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는 교회에서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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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기도
대표기도
사공남이 권사님이 대표로 기도하시겠습니다.
말씀봉독
말씀봉독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서론
서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참으로 차갑고 치열합니다. 일주일 동안 세상이라는 전쟁터에서 쉼 없이 경쟁하며 살다 보면, 내 마음을 괴롭게 하는 '원수'들을 만나게 됩니다. 직장에서, 여러 인간관계 속에서, 가장 가까워야 할 가정에서조차 우리는 깊은 상처를 입고 지쳐갑니다.
그렇게 온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은 사람들은 참된 안식과 위로를 찾아 조심스레 교회의 문을 두드립니다. 세상의 차가운 시선과 평가를 뒤로한채, 조건 없는 사랑과 용서가 있다는 하나님의 집을 찾아옵니다.
처음에는 참 좋습니다. 강단에서 선포되는 은혜로운 말씀에 굳었던 마음이 녹아내리고, 따뜻한 찬양의 가사에 남몰래 눈물을 훔치기도 합니다. 자신을 반갑게 맞아주는 성도들의 미소를 보며, "아, 드디어 내가 쉴 곳을 찾았구나. 이곳은 세상과 다르구나" 하며 닫혔던 마음의 문을 열고 교회 공동체 안으로 한 걸음씩 깊이 들어갑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렇게 교회를 찾은 이들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머지않아 아주 큰 충격과 상처를 받고 다시 교회의 문을 나갑니다. 그들의 발걸음을 돌리게 만든 가장 결정적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세상과 다를 바 없는, 오히려 세상보다 더 차갑고 날카로운 '성도 간의 분쟁과 다툼’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원수들을 피해서 간신히 도망쳐 온 마지막 피난처조차, 서로 편을 가르고 다투며 상처를 헤집는, 그런 교회의 뼈아픈 민낯을 보게 된 것입니다. 내가 피하고 싶었던 그 지독한 원수가 밖이 아니라 바로 내 옆자리,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그 자리에 앉아있음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깊은 회의감과 절망에 빠져 이렇게 묻습니다.
"도대체 사랑과 용서를 말하는 하나님의 교회에, 왜 이토록 분쟁이 끊이지 않는 것일까? 서로를 향해 이렇게 날을 세우는 이곳이, 정말 하나님이 계신, 거룩한 곳이 맞기는 한 걸까?"
여러분, 이 질문은 교회의 역사 속에서 늘 반복되었던 질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에베소 교회’ 역시,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극심한 갈등과 분열 속에 놓여 있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성도 간 화평이 없던 교회였습니다. 그곳은 결코 섞일 수 없었던 가장 지독한 두 원수,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지붕 아래 모여 있던 교회였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혐오하는 서로가 한 공동체가 되었으니, 그 안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미움이 얼마나 치열했겠습니까?
오늘 본문 속 에베소 교회를 통하여 우리 교회 안에, 그리고 내 마음속에 여전히 존재하는 분쟁과 미움의 근본적인 뿌리를 직시하기 원합니다.
나아가 영원히 분열될 것 같았던 이 원수들을 굳이 한자리로 불러 모으시고, '하나의 거룩한 교회'를 세워가시는 하나님의 목적과 뜻하심을 함께 발견하기를 소망합니다.
대지 1. 철저한 단절과 뼈아픈 상징: 내 '의'가 세운 차가운 돌담 (11-12절)
대지 1. 철저한 단절과 뼈아픈 상징: 내 '의'가 세운 차가운 돌담 (11-12절)
이 깊은 분열의 원인을 추적하기 위해, 먼저 11절과 12절을 살펴보겠습니다. 해당 본문에는 과거 이방인들이 유대인들에게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를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 다 함께 11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당시 유대인들은 스스로를 '할례당'이라 부르며 몹시 자랑스러워했습니다. 반면 이방인들을 향해서는 '무할례당'이라고 부르며 짐승 취급을 하고 멸시했습니다. 여러분, 유대인들에게 있어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들은, 그저 하나님을 모르는 이웃이나 국적이 조금 다른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율법을 모르는 그들은 존재 자체가 '부정한 자들’이었고, 심지어 당시 유대 랍비들의 문헌을 보면 "이방인들은 지옥의 불을 지피기 위한 땔감으로 창조되었다"고 가르칠 만큼 그들을 저주받은 백성으로 여겼습니다.
