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의 공동생활_복종

성도의 공동생활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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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해주신 "성도의 공동생활과 복종"에 관한 강론 내용을 바탕으로, 1시간 분량의 세미나 또는 강의 형식으로 정리해 드립니다. 이 내용은 하나님의 통치 원리에서 시작하여 교회 공동체 안에서의 실제적인 복종과 목양의 관계를 깊이 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강의안] 하나님의 통치와 성도의 공동생활: 복종의 신비와 은혜

본문 성경: 히브리어 13장 17절 강의 목표: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를 이해하고, 교회 공동체 내에서 세워진 질서에 복종함이 성도에게 어떤 유익과 행복을 주는지 깨닫는다.

1. 하나님의 통치 체제: 자연적 통치와 도덕적 통치 (15분)

1.1. 만물을 다스리는 자연적 통치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만물을 자연적 질서로 다스리십니다. 인간의 육체 또한 태어나고 죽으며 소멸하는 이 자연적 법칙과 통치 아래 놓여 있습니다.

1.2. 창조 목적을 따르는 도덕적 통치

자연적 통치보다 더 중요한 것은 **'도덕적 통치'**입니다. 이는 단순히 인간이 만든 윤리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을 기준으로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의 형상을 닮은 대리자로 세워 세상을 다스리게 하셨으며, 인간은 이 도덕적 통치를 구현할 사명을 부여받았습니다.

1.3. 타락과 구속을 통한 통치의 회복

인간은 하나님의 대리자 자리를 이탈하여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려 함으로써 도덕적 통치를 거부했습니다 (타락). 이로 인해 모든 관계가 깨지고 인간은 비참한 상태에 빠졌으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에 대한 형벌이라는 도덕적 통치를 행하심으로 구원의 길을 여셨습니다. 이제 교회는 이 통치를 받아들이기로 한 사람들이 모인 **'하늘나라의 모형'**이 됩니다.

2. 교회를 다스리는 두 가지 도구: 진리와 질서 (15분)

2.1. 진리를 통한 영적 통치

교회에는 물리적인 강제력이 없습니다. 오직 성령을 통한 진리만이 성도를 통치합니다. 진리의 빛은 성도에게 인생의 목적과 지혜를 주며, 마음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순종을 가능하게 합니다. 똑같은 말씀을 들어도 누군가는 회개하고 누군가는 대적하는 이유는 그 심령이 진리의 통치를 받아들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2.2. 질서를 통한 유기적 통치

하나님은 각 성도를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이시고, 교회를 유기적으로 작동시키기 위해 **질서(직분)**를 세우셨습니다. 목회자, 장로, 교사 등의 직분은 성도를 온전하게 세우기 위한 양육적 질서이며, 성도는 이 질서 안에서 목양을 받으며 신앙의 균형을 유지하게 됩니다.

3. 공동체 안에서의 복종과 의무의 중요성 (15분)

3.1. 감정이 아닌 '의무'로서의 복종

신앙생활은 내 기분이나 은혜의 충만함에만 의존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도덕적 질서는 내 상태와 상관없이 지켜야 할 명령입니다. **은혜가 떨어졌을 때에도 자리를 지키는 '의무에 대한 감각'**은 우리 영혼이 벼랑 끝으로 추락하지 않게 붙들어주는 지지대 역할을 합니다.

3.2. 공동체적 책임과 면역력

성도의 신앙은 결코 개인적이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 죄에 빠지거나 미끄러지는 것은 공동체 전체의 면역력을 떨어뜨리는 일입니다. 반대로 공동체가 은혜로 충만하면 지체들의 허물과 상처를 금방 치유할 수 있는 강력한 영적 면역력을 갖게 됩니다.

3.3. 질서에 대한 복종: 인격이 아닌 권위에 대한 복종

우리가 지도자에게 복종하는 것은 그 개인의 인격이 완벽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를 세우신 하나님의 질서를 존중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사울을 끝까지 존중했던 것처럼, 목회자의 연약함이 보일지라도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이기에 복종하고 사랑으로 기다려 주어야 합니다.

4. 목양의 관계와 성도의 본분 (10분)

4.1. 목회자의 고뇌와 사명

목회자는 영혼을 위해 깨어 경성하는 자이며, 성도의 회심과 은혜를 보존하는 일에 전적으로 헌신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엄중한 말씀을 전해야 하는 고뇌와 성도를 긍휼히 여겨야 하는 제사장적 마음 사이에서 끊임없이 자기를 깨뜨려야 하는 존재입니다.

4.2. 성도가 누리는 행복의 비결

성도의 가장 큰 의무는 하나님의 통치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사랑, 용납, 위로의 교제를 나누며 하나님의 통치를 선치적으로 맛보는 것이 성도의 행복입니다. 또한, 성도는 목회자가 즐거움으로 이 직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돕고 기도해야 하며, 이것이 결국 성도 자신에게 유익이 됩니다.

결론 및 기도 (5분)

하나님의 통치는 우리를 억압하기 위함이 아니라, 창조의 본래 목적을 회복하고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공동생활 속에서의 복종은 단순한 굴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서 누리는 행복의 통로입니다. 우리 모두가 자기를 깨뜨리고 지체를 사랑함으로써, 이 땅에서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를 찬란하게 드러내는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기도 제목:
내 삶이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 아래 온전히 복종하게 하소서.
교회 공동체의 질서를 존중하며 의무에 충실한 성숙한 성도가 되게 하소서.
목회자들이 즐거움으로 사역할 수 있도록 사랑과 기도로 동역하게 하소서.
제시해주신 강론 내용을 바탕으로, 소그룹 공동체가 함께 진리를 탐구하고 삶에 적용할 수 있는 성경 공부 활동지를 구성해 드립니다.

[소그룹 활동지] 하나님의 통치와 성도의 공동생활: 복종의 신비

성경 본문: 히브리서 13장 17절 주제: 교회 공동체 내에서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를 받아들이고, 질서에 복종함으로 누리는 영적 유익

1. 마음 열기 (Ice Breaking)

살아오면서 누군가의 권위나 질서에 **'기쁘게 복종했던 경험'**이나, 반대로 **'복종하기 힘들었던 경험'**이 있다면 자유롭게 나누어 보세요.

2. 말씀 깊이 읽기 (Observation & Understanding)

Q1.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두 가지 방식인 '자연적 통치'와 '도덕적 통치'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만물이 태어나고 소멸하는 자연의 법칙을 따르는 통치.자연적 통치: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을 기준으로 인간을 대리자로 세워 다스리시는 통치.도덕적 통치:본래의 목적
Q2. 교회를 다스리기 위해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두 가지 핵심 도구는 무엇입니까?
성령을 통해 성도의 중심을 변화시키고 스스로 순종하게 만드는 영적 권세.진리:
성도를 온전하게 세우기 위해 목회자, 장로, 교사 등 직분을 통해 유기적으로 작동하게 하시는 체계.질서:
Q3. 우리가 교회 안에서 세워진 지도자(인도자)에게 복종해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지도자의 인격이 완벽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를 세우신 를 존중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음에도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임을 인정하며 멈췄던 다윗의 태도와 같습니다.하나님의 질서

3. 삶으로 응답하기 (Reflection & Application)

Q4. 강론에서는 신앙생활의 '의무'를 강조합니다. 내 감정이나 영적 상태(은혜의 유무)와 상관없이 '의무'를 지키는 것이 왜 중요할까요?
은혜가 떨어졌을 때에도 자리를 지키는 '의무감'은 우리 영혼이 낭떠러지로 떨어지지 않게 붙들어주는 가 되기 때문입니다.나눔 포인트:최소한의 지지대
Q5. '영적 면역력'의 관점에서, 나의 개인적인 신앙 상태가 공동체 전체에 어떤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십니까?
한 지체의 불순종이나 영적 침체는 공동체 전체의 면역력을 떨어뜨려 다른 지체들까지 상처 입히고 골게 만듭니다. 반대로 내가 은혜로 충만하면 공동체의 상처를 치유하는 힘이 됩니다.나눔 포인트:
Q6. 목회자가 '즐거움으로' 영혼을 돌보는 직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이번 주에 내가 실천할 수 있는 구체적인 순종이나 격려의 행동은 무엇입니까?
(예: 설교를 위해 기도하기, 목양의 질서에 기쁘게 참여하기, 보이지 않는 곳에서 봉사하기 등)

