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날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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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alm 66:1–4 NKRV
1 온 땅이여 하나님께 즐거운 소리를 낼지어다 2 그의 이름의 영광을 찬양하고 영화롭게 찬송할지어다 3 하나님께 아뢰기를 주의 일이 어찌 그리 엄위하신지요 주의 큰 권능으로 말미암아 주의 원수가 주께 복종할 것이며 4 온 땅이 주께 경배하고 주를 노래하며 주의 이름을 노래하리이다 할지어다
찬송가: 85장 구주를 생각만 해도
Isaiah 2:1–22 NKRV
1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받은 바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한 말씀이라 2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3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4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 5 야곱 족속아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빛에 행하자 6 주께서 주의 백성 야곱 족속을 버리셨음은 그들에게 동방 풍속이 가득하며 그들이 블레셋 사람들 같이 점을 치며 이방인과 더불어 손을 잡아 언약하였음이라 7 그 땅에는 은금이 가득하고 보화가 무한하며 그 땅에는 마필이 가득하고 병거가 무수하며 8 그 땅에는 우상도 가득하므로 그들이 자기 손으로 짓고 자기 손가락으로 만든 것을 경배하여 9 천한 자도 절하며 귀한 자도 굴복하오니 그들을 용서하지 마옵소서 10 너희는 바위 틈에 들어가며 진토에 숨어 여호와의 위엄과 그 광대하심의 영광을 피하라 11 그 날에 눈이 높은 자가 낮아지며 교만한 자가 굴복되고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시리라 12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날이 모든 교만한 자와 거만한 자와 자고한 자에게 임하리니 그들이 낮아지리라 13 또 레바논의 높고 높은 모든 백향목과 바산의 모든 상수리나무와 14 모든 높은 산과 모든 솟아 오른 작은 언덕과 15 모든 높은 망대와 모든 견고한 성벽과 16 다시스의 모든 배와 모든 아름다운 조각물에 임하리니 17 그 날에 자고한 자는 굴복되며 교만한 자는 낮아지고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실 것이요 18 우상들은 온전히 없어질 것이며 19 사람들이 암혈과 토굴로 들어가서 여호와께서 땅을 진동시키려고 일어나실 때에 그의 위엄과 그 광대하심의 영광을 피할 것이라 20 사람이 자기를 위하여 경배하려고 만들었던 은 우상과 금 우상을 그 날에 두더지와 박쥐에게 던지고 21 암혈과 험악한 바위 틈에 들어가서 여호와께서 땅을 진동시키려고 일어나실 때에 그의 위엄과 그 광대하심의 영광을 피하리라 22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
전형상화 (말씀 강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인 이사야 2장에는 서로 매우 다른 두 장면이 나타납니다.
첫 번째 장면은 아름답습니다. 2절: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위에 굳게 서고, 모든 민족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기 위하여 시온으로 몰려옵니다. 4절:사람들이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듭니다. 나라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지 않고 전쟁을 연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장면은 두렵습니다. 10절:사람들이 바위틈과 토굴 속으로 도망합니다. 12절:인간이 자랑하던 높은 산과 견고한 성벽이 무너집니다. 20절:사람들이 은과 금으로 만든 우상을 두더지와 박쥐에게 던져 버립니다.
이 두 장면을 하나로 연결하는 중심 주제가 있습니다.
바로 12절 만군의 여호와의 날입니다.
여호와의 날은 하나님께서 역사 가운데 자신의 주권을 나타내시는 날입니다. 죄를 심판하시고, 인간의 교만을 낮추시며,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온전히 드러내시는 날입니다.
여호와의 날은 악인에게는 두려운 심판의 날이지만, 하나님을 기다리는 백성에게는 구원과 회복의 날입니다. 잘못 높아진 것은 낮아지고, 무너진 하나님의 질서는 다시 세워지며, 오직 여호와만 높임을 받으시는 날입니다.
이사야 2장 1절부터 5절은 그날에 하나님께서 이루실 영광스러운 회복을 먼저 보여 줍니다.