또한 12절을 보시면, 이방인의 비참한 현주소를 다섯 가지로 묘사합니다. 함께 12절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그들은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었으며,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철저한 외인이었고, 세상에서 아무런 소망도 없으며, 궁극적으로 '하나님조차 없는 자'였습니다. 한마디로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서 완벽하게 소외되고 배제된 자들이었고, 철저히 '멀리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이 비참한 영적 거리감을 눈으로 똑똑히 보여주는 끔찍한 상징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당시 '예루살렘 성전의 구조'입니다. (자료화면을 띠워주시길 바랍니다.) 당시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지성소를 중심으로, 안으로 들어갈수록 거룩의 등급이 나뉘어 있었습니다. 제사장의 뜰, 유대인 남성의 뜰, 유대인 여성의 뜰을 다 지나서 성전의 가장 바깥쪽, 벼랑 끝과 같은 변두리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방인들이 머물 수 있는 '이방인의 뜰'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다음 화면을 보시면) 유대인의 뜰과 이방인의 뜰 사이에는 결코 넘어갈 수 없는 약 1.5미터 높이의 거대한 돌담이 빙 둘러쳐져 있음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 담장을 당시 말로 '소렉(Soreg)'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차갑고 견고한 소렉 담장 위에는 일정 간격으로 끔찍한 경고 비문이 박혀 있었습니다. (다음 화면 넘겨주십시오.) (오늘 본문 15절에 나오는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이 가장 폭력적으로 드러난 현장이 바로 이 비문입니다.) 고고학자들이 발굴해 낸 이 돌판에는 헬라어와 라틴어로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어떤 이방인도 이 담을 넘어 성소 안으로 들어올 수 없다. 적발 시 사형에 처한다."
참으로 끔찍하지 않습니까? 이방인을 죽음으로 위협하며 쫓아내는 이 차가운 담장, 이것이 바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절망의 장벽이었습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질문을 하나 던져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담장을 세우고 또 끔찍한 경고문을 세우면서까지 이방인들을 미워했을까요? 사실 유대인들에게는 뼈아픈 상처가 있었습니다. 과거 그들의 조상이 이방인들과 섞여 우상숭배를 하다가 나라가 망하고, 또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던 끔찍한 트라우마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두 번 다시 하나님의 진노를 사지 않기 위해, 우상 숭배자인 이방인들로부터 '하나님의 성전을 거룩하게 지켜내겠다'는 아주 뜨거운 종교적 열심을 냈던 것입니다.
즉, 이방인을 향한 유대인들의 혐오와 정죄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들만의 하나님을 향한 '의(Righteousness)'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더 사랑하자, 우리가 말씀을 더 잘 지키자’라는 그들의 결단, 그들의 의가 빚어낸 비극이 바로 이방인을 향한 혐오였습니다.
