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화의 용광로,회복의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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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내가 노래하며 나의 마음을 다하여 찬양하리로다
2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3 여호와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양하오리니
4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보다 높으시며 주의 진실은 궁창에까지 이르나이다
5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땅에서 높임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
찬송가 272장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21 신실하던 성읍이 어찌하여 창기가 되었는고 정의가 거기에 충만하였고 공의가 그 가운데에 거하였더니 이제는 살인자들뿐이로다
22 네 은은 찌꺼기가 되었고 네 포도주에는 물이 섞였도다
23 네 고관들은 패역하여 도둑과 짝하며 다 뇌물을 사랑하며 예물을 구하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지 아니하며 과부의 송사를 수리하지 아니하는도다
24 그러므로 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전능자가 말씀하시되 슬프다 내가 장차 내 대적에게 보응하여 내 마음을 편하게 하겠고 내 원수에게 보복하리라
25 내가 또 내 손을 네게 돌려 네 찌꺼기를 잿물로 씻듯이 녹여 청결하게 하며 네 혼잡물을 다 제하여 버리고
26 내가 네 재판관들을 처음과 같이, 네 모사들을 본래와 같이 회복할 것이라 그리한 후에야 네가 의의 성읍이라, 신실한 고을이라 불리리라 하셨나니
27 시온은 정의로 구속함을 받고 그 돌아온 자들은 공의로 구속함을 받으리라
28 그러나 패역한 자와 죄인은 함께 패망하고 여호와를 버린 자도 멸망할 것이라
29 너희가 기뻐하던 상수리나무로 말미암아 너희가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요 너희가 택한 동산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할 것이며
30 너희는 잎사귀 마른 상수리나무 같을 것이요 물 없는 동산 같으리니
31 강한 자는 삼오라기 같고 그의 행위는 불티 같아서 함께 탈 것이나 끌 사람이 없으리라
전형상화 (말씀 강해)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말씀은 이사야 1장 21절부터 31절까지입니다.
이 본문에는 한 성읍의 가슴 아픈 몰락과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성읍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다시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흐름은 성경 전체의 큰 이야기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타락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심판하시지만,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고 다시 찾아오셔서 정결하게 하시며 회복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의 이야기입니다. 창조, 타락, 그리고 회복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단지 고대 예루살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 교회의 이야기이며,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실제 삶에서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살아가는 우리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주전 8세기경 남유다에서 활동했던 선지자입니다. 이사야는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왕의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당시는 국제적으로 앗수르 제국이 급속하게 세력을 넓혀 가던 시대였습니다. 북이스라엘은 결국 주전 722년에 앗수르에 의해 멸망했고, 남유다 역시 앗수르의 위협 앞에서 크게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다 백성의 가장 큰 문제는 앗수르가 아니었습니다. 군사력이 약한 것이 근본적인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경제가 어렵고 정치가 혼란스러운 것이 가장 큰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유다의 근본적인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졌다는 것이었습니다.
백성은 여전히 성전에 나왔습니다. 제사를 드렸습니다. 안식일과 절기를 지켰습니다. 손을 들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에는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예배와 삶이 분리되었습니다. 성전에서는 하나님을 부르면서도 삶의 자리에서는 자기 욕심과 이익을 따라 살았습니다. 제물을 드리면서도 약한 사람을 짓밟았고, 기도하면서도 고아와 과부의 억울함을 외면했습니다.
이사야라는 이름은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이름 자체가 그가 전할 메시지를 보여 줍니다.
유다를 구원하실 분은 애굽도 아니고 앗수르도 아니며, 인간의 정치력과 군사력도 아닙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문학적으로 이사야 1장은 이사야서 전체를 여는 서론과 같습니다. 이 장에는 이사야서 전체에서 반복될 중요한 주제가 압축되어 있습니다.
백성의 반역, 잘못된 예배, 사회적 불의, 하나님의 심판, 남은 자, 정결하게 하심, 시온의 회복이 모두 나타납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인 21절부터 31절은 세 가지 장면으로 전개됩니다.
첫째, 신실했던 성읍이 어떻게 타락했는지를 보여 줍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그 죄를 어떻게 심판하시는지를 보여 줍니다.
셋째, 하나님께서 심판을 통해 자기 백성을 어떻게 정결하게 하고 회복시키시는지를 보여 줍니다.
