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715 수요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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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shua 21:1–3 NKRV
1 그 때에 레위 사람의 족장들이 제사장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의 지파 족장들에게 나아와 2 가나안 땅 실로에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사 우리가 거주할 성읍들과 우리 가축을 위해 그 목초지들을 우리에게 주라 하셨나이다 하매 3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자기의 기업에서 이 성읍들과 그 목초지들을 레위 사람에게 주니라
이스라엘의 정복 전쟁이 드디어 끝났습니다. 요단강을 건너고, 여리고 성이 무너지고, 크고 작은 전쟁을 수없이 치른 끝에 마침내 가나안 땅이 이스라엘의 손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이제 각 지파가 제비를 뽑아 자기가 살아갈 땅을 나누어 받습니다. 유다 지파가 받았고, 에브라임 지파가 받았고, 베냐민도, 스불론도, 납달리도 받았습니다. 가나안 땅 지도 위에 열두 지파의 이름이 하나씩 채워져 갔습니다.
그런데 그 지도 어디에도 이름이 적히지 않은 지파가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레위 지파였습니다. 모든 지파가 자기 몫을 받아 기뻐하며 떠나가는 동안, 레위 지파만은 마지막까지 아무 땅도 받지 못한 채 남아 있었습니다. 레위 지파가 땅을 받지 못한 이야기는 아주 오래전, 그들의 조상이 저지른 잘못에서 시작됩니다.
창세기 34장을 보면, 야곱의 가족이 세겜 땅에 머물던 중에 야곱의 딸 디나가 세겜에게 성폭행을 당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러자 디나의 친오빠인 시므온과 레위는 여동생의 수치를 갚겠다며 계획을 세웁니다. 그들은 거짓으로 세겜 사람들과 언약을 맺고, 그들이 방심하고 있을 때 성읍으로 들어가 모든 남자들을 칼로 죽였습니다. 여동생을 향한 마음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당한 분노를 넘어선 일이었습니다. 죄 없는 사람들까지 죽인 지나친 복수였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정의가 아니라 사람의 분노가 만들어 낸 폭력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났습니다. 창세기 49장에서 죽음을 앞둔 야곱은 아들들을 한 사람씩 불러 마지막 말을 남깁니다. 아버지가 죽기 전에 남기는 말이니, 아들들은 저마다 축복을 기대하며 아버지 앞에 섰을 것입니다. 그런데 시므온과 레위의 차례가 되었을 때, 야곱의 입에서 나온 것은 축복이 아니라 세겜 사건에 대한 심판이었습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폭력의 도구로다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들의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그 노여움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창 49:5–7)
여기서 '흩으리로다'라는 말은 단순히 여러 곳에 나뉘어 산다는 뜻이 아닙니다. 강제로 이곳저곳에 흩어 놓아 다시는 하나로 모이지 못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한 공동체를 뿔뿔이 흩어 버리는 무서운 심판의 말입니다.
당시에는 각 지파가 하나님께 받은 자기 땅에서 함께 모여 사는 것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땅은 단순한 재산이 아니라 그 지파의 뿌리였고 정체성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땅 없이 다른 지파들 사이에 흩어져 산다는 것은 단순히 사는 곳이 바뀌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한 지파가 힘을 잃고, 결속을 잃고, 마침내 이름마저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는 심판이었습니다. 실제로 시므온 지파는 훗날 자기 땅을 따로 받지 못하고 유다 지파의 땅 안에서 얹혀살게 되었고(수 19:1), 시간이 지나면서 역사 속에서 점점 그 존재가 희미해졌습니다. 레위 지파도 같은 길을 걷게 될 것처럼 보였습니다. 야곱의 말대로라면, 레위에게도 흩어짐과 사라짐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32장에서 놀라운 반전이 일어납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하나님께 십계명을 받고 있는 동안, 산 아래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은 기다림을 견디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금붙이를 모아 송아지 형상을 만들고, 하나님 대신 그 우상 앞에 엎드려 절하며 먹고 마시고 뛰놀았습니다. 불과 얼마 전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라고 약속했던 백성이, 그 약속의 산 바로 아래에서 우상을 섬긴 것입니다. 산에서 내려온 모세는 그 광경을 보고 진영 문 앞에 서서 이렇게 외칩니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출 32:26)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오직 레위 자손만이 모세에게로 나아왔습니다. 온 이스라엘이 우상 앞에 무릎을 꿇고 있을 때, 레위 지파만은 하나님 편에 서기로 선택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를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창세기 34장에서 조상 레위는 자신의 분노를 위해 칼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손들은 출애굽기 32장에서 자신의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함을 위해 칼을 들었습니다. 같은 지파, 같은 칼인데 그 방향이 완전히 달라진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신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이르되 각 사람이 자기의 아들과 자기의 형제를 쳤으니 오늘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출 32:29)