반대로 훗날 복음을 듣고 은혜를 깨달은 이방인 성도들은 어땠을까요? 그들은 유대인들의 상처를 이해하기는커녕, 아직도 율법과 할례에 얽매여, 툭하면 담장을 치는 유대인들을 향해 '진짜 복음도 모르는 미련한 율법주의자들'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들은 “율법에 얽매이지 않고 오직 그리스를 믿는 우리가 진짜 이스라엘이다"라고 외치며, 유대인들과 다른 또 다른 의로 그들을 혐오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에베소 교회를 무너뜨리고 찢어놓은 것은 사탄의 뿔을 단 엄청난 악의가 아니었습니다. 교회를 위한다는 각자의 열심, "내가 하나님 뜻을 더 잘알아! 내 신앙의 방식이 더 옳아!”라고 믿는 두 개의 굳건한 '의'가 정면으로 충돌했기 때문에 그들 가운데 분열과 다툼이 생겨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의 갈등은 어떻습니까? 사실 우리 안에 일어나는 다툼과 분쟁의 이면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악당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렇게 해야 교회가 더 부흥하지, 이렇게 하는 것이 더 성경적이지!"라는 각자의 열심과 자기 의로움이 십자가보다 앞설 때, 우리는 형제를 향해 사형 선고의 비문을 들이밀며, 또 나만의 소렉(담장)을 세우게 됩니다. 내가 가진 '의'가 단단해질수록, 형제를 찌르는 가장 끔찍한 원수가 되는 이 역설이 바로 에베소 교회의 비극이요, 오늘날 우리들의 비극인 것입니다.
대지 2. 소속의 변화와 화평: 그리스도 안에 속한 자가 되다 (13-16절)
대지 2. 소속의 변화와 화평: 그리스도 안에 속한 자가 되다 (13-16절)
하지만 우리는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11절과 12절의 이 짙은 절망의 어둠과 차가운 소렉의 담장은, 13절의 선언 앞에서 완전히 산산조각이 납니다. 우리 13절 말씀을 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과거에는 약속의 언약 '밖'에, 이스라엘 나라 '밖'에, 그리스도 '밖'에 있던 자들이 바로 이방인들이었습니다. 13절을 원어의 어순에 따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제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ἐν Χριστῷ Ἰησοῦ)에 있다!” 이것은 단순히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가 조금 친밀해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방인들의 영적인 주소와 존재론적 소속이 완전히 뒤바뀌었다는 뜻입니다. "너희는 더 이상 담장 밖의 저주받은 외인이 아니라, 생명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에게 완전히 속한 자가 되었다!"라는 선언인 것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하게 되었습니까? 바로 "그리스도의 피로"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향해 들이밀던 그 끔찍한 정죄와 혐오의 장벽을 완전히 무너뜨렸습니다. 멀리 있던 자들을 그리스도의 피가 하나님 곁으로 바짝 끌어당기신 것입니다.
이 십자가의 피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이루었는지 14절과 15절이 설명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흠 없는 육체를 친히 찢으심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을 갈라놓았던 그 '중간에 막힌 담'을 영적으로 완전히 헐어버리셨습니다. 그리고 15절, 사형을 경고하며 서로를 원수 되게 만들었던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지하셨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의'가 되었던 그 모든 것을 지워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유대인과 이방인을 원수되게 하였던 그 모든 것을 없애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자신의 육체를 찢으시면서까지 이 담장을 허무셨을까요? 16절에 그 궁극적인 이유가 나옵니다. 함께 말씀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여러분,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이 지독한 원수 됨, 그 진짜 뿌리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아십니까?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 죄로 인해 이미 ‘하나님과 원수 된 존재'였다는 것에 있습니다.
타락으로 무너진 창조 세계에 가장 먼저 찾아온 비극은 '분열'이었습니다. 본래 한 몸으로 지음 받아 연합하여 살아가던 아담과 하와가, 죄가 들어오자마자 서로를 탓하며 갈라섰던 것을 기억해 보십시오. 이처럼 죄의 가장 참담한 결과는 끊임없는 분열과 원수 됨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로 이 율법의 저주를 대신 감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만들어낸 그 모든 끔찍한 관계의 분열을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온몸으로 끌어안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성부 하나님과의 처절한 단절을 홀로 겪어내셨기에, 비로소 우리가 이 지독한 원수 됨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십자가는 하나님과의 단절(수직적 원수 됨)과 인간 사이의 분열(수평적 원수 됨)이라는 두 가지 원수 됨을 단번에 소멸하신, 가장 완벽하고 위대한 화목의 사건입니다.