21절은 탄식으로 시작합니다. “신실하던 성읍이 어찌하여 창기가 되었는고.” 이 말씀에는 하나님의 깊은 슬픔이 담겨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본래 “신실한 성읍”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두신 곳이었습니다. 성전이 있었고, 제사가 있었으며, 하나님의 율법이 선포되던 곳이었습니다. 본문은 계속해서 말합니다. “정의가 거기에 충만하였고 공의가 그 가운데에 거하였더니.”
이것이 하나님께서 처음 세우신 예루살렘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정의가 충만하고, 하나님의 공의가 거하는 성읍입니다. 힘 있는 사람이 약한 사람을 억압하지 않고, 고아와 과부가 보호받으며, 가난한 사람의 억울한 사정이 외면당하지 않는 공동체였습니다.
이것은 창조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은 선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습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며, 이웃을 사랑하고, 창조 세계를 돌보는 존재로 세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오면서 모든 것이 무너졌습니다.
신실한 성읍이 창기가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창기”라는 표현은 단순한 성적인 타락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이 하나님을 떠나 다른 신과 다른 힘을 의지하는 영적인 간음을 의미합니다.
유다는 하나님을 완전히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선언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만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도 의지하고 우상도 의지했습니다. 하나님도 섬기고 세상의 힘도 붙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돈과 권력과 정치적 동맹을 더 신뢰했습니다.
입술로는 하나님을 인정하면서도 실제 삶에서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살았습니다.
22절은 그들의 타락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네 은은 찌꺼기가 되었고 네 포도주에는 물이 섞였도다.”
은은 여전히 은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 찌꺼기가 섞여 있었습니다. 포도주는 여전히 포도주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물이 섞여 본래의 맛과 향을 잃어버렸습니다.
겉모습은 남아 있었습니다. 성전도 있었고, 예배도 있었으며, 제사장도 있었습니다. 종교적인 제도와 언어와 습관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있어야 할 신실함과 거룩함과 사랑과 정의는 사라졌습니다. 형식은 남아 있었지만 본질이 사라졌습니다.
23절은 그들의 타락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보여 줍니다.
“네 고관들은 패역하여 도둑과 짝하며 다 뇌물을 사랑하며 예물을 구하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지 아니하며 과부의 송사를 수리하지 아니하는도다.”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공의를 세워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도둑과 짝했습니다. 뇌물을 사랑했고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사건만 다루었습니다. 고아와 과부는 고대 사회에서 자신을 보호할 힘이 없는 사람들을 대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통해 그들을 특별히 보호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다의 지도자들은 가장 약한 사람들의 소리를 외면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죄의 본질을 발견합니다. 죄는 하나님을 향한 관계만 무너뜨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지면 반드시 이웃과의 관계도 무너집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이웃을 참되게 사랑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약한 사람을 외면하고 자기 이익만 추구하면서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예배는 많은데 정의가 없고, 기도는 많은데 사랑이 없으며, 헌금은 드리지만 고통받는 이웃에게 무관심하다면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 시간만 보시는 분이 아닙니다. 예배가 끝난 후 우리가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보십니다.
우리가 돈을 사용하는 방식을 보십니다. 힘없는 사람을 대하는 모습을 보십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내리는 선택을 보십니다.
신실한 성읍이 창기가 되었다는 것은 하루아침에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보다 조금씩 다른 것을 더 사랑하기 시작한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기 이익을 조금씩 앞세운 결과입니다. 작은 타협을 반복하다가 결국 은에 찌꺼기가 가득하고 포도주에 물이 섞인 것입니다.
형상화 (현실 연관성)
우리는 하나님을 믿지만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말씀은 오늘 우리를 비추는 거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계신다고 고백합니다. 매일 새벽에 나와 기도하고, 주일이면 예배를 드립니다. 성경을 읽고 찬송을 부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을 믿는 사람처럼 살아가고 있습니까?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생각합니까? 아니면 내 이익과 체면과 편안함을 먼저 생각합니까?
사람이 보지 않는 자리에서도 하나님 앞에서 정직합니까? 아니면 들키지만 않으면 괜찮다고 생각합니까?
어려움을 만났을 때 하나님을 의지합니까? 아니면 돈, 사람, 관계, 경험, 권력과 세상의 방법을 하나님보다 더 의지합니까?
하나님이 계신다고 말하면서도 실제 삶에서는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상태를 우리는 경계해야 합니다.
