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보내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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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9:35-38

서론

치열했던 한 주간의 삶을 뒤로하고, 오늘 이 밤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오신 동암교회 성도 여러분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말씀을 시작하기에 앞서, 여러분께 질문 하나를 드리고 싶습니다.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해 보셔도 좋겠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한 영혼 때문에 가슴이 아파, 정말 눈물을 흘려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내 문제 때문에 운 것 말고, 내 자식 성적 때문에 운 것 말고, 내 아픈 몸 때문에 운 것 말고요. 오직 누군가 한 사람의 영혼이 지금 하나님 없이 죽어 가고 있다는 그 사실 하나 때문에, 밤에 잠 못 이루고 베개를 적셔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혹시 그 질문에 얼른 대답이 떠오르지 않으십니까?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으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이 밤이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시간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참 이상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의 공기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이런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제 일에 신경 끄세요. 저는 알아서 잘 살겠습니다."
엘리베이터에서 누군가와 눈이 마주치면 우리는 얼른 휴대폰을 들여다봅니다. 몇 년째 같은 층에 살면서도 옆집에 누가 사는지 모릅니다. 아니,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이 요즘의 예의가 되어 버렸습니다. 남의 삶에 관심을 갖는 것은 이제 '오지랖'이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에게 아주 정중하게, 아주 예의 바르게, 철저히 무관심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무서운 것은 이 공기가 교회 문턱에서 멈추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서로 반갑게 인사합니다. "은혜 많이 받으세요." 그러나 옆자리에 앉은 저 성도가 지난 한 주간 무엇 때문에 밤잠을 설쳤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내 속에 있는 것을 꺼내 놓으면 약점이 될까 봐 감추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함께 예배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같은 방향을 보고 나란히 앉아 있는 각각의 개인들이 되어 갑니다.
더 아픈 곳을 짚어 보겠습니다. 교회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집, 가정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자녀에 대해 참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번 시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압니다. 등수가 몇 등인지 압니다. 어느 대학을 목표로 하는지, 요즘 무엇을 먹고 싶어 하는지, 어떤 것에 관심을 보이는지 잘 압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아이가 마지막으로 하나님 앞에서 울어 본 것이 언제인지 아십니까? 그 아이가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 구주로 믿고 있는지, 아니면 그저 부모 손에 이끌려 이 예배당에 앉아 있는 것인지, 우리는 알고 있습니까?
남편과 아내는 어떻습니까? 이십 년, 삼십 년을 한 이불 덮고 살았습니다. 그 사람이 어떤 반찬을 싫어하는지, 어느 대목에서 화를 내는지 척하면 척입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만일 오늘 밤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선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과연 나는 알고 있습니까?
매일 아침 같은 밥상에 마주 앉습니다. 그 밥상에서 우리는 돈 이야기를 하고, 일정을 맞추고, 뉴스를 봅니다. 그런데 그 밥상에서 그 사람의 영혼에 대해 이야기해 본 것이 언제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몰라서 묻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물었다가 어색해질까 봐서, "당신이나 잘하세요" 하는 말을 들을까 봐서 묻지 않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한다고 말하는 그 사람의 영혼을, 세상에서 가장 오래 내버려 두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지금 보고 계신다면 무엇이라 하시겠습니까?
한 지붕 아래 삼십 년을 살면서도 그 영혼이 어디에 서 있는지 묻지 않는 부부를 보시며, 하나님은 무슨 생각을 하실까요? 십 년째 같은 예배당에서 나란히 앉아 예배하면서도 서로의 이름밖에 모르는 성도들을 보시며, 하나님은 무슨 생각을 하실까요?
우리는 그저 조금 무심할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다 그렇게 산다고 생각합니다. 바쁘니까, 어색하니까, 오지랖이니까.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은 그 한 사람을 우리와 전혀 다르게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저울은 우리의 저울과 다릅니다.
오늘 본문을 기록한 바로 그 마태가, 16장에서 예수님이 꺼내신 저울 하나를 우리 앞에 놓습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아멘.
저울의 한쪽에 무엇이 올라가 있습니까? 온 천하입니다. 온 우주입니다. 반대쪽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사람 하나, 영혼 하나입니다. 그런데 저울이 어느 쪽으로 기웁니까? 영혼 쪽입니다.
