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장 1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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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이란 1
제목: 복음이란 1
본문: 로마서 1장 16절
본문: 로마서 1장 16절
찬송: 299장 하나님 사랑은
찬송: 299장 하나님 사랑은
거대한 제국의 심장인 로마를 향해 사도 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선포한다. 이 선언은 당시의 지적, 문화적 배경 속에서 매우 역설적이고 충격적인 외침이다. 바울 시대의 로마인들에게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는 패배자이자 저주받은 자의 대명사였다. 따라서 십자가를 전한다는 것은 지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미련하고 거북한 일이었다.
오늘날 우리도 세상 속에서 기독교인임을 드러내거나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것을 은연중에 거북해하거나 부끄러워하는 영적 기류에 직면하곤 한다. 성경이 말하는 '부끄러워하다'의 헬라어 '에파이스퀴노마이'는 단순히 수줍어하는 심리 상태를 넘어, 복음의 메시지가 나의 가치관과 충돌할 때 느끼는 본능적인 '불쾌함과 거슬림'을 뜻한다. 세상이 복음을 들을 때 느끼는 이 거대한 거북함의 실체를 우리는 정직하게 마주해야 한다.
사람들은 복음을 들을 때 불쾌함을 느끼고 결국 예수를 거부하게 되는 데에는 인간의 자아가 철저히 무너져 내리는 필연적인 4단계의 연쇄적 흐름이 존재한다.
가장 먼저 복음은 나의 영적 파산을 선언한다. 복음은 인간에게 스스로를 구원할 힘이 눈곱만큼도 없다고 단언한다. 구원은 100% 거저 받는 선물이라는 선언이다. 이 메시지는 스스로 착하고 고상하게 살았다고 자부하는 인간의 도덕적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준다. 내 영혼이 완전히 파산했다는 진단 자체를 거부하고 싶은 것이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복음은 십자가라는 참혹한 대안을 들이민다. 내 비참함을 어찌어찌 인정하더라도, 그 구원의 방법이 너무 자존심 상한다. 내가 너무나 흉악한 죄인이기에 하나님의 아들이 대신 처참하게 죽어야만 내가 살 수 있다고 선포하기 때문이다. 이 피 묻은 십자가 앞에서 인간의 완고한 자기애는 무참히 조각난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주권의 상실이라는 깊은 불안이 찾아온다. 예수의 피 값으로 다시 살아났기에, 이제 내 인생의 소유권은 나에게 없다. 주님께로 넘어간다. 내 힘으로 인생을 계획하고 내 방식대로 살아가려던 자기 자율성이 완전히 박탈당하는 것이다. 오직 예수라는 좁은 문에 매여 살아야 한다는 사실에 자아는 깊은 저항을 느낀다.
결국 마지막에는 고난과 섬김의 삶으로 밀려 나간다. 예수의 다스림 아래 들어간 삶은 나만의 편안한 안락함을 보장하지 않는다. 주인이신 예수를 따라 나도 낮아져야 하고, 상처받으며, 이웃을 섬겨야 한다. 내 뜻대로 편하게 살고 싶었던 자아는 이 마지막 지점에서 복음을 향해 완전히 등을 돌리고 만다.
이처럼 죄의 고발에서 시작해, 십자가를 통과하고, 내 삶의 소유권을 빼앗긴 채, 고난의 길로 걸어가는 흐름 속에서 죄인 된 인간은 본능적으로 복음을 거부하게 된다.
그러나 세상은 이토록 예수를 불쾌해하지만, 우리가 결코 복음을 거부해서는 안 되는 절대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복음은 추상적인 사상이나 도덕 교리 같은 개념(What)이 아니기 때문이다. 본문 16절의 '복음' 자리에 '예수'를 대입하여 읽을 때 복음의 실체는 완벽하게 통하며 오히려 그 영적 인격성이 극대화된다. 함께 '복음' 자리에 '예수'를 넣어 읽어보자.
"내가 예수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예수는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여기서 한글 성경이 '능력'이라고 번역한 단어는 헬라어 원어로 '뒤나미스'이다. 이 단어는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추상적인 힘이나 이론을 말하지 않는다. 단단한 바위를 부수고 사방을 가로막고 있는 장벽을 단번에 돌파하는 폭발적이고 실제적인 하나님의 힘을 뜻한다. 우리가 오늘날 광산을 뚫을 때 사용하는 '다이너마이트'라는 단어도 바로 이 '뒤나미스'에서 유래했다.
중요한 것은 이 폭팔적인 능력이 어떤 에너지가 아니라,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Who) 그 자체라는 사실이다.
복음은 우리에게 그저 착하게 살라는 조언이나 삶의 지침을 주는 종교적 덕담이 아니다. 예수라는 살아 있는 인격이 내 삶에 수직으로 내리꽂혀, 우리의 깨어진 자아를 완전히 깨부수고 새 생명을 창조하는 실제적인 구원 사건이다. 그러므로 복음을 거부하는 것은 내 삶의 유일한 구원자이자 생명 자체를 발로 차버리는 어리석은 사망 선언과 같다.
복음은 인간이 머리를 맞고 만들어낸 종교적 산물이 아니다. 우리의 한계를 깨뜨리고 임하시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의 역사이다.
이 복음의 대체 불가능한 능력은 우리 삶에서 어떻게 역사하는가. 복음은 껍질을 잘 깐 하얗고 뽀얀 마늘과 같다. 겉보기에 마늘은 그저 매끄럽고 부드러우며 아무런 해가 없어 보인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를 그저 역사 속의 온화한 스승이나 도덕적 현자 정도로 바라본다. 아무 자극 없는 부드러운 존재로 여기는 것이다. 머리로만 구경하는 예수는 그저 부드러운 마늘 알갱이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마늘을 입에 넣고 단단한 인격의 이빨로 아삭 깨무는 순간, 그 안에서 온 입안과 영혼을 발칵 뒤흔드는 이 터져 나온다. 복음의 진정한 능력은 구경하는 자들의 것이 아니다. 내 온 삶을 던져 그분을 진짜 나의 주님으로 받아들이고 믿음의 통로를 열 때, 복음은 내 전 인격과 삶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하나님의 실제적이고 물리적인 능력으로 역사하기 시작한다. 헬라어 '뒤나미스'는 단순한 말의 유희가 아니라, 우리의 완고한 자아를 깨뜨리고 영혼의 밑바닥을 폭발시키는 실재적인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다.
오늘 새벽, 우리는 이 마늘 같은 예수를 가슴으로 깨물어야 한다. 세상의 거북한 시선과 내 자아의 본능적인 저항을 뚫고 주님의 통치 아래로 들어가야 한다. 내 자존심이 무너지고 자율성이 박탈당하는 불쾌함을 견디며 오직 믿음으로 그분을 온전히 받아들일 때 생명의 역사가 시작된다. 오늘 하루, 이 복음의 강력한 능력을 맛보고 그 주권 앞에 기쁘게 순종하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