이것은 노골적인 무신론보다 더 위험할 수 있습니다.
입술로는 하나님을 인정하기 때문에 자신의 불신앙을 발견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드리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졌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하지만 실제로는 사람의 인정과 평가를 더 두려워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묻는다고 하면서도 이미 내 뜻을 정해 놓고 하나님께 동의해 달라고 요구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듣지만 순종할 생각은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포도주에 물이 섞이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버리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께 드려야 할 마음을 다른 것들과 나누고 있습니다.
돈이 나를 안전하게 해 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자녀의 성공이 나의 가치를 증명해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의 인정이 나를 행복하게 해 줄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건강과 지위와 관계가 무너지지 않아야만 평안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들이 바로 현대인의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우상은 반드시 돌이나 나무로 만든 형상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 하나님보다 더 두려워하는 것,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는 것이 우상입니다.
29절과 30절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기뻐하던 상수리나무로 말미암아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요 너희가 택한 동산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할 것이며 너희는 잎사귀 마른 상수리나무 같을 것이요 물 없는 동산 같으리니.”
당시 상수리나무와 동산은 우상숭배가 행해지던 장소였습니다. 사람들은 그곳에 가면 풍요와 번영과 안전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기뻐하던 바로 그것으로 인해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대신하여 붙들었던 것이 결국 그들을 구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상이 약속하는 것은 많지만 실제로 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돈은 어느 정도 편리함을 줄 수 있지만 영혼의 평안을 줄 수 없습니다. 사람의 인정은 잠시 기쁨을 줄 수 있지만 우리의 존재 가치를 보장해 주지 못합니다. 권력은 사람을 움직일 수 있지만 죄와 죽음을 이기지 못합니다.
물을 공급하지 못하는 동산은 결국 메마르게 됩니다. 뿌리가 생명의 근원에 연결되지 않은 나무는 결국 잎이 마르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아닌 것을 생명의 근원으로 삼을 때 처음에는 푸르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마르고 무너집니다.
우리의 잘못된 예배도 돌아보아야 합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설득하여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 내는 시간이 아닙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내 인생의 조력자로 만드는 시간도 아닙니다.
예배는 하나님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고, 내가 하나님의 소유임을 고백하며, 말씀 앞에서 나의 죄와 욕망과 계획을 내려놓는 시간입니다.
참된 예배는 반드시 삶의 순종으로 이어집니다. 예배 시간에는 거룩한 말을 하면서 가정에서는 분노를 쏟아 낸다면 우리의 예배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교회에서는 사랑을 말하면서 직장과 사업의 자리에서는 정직을 버린다면 우리의 예배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은혜를 받았다고 말하면서 상처받은 이웃과 약한 사람을 외면한다면 우리의 예배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예배의 형식만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과 삶 전체를 원하십니다.
재형상화 (적용)
재형상화 (적용)
그러나 감사한 것은 오늘 본문이 인간의 타락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24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십니다. “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전능자.”
유다가 타락했다고 해서 하나님이 무력해지신 것이 아닙니다. 지도자들이 부패하고 백성이 하나님을 떠났다고 해서 하나님의 통치가 흔들리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만군의 여호와이십니다. 역사의 주권자이시며, 자기 백성의 죄를 심판하시고 자기 백성을 회복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25절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또 내 손을 네게 돌려 네 찌꺼기를 온전히 청결하여 버리며 네 혼잡물을 다 제하여 버리고.”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손을 돌리신다는 것은 먼저 심판의 손을 드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두렵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죄가 아닌 것처럼 지나치지 않으십니다. 잘못된 예배와 우상숭배와 불의를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심판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완전히 없애기 위해 불을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은에 섞인 찌꺼기를 제거하기 위해 불을 사용하십니다.
금속을 정결하게 하려면 불에 넣어야 합니다. 불의 뜨거움 속에서 찌꺼기가 떠오르고, 그것이 제거될 때 순수한 은이 드러납니다. 욥기 23:10 “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허락하시는 징계와 연단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어려움을 만날 때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셨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때로 우리가 의지하던 우상을 무너뜨리심으로 우리를 살리십니다. 우리가 붙들고 있던 세상의 자랑이 흔들릴 때 비로소 하나님만이 구원이심을 깨닫습니다. 사람의 인정이 사라질 때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배웁니다. 내 계획이 무너질 때 하나님의 뜻이 내 뜻보다 선하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건강과 물질과 관계가 흔들릴 때 우리가 영원한 것을 붙들고 있었는지, 사라질 것을 붙들고 있었는지가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우리를 미워하시는 증거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기 자녀로 사랑하고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를 죄 가운데 그대로 방치하지 않으십니다.
