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7.07. 루트미니스트리 정기예배. 우리가 회복해야 할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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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본문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백성과 함께 여기를 떠나서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네 자손에게 주기로 한 그 땅으로 올라가라
내가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내어 가나안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고
너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길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 하시니
백성이 이 준엄한 말씀을 듣고 슬퍼하여 한 사람도 자기의 몸을 단장하지 아니하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라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한 순간이라도 너희 가운데에 이르면 너희를 진멸하리니 너희는 장신구를 떼어 내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 어떻게 할 것인지 정하겠노라 하셨음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호렙 산에서부터 그들의 장신구를 떼어 내니라
서론
서론
할렐루야. 루트미니스트리 정기 예배로 모인 모든 예배자들을 주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우리 함께 인사부터 나누고 시작합시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한 번 더 인사할까요? “하나님이 일하고 계십니다.”
사람은 자기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잃어버릴 때 슬퍼합니다. 돈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돈을 잃을 때,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관계가 흔들릴 때 슬퍼하며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인정받는 것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누군가의 차가운 말 한마디에 하루 종일 슬퍼하며 풀이 죽어 있습니다. 이렇듯 우리의 슬픔은 우리 속마음을 정직하게 나타냅니다. 내가 무엇 때문에 슬퍼하는지를 보면, 내가 무엇을 소중하게 여기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잃을 때 슬퍼하게 될까요?
물론 우리가 살아가면서 여러 이유로 슬퍼할 수 있습니다. 취업이 잘 안되고, 시험에 떨어지고, 경제적으로 어려워지고,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가 자꾸 힘들어지는 등 내가 그렸던 미래가 자꾸만 무너져갈 때 우리는 당연히 슬픔에 빠지게 됩니다. 이런 슬픔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잃었을 때 슬퍼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정말 슬퍼해야 할 것 앞에서 점점 무뎌져 간다는 것입니다.
이 시간 잠시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세상에서 소중히 여기는 것을 잃었을 때 슬퍼하는 만큼 하나님에 대해서도 슬퍼하고 있을까요? 여러분은 하나님과 멀어질 때도 슬퍼하고 있습니까? 기도하지 않아도 별 두려움이 없고, 말씀을 들어도 아무 감동이 없으며, 죄를 반복해도 양심의 가책이 그닥 느껴지지 않을 때, 그것을 정말 슬퍼하고 있습니까? 하나님 없이도 하루가 너무 멀쩡하게 지나갈 때, 그것을 슬퍼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 삶에 손해가 되는 것에는 정말 민감합니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과의 관계가 흔들리는 것에 대해서는 너무 무뎌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을 잃으면 괴로워하면서, 복의 근원이신 분을 잃어버리는 것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쓰지 않습니다.
참 이상한 일 아닙니까? 마치 손에 쥔 동전 하나를 잃어버리고는 온 방을 뒤지며 안타까워하면서, 정작 집 전체가 불타고 있다는 사실은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죄가 진정으로 우리가 슬퍼해야 할 것을 가리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다시 한 번 우리를 깨우치시고, 우리가 회복해야 할 진정한 슬픔을 회복하게 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본론 1
본론 1
오늘 본문은 금송아지 사건 이후에 주어진 말씀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러 올라갔으나 오래도록 내려오지 않자 이스라엘은 불안해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기다리지 못한 것이지요. 그래서 아론에게 말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그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었고, 아론은 금송아지를 가리켜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라고 말했습니다. 온 이스라엘이 그 앞에서 제사하고, 먹고 마시며, 뛰놀았습니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그 산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깨뜨렸습니다.
