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의 공동생활_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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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해주신 소스 자료를 바탕으로, **'성도의 공동생활과 화해'**라는 주제로 1시간 분량의 강의 또는 소그룹 공부를 위해 정리한 강의안입니다.
[강의안] 성도의 공동생활: 화해의 영적 원리와 공동체적 삶
[강의안] 성도의 공동생활: 화해의 영적 원리와 공동체적 삶
강의 목표: 미움의 본질을 이해하고, 형제 사랑이 어떻게 영적 회복과 공동체 일치로 이어지는지 깨닫는다.
1. 미움의 본질: 의지적 거부와 살인 (15분)
1. 미움의 본질: 의지적 거부와 살인 (15분)
요한일서 3장 15절 말씀은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단순히 감정의 문제를 넘어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않는 심각한 영적 상태임을 경고합니다,.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하는 자:
미움은 누군가를 목표로 정하고 그를 입니다.미움의 정의:끊임없이 싫어하고 혐오하며 거부하는 마음과 정신의 의지적인 작용
사랑과 미움의 메커니즘:
대상에게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것을 갈망하며 붙어 있으려는 성향입니다,.사랑:
추가적인 아름다움이 발견되지 않을 때 마음은 중간 지대인 권태와 싫증을 통과하게 됩니다.권태와 실증:
대상에게서 잘못된 것과 추함을 발견하고 그것에 집착하여 의지적으로 거부하는 상태입니다,.미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식어 실증이 날 때, 신령한 일에 대해서는 이 나타나고 자기 자신을 가꾸는 일에만 몰두하게 됩니다,.영적 침체의 징후:게으름
2. 형제 안에서 발견하는 세 가지 아름다움 (10분)
2. 형제 안에서 발견하는 세 가지 아름다움 (10분)
인간을 끝까지 사랑하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는 조건을 넘어선 아름다움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외모, 학벌, 능력, 재력 등 타고나거나 성취한 조건들입니다.자연적인 아름다움:
너그러움, 용서, 착한 성품 등 인간적인 성품과 관련된 아름다움입니다,.도덕적인 아름다움:
인간 안에 있는 이며,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겨진 불멸의 아름다움입니다,.신령한 아름다움 (핵심):하나님의 형상의 아름다움
감정에 끌리는 것은 욕망일 뿐입니다. 참된 사랑은 상대의 추함보다 그 안에 있는 입니다.사랑의 결단:신령한 아름다움을 끊임없이 보려고 노력하는 의지적인 결단
3. 미움이 영혼과 공동체에 미치는 파괴적 영향 (15분)
3. 미움이 영혼과 공동체에 미치는 파괴적 영향 (15분)
형제가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를 미워하는 것은 그를 그곳에 두신 하는 것이며, 그를 사랑스럽다 하시는 하는 것입니다,.하나님의 의지와 판단에 대한 거부:하나님의 의지에 불순종하나님의 판단과 충돌
미움은 영혼의 기능을 마비시킵니다. 영혼은 육체를 통제하여 창조 목적대로 살게 하는 사령탑인데, 미움에 사로잡히면 이 달려가게 됩니다,.영혼의 기능 파괴:통제력을 상실하고 파멸의 길로
미움은 즉각적인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오는데, 그것은 바로 입니다. 은혜의 감화가 차단되면 영혼은 고사하게 됩니다,.기도의 문이 막힘:기도가 막히는 것
4. 공동체적 화해와 언어의 성화 (15분)
4. 공동체적 화해와 언어의 성화 (15분)
미움은 마음속에 악한 언어의 용광로를 만들어 과장과 조작, 비성적인 광기가 섞인 말들을 쏟아내게 합니다,.언어의 용광로:
공동체 분쟁의 99%는 말에서 시작됩니다. 은혜가 혀까지 잠겨야 진정한 성화가 이루어집니다. 화해를 위해서는 가 필요합니다,.말의 절제와 성화:나쁜 말을 옮기지 않고 아름다운 말로 바꾸어 전달하는 지혜
공동체는 각자의 자기 사랑의 깃발을 꺾고 입니다. 미움은 다시 자기 깃발을 세우려는 이기심에서 나옵니다,.자기 깃발 꺾기:십자가의 깃발 아래 모이는 곳
지체에게 용서받으며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고, 자아를 꺾으며 형제를 용서하는 고난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깊이 체험하게 됩니다,.용서와 고난의 학습:
5. 결론 및 적용: 십자가의 길로 돌아가기 (5분)
5. 결론 및 적용: 십자가의 길로 돌아가기 (5분)
세상이 우리를 보고 제자인 줄 아는 비결은 오직 **'서로 사랑함'**에 있습니다.교회의 사명:
형제를 미워했던 죄와 하나님께 싫증 냈던 마음을 회개하고, 다시 주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참회와 회복:
내가 죽고 지체가 사는 자기 희생을 통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치유하고, 사랑의 질서로 통합되는 행복을 누려야 합니다,.화해의 공동체:
[묵상 질문]
현재 내 마음속에 의지적으로 거부하거나 혐오하고 있는 '형제'가 있습니까? 그 원인이 하나님의 판단과 충돌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는 지체의 자연적·도덕적 조건이 아닌, 그 안의 '신령한 아름다움'을 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까?
최근 나의 기도가 막혀 있다면, 내 안에 품고 있는 '미움의 언어' 때문은 아닌지 돌아봅시다.
제공해주신 소스 자료를 바탕으로, 소그룹 성경 공부에서 지체들과 함께 깊이 있게 나눌 수 있는 [성도의 공동생활: 화해와 사랑의 원리] 활동지를 만들어 드립니다.
[소그룹 성경 공부 활동지] 성도의 공동생활: 화해와 사랑
[소그룹 성경 공부 활동지] 성도의 공동생활: 화해와 사랑
본문 말씀: 요한일서 3장 15절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마음 열기]
[마음 열기]
누군가의 '외모'나 '성격'이 아닌, 그 사람만이 가진 **'하나님께서 주신 아름다움'**을 발견하여 칭찬해 본 적이 있나요? 그때 어떤 기분이었는지 나누어 봅시다.
[말씀 속으로: 미움의 정체와 영적 원리]
[말씀 속으로: 미움의 정체와 영적 원리]
2. 소스에 따르면 '미움'이란 단순히 싫어하는 감정을 넘어 어떤 의지적인 작용인가요?
누군가를 목표로 정하고 그를 끊임없이 싫어하고 혐오하며 거부하는 마음과 정신의 입니다.답안:의지적인 작용
3. 우리는 사람에게서 세 가지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각 정의를 연결해 보세요.
(1) 외모, 학벌, 재력, 능력 등 타고난 조건들자연적 아름다움:
(2) 너그러움, 용서, 착한 성품 등 인간적인 성품도덕적 아름다움:
(3) 인간 안에 있는 의 아름다움이며, 그리스도의 피로 씻겨진 불멸의 가치신령한 아름다움:하나님의 형상
4. 왜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살인'과 같다고 말씀하실까요?
미움은 상대방이 가진 더러움이나 추함 때문에 그 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 사람을 그곳에 존재하게 하신 하나님의 의지를 거부하는 것과 같습니다.묵상 포인트:존재 자체가 사라져 주기를 바라는 감정
[삶의 적용: 영혼의 회복과 공동체]
[삶의 적용: 영혼의 회복과 공동체]
5. 미움이 내 마음속에 자리 잡을 때 나타나는 가장 즉각적인 '영적 심판'은 무엇인가요?
입니다. 하나님과의 은혜의 소통이 차단되면 영혼은 서서히 고사하게 됩니다. 혹시 최근 기도가 잘 되지 않는다면, 내 안에 풀지 못한 미움의 언어들이 있지는 않은지 돌아봅시다.답안:기도의 문이 막히는 것
6. '언어의 성화'에 대하여: 공동체 내에서 화해를 이루기 위해 우리의 '혀'는 어떻게 사용되어야 할까요?
우리는 은혜의 물에 온몸이 잠겨도 마지막까지 떠오르는 것이 '혀'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쁜 말을 그대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을 가 필요합니다.나눔:아름다운 말로 걸러서 전달하는 지혜
7. "용서받으며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고, 용서하며 예수의 고난을 배운다"는 문장을 묵상해 봅시다.
내가 지체들에게서 받은 '값없는 용서'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 보고, 반대로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지체를 용서하기 위해 나의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경험(고난의 학습)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결단과 기도]
[결단과 기도]
내 중심의 깃발을 꺾고, 다시금 십자가의 깃발 아래 모여 지체 안의 '신령한 아름다움'을 보기로 결단합니다.결단:
우리 공동체가 서로의 허물을 닦아주고, 미움의 언어를 그치며, 오직 사랑의 질서로 통합되는 행복한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합심 기도:
Tip: 소그룹 리더는 구성원들이 자신의 연약함을 편안하게 고백할 수 있도록, 먼저 자신의 '미움'이나 '기도의 막힘'에 대한 경험을 나누며 분위기를 조성해 주세요.
11 성도의 공동생활 공동생활과 화해 - YouTube
https://www.youtube.com/watch?v=rHNobvRWaCQ
Transcript:
(00:00) 하나님의 말씀은 신약 성경 요한복음 요한일서 제3장 15절입니다. 요한일서 제3장 15절입니다. 찾으셨으면 우리 모두 같이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시작.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아멘.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고맙고 자비로우신 하나님. 이제 저희들이 예배를 주님 앞에 드리며 이 (01:04) 시간에는 우리의 마음을 묶어 주님께 바치고 주님의 음성이 저희들에게 들리는 시간이 없나이다. 아버지여 저희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저희들이 은혜를 받게 하옵소서. 염려와 근심 그리고 욕망과 그리고 헛된 것들에 대한 생각들이 주님의 말씀에 대한 저희들의 은혜받는 것을 가로막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돌보아 주시고 우리의 지성을 명하게 하시며 우리의 생각을 락하게 하셔서 주의 말씀이 울려퍼질 때 신랑을 그리워하던 신부 속에 신부의 마음에 들리는 신랑의 음성처럼 들리게 하시고 그래서 우리의 온 영혼이 주님의 말씀 속에서 주님의 호흡을 느끼고 주님의 심장의 고동소리를들을 수 있도록 도와주셔서 저희들이 주님의 품으로 돌아가고 주님을 사랑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02:05)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아,
아마도 다음 한 시간 정도 더 하면 성도의 공동 생활을 마칠 것 같습니다. 오늘은 성도의 공동생활 중에서 특별히 공동생활과 화해의 문제를 다뤄보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사도 요한의 편지인데 이 편지 속에서 요한은 우리가 쉽게 동의하기 어려운 말을 우리에게 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형제를 미워하면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거하지 않는 줄을 너희도 아는 바라고 하는 극단적인 말씀입니다. 도대체 이것을 우리들이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비록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03:10) 불구하고 사람들을 미워할 때가 많이 있기 때문이죠. 심지어 하나님께서 명백하게 사랑하도록 명령하고 계시는 우리의 가족들을 미워할 때도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또 그리스도의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고 있는 교회의 지체들을 사랑하여야 함에도 미워하는 때가 종종 있고 그래서 우리들이 회개하고 있는 것이 현실인데 그렇게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영생이 거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러면 우리는 구원의 문제에까지 이 미움의 문제를 확대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죠. 그러면 늘 쉽게 사람들을 미워하는 우리의 현실과 만약에 미워하면 그것은 살인한 것이고 살인하는 그 사람 속에는 영생이 있지 아니하는 것이다.(04:12) 라는 이 사도 요한의 진술을 교리적으로 어떻게 좋아시킬지도 우리에게는 매우 난감한 문제가 아닐 수가 없습니다.
우선 우리들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여기서 사도가 이야기하는 미움이라는 것에 참된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우선 이 미움이라고 하는 것은 누군가를 의지적으로 지속주 지속적으로 거부하고 혐오하는 마음과 정신의 작용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이 미움이라고 하는 것은 누군가를 목표로 정하고 그를 끊임없이 싫어하고 혐오하고 거부하는 마음과 정신의 의지적인 작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이러한 이 미움과 (05:17) 영혼의 상태가 어떻게 밀접한 관계가 있길래 사도는 만약에 미워한다면 그것은 살인하는 것이고 영생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한 영적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을까요?
우선 우리들이 이 문제를 알기 위해서는 미움의 감정이 정체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마 저의 이 설명을 통해서 여러분들이 미움이라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명쾌한 이해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자, 삼각형을 어, 삼각형으로 이렇게 그려 봅니다. 여기에는 원이 이렇게 그려지고 정확하게 말하면 부채꼴이 되겠죠. 여기에 사람이 서 있고 사람의 감정의 폭이 부채꼴로 펼쳐져 있다고 칩시다. (06:20) 이쪽 끝이 사랑이라는 감정이면 반대 맨 끝은 혐오의 감정 혹은 미움의 감정이 되겠죠. 예. 그러면이 사랑의 감정은 사랑의 감정은 무엇인가를 목표로 정하고 그것을 끊임없이 즐거워하고 거기에 붙어 있으려고 하는 마음과 정신의 경향이에요. 이게 사랑의 사랑에 대한 형의상학적인 정의에요. 그래서 그런 그런 사랑을 결국은 사람이나 어떤 사물이 사랑의 대상이 되는데 사랑의 대상이 되어서 그에게 그것을 사랑하는 감정을 끊임없이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는 조건이 필요한데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라고 하는 것이죠. 그리고 그 사랑의 감정은 바로 자기에게는 없는 것 없는 아름다움에 대한 갈망이 바로 사랑이라는 감정을 (07:26) 불러오는 거죠.
그러면은 사람을 놓고 생각을 해 봅시다.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그 사람이 아름다움이 있어서 그 아름다움을 계속 발견하게 될 때에는 이 사람이 그 사람을 계속 사랑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다가 이제 사랑을 하게 되는데 근데 어이 아름다움이 잘 발견이 안 돼요. 진짜 아름다운게 다 떨어져서 발견이 안 될 수도 있고 혹은 아름다움이 많이 남아 있는데 그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이 이미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 발견되지 않을 수도 있죠. 어떤 이유든 이후에서든지간에 어쨌든 그 사람에게서 더 이상 아름다운 것이 발견이 되지 않아요. (08:22) 그럴 때 인간의 마음은 이제 사랑으로부터 멀어지기 시작을 하게 됩니다. 사랑이 쉽기 시작하는 거죠.