4. 함께 드리는 기도

내 삶이 내 기분이 아닌 아래 있게 하소서.하나님의 도덕적 통치
교회의 질서를 하나님의 의지로 받아들이며, 를 주소서.겸손히 복종하는 지혜
우리 소그룹이 서로를 용납함으로 을 이 땅에 보여주게 하소서.하나님 나라의 모형
[인도자를 위한 팁]
답변 내용 끝에 붙은 대괄호 안의 숫자 는 강론 원문의 해당 문단 번호를 의미합니다. 토의 중 깊이 있는 설명이 필요할 때 원문을 참고하십시오.인용 정보:[i]
복종은 굴욕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사랑(까리따스)**의 구체적인 표현임을 강조해 주세요.핵심 가치:
하나님의 말씀은 히브리서 13장 17절입니다. 히브리서 13장 7절입니다. 17절입니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개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아멘.
다 같이 우리 기도하시겠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오늘도 저희들이 주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입니다. 저희들의 육체에 힘을 주셔서 이 말씀을 전할 수 있도록 들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그래서 저희들이 집중된 가운데 이 말씀의 진리를 통해 은혜를 받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성도의 공동생활 중 오늘 마지막 시간 공동생활과 복종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아 핍박을 앞두고 있는 히브리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쓴 사도의 편지입니다. 핍박을 앞두고 두려워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이제 사도는 11장에서 구름같이 허다한 믿음의 증인들을 열거하면서 그들이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어떻게 고난을 이기고 승리했는지를 묘사했습니다. 그렇게 한 것은 그러한 믿음을 지킨 성도들의 본을 통해서 핍박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을 위로하기 위함이었습니다.이어서 12장에 오면서 그러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자신들의 몸을 드리도록 권면하면서 실제적인 삶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핍박이 눈앞에 온다고 할지라도 성도로서 살아야 할 애덕의 삶의 필요성은 줄어들지 않기 때문이죠. 13장에 넘어오면서 같은 어조를 가지고 이번에는 교회 공동체를 주목하면서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핍박과 고난의 날이 다가올 때 성도들은 더욱더 뜨겁게 사랑하며 그리고 교회 안에서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 안에서 좋은 목양의 관계를 누리며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며 새힘을 얻도록 성도들을 권면하고 실제로 그런 삶을 위해서 성도들이 어떻게 지혜롭게 행동해야 될 것인지를 말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공동생활 속에서 요구되는 는 복종이었습니다.
이러한 복종은 오늘날과 같은 자유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케케묵은 옛날의 관념처럼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입니다. 시대가 성경과 달라질수록 성경의 필요성은 더욱더 증대되고 진리를 따라 살아야 할 필요성도 증진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대의 정신이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의 귀를 기울이며 시대의 정신과는 상관없이 진리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공동생활이 어떻게 해서 복종 안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게 되는지를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셨을뿐만 아니라 또한 세상을 다스리고 계시죠. 이것이 바로 공동생활과 하나님의 통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두 가지로 나뉘어지는데 하나는 자연적 통치이고 또 하나는 도덕적 통치입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창조하신 세상을 자연적으로 통치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있는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보이는 모든 것은 없는 데서 태어난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들을 생겨나게끔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으로부터 시작을 해서 동물과 식물 그리고 마지막에는 들을 수도 없고 움직이지도 않는이 모든 무생물에 이르기까지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없는 것들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생겨난 것들을 소멸하게 하시고 자라게 하시고 성장하게 하시고 흘러가게 하셔서 마지막에 사멸할 때까지 하나님께서 그 모든 질서를 통치로 가꾸어 가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자연적 통치가 자연적 질서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몸도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육체는 바로 이런 하나님의 자연적 통치에 복종됩니다. 그래서 태어나고 죽고 흘러가고 소멸하는 자연의 모든 법칙을 따라서 우리의 육체도 또한 그렇게 흘러가게 되는 것이죠.
이러한 하나님의 자연적인 통치보다도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것이 도덕적인 통치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도덕적인 통치라고 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들이 알고 있는 국민윤리적인 도덕적 통치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두 인간이 만들어 놓은 도덕적인 기준일 뿐이고 그것들은 보다도 높은 도덕의 아래 존재하게 되는데 그 높은 도덕이란 바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을 기준으로 하는 도덕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세상을 창조하시고 창조하신 그 위에 또한 인간을 두셔서 인간으로 하여금 창조하신 이 세계를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에는 하늘나라를 창조하셔서 천사들로 수종을 들게 하시고이 땅에는 하나님께서 이 삶 세상을 창조하신 후에 자기의 형상을 닮은 인간을 하나님 대신하는 대리자로 두셔서 그래서 이 세상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바로 그 다스림의 의미가 바로 그런 의미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신하여서이 세상을 다스리신 다스리는이 일은 모든 이 세상에 있는 피조물에게 허락된 일이 아니라 이성과 영혼을 가진 도덕적 피조물인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권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존재의 지위면에 있어서 천사보다 뛰어난 존재입니다. 천사는 하나님의 대리자가 될 수 없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대리자로 삼으셔서 이 세상을 통치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인간이 도덕적인 통치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본래의 목적이 있겠죠.
그 본래의 목적에 기여하도록 그 본래의 목적을 구현하도록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고 그 인간이 창조의 본래의 목적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자원들이 요구되었는데 그러한 자원들로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있는 동물을 비롯한 식물과 삼라만상을 주신 것이죠.이 이 모든 것들은 사용해야 할 것이고 마지막에 즐거워해야 할 분은 자기 위에 계신 하나님 한 분이고 자기는 바로 그것들을 사용해서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주체가 되어야 하는 것이죠. 이렇게 해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의 목적을 기준으로 거기에 부합하면서 사는 것은 덕스러운 삶이고 거기에 거스리면서 사는 것은 악한 삶이 되는데 바로 그런 덕스러운 삶으로 모든 인간들이 살아가도록 그래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를 가꾸고 다스려서 창조의 영광이 한 땅에 가득하게 되도록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를 구현한 것이었습니다.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죠.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그렇게 도덕적인 통치를 이 세상에 구현하도록 인간을 창조하셨지만 인간이 타락하게 됩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구속과 하나님의 통치가 나타나게 됩니다. 인간이 이러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거스리고 자의적으로 범죄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그 큰 은혜를 망각하고 자신이 이 온 우주에 있어서 하나님 다음으로 존재하는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창조의 세계를 가꾸고 돌봐야 할 사명의 자리에서 이탈하여 자신이 하나님과 같은 자리에 오르고자 하였고 당시 자기 자신이 하나님을 제쳐놓고 최종적인 즐거움의 대상이 되고 싶어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은 인간은 하나님 앞에 범죄하게 되었고 범죄하자 하나님께서는 그 인간 인간에게 주셨던 그 모든 영광스러운 특권들을 앗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늘 복종하며 순종해서 창조의 목적에 합당하도록 자기를 사용하도록 허락하던 자연의 모든 질서들은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고 그래서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깨어지고 자연과의 관계도 깨어지고 마지막으로 자기 자신과의 관계조차 깨어져서 그래서 결국은 이런 모든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지비를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고귀함은 영혼을 소유한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영혼으로서 진리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영혼의 고귀함이 있었는데 그 진리에 대한 기억들을 망각하게 되었고 그래서 어두움에 갇혀서 인간은 유욕을 따라 사는 비참한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위험과 권세를 가지고 다스릴 수 있었던 지위를 버리고 하찮은 피조물들에게 복종되며 자연 속에서 두려움에 떨며 생존해야 하는 비참한 신사가 되었던 것이죠.
이러한 사정을 보신 하나님께서 인간이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 돌이킬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를 거절하고 산 모든 죄를 아들로 하여금 담당하게 하셔서 그 아들을 죄 있는 재물로 삼으시고 그 위에 형벌이라는 도덕적 통치를 행하심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으시고 구원의 길을 예전는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살아보려고 했지만 이제는 이행할 수 없는 그의 말고 다른 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으니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셨으니이는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의 결과였습니다. 지은 모든 도덕적 죄들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담당하시고 구원의 길을 여신 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께 돌아갈 수 없는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배려였습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우리들에 의해서 더럽혀진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하시기 위해 대신 죽으신 것을 믿고 그분께로 돌아가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의 통치로 돌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바로 이 일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내려오셨던 것이죠.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사실을 믿고 예전에 자신들이 살았던 욕심을 따르는 모든 옛사람의 삶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깊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온 모든 사람들에게 새 삶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예전에는 하나님의 도덕적인 통치를 거절하고 육욕을 따라 살았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통치를 따라서 사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며 인생에 비교할 수 없는 큰 고통은 자기 욕망의 종이 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을이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 모이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그들은 모두 거듭나는 순간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이게 하셔서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의 도덕적인 통치를 받는 것을 기뻐하는 훈련을 받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하나님과 영생을 누리면서 사는 비결이 무엇인지를 터득하게 하셨습니다. 바로 이렇게 하심으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이 세상에 자기의 외아들을 보내서 이루고자 하셨던 그 통치를 이루어가게 하신 것이죠. 그래서 이 교회는 바로이 땅에서 건설해야 할 그런 하나님의 도덕적인 통치를 선치적으로 먼저 맛본 사람들이 이루어 가는 하늘나라의 모형입니다.이 사람들에 의해서 이 세상이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이죠.
이러한 교회를 하나님께서 직접 통치하시는 것이죠. 하나님이 교회를 직접 통치하신다고 할 때이 통치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한 통치이고 그리스도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통치는 둘로 이루어지는데 하나는 진리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또 하나는 질서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진리를 통해서 교회를 통치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물리적인 권세를 주신 적이 없죠. 신앙생활을 안 하는 사람들을 옥에 가룬다든지 아니면 형벌할 수 있는 그런 권한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교회는 오직 진리로서 성령을 통해 성도들을 통치하도록 그 통치 안에서 하나님 자신의 도덕적 통치를 구현해 가심으로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신 거죠.
그것을 하나님께서 교회에 진리를 도구로 주신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교회의 이 진리 말고 다른 어떤 권세가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물론 교회는 하나님 앞에 올바른 삶을 살지 못하는 악한 사람을 여러모로 제지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찬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징계를 한다든지 심하면은 이제 교회에 더 이상 출석하지 못하도록 그를 출교한다든지 하는 그런 일들이 얼마든지 교회의 권세로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효과가 있는 것이지 그것을 징계를 받는 사람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그를 통지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성찬, 그거 평생 안 받으면 뭔 상관이 있어? 내가 언제 포도주 좋아하고 빵 먹고 살았나 하고 만약에 배장을 내민다면 그 사람은 통제할 사람이 없는 것이죠. 교회에서 쫓아내도 너희들이 무슨 권세를 날 내어쫓냐고 하며 교회에 와서 만약 고통을 주기 시작하면 누구도 그 사람을 제재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왜냐하면 교회에게 주신 권세 자체가 물리적인 권세가 아니라 영적인 권세이기 때문이죠. 그렇기 때문에 불신앙의 눈을 가지고 보면 교회는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배역한 죄인들이 교회에서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교회를 고통스럽게 해도 교회는 잠잠히 참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한번 그 진리에 붙잡힌 성도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가 얼마나 훌륭하게 수행되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성도가 있었는데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은혜를 받았어요. 그리고 깊이 찔림을 받았어요.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깨뜨려집니다. 그러면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겠죠. 자기의 본성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그 일을 그렇게 은혜 안에서 순종하게 되겠죠. 그 사람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이렇게 하라고 명령하는 것보다 훌륭한 훌륭하게 순종하며 해 나갈 수 있겠죠. 하나님의 진리에 의해 영향을 받는 사람들에게는 진리의 힘이 창칼의 힘보다도 훨씬 더 큰 것입니다.