하나님은 분명 우상을 만들지 말라 하셨는데, 그들은 그들의 손으로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들을 여기까지 인도해내신 하나님 대신 이집트에서 보았던 소 모습을 한 신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았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에 배신으로 보답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이후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함께 1절을 읽어봅시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백성과 함께 여기를 떠나서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네 자손에게 주기로 한 그 땅으로 올라가라
여기 우리가 먼저 주목해야 할 표현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가리켜 “내 백성”이라고 부르지 않으십니다. 무엇이라고 부르십니까? 하나님께서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백성”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집트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시고, 홍해를 가르시며,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와 물을 공급하신 분은 분명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이스라엘을 인도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지금은 이스라엘을 “내 백성”이라고 부르지 않으십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렸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아픔과 진노가 담겨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범죄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사이에 균열이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완전히 버리셨다는 뜻은 아니지만, 이전처럼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내 백성”이라 부를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약속 자체를 취소하지는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받은 가나안 땅으로 올라가라고 하십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을 그들에게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이어지는 2절과 3절 상반절까지를 보면 그 땅에 거주하는 가나안 사람, 아모리 사람, 헷 사람, 브리스 사람, 히위 사람,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가게 하시겠다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겉으로 보면 모든 것이 유지됩니다. 여전히 약속은 유효합니다. 천사가 앞서 가며 길을 열 것입니다. 대적들은 쫓겨나고 이스라엘은 그 땅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이스라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하나가 빠졌습니다. 하나님 자신입니다.
3절 하반절을 함께 읽어봅시다.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길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 하시니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여러분, 이 말씀이 얼마나 두려운 말씀입니까? 하나님은 가나안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함께 가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그들이 원하던 목적지는 허락하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 자신은 함께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 앞에서 이스라엘은 슬퍼합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참 이상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지 않겠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백성은 슬퍼합니다. 왜입니까? 하나님께서 함께하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이제서야 조금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약속의 땅보다 하나님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하나님 없는 가나안은 복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원하는 것을 다 얻어도 하나님 자신을 잃어버리면 그것은 성공이 아니라 재앙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시간 우리에게도 묻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예배자 여러분, 하나님이 내가 원하는 것을 다 주시지만, 정작 하나님 자신은 함께하지 않으신다면 그것은 축복이 맞습니까?
원하던 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멀어졌습니다. 원하던 직장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잃었습니다. 원하던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의 순결함을 잃었습니다. 원하던 돈을 벌었습니다. 그런데 예배의 감격이 사라졌습니다. 원하던 사역의 열매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보다 사람들의 인정이 더 중요해졌습니다. 이것이 정말 축복입니까?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하나님 없는 가나안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졌다 해도 하나님이 없다면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입니다. 거기에는 어떤 기쁨과 만족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주 가나안만 바라봅니다. 하나님과 함께 걷는 것보다 하루 빨리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보다 내가 원하는 결과를 얻는 것을 더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 이 일만 되게 해주세요.”
“하나님, 이 관계만 붙들어 주세요.”
“하나님, 이 시험만 통과하게 해주세요.”
“하나님, 이 문제만 해결해 주세요.”
“하나님, 이 길만 열어주세요.”
물론 그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필요를 하나님께 아뢰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하나님, 이 길에 주님이 함께 계십니까?”
“하나님, 제가 이 일을 이루는 동안 주님과 더 가까워지고 있습니까?”
“하나님, 제가 원하는 것을 얻으면서 주님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 이것이 정말 주님과 함께 걷는 길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회복해야 할 슬픔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바라는 것들을 잃는 슬픔이 아니라, 하나님을 잃는 슬픔 말입니다. 세상 모든 것을 다 버려도 하나님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은 축복입니다. 하지만 세상 모든 것을 다 얻어도 하나님을 잃는다면 그것은 저주입니다. 그러니 무엇보다 하나님이 더 이상 나와 함께 하지 않으신다는 것이 우리의 가장 큰 슬픔이 되어야 합니다.
본론 2
본론 2
이 말씀을 들은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함께 4절을 읽겠습니다.
백성이 이 준엄한 말씀을 듣고 슬퍼하여 한 사람도 자기의 몸을 단장하지 아니하니
이스라엘 백성은 이 말씀을 준엄한 것으로 들었다고 합니다. 여기 “준엄하다”는 말은 본래 “참담한”, “재앙과 같은”, “견디기 어려운” 같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더 이상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은 견디기 어려운 재앙과 같이 여겨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슬퍼하며 한 사람도 자기의 몸을 단장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들이 슬퍼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가진 것을 빼앗겼기 때문입니까? 바라던 미래가 사라져버렸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들이 슬퍼한 이유는 단 하나였습니다.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잃어버릴 위기 앞에 섰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이 비로소 조금씩 깨어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물론 그들의 회개가 완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하루아침에 온전히 새로워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그들이 무엇이 진짜 재앙인지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무엇을 진정으로 슬퍼해야 하는 것인지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들입니다.
