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23편 강해 서문과 1장

김남준 목사의 시편23편 강해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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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서문

숲속에서 만난 하나님.

설교자가 먼저 자신에게 설교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성경 본문 속에서들을 수 있을 때 비로소 그의 설교는 회중을 향한 하나님의 음성이 될 수 있고 설교자를 감동시키는 하나님의 거룩한 은혜가 그의 내면 세계를 바해치며 지나갈 때 그의 설교가 골수에서 울어나오는 증언이 될 수 있다는 는 평범한 사실을 시편 23편 속에서 다시 체험하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3년 전의 일입니다.
깨닫지 못하기가 짐성같이 어리석은 제가이 시의 위대한 의미에 눈뜨게 된 것은 전적으로 저의 초라한 설교 사역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끝없이 펼쳐진이 놀라운 시편 23편은 저에게 있어서 하나의 수필하기라보다는 장엄한 원실림 그 자체였습니다.
그 울창한 원실림 속에서 저는 영원하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때로 시내물이 졸졸 흐르는 시내가에서 발을 담그는 안식을 누리기도 했고 때로는 금목을 쓰러뜨리는 먼 한 기속에 떨어지는 벼락의 성강을 본세로 잘난니 비는 너른 해의 빛자락 아래 생명의 기운을 먹음고 약동하는 나무들의 내음을 을기도 하였습니다.
이 위대한 시의 원실림 속에서 무엇보다도 가슴벅찬 감격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그 속에서 불변하는 위대한 복음을 붙잡고 있는 저자 다윗을 비롯한 위대한 영적 거인들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시의 깊은 의미를 조금씩 깨닫게 될수록 저는 마치 그대한 태산 어린아이로 변해 가는듯한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초라해져 가는 느낌과 함께 약 3천년을 앞서 살았던 다윗의 신앙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는 복음의 내용을 더욱 깊이 묵상하게 된 것은 더할 수 없는 축복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강력한 낙내와 같은 설교로 교회를 깨우시기도 [목을 가다듬음] 하지만 때로는 당신의 백성들로 하여금 그들을 목자 이런 양처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도록 만들어 주심으로 자식의 마음을 아비에게 돌이키게도 하십니다.
뒤에 놓인 새 통강이 강력한 지혜는 부서지지만 잘 달궈졌을 때는 가벼운 망치질로도 원하는 모양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이 본문은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의 정서를 충분히 달아오를 때에는 속삭이는 설교로도 위대한 회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는 사실을 설교할 때 경험하게 만들어 준 본문이기도 합니다.
저는이 위대한 실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설교하고자 했었습니다. 그리고 본문을 설교할 때마다 [목을 가다듬음] 하나님은 너무나 자주 축복해 주셨습니다. 신앙생활하면서도 가슴에 깊은 상처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 사람과 자신의 운명에 대하여 칼을 품고 살아온 사람들. 형식적인 신앙생활 속에서 의식도 없이 나태하게 살아가고 있던 사람들. 빛나간 열심으로 섬기면서 끝없이 험한 마음으로 살아가던 사람들. 이런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제가 맛본 것 같은 하나님과의 만남을 갖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어두운 세상을 것처럼 살아가도록 부름받았지만 그렇게 살아가지 못하게 하는 원인들이 우리 안에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우리 앞에 살다간 믿음의 선배들과 우리의 동시들의 시대의 그리스도인들 중 많은 사람들이 끝도록 쉽게 세상과 함께 섞여 맛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예.
하나님 앞에서 깨어 있는 사람은 언제나 소수였습니다. 말씀 되지만 누룩은 언제나 한줌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서의 가루가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것이 되는 변화를 불러일으키기에는 한줌의 누룩이 충분하였던 것처럼 하나님께 깨어 있는 소수는 이미 소수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소수는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소수이기 때문입니다. 성경과 역사를 통해서 배우는 한 가지 평범한 교훈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소수가 곧 다수라는 사실입니다.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그들과 일하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바된이 세상은 하나님을 아는 것 이외에 소망이 없고 고통하는 인간에 대한 최종적인 대답은 오직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의 진척은 오로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얼마나 풍성한 영적인 삶의 깊이를 누리고 살아가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날과 같이 신앙에 있어서 영적인 특성들이 경시되거나 잘못 이해되는 시대에는 더더욱 거룩하고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원천으로서의 내면적이고 영적인 삶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가 필요합니다.
아울러 실천하는 삶과 연결되지 않는 개인의 영적 생활, 역사와 관련이 없는 교회 영성 등은 모두 거짓된 것입니다. 한 개인의 인격이 하나님께 붙잡힌 바 되었다는 사실은 삶의 현장을 통하여 고백되어지며 한 교회가 영적으로 각성하고 부흥을 경험할 때 그 교회와 함께 하신 하나님은 역사 위의 모습을 드러내시기 때문입니다.
적힌 글은 원고 없이 설교한 내용을 녹지한 후 다시 정리한 것입니다. 본문 전체를 한가면서 [목을 가다듬음] 조국 교회와 우리의 신앙 그리고 삶의 모습들을 시인의 고백과 복음을 통해 새롭게 조명하면서 잘못된 모습을 함께 아파하며 고쳐보고 용기와 위로와 용기를 얻게 하고자 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오늘 내적 치유 사역이라는 이름 아래 다루워지고 있는 상처의 치유 문제에 대해서도 심리학적 접근보다는 복음적인 접근들을 시도해 보고자 하였습니다.이
이 책이 어두운 세상을 불꽃처럼 살아서 하나님께 기쁨과 영광을 드리고 싶어하는 조국 교회 사랑하는 성도들과 교회와 세상 사이에서 아직도 결단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 분들에게 하나님을 새로 만나게 해주시는 해주는 도구가 되기를 하나님께 빕니다.
그리스도의 노예 김남준