2절입니다.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말일”은 단순히 세상 마지막의 어느 하루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을 이루시고, 메시아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 가시는 시대를 가리킵니다.
그날에는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위에 높이 서게 됩니다.
고대 세계에서 산은 단순한 지형이 아니었습니다. 높은 산은 신들의 자리와 인간의 권력과 영광을 상징했습니다. 각 민족은 자신들이 섬기는 신과 성소를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장차 여호와의 산이 모든 산 위에 굳게 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예루살렘의 해발고도가 갑자기 높아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통치와 말씀이 모든 민족과 권세 위에 높이 드러나게 된다는 뜻입니다.
3절을 보면 많은 백성이 서로 말합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열방이 시온으로 올라오는 이유는 이스라엘의 경제적 번영이나 군사력을 배우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길을 배우기 위해서입니다.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따라 살기 위하여 나아옵니다.
문은 계속해서 말합니다.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세상을 새롭게 하는 것은 인간의 권력이나 정치적 제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마음을 다스릴 때 칼이 보습으로 바뀝니다. 사람을 죽이던 도구가 생명을 살리는 도구로 변화됩니다. 창은 낫이 되고, 전쟁을 연습하던 사람들이 땅을 갈고 열매를 거두는 일을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다스리지 않는 인간은 자기 욕망을 위하여 칼을 만듭니다. 자신을 보호하고 상대방을 지배하기 위하여 힘을 쌓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면, 자신을 지키기 위해 사용하던 힘을 이웃을 살리는 데 사용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실 회복은 단순히 전쟁이 잠시 중단되는 상태가 아닙니다. 인간의 마음과 삶의 목적이 완전히 변화되는 것입니다.
죄는 우리가 가진 능력을 자신을 높이고 다른 사람을 억압하는 데 사용하게 합니다. 그러나 은혜는 우리가 가진 능력을 이웃을 섬기고 생명을 살리는 데 사용하게 합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날에 이루어질 회복입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미래의 영광스러운 회복만 바라보지 않습니다. 그는 즉시 현재를 향하여 말합니다.
5절입니다. “야곱 족속아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빛에 행하자.”
장차 모든 민족이 하나님의 빛으로 나아올 것이니, 하나님의 백성인 너희가 먼저 그 빛 가운데 걸으라는 것입니다.
미래에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것을 믿는 사람은 오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차 칼이 보습으로 바뀔 것을 믿는다면 오늘부터 우리의 말과 행동으로 사람을 살려야 합니다.
장차 모든 민족이 하나님의 길을 배울 것을 믿는다면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그 길을 걸어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의 유다는 여호와의 빛 가운데 걷지 않았습니다.
6절부터 본문의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유다에는 동방의 풍속과 점술이 가득했습니다. 은과 금이 가득했고, 말과 병거가 가득했으며, 우상이 가득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해야 할 땅이 세상의 풍속과 재물과 군사력과 우상으로 가득해졌습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날이 임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개입하시지 않는다면 인간은 자기가 만든 우상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높아진 것을 낮추시지 않는다면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을 높이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날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악 된 질서를 뒤집고 창조의 질서를 다시 세우시는 날입니다.

형상화

7절과 8절에는 “가득하다”는 표현이 반복됩니다. “그 땅에는 은금이 가득하고 보화가 무한하며 그 땅에는 마필이 가득하고 병거가 무수하며 그 땅에는 우상도 가득하므로.”
은과 금이 가득했습니다. 말과 병거가 가득했습니다. 우상이 가득했습니다.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유다는 발전하고 있었습니다. 경제적으로 부유했고, 군사적으로 강해졌으며, 외국의 다양한 문화와 종교를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그들의 풍요와 힘은 하나님을 대신하는 우상이 되어 있었습니다.
은과 금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말과 병거도 그 자체로 악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하나님만이 차지하셔야 할 자리를 차지했다는 것입니다.
팀 켈러는 우상을 설명하면서, 우상은 흔히 나쁜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을 궁극적인 것으로 만들 때 생긴다고 지적합니다.
돈과 직업, 가족과 자녀, 사랑과 인정, 성공과 안전은 모두 하나님께서 주시는 좋은 선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궁극적인 행복과 안전과 정체성을 결정하는 것이 되면 우상이 됩니다.