온 천하를 다 얹어도, 영혼 하나를 들어 올리지 못합니다. 세상의 모든 금과 은, 모든 땅과 모든 권세를 저울에 쏟아부어도, 사람 하나의 영혼 앞에서 그 저울은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매기신 한 영혼의 값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밤 이 자리에 모인 우리 모두가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을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입술에서도 마침내 이 고백,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가 터져 나오는 복된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본론 1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어디서 배울 수 있을까요?
이제 이천 년 전 갈릴리의 어느 하루로 가 보겠습니다. 그날 예수님의 눈에 무엇이 보였는지, 우리도 함께 보기를 원합니다.
갈릴리의 마을들입니다. 흙길이 이어지고, 회당 문이 열려 있고,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예수님은 그 모든 도시와 모든 마을을 두루 다니셨습니다. 회당마다 들어가 가르치시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고,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셨습니다. 이것이 35절, 오늘 본문의 첫 장면입니다.
여러분, 그 긴 사역을 마치신 예수님을 한번 그려 보십시오. 몸은 천근만근입니다. 우리 같으면 이제 사람 얼굴만 봐도 지긋지긋할 때입니다.
그런데 36절이 이렇게 시작합니다.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성도 여러분, 여기서 아주 중요한 한 가지를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36절의 순서를 보십시오. 예수님이 무리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런데 그 긍휼보다 먼저 나오는 단어가 있습니다. '보시고'입니다.
보심이 있고, 그다음에 긍휼이 있습니다. 순서가 그렇습니다. 긍휼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눈앞의 사람을 진짜로 보신 데서 터져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보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무엇을 보셨습니까? 눈앞에 있는 것은 갈릴리의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땅에 매인 농부, 그물을 깁는 어부, 병든 자, 가난한 자. 로마의 세금과 헤롯의 수탈에 짓눌린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우리 눈에도 그것이 보였을 것입니다. 가난, 질병, 고단함.
그런데 성도 여러분, 본문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그들을 무엇이라고 부르십니까? '가난한 사람들'이라 하지 않으십니다. '병든 사람들'이라 하지 않으십니다. "목자 없는 양"이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이것은 경제적 진단이 아닙니다. 이것은 영혼의 진단입니다. 예수님의 눈은 겉으로 드러난 궁핍을 뚫고, 그 배후에서 하나님을 잃어버린 채 아무 데도 기댈 곳 없이 내던져진 영혼의 실상까지 꿰뚫어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다만 이 말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분은 단 한 번도 육신의 고통을 가볍게 보신 적이 없습니다. 35절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예수님은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셨습니다. 그분의 손은 언제나 아픈 자를 향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눈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병을 고치시면서도, 그 병든 몸 안에서 목자를 잃고 헤매는 한 영혼을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인간을 복음의 빛 아래서 본다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형편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각으로 그 사람의 영혼이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목회자나 전도팀에게만 주어진 눈이 아닙니다. 한 영혼 곁에 세워진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눈입니다. 남편 곁에 세워진 아내에게, 자녀 곁에 세워진 부모에게, 그 성도 곁에 나란히 앉은 우리에게 필요한 눈입니다.
이 눈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성경 지식이 아무리 탁월해도, 신앙생활을 아무리 오래 했어도, 교회를 향한 내 열심이 아무리 커도, 사람의 영혼을 볼 줄 모른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밤 기도의 자리에 나오시면서, 여러분의 눈에 담아 온 얼굴이 있습니까?
기억하십시오. 모든 것은 여기서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보셨습니다.
그리고 성도 여러분, 우리도 보아야 합니다.
내 남편을, 내 아내를, 내 자녀를, 옆자리에 앉은 저 성도를, 주님이 피 값 주고 사신 한 영혼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 얼굴을 다시 보아야 합니다.
물론 우리 힘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이 눈은 주님이 열어 주셔야 뜨입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그 눈을 열어 달라고 구하는 것, 그리고 그 얼굴을 다시 바라보는 것. 그것이 오늘 밤 우리가 드릴 믿음의 대답입니다.

본론 2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시 본문으로 들어와서, 예수님께서 보신 후에 무엇을 하셨는지 계속해서 보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은 보고 지나치지 않으셨습니다. 보시고 무엇을 하셨습니까? 안타까워하셨습니까? 그 정도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아파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아픔은 마음 한구석이 짠해지는 그런 아픔이 아니었습니다. 몸으로 느껴지는 아픔이었습니다.
36절,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 '불쌍히 여기시니'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여러분은 아마 상상도 못 하실 것입니다.