책을 열며

이상한 처방전

어떤 환자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상한 병에 걸린 중년 신사가 있었습니다. 여러 병원을 찾아다니며 유명하다는 의사는 다 만나 보았지만 신경성 질환이라는 진단 외에는 별다른 뚜렷한 소견이 없는 병이었습니다. 낮이면 불안하고 초조해지고 밤이면 누군가가 목을 조이는 것 같이 가슴이 답답해 오면서 잠을 이루지 못하는 병이었습니다. 무엇인가 커다란 불행이 음습하거나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신을 멀리하여 버릴 것 같은 불길한 예감으로 안절부절 못해 하는 생활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깨야 오랫동안 다니던 직장도 사직하지 않으면 안 될 사항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처지를 딱하게 여기는 친구로부터 독실한 기독교인 의사가 진료하고 있는 정신과를 소개받았습니다. 그가 병원에 찾아가서 만난 의사는 젊은 사람이었지만 겸손하고 친절했습니다. 마음을 기울여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 주는 의사의 친절한 상담 태도에 마음이 열려서이 환자는 한시간이 넘도록 자신의 질병과 마음의 상태에 대하여 상세히 말해 주었습니다. 무엇인지 정체도 모르는 것에 얼매여 자신의 삶을 다 잃어버리고 기다려야 하는 스스로의 처지를 한탄하며 하소연하는 환자의 눈에서는 하염없는 눈물이 흐르러 내리고 있었습니다. 장시간 동안 환자의 이야기를 경청하던 의사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겸손히 그러나 단호한 의조로 말하였습니다.
선생님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 병을 제가 꼭 고쳐 드리겠습니다. 여러 의사를 만나보았지만 애매 모한 진단 끝에 효과도 분명하지 않는 약 몇 번지를 지워주거나 장시간에 지료를 필요로 하다는 불확실한 처방을 내려주는 것이 이제까지의 경험이었기에이 젊은 의사의 확신에 찬 선언은 그를 다소 의해야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의사에게 물었습니다. 이번 해야겠죠, 선생님? 의사는 데구도 하는 채 고개만 가로으며 책상에서 뭔가를 적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약을 다 가야 되나요? 역시 고개를 저으며 의사는 계속해서 열심히 쓰고 있었습니다. >> 네. >> 네. >> [목을 가다듬음]
>>