그날 이후 하나님은 레위 지파를 특별히 구별하셨습니다. 성막을 섬기고, 언약궤를 메고,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섬기는 지파로 세우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야곱이 말했던 '흩어짐'이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레위 지파는 끝내 다른 지파처럼 자기 땅을 받지 못했고, 여전히 이스라엘 온 땅에 흩어져 살아야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레위 지파는 한 덩어리의 땅 대신, 열두 지파의 땅 곳곳에 흩어져 있는 마흔여덟 개의 성읍을 받습니다. 겉모양만 보면 야곱의 저주가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그 흩어짐의 의미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예전에는 죄의 결과로 흩어지는 심판이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일을 맡아 흩어지는 사명이 되었습니다. 레위인들이 받은 마흔여덟 개의 성읍은 이스라엘 온 땅에 골고루 퍼져 있었습니다. 북쪽 끝에서 남쪽 끝까지, 요단강 동편까지, 어느 지파의 백성이라도 가까운 곳에서 말씀을 배울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온 땅에 말씀의 등불을 심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죽기 전 신명기 33장에서 레위 지파를 이렇게 축복합니다.
"주의 법도를 야곱에게, 주의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가르치며 주 앞에 분향하고 온전한 번제를 주의 제단 위에 드리리로다"(신 33:10)
이제 레위 지파는 더 이상 심판받은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곳곳으로 흩어져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백성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며, 예배를 섬기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저주받아 흩어지던 지파가, 파송받아 흩어지는 지파가 된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먼저 우리가 기억해야 할 진리는, 하나님은 저주도 사명으로 바꾸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레위 지파의 이야기는 분명 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세겜에서 일어난 학살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큰 죄였고, 야곱이 선포한 흩어짐은 마땅한 심판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심판을 놀랍게 바꾸셨습니다. 하나님은 흩어짐 자체를 없애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흩어지는 이유를 바꾸셨습니다. 죄 때문에 흩어지던 사람들이, 이제는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기 위해 흩어지게 된 것입니다. 한때는 흩어져 이름마저 사라질 것 같았던 지파가, 이제는 이스라엘 온 백성의 신앙을 책임지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눈에는 심판처럼 보였던 일이, 하나님의 손에서는 사명이 된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와 똑같은 은혜를 경험한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모세입니다. 모세는 애굽의 왕궁에서 자랐지만, 어느 날 자기 동족인 히브리 사람이 애굽 사람에게 매 맞는 것을 보고 분노하여 그 애굽 사람을 쳐 죽이고 모래 속에 감추었습니다(출 2:12). 동족을 향한 마음은 있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라 자기 분노가 앞선 폭력이었습니다. 세겜에서 칼을 들었던 레위와 똑같은 모습입니다. 실제로 모세 자신이 바로 그 레위 지파의 후손이었습니다. 그 일이 드러나자 모세는 미디안 광야로 도망쳤고, 왕자였던 사람이 남의 양이나 치는 목자가 되어 사십 년을 숨어 살았습니다. 누가 보아도 그의 삶은 그날의 실수로 끝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십 년이 지난 어느 날,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 도망자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가 도망쳐 나왔던 바로 그 애굽으로 그를 다시 보내십니다. 자기 힘으로 동족 한 사람을 구하려다 실패했던 사람이, 이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동족 전체를 구원하는 지도자가 된 것입니다. 사람의 분노로 시작해 도망으로 끝났던 그 자리를, 하나님은 부르심의 자리로 바꾸셨습니다. 광야로 도망쳤던 실패의 사십 년조차 하나님의 손에서는 광야에서 백성을 이끌 지도자를 준비시키는 훈련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레위 지파의 흩어짐이 그러했고, 모세의 도망이 그러했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면, 우리에게 가장 아팠던 그 자리가 하나님께서 가장 크게 일하시는 자리가 됩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땅을 받지 못한 레위 지파에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땅에 기업도 없겠고 그들 중에 아무 분깃도 없을 것이나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네 분깃이요 네 기업이니라"(민 18:20)