이 헬라어의 뿌리가 되는 명사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아십니까? 창자입니다. 내장입니다.
고대인들은 인간의 가장 깊은 감정이 바로 이 내장에서 일어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어떤 사람의 고통을 보는 순간 내 창자가 뒤틀리고 배 속이 끊어지는 것 같은 신체적 아픔을 가리킵니다.
그러니 이것은 잠깐 마음이 짠해지는 감상이 아닙니다. 텔레비전에서 굶주린 아이를 보고 "어이구, 안됐다" 하고 채널을 돌리는 그런 동정심이 아닙니다. 주님은 그 고통 가운데, 창자가 끊어지는 것 같은 아픔으로 우리를 보며 괴로워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더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복음서에서 이 단어는 거의 예수님께만 쓰입니다. 딱 하나의 예외가, 저 멀리서 돌아오는 아들을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간 탕자의 아버지입니다.
그 아버지가 누구입니까? 우리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니 이 긍휼은 인간의 동정심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 그 자체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을 보셨기에 예수님의 창자가 그토록 뒤틀렸습니까? 36절 후반부입니다.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이 두 단어를 원어로 풀어 보면 참혹합니다. '고생하며'는 원래 '가죽을 벗기다, 찢다'라는 뜻입니다. 짐승에게 물어뜯겨 살점이 뜯겨 나간 양의 모습입니다. '기진함이'는 '내던지다, 팽개치다'입니다.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져 스스로는 도무지 일어설 수 없는 양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반드시 붙잡으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두 단어가 모두 수동태입니다. 스스로 지친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에게 뜯긴 것입니다. 스스로 주저앉은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내던진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그들을 뜯었습니까? 성경은 두 가지를 지목합니다.
하나는 목자들입니다. 에스겔 34장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목자들을 이렇게 고발하십니다.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고 그 털을 입되, 약한 자를 강하게 하지 않고, 병든 자를 고치지 않고, 상한 자를 싸매 주지 않았다. 그들은 양을 먹인 것이 아니라 양을 먹었습니다.
또 하나는 그 목자 없는 울타리를 넘어 들어온 악한 권세입니다. 사탄 마귀의 세력이지요! 그 악한 영의 세력은 목자가 자리를 비운 우리 안으로, 들어와 양들을 철저히 짓밟고 물어뜯습니다.
그런데 정말 정말 안타까운 현실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주님께서 그토록 안타까워 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양들은 스스로 이렇게 뜯기고 고생하고 괴롭힘 당하는데 스스로 그런 상황을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제가 어느 책에서 읽은 이야기입니다. 한 소년이 중학교 시절에 병아리를 사다가 닭을 몇 마리 정성껏 길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닭장을 들여다보던 소년은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큰 수탉 한 마리가 옆구리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쓰러진 채, 눈만 껌뻑거리고 있었습니다. 밤중에 닭장으로 파고든 쥐가, 잠든 닭의 날개 밑을 헤집고 들어가 살을 마구 물어뜯어 놓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소름 끼치는 것은 그다음이었습니다. 쥐가 그렇게 살을 뜯어내는 동안, 닭은 감각도 없는지 그저 가만히 앉아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이 목자 없는 양의 모습입니다. 뜯기고 있는데 뜯기는 줄을 모릅니다. 피가 흐르는데 아픈 줄을 모릅니다. 죄가 내 영혼을 갉아먹고 철저히 나 자신을 망가뜨리고 있는데 그저 눈만 껌뻑거리며 앉아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면 그 양들은 누구였을까요? 우리는 자꾸 저 바깥의 세상 사람들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정직하게 보십시오. 예수님이 목자 없는 양으로 보신 그 무리는 이방인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종교적인 민족이었습니다. 율법을 따라 절기를 지키고 제사를 드리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교인들이었습니다.
주일마다 예배당에 앉아 있고, 헌금하고, 봉사하는데, 정작 그 영혼은 목자 없이 뜯기고 내던져져 있는 사람들. 예수님의 창자를 뒤틀리게 한 것은 바로 그 광경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그 무리가 우리였습니다. 뜯기고 내던져진 그 양이 바로 우리였습니다. 우리를 물어뜯은 것이 무엇입니까? 끝나지 않는 생활의 압박, 자식 걱정에 지새운 밤, 남과 비교하다 곪아 버린 마음.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를 갉아먹으면서도 우리가 아픈 줄조차 모르게 만들던 죄였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그런 우리를 향해 진노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창자가 끊어지셨습니까?
