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복음을 믿는다고 해서 관계의 어려움이 한 번도 생기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복음을 믿는다고 해서 고난이 우리 삶을 비켜가는 것도 아닙니다.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서 겪는 문제들을 통과하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수치심이 몰려와서 열등감으로 마음이 무너질 때, 우리는 다시 복음을 자신에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두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우리는 다시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관계가 깨어지고 마음이 아플 때, 우리는 다시 복음 앞에 서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는 어려움을 겪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연약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흔들립니다. 우리는 여전히 상처를 받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복음은 날마다 우리를 고치고 회복시키는 능력이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복음을 늘 자신에게 선포해야 합니다.
우리가 나이가 들어가면서 몸에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면 정해진 시간에 복용해야 하는 약이 있습니다. 어떤 약은 아침마다 먹어야 하고, 어떤 약은 식후에 먹어야 하고, 어떤 약은 늘 몸에 지니고 다니다가 필요할 때 먹어야 합니다. 그 약을 거르면 몸이 힘들어집니다.
복음도 그렇습니다. 복음은 우리가 한 번 듣고 지나가는 소식이 아닙니다. 복음은 날마다 우리 영혼이 붙들어야 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날마다 우리 마음에 선포해야 할 하나님의 진리입니다.
복음은 이 땅의 모든 고난을 즉시 제거하는 만병통치약은 아닙니다. 그러나 복음은 모든 고난 속에서 우리를 붙드는 궁극적인 능력입니다. 복음은 고난의 의미를 다시 보게 하고,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며, 마침내 그 고난을 생명과 소망의 자리로 바꾸어 가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몇 주 전에 우리는 “두려움을 이기는 능력”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그러면 두려움과 고난은 어떻게 다를까요?
두려움은 주로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것입니다. 미래에 일어날지 모르는 일에 대한 걱정과 염려입니다. 아직 닥치지 않았지만 마음속에서 이미 그 일을 상상하며 무너지는 것이 두려움입니다.
반면에 고난은 현재적으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실제로 내 삶에 닥친 어려움입니다. 그리고 그 고난은 고통을 가져옵니다. 몸의 고통이든, 마음의 고통이든, 관계의 고통이든, 삶의 현실 속에서 우리가 직접 겪게 되는 아픔입니다.
두려움을 이긴다는 것은 미래에 대한 염려와 걱정으로 오늘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섭리로 다스리고 계시므로, 앞으로의 길도 하나님이 인도하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이기고, 오늘을 다시 힘을 내서 살아가게 하는 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그러나 오늘 설교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현재적으로 고난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복음이 어떻게 처방이 되는가에 관한 것입니다. 고난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고난을 어떻게 통과하며, 고난 속에서 복음의 능력이 가져오는 결과가 무엇인가에 관한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먼저 우리가 고백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질그릇이라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 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질그릇입니다. 질그릇은 화려하지 않습니다. 강하지도 않습니다. 쉽게 금이 가고, 쉽게 깨질 수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 자신이 바로 그런 존재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강철 같은 존재가 아닙니다. 충격을 받아도 아무렇지 않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고난이 오면 흔들립니다. 아픔이 오면 무너질 것 같습니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마음이 무너질 때도 있고, 삶의 큰 어려움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처럼 느낄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사실 우리는 질그릇처럼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바로 그 질그릇 같은 우리 안에 보배를 담으셨다는 것입니다. 그 보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이기는 능력은 질그릇인 우리에게서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담긴 보배,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나옵니다. 능력은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다. 능력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어서 말합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바울은 고난이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난을 아주 현실적으로 말합니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합니다. 답답한 일을 당합니다. 박해를 받습니다. 거꾸러뜨림을 당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현실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사방이 늘 열리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사방이 막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모든 일이 시원하게 풀리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답답한 일이 계속됩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사람들이 다 나를 이해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박해를 받고 오해를 받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넘어지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거꾸러뜨림을 당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말합니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습니다.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않습니다.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울이 강해서입니까? 아닙니다. 바울이 특별한 사람이어서입니까? 아닙니다. 바울도 질그릇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 보배가 있습니다. 바울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난이 바울을 흔들 수는 있어도, 삼킬 수는 없습니다. 고통이 바울을 아프게 할 수는 있어도, 망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복음은 고난을 피하는 길이 아닙니다. 복음은 고난 속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경험하게 하는 길입니다.