무엇도 그렇게 할 수 없겠죠. 자, 똑같은 사람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둘 다 저 말씀은 나를 향한 말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근데 사실은 그렇게 설교하는 적은 없거든요. 설교자가 뭐 할 일이 없어서 설교할 때 어떤 한 사람을 겨냥을 해서 설교를 하겠습니까? 그렇게 말하고 싶으면 불러서 개인적으로 이야기하면 되지 뭐가 두려워서 한 사람을 생각하면서 그 한 사람을 겨냥해서 설교하겠느냐는 거죠. 그런 일들은 없습니다. 만약에 설교자가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명백하게 잘못하는 것이죠. 그냥 설교하는 거죠. 두 사람이 똑같이 아 저 말씀은 저 말은 나 한 사람을 두고 하는 이야기야 그랬습니다.
한 사람은 그 얘기를 들으면서 회개합니다. 어쩌면 이렇게 설교자가 나 한 사람의 모든 사정을 아는 것처럼 저렇게 설교할 수 있을까? 그러면서 깊이 깨뜨려집니다. 오늘이 말씀은 바로 내 자녀들을 올바르게 교육시키지 못한 나를 향한 말씀이야. 아무 들 누구 들으라고 하는게 아니라 나를 들으라고 하는 이야기야. 그러면서 회개하고 집에 돌아가서 자녀들을 다시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합니다.이 미워하던 사람들을 용서하고 화해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이게 그 사람의 목에 칼을 갖다들이 된다고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죠. 칼은 칼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외적인 의무는 행하게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으로 그것을 섬기게 할 수는 없는 것이죠.
그래서 한 사람은 개인적으로 찔림을 받아서 회개했는데 한 사람은 저건 분명히 나들으라고 하는 이야기야. 누가 또 고자질했구나. 그리고 삐졌습니다. 그 똑같이 개인에게 하는 말씀이라고 생각을 해도 한 사람은 말씀에 진리에 영향을 받으니까 그 진리에 의해서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를 받아들이는 거고 한 사람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죠. 그러면 오히려 하나님의 진리가 저희의 마음을 더 굳게 만들어서 하나님을 대적하게 만들어 줍니다. 오히려 자극하지 않았더라면 그냥 비슷하게 살아가실 텐데 진리의 말씀으로 도전하니까 대들고 그리고 항의하게 되는 것이죠. 봄날에 내리는 단비는 살아 있는 식물들에게는 생명을 움게 하는 원동력이 되지만 죽어 있는 나무에게는 겨울 동안 멈췄던 부패의 현상이 심화되게 만드는 도구가 되죠.
똑같이 살아 있는 진리의 말씀이지만 심령이 죽어 있는 사람들에게는 더욱더 죽어가도록 만드는 부패함을 촉진하고 하나님 앞에 살고자 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그 말씀이 단비가 되는 것이죠.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서는 진리를 통해서 당신의 교회를 통치하심으로 자기의 도덕적 통치를 구현해 가십니다. 그것을 통해서 성도들은 창조의 목적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자기가이 세상에 왜 태어났는지를 알고 오늘 살아가는 이 삶이 어떻게 자기를이 세상에 존재하게 하신 목적에 부합하고 자신의 인생 전체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에 부합하는 기여하는 삶이 될 수 있을까를 가지고 고민하게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전심의 사랑으로 자기 개인의 존재의 목적을 하나님의 존재의 목적에 합치시키고 그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사는 가운데 증폭되는 하나님의 영광을 인해서 즐거워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죠. 이렇게 이런 사람들을 만들려고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시고 여기에 교회의 진리를 위탁하신 거죠. 그러므로 교회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이 진리의 빛이 찬란하게 하는 것이에요.이 진리의 빛이 교회 안에 가득차게 하는 것이죠. 그래서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은 사람들은이 진리의 피 때문에 자신이 어디로부터 왔고 어디로 가며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지만 행복한지 이 속에서 지혜를 얻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잠시 있다 사라질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세상의 영광이 주는 표상들에 매여서 이게 이게 이 표상에 매어서 인간이 방탕하고 정욕을 따라 사는 옛 삶을 되풀이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하나님 앞에 그 표상 너머에 있는 영원한 가치를 바라보고 살 수 있는 지혜를 얻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진리의 빛에 의해서 그런 도움을 받게 되는 것이죠. 그런 것들을 하면서 살아가라고 하나님 교회를 세워 놓으신 것이죠. 그 교회에 와서는 매 주일마다 세상에서는 없는 새로운 가치관이 있다고 하는 것을 발견해야 돼요. 그리고 눈에 보이는 이 모든 것들이 영원한 것이 아니고이 교회 안에서는 바로 그런 잠시 있다 사라지는 것들을 일생의 목표로 생각하지 않고 영원히 존재하고 사라지지 않는 구원한 목표를 바라보면서 사는 공동체여 그 안에서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가 이루어지고 있다라고 하는 것을 경험하면서 그 정신을 가지고 세상에 나아가서 변천하는 세상에서 불변하는 진리를 붙들고 살 수 있어야 된다라고 하는 거죠. 그러므로 교회의 가장 중요한 일은이 진리의 빛을 충만하게 뿜어내는 것이에요. 그것을 먼저 뿜어내어서 성도들이 그 빛을 누리게 하고 그 빛을 성도들이 담아 가지고 가서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에게이 빛을 나누어 주는 현자의 삶을 살게 해야 된다라고 하는 것이죠. 응.
베드로전서에 보면 사도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이니 이는 너희를 기한 빛 가운데로 들어가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사도 베드로는 구원받은 우리를 향해서이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어두움에서 찬란한 빛으로 너희를 데려가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도행전 9장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 사울에게 나타나셔서 그를 당신의 사도로 부르시면서 남겨 주신 말씀입니다. 어두움에서 빛으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어두움에서 빛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 택한 나의 그릇이 바로 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이 성경 구절을 읽으면서 부끄러워지는 것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정말 교회에 찬란한 빛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정말 현자입니까? 정말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와서 형제여 내 인생을 나 혼자의 힘으로 살아가는이 세상에서 무엇이 진리인지 알 수 없고 내가 어떻게 살아야지 인생을 참 인간답게 사는 것인지 알지 못하겠어라고 말할 때 여러분들은 그에게 이렇게 살면 되느니라 하고 일러 줄 수 있는 빛이 있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일러 준이 진리대로 산 삶이 바로 나의 모습이다라고 말해 줄 수 있느냐 이거죠. 응. 오늘날 기독교 신앙은 너무 교회 안에 갇혀졌어요. 그래서 기독교 신앙 자체가 가지고 있었던 그 영광스러운 광휘 그리고 우주적 특성의 그 장엄함을 상실했어요.
그래서 이 세상에서 혼자 살기 혼자 사는 것이 힘들어서 그렇게 해서 종교로 도피한 사람들의 그런 모임처럼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안 돼요. 엊그제도 제가 어느 한 지체를 상담하면서 그런 얘기를 했어요. 사유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죽은 사람이다. 그는 결코 좋은 신자가 될 수 없다는 집하게 사유해야 합니다. 사색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시간만큼 사색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누구시며 내 영혼은 무엇이며 나는 어떻게 태어났으며 그리고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이며 그리고 나를 불행하게 하는 것은 무엇이며 눈에 보이는 모든 것 가운데 영원한 것과 잠세적인 것이 어떤 것들이며 그 차이는 무엇이고 우리는 무엇을 사랑해야 하는가 하는 것들을 끊임없이 지요하게 탐구하고 그 탐구의 과정에서 우리들은 이 성경 말씀을 통해서 훌륭한 지도를 받게 되는 거죠. 그러면서 찾아가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여러분들에게 늘 이야기하잖아요. 기독교 신앙을 여러분들이 택한 것은 아니지만은 여러분들의 의지를 통해서 하나님이 기독교 신앙을 갖게 하셨으니까 어떤 의미에서 여러분들이 선택한 것일 수도 있겠죠. 그 위에 하나님의 선택이 먼저 있었지만. 그러나 여러분들이 기독교 신앙을 선택한 것은 잘한 거예요. 왜냐하면 여러분들은 인류 역사 최고의 철학을 택한 거예요. 그리고 최고의 최고의 삶의 진리를 터득하게 된 거. 응. 그러면 어떻게 해야 돼? 그다음에 부지런히 진리의 말씀을 탐구하고 사색하고 자신의 삶을 진리에 합치시키도록 그렇게 살아야 돼. 생각 없이 흔들거리면서 살면은 안 된다라고 하는 거. 진리의 말씀을 배우고 탐구해야 하는 것이에요.
하나님께서 이 어두운 세상에 진리의 찬란한 등불을 세 개를 주셨어요. 하나는 성경책이에요.이 성경책 안에 진리의 빛이 가득 담겨 있어요. 그러나 이것은 뚜껑을 열어야지만 빛을 뿜어내는 그런 빛이에요. 여러분들이이 성경책을 수십권을 쌓아 놓은 방송에서 여러분들이 살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쌓아 놓은 성경책 때문에 여러분들이 결코 지혜로워지지 않아요. 성경을 배고 자고 자도 여러분들의 머릿속에 성경이 들어가는 것 아니고 성경을 바닥에다 깔고 그 위에서 누워 자도 여러분들이 성경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또 하나의 등불을 두셨는데 그게 바로 여러분들의 마음이에요. 그 마음에 하나님이 등불을 주셔서 그 등불로 진리의 참된 빛이 마음에 비치게 할 때 여러분들의 내면의 어두움이 물러가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고 영원한 것들을 사랑하며 잠시 있다 사라지는 표상에 메이지 않는 초월적인 삶을 살도록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시는 것이죠. 죄 많은 이 세상에 살면서 끝까지 붙들어야 될 가치가 무엇이고 그리고 사랑하지 말아야 될 것이 무엇인지를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는 것도 마음에 있는 이 진리의 등불 때문에 이렇게 되는 것이에요.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이성적으로 깨달을뿐만 아니라 깨달은 것을 사색을 통해서 끊임없이 마음에 흘려 보내어 그 마음에 진리의 등불에 불을 밝힌 사람. 그 사람들이 바로 지혜로운 현자로서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도덕적인 통치를 자기 마음 안에 받아들인 사람이에요. 자신의 삶 속에서 그 통치를 기뻐하고 그 통치받는 세상이 되게 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백성들을 위해서 선교하는 사람이에요.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 그들의 영혼 위에 하나님의이 통치가 임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 통치를 즐거워하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사람들이에요. 그 사람들이 바로 신자예요.
그러면 성경에 있는 이 등불과 신자의 마음 안에 있는 이 등불이 두 개를 연결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이 또 하나의 등불을 예비하셨는데 이게 바로 목회 사역 안에 있는 진리의 등불이에요. 여러분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엠마오로 가는 제자를 만난 것을 기억하실 거죠.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은 이미 구약의 성경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죽으셨다는 사실도 들었고 부활했다는 이야기도 들었지만은 이들의 마음은 근심과 염려로 휩싸여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메시아가 누구시고 메시아가 어떻게 고난을 받고 죽은 후에 다시 살아날 것을 증거한 구약의 성경 말씀을 잘 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있는 그 빛을 예수님의 목회 사역을 통해서 담아서 제자들의 마음에 불을 켰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지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게 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똑같은 일들이 성령 강림 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났죠. 예수님의 제자들은 성령 강림 사건 후에 제일 먼저 한 일이 구약의 성경의 빛을 퍼내어서 사람들의 마음에 등불을 켜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이 성경 말씀을 목회 사역을 통해 잘 풀어서 해설할 때 이 성경 안에 있던 찬란한 진리의 빛은 목회 사역의 등불을 통해서 성도들 마음 안의 등불로 밝혀졌고 그들은 그 진리의 등불로서 지혜로운 삶을 살면서 창조의 목적이 무엇이고 그리고 자신은 이 세상에 왜 태어났고 무엇을 하며 살아야지 되는가 나와 이웃은 어떻게 하나님을 향하여 생활해야 하는가 무엇을 믿고 무엇을 따라 살아야 하는가 하는 기준들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죠.
이 사도들의 선교는 바로 이런 것들을 알지 못해서 창조주 하나님을 대적하고 어두움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영혼들에 대한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부터 비롯된 복음 전파 운동인 것입니다. 바로 그 일을 위하여 오늘도 우리들이 지체들을 파송하지 않았습니까? 이 진리의 빛이죠. 그러므로 교회에 하여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언제나 목회 사역을 통해서 성경을 탐구하고 그 진리를 드러내는 일에 목회자는 전적으로 헌신해야 하고 그리고 성도들은 그 목회 사역에서 그것을 가장 중요하게 기대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밝혀낸 등불들을 등불들을 그 불빛을 보고만 가지 말고 그 불빛을 받아서 자기의 마음의 등불을 밝혀야 합니다. 예배드리러 나왔다가 예배 마치고 침묵하는 얼굴로 돌아가는 삶은 그냥 빛을 보고 돌아가는 삶입니다. 은혜를 받고 돌아가는 것은 바로 그 등불을 불을 붙여서 자기의 마음 안에 등불을 밝힌 삶입니다. 그가 바로 이 세상에 나아가서 성도의 성도로서 하나님의 도덕적인 통치를 받는 삶을 살게 되고 그것을 통해서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면서 사는 인간의 행복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는 삶이 된 것이에요.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부르신 것이죠.
그러므로 이렇게 하나님의 진리의 빛을 밝히 드러내어 성도들의 마음의 불을 밝히는 그 일보다 다른 일을 더 중요하고 앞세우는 교회와 목회자는 결코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와서 무엇보다도 먼저 그 등불을 밝혀 자신의 마음 안에 불을 켜고 그래서 그 진리의 영향력 안에서 살아가고 그 진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도덕적인 통치를 받아들이는 성도가 되는 것. 다시 말해서 진리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통치를 기뻐하며 순종하는 것.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의무가 성도에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앞세우지 않고 다른 것을 교회 생활의 유익으로 앞세우는 모든 성도는 결코 하나님 앞에 인정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교회 오래도록 다녀도 하나님을 만나지도 못하고 예전에는 언젠가 하나님을 만났지만 지금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진 채 죄의 지배 아래 살아가는 이유가 바로 이런 데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통해서 성도들이 모두 은혜를 받으면 교회는 어떤 물리적인 권세를 가지고 있는 세상의 권력 기간보다도 더 강하게 하나님의 통치를 따라서 살 수 있게 만들어 줍니다. 자기 깨어짐이 그런 것 아닙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깊이 깨뜨려져요. 일생 동안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인데 창조주 하나님이 용서해라 하니까 자존심을 꺾고 가서 무릎을 꿇고 잘못했다고 비는 거예요. 예.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인데 내가 그것을 명하노니 해라 하니까 죽여도 할 수 없는 그 일을 하는 거죠. 그래서 예전에 미워하고 원수처럼 여겼던 사람들을 깊이 사랑하면서 그들을 돌보고 그들을 위해 헌신하면서 살아가는 이게 바로 하나님께서 진리로 당신의 교회들을 통치하시는 거죠.