가나안에 못 들어가는 것보다 더 슬픈 일이 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지만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축복을 받지 못하는 것보다 더 슬픈 일이 있습니다. 축복은 받지만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보다 더 슬픈 일이 있습니다. 원하는 것을 얻지만 하나님 없이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배자 여러분, 이것이 우리가 회복해야 할 슬픔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하나님과 점점 내게서 멀어지는 것을 슬퍼하며,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 점점 희미해지는 것을 슬퍼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분이 우리 생명과 복의 근원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아는 누구라도 이렇게 고백할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 없는 영원한 삶보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하루를 살겠습니다.” 다윗도 이렇게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낫습니다”
사랑하는 예배자 여러분, 우리는 정말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더 이상 함께 하시지 않으시겠다는 말씀 앞에 두려워 떨며 슬퍼하고 있나요? 이미 하나님께서 내게서 점점 멀어지고 계시고,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음에도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만약 그렇다면 도대체 우리 마음의 중심에는 무엇이 있었던 것입니까? 우리는 무엇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왔던 것일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살아가면서 정말 소중하게 여겨야 할 것들을 자주 잊어버립니다. 곁에 있을 때는 그것이 얼마나 귀한지 잘 모릅니다. 늘 당연하게 주어지는 것처럼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잃어버릴 때, 비로소 그것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깨닫게 됩니다. 건강도 그렇지 않습니까? 건강할 때는 걷고, 숨 쉬고, 먹고, 자는 것이 너무 당연하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몸이 아프기 시작하면 그때서야 깨닫습니다. “아, 건강이 정말 소중한 것이었구나.” 당연하게 누리던 하루가 사실은 큰 은혜였다는 것을 아픔을 통해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사실보다 더 큰 복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복을 너무 쉽게 당연하게 여깁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을 익숙하게 여기고, 예배할 수 있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기도할 수 있는 것을 가볍게 여기고,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것을 평범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가 잊어버린 소중함을 다시 깨닫게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없는 삶이 얼마나 두려운 삶인지 알지 못할 때, 하나님은 자신의 은혜로운 얼굴을 잠시 가리시는 것처럼 느끼게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너무 당연하게 여길 때, 그 함께하심이 희미해지는 고통을 통해 하나님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분인지 깨닫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신 것도 바로 그런 의미였습니다. 그들을 버리기 위한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다시 깨우기 위한 말씀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정말 소중하게 여겨야 할 것이 무엇인지 잊어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 없는 삶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 아프게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부모의 마음을 생각해 보면 이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볼 수 있습니다. 자녀가 잘못된 길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말려도 듣지 않고, 위험한 선택을 계속하며, 자신의 잘못을 가볍게 여깁니다. 그때 부모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계속 웃어주기만 해야 합니까? “괜찮아, 괜찮아” 하며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대해 주는 것이 사랑입니까?
아닙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더 이상 평소처럼 웃어줄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이 가득한 얼굴빛을 거둘 때가 있습니다. 자녀를 버리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자녀가 자기 잘못을 가볍게 여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길이 얼마나 위험한 길인지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내가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않겠다”고 하신 것은 그들을 버리겠다는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 없는 길이 얼마나 두려운 길인지 깨닫게 하시기 위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들이 잃어버린 참된 슬픔을 회복시키기 위한 사랑의 경고였습니다.
본론 3
본론 3
이제 5절과 6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라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한 순간이라도 너희 가운데에 이르면 너희를 진멸하리니 너희는 장신구를 떼어 내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 어떻게 할 것인지 정하겠노라 하셨음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호렙 산에서부터 그들의 장신구를 떼어 내니라
하나님은 백성에게 장신구를 떼어 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단순히 “꾸미지 말라”는 뜻으로만 읽으면 부족합니다. 물론 슬픔과 회개의 표시로 외적인 단장을 멈추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러나 출애굽기의 흐름 속에서 이 장신구는 훨씬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본래 애굽의 노예였습니다. 자기 땅도 없고, 자기 재산도 없고, 자기 미래도 붙들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을 애굽에서 나오게 하실 때 빈손으로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애굽 사람들에게 은금 패물과 의복을 얻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장신구는 본래 나쁜 것이 아니었습니다. 죄의 상징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장신구는 해방의 선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표지였습니다. “너희는 더 이상 애굽의 노예가 아니다. 너희는 내 백성이다”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였습니다.