그래서 이제 반대편으로 이행을 하기 시작합니다. 인간의 모든 감각들은 익숙해지는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인간의 코의 후각은 15초 동안만 정상적인 기능을 발휘해요. 같은 냄새를 15초 이상 막게 되면은 코가 면역이 되어서 예전과 같이 똑같은 기능으로 그 냄새를 후각할 수가 없게 된다고 하는 거죠. 그래서 냄새가 나는 방에 들어가도 잠깐만 참고 있으면 코가 면역이 되어서 냄새를 못 느끼게 되는 것 같은 것이 바로 그러한 예입니다. (09:17) 또 자기 몸에서 나는 냄새를 자기는 잘 모르는 것도 바로 코가 그렇게 익숙해져서 그렇게 되는 거죠. 인간의 영혼도 이와 유사한 성격을 가지고 있어요. 어떤 사람에게서 아름다움을 발견해서 처음에는 사랑을 하게 되었는데 그것에 대해서 추가적인 아름다움이 계속 발견되어야지만 이 사랑이 유지가 되지 추가적인 아름다움이 발견되지 않을 때에는 이 사람을 향한 사랑의 감정이 반대편적으로 움직여서 이행하게 되는 것이에요. 조금 빛나갈지 모르지만은 이렇게 이 사람 안에 있는 아름다움이 더 이상 발견되지 않을 때에 이제 이것을 이 사람에게 아름다움이 더 이상 발견되지 않을 때에 이 사람은 회고 회고하는 심리를 갖게 됩니다. 회고하는 심리.
(10:13) 그래서 지금은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없는데 옛날에이 사람에게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었던 과거를 추억해요. 그 추억거리가 있으면은 회상의 작용을 통해서 지금은 발견할 수 없는 그 아름다움을 회상하면서 자기는 발견하지 못하지만 저 사람 속에 아름다운 것이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하는 거죠. 무슨 소린지 모르겠죠. 그렇게 모를 거라고 저 확신을 합니다. 예를 들자면 피부에 와닿게 얘기할게요. 여러분들의 수준이 꼭 뭐와 똑같으냐면 1 + 1은 뭐지? 그러니까 모르는데 빵 두 개를 갖다 놓고 이거 이거 두 개면은 얼마지? 하면 이해하는 것과 같아요.
자, 부부가 같이 살아. (11:01) 근데 항상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사랑하는 거 아니죠? 그런데 옛날에 연애도 하고 추억이 많아. 근데 같이 살아야 되겠는데 요즘 아름다움이 발견이 안 돼. 계속 속속이고 잔소리나 하고 그러는데 사진을 꺼내 놓고 보니까 옛날에 참 추억이 많아. 그 아 내 아내가 원래는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지금은 고양이 같고 여우 같지만 근데 옛날에는 참 예뻤는데 나를 참 사랑했는데 생각을 하는 거죠. 회상을 하면 다시 눈꺼풀이 열리면서 자기 안에 있는 아름다움이 보이는 거예요. 이게 바로 더 이상 사랑하는 것을 발견할 수 없을 때 일어나는 회고적 작용이야.
근데 그런 추억이 없어. (11:41) 거의 없다 얘기요. 회상을 해 보니까 옛날에도 맨날 쌈박질하고 코피터지게 다툰 기업밖에는 안 나. 그러면은 반대의 현상이 일어나게 되는 거죠. 반드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아름다움이 계속 발견되면 과거를 회고할게 없어요. 여러분, 은혜 안에 충만하게 사는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첫사랑 회고합니까? 회고할게 뭐 요즘 사랑이 더 좋은데? 예. 그러니까 항상 첫사랑을 첫사랑을 그리워하고 탄식하는 사람들은 요즘 침체에 빠져서 하나님의 사랑이 안 느껴지는 사람들이나 그걸 한다 얘기. 예. 근데 더 이상 어쨌든 아름다움을 발견하지 못할 때는 이 부채꼴에서 이쪽으로 이동을 하게 되는 거죠.
(12:30) 그래서 이게 시간이 많이 흘러서 이게 계속 이동을 해요. 그니까 진력이 나면서 이제 이동을 하게 되는 거예요. 이동을 하게 되는데 이 끝에까지 와 버리게 되면은 이거는 무슨 얘기가 되냐면은 사람에게서 그 잘못된 것을 계속 발견을 하게 되는 거죠. 그리고 그것을 집착하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대상을 목표로 정하고 끊임없이 그것을 싫어하고 거부하고 혐오하려는 의지의 선택이 이루어지는 거죠. 그게 바로 미움의 본질이에요. 그런데 이제 문제는 이 두 개의 극단이 아니라 중간 지대를 통과하게 되는 거예요. 감정이. 그래서 더 이상 아름다운 것도 발견할 수 없고 그렇다고 해서 혐오하는 감정이 생긴 것도 아닌 그런 이탈의 감정이 생겨나게 되는데 이 힘의 균형을 이룬 중간 지대를 통과할 때에 그 마음의 작용이 권태, 싫증이에요.
(13:31) 그래서 부부 사이에 권태기가 오는게 바로 이거예요.이 이거라 그거 오는 거예요. 그 권태기를 지나고 부부가 서로를 혐오하게 되는 것처럼 똑같이 이거를 지나게 되는 거죠. 그러면 이것을 만약에 영적 침체라고 하는 문제와 관련지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각해 보면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해. 그러다가 인간이 그 아름다움에 익숙해지니까 뒤로 물러가죠. 그런데 다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해. 그러면 다시 돌아와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거죠. 이런 작용이 일평생 동안 계속 일어나야 되는 거예요. 뒤로 물러가지 않을 순 없어. 근데 조금 물러갔다가 다시 돌아오고 다시 돌아오고 하는 작용들이 계속 필요하다 이거.
(14:19) 그러면 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은 뭘 통해서 발견되느냐 이거죠.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없는 곳이 없이 다 펼쳐져 있어요. 그래서 어그스틴이 뭐라고 노래했어요? 사랑의 하나님 [음악] 귀하신 이름은 내 나이 비록 어려도 잘 알 수 있어요. 그래서 아름다운 산과 바다를 보고 들판을 보면서도 그것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거죠. 음. 그러기 그런 정도의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느끼기 위해서는 영혼히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한 상태가 돼야 되 는이
(15:24) 세상에도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묻어 있지만 그 아름다움의 아름다움이 덩어리가 되어서 묻혀져 있는 보고가 있어요. 그게 뭐냐면 진리예요. 그 진리의 그 그 진리의 온전한 덩어리가 성경이에요. 그래서 다른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께 싫증난 영혼들이 다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을 들을 때 그 진리의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될 때 다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거예요. 예전에 그렇게 미끄러져서 방탕하고 하나님을 미워하고 원망하던 인간인데도 그 성경의 진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되면 다시 그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게 되는 거예.
(16:21) 영적인 침체라고 하는 것은 이것이 뒤로 물러가서 그래서 싫증의 상태로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이런 싫증의 상태로 들어가게 되었을 때 그때 육체에는 하나님을 향한 게으음들이 가득하게 되는 겁니다. 그 게으름이 두려운 것이 무엇이냐면 이 게으른 삶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이 게으른 삶이 영혼히 침체되어서 하나님께 싫증을 내고 있다라고 하는 징후를 보여 주기 때문이에요. 자, 예를 들어 봅시다. 여러분들이 막 열심히 일을 하다가 이상하게 갑자기 코에서 코피가 나요. 그러면 깜짝 놀라겠죠. 그러나 많이 놀라진 않을 거예요. 왜? 코피나는 일들이 늘 고단하면 있게 마련이니까 내가 무리를 했구나.
(17:15) 그리고 코를 막고 그리고 응급 처치를 할 거예요. 근데 만약에 여러분의 눈에서 피가 쏟아진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 피 쏟아지는 것 때문에 아 이게 이게 피가 쏟아져서이 이렇게 많은 피를 흘리면 내가 비열이 될 텐데 이런 걸 가지고 고민하는게 아니라 이런 일은 일어날 수가 없는 일이잖아요. 거의 일어날 수 없는 일이잖아요. 근데 이유 없이 눈에서 피가 막 쏟아지는 거예요. 그럼 여러분들은 겁이 덜컥 날 거예요. 이거는 뭔가 내가 알지 못하는 굉장히 심각한 징후가 이 피 말고 피 속에 있는 눈과이 뇌 어디에선가 일어나고 있다라고 하는 조짐 아니에요. 바로 그것이 징후라고 하는 것이에요.
(17:54) 그 게으름은 그 게으음은 바로 영혼이 그렇게 하나님을 향해 실증을 내고 있다라고 하는 징후예요. 그래서 어떤 사람이 자기에게 맡겨진 일들에 대해서 열심을 내지 않아 자신의 의무에 헌신하지 않아 자기를 위해서 자기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인데 그것을 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태만이 해. 그래서 게으른 삶을 살아. 그래 이것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이 뒤에 그 사람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서 이탈해서 싫증이 난 영혼의 상태가 되어 있는 것이 더 큰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을 보여 주는 거라. 그러면 그 사람이 모든 일에 대해서 싫증을 내고 있느냐? 아니에요. 하나님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하나님께 도움을 드리고 하나님을 하나님이 맡겨 주신 영혼들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그러한 신령한 일에 대해서만 게으른 거죠. 게으른 거죠.
(18:59) 자기 자신을 치장하고 가꾸고 뭐 자기 자신이 먹고 마시고 이런 일에는 오히려 반대로 하나님께 싫증 날 때 열심히 더 생겨나게 되는 거. 그렇게 되는 거죠. 그것이 바로 영혼의 침체가 이것에 의해서 설명이 되는 거죠.
그러면 이 미움의 감정이라는 것은 뭐냐? 바로 그것을 인간에게 대입시켰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에요. 사람에게서 끊임없이 아름다운 것을 발견할 수 있으면 그 사람을 계속 사랑하게 되죠. 근데 그것을 더 이상 발견할 수 없을 때는 실증이 나게 되죠. 그에게 어떤 더러움들을 발견하게 되면 그를 혐오하고 미워하게 되죠. 근데 이걸 하지 말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거거든요.
(19:46) 사도가 만약에 너희가 이렇게 지속적으로 의지를 가지고 경향성적으로 만약에 형제를 미워하고 있다면 너 거듭나지 못한 것에 틀림이 없다. 사도가 그렇게 판단을 하는 거죠. 영생을 소유했다가 잊어버린다든지 구원을 받았다가 취소가 된다든지 하는게 아니라 네가 의지를 가지고 형제에게서 추함을 계속 발견하고 그리고 그것에 집착해서 의지적으로 형제를 거부하고 싫어하는 마음의 작용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면네 영혼이 거듭나지 않은 표다라고 말하는 거예요. 네가 아무리 교회 다니고 하나님을 섬기고 한 때는 은혜에 감격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바로 너의 영혼이 예수의 생명이 없는 증거다라고 논리적으로 설득하고 있는 것이에요.
(20:36) 무서운 이야기죠.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런 생각을 하게 될 거예요. 그러면 형제를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하는 것이 도리일 텐데 인간에게 그렇게 끝없는 아름다움이 존재하겠습니까? 이거죠. 존재 안 해요. 존재 안 한다니까요. 엊그제도 어느 형제 불러 형제들하고도 이야기를 했는데 시집 장가 갈 때 제일 먼저 보는게 얼굴이거든요. 얼굴. 그래서 일단 얼굴이 예쁘게 생긴 자매들은 그 뭐 이렇게 타의적 독신 그런 거 없어요. 예. 타의적 독신은 없. 응. 타이적 독 용모에 의한 타의적 독신이 선택이 안 돼. 예. 누군가가 하여튼 데리고 가는 거죠. 누군가가 제 동생도 한번 그런 얘기해야 돼요.
(21:37) 레스토랑을 경영하는데 여직원들을 뽑을 때 그래도 뭐 그 옥상에서 떨어진 거 같은 그 그런 여직원들을 뽑아서 그 음식 장사가 되겠어요? 얼굴도 예쁘고 그런 애 뽑아 놓잖아요. 그 오래 붙어 있지 못한데 어느 손님이 하여튼 데려가 안 되는 거지. 예. 그러니까 그래 용모에 의해서 타의적 독신을 강요당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 용모에 의해서 독신을 수행할 수 없는 사람도 많아. 예. 그렇게 그렇게 이 얼굴이 예쁜 사람들을 좋아해요. 그 유효 기간이 6개월이라니까. 6개월이 장가가고 나면 6개월 동안 정도는 뭐 그냥 아 우리 아내가 다른 사람보다 예쁘구나 그리고 우월감을 느낄 줄 몰라.
(22:29) 그리고 얼굴이 예쁘고 그리고 사랑스러우면 성적인 욕망도 더 많이 느끼잖아요. 그죠? 그게 그게 콸콸 나오는게 1년 6개월밖에 안 가. 그럼 그다음에 뭐냐면 이제는 용모를 가지고는 내 아내를 사랑할 수 없고 성적인 욕망만을 가지고 내 아내를 사랑할 수 없는 거. 그러면 그 사람에게서 계속 아름다운 것이 발견이 돼야 되는데 무궁무진하게 발견이 돼야 되거든. 그런 거 없어요. 그런 것이 만약에 우리에게 무궁무진하게 있다면 우리가 구원의 대상일 수가 있겠어요? 예. 한 때에는 그렇게 사랑하던 사람들도 어느 순간에는 다시 못 볼 인간인 것처럼 돌아서고 한 때는 그렇게 존경하던 사람도 쓰레기라고 침뱉고 돌아서는게 인간의 마음이에요.
(23:14) 그러면 그러면은 도대체 어떻게 계속해서 아름다움을 발견합니까? 이제 이게 오늘 설교의 핵심이에요. 다 들으세요. 그래서 우리가 사람에게서 발견하는 아름다움 가운데는 자연적인 아름다움이 있고 이 도덕적인 아름다움이 있어요.이 도덕적인 아름다움을 가르쳐서 우리들은 신령한 아름다움이라고 부르는 거예요. 자연적인 아름다움은 이런 거야. 얼굴이 예쁘다. 아니면은 또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얼굴이 예쁘다. 또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자연적인 죄송합니다. 제가 지금 필름이 끊겨서 그러는데 다시 하겠습니다. 인간의 아름다움에는 세 가지가 있어요. 왜냐하면 자연적인 아름다움과 도덕적인 아름다움과 신령한 아름다움이에요.