우상은 단순히 우리가 예배당 밖에서 절하는 종교적인 형상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만 있으면 나는 안전할 수 있다.” “이것이 이루어져야 내 인생은 가치가 있다.” “이것을 잃으면 나는 살아갈 수 없다.”
우리의 마음이 그렇게 붙드는 것이 우상입니다.
유다 백성에게 은과 금은 경제적인 수단을 넘어 안전을 보장하는 신이 되었습니다. 말과 병거는 국방 수단을 넘어 나라를 구원할 구세주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완전히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성전에 나가 제사를 드렸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러나 실제 삶에서는 하나님보다 돈과 힘을 더 신뢰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인정하면서도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의 문화에도 동일한 우상이 존재합니다. 현대사회는 돈이 있으면 대부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좋은 직업과 안정된 소득을 가지면 안전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성공하면 인정받을 수 있고, 남들보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자신이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이러한 문화의 이야기를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믿음보다 경제적인 안정이 더 중요해지고, /순종보다 성공이 더 중요해집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보다 사람들에게 뒤처지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해집니다.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우리의 진정한 평안은 통장 잔액과 자녀의 성공과 사람들의 평가에서 얻으려 합니다.
그런데 문화적 우상은 개인이 혼자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한회의 많은 사람이 동일한 것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섬길 때 그것은 문화의 우상이 됩니다.
어떤 사회는 경제적 성공을 최고의 가치로 여깁니다. 어떤 문화는 외모와 젊음을 숭배합니다. 어떤 공동체는 학벌과 지위를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습니다.
때로는 정치적 이념이나 민족적 자부심도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보다 더 절대적인 충성과 소망의 대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교회도 이러한 문화적 우상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회의 크기와 숫자가 복음의 신실함보다 더 중요해질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보다 더 중요해질 수 있습니다.
목회자의 명성과 성도의 사회적 성공이 십자가와 겸손보다 더 높이 평가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눈에 성공으로 보이는 것보다 하나님 앞에서 신실한가를 물으십니다.
8절은 우상숭배의 모순을 이렇게 지적합니다. “그들이 자기 손으로 만들고 자기 손가락으로 지은 것을 경배하여.”
인간이 자신이 만든 것 앞에 엎드립니다.
인간이 돈을 만들고 제도를 만들며 기술과 문화를 만들었지만, 어느 순간 그것들이 인간의 주인이 됩니다.
돈을 사용해야 할 사람이 돈의 명령을 따라 살아갑니다. 기술을 사용해야 할 사람이 기술의 지배를 받습니다. 사람의 행복을 위해 존재해야 할 성공과 경쟁이 오히려 사람의 영혼과 관계를 파괴합니다.
우상의 특징은 처음에는 우리를 섬길 것처럼 다가오지만, 결국 우리에게 희생을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성공의 우상은 가정과 건강과 양심까지 희생하라고 말합니다. 인정의 우상은 사람들의 평가를 얻기 위해 진실을 감추고 자신을 꾸미라고 요구합니다.
자녀의 성공이 우상이 되면 자녀를 하나님의 선물로 사랑하기보다 부모의 자랑과 욕망을 이루는 수단으로 대하게 됩니다.
안전이 우상이 되면 하나님의 부르심보다 실패하지 않는 삶을 선택합니다. 믿음으로 순종하기보다 아무 위험도 감수하지 않으려 합니다.
우상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말합니다.
“더 가져야 한다.” “더 인정받아야 한다.” “더 높아져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가져도 만족이 없습니다. 아무리 인정받아도 불안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피조물은 하나님만이 채우실 수 있는 인간의 영혼을 채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상숭배의 뿌리에는 인간의 교만이 있습니다.
11절입니다. “그 날에 눈이 높은 자가 낮아지며 교만한 자가 굴복되고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시리라.”
우상은 단지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사랑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궁극적으로 내가 하나님이 되려는 시도입니다.