지금은 사라진 광경입니다만은 옛날에는 엿장수들이 골목에 많이 다녔습니다. 큰 구름마에다가 엿을 한 판 만들어서 그래서 신기하게이 가위를 짝짝 소리를 참 잘 몰래 한번 훔쳐서 한번 해 보면 우린 안 돼. 아, 근데 그 아저씨 잘각 잘각 잘각 그러면서 이제 온 동네를 다니면은 애들이 눈이 바빠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야, 엿장수 왔다. 새카맣게 다 몰려가요. 그러면 그 아저씨가 이제 탁탁 잘라서 요만큼씩 진짜 요만큼씩 잘라서 하나씩 입에다 넣어 줘. 그럼 이제 얘들이 바빠지기 시작하는 거야. 집에 가서 이제 찾기 시작하는 거. 뭐 고물 없나? 그래서 아직 다 떨어지지 않은 할머니 고무신 다음에 냄비 때우는 사람한테 고쳐서 쓰려고 내놓 냄비 솥 심지어는 아직 진급도 하지 않은 형에 묶어 놓은 채까지 가지고 전부 다 가서 엿 바꿔 먹는 거죠. 왜냐면 맛보기를 딱 보여 주니까 너무 맛있으니까 이제 엿밖에는 생각이 안 나는 거예. 뭐든지 엿하고 연관을 시키는 거예. 그래서 집에 가서 샅샅이 뒤지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은 몇 장수가 한번 왔다 지나가면 그날 저녁에 맞는 아이들이 많이 생겨났어. 그때 일이에요. 교회는 바로이 세상을 향해서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의 통치 그것을 보여주는 맛복이 맛보기.
요번에 우리 열린교회 아울리치 팀이 일본을 갔다 왔잖아요. 어 그래서 은혜들을 많이 받고 왔는데 저도 몇 년 전에 일본을 갔었어요. 가서 이렇게 보면서 뭐 잠깐 갔다 온 거 가지고 다 말할 순 없겠지만은 그러나 영적으로 즉시 느껴지는 것이 있었어요. 그것은 뭐냐면은 말할 수 없는 무기력과 허무예요. 허무. 허무. 그러니까 일본 잘 살잖아요. 그죠? 그러니까 이 젊은이들이 뭘 어떻게 해울지 모르는 거죠. 우리나라처럼 약간 조금 그렇게 잘 살지 못하면 어느 고민하죠. 아씨 취직해야 되는데 이거 어떻게 해야 되나? 뭐 아르바이트를 해야 되나? 뭐 막 고민을 하죠. 근데 이런 것들이 모두 해결되고냐면 인간은 아주 급속도로 허무해지기 시작하는 거죠.
지금 울산 시가 국민 소득 3만5천불의 수준을 누린다 그래요. 평균 소득이 3만5천불이래요. 그러니까 뭐 뭐 그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백화점에 가득해요. 여기 강남은 8만6,불이래요. 국민소득 8만6천불 수준이래요. 우리는 얼마나 될지 사실은 생패에서 얘기를 못 하겠는데 8만6천 불이래요. 그 8만6천 불이면은 8,600만 원이고 다섯시 네식구가 산다 그러면 벌써 4억 원 가까운 돈이잖아요. 연소도. 그러니까 뭐 부족한 것이 없죠. 옛날에는 교회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이 나왔냐면 성당 가면은 우유가루 주고 교회 나오면 밀가루 줬다고. 그 외국 선교부에서 막 갔다 부니까. 그러니까 가서 우리 어렸을 때도 교회 성탄절에 꼭 갔어. 왜냐하면은 과자 주니까. 그 봉지 이제 봉지에다 하나씩 넣어 가지고 그래서 그 저 어 뭐야 이 저 밥을 과자라도 넣어 가지고 사탕하고 넣어서 이 십자가 하나 그려서 줬거든요. 그 근 그 근데 비닐로봉지도 없으니까 우리 그때 가더니 신문으로 이렇게 꽃깔처럼 만들어 가지고 거기다가 십자가 하나 그려서 주고 그랬거든요. 그런 축성탄에서 그렇지만 지금은 그렇게 부유하게 사는 사람들한테 강남에서 밀가루 줄테니까 교회 나오라 그러면 그 교회 정신병자라 그러냐? 응. 우유가루 줄테니까 교회 나오라 그래 보라 이거야. 그럼 미친 놈들이라 그럴 거 아니냐 이거요.
그러니까 이렇게 이렇게 이 교회는 이제는 세상에 있는 것들을 가지고 우리도 있다. 이런 식으로 해서 사람들을이 사람들이 이제 불러드릴 그런 것들이 점점 어려워지게 되는 거죠. 불가능해지게 되는 거죠.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세요. 시골 같은 경우에 지금이라도 교회에서 떡을 잔뜩 해 놓고 떡 먹으러 오라 그러면 시골 사람들 막 와서 먹어요. 그 한번 강남에다가 떡 해 놨으니까 오라 그러면 너나 잡수세요. 그러고 안 올 겁니다. 그러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그러면은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냐? 그러나 그런 것들이 교회는 또 기회라고 하는 거죠.
왜냐면 욕심적인 것들이 이제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소속히 곤고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거죠. 네. 그런 삶이에요. 내가 언젠가 한번 얼마 전에 책을 하나 읽었는데 그 책에 보니까 이런 얘기가 나오고 병원에서 그 이제 음 너무 어떤 여자 한 분이 병원에서 너무 아픈 거예요. 그 진통제를 넣어 달라 그러니까 의사한테 간호원이 얘기를 했겠죠. 그니까 의사가 안 된다. 그래서 그 사람 지금 진통 맞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제 얘기해 줬어요. 그 이 사람은 그것도 모르고 간호에게 난 너무 아프리까 진통체 놔달라 그랬더니 간호원이 좀 천천히 설명을 했으면 되는데 안 돼요. 의사 선생님 안 된대요. 그러니까요. 그 자기 너무 아파서 만나는 간호마다 붙들고 사정을 하니까이 사람은 간원들 똑같이 하는 얘기야. 안 돼요. 참으세요. 못 놔줘요. 우리 병원이 그렇게 못 해요.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거예요. 그 이 사람이 나중에 거의 돌 정도가 된 거예요. 그래서 이제 각오를 하고 막 거기서 병원에서 막 난동을 부린 거예요. 그래서 나 의사를 만나게 해 달라고 의사 오라 그러라고 말이야요. 그러니까 의사 선생님이 왔어요. 그래서 의사 선생이 와서 이제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당신이 아픈 건 아는데 진통제를 못 놔아 주는 이유는 진통제를 투입하면은 이렇게 이렇게 돼서 당신의 몸이 계속 망가져서 못 낫는다. 그래서 더 나빠진다. 그래서 못 놔줍니다. 천천히 설명을 하니까이 여자가 눈물을 흘면서 고개를 끄덕떠거리더래요. 그랬어. 왜 이제 아셨어요? 그러니까 네. 그러면서 이 여자는 말이 나는 저 사람들이 나를 미워하기 때문에 주사를 안 놔 주는 줄 알았어요. 이제 주사 놀 수 없는 이유를 알았죠. 예, 알았어요. 그러면 됐죠? 아니요. 선생님, 주사를 못 놔 주시겠습 날 한번 안 알아도 주세요. 이게 이게 오늘날 풍요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인간의 정신적인 외로움이에요. 응. 말할 수 없이 비참한게 이 이게 오늘날의 이 정신적인 외로움 이런 현상들은 점점 더 촉진될 거라고 하는 거죠.
그 이런 것들로부터 이런 것들을 보면서 결국 우리는 어떤 생각을 했냐면 사람들은 점점 교회에 나와야 될 필요성을 안 느낄지 모르지만이 기독교 신앙의 필요성은 점점 더 증대될 거라고 하는 거죠. 이 사람들 마음속에서. 예. 그때 우리들이 그들을 그런 불행으로부터 건져 줄 수 있는 것이 이제 밀가루나 우유가루가 아니야. 세상에 어디든지 줄 수 있는 것 그거는 그들도 가서 얻을 수 있어요. 그 얻을 수 없는 그 무엇이 그들에게 자유를 줄 수 있어요. 예수님께서 뭐라 그랬어요? 너희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오직 하나님의 진리만이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거죠. 그런데 바로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진리의 빛을 나누어 주고 선전하게 하기 위해서 부름받은 사람들이 성도야. 근데 그 성도가 그 진리를 안 좋아해. 그리고 그 빛 아래 살지를 않아. 그럼 그 성도가 아니죠. 그리고 그는 그는 하나님의 도덕적인 통치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에요. 그 행복할 수가 없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진리를 통해서 당신의 교회를 당신의 뜻대로 도덕적으로 통치해 가시는 거죠.
또 하나는 뭐냐면 하나님께서 진리를 통해 은혜를 주심으로 당신의 뜻을 따라 살도록 성도들을 통치하시지만 또한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질서를 주셔서 그 질서 안에서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통치 도덕적인 통치를 받아들이며 살아가게끔 만들어 주시는 거죠. 이것이 바로 뭐냐면은 교회의 질서예요. 교회의 질서예요. 이 질서 질서를 통해서 이제 하나님께서이 일들을 하시는 거죠.
그럼 이 질서라고 하는 것은 뭐냐 그거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이 각자 각자 은혜를 받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구원받는 즉시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진 한 지체가 되게 하시는 거죠. 그래서 이것은 그렇게 지체가 되어졌을 때 이제 그는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서 움직 함께 공동체적으로 작용하고 움직여야 되는데 이런 움직일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질서를 정해 놓으시는 거죠. 그래서 교회를 세우시면 목회자를 보내어서 하나님께서 진리의 말씀으로 그들을 목양하도록 만드시고 또 교인들이 올바른 삶을 살아가고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지 목회자들 도와서 돌볼 수 있도록 장로들을 세우시고 영혼들을 가르치고 교육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은사와 은혜를 따라서 그들을 교사로 세우시고 구역장으로 세우시고 교회에 많은 직분 분들을 주셔서 교회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을 행하고 성도들을 섬기기에 적합하도록 하나님께서 교회를 질서롭게 작용시키시는 것이죠. 그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예요.
어떤 것들은 성경에서 직접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도 있고 어떤 것들은 그 시대를 살아가면서 성경의 정신에 의해서 섭리 가운데 세워진 제도들이 있어요. 이 모든 질서들이 바로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를 구현해 가시는 교회 안에서의 방법이라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성도의 연합,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진 성도의 연합은 영적인 연합이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연합이지만 보이지 않는 이 성도의 연합을 가시적인 유기체적 질서 안에서 이 성도들의 연합을 질서화시키심으로 하나님께서 그 질서 안에서 도덕적인 통치를 받으며 살아가도록 만들어 주시는 거죠.
그러니까 만약에 이런 교회에 질서가 없다고 할 것 같으면 여러분들이 기분 내키면은 교회 와서 은혜 생활 할 거고 그러다가 기분이 안 내키면은 집어 치고 갈 거예요. 여러분들이 은혜는 받았지만 옳게 살지 못해도 누구도 그걸 교정해 주는 사람이 없을 거예요. 그리고 교회는 질서가 있어요. 그런 질서 속에서 목양을 받으면서 진리를 알아가요. 내가 신앙생활 하기 싫을 때도 그 질서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보내어서 나를 섬기게 하셔. 그래서 나를 미끄러지지 않고 붙들어 주도록 만들어 줘요. 내가 올바르지 않은 삶의 태도가 있는데 도저히 깨닫지 못해. 근데 교회 안에는 이런 질서가 있어서 그 질서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종들이 나를 섬겨 그래서 그들의 도움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해도 잘 모르던 나 자신의 잘못된 생활의 태도를 고치고 올바른 삶으로 돌아가게 돼요.
그래서 균형잡힌 신앙생활을 하게끔 도움을 받아요. 이런 모든 일들이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도덕적인 통치를 실현해 가시는 방법이라고 하는 것이죠. 방법이라고 하는 것이다. 성도는 바로 이러한 교회 안에서 하나님이 세워 놓으신 모든 이러한 질서들을 복종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죠. 그것을 복종하는 가운데 자신이 더 많이 미끄러지지 아니하고 신앙이 침체되었을 때에도 그 질서 안에서 자기 자신이 건짐을 받고 도움을 받게 되는 것이죠. 오늘 우리는 모든 것들을 너무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는 시대에 살고 있죠. 왜 요새 그렇게 열심히 예배에 안 나오십니까? 제가 은혜가 떨어졌거든요.
왜 이렇게 구역장을 맡으셨으면 영혼들을 열심히 돌보셔야지 이게 지체들을 이렇게 내버려 두시고 제대로 먹여 주시지 않습니까? 제가 요새 저의 집에 알아 있거든요. 대대담합니다. 대담해요. 그래서 너 너 열심히 해야지. 왜 그러냐니까 아 요새 내가 마음이 마음이 아니에요. 그래서 잘 못 해요. 그 사실 이것은 잘못된 거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도덕적인 질서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충만하고 충만하지 않은 상태와는 상관없이 우리로 하여금 지키며 살도록 주신 그런 정언적인 명령이에요. 이유를 달 수가 없어요. 응. 나
나는 너를 창조한 하나님이다. 넌 나를 공경하라. 하면 그것은 충만할 때는 그렇게 하나님을 공경해도 되 되는데 그 침체에 빠졌을 때 아무렇게 해서 살아도 좋다는 건 아니죠. 그 의무는 생생하게 살아 있는 거죠. 그래서 침체에 빠졌든 충만할 때든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에게 당신을 시종일관 경외하면서 살도록 명령하시는 거죠. 이 하나님의 도덕적인 통치예요. 그 의지를 하나님이 보여 주신 거예요. 예. 침체에 빠졌습니다. 이건 자기 사정이고 그 침체에 빠져서 하나님을 경외하지 못했든지 아니면은 충만했는데도 부주의해서 하나님을 경외하지 못했든지 그거는 중요한게 아니라 어 최종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살았느냐 안 살았느냐 그게 중요한 거죠.
그러면 이제 여기에서 의무의 문제가 나오게 되는 거죠. 의무의 문제가 나오게 되는 거죠. 좋은 예가 하나 생각이 났어요. 자,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가정을 이루었어요. 근데 두 사람이 교육을 반듯하게 받았어. 그리고 철저하게 교육을 받아서 좋은 아버지 밑에서 아버지의 본분이 무언가 그리고 남편의 본분이 무언가 하는 거를 배웠어요. 자매는 아내의 본분이 뭐고 그리고 어 이 가정에 있어서 어머니의 역할이 뭔지에 대해서 자기가 다 경험은 못 했지만은 철저하게 배웠어. 그런데 살아가는데 이상하게 사랑이 식어. 그 왠지 이 남자가 자기 딴에는 잘한다고 하는데 난 만족이 안 되고 성격도 너무 이상해요.
그래도 아내가 그런 교육을 받았으면은 뭐가 살아 있냐? 의무에 대한 감각이 살아 있어요. 어 내가 남편이 나를 사랑하는 것이 만족스럽진 않지만 그러나 내가 기왕 시집와서 저 남자의 아내가 되었으니 나에게 마땅히 이런 의무가 있지. 그리고 어 애들에게도 내가 이렇게 하면 안 되지 하는 이 의무에 대한 감각이 살아 있는 거야. 남편도 마찬가지고. 근데 둘이 만났는데 이건 진짜 막대먹은 집안에서 자랐어요. 그리고 신앙생활을 해도 깨뜨려진 적이 거의 없는 진짜 육신적인 신자들이야. 그 그러네. 근데 그래요. 처음에는 사랑을 했어요. 뜨겁게 사랑을 해서 둘이 만났어요. 사랑하면 뭐 사실 안 해 주는게 없잖아요. 뭐 사랑하면 그냥 그 사랑하면 남성도 여성화 되고 여성도 남성화 돼. 그래서 음 남자가 사랑에 폭 빠지게 되면 상장 그런 거 안 하던 사람들이 걸레질도 하고 밥도 하고 뭐 마누라가 예쁜데 뭐는 못 하겠어. 다 해. 여자도 마찬가지예요. 굉장히 연약하게 짝이 없었는데 은혜를 막 이제 사랑에 빠지게 되면 사랑에 빠지게 되면 그다음에 뭐 굉장히 남성적이 되어서 남편이 뭐 생각 들리게 좀 모자라면은 자기가 가서 뭐 가서 녹아라도 해다 벌어다가 먹기는 거야. 응. 음. 그러니까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근데 사랑이 식었어요. 그럼 아무것도 없는 거야.
왜냐면 교육을 잘못 받았기 때문에 의무라는게 없어. 아버지도 잘해질던 엄마한테 잘해주면 수 틀리면 좁고 무책임해가 가정 뛰쳐나가는 어머니 이런 것만 보면서 자랐거든요. 그러니까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어 남편으로서 그럴 수 있냐 그러고 얘기하면 나 사랑이 식었거든요. 그거죠. 아내에게 당연히 어떻게 아내로서 아무리 남편이 그렇다 그러던 네가 그럴 수 있냐. 제가 사랑을 못 받는 거죠. 그게 바로 막대먹은 사람이라고 부르는 거예요.이 세상에서 그거를 신앙의 세계 속에 들어와서는 막가파 신자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에요. 그러니까 한 사람의 신앙의 인격은 그 그 사람이 얼마나 성화되었는가 하는 것은 말이죠. 은혜 충만할 때 나타나는게 아니라 바닥을 긁을 때 나타나요.
바닥을 긁어도 성화된 사람들은 그 기본이 남아 있어요. 그래서 이게 의무에 대한 생각이 남아 있는 거예요. 그래요. 그래서 어떻게 되죠? 은혜가 충만하고 들리는 말씀마다 은혜가 되고 교회가 사랑스럽고 지체들이 만나는게 기쁘고 감격스럽고 하면 사랑하지 말라 그래도 사랑하고 섬기지 말라 그래도 섬겨. 존경하지 말라. 그래도 존경하고 근데 그런게 잘 안 맞을 때가 있잖아. 그때는 뭐냐면 그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된 사람인가 하는 이게 이 성도의 본분에 대해서 얼마나 많이 자기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가 아니 그때 그때 어떻게 돼? 그때에 이제 자기가 은혜가 떨어졌어도 하나님 앞에 자기의 의무를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하는 거죠. 그러면은 자기가 은혜가 떨어졌어도 하나님 앞에 인내하면서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며 의무에 충실하게 될 때 은혜의 회복의 기회가 주어져. 그러나 은혜가 떨어졌다고 해서 집어 치워 버리고 미끄러진다고 해서 아예 미끄러움을 타 버리면은 그러면 그다음에는 자기 자신의 자력으로 돌아올 수 없는 엄청난 침륜에 빠지게 되는 거죠. 그게 처음에 시험에 되는데 나중에 악에 빠지게 되는 거죠.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야 되는 거라. 그래서 이런 질서를 어 나의 영적인 상태와는 상관없이 의무에 대한 명료한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돼요. 그것이 우리가 미끄러지되 아주 미끄러지지 않는 훌륭한 지지대가 되는 거죠.
예를 들어서 생각해 봅시다. 내가 지금 빙벽을 타고 있어. 빙벽을 타고 있어. 근데 그막 확 미끄러져서 내려와. 근데 피켓 하나라. 피켓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빙벽에 박혀 있다면 거기에 매달려서 살 수 있죠. 근데 아무것도 박힌 것이 없을 경우 어떻게 되냐? 그대로 미끄러움 추면서 벼랑 아래로 놀아 떨어 내려 떨어지는 거예요. 의무에 대한 생각이 이렇게 중요한 거죠. 그래서 제가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 해서 이런 이야기를 했죠. 제 나쁜 거, 좋은 거는 사모하는 마음으로 예배에 나와서 은혜를 받는 것이고 어 나쁜 것은 형식적으로 예배에 참석하는 거죠.
그 형식적으로 예배에 참석하는 것은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거나 다름이 없잖아요. 그렇게 설교를 했더니 어떤 사람이 그래 그럼 난 어차피 은혜를 못 받으니까 난 집어 치겠어. 그리고 교회 출석을 안 해. 그러면 이건 이제 막 하나님을 막보는 행동이에요. 하나님을 막본다는 말 이해할 수 있겠어요? 그러니까 내가 하나님 앞에 최선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직까지도 하나님을 향하여 있는 거야. 막보는 거는 하나님을 향해 대적하는 거예요. 내가 가려고 하는데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것과 하나님을 향해 칼을 빼드는 것은 틀린 거라요. 의무에 대한 생각까지 파기해 버리는 것은 바로 그렇게 하나님을 맛보는 행동이에요.