더 나아가 출애굽기의 큰 흐름을 보면, 이 금과 은은 나중에 성막을 세우는 재료로 사용될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후에 백성들은 성막을 짓기 위해 가슴 핀과 귀고리와 가락지와 목걸이와 여러 금품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던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까지 먼저 채워주셨습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라고, 하나님이 거하실 성막을 세우라고, 하나님께 기꺼이 드릴 수 있도록 먼저 은혜를 부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장신구로 무엇을 했습니까? 성막을 짓기 전에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금으로 하나님이 거하실 자리를 만들기 전에, 하나님을 대신할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금송아지 사건의 비극입니다. 단순히 우상을 만들었다는 것만이 비극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받은 것으로 하나님을 배반했다는 것이 비극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막을 짓는 재료가 되게 하시려고 주신 것을, 이스라엘은 금송아지 우상을 만드는 재료로 사용했습니다.
이것을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가난한 신부가 있습니다. 결혼을 앞두고 있지만 가진 것이 많지 않습니다. 신랑에게 무엇 하나 제대로 준비해 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신랑이 그 신부를 너무 사랑합니다. 그래서 먼저 아낌없이 선물을 줍니다. 좋은 옷도 주고, 귀한 장신구도 주고, 결혼을 준비할 수 있도록 필요한 것들을 가득 채워줍니다. 이 선물에는 신랑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너는 내 사랑을 받는 사람이다. 초라하게 살아가던 시절은 잊고, 이제 이 사랑 안에서 나와 함께 새로운 삶을 시작하자”
그런데 신부가 그 선물을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갑니다. 신랑이 준 것으로 신랑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랑을 위해 써버립니다. 신랑이 준 선물로 신랑을 배반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금송아지 사건입니다.
이스라엘은 제 손에 가진 것 하나 없는 노예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드릴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셔서 먼저 채워주셨습니다. 하나님께 드릴 수 있도록 풍성하게 채워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선물로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것으로 하나님을 대신할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복으로 하나님을 배반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장신구를 떼어 내라.”
이 말씀은 단순히 금붙이를 벗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무엇을 했는지 보게 하십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어디에 사용했는지 직면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잃어버리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몸으로 기억하게 하십니다. 장신구를 벗는 것은 회개의 몸짓입니다. 애통의 표시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복으로 하나님을 배반한 죄를 인정하는 행위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것이 있지 않을까요? 한 번 생각해봅시다. 우리의 장신구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분명 은혜로 주셨는데, 어느새 하나님보다 더 붙들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라고 주신 복인데, 오히려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드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드리라고 주셨는데, 어느새 나를 증명하고, 나를 높이고, 나를 안전하게 만들기 위해 붙들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누군가에게는 성적일 수 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취업일 수 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연애일 수 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외모일 수 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돈일 수 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스펙일 수 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사역의 자리일 수 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사람들의 인정일 수 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자기 꿈과 계획일 수 있습니다.
이것들은 본래 나쁜 것이 아닙니다. 장신구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었던 것처럼, 이것들도 악한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취업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연애가 나쁜 것이 아닙니다. 돈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외모를 가꾸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실력을 쌓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사역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이 하나님보다 커지는 순간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축복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다가 하나님 없이도 괜찮은 사람이 되어간다면, 그것이 하나님 주신 장신구로 금송아지를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연애를 하다가 하나님 앞에서의 정직함과 거룩함을 잃어버린다면, 돈을 벌고 모으다가 돈이 하나님보다 더 의지할 것이 되어버린다면, 사역을 하면서 하나님보다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이 더 중요해진다면, 이 모든 일이 사실 금송아지를 만들고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 받은 복으로 무엇을 만들고 있습니까? 성막입니까, 금송아지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간과 재능과 물질과 관계와 젊음과 기회를 주신 이유는 그것으로 하나님 없는 삶을 세우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장신구는 하나님이 거하실 자리를 세우라고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장신구를 벗어라.” 이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을 버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공부하지 말라는 뜻도 아니고, 취업하지 말라는 뜻도 아니고, 사랑하지 말라는 뜻도 아니고, 돈을 벌지 말라는 뜻도 아니고, 사역하지 말라는 뜻도 아닙니다.
