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취피차(사울이 망가진 이유)
Notes
Transcript
여호와께서 치시리니
— 같은 하나님을 믿는데, 왜 삶이 갈라지는가 —
본문 : 사무엘상 26:1-25
기억할 말씀 : “다윗은 자기 길로 가고 사울은 자기 곳으로 돌아가니라” (삼상 26:25)
들어가는 말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 사무엘상 26장에는 세 사람이 등장합니다. 사울과 아비새와 다윗입니다. 그런데 이 세 사람에게는 놀라운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셋 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사울을 보십시오. 그는 이스라엘의 왕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첫 번째 왕이고,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입니다. 아비새를 보십시오. 그는 다윗과 함께 목숨을 걸고 광야를 걷는 신실한 동지입니다. 그리고 다윗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불린 사람입니다. 셋 다 하나님을 믿습니다. 셋 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셋 다 “하나님”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같은 하나님을 믿는 이 세 사람의 삶과 선택이, 오늘 본문에서 완전히 갈라집니다. 한 사람은 삼천 명을 끌고 사람을 죽이러 내려오고, 한 사람은 “지금 찌르자”고 하고, 한 사람은 “손대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본문의 끝에서, 이들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걸어갑니다.
성도 여러분, 저는 오늘 이 질문을 여러분과 함께 붙들고 싶습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같은 하나님을 믿고, 같은 성경을 읽고, 같은 이름을 부르는데, 왜 어떤 사람의 신앙은 변질되고 어떤 사람의 신앙은 끝까지 바른 길을 갑니까? 우리 교회 안에도 오래 신앙생활을 한 분들이 계십니다. 그런데 왜 어떤 분의 삶은 은혜롭게 빚어지고, 어떤 분의 삶은 그렇지 못합니까? 오늘 본문이 그 답을 우리에게 건넵니다. 다만 그 답은 마지막에 가서야 분명해집니다. 세 장면을 차례로 따라가 보십시다.
[목사님께서 “같은 교회를 오래 다녔는데도 삶이 다른” 두 성도의 모습을 — 실명 없이, 일반화된 형태로 — 짧게 대비시켜 주시면, 이 질문이 회중 자신의 이야기가 됩니다. 답은 아직 주지 마시고 궁금증만 남겨 두십시오.]
하나 — 하나님의 사람도 모함받고, 오해받고, 어려움을 겪는다
이야기는 익숙한 배신으로 시작됩니다.
“십 사람이 기브아에 와서 사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다윗이 광야 앞 하길라 산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삼상 26:1)
십 사람들입니다. 낯익은 이름 아닙니까. 3주 전, 그일라 본문에서도 바로 이 사람들이 다윗의 위치를 사울에게 밀고했습니다(삼상 23:19). 같은 사람들이, 같은 방식으로, 또 다윗을 팝니다. 다윗이 무엇을 잘못해서가 아닙니다. 다윗은 그들과 같은 유다 지파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권력 앞에 다윗을 두 번이나 내어놓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먼저 마주하는 사실이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입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런 다윗이 모함을 받습니다. 오해를 받습니다. 아무 잘못도 없이 고발당하고, 쫓기고, 광야로 내몰립니다. 사울은 이 밀고를 듣고 삼천 명을 일으킵니다. 삼천 명. 다윗의 사람은 육백 명입니다. 다섯 배의 병력이 다윗 하나를 잡겠다고 광야로 내려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종종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잘 믿으면, 내 삶은 평탄해야 한다. 문제가 생기지 않아야 한다. 사람들에게 오해받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어려움이 닥치면 흔들립니다. “내가 뭘 잘못했나.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나.” 그러나 오늘 본문은 다르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도 모함을 받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합니다. 환경과 상황이 나를 짓누를 수 있습니다. 다윗의 광야가 그것을 증명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을 붙드십시오. 모함과 오해와 어려움은, 우리의 삶을 결정짓는 요소가 아닙니다. 다윗은 십 사람의 밀고 때문에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사울의 삼천 군사 때문에 변질되지 않았습니다. 환경은 다윗의 겉을 흔들었지만, 다윗의 속을 바꾸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니 오늘 어려움 가운데 계신 분이 있다면, 먼저 이것부터 붙드십시오. 어려움 자체는 당신의 신앙을 무너뜨릴 힘이 없습니다. 무너지는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둘 — “하나님이 하셨다”는 말이, 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아니다
그 밤, 다윗은 놀라운 일을 합니다. 도망치는 대신, 사울의 진영을 향해 걸어 들어갑니다. 밤에, 조카 아비새 한 사람만 데리고, 삼천 명이 자고 있는 진영 한복판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아무도 깨지 않습니다. 본문은 그 이유를 분명하게 밝힙니다.