다른 지파들은 땅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레위 지파는 땅보다 더 큰 선물을 받았습니다. 땅을 주신 하나님 자신이 그들의 기업이 되어 주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레위 지파가 열두 지파 가운데 가장 가진 것이 없는 지파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가장 부요한 지파였습니다. 다른 지파들은 선물을 받았지만, 레위 지파는 선물을 주시는 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시 16:5)
이 고백은 단지 가진 재산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만 계시면 충분하다는, 하나님이 나의 가장 큰 복이라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우리에게도 지우고 싶은 과거가 있습니다. 감추고 싶은 실수가 있고, 벗어나고 싶은 연약함이 있고, 떠올리기만 해도 마음이 무거워지는 기억이 있습니다. 그 앞에서 우리는 자주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 같은 사람을 하나님께서 쓰실 수 있을까. 그 일 때문에 나는 이미 틀어진 것이 아닐까. 그러나 레위 지파와 모세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해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실패와 상처를 그냥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을 향해 돌아서는 사람에게는 심판의 자리도 사명의 자리로 바꾸어 주시고, 가장 부족해 보이는 사람도 하나님 자신을 기업으로 받는 가장 부요한 사람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우리의 과거가 우리의 앞날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과거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앞날을 결정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거에 매여 주저앉아 있을 수 없습니다. 레위인들이 각자의 성읍으로 흩어져 그곳에서 말씀을 가르쳤던 것처럼, 우리도 각자의 자리로 흩어져 살아갑니다. 직장으로, 학교로, 가정으로 흩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그 자리는 단지 돈을 벌고 공부하기 위한 자리가 아닙니다. 레위인의 성읍처럼, 그곳에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라고 우리를 보내 주신 자리입니다. 우리가 매일 걸어가는 출근길과 등굣길이 사실은 파송의 길이고,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사람들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람들입니다.
이 모든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저주를 대신 짊어지신 한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갈 3:13)
예수님은 성문 밖으로 쫓겨나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를 대신 받으시고, 우리가 당해야 할 버림받음을 대신 당하셨습니다. 그분이 저주를 받으셨기에 우리의 저주가 축복이 되고, 그분이 버림받으셨기에 우리의 흩어짐이 파송이 됩니다. 땅 한 조각 받지 못한 채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레위 지파가 결국 하나님 안에서 가장 부요한 지파가 되었던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걸음도 하나님의 손에서 반드시 사명과 축복의 이야기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 반드시 기억해야 할 또 하나의 진리는,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레위 사람들은 실로에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지도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사 우리가 거주할 성읍들과 우리 가축을 위해 그 목초지들을 우리에게 주라 하셨나이다"(수 21:2)
이 짧은 한마디 속에, 레위 지파가 무엇을 의지하며 나아왔는지가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레위 지파에게는 사실 내세울 것이 많았습니다. 금송아지 사건 때 온 이스라엘 가운데 오직 그들만이 하나님 편에 섰습니다. 사십 년 광야 길 내내 성막을 어깨에 메고 다녔고, 언약궤를 붙들고 요단강 물속에 서 있었던 것도 그들이었습니다. 공로를 따지자면 어느 지파보다 할 말이 많은 지파였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 앞에 선 그들은 자신의 헌신을 단 한 마디도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섰으니 우리의 몫을 달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사십 년 동안 성막을 섬겼으니 받을 자격이 있다"고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내세운 것은 오직 하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셨습니다."