그건 아주 중대한 반역이고 이렇게 하는 그 순간 그의 영혼에는 파괴 현상이 일어나게 되는 겁니다. 그 막 인간이 막 인간이 막 망가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형편없이 망가지기 시작하는 거예. 하나님의 진노죠. 그래서 하나님이 질서를 통해서 당신의 도덕적인 통치를 구해 가시는 거예요.
하나님의 이 그러면 하나님의 통치 질서에 하나님의이 통치에 통치 질서의 본질이 뭐냐? 이건 하나님의 의지예요. 그게 무슨 뜻이냐면 하나님 자신이 그렇게 하시고 싶으시다라고 하는 것을 따라서 하나님이 의지를 가지고 이 일을 행하시는게 하나님의 통치예요. 하나님의 질서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렇게 하고 싶다.
그래서 하는데 거기 대항하고 대드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죠. 그들에게 벌을 내리시겠죠. 예. 그리고 그럭 하나님의 의지를 이해하고 하나님의 의지와 뜻에 자기를 맞추려고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상주시겠죠. 그것이 세 가지로 적용이 되는데 신자 각 개인을 향해서 먼저 적용이 돼요. 이것은 뭐냐면 예전에 하나님을 몰랐을 땐 우리가 하나님을 등지면서 살아 하나님을 배양하는 삶을 살면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의지와 반대되는 방향으로 살아간다 이거죠. 하나님을 높이라고 했는데 나를 높이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쫓아 살라고 했는데 유격을 쫓아서 살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관영과 사랑과 용서의 정신을 살려고 했는데 혈기와 미움의 정신으로 살아 그러던 사람 그러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당신의 도덕적인 통치를 보이시는 거죠. 그때에 이 통치를 받아들이는 것은 뭐냐면 그렇게 하나님을 배향했던 삶을 돌이키고 회개해서 하나님을 향하여 올바로 전향하는 삶을 사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도덕적인 통치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의지를 받아들이는 생활이에요.
두 번째는 공동체적으로 적용인 돼요. 교회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에요? 교회는 개인적 교회 안에서 성도는 개인적인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없어요. 여러분 모두 한 사람 한 사람이 거듭나는 순간 예수의 몸에 접붙여졌어. 그래서 이제는 여러분들이 자신이 그것을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던 그것과는 상관없이 이미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한 몸이야. 그러니까 오늘 만약에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받지 못하고 미끄러져서 곤고한 삶을 살고 있으면 이게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 전체에 해를 입히고 있는 거예요. 해를 입히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도 경험했겠지만은 이게 뭔가 이렇게 상처가 나면 잘 안 아무르는 체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있죠. 예를 들자면 양치질를 하다가 칫솔에 치어서 이게이 약간이 입천장이 약간 찢어 이게이이 안쪽이 약간 찢어졌어요. 음식을 급히 먹다가 혀를 깨물었어요. 그래서 혀가 상처가 나서 피가 나서 닦아내니까 피는 멈췄는데 이게 웬만한 사람의 경우에는 2, 3일 지나면 나야 되거든요. 근데 이게 곪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막 견디기 힘들게 아픈 거죠. 그래서 약을 바르고 그러는데 낫지가 않아서 어쨌든 뭐게 국 한 모음이라도 먹으려면 막 자지러지도록 아 아픈 거죠.
근데 이런 현상이 자주 일어나. 그런 사람들은 조심해야 돼요. 몸 전체의 면역력이 떨어진 거예요. 그 약 밟는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에요. 몸 전체의 면역 면역 체계 이상이 온 거예요. 응. 그러면 무슨 얘기냐면 여러분 한 사람이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져서 한 몸을 이루고 있잖아. 근데 여러분 개인이 요새 성경도 안 읽어. 말씀도 잘 안 들어. 구역 예배도 제대로 구역 공부도 제대로 안 하고 도망가. 그리고 큐티도 안 해.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그렇게 은혜를 받은 사람이 미끄러져서 마음을 폐악하게 하고 그리고 지체들과 잘 사귀려고도 하지 않아. 그러면서 계속해서 세상 유혹에 넘어져. 그런 사람들 하나하나가 모여서 그리스도 예수의 몸 전체의 면역력을 떨어뜨리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어떻게 되냐면 다른 지체들이 모두 건강의 신앙생활을 할 때에는 어떤 한 사람이 좀 미끄러지거나 죄를 지어도 그래서 교회의 상체기를 내도 금방 아물어. 근데 이제 이런 사람들이 많아져 가지고 교회 몸 전체가 면역력을 잃어버리게 되면 어떤 사람이 한번 상처를 쫙 내놓으면 그것 때문에 다른 지체들이 막 골마 들어가기 시작하는 거야. 골마 들어가기 시작하는 겁니다.
더 실감나게 예를 들어 줄게요. 여러분들이 은혜가 충만해. 그 어느 날 와서 친구가 와서 이간질을 하는 거야. 야 야 야 그 아무게 지쳐 있지? 응. 게 야, 너 엄청 갈구더라. 개 말에 의하면 넌 인간도 아니던데. 그러면 여러분들이 은혜 충만할 때에는 그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마음이 너무 상하죠. 가서 한번 따져 봐. 이런 생각을 하다가도 가서 조용히 지침 시간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데 내 마음속에 낮에 그 지체를 미워했던 마음이 떠올라요. 이건 아니구나. 그 지체가 뭔가 말을 잘못 옮겼겠지. 그렇지 않을 거야. 이게 스스로 마음의 위로를 하고 마음속으로 용서해. 설령 그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난 용서할 수 있어. 왜냐하면 그보다도 더한 죄인인 나를 주님이 용서해 주셨는데 이렇게 하면서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면서 영혼의 자유함을 얻어요. 응. 얻어.
그러면은 그 형제가 상처를 내고 갔는데 지금 아물어 버린 거잖아. 근데 여러분들이 은혜에서 미끄러져. 야, 그 어떤 지체 있지? 사실 말이 지체지. 그 자식 아니냐? 너 엄청 갈구더라. 야, 너 너 진짜 내가 막 옆에서 막 화가 나서 어쩔 줄 몰랐어요. 야, 그 너 상종도 하지 마라. 너지 너만 없을 때마다 계속 갈구는데 말이 아니더라. 그 이제 그러니 상처를 싹 내고 간 거야. 근데이 속에 면역력이 없어. 그럼이 속에서 그랬을까? 그랬지. 그러고 보니까 진짜 옛날에 그와 비슷한 기미가 보여서 이 나쁜 자식. 그래서 이서 쫙 이제 이글리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다음에 또 만나서 그다음에 자기는 듣지도 못하면서 아무게가 그러는데 너도 갈군되더라. 걔도 면역력이 없어. 그럼 이게 막 함께 곰기 시작하는 거야. 그런 이제 비유를 하잖 맨 처음에 여기 좁쌀만큼 골맞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게 막 굉장히 커져서이 이렇게 입을 벌리고 거울을 보면 막 이말이 거의 그 밤만하게 골문 자국이 누게 나타나서 그 입이 통통 붓지. 음식을 먹을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거죠. 면경이 없으니까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근데 만약에 은혜가 충만하다고 생각을 해 봐요. 그러면 한두 지체가 미끄러져도 모든 다른 지체들이 너무 불쌍히 여기는 거예.
야, 너희지 야, 얘들아, 내 말 들어봐. 얘, 너희 여기는 하나도 남기지 않고 그 어디에 있는 캐네 애들이 있지? 엄청나게 갈구더라. 그러면 거기 있는 모든 사람이 은혜가 충만하면 정말 불쌍히 여기는 거. 그 어떻게 저런 짐승 같은 인간이 어, 여기에 있으니 우리가 저 짐승을 섬기도록 부름을 받았지. 예. 주여 은혜를 내려 주십시오. 어 저도 하나님께서 응 아 그 어 그 정말 사랑해 주십시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거죠. 응 이렇게 하면서 이것들이 많하자면은 교회 전체에 대해서 이것들이 함께 이게 연 연결이 이루고 이루 이루어 가게 되는 거죠. 그니까 여러분들이 개인적인 신앙생활 뭐 그 그런 얘기 하지 마.
그런 거 없어요. 공동체 속에서 신앙생활을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유혹을 받거나 죄에 빠질 때마다 교회 전체를 생각해요. 그리고 그리스도의 내가 잘못되는 이 일이 교회 전체의 해를 끼친다고 생각을 해야 돼요. 근데 그것은 성도의 사명에 반하는 거잖아. 하나님께서 성도를 택하셔서 예수의 몸에 접붙이신 것은 뭐 하게 하시려고 그렇게 하신 거예요? 성 그리스도의 몸을 온전케 하시려고 하는 그렇게 하는 거잖아. 근데 그렇게 아까처럼 그렇게 행동하면 정 반대의 일을 하는 거죠. 그리스도의 몸을 온전케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온 몸의 온전함을 점점 해치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수 있는 삶이겠어요. 하나님 기뻐하실 수 없죠. 그런 삶을 사는 것.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를 받아들이는 것이 정 반대의 삶을 살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렇게 하면 안 돼. 그래서 신앙생활 그 자체가 공동체가 함께하는 신앙생활이에요. 항상 여러분 혼자 있는 것이 혼자 있을 때도 혼자 있는게 아니에요. 항상 지체들과 함께 있는 것이에요.
세 번째는 세상에 대해서 이러한 통 도덕적 통치를 받아들이는 거죠. 그러니까 교회는 바로 이렇게 세상 속에 구현되어야 할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를 선취적으로 맛보면서 살아가는 공동체예요. 그러니까 성도의 가장 큰 의무는 바로 이렇게 하나님의 현재적인 통치를이 교회 생활 안에서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그 하나님의 통치 안에서 아래 살아가는 것을 자신이 매우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 이것이 성도에 피할 수 없는 의무예요. 그러니까이 교회 생활 자체가 아픔도 있고 괴로움도 왜 없겠어요? 그죠? 있지요. 그렇지만 궁극적으로는 이 속에서 하늘 기쁨을 미리 맛보는 그런 것이 되는 성도들의 위로 사랑하는 지체들과의 교재 그 연합, 용납, 사랑 용서 위로 자비, 은총 격려 그다음에 올바르게 됨.이 모든 것들을 통해서이 교회 안에서 살아가는 그 자체가 행복해져야 된다라고는 행복해져. 그리고 행복해지지 못할 때에는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돌아보고 혹시 자신의 죄 때문에 자신이 그렇게 되지 않았는가? 자기의 자기가 이 교회에 있고 그리스도의 몸에 한 지체인 것이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통치를 행복해 하면서 살아가게 하는데 작은 만큼이라도 보탬이 되는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것 이것이 성도의 본분이에요. 그 일을 위해서는 자신의 힘으론 안 되고 많은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해. 그러니까 까리따스의 사랑 없이는 그것이 안 되는 거죠. 의심.
근데 오늘날 생각을 해 봐. 사람들이 너무 쉽게 생각하는 거죠. 교에서 상처를 받으면 막 싸워. 뭐 그 순간에는이 딱 딱 이게 이게 뭔가 이렇게 눈꺼에 뭐가 씌우는 거야. 성도의 본분도 잊어버리고 그러면 흉악하게 싸우는 거야. 무슨 멱살을 잡고 뭐 그냥 주먹을 날려보내는 그런 싸움만이 아니라 응. 어 개처럼 싸워요.
여러분 늘 듣는 얘기지만 교회가 갈라져서 같은 예배당에서 여기서 딴파가 예배드리고 여기서 딴파가 예배드리는 여기서 찬송 부르면 저쪽에서 통성 기도하고 저쪽에서 말씀 전하면 여기선 통성 기도해요. 아 그러면 실제로는 나도 봤어요. 그것도 모자라서 세상 법정에 끌고 가서 아이 자식 저 자식 하면서 싸우고 그러는 동안에이 세상 사람들에게 이 세상 사람들을 향해 교회가이 진리의 빛을 나누어 주고 싶어 하면 세상이 뭐라 그러냐를 너나 잘하세요. 너나 잘하세요. 그렇게 해서 한번 훼손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인상은 사람들에게 잘 고쳐지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복음을 전하다 보면은 제일 복음 전하기 힘든 사람이 불신자나 이교도가 아니라 교회 다니다가 질린 사람이나 가까이에서 교회에 질리는 관경을 경험한 사람들 절대로 예수합니다.
그는 안 믿기로 이미 결심을 한 거예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도덕적인 통치를 교회가 받아들이지 않은 그 모습 때문에 상처받은 세상을 보여 주는 거라죠. 하나님의 의지는 오히려 교회를 통해서 당신의 도덕적인 통치를 이 온 세상에 함께 구현하는 것.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 통치 아래 들어오기를 기뻐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한번 생각해 보세요. 오늘날 일본이 잘 산다고 하지만 우리도 앞으로 더 잘 살게 되겠죠. 염려가 많이 되는 거죠. 세계의 역사를 보면은 잘 살면서 하나님의 얼굴을 간절히 구했던 민족은 없어요. 그러면 결국은 우리가 무엇에 대해서 눈을 떠야 되냐면은 교회가 찬란한 빛을 가지고 있어서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물질 생활이 풍요해질수록 인간의 영혼은 아주 곤궁하고 비참해지거든요. 근데 그 그 영적인 기가를 채워 줄 수 있는 그 무엇을 그들에게 줄 수 있어야 하고 우리는 많은 소득을 누리면서 살아도 그런 영적인 기갈이 없는 그런 즐거움의 삶을 이 세상 사람들에게 펼쳐 보일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도덕적인 통치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기뻐하는 삶을 살아야 된다 이거죠. 근데 이제 이러한 하나님의 도덕적인 통치가 바로 교회 속에서 이 교회가 바로 그런 이 세상에 실현될 도덕적인 통치를 받는 것에 모형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 모형으로 이루어진 이 교회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질서를 세우시고 그리고 질서 안에서 특별히 목양을 받게 하심으로써 이제 이 교회가 하나님의 도덕적 도덕적인 통치를 제일 먼저 받아들이고 제일 잘 그 통치를 받아들이고 그 도덕적인 하나님의 통치 아래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살면서이 공동체 전체가 행복해 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하시는 거죠. 행복해 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하시는 거예요.
오늘날의 이 기독교의 문화 현상을 보면은 아 기독교의 이 현상을 보면은이 종교 현상이라고 해도 문화 현상 쪽으로 많이 기울어져요. 그래서 뭔가 현대인의 지친 심신을 교회에 와서까지 막 회개하라고 닥달하고 파에 쳐 가지고 스트레스를 받게 만드는게 아니라 그래서 이렇게 지치고 힘든 사람들을 교회 왔을 때라도 편안하게 이렇게 위로를 좀 받게 해 주고 소망을 갖게 해 주고 그래서 그렇게 되게끔 만들어 주는 것이이 현대 이거 기독교 신앙의 한 흐름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어요.
그 마치 그 아침마당 같은 토크쇼 분위기 같다거나 할까요? 이게 뭔가 이렇게 사람을 자극하지 않으면서도 사람들을 하여튼 편안하게 해 주는 이런 것들이 미국과 한국에서 우리나라에서 상당히 주류를 형성하고 있죠. 근데 저는 그런 것들이 옳지 않다고 보는 거죠. 왜냐하면 인간이 곤고하면 곤고할수록 표피적인 문제를 버리고 본질로 돌아가야지만 그 권고하면서 벗어날 수가 있는 거죠. 그렇죠? 정말 정말 죽어가고 있는 사람. 속이 병들어서 죽어가고 있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화장품을 발라주고 좋은 옷을 입혀 주고 어깨를 두드리면서 잘 될 거야. 염려하지 마. 그게 필요한 것이 아니 배를 갈라야지 그래지 그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죠. 뿌리를 드러내야죠.
다른 거 가지고 되지 않죠. 그렇죠? 그런 그런 일들을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하는 것. 그렇게 변화된 사람들이 하나님이 자기를 고치시는 과정을 통해서 보여 주신 진리의 힘을 믿으면서 하나님의 도덕적인 통치를 받아들이게 되는 거죠. 왜? 그렇게 자기를 치료하시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기 때문에 그 놀라운 사랑을 알게 되면 그다음에 자기의 존재의 목적을 하나님께 합치시키죠. 합치시키면서 그러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는 어 그런 삶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거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제 목양하는 사람을 교회에 세우시죠. 목양하는 사람을 교회에 세우셔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교회의 질서를 세우시는 가운데 특별히 이 질서 자체가 사람을 통제하고 계획하고 억압하기 위한 질서가 아니라 에베소서 4장에 나오는 바 같이 성도를 온전한 사람으로 세워서 하나님의 하나님을 섬기기에 유익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그런 종류의 양육적인 질서야. 그러니까 그 그러니까 목양의 질서가 이 모든 질서의 근본을 이루고 있는 거죠. 그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목회자를 세우는 거죠. 그 목회자는 영혼을 돌보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이에요. 그래서 영혼을 잘 돌보는 그것이 목회자의 하는 일이에요. 그의 사명이에요. 그 일을 위해서 목회자는 부름을 받았어요.
그래서 목회자는 그 영혼들을 위해서 봉사하고 영혼들을 위해서 수고하고 그 영혼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고 하는 그 일을 위해 부름을 받은 거죠. 그런 점에서 보면 목회자는 여러분들과 똑같은 한 형제로서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았지만 그가 하고 있는 그 일은 여러분들이 하고 있는 일들과는 틀린 일이죠. 그래서 어떻게 보면은 여러분과 한 형제이지만 그러나 여러분들의 영혼을 주님을 대신해서 직접적으로 돌보고 있다는 점에서 그는 여러분의 형제는 또 아닌 것이에요. 이런 이중성을 가지고 있는 거죠.