“아는 자도 없었고 본 자도 없었고 깬 자도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깊이 잠들게 하셨으므로 다 잠들었음이었더라” (삼상 26:12)
여기 쓰인 히브리어가 타르데마(תַּרְדֵּמָה)입니다. 그냥 잠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잠들게 하시고 하와를 지으실 때(창 2:21), 아브라함을 깊이 잠들게 하시고 언약을 맺으실 때(창 15:12) 쓰인 단어입니다. 사람이 만들 수 없는 잠, 하나님이 부으시는 잠입니다. 삼천 명이 한 사람도 깨지 않은 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그 밤의 조건을 만드신 것입니다.
자, 이제 그 하나님이 만드신 상황 앞에서 아비새가 입을 엽니다.
“아비새가 다윗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오늘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넘기셨으니 그러므로 청하오니 내가 창으로 그를 찔러서 단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 내가 그를 두 번 찌를 것이 없으리이다” (삼상 26:8)
들으셨습니까. “하나님이 넘기셨으니.” 아비새는 지금 이 상황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해석합니다. 그리고 그 해석은 상당히 그럴듯합니다. 다윗은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이고, 사울은 버림받은 왕이고, 지금 하나님이 삼천 명을 재우셨습니다. 이보다 완벽한 명분이 어디 있습니까. 정당방위입니다. 예언의 성취입니다. 아비새의 신앙에는 빈틈이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여기서 소름 돋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이 넘기셨다.” 이 말, 우리가 어디서 들어봤습니까. 3주 전 그일라 본문입니다. 다윗이 성문과 빗장이 있는 그일라 성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사울이 정확히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울이 이르되 하나님이 그를 내 손에 넘기셨도다 그가 문과 문 빗장이 있는 성읍에 들어갔으니 갇혔도다” (삼상 23:7)
똑같은 동사입니다. 히브리어로 나탄(נָתַן), “넘기다”입니다. 사울도 “하나님이 하셨다”고 했습니다. 아비새도 “하나님이 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울의 그 확신은 착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사울의 손에 넘기신 적이 없습니다. 상황이 유리해 보인다는 이유 하나로 하나님의 뜻을 단정했던 사울은, 처음부터 끝까지 틀렸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기가 두 번째로 우리가 마주해야 할 사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셨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다”, “하나님이 문을 열어주셨다”는 말을 참 쉽게 합니다. 성도도 그렇게 말하고, 때로는 목회자도 그렇게 말합니다. 일이 잘 풀리면 하나님이 하신 것이고, 상황이 유리하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서늘하게 경고합니다. “하나님이 하셨다”는 그 말이, 언제나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 더 붙들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사울을 보며 “저건 불신자다”라고 말하고 싶어집니다. 저렇게 사람을 죽이러 다니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가. 그런데 성경을 보면, 사울은 누구보다 하나님을 찾던 사람입니다. 그는 제사를 드렸고, 선지자를 찾았고, 하나님의 뜻을 물었습니다. 심지어 다윗에게 두 번이나 눈물로 회개하기도 했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을 안 믿은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열심히 찾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의 신앙은 변질되었습니다.
바로 여기에 오늘 설교의 가장 무서운 지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안 믿어서 무너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하나님을 찾으면서도, “하나님이 하셨다”를 말하면서도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사울과 다윗을 갈랐습니까. 무엇이 열심 있는 신앙을 변질시키고, 무엇이 흔들리는 신앙을 끝까지 바로 세웁니까. 이제 마지막 장면에서, 본문은 그 답을 열어 보입니다.
[“나는 열심히 믿는데 왜 삶은 자꾸 어긋날까” 하는 성도의 정직한 질문을 여기서 짚어 주시면, 다음 대지의 답이 훨씬 강하게 꽂힙니다.]