레위 지파는 자신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자신의 자격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근거로 담대히 나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다면, 그 약속을 이루시는 것도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기도의 비밀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근거는 우리가 쌓아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 공로는 흔들리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흔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약속을 그대로 이루어 주셨습니다. 3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자기 기업에서 이 성읍들과 그 목초지를 레위 사람에게 주니라"(수 21:3)
여기서 한 가지 더 눈여겨볼 것이 있습니다. 레위인의 성읍은 빈 땅을 새로 개척해서 만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각 지파가 이미 받은 자기 기업에서 떼어 낸 것이었습니다. 유다가 자기 몫에서 떼고, 에브라임이 자기 몫에서 떼고, 열두 지파 모두가 자기 땅의 일부를 내어놓았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이루실 때 하늘에서 땅이 뚝 떨어지게 하지 않으시고, 순종하는 백성의 손을 통해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께서 이루시지만, 그 약속이 이루어지는 현장에는 순종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민수기 35장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레위 지파에게 성읍을 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명령이 내려진 뒤, 오늘 본문에서 그 말씀이 이루어지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 사이에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는지 헤아려 보아야 합니다. 먼저 모세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가 무대에서 사라진 것입니다. 약속을 전해 준 사람이 죽었으니, 약속도 함께 묻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요단강을 건너야 했고, 굳게 닫힌 여리고 성을 무너뜨려야 했습니다. 아이 성에서는 뼈아픈 실패를 경험했고, 기브온 사람들의 속임수에 넘어가기도 했습니다. 남쪽의 다섯 왕과 북쪽 하솔 왕이 이끄는 연합군을 상대로 오랜 전쟁도 치러야 했습니다.
지도자가 바뀌고, 세대가 바뀌고, 수많은 전쟁과 혼란이 이어졌습니다. 그 긴 시간 동안 레위 지파는 자신들의 땅도, 성읍도 받지 못한 채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다른 지파들이 하나씩 자기 땅을 받아 떠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들은 여전히 빈손으로 서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레위 지파에게 하신 약속을 한순간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사람은 바뀌고 환경은 계속 변했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장의 마지막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씀하신 선한 말씀이 하나도 남음이 없이 다 응하였더라"(수 21:45)
새번역 성경은 이렇게 옮깁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 사람에게 약속하신 모든 선한 말씀이, 하나도 어긋남이 없이 그대로 다 이루어졌다."
성경은 "대부분 이루어졌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거의 다 이루어졌다"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도 어긋남이 없이, 그대로, 다 이루어졌다고 말씀합니다. 이 한 절은 여호수아서 전체의 결론이자, 창세기부터 이어져 온 긴 이야기의 결론이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하신 약속이 육백 년이 넘는 세월을 지나 이날 이루어졌고, 레위 지파에게 하신 성읍의 약속도 이날 이루어졌습니다. 사람은 약속을 잊을 수 있지만, 하나님은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은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무엇이든 빨리 이루어지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물건을 주문하면 다음 날 문 앞에 도착하고, 메시지를 보내면 몇 초 안에 답장이 옵니다. 음식도, 정보도, 만남도 기다릴 필요가 없는 세상입니다. 이렇게 빠른 세상에 익숙해진 우리는 기다리는 것을 점점 어려워합니다. 그리고 그 조급함은 세상일에서 멈추지 않고 신앙의 자리까지 들어옵니다.
그래서 기도한 일이 내가 원하는 때에, 내가 원하는 방법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쉽게 조급해집니다. 조급한 마음은 불안과 두려움으로 이어지고, 불안과 두려움은 결국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한 채 내 생각과 내 방법대로 행동하게 만듭니다.
성경은 그렇게 행동했을 때 어떤 결과가 생겼는지를 솔직하게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후손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지만 십 년이 지나도 아들이 태어나지 않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사라의 여종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창 16장). 약속을 의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약속을 자기 방법으로, 자기 속도로 이루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 선택은 오랫동안 가정의 갈등과 아픔을 가져왔습니다.
사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이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블레셋 군대가 몰려오고 백성들이 하나둘 곁을 떠나기 시작하자, 사울은 두려워졌습니다. 이레째 되는 날, 결국 그는 사무엘을 끝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이 직접 번제를 드렸습니다(삼상 13장). 눈앞의 상황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크게 보였던 것입니다. 그 조급한 선택은 왕위를 잃는 시작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도, 사울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약속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였습니다. 하나님보다 먼저 움직인 것이 그들의 실수였습니다.
하지만 레위 지파는 달랐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약속하신 것은 광야에서였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이 이루어진 것은 여호수아 시대였습니다. 그 사이에 모세는 세상을 떠났고, 이스라엘은 전쟁을 치렀으며, 많은 어려움을 지나야 했습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약속을 잊으신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레위 지파는 조급해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힘으로 성읍을 차지하려고 하지도 않았고, 하나님보다 먼저 움직이지도 않았습니다. 때가 되자 그들은 실로에 있는 회막으로 나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공로나 생각을 내세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자신의 방법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습니다.