(24:09) 그러면이 사람이 얼굴이 예쁘다든지 남자라서 키가 훤칠하다든지 아니면 뭐 좋은 학교를 나왔다든지 학벌이 좋다든지 어 말 주변이 아주 좋다든지 이런 것들 뭐 돈 많은 집안에서 태어났다든지 뭐이 능력이 있다든지 이런 것들은 자연적인 아름다움이에요. 그것도 사람으로 하여금 사랑하게 만들죠. 두 번째 도덕적인 아름다움은 뭐냐면이 사람의 자연적인 성품과 관련된 아름다움이에요. 그래서 지금 사람이 무단해요. 그래서 자기가 뭐라고 딱딱거리고 막 신경질을 부리고 그래도 다 받아 줘. 어떤 사람 한 번만 뭐라고 떼떼 그러면 막 규팡맹이가 올라온다 이거야.
(24:53) 이러면 이제 이런 남자는 사랑하지 않게 되는 거죠. 근데 이제 많이없이 용서해 주고 뭐 너그러워. 어 아 뭐 그 그렇게 그 도덕적으로 그래. 그런 거면 또 착해. 그래서 진정 식구들 뭐 좀 도와달라 그래도 넘치도록 도와줘. 근데 짠도리를 만나면은 우리 쓸 것도 없는데 어떻게 너네 친정 도와주냐 그러면서 신경질을 낸다 이거죠. 그럼 그것도 아름답게 보이는 거죠. 그 사람이 이런 것들이 자연적인 아름 도덕적인 아름다움이에요. 그런데 문제는이 자연적인 아름다움이나 도덕적인 아름다움이나이 모든 것들은이 인간적인 이 원래의 자연적인 것에 기초하고 있는 거죠. 그래서 이런 것들은 항상 끝없는 것은 없어요.
(25:36) 끝이 없는 것은 없다고. 왜? 하나님 이외에는 무한이라고 하는 것이 없어요. 그러니까 그런 건 없는 거죠. 그러니까 내가 아주 깨끗한 마음이 되어서 있는 대로 아름다움을 다 발견한다고 하더라도 그 아름다움엔 끝이 있는 거고 내가 항상 그렇게 깨끗하고 아름다운 마음이 되어서 상대방을 보는게 아니라 내 마음도 그 아름다움이 보기 싫어지는 적이 있으니까 이것은 아주 빨리 아름다움에 대한이 관찰이 끝나고 그다음에 더 이상 그를 사랑할 수 없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세 번째 나오는 것이 뭐냐면 신령한 아름다움이야.이 신령한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형상의 아름다움이에요. 이거는 한없이 있는 거예요.
(26:23) 그리고 인간 안에 하나님께서 무한하게 인간 안에 있는 아름다움이 어떻게 무한할 수 있느냐? 그 인간 안에 계신 하나님 자신의 아름다움이기 때문에 무한한 거라 지금. 그래서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이게 사랑하게 사랑하게 되시는 거죠. 그러면 여러분들은 여러분 중에 그래도 이성적인 분들은 교리를 좀 공부한 분들은 이런 설교를 들으면서 모순을 직접 발견하게 될 거예요. 그러면 그런 아름다움이 인간 안에 영원히 있는 것이라면 왜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 어떤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영원히 심판하십니까라는 질문이 나올 수 있는 거죠. 그럼 그 아름다움이 사라져 버린 겁니까? 그거 아니죠.
(27:05)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들을 심판하십니까라고 하는 거죠. 그것은 뭐냐면 인간 안에 더러운 것과 아름다운 것이 공존하는데 하나님께서 일정한 기간 동안 그들이 최후의 심판에 이르지 않는 동안은 그들에게 더러운 것과 그리고 아름다운 것이 있는데 하나님이 아름다운 것을 계속 주목하시면서 그들을 사랑하시고 사랑하심으로써 그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시는 거죠. 그 죽은 후에 최후의 심판이 있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공정하게 모두 보시면서 그 죄에 대해서 심판을 내리시는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서 우리들은 시비할 수가 없는 것이죠.
(27:53) 그러니까 오늘이라고 일컫는 이 날에 우리는 모두 더럽게 타락한 존재가 되었지만 아직까지도 남아 있는 이 하나님의 아름다움 때문에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있고 그 사랑 안에서 회개할 기회 기회를 제공받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들이 감격을 해야 된다이 얘기죠. 그거예요. 그렇게 해서 답변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제 이 미움의 감정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그렇게 그 그런 아름다움 그런 신령한 종류의 아름다움이 우리에게 있는데 이것은 불멸하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고 특히 성도 성도에게 주신 이 성도 안에 있는 이 그 불멸의 아름다움은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로 씻겨진 아름다움이에요.
(28:46) 그러니까 불신자들 속에 있는 영혼의 아름다움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빛나는 아름다움이야. 불신자들 속에 있는 아름다움은 흙이 묻은 보석이라면 우리는 깨끗이 닦아서 생수를 씻어낸 아름다움이에요. 그 아름다움을 우리들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들이 사람을 끝까지 영원히 사랑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바로 그 자연적인 아름다움을 넘어서 도덕적인 아름다움을 초월해서 존재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피로 씻겨진 인간의 영혼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의 아름다움을 끊임없이 보고 그것 때문에 즐거워하고 하고 행복해하고 그래서 그것을 끊임없이 고착하려고 하는 이 마음의 작용을 유지해야 되는데 이것은 말하자면 의지적인 노력이 상당히 많이이 속에 들어가게 된다라고 하는 거 그래서 끌리는 것을 그냥 좋아하게 되는 그것은 욕망이지 사랑이 아니에요.
(29:50) 사랑은 이 안에 그 자체에 의지적인 성격을 깊이 내포하고 있는 거죠. 예. 그래서 사랑은 항상 의무를 생각하며 그것을 끊임없이 사랑하고자 하는 의지적인 결단 속에서 사랑이라는 불꽃이 보존이 되는 거죠. 보존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욕망을 따라 끌려가는 데는 자신의 의지가 필요가 거의 없지만 자신의 자발적인 선한 의지가 행사가 거의 소용이 안 되지만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이 선한 의지를 계속 발휘하는 끊임없는 의지적인 선택이 요구가 되는 거죠. 그렇게 되는 거죠. 그러면은 형제에게서 미움을 계속 그 형제를 계속 미워하는 것은 그에게서 계속해서 추함과 더러움을 발견하는 거거든요.
(30:43) 그것은 사실일 수 있어요. 사실일 수 있고 혹은 추함이 아주 작은데 미워하는 마음이기 때문에 그 추함을 아주 크게 생각하는 그런 경향이 있어요. 그렇죠? 그 그런 경향이 있어요. 그 그것 그것은 별개의 문제고 어쨌든지간에 더럽고 추한 것을 계속 발견하게 되는 거죠.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은 하나님을 내가 사랑하고 있을 때에는 하나님 안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있는 순간이기 때문에 그렇게 동질의 아름다움이 형제에게 있을 때 그 아름다움이 잘 발견이 돼요.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구별이 안 되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에요. 구분이 이거 그것이 동질의 것인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에요.
(31:41)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나를 사랑하는 자는 반드시 나를 사랑하는 자는 반드시 내게 속한 자들도 사랑하느니라 말씀하신 거죠. 똑같은 거죠. 그래서 나뉘어지지 않는 거죠. 그러면은 그러면은 한 사람이 어떤 형제를 집요하도록 계속 미워하고 있다라고 하면은 그는 형제 안에 있는 하나님의 아름다움, 그 신령한 아름다움을 더 이상 발견할 수 없는 사람이 된 거죠. 그러면 그 사람이 여태껏 좋아했던 것은 그의 외모나 자연적인 아름다움이나 도덕적인 아름다움 때문에 사랑했을 가능성이 아주 높게 되는 거죠. 이것이 바로 미움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이 영적인 배경이에요. 그러면 이제 보십시오.
(32:39) 어떤 사람에게서 어쩔 수 없이 계속해서 자기가 더러운 것을 발견해. 그래서 그 형제를 미워하게 돼. 그래서 미움의 감정이 생겨나. 그러면 그것을 왜 예수님께서 살인이라고 말씀하셨을까? 그거죠. 자, 여기에 꽃이 있습니다.이 꽃은 보니까 아름다워요. 아름다움과 이 꽃은 지금 하나가 되어 있는 거죠. 근데 누군가가 이 꽃을 치워 버렸어요. 그러면 꽃은 사라졌으나 꽃의 아름다움은 빈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도 이 꽃과 함께 사라진 거죠. 그렇죠? 자,이 컵에 아주 더러운 오물이 둥둥둥 떠서 도저히 물을 먹을 수가 없어요. 그때에 이 컵은 더러운 거죠. 더러움을 가지고 있는 거죠.
(33:33) 그러면 이 컵을 치워 버리면 컵은 치워 버리는데 더러운 건 여기 그대로 남아 있느냐 하면 그것이 아니죠. 우리의 기억 속에 더러움에 대한 인상이 남아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기억일 뿐이고 실제의 더러운 컵이 치워지는 것과 함께 더러움도 사라지게 되는 거죠. 그러면 이제 이렇게 있는데 이 컵을 이 컵을 사랑하는게 아니라 이 컵은 그냥 여기에 담겨 있는 물을 내 몸에 섭취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에요. 그러니까 여기에 더러움이 묻어 있으면 더러움을 여기서 구별해 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존재 자체를 없애 버림으로 더러움을 처분하려고 하는 거죠. 그런데 그런데 만약에 만약에 만약에 생각해 봅시다.
(34:30) 만약에 만약에 이 컵이 굉장히 비싼 돈을 주고 금으로 만든 컵인데 이게 내가 가지고 있는 재산 중에서 제일 큰 돈이에요. 그래서 이게 2,800만 원짜리 컵이야. 금컵이야. 근데 여기에 물이 담겼어요. 근데 이렇게 보니까 컵 밑에 오물이 묻어 있는 거예요. 물을 따라 버려도 여전히 컵에 오물이 남아 있어요. 더러움이 이 존재에 부착되어 있는 거죠. 그러면이 컵을 폐기 처분해 버리고 갖다 버리면 그러면 더러움도 함께 사라지잖아요. 근데 이 컵이 귀하다고 생각되면 그렇게 안 해. 어떻게 해야든지 수세미를 가지고 그 더러운 걸 닦아내서 이 존재는 존재는 계속 유지하고 존재의 더러움만을 여기에서 빼내려고 하지 더러움 때문에 이 존재를 폐기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거죠.
(35:27) 이런 이야기를 우리들이 일상 속에서 뭐라고 표현하냐면은 야 목욕물이 더럽다고 애까지 버리란 말이냐? 그 우리들 그렇게 얘기하는 거. 애 애 녀석을 갖다 놓고 막 씻더니 얼마나 목욕을 안 했는지 어린 애가 때가 막 둥둥 뜨는 거야. 더러워서 볼 수가 없어. 같이 갔다가 하수도에다 버리냐 이거죠. 예. 그 그 사랑하는 자식인데 그렇게 할 수 없잖아요. 똑같이 그렇게 되는 거죠. 그런데 그 형제에게서 계속 미움을 발견하게 되는데 사실은 신령한 눈을 가지고 보면 그 사람 안에 있는 아름다움이 더 본질적이고 영원한 거예요. 그러면 그것을 바라보면서 사랑하게 되면 이 존재를 치워 버리고 싶은게 아니라 이 존재와 붙어 있는 나로 하여금 자꾸 더럽게 느껴지게 만드는 그것만을 떼어 버릴 수 없을까라고 고민을 하게 만드는 거죠.
(36:21) 그게 바로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형제 교정의 동기가 되는 거죠. 형제 교정은 형제를 목쳐서 내보내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내버려 두고 고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의 몸에는 손상이 없고 예수의 몸에 해가 되는 것들을 떼어내게 하는 것이 이게 형제 교정이라 이거죠. 그러면 미움이라는 감정은 뭐냐? 바로 형제에게 붙어 있는 더러움. 그것은 착각일 수도 있고 진실일 수도 있고 그건 아무래도 상관이 없어요. 어쨌든 형제에게서 발견되는 더러움과 추함 때문에 이 존재 자체가 사라져 줬으면 하고 하는 원하는 감정이 미움의 감정이에요. 그러니까 자기로 하여금 혐오하게 만드는 그 대상이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는 감정이 미움의 감정이에요.
(37:12) 근데 여전히 존재해요. 사람이 여전히 존재해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방법은 죽는 방법밖에 없어요. 그러면 그 죽는 것이 다른 사람에 의해서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나에 의해서 선택하는 감정이 살인의 감정이라 요즘. 그래서 다른 사람이 존재하는 것이 싫을 때 나타나는 감정은 살인의 감정이고 내가 존재하고 있으나 그것이 싫기 때문에 비존재를 택하고자 하는 것이 자살의 감정이라 이거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미움의 감정을 절대 과장이 없이 그 정체를 보여 주는데 그것이 바로 살인의 감정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이 이렇게 사람을 미워하게 되면 미워하는 자의 영혼에 아주 즉각적인 파괴 현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거예요.
(38:06) 그러면 어떻게 나타나게 되는지를 이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선 말이죠. 이 미워하는 자의 영혼. 음. 이 미워하는 자의 영혼은 이제 어떻게 되냐면 첫째는 말이죠. 하나님의 의지를 거부하는 거예요. 이것은 무슨 의지냐면 존재하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의지를 거부하는 거예요. 제가 몇 가지 질문을 할테니까 여러분들이 한번 대답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 대답, 정답을 가르쳐 줄게요. 그럼 하나님이라고만 대답을 하면 돼요. 세상을 누가 창조하셨어요? 하나님. 교회를 여기에 누가 세우셨죠? 예. 그러면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창조하신 분은 누구예요? 여러분들을 예수 믿게 하신 분은 누구죠? 이 세상에 수많은 교회가 있는데 여기에 이렇게 모이게 하신 분은 누구예요? 내가 끊임없이 지체들에게 상처를 주고 고통을 주는데도 내가 떠나지 못하고 여기 있는 건 누구 때문이에요? 하나님 때문이죠. 그 이렇게 해서 내
(39:10) 나뿐만 아니라 내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의 질서들이 하나님이 주셔서 내게 있게 하신 것들이에요. 모든 선한 것들은 하나님이 내게 주셔서 있게 하신 것들이에요. 악도 하나님의 큰 허용의 작정 속에서 우리에게 존재하게 된 거죠. 그러면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이 주셔서 내게 있게 하셨어요. 가족도 마찬가지로 내가 왜 이 집안에 태어났을까? 그 100번 얘기해야 소용 없어요. 그거는 실존 철학자들의 말처럼 자기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에 의해서 던져진 거예요. 그래서 그렇게 해서 이 존재하게 된 거죠. 그래 가족들도 그렇게 해서 존재하게 된 거예요. 이거는 하나님께서 그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하셔서 우리를 거기에 던져 두신 거예요. 거기에 두신 거예요.
