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장 1-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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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이란
제목: 복음이란
본문: 로마서 1장 1-7절
본문: 로마서 1장 1-7절
찬송: 3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찬송: 3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
로마서는 사도 바울이 3차 선교 여행 중 고린도에 체류할 당시, 주후 57년경에 로마에 있는 성도들을 향해 기록한 편지입니다. 바울은 로마 교회를 직접 개척하지도 않았고, 그들을 직접 대면한 적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의 사도로서 복음의 완전한 진리를 체계적으로 선포하고, 당시 교회 안에 존재했던 유대인 그리스도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 사이의 깊은 갈등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해소하기 위해 이 편지를 기록했습니다.
이 로마서는 교회사 속에서 수많은 영혼을 깨우고 세상을 뒤흔든 위대한 변혁의 도구였습니다. 4세기 방탕함 속에서 길을 잃었던 어거스틴을 변화시켰고, 16세기 율법의 고통 속에서 신음하던 마르틴 루터에게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해방의 돌파구를 열어주어 종교개혁의 불씨를 당겼습니다. 신학자 장 칼뱅은 로마서를 일컬어 "성경의 모든 보화를 여는 입구"라고 고백했으며, 20세기 신학자 칼 바르트는 인간의 종교적 도덕성이 무너진 자리에서 "오직 하늘로부터 임하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의 절대적인 주권"을 선포하기 위해 이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로마서는 단순히 머리로 이해하는 교리적 책이 아닙니다. 이것은 지금도 살아서 우리 영혼을 흔드는 기독교 신앙의 가장 뜨거운 심장입니다.
본론 1: 세상의 종에서 그리스도의 종으로—소유권의 이전이 주는 자유
본론 1: 세상의 종에서 그리스도의 종으로—소유권의 이전이 주는 자유
오늘 본문 1절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을 향해 가장 먼저 이렇게 선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여기서 '종'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둘로스'입니다. 고대 로마 사회에서 이 단어는 자신의 권리나 소유권이 완전히 박탈당한 가장 낮은 '노예'를 뜻했습니다. 우리는 흔히 '종'이나 '노예'라는 단어를 들을 때 억압과 고통, 비참함을 떠올립니다. 그래서 "내가 예수의 종이 되어 더 헌신하고 고생해야 하는구나"라는 율법적인 부담을 가지곤 합니다.
그러나 고대 사회에서 노예가 누구의 소유냐에 따라 그의 신분과 안전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만약 온 천하를 지배하는 '황제의 노예'라면, 제국의 그 누구도 황제의 노예를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습니다. 그의 먹을 것과 입을 것, 안전과 생명은 온전히 황제의 국고와 군사력으로 책임졌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바울이 스스로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부른 것은 굴종과 비참함의 고백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주에서 가장 부요하시고 자비로우신 만왕의 왕이 내 인생의 진짜 주인이 되셨다는 '가장 위대한 해방과 안식의 선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전까지 무엇의 종으로 살아왔는지 물어 볼 수 밖에 없습니다.돈의 종, 불안의 종, 미래에 대한 염려의 종, 그리고 끊임없이 타인의 평판과 시선에 흔들리는 평판의 종으로 살아왔습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내 인생의 소유권이 예수님께로 이전되었습니다. 그것은 곧 내 인생의 모든 무거운 짐과 염려가 이제는 내 책임이 아니라, 나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책임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제 주님이 나의 참 주인이심을 고백하며 내 어깨를 짓누르던 모든 염려의 짐을 그분의 은혜의 어깨 위에 다 내려놓는 안식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본론 2: 무엇(What)이 아닌 누구(Who)—선물로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
본론 2: 무엇(What)이 아닌 누구(Who)—선물로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
바울은 이어서 자기가 부름받은 목적이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라고 말합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이 '복음'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복음을 뜻하는 헬라어 '유앙겔리온'은 본래 전쟁터에서 승리한 왕이 나라 전체에 평화를 선포할 때 쓰던 단어입니다. 최전방에서 칼을 들고 피 흘려 싸운 적이 없는 성 안의 백성들은, 오직 전령이 들고 온 "우리가 이겼다!"라는 승전보를 듣는 순간, 아무 자격 없이 영광과 평화를 선물로 누리게 됩니다.
그렇기에 복음은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고, 무엇을 바쳐야 하는가"를 요구하는 도덕적 지침이나 종교적 원리인 '무엇(What)'이 아닙니다. 복음은 우리의 자격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찾아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사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인격' 그 자체입니다.
세상의 수많은 종교는 인간이 하나님께 도달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과 고행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 높은 사다리를 꺾고, 우리 인생의 가장 더럽고 비참한 밑바닥까지 직접 내려오셔서 우리를 안아주신 사건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다고 고백합니다. 그 뜻은 '세상으로부터 특별히 구별하여 따로 떼어놓았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사역적 능력이 뛰어나서, 혹은 대단한 도덕적 자격을 갖추어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여전히 흔들리고 넘어질 때에, 조건 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그리스도의 것으로 특별히 구별하여 떼어놓으셨습니다. 이 무조건적인 선택과 약속의 실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오늘 그분을 그저 믿음으로 받아 누리기만 하면 됩니다.
본론 3: 은혜가 이끄는 삶, 믿음의 순종
본론 3: 은혜가 이끄는 삶, 믿음의 순종
마지막으로 바울은 5절에서 이 복음을 받은 우리가 "믿어 순종하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순종'이라는 단어 앞에서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구원받았으니 이제는 내 의지와 노력을 다해 억지로라도 순종의 의무를 다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순종은 순서가 다릅니다. 우리는 어떤 의무를 행하기 전에, 7절 말씀처럼 이미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순종은 율법적인 강요나 두려움으로 쥐어짜 내는 고역이 아닙니다. 진짜 순종은 하나님의 거대한 사랑에 압도당해 내 영혼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기쁜 항복이자 '사랑의 반응'입니다.
갓 태어난 아기가 부모의 품 안에서 조건 없는 사랑을 누릴 때, 부모가 억지로 시키지 않아도 부모의 따뜻한 눈빛만 보고 방긋 웃으며 그 품속으로 온전히 파고드는 것처럼, 참된 순종은 "내가 자격 없음에도 이미 하늘 아버지께 완전히 용납되었고 뜨겁게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깨달은 영혼이 자발적으로 드리는 감사의 고백입니다. "나 같은 죄인을 살려주신 그 사랑이 너무나 고마워서, 이제는 주님의 뜻대로 기쁘게 살고 싶어지는 마음", 이것이 바로 은혜가 우리 삶 속에 스스로 일구어내는 참되고 건강한 믿음의 순종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사도 바울은 로마의 성도들을 향해, 그리고 오늘 이 아침 주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온 우리를 향해 가장 위대한 축복을 선포합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호의이자 선물인 '은혜'가 우리 마음에 먼저 머물 때, 비로소 세상의 풍파와 환경이 결코 빼앗아 갈 수 없는 하늘의 '평강'이 우리 삶을 덮기 시작합니다.
오늘 하루, 여러분의 자격과 힘으로 인생을 살아내려고 버둥거리지 마십시오.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셔서 먼저 찾아와 안아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품에 온전히 머무십시오. 그 압도적인 은혜가 오늘 우리의 삶을 가장 안전하고 평안한 길로 넉넉히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 복음의 영광을 온전히 누리는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