오늘 저는 우리가 당하는 고난의 이유를 다 설명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많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고난에는 뜻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믿음을 굳건하게 하시기 위하여 고난을 허락하신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또 어떤 고난은 우리의 죄의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고난은 믿음을 연단하는 과정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고난은 의를 위하여 받는 고난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고난 앞에서 너무 빨리 결론을 내리는 것입니다.
“네가 죄를 지어서 그렇다.”
“하나님이 너를 시험하시는 것이다.”
“이 고난에는 반드시 이런 뜻이 있다.”
이렇게 쉽게 말해서는 안 됩니다. 고난 중에 있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섣부른 해석이 아니라, 함께 울어주는 사랑과 복음의 위로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난 중에는 그 고난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하나님의 뜻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다 분별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든 고난의 이유를 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것입니다. 인생에는 고난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난으로 인해 우리는 고통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에게도 고난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고난을 피하려고 합니다. 종교생활을 하는 이유도, 마음으로 바라고 소망하는 것도, 결국 고난을 피해 가기 위한 것일 때가 많습니다. 사람들은 고난 없는 삶을 원합니다. 아픔 없는 인생을 원합니다. 실패 없는 길을 원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고난은 우리를 피해가지 않습니다. 아무리 계획을 잘 세워도, 아무리 조심스럽게 살아도, 고난은 우리 삶 속에 찾아옵니다.
기독교는 예수를 믿으면 고난이 사라진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그리스도인도 이 세상에서 고난을 겪는다고 말합니다. 때로는 예수를 믿기 때문에 더 큰 고난을 받을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동시에 말합니다. 그 고난이 우리를 삼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고난 속에서도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고난을 무조건 피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고난을 주님과 함께 통과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고난을 통과하는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놀라운 일을 행하신다고 말씀합니다. 고난의 목적과 이유를 지금 다 알지 못해도, 하나님은 그 고난 속에서 우리를 붙드시고,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때로는 그 고난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생명을 흘려보내십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리고 11절에서도 말합니다.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고난을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고난을 당했습니다. 죽음 같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 속에서 예수의 생명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12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이것은 바울 자신이 고난을 통과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죽음 같은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을 통해 다른 사람들이 생명을 얻고 있습니다. 바울의 고난이 헛되지 않은 것입니다. 그의 깨어짐을 통해 복음의 생명이 흘러가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고난 이해의 중심에는 부활이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 당하는 고난만 바라본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부활을 바라보았습니다. 예수님을 다시 살리신 하나님께서 자신도 다시 살리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에게 고난은 끝이 아니었습니다. 죽음도 끝이 아니었습니다. 사망이 역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생명이 역사합니다. 깨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깨어짐을 통해 복음의 생명이 흘러갑니다.
고난은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서 나 개인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고난은 공동체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고난을 통과하는 것을 통해 여러분도 살아나고, 여러분 주변의 사람들도 생명을 얻게 됩니다.
물론 이것은 고난을 가볍게 여기라는 말이 아닙니다. 고난을 낭만적으로 포장하라는 말도 아닙니다. 고난은 아픕니다. 고난은 괴롭습니다. 고난은 우리를 울게 합니다. 그러나 복음 안에서 고난은 단순한 상처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 고난을 생명의 통로로 바꾸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과 그로 인한 고통 때문에 포기할 것이 아니라, 그 고난과 고통을 주님과 함께 통과해 나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 고난을 어떻게 통과해 나갑니까?
내 힘으로 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내 의지로 견딜 수 있습니까? 어느 정도는 버틸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깊은 고난 앞에서 우리는 압니다. 내 힘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압니다. 내 힘으로는 그 고난과 고통을 끝까지 견뎌낼 수 없습니다.
바로 복음이 우리로 하여금 고난과 고통을 견디게 합니다.
저는 우리 아이들에게서 신앙생활에 관한 많은 것을 배웁니다.
아이들이 몸이 아프고 고통스러울 때 어떻게 행동합니까? 부모를 찾습니다. 아이가 주사를 맞을 때 어떻게 견뎌냅니까? 부모의 품에 안겨서 주사를 맞습니다. 혹은 부모가 손을 꼭 잡아주면 아이는 고통을 참아냅니다.
아이는 주사가 왜 필요한지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 주사 안에 어떤 약이 들어 있는지 모릅니다. 왜 이런 아픈 과정을 지나야 하는지도 다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부모의 품에 안겨 있기 때문에 견딥니다. 부모가 자기 곁에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자기를 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고난의 이유를 다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났는지 모릅니다. 왜 하나님이 지금 이 상황을 막아주지 않으시는지 이해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왜 이렇게 오래 기다려야 하는지, 왜 이렇게 아파야 하는지 알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에게 이것 하나를 분명히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자기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은 고난 속에서도 우리를 붙들고 계십니다.