하나님께 삶을 맡기지 않고 내가 내 인생을 통제하려는 것입니다. 무엇이 선하고 악한지를 하나님께 묻지 않고 내가 결정하려는 것입니다. 돈과 성공과 사람을 붙드는 이유도 그것들을 통하여 내 삶을 통제하고 내 가치를 증명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상숭배의 중심에는 자기 자신이 있습니다.
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한다.” “나의 계획대로 되어야 한다.”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야 한다.”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이 일하셔야 한다.”
이것이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교만입니다.
겉으로 자신감이 없어 보이는 사람도 교만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평가에 지나치게 예민하고, 인정받지 못할 때 견디지 못하는 것도 자신의 가치가 반드시 사람들에게 증명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염려도 때로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교만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모든 일이 내가 예상하고 통제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모든 불안과 염려를 단순히 교만이라고 정죄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불안 속에는 하나님보다 내가 상황을 통제해야 평안할 수 있다는 불신앙이 숨어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여호와의 날을 말씀하시는 것은 단순히 먼 미래의 심판을 알려 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무엇을 의지하며 살아가는지를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여호와의 날 앞에서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나는 무엇을 잃을 때 가장 두려워하는가?
무엇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내 삶이 실패했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무엇을 통하여 나의 가치를 증명하려 하는가?
어려움을 만났을 때 가장 먼저 누구와 무엇을 의지하는가?
그 대답 속에 우리의 우상이 숨어 있을 수 있습니다.

재형상화

12절은 여호와의 날을 직접 선포합니다.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날이 모든 교만한 자와 거만한 자와 자고한 자에게 임하리니 그들이 낮아지리라.”
여호와의 날은 모든 교만한 것이 낮아지는 날입니다. 본문에는 당시 사람들이 높고 강하며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계속 등장합니다.
레바논의 높고 높은 백향목, 바산의 상수리나무, 높은 산과 솟아오른 언덕, 높은 망대와 견고한 성벽, 다시스의 모든 배와 아름다운 조각물입니다.
백향목은 인간의 위엄과 부요함을 상징했습니다. 견고한 성벽은 군사적 안전을 상징했고, 다시스의 배는 경제적 번영과 무역의 힘을 상징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날이 임하면 인간이 높여 놓은 모든 것이 낮아집니다.
17절은 다시 선언합니다. “그 날에 자고한 자는 굴복되며 교만한 자는 낮아지고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실 것이요.”
여호와의 날의 목적은 단순히 모든 것을 파괴하는 것이 아닙니다.
잘못 높아진 것을 낮추고 마땅히 높임을 받으셔야 할 하나님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지하던 우상은 여호와의 날에 그 실체가 드러납니다.
20절입니다. “사람이 자기를 위하여 경배하려고 만들었던 은 우상과 금 우상을 그 날에 두더지와 박쥐에게 던지고.”
평소에는 귀하게 여기며 붙들던 은 우상과 금 우상을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는 내던지게 됩니다.
사람들은 우상이 자신을 구원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닫습니다.
돈은 생활의 필요를 채워 줄 수 있지만 죽음에서 우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사람의 인정은 잠시 기쁨을 줄 수 있지만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우리를 의롭게 하지 못합니다.
권력은 다른 사람을 움직일 수 있지만 자기 영혼의 죄를 제거하지 못합니다. 건강과 젊음은 한동안 유지될 수 있지만 영원한 생명을 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호와의 날 앞에서 누가 설 수 있습니까? 우리 안에도 교만과 우상이 있기 때문에 우리 역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구약은 여기까지만 계시한다. 신약에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회복이 완성된다. 여호와의날 이 무엇인지 완전히 드러내셨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가장 높으신 분이셨지만,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종의 형체를 입으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으며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인간은 자신을 높이려다가 심판을 받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낮추셔서 죄인을 구원하셨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이 만나는 자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가 받아야 할 여호와의 날의 심판을 대신 담당하셨습니다. 어둠이 온 땅을 덮었고,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가 죄 없으신 그리스도께 임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낮아지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높임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버림받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우리에게 단순히 “교만하지 말라”고 명령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복음은 우리가 자신을 높여야 할 필요에서 자유롭게 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인정받아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입니다.