그것은 참된 목자, 참 좋으신 목자이신 주님께서 우리의 무기력함, 무능력함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에스겔 34장에서 흩어진 양들을 향해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나 곧 내가 내 양을 찾고 찾되." 이게 무슨 말입니까? 기진하고, 고생하는 양들아 내가 너에게 가겠다. 내가 너희들을 찾겠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보셨고, 그리고 아파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의 그 아픔은 결코 아픔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본론 3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이 이 아픔을 느끼실 때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십시오. 14장에서는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15장에서는 굶주린 무리를 먹이셨습니다. 20장에서는 맹인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이 긍휼은 반드시 움직입니다. 마음만 아프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직 예수님의 긍휼이 아닙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여기서 우리 자신에게 정직하게 물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나에게 그 마음이 있습니까? 목자 없는 양을 보시고 창자가 끊어지셨던 그 예수님의 마음이, 지금 내 안에 있습니까?
그리고 만일 있다면, 나는 지금 움직이고 있습니까? 그 한 사람을 향해, 내 발이 한 걸음이라도 옮겨진 적이 있습니까?
성도 여러분, 솔직히 직면하길 원합니다. 우리는 매일 스치는 얼굴들 앞에서 창자가 뒤틀리지 않습니다. 한때 뜨거웠던 사람들조차 그렇게 빨리 식어 버립니다. 도대체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흔히 이렇게 대답합니다. "제가 너무 바빠서요." "제 코가 석 자라서요."
물론 그것이 표면적인 이유는 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그 진짜 이유는 훨씬 단순하면서도, 우리의 폐부를 찌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주님의 형상을 지닌 그 영혼들에게 흘려보낼 사랑이 우리 안에 없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주님을 닮아질 수 없고, 주님을 닮을 수 없기에 저 영혼들을 향해 창자가 끊어지는 마음이 부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부터 이를 악물고 주님을 더 사랑해 보겠다고 결심하면 됩니까?
아닙니다. 사랑은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사도 요한이 우리에게 답을 줍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아멘.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사랑은 짜내는 것이 아니라 돌아 나오는 것입니다. 우물에 물이 없다면, 두레박을 더 세게 내릴 것이 아니라 샘을 다시 찾아야 합니다. 그 샘이 어디입니까? 나를 위해 창자가 끊어지신 그분입니다. 그분이 나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다시 볼 때, 우리 안에서 그 사랑이 다시 흐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그분의 마음이 우리 가슴에 부어집니다.
저는 그 일이 일어나는 것을 최근에 두 눈으로 보았습니다.
제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전도폭발 사역을 섬기고 있는데요. 전도팀이 노방으로 나갔다가 돌아와서 함께 보고하고 나누는 시간이 있습니다. 저는 그 시간에 앉아 있다가 여러 번 놀랐습니다.
무엇 때문에 놀랐는지 아십니까? 그분들이 나누는 이야기의 초점이 "오늘 몇 명을 만났다"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분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이렇게 흘러갔습니다. "이 영혼이 생명의 소식을, 이 복음을 듣고 변화되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왜 이토록 관심을 갖지 않을까."
그 안타까움이 어찌나 사무치는지, 돌아서는 그 사람의 등 뒤에 대고 한 번 더 전하고, 한 번 더 권면합니다. "영생을 선물로 받으십시오. 제발 받으십시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나누다가, 앞에서 말씀하시던 그분의 목이 메고 눈물이 흐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처음 만난 사람입니다. 이름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다시 볼 일도 없을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한 영혼 때문에 가슴이 무너져서 울고 있는 것입니다.
그 눈물이 어디서 왔겠습니까? 그분들이 저보다 신앙이 깊어서입니까? 성경을 더 많이 알아서입니까?
아닙니다. 성도 여러분, 그분들은 자기가 어떻게 건짐받았는지를 아는 사람들입니다. 목자 없이 뜯기고 내던져져 있던 자기를, 주님이 어떻게 찾아오셨는지를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 사랑을 알기에, 아직 그 사랑을 모르고 돌아서는 저 사람의 등을 보며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정이 아닙니다. 목자 없는 양을 보시고 창자가 끊어지셨던 우리 주님의 마음이, 한 성도의 가슴을 통해 흘러나온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긍휼은 반드시 움직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긍휼은 무엇으로 움직입니까?