셋 — 사울은 ‘곳’을 붙들었고, 다윗은 ‘길’을 걸었다
자, 이제 답을 찾아봅시다. 무엇이 이 세 사람을 갈랐습니까. 그 답은 놀랍게도, 본문의 맨 마지막 절 한 구절에 숨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할 말씀입니다.
“다윗은 자기 길로 가고 사울은 자기 곳으로 돌아가니라” (삼상 26:25)
보이십니까. 성경은 두 사람의 마지막을 두 개의 단어로 갈라놓습니다. 다윗은 ‘길’로 갔고, 사울은 ‘곳’으로 돌아갔습니다. 히브리어로 다윗은 데레크(דֶּרֶךְ, 길)를 갔고, 사울은 마콤(מָקוֹם, 곳)으로 돌아갔습니다. 저는 이 한 절에서, 오늘 우리의 질문에 대한 답을 봅니다.
사울은 평생 ‘곳’을 붙들고 산 사람입니다. ‘곳’이란 무엇입니까. 내가 서 있는 자리입니다. 나의 위치, 나의 체면, 나의 안전, 나의 성과, 나의 소유입니다. 사울에게 그 곳은 왕좌였습니다. 그는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을 신앙생활의 중심에 두었습니다. 하나님을 찾은 것도, 제사를 드린 것도, 선지자를 부른 것도 — 결국은 그‘곳’을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그 곳이 위협받자, 하나님을 믿는 그가 사람을 죽이러 삼천 명을 끌고 내려온 것입니다. ‘곳’을 중심에 둔 신앙은, 그 곳이 흔들릴 때 반드시 변질됩니다.
그것이 사울의 회개가 그렇게 쉽게 마른 이유입니다. 24장에서 눈물로 “네가 나보다 의롭도다” 고백했던 그가, 눈물이 마르기도 전에 다시 창을 듭니다. 왜입니까. 회개는 감정이었지만, 그의 신앙의 중심은 여전히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중심이 바뀌지 않은 회개는, 상황이 바뀌면 증발합니다.
그런데 다윗을 보십시오. 다윗은 ‘곳’이 없는 사람입니다. 왕좌도 없고, 집도 없고, 지켜야 할 자리도 없습니다. 아내와 헤어졌고, 부모를 이방 땅에 맡겼고, 동굴에서 잤습니다. 그가 가진 것은 오직 하나, 하나님이 이끄시는 ‘길’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밤, 아비새가 “지금 찌르자”고 했을 때 다윗은 이렇게 답합니다.
“다윗이 아비새에게 이르되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삼상 26:9)
다윗은 상황으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원리로 판단합니다.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 사울이 지금 어떤 사람인가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어떤 자리에 세우셨는가를 봅니다. 아비새는 ‘곳’을 지금 완성하자고 했지만, 다윗은 ‘길’을 계속 걷겠다고 답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이 오늘의 본문 제목입니다.
“다윗이 또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은 죽을 날이 이르거나 혹은 전장에 나가서 망하리라” (삼상 26:10)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이 문장의 주어를 보십시오. 여호와입니다. 다윗은 심판자의 자리에 자기 이름을 넣지 않습니다. 사울을 어떻게 할 것인가 — 그것은 다윗의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몫으로 남겨 둡니다. 성도 여러분, 다윗도 흔들렸습니다. 다윗도 광야에서 방황했습니다. 25장에서는 나발에게 칼을 빼 들 뻔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방황하다가도, 기도함으로 다시 자기 ‘길’을 찾았습니다. ‘곳’이 없었기에, 그는 잃을 것이 없었고, 잃을 것이 없었기에, 다시 하나님의 길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사울도 다윗도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사울도 다윗도 “하나님”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의 신앙은 ‘곳’을 중심으로 돌았고, 다윗의 신앙은 ‘길’을 따라 걸었습니다. 그 하나의 차이가, 변질된 신앙과 온전한 신앙을 갈랐습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 광야의 밤은, 천 년 뒤 또 다른 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겟세마네의 밤입니다. 그 밤에도 무리가 창과 칼을 들고 한 사람을 잡으러 왔습니다. 그 곁에도 아비새 같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는 칼을 뽑아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칩니다. “주님, 지금이 기회입니다.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아비새와 똑같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마 26:52-53)
