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순간에

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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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와 참된 예배의 의미,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과 성경적인 관계에 관해 살펴보며,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하며 기도로 나아가도록 권면한다.

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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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다보면 여러 고통을 겪을 때가 있다. 적은 고통일 때도 있고, 감당하기 힘든 고통일 때도 있다. 그럴 때 우리는 반문하곤 한다.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이 오는 걸까? 다른 사람들은 저렇게 평안하게 살고 있는데 왜 나에게만 이런 고통이 있는 걸까?
우리는 모두 고통을 싫어한다. 그래서 보통 고통을 나쁜 것으로 인식한다. 세상 사람들의 경우에는 운이 없어서, 팔자라서, 혹은 저 사람 때문에 등의 이유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전능하시고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그분의 뜻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이 고통이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고 믿기에 더 힘들기도 한다.
나를 사랑하시는 선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나에게 이런 고통을 주실까? 직장에 쫓겨나거나 병이 들거나, 다치거나, 비난을 당하거나, 시험을 떨어지거나, 사업이 망하는 등의 문제 가운데 우리는 의문을 가진다. 하나님께서 왜?
이런 문제 때문에 기도하지만 쉽게 해결되지 않을 때 우리는 더욱 회의에 빠지기도 하다.
이런 고통의 순간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늘 시편에서 고통의 순간에 하나님 앞에 몸부림치는 시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1절: 시인이 하나님께 간절히, 더할 수 없이 간절히 부르짖고 있다. 그가 크나큰 고통 가운데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쉽게 응답해 주시지 않는 것 같다.
2절: 시인이 기도를 조금해서인가? 그렇지 않다. 시인은 밤낮으로 부르짖고 있다. 이 고통 이전에도 시인은 믿음이 좋았던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문제 앞에서 하나님께만 메달리지 못했을 것이다.
9-10절: 모태에서부터 하나님을 의지했다고 한다. 날 때부터 하나님께 드려졌고, 날 때부터 하나님을 주님으로 알았다.
이런 믿음 좋은 시인이 밤낮 부르짖어도, 그래도 응답은 없다.
그럼 어떤 문제가 있어 시인이 이렇게 고통하고 있는 것인가?
6-8절: 사람들이 그를 조롱한다. 훼방한다. 비웃는다. 그 비웃음이 얼마나 크고, 많은 사람이 그를 그렇게 대했는지, 심지어 자신이 벌레로 느껴질 정도이다.
시인을 보는 자마다 모두 그를 비웃는다. 그의 고통이 다른 이들의 눈에도 보이는 외적 고통이었다. 하나님이 구원해 주시겠지 라고 하며 조롱했다.
감옥에 갇혔을 수도 있다.
12-13절: 많은 힘있는 자들이 시인을 둘러싸고 괴롭힙니다. 고문을 가했었던 모양이다.
14-16절: 물 같이 쏟아 졌습니다. 자신의 몸이 형체를 가지고 있다고 느껴지지 못할 정도로 고통을 당했습니다. 모든 뼈가 뒤틀렸습니다. 마음이 초가 녹듯 녹아져 버려 의지라고는 하나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쇠약해졌습니다.
이제 너무 오랜 고통에 힘도 하나도 없습니다. 죽음이 눈 앞에 거의 다가왔습니다.
개 같은 자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자신의 손발을 찌릅니다.
17절: 오랜 고통 때문에 몸이 말라버려 뼈를 셀 수 있을 정도입니다. 모든 뼈들이 드러나 보입니다.
18절: 겉옷도 빼앗기고 속옷까지 빼앗겼습니다. 발가벗겨져 수치와 치욕을 당했습니다.
이곳에 이런 고통을 당해본 사람이 있는가? 인간으로 당할 수 있는 극한의 고통 중에 극한의 고통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은 육체, 정신, 의지, 감정 모든 영역에서 극한의 고통을 당했다.
그런데 시인은 하나님을 찬양한다.
3-6절: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십니다.