(40:05) 그러면 교회는 더더욱 그렇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냥 교회에 모인게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고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고 예수께 접붙여줬어요. 그래서 각자는 믿음이 있던 없던 적든 그것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뜻한 바가 계셔서 그 많은 교회 중에 여기에 나와 함께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져서 여기에 있는 거죠. 그러면 그 그런데 그런데 그 사람이 거기에 존재하는 것이 싫다라는 감정이 미움의 감정이에요. 그럼 어떡하죠? 그 사람이 존재하는 것이 싫으면 둘 중에 하나죠. 그 사람의 존재가 사라지든지 나의 존재가 사라지든지 둘 중에 하나고 그런 극단적인 것을 택하는 것이 힘들 경우엔 어떡하죠? 서로 부딪히지 않는 길을 선택하게 되는 거죠. 그게 바로 이별이에요.
(41:00) 헤어지는 거죠. 회피하는 거죠. 그거예요. 그러면 결국은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와 함께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도록 그래서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 가도록 주신 그 형제가 밉다면 그렇게 그 사람을 내 옆에 존재하게 하신 하나님 자신의 의지에 대한 거부라 얘기예요. 그러면 자 이 거부은 의지적인 불순종이거든요. 그러면 하나님의 의지를 거부해요. 하나님의 의지를 거부하는 그 순간에 즉시 영혼은 더럽혀지기 시작하는 거죠.
증거를 대겠습니다. 베드로전서에서 베드로 사도가 이런 고백을 합니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의 (42:07) 영혼이 깨끗하게 되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이성적으로 다 몰라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고 순종하는 그 순간 우리의 영혼은 깨끗해지기 시작한다 이거죠. 그러면 반대로 하나님의 명백한 의지를 거절하게 되면 우리의 영혼은 즉각적으로 지성은 어두워지고 우리의 영혼 전체는 더러워지기 시작하는 거죠.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영혼히 깨끗게 되어 반대말로 뒤집으면 어떻게 되죠? 너희가 진리를 불순종함으로 너희가 진리를 거역함으로 너희의 영혼이 더럽게 되어라고 바꿀 수 있잖아요. 그렇게 되는 거죠. 그러면 그렇게 그렇게 하나님의 의지를 거부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은총의 빛 아래 살 수 있겠느냐.
(43:07) 예. 그것은 마치 해를 등지고 있으면서도 그림자를 원하지 않는 것과 똑같으다. 모든 하나님과의 화목 그 은총의 빛 아래 살아가는 자유의 삶은 하나님의 의지에 대한 복종에서 시작이 되는 거죠. 잘 몰라도 잘 몰라도 일단 복종하면 자유가 주어지게 되는 거예. 두 번째는 뭐냐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거부하는 거죠. 왜냐하면 어떤 신자 속에도 어떤 신자 속에도 그 안에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있어요. 이게 신령한 아름다움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셔요. 그가 여전히 결정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셔요. 심지어는 깊은 침륜에 빠져서 타락을 했는데도 하나님이 그를 변함없이 사랑하셔.
(44:11) 그런데 하나님보다 훨씬 부도덕하고 비교될 수 없이 더러운 죄인인 그 인간이 그 사람을 그 사람 안에 있는 아름다움을 거절하고 그의 추함을 붙들고 그를 비난하고 미워하고 그리고 그를 그의 평판을 깎아내리고 비난하는 거죠. 그러면 그것은 즉각적으로 두 가지 문제를 내포하게 되는데 우선 첫째는 자신을 자신의 판단과 하나님의 판단이 충돌을 하는 거죠. 하나님은 이 사람이 아직까지 아름답다 사랑스럽다라고 판단하시는데 자기는 싫다, 밉다라고 판단하는 거죠. 그러니까 형제를 미워하는이 의지의 끊임없는 선택은 하나님께 대한 지속적인 반항 없이는 불가능한 거예요. 다시 말씀드릴게요. 하나님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판단과 충돌를 (45:14) 일으킨다 이거죠. 하나님은 나는이 사람이 사랑스럽다라고 말씀하시는데 자기는이 사람이 밉다라고 말하는 거죠. 그럼 하나님의 판단과 충돌을 일으키는 거죠. 그러면 한 사람이 어떤 사람을 지속적으로 계속 미워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그 판단을 지속적으로 거부해야 돼요. 그래서 하나님 보고 당신은 틀렸다고 계속 외쳐야지만 이 미워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얘깁니다. 그러면 그렇게 하나님을 향한이 끊임없는 거절의 감정이 시간이 지나면서 이 사람 영혼 자신을 엄청나게 파괴하는 거죠. 또 하나의 문제는 뭐냐면은 하나님은이 사람에게서 아름다움을 계속 발견하실 수 있는데 이 사람은 그 아름다움을 발견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모순이에요.
(46:13) 그럼 무슨 뜻이냐면 하나님은 계속해서이 사람이 아름답다고 말씀하시는데 자신은 그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가 없어요. 그러면 그러면 결국 어떻게 되냐면 어떤 존재하는 사물에 대해서 있다 없다를 판단할 때 하나님의 판단이 정확하겠는가? 사람의 판단이 정확하겠는가? 대답해 보세요. 그 하나님의 판단이 정확한 거죠. 그러면 무슨 자신의 판단은 틀린 거야. 근데 오류가 있는 판단을 가지고 진실한 하나님의 판단을 끊임없이 꺾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의지적인 지속적인 불순종이 없이는 누군가를 이렇게 집요하게 미워할 수가 없는 거예요. 미워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렇게 돼서 결국은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냐면은 세 번째로 영혼의 파괴 현상이 일어나게 되는 거예.
(47:11) 그러면 영혼이 파괴된다는게 뭡니까? 무슨 영혼이 폭탄입니까? 그게 아니라 잘 들어 보세요. 이거 파괴는 기능의 파괴를 의미하는 거예요. 기능의 파괴. 자, 예를들을테니까 여러분 잘 들어 보세요. 어. 어떤 어떤 예를 들으면 여러분들이 이해를 잘 그 잘할 수 있을까? 지금 제가 생각을 하는데 자, 뭐 이런 예를 한번 들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자, 여기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기능을 가지고 있죠. 그래서 수천 장의 종이로 되어 있고 이렇게 한 장씩 원하는 대로 손으로 넘기면 이렇게 넘겨져야 돼요. 이렇게 잘 넘겨질 때 이것이 책으로서의 기능을 잘 발휘하고 있는 거예요.
(48:09) 근데 오랫동안 덮어 놓고 관리를 잘못했어요. 그랬더니 이번에 이게 습기가 스며들면서 곰팡이가 먹고 책이 막 달라붙어 버렸어요. 그래서 이제 이렇게 해서 한 장을 이렇게 넘기려 그랬더니 아까처럼 이 밑에 장이 따라오는데 딱 달라붙은 거예요. 그래서 한 장씩 넘기려고 이걸 이렇게 했더니 주주죽 그리고 뜯어지는 거예요. 근데 이 모든 페이지가 그렇게 돼 버린 거죠. 그러 뭐냐면 책으로서의 기능이 파괴되었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죠. 그러면 영혼이 파괴된다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면 영혼은 영혼 나름대로의 기능을 가지고 있는 거죠. 이런 종은 이렇게 치면은 소리가 나는 기능을 가지고 있고 이 시계는이 자신 안에 있는 에너지를 이용해서 이렇게 일정하게 초침과 시침이 돌아가는 기능을 가지고 있는 거죠.
(49:02) 전기는 동력을 공급하면 이렇게 빛을 비추는 기능을 가지고 있는 거죠. 이런 모든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이 기능들을 잃어버리는 것을 가르쳐서 기능이 파괴된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죠. 이 기능은 경향성적인 기능이에요. 경향성적인 기능이라고 하는 것은 그 자체 안에 어떻게 작동하려고 하는 일관된 성질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기능성, 경향성이에요. 이런 것들이 파괴가 되는 거죠. 파괴가 되면은 이거는 종인데 울릴 수가 없고 전구는 켜져 있지만은 빛이 비치지를 않는 거죠. 그래서 안경은 있지만은 기능이 파괴되고 나면 이 그 돋보기나 혹은 졸보기의 구실을 제대로 못 하게 되는 거죠.
(49:49) 그럼 영혼의 기능이 파괴되면 가장 심각한 현상은 뭐냐면 영혼으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못 하게 되는 거죠. 영혼의 기능은 무엇입니까? 영혼의 기능은 육체의 사령탑이 되어서 이 육체를 어떻게 사용해서 창조의 목적에 합당하게끔이 육체를 살아가게 할까? 아래로는 그것이 영혼의 역할이고 또 한편으로는 위에 계신 하나님을 우리의 육체로는 하나님을 감각할 수 없잖아요. 아, 눈으로 하나님을 볼 수 없잖아요. 이게 눈으로 그러면 눈 본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볼 수가 없게요. 그러니까 눈으로 신령한 것을 보는 것이 아니고 영혼으로 아름다움으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아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영혼의 눈으로 죄의 추함을 봐서 죄를 미워하고 그래서 영혼 그 자체가 위로는 하나님을 섬기고 아래로는 우리의 육신을 이끌고 예수께서 사셨던 삶을 살아가게 하는
(50:52) 등불과 사령탑의 역할을 하는 것이 영혼의 기능이에요. 근데 이 영혼의 기능이 파괴된다 얘기예요. 하게 되면 이 일들을 제대로 못 하게 되는 거라 이거죠. 그래서 육신은 그대로 살아 있고 침체에 빠져서 더 많이 먹고 살이쪄서 육신은 더 튼튼해지고 헬스클럽 열신히 날려서 날씬는 됐는데이 육체를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는 거야. 그리고 이 육체를 어떻게 통제하고 조절해서 창조의 목적대로 살아가서 내 인생을 행복하게 할 수 있을지에 대한 통제력 통제할 수 있는이 기능을 이 영혼 자체가 상실해 버리는게 그게 영혼의 파괴라 이거죠. 영혼이 침체 속에 들어갔을 때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거죠.
(51:38) 그 길로 가면 안 되는데 계속 그 길로 가는 거죠. 그 파멸이 기다리고 있는데도 죽어라 하고 그 길로 가는 거야. 그래서 죽음의 방불한 고통을 경험할 때까지 바보같이 그 어리석은 길로 계속해서 걸어가는 겁니다. 그래서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행복이 지혜라고 하는 것을 말씀드린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고 기독교라고 하는 것은 바로 그런 지혜를 찾아가는 것 그 지혜로 우리를 인도해 주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라. 음. 그럼 박의 현상들이 나타나게 되는 근데 이제 문제는 뭐냐면은 이미 미움이 자신 속에 이렇게 들어와서 이렇게 영혼 자체를 다 파괴해서 그래서 비참하게 만들거든요. 인간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무슨 아름다움이라고 여러분들에게 정의를 했습니까? 인간 존재의 아름다움이라는게 무슨 아름다움이었어요? 영혼의 아름다움이야.
(52:39) 왜냐면 오늘 꽃처럼 예쁘다고 그 용모를 자랑하고 수많은 뭇 남성들로부터 프로포즈를 받는 여성도 10년이 지나면 그 안에서 더 이상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이거죠. 20년 30년을 지나고 난 뒤에도 그 육체를 보고 아름답다 그러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거. 예. 왜냐면 이 육체 자체는 지금은 존재하고 있지만 점점 사멸되어 가는 거예요. 사라져 가는 것들은 영원한 아름다움을 간직할 수가 없는 거죠. 왜? 아름답다고 하더라도 존재가 사라지면 아름다움도 함께 사라진다고 말씀을 드렸잖아요. 그러면 사멸할 것들 속에 남아 있는 아름다움은 한시적인 아름다움이에요.
(53:21) 한시적인 아름다움을 영원히 사랑하면 잘 들으세요. 한시적인 아름다움인데 그것을 영원히 사랑하게 되면 언젠가는 없는 것을 사랑하게 되잖아. 그 이게 허위지. 허위. 조금만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우리가 세상을 사랑할 수가 없는 거죠. 예. 이곳이 아름다워. 그렇지만 그래서 사랑해. 그러나 일시적인 사랑이지 영원한 사랑일 수 없어. 왜일까? 일주일만 지나면이 존재가 사라지기 때문에 아름다움도 사라져. 그런데도 계속 사랑해. 그럼 헛것을 사랑하는 거죠. 없는 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게 악이에요. 그 우리가 자기를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허무한 이유가 바로 그거든요. 내가 나를 사랑해.
(54:01) 근데 나라는 존재도 공간 속에서 주어지고 시간 속에서 사라지는 존재야. 그래서 점점 점점 점점 점점 사멸하는 거예요. 소멸되어 가고 있는 거예요. 저를 보세요. 교회 개척했을 때에는 그래도 팽팽한 젊은이었어요. 근데 죽음의 기운이 점점 나 자신을 삼키고 있잖아요. 월요일 날 새벽기도 안 나오는 목회자는 나 인간이라고 생각도 안 했어요. 못 나오잖아요. 나올 순 있는데 화요일, 수요일이 방해를 받아요. 그래서 슬퍼요. 수시로 죽음의 그림자가 스며 들어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예. 그렇게 공간 속에서 주어졌지만 시간 속에서 나라는 존재가 사멸되어져.
(54:48) 근데 나를 사랑해. 그러면 뭐냐면 나에게서 아름다움을 발견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사라져 가는 아름다움이에. 그 사실일 리가 없죠. 육욕적인 아름다움이죠. 사라져가. 그 결국은 어떤 일이 일어나냐면 자기를 사랑하게 되면 마지막에 자기에게 배신을 당하는 난 사랑했는데 나 자신이 공간 속에서 주어져서 시간 속에서 사멸하는 거예요. 공간은 우리에게 사랑할 대상을 제시해 주지만 시간은 우리에게서 그것을 아삭아가 그리고는 모든 것이 사라지고 마지막에는 아무것도 없는 비존재로 돌아가는 거죠. 근데 영원한 사랑 영원히 그걸 사랑해. 영원이 있는 것처럼 사랑해.
