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7월 8일 연신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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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에베소서 4장 11~16절 주님의교회를어떻게세울것인가
(예배 인사, 축복) 들어가며 : 이 책의 주어는 "그가"입니다 - 에베소서는 교회를 이야기하는 책입니다. 감옥에 갇힌 사도 바울이, 자신의 손과 발은 묶여 있는 그 자리에서, 그 무엇으로도 묶을 수 없는 교회의 영광을 기록한 책입니다. 그런데 이 에베소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내려가다 보면, 거듭거듭 눈에 들어오는 한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그가"라는 주어입니다. 오늘부터 직전 3장까지 주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그’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행한 일은 무엇입니까? 1장 3~5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그가 창세 전에 우리를 택하셨고, 그가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셨고, 그가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셔서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습니다. 에베소서가 교회에 대하여 말하는 모든 문장의 주어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도달하는 궁극의 지점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으시고, 이 세상이 주님으로 충만하게 되도록 세우신 공동체, 곧 교회로 향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택한 본문 직전, 10절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내려오셨고, 그가 오르셨고, 그가 충만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11절이 오늘 본문의 첫 마디입니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주님의 교회를 어떻게 세울 것인가"라는 질문을 붙들고 이 본문 앞에 서려고 합니다. 그런데 미리 말씀드립니다. 이 질문의 답은, 우리가 기대하는 곳에 있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본문이 우리를 데려가는 길을 따라 함께 걸어가 보시기를 바랍니다.
첫째, 그가 사람을 세우셨습니다 : 은사는 은혜의 선물입니다 -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시기 위하여 가장 먼저 행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건물을 지으신 것도 아니고, 제도를 만드신 것도 아닙니다. 사람을 세우셨습니다. 사도로, 선지자로, 복음 전하는 자로, 목사와 교사로, 하나님은 사람을 부르시고 세우시는 방식으로 교회를 세워 가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하나님께서 은사대로 우리를 부르셨다." 그런데 이 은사가 무엇인지, 본문은 7절에서 이미 그 뿌리를 밝혀 두었습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은혜, 헬라어로 '카리스(χάρις)'입니다. 이 단어 안에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선물'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받을 이유가 없는 자에게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것, 그것이 은혜입니다. 그리고 은사를 가리키는 카리스마(χάρισμα)는 바로 이 카리스, 즉 은혜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은혜가 선물의 형태로 구체화된 것이 은사입니다. 은사는 우리가 노력으로 획득한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로 부어 주신 선물입니다. 사도가 자격이 되어서 사도가 된 것이 아닙니다. 목사가 훌륭해서 목사로 세워진 것이 아닙니다. 그가 삼으셨습니다. 그가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은사는 무엇입니까. 은사는 하나님의 일하심, 역사의 결과물입니다. 우리는 그 은사가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오해해왔지만, 그러나 그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이미 내 안에서 일하고 계시다는 증거이며, 흔적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 은사 없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직분도 은사요, 타고난 재능도 은사요, 인생에서 통과해 온 눈물의 경험조차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면 은사가 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이 자리에 앉아 계시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이미 무언가를 맡기셨다는 뜻입니다.
