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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주의
개인주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사랑합니다. 꿈사땅 예배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의 일에 너무 깊이 관여하지 않는 것을 배려라고 생각할 때가 많다. “그건 네 일이니까 네가 알아서 해”, “나와 상관없는 일이야”, “굳이 내가 나설 필요는 없잖아”라고 생각하며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모른 척 지나갈 때가 있다. 특히 오늘날 우리는 ‘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내가 원하는 것, 내가 편한 것,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중요하다 보니 다른 사람의 어려움이나 필요에는 점점 무관심해질 때가 있다. 물론 다른 사람의 삶을 존중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 마음이 지나치면 다른 사람의 아픔을 외면하는 개인주의적인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제사장과 레위인도 강도 만난 사람을 보았다. 그들은 그 사람이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과 상관없는 사람이라는 듯이 그를 지나쳐 버렸다. 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그는 불쌍히 여겼고, 가까이 다가갔으며, 자신의 시간과 물질을 사용하여 그를 돌보았다.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지신다. “누가 내 이웃인가?”가 아니라 “나는 누구의 이웃이 되어 주고 있는가?”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다른 사람의 아픔을 외면하는 개인주의적인 삶에서 벗어나, 예수님을 따라 먼저 다가가 사랑을 실천하는 삶이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예수님은 당시 유대인들이 자주 사용하던 방식인 비유를 통해 레위기 19장 18절의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설명하신 것이다. 비유는 “어떤 사람”이라는 말로 시작된다. 예수님께서 일부러 이름이나 신분을 밝히지 않으신 이유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보다 도움이 필요한 한 사람이라는 사실에 집중하게 하시기 위함이다. 유대인인지, 사마리아인인지, 친구인지, 원수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는 지금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한 사람일 뿐이다. 그 사람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난다. 예루살렘은 높은 산 위에 있고 여리고는 낮은 지역에 있기 때문에 ‘내려간다’는 표현은 당시 실제 지형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또한 이 길은 바위와 동굴이 많아 강도들이 자주 숨어 있던 매우 위험한 길이었다. 당시에는 실제로 이런 길에서 강도를 만나는 일이 흔하게 일어났기 때문에 예수님의 비유는 사람들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현실적인 이야기였다. 예수님은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지신다. “강도들은 이 사람을 이렇게 대했는데,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은 이 사람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이것이 비유의 긴장감을 만드는 핵심이다. 먼저 제사장이 등장한다. 이어서 레위인도 등장한다. 두 사람 모두 강도 만난 사람을 보았지만, 다른 길로 피해 지나간다. 예수님은 왜 그들이 지나갔는지 이유를 설명하지 않으신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동기가 아니라,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어떤 사람들은 제사장과 레위인이 시체를 만지면 부정해질까 봐 피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본문은 그런 이유를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두 사람은 이미 성전에서의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이었을 가능성이 크며, 당시 제사장에게는 버려진 시신을 장사할 책임도 있었다. 따라서 예수님은 그들의 행동을 변명할 이유를 남겨 두지 않으신 것이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당시 사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신앙인의 대표였다. 그들은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들이었고, 많은 사람들에게 모범적인 신앙인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눈앞에서 고통당하는 사람을 외면하였다. 예수님은 이를 통해 신앙은 높은 지위나 종교적인 직분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향한 행동으로 드러나는 것임을 보여 주신다. 이처럼 예수님은 사람을 ‘우리 편과 남의 편’으로 구분하는 시선보다, 눈앞의 어려운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가르치시는 것이다.
이제 예수님은 세 번째 사람을 등장시키신다. 그런데 이 사람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매우 충격적인 인물인 사마리아인이다. 사마리아인은 유대인들과 오랫동안 갈등하며 서로를 멀리하던 민족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마리아인이 등장하는 순간, 그 역시 그냥 지나갈 것이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크다. 사마리아인도 제사장과 레위인처럼 강도 만난 사람을 본다. 그러나 여기서부터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보고도 지나갔지만, 사마리아인은 보고 불쌍히 여겼다. 그리고 그 마음은 행동으로 이어진다. 그는 강도 만난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가 상처를 치료해 주고, 자신의 짐승에 태워 여관까지 데려가 돌봐 준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차이는 유대인이냐 사마리아인이냐가 아니다. 또한 종교적인 직분이 있느냐 없느냐도 아니다. 가장 중요한 차이는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행동했느냐 하지 않았느냐이다. 사마리아인은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시는 모습을 행동으로 보여 준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신분이나 체면을 먼저 생각하지 않았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보고 먼저 다가가 사랑을 실천하였다. 예수님은 이를 통해 하나님 백성은 높은 신분이나 종교적인 위치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긍휼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삶으로 드러난다는 사실을 보여 주신다. 또한 사마리아인의 사랑은 단순히 해야 할 의무만 수행한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시간과 물질을 아끼지 않았다. 강도가 다시 나타날 수도 있는 위험한 길에서 멈추었고, 자신이 가진 기름과 포도주를 사용하여 상처를 치료하였다. 자신의 짐승에 태워 여관까지 데려갔으며, 여관비까지 대신 내고 부족한 비용은 다시 와서 갚겠다고 약속하였다. 이처럼 사마리아인의 긍휼은 말이나 감정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손해를 감수하고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사랑을 행동으로 실천하였다. 예수님은 이를 통해 참된 긍휼은 계산하지 않고, 대가를 바라지 않으며, 실제 행동으로 나타나는 사랑임을 보여 주시는 것이다.