(55:30) 그게 허위죠. 거짓이 되는 거죠. 그게 바로 하나님이 우리 보고 너 자신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신하지 않은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에요. 오직 하나님과 그리고 이웃 이웃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사랑하는 거예요. 그게 사랑하는 그런데 그렇게 인간 인간 존재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결국은 영혼의 아름다움이거든요. 그 영혼의 아름다움, 인간 존재의 아름다움이 그러니까 이 사도 바울도 얘기했죠. 겉사람은 날마다 후패하나 날로 후패하나 속 사람은 날로 새롭도다. 이거 그게 인간 존재의 아름다움이라 이거죠.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내가 이렇게 육신적으로 늙어가서 나를 후지게 보고 아주 평가 저라하고 나를 아주 우습게 여긴다는 그 인간이 지금 그 진짜 아름다움을 못 보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하니까 오히려 내가 불쌍한게 아니라 그렇게 거짓된 표상에 속으면서 살아가고 있는 비참한 그 인간이 너무나 불쌍한 거예요. 이게 바로 영적인
(56:33) 사랑이에요. 그리고 긍휼히 여기는 거죠. 그래서 그런데 인간 존재의 아름다움이 이 영혼의 아름다움이에요.이 아름다운 영혼 안에서 인간의 지성이 아름답고 인간의 총명이 빛나서 아름답고 인간이 의지적으로는 선한 의지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복종하는 아주 아름다운 존재가 되는 거죠. 그런 영혼으로 위로는 하나님을 섬기고 아래로는 자기 자신의 육체를 어해서 그리고 수평적으로는이 세상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행복이에요. 이게 인간의 돌이에요.이 일을 위해서 우리들이 그렇게 지요하게 성경을 공부하고 자기 깨어짐의 삶을 사는 거야.
(57:20) 그런데 그런 위로 수평으로 아래로 이 모든 것의 중심부에 있는게 뭐예요? 우리의 영혼이에요. 근데 이 영혼이 침체에 들고 형제를 미워함으로 다 파괴가 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멍청이 같은 인간들이 누구 때문에 미워하게 되었는데 그걸 따지는 거예요. 그걸 따지는 거야. 그걸 따지 그걸 따져서 그 뭐 하겠어요? 지금 자신의 영혼은 다 파괴됐는데 그래 가지고 그냥 피가 터지게 싸우면서 결국은 법정까지 가. 그래서 결국은 누가 옳다는 것이 판명이 됐어요. 그 누가이긴 거예요? 왜 이미 진짜 그 사람을 미워한 사람 미워하게 한 사람도 영혼이 다 파괴됐고 미워한 사람도 영원히 다 파괴되었는데 법정에서 네가 옳다라고 손을 들어줬는데 그 순간에 하늘이 열리고 빛이 쏟아지냐 이거예요.
(58:13) 그 상상하면 미친 상상이지. 예. 예. 그래서 사도 바울이 세상 법정으로 들고 나가는 사람들에 대해서 뭐라고 얘기했어요?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 그러면 차라리 너희의 아름 영혼의 아름다움이 파괴되지 않지 않겠느냐? 얘기하는 거죠. 예. 그러니까 그렇게 미워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자기가 피해자인 것처럼 둔갑이 되어서 그래서 그 형제의 무엇 때문에 내가 미워할 수밖에 없게 됐는데 그 자기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그 형제를 집요하게 미워하는 거야. 근데 기억하세요. 그 사람이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있는 동안에는 사랑하고 있는 동안에는 형제에게서 더러움이 발견되어도 그 형제에 있는 아름다움을 더 먼저 보게 돼요.
(59:04) 우리 그런 얘기 있죠. 재수 없는 죄수들은 재판을 받는 그날이 판사가 부부싸움하고 온 날이래요. 그럼 뭐 판사가 벌써 이게 뿔이 나 가지고 온 거야. 아주 인생 살기도 싫고 하여튼 뭐 인간들이 비기도 싫어. 부인이 나고 대판거리 싸우고 그러고 왔어. 근데 어떤 여자가 재판받아 온 거야. 여자 이 똑같은 인간이야. 사형 그래 탕탕 내 아마 1년만 해도 될 텐데 3년 그리고 빵땅 때려 버리는 그런 거죠. 예. 그리고 마음이 좋을 때는 저 좀 용서해 주세요. 그러면 정상이 참작되는데 이게 잘못한 건 뉘우치진 않고 용서만 해 달라 그래. 3년 아니야. 4년이 탁탁 내려. 예. 그런 거죠.
(59:50) 집에서 아주 굉장히 좋은 일이 일어났어요. 부인이 막 그 맛있는 아침도 채려주고 뭐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뭐 선물도 주고 뭐 굉장히 좋은 일들이 일어났어요. 그럼 사람들이 다 여자가 나타난 거 아 그 저 아 오죽했으면 저렇게 가정에 어려움이 있었을까? 그리고 무죄 탕탁탕 때리 아니 이게 이것도 인간이 인간이 그런 거 아니야. 이게 그렇잖아요. 그런데 똑같이 한번 대입을 해 보라 이거죠. 그거 그래도 그거는 사실 영혼히 파괴되고 살아나고 그 정도는 아니잖아. 근데 이거는 신자가 누군가를 미워하게 되면 영혼이 파괴된 거죠. 그러면 아름다운 거는 못 보게 되는 건 너무 당연하잖아요.
(1:00:29) 근데 마음이 지금 이 사람이 형제가 자신에게 심하게 잘못했어. 그래서 자기의 추함을 보였어. 그래서 내가 미워할 수밖에 없는 원인을 제공했다고 하더라도 내가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고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면서 끊임없이 하나님을 사랑해. 그럼 형제가 자기를 모욕하거나 비난을 해도 그의 결점도 보이지만 그 아름다운 점이 더 많이 보이는 거예요. 왜? 그게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래서 사랑을 하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그게 더러운 것은 참 싫은데 형제는 너무 소중하니까 어떠한지 닦아서 쓰고 싶어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미워하게 안 되는 거죠. 그게 바로 까리따스의 사랑 안에 있는 죄의 객관화 현상이에요.
(1:01:17) 그렇게 해서 사랑하게 되는 거죠. 사랑하게 되는 그렇게 되는 거죠. 그러면 이제 이것이 그러니까 이미 한 형제가 아주 명백하게 잘못해서 자신에게 모욕을 주거나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 형제를 미워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미워하게 되어서 그래서 영혼이 계속 파괴되는 상태까지 들어가기 전에 이미 형제를 그렇게 쉽게 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최소한 싫증난 영혼의 상태에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는 거라. 이게 싫증난 영혼의 상태에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는 거예. 바로 그거예요. 바로 그거예요. 미움은 불과 같아요. 그래서 태울 수 있는 모든 것을 태워요. 정욕과 똑같아요.
(1:02:14) 불 붙지 않는 거는 못 하지만 불 붙는 거는 모두 태워요. 그게 미움이에요. 그러면서 자신의 영혼이 그렇게 추루하게 변해 가는 거예요. 이때에 누가 그 원인을 먼저 제공했는지 하는 것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판단에서 보면 그렇게 중요한게 아니에요. 왜냐면 원인을 이 형제가 제공했다고 하더라도 지금 네가이 형제를 미워하고 있는 피해자라고 할지라도 네가 나를 사랑하고 영혼의 싫증이 없었더라면 그걸 충분히 이길 수 있었을 텐데 이미 하나님께 싫증이 난 거야. 근데 형제의 결함을 보는 거죠. 죽어라고 미워하다가 그다음에 살인의 감정까지 품게 되는 거죠. 이것이 바로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 그 안에는 영생이 없다라고 단어하는 이유라 이거죠.
(1:03:04) 그러면 이제 이런 것이 공동생활 속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 공동생활과 미움의 관계로 들어가서 좀 더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공동생활과 일치의 문제예요. 자, 한번 보십시오. 우리의 몸이 있는데 우리의 몸을 향한 우리의 소원은 무엇이겠어요? 우리의 몸을 향한 우리의 소원은 우리가 우리의 몸의 소원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은 우리의 뇌가 지시하는 대로 온 몸을 움직일 수 있어야 된다고 저는 생각을 해요. 이것이 우리의 몸을 향해 우리들이 원하는 바예요. 그런데 우리가 불행히도 요번에도 전 그런 경고를 받았습니다만은 이게 작년에 병원에 가서 이 그 건강 검진을 해 보니까 뒤에 올라가는이 그 경동맥이 있는데 5년 전에는 안 그랬는데 5년 만에 검사를 해 보니까 핏줄이 100이라면 31%가 막혔다는
(1:04:10) 거죠. 그러면서 뭐냐면 이런 사람들에게 중풍이 잘 일어나니까 조심하라 이 그러면서 아스피린을 계속 먹고 그 혈액에 낀 노폐물은 이미 낀 거는 어쩔 수 없지만 더 이상 끼지 않도록 뭐 커피도 마시지 말고 뭐 뭐도 먹지 말고 그리고 다 그렇게 그 의사가 소상하게 설명을 해요. 그러면 예를 들면은 그렇게 해서 중풍이 온다고 칩시다. 그 탕하고 풍이 와요. 그럼 어떻게 반신불수가 되겠죠? 그래서 이렇게 설교할 수가 없을 거예요. 이쪽에 감각이 마비가 되니까 손도 움직일 수 없고 발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어서 남들의 부축을 받으면서 외다리로 걸어야 되는 상황이 발생하게 돼요.
(1:04:48) 이게 인간의 육체적인 불행이에요. 왜냐면 그렇게 해 가지고는 당장 설교를 못 할 거 아니야. 그다음에 글도 못 쓸 거 아니야. 입이라도 살아 있어야지만 불러주면 다른 사람이 베겼을 텐데 말도 못 해서 이 발음이 밖으로 샌다고 쳐 보세요. 그 어떻게 될까? 요새 매일 그런 생각을 해요. 근데도 커피는 계속 먹고 싶어요. 이게 이게 타락한 인간이에요, 이게. 예. 그래서 이 대수 이틀에 한 잔만 먹으려고 지금 그러는데 그 왜 그럼 딱 끊냐 그런 거 묻지 말라 이거.지 나도 죄인이다 이거지. 그래서 이제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은 교회를 한번 보자. 교회의 교회는 어쨌든 그리스도 예수의 몸이니까 아름다워요.
(1:05:36) 더 아름다우려면 어떻게 돼? 이 이 몸의 지체들이 모두 하나로 합쳐져서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시는 대로 달려가고 그다음에 걸어가고 무릎을 꿇고 섬기고 일어나서 섬기고 허리를 구풀려서 봉사하고 그다음에 눈을 들어서 위를 쳐다보고 이럴 수 있는 기능을 그리스도 머리신 그리스도께서 생각하시는 대로 자유자재로 행할 수 있을 때 그때에 그것이 정말 아름다운 상태가 되잖아요. 온전한 탁월함을 가진 상태가 되는 거 아니에요. 그죠? 음. 근데 그렇게 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되냐면은 일치를 이루어야 돼요. 그래서 교회가 온전한 일치를 이루기 위해선 자기 사랑을 꺾고 그리고 형제를 누구도 미워하지 않고 예수의 사랑에 합치되어서 그 사랑 안에서 일치를 이루어야 돼.
(1:06:36) 그래서 예수님이 좋으신 것이 우리 모든 교회의 지체들이 다 좋고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이 우리 모두 원하는 것이고 예수님이 싫은 것이 우리 모두 미워하는 것이에요. 그 예수님이 하기 싫은 거는 우리도 하기 싫어요. 한마디로 얘기해서 교회가 그 마음속에 공동체가 예수의 심장을 품은 공동체가 되는 거죠. 그렇게 해서 완전한 일치를 이루는 것이 이상이에요. 근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죠. 지상에 있는 교회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거예요. 그러면 왜 성경에서 끊임없이 일치를 이루라 마음을 한 마음을 가지고 서로 뜻을 합고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게 바로 프로그램적인 명령이에요.
(1:07:21) 그쪽으로 가라고 지시해 주시는 방향적인 명령이라 이거죠. 절대 완벽한 일치는 하늘나라에선 가능하지만 이 세상에선 가능하지 않아요. 그러면 그럼 그러면 우리의 목표는 뭐냐?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현실적으로는 하나가 될 수 없는데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그렇게 끊임없이 되고자 하는 것 이것이 교회의 이상이에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닮을 수 있어요? 없어요?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와 같아질 수 있어요? 없어요? 지상에서 그러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 예수를 담고자 하는 것은 가능해요? 안 안해요? 그건 가능하잖아요. 도달하지 못하지만 그쪽 방향으로 계속 감으로써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신자가 될 수 있는 거죠.
(1:08:08) 그걸 놓치고 나면 그다음에는 도달할 수 없는 거죠. 밤중에 지금처럼 내비게이션이나 나침반이 없었던 시대에는 별을 보고 항해를 했잖아요. 북두칠성을 향하여 노를 저어가. 그 북두칠성에 도달할 수 있어요? 없어요? 그 목표는 북두칠성에 도달하는게 아니라 그 길을 따라서 가다가 보면은 원하는 항로를 찾아가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온전해질 수는 없어요. 그러나 온전해지고자 하고 그쪽으로 갈 때에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하신 그 올바른 길을 따라갈 수 있는 거죠. 예수님의 형상은 북도체성과 같은 우리 도달할 수 없어요. 누구도 나는 이제 예수를 완전히 빼았다.
(1:08:49) 이렇게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은 정신병자가 되기 전까지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에요. 그렇게 가는 거죠. 바로 그거예요. 그러면은 그러면 우리가 그러면 어떻게 생각해야 되냐? 이렇게 교회는이 세상은 한 사람이 각자 자기 사랑의 깃발을 하나씩 세우는 거야. 그리고 힘을 모아서 뒤에 있는 사람을 그냥 복종시키고 굴복시켜서 돈이나 권력을 가지고 내 사랑의 질서 안에 들어와라. 내가 좋아하는 거는 너도 좋아하는 것처럼 섬기고 내가 싫어하는 건 너도 미워해야 된다. 그고 강요를 하는 거야. 그 안 하면은 이제 끊어내는 거예요. 권력을 가지고 보복을 하거나 심지어는 생명을 빼앗거나 이런 식으로 하는 거죠.