그래서 이 목회자에게는 이중적 고통이 있어요.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여서 내 형제들을 좀 이해를 해 주십시오. 이렇게 밖에 못 살아도 하나님 이해를 좀 해 주시고 긍휼히 여겨 주십시오라고 하는 제사장의 마음이 있고 또 한편으로는 그리스도 예수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아파하고 고통스러워할 줄 알면서도 하나님의 명백한 음성을 전달해 주어야 하는 고뇌가 있는 거죠. 그러니까 어떤 때는 하나님 앞에 제사장처럼 여러분들을 이해해 달라고 여러분들의 모든 잘못을 지고 나가서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빌지만 어떤 때에는 전혀 여러 편 여러분의 편이 아닌 것처럼 자기는 다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인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와서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 주면서 죄를 책망하고 그리고 교훈하고 책망하고 의로 교육하고 바르게 하는 그 일을 위해서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대로 전해서 하나님의 생각을 여러분들에게 알려 주기 위해서 때로는 여러분 모두과 모두와 함께 관계가 끊어져도 좋을 사람인 것처럼 아주 아프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될 때가 있다라고 하는 것이죠.이 이 고뇌는 여러분들은 죽었다 깨놔도 이해할 수 없는 종류의 고뇌에요. 물론 하나님의 영혼을 돌보는 이 사명들을 목회자에게뿐만이 아니라 평신도에게도 일부 나누어 주어서 그래서 성도들을 섬기게 하셨지만 그것은 보조적인 역할들이고 궁극적으로 영혼을 돌보는 사명은 하나님께서 목회자에게 위탁한 고유의 사명이고 예수님께서 어이 어린양을 먹이라고 부탁하신 그 말씀이 바로 예루살렘 교회를 맡기시면서 사도 베드로에게 부탁한 말씀이에요.
물론 사도 베드로는 혼자이 일을 하지 않았어요. 많은 동역자들이 있었고 성도들의 섬김이 있었어요. 궁극적으로 그 영혼을 돌보는 책임은 그러나 사도 베드로에게 위탁된 명령이었단 말이죠. 똑같은 구도 속에서 우리들이 이 목양의 정신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라 이거죠. 그 영혼을 돌보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이다라고 하는 것이에요. 그까 여기에서 이제 모든 고뇌가 생겨나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오늘 성경에 보면은 그런 목양의 질서 안에 있는 목회자에 대해서 말하기를 저는 너희의 영혼을 위하여 마치 자신이 하나님 앞에 회개할 사람인 것처럼 계산을 하고 샘해야 되는 사람인 것처럼 너희의 영혼을 위하여 깨어 있는 사람이다. 그렇게 성경에서 자리매임을 하고 있는 거죠. 바로 그거예요. 그것이 바로 목회자의 본분이고 바로 그 모습이에요.
그니까 만약에 목회자가 자신이 하고 있는 그 직무 중에 가장 중요한 일을 영혼을 돌보는 그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고 성도들에게 박수 갈채를 받아도 하나님은 그 사람을 향해 고개를 돌리실 거예요. 외면하실 거예요. 그러면 오늘 여러분들이 만약에 목회자인 저에게 그러면 당신의 우리를 향한 최대의 고민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으면 난 딱 두 가지밖에는 대답할 말이 없어요. 회심과 회심의 은혜를 보존하는 것. 이것이 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목표예요. 회심과 회심의 은혜를 보존하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한 거예요.
회심하지 못한 사람이 회심하고 그리고 회심했지만 미끄러졌던 사람이 다시 회심하고 회심했다면 미끄러지지 않도록 회심의 은혜를 보존하면서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하나님을 계속 사랑하며 그래서 자기를 부인하고 성도를 섬기고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통치의 목적을 받아들이는 그런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목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명이에요.
그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이것이 만약에 가장 중요한 목회의 사명이라고 한다면 그 일이 무엇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을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교회 안에서 자연적인 선의를 따라서 사람들을 좋게 대우해 주는 그 일이 사람의 영혼을 변화시킬 수 있겠습니까? 말씀이 들어가지 않아서 변화되지 않는 그 본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교회에서 많은 직분을 주어서 높이 뛰어주면 그들에게 영혼의 변화가 일어나는 일이 공식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 일은 정말로 영적인 것에 속하는 일이기 때문에 뭐 인간의 재능과 방법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그래서 우리는 성도가 많이 모이는 것을 가지고 그렇게 자랑스러워하고 그것을 가지고 우리들이 그 안일한 삶을 살 수는 없는 것이 그것은 영광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교회의 영광은 교회가 하나님의 도덕적인 통치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기뻐하는 것이에요.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의 도덕적인 통치를 받기 싫어한 이 세상을 향해 선교와 섬김 모든 봉사로서 그 도덕적인 통치를 구현해 가는 것이에요. 예.
저희가 이번에 여름 성경학교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많은 은혜의 역사가 있었어요. 그 여기에는 저의 많은 하나님의 은혜도 있었고 저의 인내도 있었어요. 그래서 내신 마음속으로 뭐 몇 년 동안 고통스러웠어요. 왜 교회 학교를 저렇게밖에 못 할까? 아, 나 옛날엔 저렇게 안 했는데 뭐 등등의 마음부터 심지어는 아주 솔직히 얘기하면 저 사람이 가고 딴 사람이 오면 좀 갈텐데 사실 그런 생각도 했어요. 근데 똑같은 마음에 내가 그런 그런 마음을 하나님 나에게 주셨어요. 하나님이 나를 향해 오래 참으신 것처럼 나도 한번 저분 저 사람들을 참으면서 기대하자. 그리고 한 두 달 천서부터 제가 정말 기도하면서 그 저 교역자들에게 퇴근했어요. 그리고 원리와 방법을 상세하게 일러줬습니다.
물론 예전에도 알려줬지만 이번엔 더 간절하게 알려줬어요. 그랬더니 목회자들이 가서 여름 성경을 앞두고 금식 기도하러 기도원에 올라가는 사람도 있었고 뭐 등등에 많은 준비가 있었어요. 그리고 해 보니까 정말로 아이들에게 회심의 역사가 일어나는 거예요. 거기서 막 굉장히 많이 고무된 거죠. 그니까 결국은 자기 자신이 철저하게 죽을 때 그때 영혼들이 회심의 역사가 일어나는구나 하는 걸 깨닫게 된 거죠. 부모들은 많이 고민하고 있죠. 우리 통계를 내보니까 5, 6학년들의 경우에는 20%밖에 회심한 사람 아이들이 없다라고 통계가 여러분 성경학교 하기 전에 나왔어요.
성경학교를 통해서 아마 40% 정도 올라갔을 거라고 보는데 뭐 정확한 통계는 아니지만 그리 그러고 나서 우리들이 많이 기뻐했는데 제가 마음에 기도하는 가운데 아직까지도 안 착한 마음이 사라지지 않아요. 아 이게이 이게 이제 이번 여름 방학이 지나가고 나면은 이제 쟤네들은 중등부 올라가는데 중등부 올라가면 다시 기회가 있을지 모르지만 회심할 가능성은 그만큼 줄어드는데 올라갈수록 회심의 가능성은 줄어드는 거예요. 70먹은 할아버지가 펑펑 울고 회심하면서 예수 믿는 거 보신 적 있어요? 최근에. 근데 여러분 청년들에게는 많이 일어나잖아. 주일학교서 더 자주 일어난 거야. 그래서 그 고심을 하다가 하나님이 지혜를 주셨어요.
네가 직접 한번 해 봐라. 그래서 8월 달에 담임 목사와 함께 하는 회심을 위한 신앙 사경회가 열려요. 1학년도부터 6학년까지예요. 함께 모아놓고 모든 참모들을 금식하고 기도시키고 뭐 저도 하도 한지가 오래돼서 감각은 없지만은 그러면 한번 힘 주시는 대로 해 보려 그래요. 왜냐면 안 되더라도 해야 되잖아요. 왜? 그게 우리의 사명이잖아요. 응. 그 아이들이 변화돼야 되. 최소한 그 아이들이 회심한 프로티지가 지금 작년들과 청년들이 회심한 프로티지보다 많아야지만 이 열린 교회 미래가 있는 거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그렇지 않냐 이 얘기예요. 어차피 나이든 사람들은 다 이렇게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죽어 넘어가는데 응.
얘네들 시대는 더 잘 사는 시대가 될테니까 더 강력한 신앙이 필요할 거 아니냐. 그래서 하기로 했어요. 모든 관심은 거기예요. 예. 거기에 쏠려 있는 근데 목회자가 바로 그런 임무를 위해서 부름을 받은 사람이에요. 그죠? 응. 그런 임무를 위해서 부름을 받은 사람이에요. 그런데 그 일이 무엇을 통해서 일어나는지 한번 생각해 보라 이거. 그 일이 무엇을 통해서 일어나는지 생각해 보세요. 그게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은혜를 통하지 않고는 인간의 본성은 바뀔 수 없는 거예요. 살아가는 삶의 태도는 뭐이 세상의 빛을 통해서도 바뀔 수 있을지 모르지만은 본성이 변화되어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을 배향하던 사람이 하나님께 순종하게 되는 이런 일들은 본성이 변화되지 않고 일어나지 않고 이 본성은 오직 진리와 성령 이외에는 어 무엇으로도 인간의 그 사악한 본성을 바꿔 놓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 일을 위해서 헌신하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이 목회자예요. 목회자예요. 이게 목회자. 근데이 일은 너무 막중한 일이에요.
나 맨 처음에는 목회는 특별한 사람이 하는 거라고 생각을 했어요. 요즘은 아주 절실하게 생각이 바뀌었어요. 그럼 보통 사람이 하는 거냐? 아니에요. 매우 특별한 사람이어야 됩니다. 매우 특별한 여러분들이 들으면 동의 안 할지 모르지만은 나는 한 때에는 목회하고 한 5, 6년 지난 다음에 내가 목회에 달란트가 있다고 그렇게 믿었어요. 상당한 기간 동안 이렇게 믿었어요. 지금은 아니에요. 오늘 아침에도 기도하면서 마음으로 드리니까요. 나는 이 일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나는 진짜 오늘 눈을 감아도 아 확신하는 건 난이 일에 적합하지 않아. 정말 적합하지 않아. 예 정말 이 일에 적합하지 않고 사명이기 때문에 하지. 나에게 그런 달란트가 있다는 거 이제 믿어지지 않아요.
이 일은 너무너무 어려운 길이에요. 너무너무 어려운 길이에요. 그렇게 될지 안 될지 모르지만 우리 아들이 목회의 길을 가겠다 그러는데 나는 마음속으로는 할 수만 있으면 안 가기를 바라. 이 길은 인간으로 태어나서 갈 수 있는 길이 아니에. 오죽했으면 제가 신학교 다닐 때 한 5년 동안 200명을 신학교에서 내보냈어요. 가지 마라.이 길은 너희들이 가야 될 길이 아니에. 그렇게 해서 안 갈 수 있는 사람은 안 가야 되는 사람이에요. 진짜 갈 사람은 그렇게 해도 갈 수밖에 없는 사람이 가는 사람이에요.이 길은 여러분 중에서도 신학을 준비하고 뭐 이런 사람이 있다는 얘기 들었는데 다시 생각하세요. 웬만하면 가지 마세요. 이 이 길은 인간이 태어나서 갈 수 있는 길이 아니에요. 갈 수 있는 길이 아니에요.
목회자는 영혼을 섬기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이에요. 그래서 근데 그 사역의 대상이 여러분 자신의 영혼이야. 그러니까 순종해야 된다 이 얘기예요. 이게 내 이야기 성경의 성경의 가르침이에요. 그 여러분들에게는 즉시 이런 의문이 떠오를 수 있어요. 목회자가 존경해야, 존경할 만 해야 순종을 하죠. 근데 여기에서 우리들이 조심해야 될 것은 뭐냐면 하나님께서 이처럼 너희의 영혼을 위해서 수고하는 자들에게 순종하라고 말씀하실 때 하나님이 어떤 특정한 개인의 인물을 염두해 두면서 지금이 말씀을 하시는 걸까요? 그건 아니라 얘기죠. 그거는 분리해서 생각을 생각을 해야 된다 이거죠. 우리가 목회자를 향한 깊은 존중심과 복종의 정신은 이게 기독교의 전통이에요.이 목회자에게 복종하는 이것이 기독교의 전통이라 얘기예요.
지금 이 전통 이런 전통이 캐톨릭에 아직까지도 상당 부분 남아 있어요. 거기서는 그 사제가 이렇게 하라고 이야기할 때 아니요라고 하는 것이 금기 되어 있어요. 근데 그 그러한 복종이 어떤 개인에 대한 존경심을 기초로 한 복종이 아니라고 하는 거죠. 이것은 뭐냐면 세워 놓으신 질서에 대한 복종이에요. 이게 하나님의 법이에요. 아마 한국 역사 가운데 요즘 노무현 대통령처럼 이렇게 국민에 의해서 떡이 되도록 씹힌 대통령은 없을 거예요. 지금 여러분 너무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물론 그분이 하는게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 언사들이 참 많아요. 무엇보든 건 너무 가볍다는 느낌이에요. 그래서 어떤 때는 기분이 나쁜게 아니라 일개의 국민으로서 불안해요. 그 왜 왜 저렇게 왜 저렇게 저렇게 경할까 그런 느낌이 드는 거죠. 그런데도 너무해. 너무해. 그런데도 대통령으로서 기본적인 존중심들이 남아 있죠. 왜? 법이 그거를 보호하고 있어요. 여기서 노무현이가 어쩌고 저쩌고 욕하는 건 괜찮은데 청와대 유리창 깨고 들어가서 대통령 멱사를 잡으면은 감옥 들어가 법이 그걸 보호하고 있는 거예요. 그거는 노무현이라는 사람이기 때문에 법이 보호해 주는게 아니라 그 질서 자체가 국법에 의해서 세워진 것이기 때문에 존중을 받는 거예요. 예.
그 똑같이 사도가 지금 어떤 존경할 만한 인무를 이야기하면서 그 사람 정도라면 너희들이 순종해야 된다. 왜? 그 사람은 진짜 너희 영혼을 자기 영혼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 그렇게 말하면서 지금 복종하라고 얘기하는게 아니거. 이건 교회의 질서를 이야기하다가 이야기하는 거예요. 목회자가 있는데 그 사람들의 본부는 너희의 영혼을 위해서 경성해 있는 것이다. 근데 고뇌를 많이 한다. 순종해라. 그 얘기는 뭐냐면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를 보면서 순종하라고 하는 것이 이것이 그림같이 잘 나타난 그 사건이 바로 사울에 대한 다윗의 태도였어요.
사울은 정신병자였죠. 하나님이 이미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사울은 자기에게 필어서 풀어서 자기를 죽이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 있었어요. 다윗에겐 여러 번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어요.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우신 자를 내가 어떻게 손댈 수 있겠냐 하면서 거절했습니다. 결국은 하나님이 대락하셨어요. 만약에 여러분들에게 여러분들에게 목회자가 있어요. 그들은 여러분보다 나이가 어릴 수도 있어요. 그래서이 세상의 경험이 일천할 수 있고 너무 빨리 신학의 길에 들어섰기 때문에 세상 물정을 몰라서 판단력이 떨어질 수 있어요. 그리고 오랜 시간 동안 공부에 자기를 바치지 못하고 바로 신학에 헌신했기 때문에 여러분보다 지성적으로 모자 부족할 수도 있어요. 혹은 여러분처럼 이렇게 오랫동안 말씀을 들으면서 목양을 받기도 전에 타오르는 열정으로 목회자가 되었기 때문에 성화가 덜 되었을 수도 있어요. 그래서 부패함이 보일 수도 있어요. 인격적으로 잘 다듬어지지 않아서 못한 부분이 보일 수도 있어요. 그까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복종해야 된다라고 하는 것죠. 성경의 가르침이라.
그러니까 이러한 목양이 질서에서의 복종이라고 하는 것은 개인의 인격에 대한 복종이 아니라 그 질서를 세우신 하나님께 대한 복종이에요. 우리가 노무현 대통령의 마음에 안 들어도 청와대 담장을 넘어서 유리창 깨뜨리지 않는 것은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존경심 때문이라기보다는 국가의 질서에 대한 존중심 때문이에요. 똑같이 교회의 질서도 바로 그런 질서 안에서 질서 안에서 존중되도록 하나님께서 택정하신 것이거든요.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까리따스의 사랑과 일치하는 거죠. 하나님을 향한 지순한 사랑을 가지고 있으면 주님이 세워 놓으신 그 질서에 대해서도 존중심이 생겨나는 거죠. 존중심이 생겨나는 거죠. 그러니까 인간적으로는 미숙하고 모자하고 부족할 수도 있고 어떤 땐 인격적으로도 아 정말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세우신 하나님의 질서를 존중하고 기다려 주는 것이죠. 기다려 주고 그리고 불쌍히 여기고 그리고 그가 그 역시 한 사람의 구도자로서 지금 성화의 길을 가고 있는 중이에요. 지금 아직은 성화가 덜 됐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바뀔 거예요. 바뀌잖아요. 그러면서 변화되어 가는 거예요. 하나님이 참고 기다리시는 거죠. 그러면 여러분도 인내와 사랑을 가지고 참고 기다려야 돼요.이 모든 것들이 목회자뿐만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공동체의 일원에 대해서 누구도 우리 중 누구도 너는 어떻게 이렇게 성화가 느리냐하고 채찍질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것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에요. 그때까지 참고 용서하고 사랑하고 책망 교훈하고 책망하고 바르게 하고 의로 교육하면서 기다려 주는 것이에요. 사랑으로.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교회에서만 바꿀 수 있는 하나님의 자비요 도덕적인 통치의 결과예요.
그런데 어느 목회자가 있는데 나쁘다. 아무리 성도가 기다려 줘도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정말 영혼을 향한 뜨거운 눈물과 사랑 없다. 진리는 그냥 세상 이야기만 즐겨한다. 그래서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 주는 변하지 않는다. 그러면 하나님이 손을 보실 거예요. 하나님이 깊이 깨뜨리셔서 변화시키시거나 돌이킬 기회를 주시거나 그래도 대책이 없으면 하나님이 죽이셔요. 데려가신다고 생명을 걷어가신다고 죽은 모든 목회자들이 그렇게 죽었다고 말할 수 없지만 하나님이 보다 보다 못해 교회를 보호하시려면 그런 사람들의 생명을 하나님이 걷어가시는 거예. 이게 하나님의 주권이에요. 그거를 믿고 하나님이 세우신 이 목양의 목사들을 존중하는 거예요.
그렇게 하지 않고 거기에 대해서 반기를 드는 겁니다. 심지어는 자기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귀합하고 그리고 부추이고 이렇게 해서 하나의 커다한 무리를 형성하는 일까지 교회 안에서 일어나잖아요. 이런 것은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아주 의도적인 상처를 가하는 거예요. 이거는 말할 수 없이 그리스도의 몸을 고통스럽게 하는 거죠. 오늘날 교회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이 많은 소송과 분쟁들이 바로 그렇게 해서 일어나는 것 아니에요. 어떤 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몸을 아프게 하지 않기 위해서 내가 모두 뒤집어쓰고 내가 희생해야지 한 사람만 그렇게 해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요. 그러는 동안에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 의해서 손가락질을 받고 하나님의 도덕적인 통치를 받아들이기는 커녕 오히려 하나님의 질서에 대해서 전반적으로 대적하는 그런 비참한 모습을 보여주는 교회을 통해서 어떻게 이 세상이 선교가 될 수 있겠느냐 한번 생각을 해 보십시오.