예수님은 기도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기도한 그 사람을 보내십니다.
37절에서 예수님은 갑자기 그림을 바꾸십니다.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방금 전까지 무리는 '양'이었는데, 이제는 '곡식'입니다. 양은 돌봐 주어야 할 존재이고, 곡식은 때를 놓치면 안 되는 존재입니다. 익은 곡식은 거두지 않으면 밭에서 그냥 썩어 버립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떨어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문제의 소재를 정확히 못 박으십니다. 잘 들으십시오. 문제는 밭에 있지 않습니다. 곡식은 이미 익었고, 이미 많습니다. 문제는 일꾼의 부족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늘 반대로 말합니다. "요즘 세상이 하도 악해서요." "전도가 안 되는 시대잖아요." "젊은 사람들이 다 교회를 떠나서요." 우리는 열매 없는 이유를 언제나 밭에서 찾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 한 번도 밭을 탓하지 않으십니다. 곡식은 이미 익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일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의 남편, 여러분의 자녀, 매일 스치는 사무실 옆자리 그 사람. 하나님이 이미 그 마음을 갈아엎어 놓으셨을지 우리가 어떻게 압니까? 이것은 절망의 진단이 아닙니다. 이것은 소망의 진단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무엇을 명하십니까? 여기서 우리는 깜짝 놀라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러니 어서 가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38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밭도 그분의 것이고, 곡식도 그분의 것이고, 일꾼조차도 그분이 세우시기 때문입니다. 사역은 내 열심의 산물이 아니라, 추수하시는 주인의 일입니다. 우리가 밭의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인께 구하는 자일 뿐입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여기 '보내 주소서'라는 단어를 보십시오. 이 단어는 원래 '내보내다, 강하게 밀어내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실' 때 쓰이는 바로 그 단어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지금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기도는 이런 기도입니다. "주인님, 일꾼들을 저 밭으로 힘 있게 떠밀어 주십시오!" 성도 여러분, 추수의 주인이 얼마나 간절하십니까. 일꾼의 등을 떠밀어서라도 그 밭으로 보내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 본문의 절정을 보십시오. 바로 다음 장, 마태복음 10장 1절입니다.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여러분, 지금 무슨 일이 벌어졌습니까? 예수님이 "일꾼을 보내 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신 그 직후에, 바로 그 기도하라는 말씀을 들은 제자들을 불러 일꾼으로 세워 보내십니다.
기도하라는 부르심을 받은 자가, 그 기도의 응답이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기에 이 본문의 놀라운 은혜가 있습니다. 추수를 위해 진심으로 기도하기 시작하면, 그 기도는 결코 나를 관중석에 앉혀 두지 않습니다. 기도는 나를 밭 밖에 세워 두는 것이 아니라, 나를 밭 안으로 밀어 넣습니다.
그러니 이것은 결코 가볍게 드릴 수 없는 기도입니다. 제가 정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주여, 일꾼을 보내소서" 하고 부르짖다 보면, 어느 날 하나님께서 조용히 내 이름을 부르십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그렇다고 이 기도를 드리지 않을 수 있습니까?
이것은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38절을 다시 보십시오. "청하여… 보내 주소서 하라." 몇몇 특별한 사람에게만 주신 명령이 아닙니다. 시간 많은 사람, 말 잘하는 사람, 믿음 좋아 보이는 사람에게만 주신 명령이 아닙니다. 주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그러니 오늘 이 자리에 앉은 우리 모두에게 주신 명령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엇을 합니까? 좌우를 두리번거립니다. 나 말고 저 사람이 낫지 않겠느냐고, 나보다 시간 많은 사람, 나보다 말 잘하는 사람, 나보다 믿음 좋은 사람이 있지 않겠느냐고 뒷걸음질을 칩니다. 그러면서 참 그럴듯한 기도를 계속합니다. "주여, 일꾼을 보내소서." 일꾼은 보내 달라고 하면서, 내가 그 일꾼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그렇게 뒷걸음질 치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일은 언제나 여기서 시작됩니다. "누가 좀 가야 할 텐데"가 "제가 가겠습니다"로 바뀌는 자리. 그 한 사람에게서, 하나님은 추수를 시작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보셨고, 아파하셨고, 그리고 보내십니다.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혼들을 향해 보이신 그 모습을 통해, 목자의 심정을 보았습니다. 보셨고, 아파하셨고, 그리고 보내십니다.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 **"제가 가겠습니다"**라는 그 대답이 어디서 나올 수 있습니까?