26절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 재판관들을 처음과 같이, 네 모사들을 본래와 같이 회복할 것이라 그리한 후에야 네가 의의 성읍이라, 신실한 고을이라 불리리라.”
하나님께서 회복하시는 것은 단순히 경제적인 형편이나 정치적인 안정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정체성을 회복하십니다. 창기가 되었던 성읍을 다시 신실한 성읍으로 만드십니다. 불의가 가득했던 성읍을 다시 의의 성읍으로 만드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구원은 단순히 어려움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죄로 인해 훼손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났던 사람이 하나님께 돌아오고, 자기 욕심을 따라 살던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27절은 선언합니다. “시온은 정의로 구속함을 받고 그 돌아온 자들은 공의로 구속함을 받으리라.”
여기에서 말하는 정의와 공의는 인간이 자기 의를 쌓아서 구원을 얻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에 신실하셔서 자신의 의로운 방식으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죄인을 용서하시면서도 자신의 공의를 세우실 수 있습니까?
그 대답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모른 척하고 넘어가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심판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받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심판의 불을 통과하셨습니다. 우리가 버림받지 않도록 그분이 버림받으셨고,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도록 그분이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사랑이 함께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심판하셨고, 동시에 죄인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회개를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를 정죄하여 버리기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돌아오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회개는 단순히 잘못을 후회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붙들고 있던 우상에서 돌아서서 하나님을 다시 나의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하나님도 필요하지만 이것도 필요합니다”라고 말하던 삶을 버리고, “하나님만이 나의 구원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의 은에 섞여 있는 찌꺼기는 무엇이냐?”
“너의 포도주에 섞여 있는 물은 무엇이냐?”
“네가 나보다 더 사랑하고 더 의지하는 것은 무엇이냐?”
“너는 예배할 때의 모습과 일상에서의 모습이 같은 사람이냐?”
우리는 이 질문 앞에서 자신을 변명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드러내실 때 그것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여 버리기 위함이 아닙니다. 상처를 싸매고 회복시키기 위함입니다.
의사는 환자를 치료하기 전에 먼저 상처를 드러냅니다. 상처를 감추는 것이 사랑이 아닙니다. 곪은 부분을 씻어 내고 치료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도 우리의 상처와 죄를 드러내십니다. 때로는 아프고 부끄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은 우리를 죽이는 손이 아니라 살리는 손입니다.
하나님은 심판하시지만, 자기 백성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책망 하시지만, 다시 돌아올 길을 열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우상을 무너뜨리시지만, 그 자리에 자신을 가장 좋은 선물로 주십니다.
결론: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사야 1장의 이야기는 창조, 타락, 회복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신실한 성읍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러나 백성은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겼고, 예배와 삶을 분리했으며, 정의와 사랑을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심판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심판은 자기 백성을 완전히 버리기 위한 심판이 아니었습니다.
찌꺼기를 제거하고 다시 신실한 성읍으로 회복시키기 위한 심판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제 안에 섞여 있는 찌꺼기를 제거하여 주십시오.”
“입술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삶에서는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았던 저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제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의지했던 우상을 보여 주십시오.”
“형식만 남은 예배가 아니라, 삶으로 이어지는 참된 예배를 드리게 하여 주십시오.”
“나의 상처를 싸매시고, 나의 마음을 정결하게 하시며, 나를 다시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 주십시오.”
우리가 소망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우리의 결심이 강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의 소망은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잊고 살아갈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잊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멀어질 때에도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책망하시고, 깨뜨리시며, 돌이키게 하시고, 우리의 상처를 싸매십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다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워 주십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하나님께 돌아갑시다.
우리의 우상을 내려놓고, 잘못된 예배를 회개하며,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듭시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의 찌꺼기를 제거하시고, 메마른 동산 같은 우리의 영혼에 생수를 부어 주시며, 우리를 다시 의의 성읍,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워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심판하시지만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정결하게 하시고, 상처를 싸매시며,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신실한 백성으로 회복 시키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