여기서 또 하나 생각해야 될 것은 뭐냐면 그는 영혼을 돌보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여러분과는 틀린 사람들이지만 그러나 사실은 여러분의 한 형제였던 사람이에요. 저도 한 때는 집사였어요. 그 이전에는 교회의 청년이었어요. 더 이전에는 교회학교 주일학교 학생이었어요. 그렇게 살다가 내가 예정하지 나는 생각하지도 못했는데 하나님이 나를 당신의 종으로 부르셔서 그래서 목회 사역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고 그때는이 길이 이렇게 어려운 길이 될 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결국은 하나님이 매우 특별한 일을 위해서 형제들과는 구별되는 부르심으로 부르셨지만 그러나 그는 아주 연약한 한 형제에 지나지 않는 거예요.
여러분 교회 생활하면서 뭐가 힘들어요? 헌금하는 거 힘드세요? 그래서 신앙생활을 그만둔 사람 있습니까? 주일날 교회 출석하는게 너무 벅차세요. 그래서 신앙을 버리는 사람 본 적 있습니까? 교회 가서 청소하는게 힘드세요? 구역 예배 인도하는게 힘들어요? 아니에요. 힘든 거는 종류는 많아 보이지만 마지막에는 하나요.
큰 은혜를 주우신 내 예수시니 이전 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그게 힘들어서 주님을 떠나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은혜 많이 받고 예수님밖에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하는 분이 없어요. 그래서 기쁨과 은혜의 샘물이 넘쳐 뭐가 힘이 들었어요? 교회 나오는게 힘들었어요. 즐거웠죠. 영혼을 섬기는게 즐거웠어요. 행복했죠. 물질을 바치는게 아까웠어요. 보람이 있었죠. 연약한 지체들을 위로하고 섬기는 것이 짜증났어요. 아니죠. 감사하죠. 나 같이 쓸모없는 인간을 들어서 연약한 지체들을 섬기고 나 같은 사람을 사용하셔서 곤고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위로를 전달해 주시는 이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들이 감사하지 않아서 그 목회자는 뭐가 힘들까요? 힘든 건 많아요.
저는 교회를 경영하면서 그렇게 생각을 했어요. 교인들 중에 중소 기업을 경영하는 사람도 있고 직장 다니는 사람도 있지만 나도 직장 생활 해 봤지만 그 무게가 목회자의 무게만큼 안 될 거라고 내가 생각해요. 왜냐하면 사업은 하다 망가지면 자기만 구겨지면 되잖아요. 이거는 뭐냐면은 뒤로 물러설 수 없는 현장이에요. 속내를 한번 얘기해 볼까? 한 5년 전 부터 마음에 간절한 소원이 있어요. 1년만 여러분하고 헤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나도 모든 일에서 해방되어서 한번 하나님과만 살았으면 좋겠어요. 계속 뭐 아름다운 무슨 관광 그런 건 난 좋아하지도 않아요. 그냥 깊은 숲속이면 돼요.
흐르는 시냇물이 있고 살아부는 바람이 있는 곳입니다. 한적한 거 새벽에 이슬을 맞으며 기도하고 싶고 내 영혼만 돌아볼 수 있는 날이 있으면 좋겠어요. 하루 종일 진리의 말씀을 생각하고 탐구하고 저녁에는 별빛 쏟아지는 숲속에서 기도하고 평생 소원이에요. 근데 직감적으로 그런 호강하는 날이 살아 있는 날 동안에 안 올 거 같아요. 난 목회를 하면 돈으로부터 가장 자유로운 직업일 거라고 믿었어요. 근데 저는 태어나서 물질 때문에 가장 고통을 받아본 거예요. 목회를 하고 나서요. 살인적으로 밀려드는 많은 일. 어느날 오후 4시에 겨우 세수를 하는 날도 있었어요.
교회를 짓는 일, 실족한 성도를 위로하는 일.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싫어서 보따리를 싸는 교인들을 뒤에서 바라보는 목회자의 마음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에요.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그건 어려운 일은 아니에요. 내가 의지를 가지면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그러나 어려운 일이 하나 있어요. 그 여러분들이 어려워하고 있는 일하고 똑같은 거예요.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어떤 사람은 목회자라면은 주님을 사랑하는 일 정도는 이미 마스터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새빨간 거짓말이에요. 그렇더라면 사도 바울이 왜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말했겠어요? 예. 말이 안 되죠. 근데 문제는 뭔지 아세요? 성도들이 목회자들을 기다려 주는데 매우 인색해요. 그래서 완전한 사람을 요구하는 거죠. 그러면서 어느 하나도 잘못하지 말아야 돼요.
보십시오. 개인적으로 목회자가 경건해. 기도 많이 해. 그러면은 설교는 아무렇게나 해도 용서해 줄 수 있겠어요? 설교도 불꽃이 튀어야 돼요. 그러면 기도 많이 하고 설교에만 은혜가 쏟아지면 나머지는 다 용서할 수 있어요. 그래서 산속에서 꾸준히 하나님을 묵상하자 주일날 와서 폭탄 하나씩 떨어뜨리고 가면은 다 용서해 줄 수 있어요. 어림도 없어요. 적어도 한국 교회는 그렇게 안 해요. 두 가지를 다 잘해서 하늘의 사람 같아도 교회 일도 잘 처리해야 돼요. 열 개를 잘 처리하다 하나가 잘못해서 교회가 흔들리면 모든 비난을 한 몸에 다 받아요. 지도자로서 리더십을 의심받는 눈초리 아래 있게 돼요.
그렇죠? 자주 아픈 목회자도 교인들이 좋아하지 않아요. 한 달 아프면 죽도 쏘고 그리고 병원도 알아보 준다 그러지만은 1년 들어 놓으면 얼마 주면 나가실까 후임은 누가 올까 계산하기 시작하는 것이 교회예요. 그뿐만이 아니죠. 아무리 진리의 말씀을 잘 전해도 우울하고 진지한 목회자는 싫죠. 강단을 내려오면 언제나 유쾌하고 제기 발랄해서 성도들과 함께 웃고 친구처럼 어울릴 수 있는 시골 아저씨 같은 목회자를 원하죠. 그런 제기 발랄한 시간이 끝나고는 다시 진지하게 피를 토하는 설교를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신해 줘야죠. 근데 그런 사람은 이 지상에는 없습니다.
천사들 중에 찾아보면 혹시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 많은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것은 할 수 있는데 그러면서도 영적으로 계속 진보해야 됩니다. 끊임없는 자기 깨어짐 속에서 뒤로 물러서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고 성도들이 볼 때 늘 경탄할 수 있으리 마치 순결하고 하나님을 사랑해야 돼요. 근데 언제나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목회자들이 자기는 그렇게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은 안 그럴 때가 많다라고 하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솔직히 말해요. 그때 목회자는 자기 자신이 지극히 연약한 한 인간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거예요. 잘 깨닫는 거예요.
주일이면 수천 명의 성도들이 예배당에서 들끓가 쫙 나가요. 그리고 밤중에 마당에 한복판에 혼자서 있어요. 그때 정말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주님의 손에 붙잡히지 않는다면은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오늘 성경에서 뭐라 그러냐면은 그 이러한 목양이 마음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거 저희로 하여금 즐거운 마음으로 하게 하는 즐거운 마음으로 하게 하고 근심하는 마음으로 하게 하지 말아라. 그 자체가 뭘 얘기하냐면 만약에 그분이 하나님이시라면 근심하기 때문에 해야 할 일을 못 하는 경우가 있을까요?
하나님에게 그런 일 없어요. 천사에게도 그런 일 없을 거예요. 그러면 인간이기 때문에 그런 일이 가능한 거예요. 해야 되겠다라고 하는 분명한 의무에 대한 인식이 있는데 마음이 산란하고 혼돈스럽고 염려와 근심으로 가득차게 되면은 그 그렇게 회심과 회심의 보존을 위해 자기를 바치는 이러한 집중적인 사역 자체가 힘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오늘 사도가 이렇게 권면을 하고 있는 거죠.이 결국은 목양의 질서 안에 있는 목회자의 인간적인 연약함을 보여주는 거죠. 처음에는 목회는 뛰어난 사람이 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지금은 아니에요. 매우 뛰어나야 해요.
나는 매일 그리고 아침마다 밤마다 나는이 사역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그 자기 고백 속에서 살아요. 아, 난 적합하지 않아. 정말 예전에 나는 적합하다. 달란트라고 생각했던 그것들이 사실은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 그러면 도달하게 되는 결론은 뭐예요? 하나님의 은혜 아니면은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구나. 그렇게 해는 거죠. 근데 그런 연약한 연약한 연약한 인간이 목회자. 그런데도 오늘 뭐라 그러냐? 그에게 순종하도록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거죠. 그 이유는 역설적이에요. 연약하기 때문에 순종하는 거예요. 그래서 뭐냐하면 자신의 힘으로는 성도를 끌 수 없는데 성도들이 자기가 훌륭한 목회자라는 사실 때문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이 질서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까리따스로 이 질서에 복종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거예요. 그때에 연약한 목회자는 그 도움을 받는 거예요. 그 도움을 다시 말씀드릴게요.
목회자가 훌륭하기 때문에 성도들이 순종하는게 아니라 성도들이 하나님을 향한 까리따스의 사랑을 가지고 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세우신이 질서를 사랑하는 거야. 그리고 의무에 대한 명확한 인식하여서 하나님을 보고 그 질서에 순종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역설적으로 목회자가 연약할 때 그 도움을 받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연약한 자가 다시 일어서는 거예요. 일어서는 거죠. 한 주일에도 몇 번씩 내가서 있는이 자리가 정말 내가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는 자리인가? 내가 아니고 다른 사람이 여기 서 있다라면 훨씬 더 섬길 수 있는 자리에 내가 성도와 교회와 그리스도에게 짐이 되고 있지는 않은가? 난 고백해요.
입술의 고백이 아니라 매일매일 생각해. 난 적합하지 않다. 그걸 깨닫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그런 그러한 목회자에게 순종하도록 가르키시는 거. 여기서 목회자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저처럼 한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목사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이 함께 목회 사역에 동참하는 모든 교역자들 심지어는 이제 신학을 공부하면서 미래의 목회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까지 포함해서 이 그 사람들에게 순종하라는 거에요. 이 길은 너무 특별한 길이고 걸어가는 사람들 중에 누구도 자기가 원해서 이 길에 들어선 사람이 없어. 그렇다. 만약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중대한 실수를 한 거죠. 이 이 그렇게 해서 갈 수 있는 길이 아니에요. 그 한번 생각해 보세요.
오늘 여러분들이 토요일 날 마음에 상해요. 그럼 주일날 교회 안 나올 수도 있고 아니면 교회 나왔지만은 마음은 하나님께 안 드린 채 예배드릴 수 있어요. 그 목회자에겐 그런 자유가 허락이 안 돼요. 토요일 날은 마음이 많이 상하는 일이 있고 심지어는 개인적으로 어 상처받은 일이 있어도 주일날 설교하러 올라올 때는 그를 다 용서하고 사랑해야 돼. 그래야 설교를 할 수 있는 거예요. 근데 그 일이 너무 얼마나 어려운가는 여러분 알잖아요. 오랜 세월을 들고 서서히 고치라 그러면 고치겠는데 하나님은 언제나 바로바로 고치도록 요구하시는 거죠. 그 속에서 끈이 없는 자기 깨어짐과 죽음이 아니면은 그게 될 수가 없어요. 응.
탕자는 오랜 세월 동안 타락했다가 다시 돌아와서 감격적인 기쁨을 맛보았지만 목회자는 그런 탕자가 하나님께로 돌아온 거 같은 감격적인 기쁨을 수시로 맛보아야 돼. 타락하지도 않았는데 그 타락의 씨를 자기 자신 안에서 보면서 자기 깨어짐으로 나가야 된다. 얘기 목회자가 한 1년 동안 타락의 길을 걷고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교회가 어디 있느냐 이거죠. 1년 후에 내가 타락에서 돌아와서 감격적으로 복음을 전하겠다 그럴 때 기다려 줄 교회가 어디냐 이거죠.
허락을 안 해요. 그러니까 자기 안에서 그런 모든 것들을 경험하면서 그 씨들을 발견하면서 실제로는 탕자와 같은 길을 안 갔는데도 그 길을 걸어가게 만드는 요소가 자기 안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면서 거기에서 아파하고 자기 깨어짐의 길을 걸어가야 돼요. 그러면서도 밀려드는 그 모든 일들을 뒤로 미룰 수 없어요. 누구에게 위임을 하겠어요? 그 모든 짐을 다 짊어지면서 영적인 진보는 진보대로 이루어져 가고 영적인 진보는 진보대로 이루어가면서 자신의 죄에 대해서 깨뜨려지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차는 일들은 매일매일 그의 영혼 안에서 쇄신되어서 일어나야 돼요.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으면 제일 먼저 자신이 알고 두 번째는 성도들이 알아요. 그 설교의 은혜를 안 받아요. 교인들이 교만해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설교에서 일단 피냄새가 사라지기 시작하면 이 성도들은 교만해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말씀의 권위는 짓밟히기 시작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교회의 목회자로 베드로를 부르시면서 물으셨어요. 질문하시고 싶은 내용이 얼마나 많으셨겠어요. 근데 예수님이 물으신 질문은 단 한 가지 날 사랑하느냐? 예루살렘 교회를 사랑하느냐고 안 물어보셨고요. 양떼를 사랑하느냐고 물어보시지 않으셨어요. 네가 날 사랑하느냐? 그것도 현재의 형으로 물어보셨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 그 이게 최고의 숙제죠. 이거 어떻게요? 상처를 받아도 혈기를 부릴 수가 없어요. 그날 밤에 씨름하면서 마음에서 씻어야 돼요. 안 되면 그다음 날, 안 되면 그다음 주, 안 되면 그다음 달. 그러면서 덜어내 Ah.
그러면서 가는 길이에요. 그래서 이 목회 사역에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는 그 길을 걷지 않는 사람들은 도주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한 세계가 있어요. 하나님이 사랑해 주셔요. 매우 특별한 방법으로 만약에 차별 대우 한 것 같은 그런 특별한 사랑이 아니었다면은 이 길을 오늘날까지 걸어올 수 없었을 거예요. 어떤 때는 아주 명백하게 그분이 나를 편애하신다고 느낄 정도로 사랑하시는 것을 경험해요.
많은 고통과 괴로움에 시달릴 때 혈기를 꺾고 정히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 마음에 있는 수많은 언어들을 불처럼 타오를 때 그분 앞에 나아가고 그리고 조용히 예수님의 고난의 생애를 묵상합니다.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 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 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지금도 그렇지만 저는 혈기방자한 청년이었어서요. 주님이 목회의 길에서 수없이 가슴앓이를 하게 하시면서 낮추고 또 낮추고 낮추고 하나님은 편해에 가까울 정도로 사랑하시면서 가혹할 정도로 깎으시는 분이죠. 그렇게 하면서 구도의 길을 걸어왔는데 지금 그 모습이 여러분 앞에서 있는 이 정도의 모습밖에 안 돼요. 그래서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실망했다. 뭐 설교에 대해서 뭐 어쨌다 이런 얘기들을 때 난 조금 더 부당하다는 생각하는 적 없어요. 오히려 은혜받은 성도들이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거고 미끄러진 사람들이 정확하게 보는 것일다 그렇게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마지막에 하나님의 은혜밖에 없다라고 하는 것을 깨달아요. 그래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거예. 성도는 목회자에게 사랑해야 할 대상이지 의지해야 할 상대는 아니에요. 그래서 사랑하는 거죠. 저는 목회를 하면서 하나님 앞에 너무 감사한 것이 있어요. 그것은 뭐냐면은 고난의 길을 걸어오게 하시지 않았더라면 지금은 정말 더 쓰레기 같은 인간이 되었을 것이다라는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과 같이 나아오리라. 가슴에 늘 새겨지는 말씀이었어. 지금도 그래요.
이런 하나님을 의존하는 마음은 사실은 목회자 안에서만 일어나야 될 마음이 아니라 성도 안에서 일어나야 될 마음이라는 거죠. 그래서 완전하지 않은 불완전한 인간을 목자로 순종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그 목회자를 목회자를 사용하셔서 나를 이끄시긴 하지만 내가 의지할 수 있는 분은 목회자가 아니고 목회자를 붙들고 계신 하나님일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이유를 여기서 발견하게 되는 거죠.
그가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고 학식이 있고 능란하게 설교하고 그리고 매같이 뛰어난 지혜로 그렇게 교회를 다스린다고 할지라도 그를 의지하고 그 모든 자원이 그에게 있는 것처럼 생각하면 하나님이 그것을 교회의 교만으로 여기시는 거죠. 그래서 반드시 그 목회자에게 실망하게 만드셨어. 그리고 걸려 넘어지게 하시고 목회자들 목회자들은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셔서 성도들을 의지하지 못하게끔 만드시죠. 그 주일날 예배에 나와서 설교를 통해 하나님을 만날 것이라는 기대를 갖는 것은 너무 당연한 거예요. 근데 기도하지 않고 그 기대를 갖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의 재주를 의지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렇게 살아서 안 된다고 하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거죠.
하나님의 이 교회에 대한 생각은 우리들이 느끼는 거보다 훨씬 섬세해요. 예. 그래서 하나님은 어떻게하든지 이 교회가 대충 대충 꾸려가는 집단이 되기를 원하지 않으시는 거예. 당신의이 도덕적인 통치를 온전히 받아들여서 정말 온전한 예수의 몸을 잃어가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런 것도 간섭하시는 거예요. 그 한번 생각해 보세요. 성도들이 교회 나왔는데 뭐 사모하는 마음으로 말씀의 은혜를 받으려고 해. 이게 얼마나 교회 아름다운 모습이에요. 하나님이 보기에 흉할 때도 있다 이거 그것이. 응. 왜 너는 그 목회자를 붙들고 있는 나를 의지하지 않고 나서 좋은 말로 너희들에게 설교를 하는 감동을 줄 수 있을 거라고 이 설교자를 의지하냐? 그 네가 나를 의지하지 않고 설교자를 의지하면 내가 설교자에게 반드시 너를 실망시킬 수 있도록 기회를 주겠다 이거. 응.