본론 3. 야다'를 통해 생명체로 자라가는 새로운 인류 (17-22절)
본론 3. 야다'를 통해 생명체로 자라가는 새로운 인류 (17-22절)
이제 십자가에서 모든 장벽을 허무신 주님은, 17절에서 멀리 있는 자(이방인)와 가까이 있는 자(유대인) 모두에게 '평안(평화)'의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그 결과 18절, 이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아무런 차별 없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갈 수 있는 특권을 얻게 되었습니다. 철저한 외인이었던 이방인들은 19절의 말씀처럼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자 가족'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 끔찍한 원수들을 굳이 불러 모아 하나로 묶으신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그저 유대인의 뜰 안에 이방인을 넣어주신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안에서 원수였던 둘을 완전히 새로운 '하나의 인류(한 새 사람)'로 재창조하셨습니다.
이 대목에서 바울은 아주 놀라운 그림 하나를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21절을 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αὔξει)"
여기서 '되어 가고'로 번역된 헬라어는 '자라나고'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차갑고 딱딱한 무생물인 '건물'에는 결코 쓸 수 없는 단어인 ‘자라나고’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갑자기 바울이 왜 건물을 이야기하다가 생명체의 성장을 이야기할까요? 바울은 훗날 에베소서 5장에 가서 이 놀라운 연합의 신비를 "남자와 여자가 합하여 한 육체가 되는 것" 즉, 부부의 연합에 비유합니다.
여러분, 완전히 다른 환경에서 자란 두 남녀가 만나 한 몸을 이룰 때, 단지 결혼 서약서에 사인했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하나가 됩니까? 아닙니다. 끊임없이 부딪히고 다투고 갈등합니다. 그러나 그 치열한 갈등의 시간 속에서, 서로의 연약함을 품고 상대를 향한 깊은 긍휼을 배우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구약 성경이 말하는 '야다(יָדַע)'의 은혜입니다. 부부의 연합을 표현하는 단어인 히브리어 ‘야다'는 머리로 아는 지식이 아니라, 서로의 뼈와 살을 부대끼며, 상대방의 가장 깊은 아픔과 감추고 싶은 연약함까지 몸소 겪어내는 전인격적이고 경험적인 앎입니다. 단지 상대방에 대한 정보를 아는 것을 넘어, 내 곁에 있는 지체의 눈물과 상처를 나의 것으로 끌어안아 마침내 둘이 완벽한 하나를 이루게 하는 긍휼의 앎인 것입니다.
과거에 유대인과 이방인은 할례의 유무, 율법 준수라는 겉모습만 보고 서로를 짐승 취급하며 정죄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피로 소속이 바뀌어 '한 몸'이 된 이들은, 이제 성령 안에서 서로를 '야다'하기 시작합니다.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이 왜 그토록 율법에 집착했는지, 과거 이방 우상 때문에 나라가 망해야 했던 그 처절한 포로기의 트라우마와 아픔을 비로소 이해하게 됩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그동안 차가운 소렉의 담장 밖에서 평생 겪어야 했던 멸시와 소외감의 눈물에 깊이 공감하게 됩니다.
서로가 내세우던 뻣뻣한 '자기 의' 뒤에 숨겨진 깊은 상처와 연약함을 인격적으로 체휼할 때, 비로소 그 차가웠던 두 개의 돌벽은 따뜻한 피가 흐르는 '한 몸'으로 녹아내리게 됩니다. 우리는 억지로 끼워 맞춰진 죽은 벽돌이 아닙니다. 이방인과 유대인은, 그리고 나와 내 옆의 지체는 이렇게 서로를 향한 '야다'의 은혜를 통해 핏줄처럼 정교하게 연결되어 한 몸으로 '자라가는' 살아있는 성전입니다.
결론. 원수는 실로 교회 안에서 만납니다
결론. 원수는 실로 교회 안에서 만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흔히들 세상에서는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 에베소서가 보여주는 진리 앞에 서면 이 속담은 틀렸습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나지 않습니다. 원수는 실로 '교회 안'에서 만납니다.