예수님께는 힘이 없어서 잡히신 것이 아닙니다. 열두 군단의 천사, 그 밤을 뒤집을 힘이 손닿는 거리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힘을 쓰지 않으셨습니다. 하늘 보좌라는 ‘곳’을 붙들지 않으시고, 십자가로 가는‘길’을 택하셨습니다. 다윗은 원수를 살려주고 자기도 살아서 산을 내려왔지만, 예수님은 원수인 우리를 살리시려고 자기가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바로 그 원수였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던 우리를, 하나님은 치지 않으시고 대신 아들을 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치시리라”던 그 심판이, 우리 대신 예수님 위에 떨어진 자리 —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래서 우리는 ‘곳’을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동양의 옛 지혜에 ‘거피취차(去彼取此)’라는 말이 있습니다.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하라”는 뜻입니다. 노자는 화려하고 겉으로 드러나는 것(彼)을 버리고, 본질적이고 속이 꽉 찬 것(此)을 취하라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비추면, 우리가 버려야 할 저것(彼)은 ‘곳’이요, 취해야 할 이것(此)은 ‘길’입니다. 다만 다릅니다. 노자가 취하라 한 이것은 자기 안의 본성이었지만, 우리가 취하는 길은 하나님이 여시고 하나님이 앞서 걸으신 그 길입니다. 우리가 ‘곳’을 버릴 수 있는 것은, 그 자리를 대신 지켜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이요, 나 대신 십자가라는 그 ‘곳’에서 심판을 받으신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억울함을 풀 수 있는 힘이나 위치가 주어졌을 때 그것을 쓰지 않고 하나님께 맡겼던 간증 — 목사님 자신의 것이든, 동의를 얻은 성도의 것이든 — 이 절정 직후에 나누어지면, 십자가 적용이 관념이 아니라 실제가 됩니다.]
맺는 말
본문의 마지막 절로 돌아갑니다. “다윗은 자기 길로 가고 사울은 자기 곳으로 돌아가니라.” 사울은 자기 곳, 자기 왕궁으로 돌아갔고, 그 곳을 지키려다 결국 길보아 산에서 스스로 무너졌습니다. 다윗은 여전히 광야였습니다. 돌아갈 곳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깨끗한 손으로 자기 길을 갔고, 그 길 끝에서 피 묻지 않은 손으로 왕좌에 앉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의 질문으로 마칩니다. 같은 하나님을 믿는데 왜 삶이 갈라집니까. 곳을 붙드느냐, 길을 걷느냐 — 그 하나의 차이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붙들고 있는 ‘곳’은 무엇입니까. 오늘, 그 곳을 하나님께 맡기고 길을 택하십시오. 그 길을 여신 여호와는, 여러분을 치셔야 할 그 밤에 여러분 대신 아들을 치신 분이십니다.
사도 바울도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그 하나님 앞에서, 같은 고백을 했습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빌 3:13-14)
뒤에 있는 것 — 사울이 붙들었던 그 ‘곳’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잊으라 합니다. 앞에 있는 것 — 다윗이 걸었던 그 ‘길’입니다. 바울은 그 푯대를 향해 달려가라 합니다. 곳이 아니라 길을 걸어가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참고: 강조 단어 — נָכָה 나카(치다, 26:10) / תַּרְדֵּמָה 타르데마(깊은 잠, 26:12; 창 2:21, 15:12) / שָׁלַח יָד 샬라흐 야드(손을 대다, 26:9, 11, 23) / נָתַן 나탄(넘기다, 26:8; 23:7과 연결) / דֶּרֶךְ 데레크(길, 26:25) / מָקוֹם 마콤(곳, 26:25)
설교 구조(귀납적) : 질문 제기(같은 하나님을 믿는데 왜 삶이 갈라지는가) → ① 하나님의 사람도 모함·오해·고난을 겪지만 그것이 삶을 가르지 않는다 → ② “하나님이 하셨다”는 말이 다 인도하심은 아니다(사울=열심 있으나 변질) → ③ 사울은 ‘곳’, 다윗은 ‘길’. 십자가·거피취차로 절정. 맺음은 짧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