이상한 처방전

잠시 후 의사는 공된에 공투를 환자에게 내밀며 말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의 병은 웬만한 약으로 고칠 수 없는 질병입니다. 제가 매우 귀한 약을 처방하였으니 지시대로 지어 복용하십시오. 약을 짓기 위해 약국에 가시기 전에 먼저 오늘 밤 중 조용한 시간에 혼자서이 처방을 읽어 보십시오. 환자는 이상한 의사도 다 있구나. 생각하며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리고 밤이에 되기를 기다렸습니다. 온 가족이 깊이 잠든 밤 조용한 시간에 그는 자신의 침대 머리 맡에 봉원된 처방전을 뜯어 보았습니다. 뜻밖에도 이런 메모지가 나왔습니다.
처방전 귀아의 신석한 케율을 기하며 다음과 같이 처방합니다. 약의 이름 구약의 종류 시편 23편 용법 및 이용 하루 다섯 차례 식전 식후에 물 없이 천천히 씹어 드십시오. 기상 꾸준히 장기 복용하셔야 뚜렷한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교육 환자는 처음에 매우 분노하였습니다. 마치 사기당한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겸손하고 신뢰할 수 있는 것 같았던 의사에게 낙락당한 거 같은 불쾌한 마음을 주최할 수 없었습니다. 김에 그 처방절서 쓰레기통에 던져버렸습니다. 그러던 그날 밤에이 사람은 한 숨도 못 자고 불면증에 시달렸습니다. 새벽에 잠치 눈을 붙이는가했는데 심한 가위에 눌려 큰 소리를 지르며 깨고 말았습니다.
온 가족이 그 심어 있는 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앉아 구절했습니다.이 일이 있은 후 일주일 가까이 지났지만 평생은 점점 더 뚫렸지 악화되었습니다.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상황에 이르자 물에 빠진 사람이 치불하기로라도 잡는다고 했듯이 언젠가에 그의 처방전이 생났습니다. 그는 즉상 한 구석에 놓인 성경책을 가져다가 작은 독성 카드에 시편 23편을 깨알같이 옮겨 접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의사의 지시에 따라 하루에 다섯 자례씩 천천히 읽기 시작했습니다. 일어나자마자 한 번 아침 먹고 나서 한 번 점심 식사 한 번 저녁 식사 후 한 번 그리고 잠자리 들기 전 한 번 모두 앞하여서 정확히 매일 다섯 번씩 읽었습니다.
그리고 약 한 달이 흘렀습니다.

말씀의 기적.

그러던 어느 날 이런 아침에 평소와 다름없이 시편 23편을 천천히 읽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하도만 읽어서 자신의 의주와는 상관없이 저절로 거의 외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언제부터인지 그는 정해진 시간이 되면 조용히 눈을 감고 시편을 암송하는 생겼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나를 푸른 초장에 놓이시며 출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시니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령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그날 이른 아침 이시의 첫 절을 암송하는 순간부터 그는 여지없이 심령이 무너지는 커다한 충격을 경험하였습니다. [웃음] 가슴속에 있던 어떤 무거운 응어리가 흐물흐물하게 풀어지는 것 같더니 마음이 뜨거워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영혼 깊은 곳에서 일찍이 경험해 본 적이 없는 그런 통곡이 터져 나왔습니다. 마치 낡은 콘크리트 건물더미에 무너지듯이 자신의 아집과 하나님 없이 살아온 인간의 교만이 무너지고 하나님 앞에 선 자신의 참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한때 사회에서는 총망받는 사람이었고 스스로 유능하다고 생각해 왔지만 자신은 하나님을 떠나 길이은 양의 처지가 되어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드러난 자신의 참 모습을 발견하고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불순종으로 일관된 삶을 살았으며 자신의 영혼을 돌보는 일에 얼마나 소하였는가를 뼈저리게 후회하였습니다. 읽은 것은 시편 23편인데 거기서 그는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신 하나님의 복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그는 울고 또 울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만난 후 하나님의 사랑과 치료하시는 여호와의 은혜가 그의 영혼에 강물같이 흘러 들어왔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이것은 전적으로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그의 병은 씻음이 나왔습니다. >>