주님의 거룩하심을 찬양한다.
하나님을 의뢰하면서도 구원을 받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를 하나님은 구원하신다고 믿음을 고백합니다.
엄청난 수치의 순간에 하나님께 의뢰하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고 고백합니다.
22절: 말로 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 하나님의 응답을 받지 못하고 고통하는 그 순간에 여러 사람 가운데서 하나님을 찬양하겠다고 고백합니다.
23절: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선포합니다.
24-26절: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선포합니다. 자기가 지금 경험하지 못하고 있지만, 하나님이 그런 분이시기에 선포합니다. 잠시 자기가 경험하지 못할 뿐이지 하나님은 곤고한자를 구원하시고 부르짖음을 들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27-28절: 이제는 예언을 합니다. 하나님께 모든 열방이 경배할 것을, 열방의 왕이 되실 것을 예언합니다.
29-31절: 열방에 구원받지 못할 자들이 구원을 얻고, 그의 후손들이 주님의 백성이 되며. 주를 전하며. 주님의 행사를 선포할 것을 예언합니다.
이 시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런 고통 가운데 이렇게 까지 해야 하는가? 이것이 그에게 무슨 유익이 있는가?
우리 고통의 순간에 이렇게 해야 하는가? 그것이 무엇이 유익이 있는가?
알겠지만, 이 시편은 예수님의 수난에 대한 예언 시편이다. 그분이 십자가에 못박히셔서 1절의 말씀을 외치셨고. 그분이 당한 고통이 5-21절에 기록되어 있다.
그분이 죽으신 후에 22-31절 말씀이 성취되었다.
이 시인은 자신의 고통의 순간에 하나님께 믿음으로 토로하고 고백하고 선포했다. 그런데 그의 고통은 예수님, 하나님이 이 땅에서 당하실 고통을 겪는 것이었다.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었다. 그분의 고난을 예언하는 것이었다.
이 시인이 고통 당할 때 물론 무엇 때문에 이런 고통을 당하는지 정확히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믿음으로 반응했다. 선하신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했다. 그러자 그는 온 우주의 왕이요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고통에 동참하는 크나 큰 영광을 누렸다.
하나님의 전 역사는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 역사이다. 그 구원의 가장 핵심은 예수님의 십자가이다. 이 시인이 당한 고통은 너무도 큰 것이었지만, 그 시간은 얼마간이었다. 몇 달이었을 수도 있고 몇일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누리는 영광은 영원하다.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 가서 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불평했을까, 감사했을까? 말로 할 수 없는 감격으로 찬양에 찬양에 찬양을 드렸을 것이다.
한 사람의 예를 더 보자. 유다의 선한 왕이었던 히스기야의 경우이다.
사38:1-6
히스기야가 잘 지내고 있던 어느날 갑자기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죽을 준비를 하라는 청천벽력같은 말을 듣는다. 아마 피부암이나 그 당시에 고칠 수 없는 어떤 피부에 관련된 병이었을 것을 추측한다.
어째거나 히스기야는 황망하여 하나님 앞에 앉아 통곡하며 기도한다. 나를 살려달라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들으셨다. 유다를 지키신다는 약속도 함께 주셨다.
병으로 고통하다가 나을 때까진 시간이 조금 걸렸을 것 같다. 무화과를 종처에 올려 놓으라는 처방을 보아 바로 낳지는 않았을 것 같다.
히스기야가 병이 낳았을 때 이렇게 고백한다.
10-20절
그가 병으로 어떻게 고통하고, 하나님께 어떻게 기도했는지 기록하고 있다.
병을 통해 병이 나으며 깨달은 것이 있다.
17절: 하나님이 병을 주신 것은 자신의 영혼을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기가 멸망으로 가고 있었던 것을 몰랐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멸망에 길에서 병을 통해 깨닫게 하심으로 건져 주셨다. 자신의 죄를 제해주셨다. 병의 고통을 통해 그렇게 행하셨다고 고백한다.