(1:09:30) 그런데 교회에도 우리는 부패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 자기 깃발을 세우려고 해. 근데 회심한 사람들이야. 그래서 이 깃발을 다 꺾고 십자가의 깃발 아래 모였던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회개해서 예수의 사랑으로 통합됐어. 그런데 문제 뭐냐면 모든 사람이 그렇게 그렇게 하나님을 현재적으로 사랑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은 지금 울며 회개하면서 자기 사랑의 깃발을 꺾고 예수께 예수의 십자가를 향해 올라가고 있는데 어떤 인간들은 침체에 빠져서 내려오는 거예요. 깃발 들고 그리고 다시 꼽으러 가는 거예요. 그거를 꼽았기 때문에 살았기 때문에 만신창의가 되어서 피투성이가 되어서 눈물을 며개하고 돌아오는 형제들을 보면서도 그게 눈에 안 들어와.
(1:10:18) 그리고 예수께 붙어 있는 것이 싫어서 그래서 자기 깃발을 다시 들고 자기 자기 깃발을 꽂으러 다시 내려가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회개하고 돌아왔던 그 자리로 다시 돌아가는 거죠. 교회에는 이런 인간들이 언제나 있게 마련해요. 그 이런 인간들도 버리지 말고 사랑해야 되는 것이 교회라. 응. 사랑해야 되는 것이 교회라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되 성령 충만할 때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침체에 빠졌을 때 심지어는 하나님께 죄를 지을 때조차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은 사랑을 교회는 똑같은 사랑을 가지고가 계신 분이 예수님이시니까 그 예수님의 마음을 최대한 구현하는 교회가 이게 아름다운 교회예요.
(1:11:12) 그래서 교회의 아름다움은 의인의 숫자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에요. 교회의 아름다움은 얼마나 그 예수의 마음을 지체들이 같이 품고 살아가는 거예요. 그런 교회이면 많은 인간들이 깃발을 버리고 자기 깃발 꼽기 위해서 내려오고 있어도 그 교회는 아름다운 교회입니다. 아름 왜 더 많은 사람들이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목회의 축복이라고 하는 것, 교회 생활의 복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면 교회 나와서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이 돈도 많이 벌고 좋은데 취직하고 이쁜 형제 자매 만나서 시집장가 가서 뭐 애를 대여섯 낳는 것도 복이지만 그러나 더 본질적인 축복은 뭐냐면은 교회에서이 지상에 있기 때문에 은혜를 받았던 성도 중에도 자기 자기 깃발을 꼽기 위해서 그 언덕에서 내려와서 다시 세상으로 날아가는 내려가는 이 미끄러지는 인간들이 없을 수는 없지만은 그것보다 더 많은 영혼들이 하나님 앞에 그렇게 자기 깃발을 꺾고
(1:12:19) 눈물을 흘리며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간 것 그래서 그 언덕에서 사랑의 합치를 이루는 것 이것이 목회의 축복이고 교회의 행복이에요. 아멘. 허락하는 그 교회에서 올바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지고 교회에서 울려퍼지는 하나님의 음성의 귀를 기울이고 형제들의 용서와 사랑과 돌봄을 받으면서 자라는 사람들은 미끄러져도 희망이 있어요. 왜냐면 절대로 그가 미끄러졌다고 하더라도 결코 영원히 미끄러질 수 없기 때문에. 왜? 그는 이미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이기 때문에 그 자신이 아무리 미끄러져도 영원히 미끄러져서는 살 수 없는 본성을 하나님이 주신 거예요.
(1:13:02) 그래서 다시 하나님의 말씀이 울려퍼지면 다시 돌아오는 거예요. 그걸 하나님께서 주시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서 공동생활 속에서 일치가 이루어지게 되는 거죠. 그러면 이제 이렇게 미움이라고 하는 감정은 결국은 내려와서 자기 깃발 꽂고 자기 사랑의 질서에 파문을 그리는 데서 생겨나는 현상이에요. 예수께 온전히 합치되고 예수만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미움이 존재할 수가 없는 거죠. 잠시 그런 생각이 들어도 그는 금방 떨쳐 버리고 아 예수 안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처럼 지체 안에서 더 큰 아름다움을 발견하면서 그렇게 해서 하나님 앞에 사랑의 삶을 살아가는 거죠. 근데 그렇게 하지를 않아요. 그러니 미끄러지는 거죠.
(1:13:51) 그러면은 보세요. 그렇게 해서 끊임없이 자기 깃발을 꺾고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의 골고 언덕으로 올라가서 사랑으로 일치를 이루 교회는 예수께 순종하는 아름다운 교회가 돼. 그런데 내가 내 중심의 깃발을 꽂고 꽂고 그리고 그 깃발 아래 사람들을 판단하고 집요하게 미워요. 그리고 용서하지 않아. 그리고 지속적으로 거부하고 싫어하고 혐오하려고 마음의 작용을 의지적으로 선택해요. 그렇게 될 때 영혼은 파괴되죠. 파괴되는 건 자기 안에 일어나지만 자기 바깥에서도 이 일이 일어나요. 그 일어나는 일이 뭐냐면 둘이 함께 사람들끼리 서로 분쟁하게 되는 거예. 그러면서 여기에서 무슨 문제가 나오냐면은 이제 다툼과 다툼이 일어나게 되고 그 다툼을 통해서 미움이 증폭되게 되는 거.
(1:14:51) 증폭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누가 나를 나 누군가를 미워하게 되었는데 이것들을 전혀 내색하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청산하면 그것으로 파문은 끝나. 근데 그것을 그것을 미움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내세우면서 다툼을 일으키게 되는 거죠. 미움이라는 감정이 들게 되면 분노의 감정, 미움의 감정이 생겨나게 되면 즉각적으로 마음 자체가 잘 들으세요. 분노하고 미워하는 감정은 직각적으로 이 마음 안에서 언어의 용광로를 만들어내요. 그 여기서 수많은 언어가 막 솟아나는 거예요. 이거는 애정과 사랑의 감정도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고 사랑에 빠지게 되면은 그다음에는 잠이 안와. 언어가 막 생겨나게 되는 거죠.
(1:15:50) 저희 부부가 잠을 못 이루는 적이 있는데 그게 언제냐면 주일날 하나님의 은혜가 많이 쏟아졌을 때 바로 침대 앉아서 잠이 안 그게 뭐냐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사랑하신다는 것이 느껴졌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예배 중에 일어나게 되었어요. 그럼 뭐냐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많이 생겨나는 거예. 사람이라는 감정은 즉각적으로 언어의 용광로를 만들어. 그 용광로에서 막 온갖 종류의 언어들이 막 생겨나게 되는 거 없는 거야. 하나님에게 실증난 사람들은 되게 말이 없어요. 특별히 그 맨날 뭐든지 물어보면 모른대요. 특히 신령한 것들에 대해서 물어보면 모른데.
(1:16:40) 영적인 침체에 빠졌다고 변담을 상담을 왔는데 그 이런 상태에 빠진 것에 대해서 어떻게 해서 이런 경로에 빠지게 됐지? 몰라요. 이렇게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 같아? 몰라요. 다 몰라요. 그 대신 세상 것들에 대해서는 얼마나 할 얘기가 많은지 몰라요. 그러니까 누군가로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거나 분노가 생길 때이 속에서 극단적인 언어들이 막 쏟아져 나오는 거예요. 잘 들으세요.이 이 언어들이 막 쏟아져 나오 이것은 말이지 마치 인간 속에 음란한 마음이 꽉 찬 거하고 비슷해요. 그 음욕이 꽉 차게 되면 이걸 해석하지 않으면 막이 속에서 고통스럽잖아요. 이것보다도 더 고통스러운 거야.
(1:17:31) 이 언어가 찰 때 이것을 쏟아내지 않는 거. 그래서 이거를 막 너무나 억누르면 어떤 일이지?이 이 정신병으로도까지 발전을 하고 막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되잖아요. 억압이 억압이 온다 이거죠. 근데 이것들이 막 쏟아서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떻게 되죠? 미워하는 감정을 가지고 있으면 반드시 다툼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 다툼의 시작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냐면 여기서부터 시작이 되는 거예. 말에서부터 말을 막 쏟아내는 거예요. 근데 신기한게 사랑의 말을 계속 쏟아내면 사랑이라는 감정이 계속 없었던 없었었는데도 계속해서 생겨나요. 그런데 미워하는 말을 쏟아내게 되면 새로운 미움의 감정들이 꼬리를 물고 생성이 돼요.
(1:18:16) 그래서 의지로 계속해서 미워야 되겠다라고 하는 결단들이 생겨나게 되는 거죠. 그게 생겨나게 되는 거예.에 에또 일본 사람인데 에모또 마사루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이 사람이 물은 알고 있다라는 책을 썼어요. 제가 그 책을 읽었는데 물을 얼렸다가 서서히 녹히면 -2도에서 물로 변하면서 한 2천지 3초 동안만 물의 고유한 결정이 나타나요. 그걸 현미경으로 찍었어요. 그런데 재밌는게 물컵을 수십 개를 만들어 놓고 사랑해, 평화, 이뻐, 난 네가 참 좋아. 너를 사랑하고 싶어. 내 곁에 있어 줘. 이런 말을 붙이고 이쪽에는 죽어 버려. 못난이 난 네가 싫어 꺼져버려 나쁜 놈. 이런 식으로 욕을 쏘는 거죠.
(1:19:10) 그리고 이거를 딱 얼렸어요. 동시에 얼리고 그다음에 높여서 현미경으로 동시에 관찰을 하는 거예요. 신기한게 결정이 틀리게 나오는 거야. 근데 이쪽 그룹과 이쪽 그룹이 다 틀린대 근데 통일성을 가진 상태에서 틀리는 거예요. 그니까 이쪽 그룹은 육각형의 상태를 대체적으로 유지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틀려요. 근데 이쪽은 파상형이야. 이렇게 길게 찢어진 예 찢어진 이게 그 이게 긴팔 같은 그런 모습으로 막 날카롭게 변하는 거죠. 그래서 여기가 꽃잎과 같은 모양이라면 이쪽은 얼음 막 분질러뜨린 거 있죠? 그런 모양으로 변하는 거예요. 인간의 몸이 대부분이 물로 이루어져 있는 거 기억하시죠? 그러니까 무슨 미워하는 감정은 미워하는 감정은 제일 먼저 이 사람을 망가뜨리는 거예요.
(1:20:06) 영혼을 망가뜨릴뿐만 아니라 미워하는 감정을 계속 품으니까 그 사람 자신이 물병이 되어서 거기에 그 그 아주 험한 말을 써붙인 거랑 똑같은 효과를 낸다는 그래서 항상 보면은 스트레스 많이 받은 사람들이 암에 걸리잖아요. 그게 물과 연관이 되는 거라고 그게 근데 그런 일이 생겨나는 거죠. 근데 그것을 가만히 담아두지 못하고 입으로 말 언어로 발설을 하는 거죠. 그 언어는 언어는 철학자들의 공통된 관점이 이 언어는 영적이라는 거죠. 이게 그냥 단순한 말이 아니라 언어는 영적인 거예요. 그래서 이 언어가 확 쏟아져 나올 때 이거는이 자체가 영혼의 영적 작용이야. 그까 그것이 그 사람에게 확 가는 거야.
(1:21:02) 그래서 그 사람의 이 그 영혼을 파괴할뿐만 아니라 육체까지 막 파괴하게 되는 거죠. 사랑으로 그걸 이기면 되는데 이러면서 이제 미움이 증폭되는 거죠.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자기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은 상처는 굉장히 심각하고 그다음에 그 상처 때문에 자기가 짓게 되는 죄와 영혼의 파괴 그걸 통해서 그다음에 다툼과 그다음에 더러운 말들이 쏟아져 나와서 공동체에 입히는 이 손해와 영적인 파괴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생각을 안 해요. 그러니까 영적으로 어둠움에 빠지게 되면 인간이 그렇게 자기 중심에 흐르게 되는 거죠. 그래서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는지 압니까? 그래서 이 속에서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언어들을 언어들이 막 쏟아져 나와요.
(1:21:51) 그때에 그것을 이게 지각이 있으면 막 쏟아져 나올 때 딱 닫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이 쏟아져 나오는 언어가 아니라 이런 이런 그 이런 살인적인 언어들을 토해는 용광로에 주목을 하게 되는 내 안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이 원천을 주목하게 되는 그리고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빌게 되는 거죠. 내가 내 내 안에 어떻게 이런 용광로가 있어서 형제와 공동체에 대해서 이렇게 모욕하는 언어들을 거침없이 쏟아낼 수 있는 이런 수많은 언어들이 생겨납니까? 이런 언어들이 있는 동안에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찬송, 그리스도의 탁월하심에 대한 존귀와 존영, 그것을 노래하는 그 기쁨, 언어 이런 것들은 다 사라져 사라져 버리는 거거든요.
(1:22:41) 두 개가 공존할 수가 없어요. 그러면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요. 그래서 이 원천들이 말라. 그래서 이 미움의 언어들까지도 마지막에 다 사라지는 거예요. 근데 그렇게 안 하고 이걸 입을 열고 토해 놓기 시작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 잘 알다시피 사랑할 때도 사람들은 과장하고 사랑할 때도 어떤 남자가 그러더라. 아 막 이게 녹커이신 거지. 아 그 여자 손을 붙들고 아 당신의 눈은 정말 호수와 같습니다. 그 그리고 눈꼽긴 눈을 향해서 그렇게 얘기를 하는 거야. 당신의 눈은 정말 호수와 같습니다. 대로 놀. 그러니까 이제 여자가 이러돼 저 눈이 매우 나쁜데요. 그러니까 아 정정하겠습니다.
(1:23:23) 안개 끼는 호수 같군요. 그 다 아름다워 보이는 거죠. 그렇게 사람들이이 속에서 언어들이 막 쏟아져 나오는 거예. 그리고 항상 사랑하는 감정에서 쏟아져 나오는 언어도 과장이고 미워하는 감정에서 쏟아져 나온 언어는 더욱더 비성적인 광기가 그 속에 깃들어 있어서 수많은 조작과 과장 허언들을 만들어내는 거예요. 그렇게 생산하는 동안에 그는 자신의 영혼은 계속 파괴되고 지체들을 실족시키고 하나님 앞에 계속 죄를 짓는 거예요. 그러면서 그러면서 이제 진전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럴 때 막 쏟아져 나오는이 언어들이 뭐냐면은 사실은 영적인 똥이야. 똥. 그래서 이게 입이 아니라 영적인 항문이 되는 거예요.