장대에 달린 놋뱀

호르산에서 진행하여 홍의 길로 쫓아 에돔 땅을 둘러 행하려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험한 길로 인하여 하나님과 모세를 원몽하였습니다. 길로 인하여 마음에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 곳 이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도다. 싫어하노라. 이러한 이스라엘의 원망은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불뱀들을 보내어 많은 백성을 물게 하셨고 뱀에게 물린 백성들 중 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백성을 위하여 중보 기도하는 모세에게 주었던 하나님의 명령을 기억하십니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법을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가 노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노뱀을 쳐다본즉 살더라. 뱀에 물린 자에게 필요한 것은 해독제입니다. 뱀에 물려 고통하는 것과 장대 끝에 달린 노뱀을 보는 것이 무슨 과학적인 상방관계가 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당신의 백성을들을 고치셨습니다. 그날 뱀에게 물려 불덩어리처럼 달아오른 자신의 몸과 퉁퉁 부어 오르는 자신의 다리를 매만지면서 단지 눈물 흘린 자신을 불쌍히 여기고 있었던 사람들은 광야에서 모두 죽어갔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을 원망한 죄를 그대로 안고 말입니다. 그러나 장대 높이 달린 노뱀을 바라보는 자들은 나음을 얻었습니다. 노뱀의 위력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당신의 말씀에 순종하며 쳐다본 이스라엘 백성들의 바라봄을 믿음으로 인정해 주신 하나님의 능력 때문이었습니다.

오해로부터 벗어나라.

영적인 침체나 과거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며 아파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보다는 자신의 고통스러운 처지를 주목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을 바라보는 자들에게 치유의 은혜를 베푸십니다. 스스로 자신의 마음의 상처와 침체된 영혼을 부듬껴고 자신을 긍휼히 여기는 사람은 영적 회복보다는 갑산 감상의 성서를 대가로 받을 뿐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영혼을 살릴 수 있고 죽은 자와 방불한 심령에 소생을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영적 소생 상처로부터의 해방과 자유는 우리가 앉는 고통에 비례하여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절대 의존적인 소망에 의하여 하나님 자신이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상처와 치유 그리고 영적 침체에 대한 오해가 나무하고 있는 시대입니다. 영혼의 진정한 회복을 위하여는 무엇보다도 두 가지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소망은 우리 오직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께 있다는 것과 하나님은 오직 말씀으로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마음에 깊은 상처와 침체된 영혼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녀들을 바라보시는 것은 하나님에게 있어서 큰 고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자녀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서 우리의 믿음 생활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온 땅에 알리시기 위함위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하나님이 하시는 가장 영광스러운 일들 일 중에 하나는 당신의 백성들의 영혼을 회복시키시는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단순한 지유와 회복을 넘어서 어두운 세상을 불꽃처럼 살아가게 하시려고 말입니다. 당신이 바로 하나님께서 회복시키시려는 그 사람입니다. >>

제1장 목자는 계십니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길은 길은 [웃음] 마리 양을 향한 목자이신 하나님의 가슴 접이는 사랑과 그분의 목양 아래 사랑하는 삶의 행복은 어떤 것일까?

들어가는 말.

우리는 흔히이 시편을 읽으면서 다윗의 목동 시절을 떠 떠올립니다. 그러나 구약을 연구하는 사람 대부분의 사람들은이 시기가 다윗의 어린 목동 시절에 쓰인 시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에 대한 외적인 증거는 찾기 어렵지만 시 자체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오히려 그가 만련해지 가능성이 많다는 판단을 내리게 합니다.이 시속 속에 나오는 몇 가지의 표현 그런 추측을 가능하게 합니다. 사망이 음침한 골짜기 자기 이름을 위하여 원수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고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등의 표현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목과적인 목과적인 전원 생활에서 비롯된 내용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치열한 싸움과 같은 인생을 지나오면서 깨닫게 된 사실에 대한 신앙적인 표현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주석가들은이 시가 자기 아들 압살롬모에게 공격을 받아서 도망가는 극심한 시련을 당한 직후에 쓰였다고 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시인은 인생의 가장 공구하고 어려운 시기에 여호와는 나의 목적이라는 꼭 고백하고 있는 셈이 됩니다. >>