돈과 성공을 통하여 안전을 확보하려고 몸부림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의 생명과 미래가 신실하신 하나님의 손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보다 높아지기 위해 경쟁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낮아져 우리를 섬기셨기 때문에 이제 우리도 이웃을 섬길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날은 이미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마지막 날, 모든 인간의 교만과 세상의 우상은 완전히 무너질 것입니다. 나라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지 않고, 전쟁을 연습하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민족이 하나님 앞에 나아오며 오직 여호와만 높임을 받으실 것입니다.
그날을 기다리는 우리는 오늘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본문은 이미 5절에서 답을 주었습니다. “야곱 족속아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빛에 행하자.”
첫째, 우리는 날마다 우리 안의 우상을 하나님 앞에 드러내야 합니다.
우상은 단번에 완전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은 끊임없이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하고 의지하려 합니다. 그러므로 말씀과 기도 앞에서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 제가 주님보다 더 의지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제가 무엇을 통하여 나의 가치를 증명하려 합니까?” “무엇을 잃을까 두려워하여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합니까?”
성령께서 우리의 우상을 보여 주실 때 변명하지 말고 회개해야 합니다.
둘째, 칼을 보습으로 바꾸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 손에 실제 칼은 없을 수 있지만, 우리의 말과 태도가 칼이 될 수 있습니다.
비난과 정죄, 비교와 냉소로 사람을 찌를 수 있습니다. 과거의 상처를 무기처럼 사용하여 가족과 이웃을 공격할 수도 있습니다. 여호와의 빛 가운데 걷는 사람은 사람을 죽이는 도구를 살리는 도구로 바꾸어야 합니다.
상처를 주던 입술로 위로하고, 경쟁하던 사람을 축복하며, 갈등하는 관계 속에서 먼저 화해의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셋째, 사람을 궁극적으로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의 마지막 22절입니다.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
사람은 사랑하고 섬겨야 할 대상이지만 하나님처럼 의지해야 할 대상은 아닙니다.
아무리 강하고 지혜로운 사람도 호흡이 멈추면 모든 능력이 끝납니다. 사람의 약속은 변할 수 있고, 사람의 도움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고 그분의 언약은 실패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람의 도움을 받을 수 있고, 재물을 사용할 수 있으며, 지식과 제도를 활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궁극적인 소망과 안전은 오직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호와의 날은 반드시 옵니다.
그날에는 우리가 지금 높게 여기는 많은 것이 낮아질 것입니다. 사람들이 부러워하던 성공과 자랑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우리가 의지했던 은과 금, 말과 병거도 우리를 구원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 여호와의 날은 두려움만의 날이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눈물과 상처가 끝나고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구원의 날입니다. 죄와 죽음이 사라지고 칼이 보습으로 바뀌며, 모든 민족이 한마음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회복의 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날을 두려움 속에서만 기다리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고 소망 가운데 기다립니다.
오늘 이 새벽, 하나님 앞에 우리의 우상을 내려놓읍시다. 돈과 성공, 사람의 인정과 자녀에 대한 욕망, 나의 경험과 계획을 하나님보다 더 의지했던 죄를 회개합시다.
“하나님, 제 안에 높아진 모든 것을 낮추어 주십시오.” “제가 만든 우상을 주님보다 더 의지하지 않게 하십시오.” “사람을 죽이는 칼과 창을 내려놓고 사람을 살리는 보습과 낫을 들게 하십시오.”
“사람의 호흡을 의지하지 않고 영원하신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십시오.”
여호와의 날에는 모든 교만한 것이 낮아지고 오직 여호와만 높임을 받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날이 오기 전에 오늘 우리의 마음에서 하나님을 가장 높여 드립시다.
우리의 가정에서 하나님을 높이고, 일터에서 하나님을 높이며, 우리의 선택과 말과 관계를 통하여 하나님을 높여 드립시다. “야곱 족속아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빛에 행하자.”
여호와의 날은 인간이 높여 놓은 모든 우상을 무너뜨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을 회복하여 오직 하나님만 높임을 받게 하는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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