(1:24:09) 그래서 여기서 그 더러운 똥이 막 그냥 수없이 쉴새 없이 쏟아진 거. 한번 머릿속에서 그려 보세요. 그래서 수없이 쏟아져 나온 거야. 입을 열고 다니는 곳마다 막 수없이 쏟아내는 거예요. 어느 순간에 입을 닦고 딱 그쳐요. 예. 근데 자신은 이제 잊어버렸다고 하는데 토해 놓은 그 똥들은 여전히 지체들을 온몸을 더럽히고 영혼을 더럽히면서이 공동체 속에서 악취를 풍기는 거예요. 그럼 사실 그 죄가 맨 처음에 이 형제로 하여금 자기로 하여 그 형제로 하여금 누군가가 미추함을 보여주어서 밉게 만들었던 그 이상의 죄일 수가 있는 거죠. 그래서 뭐냐면 우리의 온 몸의 지체 가운데 가장 늦게 성화되는 곳이 있어요.
(1:24:58) 그게 뭐냐면 혀예요. 혀. 그렇게 복음 안 전하던 사람도 은혜의 물에 잠기고 발목이 은혜의 물에 잠기면 복음 전하러 가요. 그렇게 기도하지 않던 인간인데 무릎까지 은혜가 차면 무릎을 꿇어요. 그렇게 거만해서 봉사하지 않았는데 허리까지 은혜의 물이 차면 허리를 구부리고 자기보다 낮은 지체들을 섬겨요. 예. 그리고 그 은혜가 목까지 가득차게 되면 그 손 가지고 하나님께 봉사하면서 살아가요. 은혜의 물에 풍덩 잠겨도 죽을 때까지 물에 잠기지 않겠다고 떠오르는 세치자리 지체가 있는데 그게 바로 혀야. 혀. 혀요. 나는 이것을 말이죠. 교회를 하면서 목회를 하면서 절실하게 그전에는 경험을 별로 못 했어.
(1:25:49) 개척 교회를 시작을 했는데 그 지하실에 냄새나고 일주일이면은 몇 번씩 물랄리가 나는 교회에 사연이 없는 사람들이 왜 등록을 하겠어요? 그 좋은 교회 내버려두고 그렇지 않겠어요? 그 교회에서 등록을 해서 예배 시간마다 저희들이 성도들이 너무 울어서 설교를 계속하지 못하던 때가 여러 번 있었어요. 그렇게 은혜를 받는 사람들이 들이라면 생애적으로 주님 만난 사람들이고 주님 주님께 목숨을 건 사람들이거든요. 그렇지 않아요? 그런데 어쩌 그렇게 말을 막하는지 나는 이해를 할 수 없었어요. 나중에서 이제 이해가 됐어요. 이게 뭐냐면 상처가 많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대부분이 말의 절제가 없이 쏟아놓는 사람들은 어린 시절에 사랑을 못 받았거나 예수 믿고 구원 받았는데 성화의 길을 제대로 안 가서 하나님의 은혜의 물에 푹 잠겨지지 않은 고기로 말하자면은 반쯤 삶다가 꺼낸 그래서 수육을 하기
(1:26:55) 위해서 썰었는데 핏물이 흐르는 그런 고기와 같은 영혼의 상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되게 말의 절제가 이것들을 막 쏟아내는 거예요. 그 불쌍한 사람들이죠. 허해서 그러는 거예요. 근데 이 시간에 펑펑 울면서 주님만을 위해 살겠다고 벌벌벌 떨고 은혜를 받던 사람들이 일주일이 지난 사람들이 지들끼리 머리가 터져하고 싸우는 거예요. 예. 그리고 참 신기한게 그렇게 생애적으로 하나님 만난 사람들은 웬만해서 화해를 안 해. 왜? 각자 하나님에 대해서 확신을 갖고 있으니까.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는 거지. 정신병자들이야. 내가 오죽했으면 말을 가지고 칠 주를 설교를 했어요. 시리즈로.
(1:27:45) 이 꼭 이게 한 7년 전까지도 그게 필독 시리즈였어요. 그냥 교회에서 일어난 모든 미움과 다툼에 99% 이상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말만 없으면은 기름이 끼얹져진 집과 같아요. 기름을 아무리 끼얹져도 불은 안 나. 근데 말이 성향이야. 탁하고 불을 붙이는 거예요. 확 타는 거예요. 기름이 뿌려져 있어도 시간이 지나면 다 증발돼서 불 안 나거든요. 근데 누군가가 말을 해서 성령불을 던지는 거예요. 확 타는 거예요. 결국은 하나님 앞에 다 마지막 날에 헤아림을 받아야 됩니다. 그렇게 놓고 자신이 억제할 수 없는 언어 하나를 가지고 교회를 더럽히면서 그리스도의 몸을 그게 상처내는 거죠.
(1:28:31) 이런 일들이 생겨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은 화해가 필요하다라고 하는 그 조금만 더 그런 말의 문제가 생겨나게 되는 거예. 그래서 결국은 한편으로는 그런 미움의 감정들이 생겨날 때 그때에 아주 단순한 경험을 가져야 돼. 그게 말을 알고 그다음에 듣지 말고 보지 말아야 돼. 제가 여자는 아니지만은 나는 이 목회하면서 난 시집살이 한다 이렇게 생각되는 거거든요. 어떤 사람 목회가 행복하다 그러는데 나 행복하지 않아요. 전혀 행복하지 않아요. 영혼을 돌보면은 기쁜 때도 있고 즐거운 때도 있죠. 그 전체적으로는 행복하지 않아요. 고난의 길인데 어떻게 그게 행복할 수 있겠어요? 예.
(1:29:19) 항상 가슴에 새겨요. 이 땅에 내 인생을 마감하는 그날까지 시집은 며느리 참고 벙어리가 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말고 귀가 있지만 듣지 말고 그래야지만 여러분들을 사랑할 수가 있어요. 그러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언젠가 어느 곳에 갔는데 연세 드신 목사님을 배웠어요. 목사님이 다시는 소개하는데 알고 보니까 그 목사님은 어느 교회 원로 목사님이고 그 원로 교회에서 지금 목회하시는 분은 저희 제가 잘 아는 친구 목사님이에요. 근데 목사님이 저하고 같이 대화를 나누시다가 저에 대한 인상이 참 좋으셨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이제 제가 목사님께 이제 좀 어이 목회 많이 하셨으니까 저도 좀 가르쳐 주십시오 하면서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이 노인 분이 마음에 확 풀렸어요. 그리고
(1:30:24) 당신 자신 교회 얘기를 하시는 거예요. 나 안 하셨으면 좋겠는데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뭐라 그러냐면 이러는 자기 후임 목사가 내 친구라고 분명히 얘기했는데도 굉장히 안 좋게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은 제가 이렇게 말씀을 막으면서 좋은 얘기를 해서 헤어졌어요. 그다음에 그 목사를 만났어요. 근데 아무말 하지 말아야지 그러고 있었는데 말이 다 나 막 하고 싶더라고요. 그게 참 인간이야. 막 하고 싶어. 그래서 그 형제를 만나서 야이 원로 목사님이 그러는데 네가 와서 교회 다 망가뜨려 놓다 그러더라. 데 그렇게 얘기했겠어요? 안 하죠. 그래서 야 너네 교회 원로 목사님 만났는데 목사님이 너 정말 목회 열심히 한다고 그러시더라.
(1:31:27) 그러니까 이 젊은 목사가 막 활짝 웃어. 그 너무 좋아하는 거야. 정말 그래. 아, 그럼 두 번이나 그러셨어요. 근데 사실은 사실이었거든요. 뭐라 그러셨냐면 열심히는 하지만 좀 믿음으로 했으면 좋겠어 그랬거든요. 뒤는 딱 자르고 너 열심히 한다 그러더라. 하지만 그 얘기하지 않고 열심히 한다 그러더라. 정말 헌신적으로 목회한다 그러더라. 그러면 그다음 주일에 교회에 가서 다임 목사가는데 저희 원로 목사님이 오셔요. 그 두 경우를 비교를 해 봐. 가서 김남준 목사를 만났는데 저 노인내가 아 나보고 교회 다 망가뜨리는 후임 목사라고 그랬다 그러지. 근데 어떻게 그 좋은 악수의 손을 내밀 수 있겠어요? 근데 이 분명히 그 주일에는 몇걸음 앞으로 나아가서 목사님 두 손으로 붙들었을 거야.
(1:32:28) 아, 딱 보는 순간 아, 저 목사님이 김남준 목사 만나서 어, 아, 정말 우리 후임 목사가 열심히 목회다 이랬대지. 아, 내가 정말 열심히 하나 봐. 그럴 거 아니에요. 그렇게 한편으로는 말을 고루어서 그 말을 바꾸어서 화해하고 일치를 이룰 수 있게끔 그런 역할들을 해 나가야 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뭐예요? 근데 이러한 화해가 필요한 거죠. 근데이 화해가 필요한데 이 화해의 필요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우리들은 또 하나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뭐냐면 분노와 증오의 문제예요. 많은 사람들이이 둘을 구별하지 못해. 분노하고 미움은 틀린 거예요. 오늘 성경은 분노하는 자마다라고 말하지 않고 분노하는 자가 미워하는 자예요.
(1:33:23) 분노는 충동적으로 일어나는 어떤 대상에 대한 그 거부하는 감정이에요. 미움은 반복해서 의지적으로 그것을 선택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분노는 한 순간에 확 일어났다가는 일어나는 일들은 있을 수 있는 거죠. 그래서 성경이 뭐라 그러냐면은 분을 품때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질 때까지 그 분노하되 죄를 짓지 말며 그리고 해가 질 때까지 그것을 가슴에 품지 마라. 분노를 품으면 그것이 이제 미움과 혐오의 감정으로 변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어거스틴이 아주 감동적인 그 격언을 우리에게 남겼어요. 그게 뭐라 그러냐면은 저는 굉장히 감동을 받았는데 이런 이야기예요. 자주 분노하고 자주 화해하는 사람이 거의 분노하지 않지만 한 번 분노한 후 미워하는 사람보다 낫습니다.
(1:34:19) 물론 그렇다고 해서 또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늘 그냥 막 팍팍 신경 질는 사람들이 위로를 받으면 안 되죠. 항상 그 사람들은 자기는 뒷끝 없다고 그러는데 앞끝도 없어야지 뒷끝만 없으면 되는게 아니거든요. 그러나 그래도 잘 미워하지 않는 잘 분노하지 않는데 어쩌다 한번 분노하면 그것을 가슴에 확 끌어앉고 누구하고도 화해하지 않고이 속에서 미움의 감정으로 발전시키는 그 사람보다는 분노할지라도 즉시 즉시 회개하고 형제와 화해하고 나를 용서해 달라고 빌고 이렇게 하는 그 사람의 영혼이 훨씬 건강하다라고 하는 거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예물을 드리러 왔다가 형제와 원망을 들을 만한 일이 있거든.
(1:35:08) 그러면 가서 먼저 화해하고 와서 재물을 드리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거죠. 그 이유는 뭐냐면 시간을 두면 둘수록 그것이 미움으로 발전하기 때문에 빨리 그 문제를 풀고 하나님께 경배하라고 하는 것이죠. 여기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또 하나가 뭐냐면 미움과 기도의 문제예요. 일단 미워하게 되면 즉각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이 돼요. 그 심판이 뭐냐면 기도할 수 없는 거예요. 내가 미워하는 마음이 지금 생겨도 교회를 못 나가거나 하던 일을 할 수 없거나 갑자기 사업에 부도가 나거나 가족이 누가 죽거나 하는 일이 일어나는 건 아니에요. 그런데 즉각적인 하나님의 심판이 오는 것이 뭐냐면 기도가 안 되기 시작하는 거죠.
(1:35:52) 기도가 안 되기 시작하는 거죠. 그래서 결국은 기도의 문이 막히게 돼. 어떻게 하든지 기도의 문은 열려 있어야지만 내가 혹시 잘못했더라도 기도를 하면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잖아요. 은혜가 사랑의 감화잖아. 그니까 그 사랑의 감화를 받아서 나도 미워하고 자기도 부인하고 십자가도 지고 이렇게 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 텐데 하늘의 문이 딱 막히는 거죠. 그렇게 해 가지고 모든 걸 다 하기는 하는데 하나님의 은혜의 감화가 없어. 그래서 사람들을 끊임없이 미워하고 한번 미워한 감정을 이렇게 중화시킬 수 있는 은혜가 하늘문이 막히고 그치는 거예요. 그럼 이 안에서 마치 햇빛이 차단됐을 때 수많은 곰팡이와 벌레들이 자라듯이 그런 식으로 계속해서 이제 막 융성하게 되는 거죠.
(1:36:42) 그래서 그것들이 자기를 삼켜 버리는 거죠. 그렇게 해서 나중에는 자기가 왜 처음에 그를 그렇게 미워하게 됐는지보다도 더 심각한 문제에 빠지게 되어서 유격에 흐르는 삶을 살게 되는 거죠. 그렇게 하면서 인간이 파멸로 가는 거죠. 그러니까 사단이 교회를 역사적으로 볼 때 교회를 파멸시키기 위한 사단의 고존적인 수법은 핍박이 아니었어요. 왜냐? 핍박을 하면 순교자들의 피가 핍박의 주먹을 맞아서 튀면서 다시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는 거예요. 그 핍박 가지고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은 마귀도 너무나 잘 아는 거죠. 그러니까 어떻게 되냐면 교회를 분쟁하게 하는 거예요.
(1:37:25) 그래서 미워하게 만드는 거죠. 오해와 불신이 가득차게 만드는 거죠. 이러는 동안에 성도 각 사람 각 사람을 향하여 열리고 있던 하는 물들이 하나씩 닫히게 하는 거예요. 여기 지금 여러분처럼 많은 사람들이 예배드리고 있어요.이 천정에 수천 개의 창문이 나 있다고 생각을 해요. 그럼 그 문이 다 열려 있어요. 그럼 환한 태양빛이 들어오 오겠죠. 그렇죠? 창문은 작아. 근데 한 사람 한 사람 창문이 다치면서 어두움이 드리우기 시작해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만약에 절반 이상의 문이 다쳤다고 생각하면이 예배당은 아마 설교자를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움으로 가득찬 예배당이 될 거예요.