아, 시편 23편이여

>> 모든 하나님의 말씀이 그러하듯이 다윗의이 신은 참으로 광대한 진리를 보여줍니다. 복음의 빛이 아니고는이 시의 내용을 이해할 수 없으며이 시를 바르게 해석하면 우리는 그 해석 속에서 팔을 벌려도 깨안을 수 없는 광대한 복음의 광맥을 만나게 됩니다. 어느과 저는이 시를 읽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주 읽는 일은 아니지만 그 시에 숲속에서 한없는 감격과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끝없이 펼쳐진 시편 23편 습속은 저에게 있어서는 그야말로 울창한 원실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황량하고 두려운 것이 아니라 꼽히고 새도 울며 흐르는 물소리와 떨어지는 폭포수 소리가 있는 곳이었고 때려놓 광야처럼 느껴지는 곳이었습니다. 저는이 실을 통해 끝없이 이어지는 숲속과 그 속에서 흘러나오는 감미로운 찬송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제게 있어서 한없이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제가 바로 그 숲속에서 주님께서 주님께 이끌려 끝없이 푸른 초장으로 나아간마의 양이란 사실을 발견한 것이었습니다. >>

거룩한 이름 여호와.

우선 이시의 첫절에서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는 고백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맨 앞에 나오는 두 단어는 시편 23편 전체의 제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이시 전체의 내용을 대표합니다. 다윗은 여기서 나의 목자를 여호와라고 부릅니다. 다윗이 왜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니라고 말하지 아니하고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말하고 있는지를 묻는 것은 사세한 만 [목을 가다듬음] 말장난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이 문제는 시편 23편을 풀어가는 아주 중요한 열쇠입니다. 우리는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들을 때에 [목을 가다듬음] 출애굽기 6장을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해 가도록 명령하고 계신 자신이 누구신지를 소개해 주실 때에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가라사되 나는 여호와로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가나안 땅 곧 그들의 우하는 땅을 주기로 그들과 언약하였더니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명칭은 그분의 가장 고유한 칭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감히 하나님의 명을 입에 담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면 십계명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죄많은 인간의 입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번명을 거명한다는 사실 자체가 계명을 범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 읽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 읽컫는 자를 죄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언약의 여호와

구약에서 여호와라는 이름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이라는 고침과 구분되어서 사용됩니다. 다시 말해서 여호와라는 이름은 특별히 하나님이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아니하시며 홀로 스스로 자존하시는 분임을 알려주거나 또는 그분의 이름을 계시하는 것이 당신이 선택하신 백성들과의 언약 관계에 있음을 강조할 때 자주 사용하였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그러므로 다윗이 이시의 첫머리에서 하나님을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고백했을 때 풍성한 은혜와 계시의 축복 속에서 살았던 그가 가 즉시 하나님과 자신 또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신 언약 관계를 생각했다고 추측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나님은 하늘 위에 홀로 계셔서 온 땅을 달스리시며 다윗의 인생 가운데 나타나셔서 기름부시고 왕국의 보좌를 주시기로 언약하시고 그 왕권을 통하여지지 않는 더한 나라의 보좌를 시하셨습니다. 그진 왕국을 통하여지 아니하는 무궁한 그리스도의 왕국을 바라보게 될 것을 믿었습니다. 멀리로는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위로는 자신들의 실질적인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나타나시고 그 모든 민족 믿음의 조상들의 역사의 주인이 되시며 그들과 맺으신 언약을 지금도 다윗의 인생 속에서 유효하게 경륜하고 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부르고 있습니다.
바다의 모래와 같이 수많은 당신의 백성들과 관계를 맺으시면서 역사는 변하고 세상은 바뀌어도 갈리지 아니하는 인재하심으로 언약 관계를 계속해 오신 불변의 하나님 여호와 다윗은 그 우주적인 사랑과 자비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자기의 개인적인 신앙 고백에게 대상으로 불러드립니다. 시인에게 있어서 여호와는 단순히 한 어느 한 순간에 만난 하나님일 수 없었습니다. 그분은 단지 내 인생의 어느 시기에 오셔서 겨울 그때부터 관계를 맺으시며 나의 신앙에 의하여 그 관계가 단절되다가는 다시 이어지고 이어지는 것 갖다가는 다시 단절되는 그러한 관계 속에 하나님이실 수 없었습니다. 그분은 온 땅의 하나님이시고 우주의 주인이심이여 인간 신앙의 상태에 의하여 폐기할 수 없는 불변의 언약을 주도하고 계신 거룩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뿐만
아니라 여호와는 시인의 미래에서도 그 위대한 능력으로 온 세상을 다스리고 온 땅 위에 당신의 통치를 보이실 하나님이셨습니다.