둘째, 그 은사로 몸을 세우게 하십니다 : 섬김이 우리를 자라게 합니다 -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사를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12절이 그 목적을 밝힙니다.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그 이유는 먼저, 성도를 온전하게 하는 일입니다. 원어를 살펴보면 이 '온전하게 한다'는 표현은 배에서 찢어진 그물을 다시 깁는 행위를 가리키기도 하고, 탈구된 관절을 제자리로 맞추는 의술 행위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교회가 어떤 곳입니까. 완성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찢기고, 깨어지고, 낙담한 영혼들이 들어오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은사를 받은 지체들을 통하여 그 상한 심령을 싸매시고, 부러진 인생을 다시 맞추시고, 회복시키십니다. 그렇기에 교회는 어떤 곳이 되어야 합니까? 회복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를 통해 우리의 영혼이 회복되고, 생명을 얻어 살아나는 곳, 그곳이 교회여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회복이 종착역이 되어선 안됩니다. 온전하게 된 성도는 이제 봉사의 일을 하게 됩니다. 성도가 섬기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에서 봉사한다는 것은 정말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성도 한 분이 한 가지 사역을 감당하는 것, 1인 1사역이 교회 안에서 굉장히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물론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배만 잘 드려도 충분하지 않습니까?" 맞는 말씀입니다. 예배만 나와도 귀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더 성숙한 신앙의 결론처럼 여겨져서는 안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섬김은 우리를 더 온전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도는 그리스도의 몸, 그리고 그 몸의 지체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몸의 지체는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귀하지만, 동시에 움직일 때, 더 건강해집니다. 손은 움직일 때, 손 답고, 발은 걸을 때, 발 다워집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는 섬길 때, 더 성도다움, 온전함의 자리까지 나아가게 됩니다. 봉사는 교회가 사람의 일손을 필요로 해서 시키는 노동이 아닙니다. 봉사는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로 이끌어 가는 하나님의 통로입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그 섬김이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게" 하는 큰 원동력이 됩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사역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봉사의 자리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오늘도 일하고 계심을 더욱 선명하게 보기 때문입니다. <주일학교 아이 한 명을 맡아 보십시오. 목장 식구 한 사람을 품어 보십시오. 아비의 마음으로, 어미의 마음으로 인내하게 됩니다. 때로는 실망하고, 솔직히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고, 심하면 시험에 드는 순간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시간을 통과하면서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아,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참아 주셨구나.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기다려 주셨구나. 그래서 바울의 고백이 비로소 내 고백이 됩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라디아서 2:20).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섬김의 자리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머리가 아니라 우리 몸의 근육과 뼈, 세포로 배우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15절이 말씀하는 대로, 우리는 사랑 안에서 범사에 그에게까지,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가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 그런데 왜 이 일이 안 됩니까 : 어린아이에 머물고 싶은 마음 - 그런데 성도 여러분, 이 아름다운 일이 왜 우리 안에서 잘 일어나지 않을까요? 14절이 그 이유를 정확하게 짚어 줍니다.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누구나 다, 이 그리스도의 몸된 공동체, 교회 안에서 어린아이에 머물고 싶어합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어린아이는 받기를 원합니다. 관심받기를 원하고, 사랑받기를 원하고, 돌봄받기를 원합니다. 그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는 신앙의 연수가 쌓여도 그 자리에 머물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책임이 따르는 자리, 섬겨야 하는 자리는 불편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은혜를 받는 소비자로 남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아직 부족해서요. 더 사랑을 받아야할 것 같은데요.” 이러면서 신앙의 연수는 쌓여 가는데 신앙의 키는 자라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어린아이에 머무는 것이 단지 아쉬운 일이 아니라 위험한 일이라고 경고합니다. 어린아이로 머물면 어떻게 됩니까. 다시 14절을 주목해보십쇼.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게" 됩니다. 뿌리내리지 못한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듯, 몸에 붙어 있지 않은 지체가 힘을 잃듯, 섬김 없이 홀로 서 있는 신앙은 세상의 속임수와 유혹과 풍조 앞에서 쉽게 흔들립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가 어떤 시대입니까. 진리와 거짓이 뒤섞이고, 미움의 언어가 넘쳐나고, 온갖 풍조가 파도처럼 밀려오는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일수록 우리는 어린아이의 자리에 머무르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께 더 깊이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연결되어 귀한 성도들과 함께 각 지체로 연결되어 각자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열심을 갖고 봉사한다 하여도, 그래서 귀한 교회를 세워간다 할지라도, 속임수와 유혹, 그리고 우리를 요동치게 하는 온갖 소리들은 우리 주변에 남아 있을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이 흔들리는 우리에게 남은 소망은 무엇입니까. 바로 여기에서, 오늘 본문은 우리를 결정적인 진리 앞에 세웁니다.