심리학에서는 부모와 자녀 간의 안정 애착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부모가 자기를 버리지 않고 떠나지 않으며, 언제나 자기를 돌보며 옆에 있다는 안정된 관계가 형성되면, 아이는 무서운 순간에도 완전히 무너지지 않습니다. 두려워할 수는 있습니다. 울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의 품에서 다시 안정을 되찾습니다.
혼자 있을 때 무서운 일을 겪은 아이도 안정 애착이 형성되어 있으면 부모의 품에서 금방 진정하고, 다시 부모를 떠나서 놀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안정 애착이 형성되지 못한 아이는 부모의 품 안에서도 쉽게 진정하지 못하고, 다시 부모를 떠나 놀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부모에 대한 신뢰가 아이로 하여금 고난과 고통을 다스리고, 다시 상황을 감당하고 일어날 힘을 공급하는 것입니다.
정신과 의사인 커트 톰슨은 『고통을 지나는 중입니다』라는 책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안정된 애착 관계를 누리며 살아갈 때, 고통 앞에서도 우리 마음에 소망에 대한 기대가 생기기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그 말은 안정된 관계가 고난과 고통의 시간을 견디게 하고 다시 일어나게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은 이것을 단순히 심리학적 애착이라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양자 됨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 속에서 막연한 신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자기 아들을 내어주신 아버지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를 결코 정죄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받아주시고, 우리를 붙드시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모든 고난을 즉시 없애주시지 않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성령으로 우리의 고통을 마취시켜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게 하지 않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고난과 고통을 통과할 능력을 주십니다.
그 능력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에서 옵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세워진 관계에서 옵니다.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시고,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믿음에서 옵니다. 십자가에서 확증된 하나님의 사랑에서 옵니다. 부활로 증명된 하나님의 능력에서 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복음으로 이미 보여주셨습니다.
“나는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나는 너를 이미 받아들였다.”
“나는 너를 나의 식탁에 초대했다.”
“너는 있는 모습 그대로 내게 나아와도 된다.”
“나는 너와 함께 먹고, 너와 함께 살기 원한다.”
“나는 너를 천하보다 귀하게 여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을 부활의 첫 열매가 되게 하심으로, 우리를 돌보실 하나님의 능력이 사망 권세보다 크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그 복음을 받아들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누리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 복음을 믿게 하셨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고백하게 하셨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붙드시는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고난 속에서 우리가 붙들 것은 고난의 이유보다 더 깊은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확증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부활로 증명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성령 안에서 우리를 자녀 삼으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 속에서 복음을 다시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버림받은 자가 아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하나님은 나를 정죄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받아주셨다.”
“예수님은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다.”
“그러므로 이 고난이 나의 마지막이 아니다.”
“이 고통이 나의 전부가 아니다.”
“하나님은 이 고난 속에서도 나를 붙들고 계신다.”
이렇게 복음을 자신에게 선포해야 합니다.
이것이 고난을 이기는 능력입니다. 고난이 사라져서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이 없어져서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리지 않기 때문에 이기는 것입니다. 복음을 붙들기 때문에 이기는 것입니다. 질그릇 같은 우리 안에 보배 되신 그리스도께서 계시기 때문에 이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고난과 고통을 다스리고, 그 길을 통과해 걸어가는 것을 통해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 복음의 능력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고난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것을 통해, 우리가 아프지만 하나님을 붙드는 것을 통해, 우리가 울면서도 다시 예배의 자리로 나아오는 것을 통해, 사람들이 복음의 능력을 보게 됩니다.
바울의 고난을 통해 다른 사람들이 생명을 얻었던 것처럼, 우리의 고난도 하나님 손에 붙들리면 생명의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질그릇입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보배가 있습니다. 우리는 약합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습니다. 우리는 흔들립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버림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고난 속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십시오. 복음을 다시 붙드십시오.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십시오.
그 복음의 능력이 여러분을 오늘도 견디게 할 것입니다. 다시 일어서게 할 것입니다. 고난을 통과하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고난 속에서도 생명의 열매를 맺게 하실 것입니다.
고난 속에 있는 성도 여러분, 고통 가운데 있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 안에서 능히 견디시고 이기시기를 축복합니다. 질그릇 같은 우리 안에 담긴 보배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고난이 생명의 통로가 되고 아름다운 열매로 변화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