모든 곤고함의 원인

시인은 그런 강대하신 하나님을 나의 목자라 부름으로서 개인적인 신앙의 고백을 고백으로 삼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편 23편에 정에 들어가기도 전에 대문 앞에서 그 웅장한 문의 규모 앞에 감탄합니다. 어떻게 여호와를 그 위대하신 우주의 하나님을 지풀하기와 같은 자신의 사소한 인생의 목자로 불러드릴 수 있다는 말입니까? 우리의 신앙과 삶 속에서 경험되는 모든 공고함과 고통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모르는 무지에서 비롯됩니다.
여호와가 누구인지를 알고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신지를 깨닫게 되는 곳에서는 언제나 자유함이 있습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일과 그 일을 통해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외면할 수 없는 증거가 온 땅에 우리의 경험 속에 무엇보다도 풍성한 계시의 책인 성경 속에 가득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먹고 사는 방법을 위해서 애쓰는만큼 여호와를 알기 위해서 힘쓰지 않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다고 자부하는 교회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일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사모해야 할 것을 추구하지 않고 쓸데없이 헛된 것들에 애정을 쏟고 시간을 허의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음으로 망하는도다. 내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내가 내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내 자녀들을 잊어버리라.

무한하신 하나님

누구도이 우주가 얼마나 큰지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과학자들이 대략적으로 추정하기로는 우주 적끝에서 이끝 빛이 약 150억 광년을 달려가야 하는 거리라고 합니다. 최근에 몇몇 과학자들은 우지의 끝을 가음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우주가 계속해서 폭파를 일으키면서 1초당 2,000km씩 확정되고 있다는 이론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이런 측정 불과한 우주가 셀 수 없이 많다는 월트 유니버스 이론도 제 제기되었습니다.
수억년의 시간도 영원하신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순간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우주 공간이 아무리 무한해 보여도 유무 무한하신 하나님에게 그 공간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무한한 우주 공간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별들 중 육의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별은 약 6천개 정도입니다. 그 별들은 밤안을 빼히 채웁니다. 하지만 그 별들 사이의 거리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가깝게는 몇 광년, 멀개는 몇 억 광년의 거리에 있는 것 있는 별들이 우리의 눈에는 그렇게 서로 사이 좋게 반짝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를 더 사면 그 별들 중 하나에라도 볼수 에라도 가볼 수 있을까요? 수백년을 더 살면가 볼 수 있을까요? 태양주의를 돌고 있는 행성들 즉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 명왕성 중에서 아주 작은 별에 지나지 않는 지구 그곳에 인간이 살고 있습니다. 영혼과 무한한 사이의 한 시점과 한 공간을 차지하고 사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인간은 무한한 우주 가운데 살 수 없지만은 별들 중 하나에 잠시 살다가 점 하나로 옷 지키고 지나가는 존재입니다. 잠시 눈을 감고 우주의 무한과 시간 정과 시간 이후의 영혼성을 이해 생각해 보십시오. 두려움이 엄습해 오지 않습니까? 그 위대한 우주의 기원에 대하여 성경의 첫장에서 간단하게 말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의 하나님의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시인이 지금 자신의 신앙고백 속에 불러들이고 있는 하나님이 바로 그런 위대하신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을 지금 자신의 인생과 관계하고 계신 하나님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예. >>