대적 앗수르를 물리치고 승승장구하던 히스기야는 하나님을 떠나가고 있었다. 교만하여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고 있었다. 그의 몸보다 그의 영혼을 더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그의 몸에 고통을 주어 그의 영혼을 깨우시기로 하셨다. 일종의 훈계이며, 깨닫게 하시는 징계였다. 이를 통해 히스기야는 깨닫게 된다.
큰일 날 뻔했다. 난 멸망의 구렁텅이 빠져들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나를 깨닫게 하지 않으셨다면 큰일 날 뻔했다. 병을 주신 것이 오히려 감사하다. 병을 주시지 않고 내버려 두셨다면 나는 분명 죄로 망했을 것이다.
이렇게 깨닫게 감사하게 된 것이다.
성경에서 많은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의 경우를 보게 된다. 어떤 경우는 드러나는 죄로 인해 징계를 받음으로 고통을 당한다. 어떤 경우는 드러나지 않는 죄로 인해 고통을 겪는다. 어떤 경우에는 죄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고통을 받는다.
짧은 시야를 가진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명확히 알지 못한다. 아니 나 자신의 상태도 바로 보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 안에 있는 믿음이, 성령이 우리에게 증거하시는 것은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지금 이해되지 않는다. 당연하다. 우리가 그분의 뜻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이해하게 되는 날에는 너무나 감사하여 찬양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우리가 이해력이 부족하고, 미리 알게 되었을 때 오히려 그르칠 수 있는 연약한 존재임을 아시기에 알려주시지 않을 뿐이다.
좋은 부모는 때로 자녀에게 고통을 허락한다. 그가 경험해봐야 아는 것들도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다 대신해주고, 막아주고, 모든 것을 보호해주는 부모를 우리는 결코 좋은 부모라고 하지 않는다. 자녀의 수준과 상황에 맞게 어떤 것은 자녀에게 경험하도록 하고, 그러면서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도록 보호하는 부모를 좋은 부모라고 한다.
하나님도 그러시다. 우리가 연약할 때 우리에게 고통을 허락하신다.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이다. 우리의 죄를 제거하시고, 믿음을 자라게 하시기 위해서이다. 성장하게 하기 위해서 이다. 고통없이는 성장이 없기에 고통을 허락하신다. 하나님은 자기의 유익을 위해 사시는 이기적인 분이 아니다. 그분의 선하심이 그렇게 하도록 하신다. 그분의 영광을 위해 우리를 창조하신 것도 자신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닌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성숙하게 될 때는 그분의 일을 감당하게 하신다. 그 가운데 그분과 더 깊은 연합으로 이끄시기 위해 고통을 허락하신다. 이는 하나님의 고통을 알고 경험하게 하기 위한 고통이다. 이를 통해 하나님과 더 깊이 연합되기 때문이다. 하나님과의 연합은 하나님이 줄 수 있는 최상의 것이다. 피조물 된 우리가 감히 누릴 엄두도 낼 수 없는 너무나 영광스러운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어떤 것도 나쁘거나 악한 것은 없다. 혹시 지금 고통의 순간을 보내고 있는가? 내 뜻대로 되지 않아 힘든가? 기도해도 응답이 없다고 여기지는가?
상황이나 환경, 현상에 믿음을 두지 마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그분에게 믿음을 두라. 우리의 믿음의 대상은 상황, 환경, 현상이 아니다. 우리의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선하시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항상 나에게 좋은 것을 주신다. 본문의 시편의 시인처럼 그렇게 고백하고 선포해라. 지금 현재 이루어지는 일들이 아무리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도 하나님이 변한 것은 절대 아니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붙들 때, 분명히 기쁨의 찬양의 날이 온다.
고통의 순간! 사실 그 순간은 하나님이 우리를 성장시키고, 우리 죄를 제거하여 건강하게 하는 회복의 시간이다. 하나님과 연합으로 가는 복된 순간이다.
벧전 1:6-7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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