(1:38:05) 그러니까 한 교회 전체를 막을 순 없으니까 한 사람 한 사람을 그런 식으로 막아 버리는 거죠. 그래서 교회 전체를 어둡게 하는 거죠. 일단 어둡게 하고 나면 그다음에는 진리가 주인이 아니라 그렇죠. 인간의 욕망이 주인이 되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서 그렇게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실 때 사람들이 빛을 싫어한 이유예요. 그렇게 하면서 영적으로 발전을 하게 되는 거죠. 기도의 문이 막히는 거예요. 그래서 난 항상 이야기하죠. 누군가를 미워하는 사람들이 항상 자신은 피해자라고 말하고 그리고 자신으로 하여금 미워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그 사람에게 모든 책임이 있다고 자기의 의로움을 강변해.
(1:38:49) 그럼 내가 항상 하는 말이 있어요. 그럼 기도해 봐라. 네가 만약에 하나님께 인정을 받으면 지금 이 순간에 하늘문이 열리고 기도의 문이 기도의 문에 빛이 들어올 거니다.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지 만약에 하나님이 네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면 그것은 너도 죄가 있는 것이다. 그거 이외에 죄 이외에 무엇도 하나님과 나 사이에 있는 기도의 문을 막을 수가 없다는 뭐 입증해 봐라요.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철저하게 기도의 문이 막힌 가운데 거의 기도하지 못하면서도 자신의 허물을 돌아보려고 하지 않은 그리고 그 미움들을 무슨 보석이나 되는 것처럼 간직하면서 자신의 영혼을 파괴하고 공동체에 의도하지 않은 죄를 짓고 형제의 영혼을 파괴하면서 결국은 자신의 몸까지 계속 하나님 앞에 파괴되어 가고 선한 의지도 파괴되어 가고 하나님의 은혜의 흐름도 막히고 그런 속에서 자기 자기 자신은 영적으로 고사되어 가는 거죠. 그리고
(1:39:52) 영혼의 깊은 침체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그 사람 마음속에는 지금이 순간도 수많은 언어들이 용광로 속에서 자신의 옳음을 강변하는 수많은 언어들, 형제를 정지하는 수많은 언어들이 솟아나고 있을 거예요. 그러나 결국은 모든 것을 판단하시는 분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 편이시며 하나님은 항상 당신을 향해서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보이시고 당신의 사랑을 보이신 사람을 향하여는 하늘의 문을 열고 기도로 교통하셔요. 기도의 문이 막힌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할 수가 있겠느냐 얘기예요.
결국은 결론적으로 우리는 화해와 관용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에요. 우리는이 세상에서이 세상에서 모든 상처를 안고 혼자 도저히 살 수 없어서 아가페의 사랑 앞으로 나온
(1:40:56) 사람이에요. 거기서 하나님의 사랑의 그 지극히 크심과 위대하심을 발견했어요. 그래서 우리는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우리 사랑의 깃발을 꺾었어요. 우리가 걸어온 인생의 길. 오늘 예수님을 만나고 주 안에서 살아가는 이 삶. 다른 사람은 우리 보고 너절한 인생을 살았다고 말할지 모르고 실패뿐인 불순종뿐인 인생을 살았다고 말할지 몰라도 우리는 그 이력서 한 줄 한 줄을 피눈물을 흘리면서 걸어온 사람들이에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걸어온 모든 길을 동의할 수 없으나 사랑해요. 왜냐하면 거기에서 걸음 걸음마다 주님의 인도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여기까지 왔기 때문이죠.
(1:41:43) 보십시오. 하나님이 어떠한 사랑을 주셔서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하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까? 우리 모두 한 사람 한 사람 눈물겨운 대하소설을 쓰면서 여기까지 걸어와서 오늘이 교회에서이 한 목회자에게 목양을 받으며 우리 한 형제가 되어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여기 살아가고 있어요. 나만 그런 눈물나는 사연을 안고 여기 온 것이 아니에. 다 들어보지 못했지만 내 옆에 있는 내가 미워하는 모든 지체들이 그렇게 살아왔어. 그리고 때로는 넘어 때로는 쓰러지고 때로는 하나님 앞에 불순종할 때도 있지만 내 곁에 있는 모든 지체들 속에 있는 소원은 내 안에 있는 소원과 동일해.
(1:42:39) 어떻게 해야지 하나님 앞에서 살고 싶은 거예요.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이 세상의 존재에서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것보다는 훨씬 나은 존재가 되는 거예. 거친 바다 험한 산 피가 맺혀도 십자가 내가 지고 끝내 이기리. 이 말하고 다 눈물나는 사회를 허물투성이의 사람들이 나는 목회자이지만 여러분들을 끊임없이 용서하는 위치에만 있지 않은
(1:43:42) 나에게도 여러분들의 용서가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지체들에게서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있어요. 그것이 뭐냐면은 내가 너무 부족하고 때로는 허물이 많은 인간인데도 내가 아니라 그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바뀌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내 형제들이 나를 용서해 주는 것이에요. 용서해 주신. 그래서 용서를 받으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해. 그리고 내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면서 예수의 고난을 배워.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어요. 내가 지체들에게 값없이 용서를 받으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배워 내가 자아를 꺾으며 내 형제를 용서하는 가운데 예수의 고난을 배우는 거 그게 십자가의 길이에요.
(1:44:36) 십자가의 길. 그래서 사랑할 수 없는 지체를 사랑하기 위해서 그를 미워하고 집요하게 혐오하고 거부하려고 하는 나의 예차를 끊임없이 십자가에 못 박으면서 예수의 고난으로 나의 마음에 갑옷을 삼는 그래서 용납할 수 없는 지체를 발견하고 그에게서 더 이상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없을 때마다 자기 사랑에 빠진 나를 발견한 그리고 예수님이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이 세상에 오셔서 이 추루한 인간을 위해서 사셨던 지상의 생애를 회상하는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죄인들과 한 친구가 되셨습니까?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그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고난의 길을 걸으셨어.
(1:45:31) 그 사랑하셨기 때문이 아니에. 그래서 예수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신 그 고난의 길을 생각하면서 형제를 집요하게 미워하고 용서하지 않으려고 하는 내 마음의 악한 경향을 십자가에 못 박아요. 그 속에서 우리는 자아가 죽는 고통을 경험해요. 내 안에 미움의 언어들이 수없이 끌어오르는데 입을 닫고 예수께 호소해요. 하나님 내 안에 있는이 수많은 파괴적인 언어들 쏟아내고 싶어 하는 이 억울한 수많은 언어들, 하나님 나를 도와주십시오. 거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배우게 돼요. 나를 깨뜨려 지체들을 세우는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고 그리스도의 몸이 상처받기보다는 차라리 내가 만신창이가 되는 길을 택하는 자기 희생의 도리가 무엇인지를 배우게 돼요.
(1:46:33) 그 속에서 우리는 죽지 않으려는 내 안에 수많은 옛 본성을 발견하게 되고 아우성치는 부패한 본성의 외침의 귀를 외침을 듣게 돼요. 그때 우리는 그 수많은 외침 대신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들려오시는 예수님의 음성, 그 음성, 우리를 위해서 생명을 다 버리시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까지 저희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시던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의 심장을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십자가에서 들려오는 그 용서와 화해의 음성을 들으면서 우리 안에 아직까지도 진멸되지 않고 있는 가나안의 원주민 같은 수많은 악한 본성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내가 얼마나 죄인인가 하는 것을 미워할 수밖에
(1:47:40) 없는 형제의 존재를 통해서 깨닫게 되고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다. 내 자신의 자연적인 본성 가운데는 아무것도 이 까리타스의 사랑을 이룰 수 있는 것이 없고 오직 내게 필요한 것은 매 순간 하늘을 열고 주께서 부어 주시는 파멸되어 마땅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까지 다 주시면서 자기를 못박는 자들을 미워하지 아니하시던 그 예수님의 관용과 용서의 정신을 배우는 그러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자기의 몸을 버리셨으니 나도 예수를 위해서 죽는 것이
(1:48:50) 마땅하다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거. 그래서 나는 죽고 지체들은 살고 주님은 부유하셨지만 가난한 우리를 위해서 비천하게 되셨던 것처럼 나는 가난해지고 내가 가난해지는 것 때문에 지체들은 부요해지고 내가 버림을 받는 것 때문에 지체들은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그래서 존귀 영광 모든 권세는 주님이 받으시 고 날마다 살아가는 공동체의 삶 속에서 멸시 천대 십자가는 내가 지고 걸어갑니다. 이 이 세상에서는 그런 사람들이 가장 불행하게 보이지만 그들에게 행복이 있으니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은 그를 싫어 버릴지라도 하나님은 바로 그렇게 멸시받고 고난을 받는 자기의 사람들
(1:49:57) 선한 일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몸을 위해서 자신이 죽는 사람들 그래서 자신이 깨뜨려지고 주님의 몸은 치유되는 그 일을 위해 자기를 공여하는 사람들 그래서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깨뜨려서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을 꿈꾸는 사람들 곁에 가장 가까이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에게 너무나 긴 설교였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는 아직 끝나지 않은 수많은 하나님의 언어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1:51:02) 십자가를지고 죽으시면서 그 고난의 길을 오르시기 전에 우리에게 남기신 유언이 무엇이었습니까?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느니 너희는 서로 사랑하는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너희를 보고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200만이던 기독교 인구가 860만으로 3분에 1 토막이 났습니다. 정확한 통계를 가지고 있는 어느 교수님을 만났는데 확실한 증거가 있는데 주일날 예배에 참석하는 교인는 460만 밖에 안 된다는 확신 언어를 나에게 들려 주었습니다. 신학교 교정을 걸으면서 제 마음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내가 바로 그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기독교의 눈돌리게 등돌리게 한 그 장본인 가운데 한 사람이
(1:52:06) 끝없는 미움과 중식될 줄 모르는 다툼 그리고 그 포기하지 않는 그 지독한 이기심과 한번 원한히 맺히면 대를 물려가며 풀지 않는이 기독교인의 옹졸함과 그 집요한 증후 이것들이 교회 분열의 역사였고 이것들이 오음을 옳고 그름을 빙자해서 수많은 교회에 상처를 내고 예수의 불구된 몸을 이 세상에 보여 주었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떠났습니다. 마지막 날에 우리들이이 분열과 다툼 종식되지 종식되지 않은 증의 감정들에 대해서 우리가 마지막 심판 날에 주님 앞에 이것으로서 교회를 더럽힌 것에 대해서 어떻게 변명할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피를 발라 교회를 흠없게 하시는데 우리는 똥을 발라 교회를 더럽혔습니다.
(1:53:12) 그러면서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몸에 상처를 내면서 예수 때문에 그 알량한 신앙의 덕으로이 세상에서 번영을 꿈꾸고 있습니다. 주님의 마음과는 얼마나 거리가 먼 신앙인지 우리는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오늘이 시간에 가슴이 깊이 눈을 감고 여러분들의 마음속에서 울려퍼지는 예수의 음성의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들리지 않는다면 여러분들의 마음의 귀를 열어 달라고 부르짖으십시오. 주님의 음성이 들려올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모든 불신과 미움 그리고 원망과 그리고 저주 그리고 가슴에 담긴 그 악한 말들과 그 모든 독들을 버리고 그리고 돌아와야 합니다.
(1:54:13) 그래서 우리는 용서받으며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고 지체들을 용서하는 어려움 속에서 예수의 고난을 배워갑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피흘리고 죽으신 그 고난을 마음의 갑옷으로 삼아 수많은 미움과 유혹의 화살을 이기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사랑의 온전한 일치를 이루는 공동체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 속에서 회심하지 않았던 영혼들은 회심하게 될 것이고 미끄러졌던 영혼들은 다시 일어나게 될 것이며 핍절하고 하나님을 등지며 거역했던 영혼들은 참회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다시금 하나의 사랑의 질서로 통합되는 하나님의 교회의 행복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행복을 누리는 그리스도의 지체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1:55:07) 우리 같이 기도하겠습니다.이 시간에 우리 같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시겠습니다. 기도하실 때 하나님 오늘 이 시간에도 저희들에게 은혜를 내려 주십시오. 사랑과 미움 사이에 있는 진리의 빛과 그 안에서 일어난 어두운 우리의 영혼의 정신 작용들을 탐구한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이제 변명할 수 없이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 주신이 신앙의 이치와 영혼의 원리들로 인하여 저희들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오니 우리들이 형제를 미워했던 죄를 용서해 주시고 하나님을 향하여 싫증냈던 모든 죄를 하나님 참여하오니 우리의 열정 없음을 하나님이 하감하시고
(1:56:10) 우리에게 다시 주님의 아름다움을 보이셔서 주님의 길로 돌아가 하게 하시옵소서. 사랑으로 화해와 일치를 이룰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우리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이 많으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부족하고 연약한 사회들을 하나님이 사랑해 주시고 오늘이 시간에도 간구하고 기도하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 하나님 오늘이 시간에도 간구하고 기도하며 주여 우리에게 은혜를 누려 주시옵소서. 아버지 하나님 도와주시기를 원하나이다.이 미쳐난 인생이 아버지 앞에 살기를 원하오니 주여 도와주시고 은혜를 내려 주시옵소서.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이 시간에도 간고하고 기도하오니 은혜를 내려 주시옵소서.
(1:57:04) 자비하신 아버지 하나님 저희들을 아버지 하나님이 은혜를 내려 주시옵소서. 저희의 마음을 높이시고 그래서 아버지 하나님이 저희들이 마음에 아버지 하나님이여 가을 놓고 증기를 만들고 마음의 아버지 하나님이여 장을 녹이고 아버지 하나님여 부상을 만들게 하옵소서 그래서 아버지 하나님이여 저희들은 주님 앞에서 살 수 있도록 주여 은혜를 내려 주시기를 간절히 빌고 원하옵나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은혜를 내려주시고 역사해 주시옵소서. 그래서 아버지 하나님이여 저희들이 온전한 형제의 사랑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주여 역사해 주시고 은혜를 내려 주시기를 간절히 빌고 원하옵나이다. 자비하신 아버지 오늘이 시간에도 간고하고 기도하오니 주여 도와 주시옵소서.
(1:58:04) 은혜를 내려 주시고 도와 주시옵소서. 그래서 저희들이 더 온전하게 주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할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성령 하나님의 교통하심이 사랑하는 주의 자녀들 위해 이제로부터 영원히 함께 있어지다. 아멘. [음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