신앙의 힘.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마다올 수 없이 무한하신 하나님을 유한한 자신의 인생과 관계 있는 분으로 여기고 실제로 그분과 관계를 누리며 살아가게 만드는 위대한 힘의 근원은 오직 믿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이 세상을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바로이 같은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붙들고 거기에 자신의 삶을 의탁하며이 어두운 땅에서 불꽃처럼 사는 것입니다. 시인은 자기를 바라보며 실망하거나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히려 인간의 신뢰할 수 없으리 많쌍한 삶의 태도와 예측할 수 없는 인생의 세월들을 초월하여 온 땅을 다스리시며 스스로 계신 거룩한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고백으로 가득찬 마음이 되어이 시를 적어 내려갔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그분의 탁월한 영광을 묵상하는 것은 신자인 우리에게 헤아릴 수 없는 위로와 능력을 줍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대제사장의 기도를 올리시는 가운데 자신의 간절한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였습니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심으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하나님을 믿는 자의 현세와 내세에서의 가장 큰 유익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천국에서는 그분의 거룩한 영광을 직접 배울 수 있지만이 땅에서는 [콧방귀] 믿음의 눈으로 그분을 뵙습니다.
아무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지만 믿음을 가진 모든 사람은 그분을 별 수 있습니다. 시인 다윗도이 같은 신앙 속에서 우주적인 하나님이 지프라기아와 같은 자신의 인생과 관계를 맺고 계심을 발견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

당신은 안녕하십니까?

시편 23편에 장음한 숲속으로 들어가기 전에이 시를 시작하는 첫 단어가 우리에게 도전을 줍니다. 그리고 그것은여 여러분을 향한 저의 질문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을 믿고 있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공고하십니까? 창으셨습니까? 고통 가운데 계십니까? 사망치만 골짜기를 지나는 것 같은 시련 속에 있습니까? 여러분의 몸과 마음과 영혼이 안녕하십니까? 저는 그러나 저는 말합니다.
여러분이 자신을 주목하고 있는 한 여러분의 마음의 고통은 치유될 길이 없을 것이며 심령의 상처는 아물지 아니하고 계속 덧날 것입니다. 쓸데없는 질문이라 여기지 말고 시편 23편의 숲에 어기에서 스스로 질문해 보십시오. [목을 가다듬음]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누구인가? 신앙의 수준은 그가 인식하고 있는 하나님의 광대하심의 정도에 비례합니다. 그리고 그를 붙잡고 계신 하나님이 누구시며 붙잡혀 있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는 정도에 비례합니다.

나의 하나님

그러나 시인은 그러한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무엇이라 부릅니까? 그는 말이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인은이 위대한 신앙 고백 속에서 하나님은 나의 목자라고 말합니다. 저는이 부분을 읽을 때마다 기하란 느낌을 받습니다. 지금 시인은 시를 쓰거나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문학 작품을 기록하면서 특히 작가들이 하는 것처럼 싫는 형 형태 속에서 잊지도 아니하고 느끼지도 못하는 말들을 부풀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인은 거룩한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배웠을 것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위대한 능력으로부터 시작해서 이어지는 조상들의 이야기와 이스라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이 어떻게 나타나시고 자기 백성을 위하여 어떤 크고 놀라운 일들을 행하신 분인지도 배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을 보십시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천천히이 짧은 한 구절을 묵상해 보십시오. 시인은 지금 누가 가르쳐준 교리를 따라서 여호와는 나의 우리의 목자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주적인 하나님이셨고 광대하신 전능자이셨지만 그가 지금이 그 위대하신 하나님을 자신의 목사로 고백하게 만든 것은 그만의 신앙 체험이었습니다. [콧방귀] 그가 자신과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를 생각해 본다면 그 위대하신 하나님을 나의 목자라고 고백하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가를 알게 됩니다. 아버지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를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인생은 그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들의 꽃과 같도다. 그것은 바람이 지나면 없어지나니 그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 시인은 그렇게 위대하신 하나님 언약에 신실하셔서 여호와로 불리기에 마땅하신 하나님 비할 때 없이 크고 전능하시며 강대하신 하나님께서 들풀과 같이 한찬은 자신의 인생 속에 동일한 신실하심으로 깊이 관여하시고 간섭하시는 것을 체험하였습니다. 진흙같은 자신의 삶속에 개입하셔서 온 천지를 창조하시던 그 능력과 만물을 돌보아주시는 신실하심으로 자신을 인도해 주심을 뼈저리게 체험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체험함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진리 하나를 발견합니다.
참된 신앙은 우리가 얼마나 오랫동안 종교 생활에 익숙해져 있고 교회라는 모임과 제도에 길들려진 삶을 살아왔는지에 의하여 자우되지 않습니다. 오랫토록 교회를 다닌 경력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세상에서 믿음으로 하는 힘의 원천이 그것에서 비롯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그렇게 알게 된 바을 하나님과 인격적인 만남을 통하여 개인적으로 체험하는 것입니다. 신인은 하나님에 대해서 많이 듣고 또 배웠 배워왔습니다. 하지만 다윗의 입술을 통하여 나의 목자로 고백되고 있는 하나님은 듣거나 배운 하나님이 아니라 그 영혼과 삶 속에서 체험된 하나님이십니다.
위대하심에도 사소한 시인의 인생에 개입하시고 강대하심에도 지표라기와 같은 그의 삶 속에 간여하시는 그 하나님이 가까이 하기엔 너무 위대하신 분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목자라 목자시라고 고백할 수 있게 만들어 준 힘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에게도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인격에 대한 고백이 있습니까?