넷째, 교회를 세우는 것은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처음에 말씀드렸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이 본문의, 아니 에베소서 전체의 주어는 "그가",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의 전체 흐름을 다시 보십시오. ‘그’가 사도와 선지자와 복음 전하는 자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습니다. 그들이 자격이 되어서가 아닙니다. 그분의 전적인 선택입니다. 성도를 온전하게 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온전하게 할 수 없습니다. 부러진 뼈가 스스로를 맞출 수 없듯이, 회복 역시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16절을 보십시오.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몸이 자라나는 그 모든 역사가 어디에서부터 옵니까.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그’에게서입니다.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서 생명이 흘러나와 온 몸이 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세우고 계신 그 몸을 세우는 일에 함께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주님의 마음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사랑을 통해 우리도 그 사랑 안에서 이 몸을 세우는 일에 쓰임받고 있다는 사실 앞에서 감사와 감격과 은혜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세우는 것은 짐이 아니라 특권입니다. 의무이기 전에 영광입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가면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파밀리에성당이 있습니다. 1882년에 첫 돌을 놓았는데, 지금까지 140년이 넘도록 여전히 짓고 있는 성당입니다. 이 성당을 설계한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는 자기 인생의 마지막 40여 년을 이 한 건물에 바쳤지만, 192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완공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 후로 지금까지 수많은 석공과 기술자들이 이 성당에서 평생을 일하다가 은퇴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들 중 누구도 완성된 성당을 본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공사는 멈추지 않습니다. 왜입니까. 설계자가 남긴 도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일꾼들은 전체를 다 보지 못합니다. 어떤 이는 평생 기둥 하나를 조각하고, 어떤 이는 보이지도 않는 기초를 다집니다. 그러나 그 모든 손길이 설계자의 도면 안에서 하나의 성전으로 자라 갑니다. 생전에 가우디는 공사가 너무 더디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제 건축주는 서두르지 않으십니다." 그의 건축주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를 세우는 일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작은 돌 하나를 다듬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하는 섬김이 전체 어디에 놓이는지 다 알지 못합니다. 열매가 내 눈에 보이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도면은 우리 손에 있지 않고 설계자이신 주님의 손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건축주는 서두르지도 않으시고, 포기하지도 않으십니다. 우리의 부족한 손길까지 그분의 설계 안에 넣으셔서,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몸, 교회를 완성시켜 가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나가며 : 주님의 교회,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니" -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주님의 교회를 어떻게 세울 것인가. 어쩌면 이 설교의 제목은 모순처럼 느껴질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어떤 방법을 기대하셨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어떤 탁월한 방법, 그 어떤 훌륭한 프로그램을 가져다 놓는다 할지라도, 이 교회를 세우는 가장 강력한 길은 단 하나입니다. 이 교회가 ‘주님의 교회’라는 것을 기억하고 믿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그 고백 위에 주님께서 선언하셨습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 믿음의 고백 위에 '내 교회', 나의 교회(MY CHURHCH)를 내가 세우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교회에는 그 어떤 인간의 생각과 자기 주장이 개입할 공간이 없습니다. 특정한 목사의 교회도 아니고, 장로의 교회도 아니고, 어느 헌신된 성도의 교회도 아닙니다. 저 역시 그가 세우신 한 사람의 일꾼일 뿐이며, 도면은 언제나 주님의 손에 있습니다. 교회가 주님의 몸임을 겸손하게 고백하고 인정할 때, 그리고 교회의 머리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명확하게 할 때, 교회는 온전하게 자라나며 세워져 갈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은사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이 연신교회, 그리스도의 몸에 붙이셨습니다. 이제 어린아이의 자리에서 일어나, 각자에게 주신 은사를 들고, 감사와 감격으로 주님께서 세우시는 그 성전의 돌 하나를 함께 다듬어 가시지 않겠습니까. 그리하여 우리 연신교회가 그리스도로 충만하고, 그 충만함이 흘러넘쳐 우리의 가정과 일터와 이 지역과 이 나라를 충만하게 하는, 참으로 주님의 교회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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