그것이 너의 하나님이 되게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네가 받은 복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으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것을 하나님께 다시 드리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선물보다 하나님 자신을 더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5절 마지막에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 어떻게 할 것인지 정하겠노라.” 이 표현은 얼핏 차갑고 조건적으로 들립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거래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백성을 회개의 자리로 부르시는 말씀입니다. 너희가 정말 무엇을 붙들고 있었는지 보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정말 하나님 없는 삶을 두려워하게 되었는지 보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다시 하나님과 함께 걷기를 원하는지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기 위해 장신구를 벗기신 것이 아닙니다. 다시 함께 걷기 위해 벗기신 것입니다. 그들의 죄를 가볍게 넘기지 않으시고, 하나님께 받은 복으로 하나님을 배반했다는 사실을 깊이 슬퍼하게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우리가 회복해야 할 슬픔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복으로 우상을 만든 것을 슬퍼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막의 재료로 주신 것을 금송아지의 재료로 사용한 것을 아파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선물보다 하나님 자신을 더 사랑하지 못한 것을 슬퍼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회개가 필요합니다. 장신구를 벗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없는 삶을 슬퍼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 회개와 슬픔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며 우상을 만든 죄, 참 하나님 대신 헛된 신을 하나님으로 삼은 죄,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 분을 배신하는 죄는 결코 가벼운 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심판을 받아 마땅한 벌을 받아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슬퍼하며 회개하는 것만으로는 다시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 우리게 주신 복음이 그 영광의 빛을 비춥니다. 하나님은 분명 공의로우신 분이시기에 죄를 그냥 넘어가실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랑이 풍성하신 분이시기에 우리를 죄 가운데 버려두지도 않으십니다.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은 중보자를 세우십니다.
출애굽기 33장 후반부에서 모세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모세는 알았습니다. 이스라엘에게 하나님 없는 가나안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매달립니다. “하나님, 함께 가 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으신다면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겠습니다.”
모세는 위대한 중보자였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최종적인 중보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백성을 위해 엎드릴 수는 있었지만, 백성의 죄를 영원히 없앨 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임재를 위해 기도할 수는 있었지만, 죄인과 거룩하신 하나님 사이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더욱 위대한 중보자가 오셨습니다.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단지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기 위해 친히 속죄의 제물이 되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모든 죄의 짐을 지셔서 죄인과 거룩하신 하나님 사이의 문제를 완벽히 해결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자기 죄 때문에 장신구를 벗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 때문에 영광을 벗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받은 복으로 하나님을 배반했지만, 예수님은 그 배반한 백성을 위해 십자가의 수치를 담당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지는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이렇게 울부짖으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예수님께서 버림받으셨기에, 우리는 다시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수치를 당하셨기에, 우리는 다시 부끄럼 없는 하나님의 자녀로 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기에, 우리는 언제나 새로운 마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은혜 또한 슬퍼하며 회개하는 자만이 누릴 수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사랑하는 예배자 여러분 이것이 여러분을 향한 주의 말씀입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장신구를 다시 주님 앞에 내려놓읍시다. 하나님 없는 가나안을 부러워하지 맙시다. 하나님 없는 성공을 두려워합시다. 하나님 없는 사역을 두려워합시다. 하나님 없이도 괜찮아진 마음을 슬퍼합시다.
하나님께서 주신 시간으로 금송아지를 만들지 말고, 하나님이 거하실 자리를 세웁시다.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으로 금송아지를 만들지 말고, 하나님이 거하실 자리를 세웁시다. 하나님께서 주신 관계와 젊음과 사역과 미래로 금송아지를 만들지 말고, 하나님이 거하실 자리를 세웁시다.
참된 복은 그저 가나안에 도착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복은 하나님과 함께 가나안에 이르는 것입니다. 우리의 연약하여 자주 죄를 짓고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잃지만, 이런 죄인들을 위해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가 몇번이고 돌이킬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다시 주님께 돌아갑시다. 우리가 잃어버린 슬픔을 회복하며 주님 앞에 섭시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와 축복으로 세상을 위해 살았던 삶을 돌이키며,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다고 부르짖읍시다. 다시 하나님과 동행하게 되길 소원하며, 하나님께 받은 모든 장신구를 다시 하나님께 돌려드립시다. 우리에게 주신 것으로 금송아지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 땅 곳곳에 하나님이 거하실 예배의 자리를 세우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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