신앙과 체험.

오늘날은 신앙에 있어서 체험을 경시하는 시대입니다. 또 한편으로 교회는 붉은 전한 체험말을 강조하는 오른속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진리에 대한 인식이 영적 체험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발견된 진리가 우리의 인격 속에서 경험되어질 때 그 진리는 우리의 인생을 사로잡 사로잡습니다.
진리 안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체험은 언제나 빛나간 종교적 열심을 자극하여 그릇된 길로 나아가게 하고 우리의 삶을 참된 하나님의 인격으로부터 벌어지게 합니다. 그러나 또한 체험되지 아니한 진리는 불붙지 아니한 갈멜산의 장작더미와 같아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삶으로 보여줄 수가 없습니다. 신앙은 위대한 진리의 내용들을 단지 보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진리의 온 인격과 삶이 사로잡히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체험이 있습니까? 여호와는 인격적인 경험의 지식이 있습니까? 오늘 시편 23편을 읽어는 여러분에게 가장 다급한 고민거리는 무엇입니까?이 글을 읽으며 영적인 회복을 갈망하는 여러분의 마음속에 꿈틀거리는 가장 두드러진 욕망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나기 원하십니까? 이제껏 여러분의 삶을 붙들어 온 것이 하나님의 하나님을 아는 올바른 지식이었습니까? 여러분이 인생에 어느 경점을 지나듯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게 하는 신적인 강제게 여러분을 주장하고 있습니까? 이것이 바로 시편 23편의 첫절을 열며 아들 피할 수 없는 도전입니다. 우리는 우리보다 뛰어난 삶을 살았던 신앙의 위들을 볼 때마다 항상 그들의 삶을 주목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들로 하여금 그처럼 탁월한 신앙의 삶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비밀은 그들의 삶의 현장에 있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들의 내면 세계에 있습니다. 그들의 영혼 속에 살아 계셔서 그들의 삶을 사로잡으신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위대한 믿음의 삶을 사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을 깊이 만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만남은 이래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하나님과의 교를 통해 그들의 삶에 반복적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참된 앎은 경험을 동반한 것이었으며 그 체험은 진리로 나닐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아는 것이야말로 모든 영적인 회복의 관계입니다. 전심으로 하나님을 추구하십시오. 그분을 배기를 사모하십시오. 거룩하신 인격과 관계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경험하도록 더욱 풍성한 인격적인 만남을 구하십시오. 왜냐하면 다윗이 위대한 하나님을 자기의 목자로 부르는 믿음을 보면서 감탄하는 것만으로이 어두운 세상에서 천란한 복꽃으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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