비유를 마치신 예수님은 다시 율법교사에게 질문하신다. 그런데 예수님의 질문은 처음과 다르다. 율법교사는 “누가 내 이웃입니까?”라고 질문하였다. 하지만 예수님은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라고 질문하신다. 이 질문의 차이는 매우 중요하다. 율법교사는 사랑해야 할 대상을 제한하려고 질문하였다. 다시 말해 “어디까지 사랑하면 됩니까?”를 묻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질문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신다. 중요한 것은 ‘누가 내 이웃인가’가 아니라 ‘내가 누구의 이웃이 되어 주고 있는가’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강도 만난 사람의 신분을 끝까지 말씀하지 않으신다. 그 사람이 유대인인지, 사마리아인인지, 친구인지, 원수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사랑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율법교사는 예수님의 질문에 “긍휼을 베푼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한다. 그는 사마리아인을 인정하기 싫었지만, 결국 이 비유의 핵심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참된 이웃은 높은 신분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긍휼의 마음으로 행동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이에 예수님은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단순히 이웃 사랑을 배우라고 말씀하지 않으신다. 이제는 직접 실천하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이처럼 예수님은 사람을 ‘우리 편과 남의 편’으로 나누던 당시의 생각을 뒤집으신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누구를 이웃으로 인정할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 좋은 이웃이 되어 주는 삶이다. 누가복음은 여기에서 율법교사가 실제로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했는지 말해 주지 않는다. 이야기는 열린 결말로 끝난다. 이는 당시 율법교사뿐 아니라 이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같은 질문을 남겨 두기 위함이다. 과연 우리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살아가고 있는가? 이웃은 내가 사랑할 사람을 선택하는 대상이 아니라, 내가 먼저 다가가 사랑해야 하는 대상이라는 말씀이다. 결국 율법교사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했지만, 율법의 가장 중요한 계명인 이웃 사랑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실천하지도 못한 사람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신앙을 말로만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라,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 좋은 이웃이 되는 사람이다. 또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선행으로 구원을 얻는 방법을 가르치는 이야기가 아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핵심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긍휼의 마음으로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 좋은 이웃이 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강도를 만난 사람을 직접 만날 일은 거의 없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학교에서 혼자 있는 친구, 따돌림을 당하는 친구, 힘들어 보이지만 아무도 먼저 다가가지 않는 친구, 교회에 처음 왔지만 어색하게 혼자 있는 친구가 있다. 문제는 우리가 그들을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들의 모습을 본다. 그러나 대부분 ‘누군가 도와주겠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괜히 나섰다가 귀찮아질 것 같아’라는 생각으로 그냥 지나간다. 제사장과 레위인도 강도 만난 사람을 보지 못한 것이 아니라, 보고도 지나간 사람들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모습을 통해 개인주의적인 태도를 경계하신다. 개인주의는 단순히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어려움보다 자신의 편안함과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삶의 태도이다. 또한 우리는 사랑의 범위를 내 마음대로 정하려는 모습도 가지고 있다. 친한 친구는 잘 챙기지만, 친하지 않은 친구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우리 반 친구는 도와주지만 다른 반 친구에게는 무관심하다. 교회에서도 친한 친구들하고만 이야기하고, 처음 온 친구에게는 먼저 다가가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예수님은 “누가 내 이웃입니까?”라는 질문을 “내가 누구의 이웃이 되어 줄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바꾸신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사랑할 사람을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는 것이다. 사마리아인은 불쌍한 마음만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시간과 물질을 사용했고, 위험을 감수했으며, 끝까지 책임을 지는 사랑을 실천하였다. 참된 사랑은 말이나 감정에서 끝나지 않고 행동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의 삶은 ‘내 시간’, ‘내 편안함’, ‘내 이익’만을 생각하는 삶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기꺼이 시간과 관심을 내어주는 삶이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단순히 착한 사람이 되라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신 것처럼 우리도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게 긍휼을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씀이다. 이번 한 주 동안 학교와 가정, 그리고 교회에서 하나님께서 내게 누구의 이웃이 되어 주기를 원하시는지 돌아보고, 먼저 다가가 사랑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삶은 나에게 필요한 사람만 사랑하는 삶이 아니다. 나와 친한 사람만 챙기고, 나와 상관없는 사람은 외면하는 삶도 아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보았을 때 ‘내 일이 아니다’라고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 그의 이웃이 되어 주는 삶이다. 우리 주변에도 강도 만난 사람처럼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다. 학교에서 혼자 있는 친구가 있을 수 있고, 힘든 일을 겪고 있지만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친구가 있을 수 있다. 교회에 처음 와서 어색하게 앉아 있는 친구가 있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들을 보았을 때 어떻게 반응하느냐이다. 제사장과 레위인처럼 보고도 지나갈 것인지, 아니면 사마리아인처럼 긍휼히 여기고 먼저 다가갈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누가 내 이웃인가?”를 따지는 사람이 아니라 “오늘 내가 누구의 이웃이 되어 줄 것인가?”를 생각하는 사람이다. 개인주의적인 세상 속에서 나만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긍휼을 따라 다른 사람의 아픔을 돌아보고 먼저 손 내미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작은 사랑의 실천을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가정과 학교와 교회가 조금씩 변화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이제 우리도 가서 이와 같이 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