세상의 차가운 원수들을 피해 참된 안식을 찾으러 온 이 거룩한 피난처에서, 하나님은 왜 하필 나와 가장 맞지 않는 낯선 원수를 마주하게 하실까요? 그것은 교회가 실패해서가 아닙니다. 바로 그곳이 내 안의 견고한 소렉(담장)을 무너뜨리는 십자가의 작업장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원수 같은 그 지체를 통해, "내가 저 사람보다 교회를 더 사랑해, 내 신앙의 방식이 더 옳아"라고 주장하던 나의 알량한 '자기 의'와 정죄의 비문을 십자가 앞에 산산조각 내기를 원하십니다. 교회를 세우는 기준은 내 굳건한 신념이 아니라, 오직 모퉁잇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 묻은 십자가뿐임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를 찌르고 섭섭하게 만드는 그 지체를 만날 때, 피하거나 정죄하려 하지 맙시다. 오히려 그의 뾰족한 태도 이면에 숨겨진 아픔과 눈물을 따뜻하게 공감할 수 있는 '야다(יָדַע)'의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였으면 좋겠습니다. 내 옆의 그 사람은 내가 내 잣대로 뜯어고쳐야 할 원수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나 됨의 신비를 가르치시기 위해,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루듯 나와 뼈를 맞대어 거룩한 생명체로 빚어가시는 나의 또 다른 몸입니다.
우리가 십자가 앞에 나의 의를 철저히 내려놓고, 서로를 깊이 체휼하며 용납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세상의 원수들에게 치이고 상처받아 우리 교회의 문을 두드린 수많은 영혼들이, 십자가로 하나 된 우리를 보며 비로소 이곳에서 '진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갈라놓던 모든 차가운 담장을 그리스도의 피로 박살 내신 주님을 굳게 붙잡읍시다. 서로의 아픔을 품어 안으며 성령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거룩한 생명 공동체, 우리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통성기도
통성기도
먼저 오늘 말씀을 생각하며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야다(יָדַע)’의 마음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내 옆에 있는 이가 나와 가장 안 맞는 원수라 할지라도, 우리가 먼저 서로를 이해하고 알아가며, 그 뾰족한 가시 이면에 감춰진 아픔과 눈물을 온전히 품어낼 수 있는 긍휼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옵소서.
주님, '내가 더 옳다'며 형제를 향해 들이밀었던 나의 알량한 의로움과 정죄의 잣대를 회개합니다. 내 안에 세워둔 차가운 소렉의 담장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로 산산조각 내어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우리 교회가 억지로 끼워 맞춰진 죽은 건물이 아니라, 서로의 연약함을 껴안고 생명력 있게 자라나는 거룩한 성전이 되게 하옵소서.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모퉁잇돌 삼아, 참된 화평을 누리는 생명 공동체가 되게 해달라고 다 함께 주님 이름 한 번 부르고 간절히 기도하며 나아가겠습니다. 주여!"
2. 이 시간 인도에서 사역하시는 박정섭 문진숙 선교사님을 위해서 기도하시겠습니다. 선교사님의 기도제목을 읽어드리겠습니다.
(1)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정이 될 수 있도록
(2) 지도자 훈련 가운데 성령의 충만함이 있을 수 있도록
(3) 여름방학기간 동안 희준이가 한글을 익힐 수 있도록
(4) 중고로 구매한 차에 잦은 고장이 있다고 합니다. 이로 인해 차량을 구매하려고 하는데, 필요한 재정이 채워질 수 있도록 기도 부탁드립니다.
인도에서 사역하시는 선교사님들을 위해 이시간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마무리
마무리
다함께 찬송가 220장 함께 찬송하시겠습니다.
주기도문으로 오후예배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이상으로 오후 예배를 마치겠습니다. 모두들 평안히 돌아가시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