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2장 8-1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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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겉모습이 아닌 내면
제목: 겉모습이 아닌 내면
본문: 로마서 2장 8-11절
본문: 로마서 2장 8-11절
찬송: 436장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
찬송: 436장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
우리는 날마다 수많은 가면을 쓰고 살아가기 쉽다. 신앙의 연수, 교회에서의 직분, 가문의 신앙 내력, 그리고 눈에 보이는 헌금과 봉사의 이력은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내세우기 좋아하는 대표적인 겉모습이다. 사도 바울 시대의 유대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혈통이라는 사실과 하나님의 율법을 소유했다는 종교적 기득권을 일종의 안전한 방어막으로 여겼다. 당시 로마 교회는 율법을 가졌다는 자부심에 차 있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율법이 없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신학적 갈등과 긴장이 가득한 공동체였다.
바울은 이 둘 모두를 향해 인간이 자랑하는 종교적 배경은 하나님 앞에서 무용지물임을 폭로한다. 그는 우리의 이러한 종교적 위선과 안일함을 날카롭게 헤집어놓는다.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가 스스로를 누구라 칭하는지, 어떤 종교적 테두리 안에 머물고 있는지와 같은 타이틀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오직 매 순간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단독자로 서서 무엇을 행하는가라는 실존적 순종만이 유일한 실재이다. 우리의 화려한 종교적 이력서는 결코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피하게 해주는 면죄부가 될 수 없다.
본문 11절은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고 단호히 선언한다. 여기서 '외모로 사람을 취한다'는 것의 본래 의미는 "사람의 얼굴이나 그가 쓴 겉가면을 보고 판단하는 것"을 뜻한다. 세상은 사람의 외적 조건, 즉 지위와 신분과 재산을 보고 판단하며,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신앙의 경력과 직분의 화려함으로 그 사람의 신앙을 평가하곤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인간이 겉으로 꾸며낸 위선적인 포장지에 속지 않으신다.
우리가 성경책을 들고 교회를 드나들며, 십일조를 드리고 구제에 열심을 내는 것 자체는 선한 일이다. 하지만 그 모든 종교적 행위가 내면의 진실한 회개와 변화를 가리는 방패막이로 전락할 때, 그것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우상이 되고 만다. 우리는 남에게 보여줄 수 있는 종교적 성벽 뒤에 숨어, 정작 말씀에 반응하지 않는 굳어버린 양심을 감추려 든다.
그러나 우리가 공들여 쌓아 올린 종교적 업적과 스스로 의롭다고 믿는 확신이 오히려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 앞에서는 자신을 방어하려는 거대한 종교적 성벽이 될 수 있다고 본문은 말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 견고한 성벽 뒤에 숨어 하나님의 심판을 모면하려 하지만, 하나님은 단호하게 우리의 영적 가면을 사정없이 벗겨내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의지하는 종교적 배경을 무너뜨리시고, 우리 각 사람을 그분 앞에 홀로 서 있는 허물이 있는 영혼으로 대면하게 하신다. 목사이든 평신도이든, 모태신앙인이든 이제 막 믿기 시작한 초신자이든 상관없이,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불꽃 같은 눈동자 앞에서 벌거벗겨진 채 우리의 참모습을 직면해야 한다.
본문 9절에서 사도 바울은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라고 경고한다. 여기서 '영'은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중심인 "영혼"을 의미한다. 악을 행하며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자들이 이 세상에서 아무리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고 자녀가 잘되며 육신적으로 형통해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심판은 반드시 그의 가장 깊은 영혼의 중심에 참을 수 없는 환난과 곤고를 가져다준다.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평안과 기쁨은 오직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안에서만 주어지기 때문에, 내면에 하나님이 없는 자들의 영혼에는 늘 깊은 불안과 요동침이 가득할 뿐이다.
반면, 참된 믿음을 가지고 삶의 자리에서 묵묵히 선을 행하는 자의 중심에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가득 채워진다. 마르틴 루터와 장 칼뱅 역시 로마서 2장의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는 말씀을 주해할 때, 이것이 인간의 힘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공로주의로의 회귀가 아님을 강력히 강조했다. 루터와 칼뱅은 "참된 믿음은 반드시 성령 안에서 역사하는 선한 열매, 즉 행함으로 스스로를 증명한다" 고 가르쳤다.
종교개혁가들은 내면의 진정한 변화가 없는 껍데기뿐인 고백을 단호기 거부했다. 그들이 목숨을 걸고 회복하고자 했던 참된 기독교인의 모습은 성령으로 거듭나서 믿음과 행함이 일치하는 신앙이었다. 또한 칼 바르트는 참된 신앙이란 고정된 교리를 머리로 동의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매 순간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새롭게 결단하고 행동하는 역동적인 사건이라고 보았다.
이처럼 믿음과 행함은 분리될 수 없는 한 동전의 양면과 같다. 루터가 강조했듯이,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은 자연스러운 생명의 법칙이다.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의 삶에서 공로 의식이 아닌, 자발적이고 은혜에 감격한 사랑의 열매가 맺힐 수밖에 없다. 따라서 내면이 변한 사람은 반드시 삶으로 그 믿음을 증명해 내야 하는 것이다.
오늘 이 고요한 새벽, 우리는 어떤 모습을 가지고 하나님 아버지의 보좌 앞으로 나아왔는지 스스로의 중심을 정직하게 돌아보아야 한다. 우리는 종종 무덤덤해진 종교적 타성이라는 겉포장지 뒤에 우리 영혼의 차가움과 영적 나태함을 감춘 채 안일하게 서 있을 때가 있다. 하나님이 오늘 찾으시는 사람은 종교적 경력 화려하게 꾸며진 사람이 아니다. 오늘도 주님의 날카로운 말씀 앞에서 자신의 고집과 교만의 가면을 깨뜨리고, 오직 성령의 세밀한 인도하심에 복종하며 세상 속에서 구체적인 사랑과 순종의 발걸음을 내딛는 그 한 사람이다.
오늘 이 새벽에 모여 드리는 우리의 기도는 단순히 건강이나 물질의 형통, 자녀의 성공 같은 겉으로 드러나는 기도 제목만을 나열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의 부끄러운 자아를 주님 앞에 내려놓고, '주여, 내 메마른 내면의 영혼을 주의 보혈로 씻어주시고, 오늘 하루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새 마음을 주옵소서'라고 울부짖어야 한다. 우리의 겉모습이 아닌 깊은 내면의 영혼을 불꽃 같은 눈으로 바라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가식을 버리고 중심으로 주님을 대면하는 복된 하루가 되기를 결단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