그러니까 교회는 목회자로부터 모든 성도들까지 모두 필요한 것이 뭐냐면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에요. 하나님을 향한 그 다한 목마음 지혜를 모두 자 체 체계를 갖춘 질서를 잘 다듬어 훌륭한 사람을 세워 온갖 힘을 다해서 교육을 해 온 마음과 지혜를 동원해서 많이 배워서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어 그 일이 왜 안 필요하겠어요? 예. 왜 안 필요하겠어요? 예수님이 갈릴리 바닷가에서 간섭하실 때 일어났던 고기를 잡는 기적들도 고기가 배 위로 뛰어오는게 아니라 그물을 가지고 잡았어요. 그 그 일이 왜안 필요하겠어요? 문제는 그 일이 필요 없는게 아니라 사람들이 그렇게 철저하게 일하다가 보면 하나님을 안 의지한다는데 문제가 나오는 거예요. 하나님이 안 의지하게 되는 예 하나님을 안 의지하게 된다라고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정말 도전하고 싶어요. 여러분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주님을 만나려고 갈망을 가지고 예배에 나오는지 묻고 싶어요. 그럼 여러분의 다수는 저는 그런 갈망이 있습니다라고 말할 거예요. 근데 그럼 묻고 싶어요. 그 갈망의 크기만큼 기도하는지 묻고 싶어요. 이런 모든 것들이 하나님이 보기에는 아주 흉물스러운 교회 생활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은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일수록 온전해지기를 간절히 열망하시는 거예.
그래서 하나님이 열심으로 우리들을 연단하고 우리를 시키시고 우리를 고치셔요. 응. 고치셔. 설교의 능력이 나타나고 교인들이 은혜 가운데 있고 마음에 고통이 없는 날 목회자가 전심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에요. 그래서 때로 하나님은 고난을 허락하셔요. 응. 때로는 하나님이 오랜 연단을 받아서 이 강해졌기 때문에 때로는 여태까지 당해 보지 않았던 그런 연단도 허락을 하십니다. 그래서 주님만을 바라보게 하신 거죠. 이런 원리들이 성도들에게도 그대로 적용이 되는 거죠. 그래서 목회자가 무엇인가 온전하게 못 해낼 때 그래서 불안하고 무엇인가 자기를 실망시키는 것 같은 위기를 느낄 때 그때가 바로 하나님의 은혜의 기회야. 그걸 통해서 아 우리는 안전하지 않구나. 우린 안전하지 않구나. 응. 하나님의 사자가 우리를 인도하시지만 안전하지 않구나. 그러면서 정말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는가를 묻게 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에요. 방법이에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이 세상에 제일 미친 사람이 누구냐면 좋은 교회 왔다고 혁대 풀르는 사람이야. 그런 교회 없어요. 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혁대를 푸르는 순간 나쁜 교회가 되는 거야. 자기 때문에. 응. 하나님이 이 땅에 교회를 세워 놓으시고 교회를 영원히 지켜 주실 것을 약속하셨지만 그것은 그걸 약속하셨지만 그것 때문에 성도들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갈망하지 않아도 된다라고 하는 뜻은 아니에요.
그래서 하나님을 간절히 갈망해야 되는 주일학교도 그런 생각을 하는 거예요. 지금 상당수가 아직 많이 회심 안 했거든요. 제가 보기에는 5, 60%나 회심했다고 보면 아마 높은 비율 거예요. 그 나머지는 완전히 생짜배기들이에요. 응. 그 왜 회심 안 할까? 사실 우리 교회도 시스템은 갖춘만큼 갖췄어요. 교역자 다 세상에 내놓라 하면은 어 다 좋은 대학 나온 사람들이고 다 석사받은 사람들이야. 예. 어디 가도 그만한 사람들 못 구해. 그건 뭐냐? 난 이걸 갈망으로 본다 이어지 우리가 자라는 세대의 회심을 향해서 내 영혼인 것처럼 응 우리의 미래가 저들에게 있는 것처럼 그 영혼을 위해 목매어 하느냐? 응.
내가 내 자식, 내 새끼들을 향해서 어 내가이 아이들의 회심을 언젠간을 하겠지. 그러다가 나중에 다 커서 불신 잠에 데리고 와서 예식장에서 결혼하겠다 그러고 목사 줄여도 필요 없다 그러고 우리 신앙 강요하지 말라 그러고 이런 사태가 벌어지기 전에 금년을 넘기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 오늘 저를 저에게 회심을 주십시오. 이런 눈물이 만약에 우리 부모들에게 있다면 그리고 우리 교사들에게 있다면 저렇게 되지 않을 거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영혼들이 돌아오기를 원하시느냐 말이죠. 응. 그런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절대적인 갈망. 손으로 지혜를 발휘해서 모든 것을 하면서도 매순간 그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요.
우리가 온 힘을 다해서 주님을 섬기고 교회를 온전케 되기 위해서 우리들이 모든 지혜를 다 동원하지만 그러나이 모든 것들은 갈멜산 위에 올려 갈멜산 위에 쌓아올려진 장작에 불과합니다. 불을 내려서 타오르게 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응. 그 고백이 정말 우리들에게 있느냐. 응. 정말 우리들에게 있느냐? 제가 작년 한해 동안 수없이 질문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어요.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 볼지라.
교회가 커가면서 얼마나 안 좋은 일이 일어납니까? 예전에는 말씀의 은혜 받기 전에는이 교회에서 등록하는 사람들이 없었어요. 예전는 뭐 지붕이 이뻐서 마당이 예뻐서 등록하는 사람들까지 나와요. 아무 생각 없이 등록하는 사람들. 그들은 자기 자신의 영혼을 위해 울지 않아.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어요. 그럼 무슨 얘기냐면 남아 있는 우리들이 져야 될 그 십자가 그것이 더 많아진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고 이것들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거예. 목회자만을 믿을 수가 없어요. 어떻게 믿을 수가 있겠어요? 얼마나 연약한 인간인데요. 나도 신뢰하지 않은 나를 여러분들이 나를 신뢰하셔야 되겠어요? 정말 아무것도 아닙니다.
응. 정말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에는 항상 눈물이 고여야 해요. 기쁨의 눈물 그리고 갈망의 눈물 그리고 주님이 아니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를 이렇게 모아 놓으셨고 교회가 이렇게 세워지고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으로 설교를 듣고 주님을 만나고 그러지만 사실 이것은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지 않으면은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정말 저를 하나님이 그렇게 붙들어 주시도록 여러분들의 교역자들을 그렇게 붙들어 주시도록 그렇게 여러분들이 갈망하고 있습니다. 정말 여러분들의 눈에 우리 목회자를 향한 눈물이 흐르고 있습니까? 정말 흐르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은혜의 영을 부으실 때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제도나 방법 위에 부으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갈망하는 사람들 그 위에 하나님이 그런 은혜를 부으십니다. 그런 은혜를 하나님이 부으시는 오늘 설교는이 순간도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아요. 우리가 마음을 더 많이 하나님께 바쳤더라면 이룰 수 있는 일들이 얼마나 더 많았을까? 곤고한 영혼으로 미끄러진 수많은 지체들은 그 영혼들이 살아났을 겁니다. 세월이 많이 흘러도 아직까지도 회심하지 않고 있는 영혼들은 이미 오래전에 그리스도 예수의 창고에 추수되었을 것입니다. 형식적인 섬김과 그리고 의식이 없는 목양의 관계 속에서 작은 갈등들을 큰 갈등으로 변모되어 가는 것을 보고 그리고 온전하게 되고자 하는 모든 노력들이 우리 속에서 현저히 감퇴했을 때 우리 안에서 까리타스의 사랑도 함께 빠져나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연약한 목회자를 그 목양의 질서 안에서 주님이 세우신 목양의 질서 안에서 순종하는 삶을 살아도 전혀 불안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서 너희는 나를 의지하라 부르시는 거죠. 그 안에서 사랑의 일치를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그러므로 12주 동안 들었던 이 모든 말씀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 한 성도로 부르신 것은 완성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그 공동생활은 성도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는 피할 수 없는 공동 생활이고 그리고 우리가 죽어서 하늘나라에 올라간 그 후에도 우리의 공동 생활은 계속될 것인데 이것은 우리가 불멸할 존재로 창조되었으니 그 성도의 교제도 불멸하는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교제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이 성도의 공동생활 안에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성화된 정도를 측정하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보이는 공동체의 지평 속에서 구체화하고 그 까리따스의 사랑을 입증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서는 우리 자신 없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전에 어둠 가운데 살던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의 택하심과 거룩하게 하심 안에서 피뿌림을 얻고 순종함을 얻기 위해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는 이제 우리는 영혼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이웃들에게 사랑하고 아버지의 도덕적인 통치를이 세상의 구현에 보여주는 사람들이 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자기 깨어짐과 죽음 속에서 자기는 버려야 합니다. 자기를 깨뜨려 지체들에게 유익을 주고 자기를 희생함으로 지체들에게 도움을 주는 그런 그리스도 예수의 분신과 같은 삶을 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안팎에 우리의 많은 대적들이 있기 때문에 이 일은 쉽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우리 안에서 솟아난 부패한 욕망과 그리고 하늘과 그리고 이 공중의 권세잡은 자들의 악한 영들의 공격이 있고 눈만 뜨면 만나는이 죄악된 세상은 우리에게 세상의 길과 가치로 돌아가서 행복을 찾으라고 유혹을 합니다. 사면에 적들로 에워 싸여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우리들이 다 못 이룬 하나님의 도덕적인 통치의 그 결과로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그 통치를 받고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그 희생적인 자기 죽으심 앞에서 우리는 죄의 용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처음 이 교회에 발을 들여 놓았던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어둠 속에서 방황하며 우리는 살아 있는 것이 죽는 거보다 훨씬 힘든 세월들을 지났습니다. 그리스도 없는 삶 진리의 빛으로 벌어진 어두운 삶이 가져다 준 결과였죠. 그러나 우리는 그때에 주님을 깊이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 진리의 빛이 주님이 약속하신 바와 같이 어두움과 흑암에 매여 있던 우리 모든 사슬들을 풀어 주었습니다. 죄와 불의에 얼매여 있던 우리를 얽매어 있던 우리 모두를 해방해 주셔서 그래서 우리를 이제 자유로운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성전 미문에서 일어난 앉은뱅이가 뜨기도 하고 걷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했던 것처럼 우리는 그 모든 죄와 그리고 미움의 사슬에서 벗어나서 좋으신 하나님을 찬송하며 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에 밀려드는 감격으로 우리린는 주님께 물었습니다.
내게 베풀어 주신 은혜가 이렇게 큰데 내가 주님께 무엇을 해 드려야 되겠습니까?이 교회를 섬겨라. 분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여기에 있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모두가 여러분의 지체들과 함께 그리스도 예수의 그 피로 씻김 받은 형제들입니다. 살아간 그의 모습이 여러분들의 눈에 자지 않고 여전히 허물과 죄가 많고 삶의 태도를 고치지 못하지만 불멸하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그 형제 안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향한 사랑을 그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사랑하십니다. 신앙은 바로 그 사랑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제 안에서 그 불멸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를 위해서 자신이 희생하는 것, 남의 유익을 위해서 자신이 해를 당하는 것 그러면서 자기 안에 그리스도 예수의 흔적을 이루어 가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입은 성도의 삶입니다.
이런 공동체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도덕적인 통치는 온전히 구현될 것이고 그 속에서 성도들은 행복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은 이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찬송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들이 받을 그 영광스러운 기업에 대해서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우리들이 당하는 고난과 수고하는 비교될 수 없는 영광이 그날에 우리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빛 가운데서 말이죠.
기도하겠습니다.
이 시간에 우리 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 오늘이 시간에도 저희들을 깨닫게 하시고 그리고 주님이 어떠한 마음으로이 교회를 사랑하시고 당신의 몸으로 여기시는지 우리들이 개피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그래서 온몸으로 하나님께 주님의 그 마음을 품고이 공동체 안에서 주님의 도덕적인 통치를 구현해 갈 수 있도록 하나님 우리에게 그리 없는 십자가의 정신을 주시도록 예수의 마음 주시도록 우리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부족한 저희들을 주님께서 사랑해 주시고 오늘이 시간에도 하나님 앞에 간구하고 기도하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오늘이 시간에도 기도합니다. 인생 하나님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은혜와 긍휼이 필요합니다. 주님 도와주시고 은혜를 내려 주시옵소서.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도와주시고 은혜를 내려 주시옵소서. 오 왕이신 주님 저희들이 먼저 주님의 통치를 즐거워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이 우리를 다스려 주시기 때문에 행복해 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그 통치 안에서 맛보는 주님의 임재를 인하여 저희들이 행복해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그래서 아버지 하나님 저희들이 주님의 그 은혜와 사랑 안에서 행복해 하고 그것 때문에 주님을 찬송할 수 있는 저희들이 되도록 역사하여 주시고 은혜 내려 주시기를 간절히 원하옵나이다. 사랑이 만드신 아버지 하나님 오늘이 시간에도 내가 내 마음을 열어 교회를 향한 주님의 아픔을 보기를 원합니다. 주의 은혜를 내려 주시오. 무지무각하고 어리석게 아버지 하나님이여 내 마음대로 자행하였던 나의 많은 물들을 용서해 주시고 온 마음과 온 뜻으로 내가 주님을 사랑하게 하시고 하나님 주님을 의지하도록 도시 하나님의 순간마다 하나님 저를 바른 주님이 붙들어 주셔서 주님 앞에 살게 해 주시옵소서 죽은 자와불한 자들을 살리셔서 주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그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 약한 자를 부르시어 하늘 뜻을 이루시는 주님 하나님 은혜를 내려 주시옵소서 아버지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비전한 인생이오니 하나님을 도와주시옵소서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으로 저를 용서하여 주시고 그 은혜로 저를 세워 주셔서 아버지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이 교회를 목경하게 해 주시옵소서. 주님이 생명처럼 사랑하시는 그리스도 사랑하게 하시고 사역과 아버지의 나의 어리석음으로 주님의이 사랑의 도를 버리지 말게 하시고 온 마음을 다하여 아버지 하나님 앞에 살 수 있도록 주여 도와주시고 은혜를 내려 주시옵소서. 없는 자기 죽음과 용서의 길을 메우게 하시고 묵복히 주를 따라 인종의 도를 메우게 하시고 열기와 자기 사랑과 분냄 악감을 버리고 순전한 주님 앞에서 살아가는 저희들이 되 도와주시고 은혜를 내려 주시고 간절히 빌고 나옵나이다. 주님 도와 주시옵소서. 우리의 마지막으로 왕이신 나의 하나님 찬양 한번 부르시겠습니다. 왕이신 나의 하나님. 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 성추하리 다 한 번만 더 부르시겠습니다. 왕이신 나의 하나님.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성축하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가슴 처음이는 사랑과 성령 하나님의 교통하심이 오늘 머리숙여 기도하는 사랑하는 어린아들 딸들과 과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몸을 지어 비흘려 사신 교회 의로부터 영원히 함께 있어지다. 아멘.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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