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5장
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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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view죄인을 구원하시는 복음과 하나님의 은혜,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가 삶을 이끄는 방식에 관해 살펴보며, 복음을 믿고 구원받은 성도답게 살아가도록 권면한다.
Notes
Transcript
누가복음 5장은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 사역의 중요한 전환점이자 핵심 주제를 강조하는 역할을 합니다. 누가복음 4장 14절부터 9장 50절까지의 큰 내러티브 섹션에 속하며, 예수님의 공적 사역, 기적, 가르침을 상세히 다루는 부분의 초반에 위치합니다. 이 장은 예수님의 권위와 정체성,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의 확장이라는 누가복음의 핵심 메시지를 강력하게 제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기존 유대인들의 체제를 흔들고 계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을 중심으로 한 기존의 유대인들의 종교 관습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들은 유대교라는 허울을 쓰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진리를 아시고, 진리를 순종하며, 진리를 선포하였기에, 진리에서 멀어진 낡은 체제와 충동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낡은 체제를 무너뜨리셨다기 보다, 진리가 나타나니 거짓이 거짓으로 드러난 것이며, 거짓에 속한 자들은 자신이 거짓이라는 것이 드러나지 않기 위해 진리를 죽여야 했던 것입니다.
5장 중에 레위를 부르신 사건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27절: 예수님께서 레위를 부르셨습니다. 레위와 마태는 동일 인물입니다. 레위는 유대식 이름입니다. 아마 마태의 본래 이름이었을 것입니다. 마태는 헬라식 이름으로 유대인들은 로마와 교류를 위해 헬라식 이름을 가진 경우가 많았습니다. 마태는 세리였을 때 자주 쓴 이름이었을 것이고 마태는 의도적으로 자신을 마태라고 하여 세리였던 때를 나타나며 겸손하였을 것입니다. 아시듯이 당시 세리는 로마를 대리하여 유대인들에게 세금을 거두는 일을 했고, 때로는 할당된 것보다 많은 세금을 거두어 자신의 주머니를 채웠습니다.
예수님은 마태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에게서 무엇을 보셨던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자 28절에 레위는 망설이지 않고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은 마태가 자신의 직업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 죄책감, 하나님께 헌신할 수 있는 가능성, 그것을 보셨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레위가 세리였다는 것, 그가 죄를 지었다는 것 거기에만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레위가 회개하고 회개한 자답게 세리였던 자신의 삶을 청산하였다는 것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29절: 레위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너무 기뻐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동료들을 초대했습니다. 레위가 세리라는 자신의 직업을 버린 것을 이렇게나 기뻐하는 것에서, 그가 얼마나 무거운 죄책감 아래서 고통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돈을 좀 벌었을 수 있으나, 죄의 짐에 눌려 붙잡혀 있었던 것 뿐, 레위는 죄를 즐거워하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누군가 그들 구원해주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그들을 비방합니다. 죄에서 구원받아 기쁨으로 즐거워하는 즐거움을 보지 못하고, 자신들의 관점, 너가 죄를 지었었잖느냐. 지금 같이 있는 이들도 죄인들 아니냐. 자신들의 율법적 관점으로 비방합니다.
31절: 이에 대해 예수님은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다. 병든 자에게야 의사가 쓸 데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너무나 당연하 말인데, 건강한 자는 의사를 찾지 않습니다. 병든 자는 의사를 찾습니다. 그의 병이 중한 만큼 의사를 찾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자기가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찾지도 않고, 예수님이 별로 대단할 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죄인이라고 하는 예수님이 싫습니다.
32절: 예수님은 자신이 오신 이유를 한 번 더 정확하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다.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세상에 예수님 외에 의인은 없습니다. 다만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뿐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그런 자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너희와 상관없다. 너희는 너희 의로 구원을 받으라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이 자기 의로 결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자신들은 구원받을 것이라 자부했던 그들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그들의 의는 자기 몸을 가리지 못할 찢어져 헤어진 옷과 같을 것입니다.
제 모니터 오른쪽 아래 작은 종이에 출력해서 붙인 글귀가 있습니다.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 셋째도 겸손” 어거스틴이 한 말이라고 하는데, 너무 마음에 와 닿아 적어서 붙여놨습니다. 제가 죄인이라는 것을 잊지 않기 위해서, 교만하지 않고 언제나 겸손하기 위해서, 항상 그런 마음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렇게 붙여놨습니다. 얼마나 마음이 높아지기 쉬운지 알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일 때 부름 받았고, 지금도 여전히 너무 쉽게 죄로 흘러가는 죄인입니다. 그런데 성도들 중에는 스스로 의인이 된 이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 고개를 숙일 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로 우리를 입히시며 의롭게 여겨주시는데, 하나님과 상관없이 스스로 의인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의 바리새인들처럼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비방합니다. 나는 세리처럼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지 않았다. 나는 창녀처럼 성적 부도덕을 행하지 않았다. 나는 죄인들처럼 율법을 어기는 죄를 짓지 않았다. 세리 너는 악하다. 창녀 너는 부정하다. 그렇게 판단하고 정죄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의인이었습니다.
성도들 중에도 다른 이를 쉽게 판단하고 정죄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왜 옷차림이 저래? 왜 말은 저렇게 해? 왜 기도할 때 저렇게 한다니? 참, 불편해 죽겠네. 말하고, 따지고, 다른 이를 고치려고 합니다. 자신은 온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너는 나와 상관이 없다. 너가 판단하는 저 사람은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내게 회개하는 이다. 나는 그의 하나님이다.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됩니다. 죄인은 말이 없습니다. 그저 용서해주신 황송한 처분에 감사할 뿐입니다. 만약 우리가 자신의 처지를 잊고 교만해진다면 결코 예수님과 상관이 없고, 또한 예수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은혜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36-37절: 새 옷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습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습니다. 둘 다 망치기 때문입니다.
새 옷은 회개한 세리와 같은 이들입니다. 낡은 옷은 바리새인들이 주장하고 있는 기존 유대교입니다. 새 포도주는 성령님입니다. 낡은 가죽 부대는 기존 유대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의롭다고 여기는 바리새인, 서기관들을 비롯한 그들이 주장하는 유대 공동체에는 새 일을 행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들에게는 새로 하나님의 백성된 이들을 붙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세대마다 새로운 은혜를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새로운 은혜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자신을 죄에게 구원해주실 분을 간절히 사모하는 이들에게 임합니다.
우리 교회에 하나님께서 부어주실 새로운 은혜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실 때 모두 은혜 받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에 혜택을 보지 못하고, 예전처럼 메마른 심령 그대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지금부터라도 겸손한 마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먼저 입술의 말을 조심하고, 말을 삼가면서 회개하기에 힘쓰고, 다시 겸손한 영을 회복해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의 영을 회복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