같은 여호수아서 안에 이런 믿음을 보여 준 사람이 한 명 더 있습니다. 바로 갈렙입니다. 갈렙은 사십 세에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와 믿음의 보고를 했고, 그때 모세를 통해 헤브론 땅을 약속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이 이루어진 것은 사십오 년이 지난 후였습니다. 팔십오 세가 된 갈렙은 여호수아에게 나아와 이렇게 말합니다. "그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수 14:12). 사십오 년 전의 약속을 토씨 하나 잊지 않고 붙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갈렙이 그토록 오래 기다릴 수 있었던 것은 자기 기억력이 좋아서가 아니라, 약속하신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레위 지파도, 갈렙도, 약속을 붙든 사람은 기다림 속에서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우리도 살아가다 보면 하나님이 너무 늦으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간절히 기도했는데 아무 변화도 없는 것 같고,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취업의 문이 열리지 않을 때, 오래 기도해 온 가족이 여전히 돌아오지 않을 때, 몸의 아픔이 낫지 않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보다 눈앞의 현실이 더 크게 보입니다.
하지만 그 시간은 하나님께서 일하지 않으시는 시간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너던 날을 기억해 보시기 바랍니다.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강물에 닿는 순간 물이 끊어졌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물이 어디에서 멈추었는지를 이렇게 기록합니다.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사르단에 가까운 아담 성읍 변방에 일어나 한 곳에 쌓이고"(수 3:16). 아담 성읍은 백성들이 건너던 곳에서 약 삼십 킬로미터나 떨어진 저 위쪽 상류였습니다. 백성들의 눈에 보인 것은 발 앞의 물이 줄어드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하나님은 그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저 멀리 상류에서 이미 강물을 막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언제나 우리 눈에 보이는 것보다 훨씬 먼저, 훨씬 먼 곳에서 시작됩니다. 우리 눈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상류에서 이미 일하고 계신 것입니다.
레위 지파가 빈손으로 기다리던 그 여러 해 동안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 곳곳에서 약속의 성취를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동안에도 하나님은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은 가장 좋은 때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응답이 더디게 느껴지는 그 시간은 약속이 취소된 시간이 아니라, 약속이 성취를 향해 걸어오고 있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하나님보다 먼저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레위 지파는 바로 그 믿음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기다림 끝에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하나도 남음이 없이 다 응하였더라. 우리의 기다림 끝에도 이 고백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오늘 우리는 가나안 땅 지도 어디에도 이름이 적히지 않았던 한 지파를 보았습니다. 조상의 죄 때문에 흩어지는 저주를 받았고, 모든 지파가 땅을 받아 떠나가는 동안 마지막까지 빈손으로 남아 있던 지파였습니다. 사람의 눈에는 가장 초라해 보이는 지파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지파를 잊지 않으셨습니다. 저주로 시작된 흩어짐을 온 이스라엘에 말씀을 전하는 사명으로 바꾸셨고, 광야에서 하신 약속을 긴 세월과 전쟁의 혼란을 지나 하나도 어긋남 없이 이루어 주셨습니다. 지도에 이름이 없던 지파가, 사실은 온 지도 위에 흩어져 심겨진 말씀의 등불이었습니다. 땅이 없던 지파가, 사실은 하나님 자신을 기업으로 받은 가장 부요한 지파였습니다.
이 두 가지 진리는 서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과거를 사명으로 바꾸신다는 것도 약속이고, 그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증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실패가 아직 사명으로 바뀌지 않은 것처럼 보여도, 우리의 기도가 아직 응답되지 않은 것처럼 보여도, 우리는 낙심할 이유가 없습니다. 요단강 상류에서 이미 물을 막고 계셨던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약속이 확실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가장 큰 약속을 이미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여자의 후손을 보내시겠다던 그 오래된 약속대로, 하나님은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를 십자가에서 대신 받으셨고, 하나님은 그분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가장 지키기 어려운 약속을 지키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나머지 약속들을 지키지 않으실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고후 1:20)
이제 우리는 각자의 자리로 흩어집니다. 레위인들이 마흔여덟 성읍으로 흩어졌던 것처럼, 우리도 가정으로, 일터로, 학교로 흩어집니다. 그 자리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붙들고 살아갑니다. 우리의 과거까지도 사명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도 남음이 없이 다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 은혜와 그 약속을 붙들 때, 지도에 이름이 없어 보이는 우리의 자리가 하나님의 손에서 가장 귀한 자리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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