우리의 참 목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입니다. 그분을 깊이 바라볼 때, 우리 영혼 깊은 곳에서 그 대답이 울려 나옵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의 그 목자를 조금 더 바라봅시다. 목자 없는 양을 보시고 창자가 끊어지셨던 그 목자가, 그 양들을 위해 어디까지 가셨는지 말입니다.
마태복음 26장, 잡히시던 그 밤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스가랴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하십니다.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여러분, 이 말씀을 오늘 본문 위에 그대로 겹쳐 놓아 보십시오.
목자 없는 양을 보시고 창자가 끊어지셨던 그 목자가, 이제 하나님께 치심을 당하십니다. 그리고 그 매를 맞는 순간, 양들은 다 흩어져 달아납니다. 열두 제자가 그날 밤 그렇게 흩어졌습니다.
성도 여러분, 그러면 이제 이 세상에 목자가 남아 있습니까? 없습니다. 목자가 없습니다.
골고다 언덕 위, 온 땅이 어두워지고 하늘이 침묵하던 그 세 시간 동안, 목자 되신 그분이 이렇게 부르짖으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 순간, 목자가 버림받으셨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이 식어서가 아닙니다. 뜯기고 내던져진 우리의 죄를, 그분이 자기 몸에 지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그 진노를, 그분이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그 목자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흩어진 양들을 하나하나 다시 찾으시려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분이 목자 없는 자가 되셨기에, 우리가 영원한 목자를 얻었습니다. 그분이 버림받으셨기에, 우리가 찾아졌습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여기서 우리 숨이 멎습니다.
세상의 목자는 양을 팔아 자기 배를 채웁니다. 에스겔 34장의 그 목자들이 그랬습니다. 양을 먹인 것이 아니라, 양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자기를 팔아 양을 사셨습니다. 값을 받는 자리에 서지 않으시고, 값을 치르는 자리에 서셨습니다. 그 양의 값이 얼마였습니까? 은도 아니고 금도 아니었습니다. 목자 자신의 피였습니다.
여러분, 오늘 밤 우리가 처음에 나누었던 그 저울을 기억하십니까? 온 천하를 다 얹어도 꿈쩍하지 않던 그 저울. 그 저울의 반대편에 하나님의 아들이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그 저울을 기울이셨습니다. 그렇게 우리를 사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아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미 찾아진 양입니다. 아니, 이미 값 주고 사신 바 된 양입니다.
그러니 "나를 보내소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내미는 헌신의 계약서가 아닙니다. 어떻게 내 것도 아닌 것을 드려 계약을 맺겠습니까? 이 몸도, 이 입술도, 이 발걸음도, 이미 그분이 피로 값 주고 사신 것입니다.
"나를 보내소서"는 이미 그분의 것이 된 자가 드리는 감사의 대답입니다. 그러니 이 파송은 우리 어깨에 얹힌 짐이 아니라, 그분의 마음에 참여하는 영광스러운 특권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 그 대답을 드립시다. 그런데 그 전에, 눈을 감고 얼굴 하나를 떠올리십시오.
매일 한 밥상에 마주 앉으면서도, 단 한 번 그 영혼의 안부를 물어본 적 없는 그 가족. 십 년째 같은 예배당에 앉으면서도 이름밖에 모르는 그 성도. 지금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떠올려 주시는 그 얼굴, 그 한 사람을 붙드십시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주여, 내 눈을 열어 주십시오. 저 사람을 숫자가 아니라, 주님이 피로 값 주고 사신 한 영혼으로 보게 하여 주십시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주여, 주님의 그 마음을 내게 부어 주십시오. 저 한 영혼 앞에서 내 창자가 뒤틀리게 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 때문에 울게 하여 주십시오."
그리고 마침내,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주여, 추수할 일꾼을 보내소서. 그리고 만일 그 일꾼이 저라면… 주여, 저 한 영혼에게로 나를 보내소서!"
우리를 사시려고 자기 목숨을 값으로 치르신 참 목자의 그 애끓는 긍휼이 오늘 밤 여러분의 심령에 깊이 부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 한 영혼을 예수님의 마음으로 품고 추수밭으로 나아가는, "나를 보내소서" 하고 손을 드는 우리 동암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찬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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