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할 수 있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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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기도가 중요하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한 성도라면 기도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시는 분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기도해야 하고,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기도해야 하며, 자녀와 가정과 교회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도가 중요하다는 것을 아는 것과, 실제로 기도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도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기도를 시작해도 몇 마디 하지도 못하고 끝날 때가 있고, 오랫동안 같은 제목으로 기도했는데도 아무런 변화가 보이지 않아 낙심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마음속에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내 기도를 듣고 계시는가? 계속 기도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런 질문에 답해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기도를 많이 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누구를 믿고 기도해야 하는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은 누가복음 11장 1절부터 시작된 기도에 대한 가르침의 한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다가 기도를 마치셨을 때 제자 중 한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요청을 합니다.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준 것 같이, 우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말입니다.
  제자들은 기도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어려서부터 정해진 시간에 기도했고, 회당과 성전에서 기도를 배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기도가 자신들이 알고 있던 종교적 의무로서의 기도와는 다르다는 사실을 보았던 것입니다.
  이런 제자들의 요청에 예수님께서는 먼저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시고, 이어서 오늘 본문의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어느 날 한 사람의 집에 여행 중인 친구가 밤중에 찾아왔습니다. 우리의 기준으로 보면 밤중에 찾아온 것이 무례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당시에는 지금처럼 전화로 미리 방문을 알릴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당시에는 뜨거운 낮을 피해 밤에 여행하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에 늦은 시간에 손님이 도착하는 일은 드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손님에게 대접할 음식이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 사회는 오늘날보다 훨씬 공동체적인 사회였습니다. 한 가정의 일은 그 집만의 일이 아니라 마을 전체의 일로 여겨졌습니다. 특별히 외지에서 손님이 오면 그 손님은 한 가정만의 손님이 아니라 마을 전체가 환대해야 할 손님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손님을 제대로 대접하지 못하는 것은 개인적인 실수가 아니라 마을 전체의 수치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어느 집에 음식이 부족하면 이웃이 함께 책임지는 것이 당연한 도리였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날 손님이 찾아온 사람의 집에 빵이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시간이 늦었지만 한밤중에 이웃집을 찾아가 부탁합니다. “이보게, 내게 빵 세 덩이만 꾸어 주게. 내 친구가 여행 중에 우리 집에 들렀는데 내가 먹일 것이 없어서 그렇다네”
  우리의 생각으로는 밤 늦게 찾아가 먹을 것을 요구하는 이 일이 매우 무례해 보이지만, 당시로서는 무례한 부탁이 아니었습니다. 여행으로 지친 손님에게 한 끼를 제공하기 위한 정당한 요청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이웃집 친구가 당연히 자신의 부탁을 들어줄 것이라 믿고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집 안에 있는 친구가 이렇게 대답하는 상황을 상상하며 말씀하십니다.
  “나를 괴롭게 하지 말게. 문은 이미 닫혔고, 아이들과 나는 잠자리에 누웠네. 내가 지금 일어나 자네의 청을 들어줄 수 없네”라고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정말 이웃의 요청을 이렇게 거절하는 사람이 있겠냐고 예수님은 질문하십니다. 당시의 문화를 알고 있는 제자들은 분명히 이렇게 대답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웃이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도움을 요청하는데, 귀찮다는 이유로 외면한다면 그는 다음 날 마을 전체 앞에서 큰 부끄러움을 당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이 말씀을 단순히 “계속 조르면 결국 귀찮아서라도 들어준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성경은 우리가 낙심하지 말고 인내하며 기도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오늘 비유의 핵심은 우리의 끈질김에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 “간청함”이라고 번역된 말은 수치를 개의치 않는 태도, 또는 수치를 피하려는 태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당시 문화에서 이웃의 요청을 외면하는 것은 자신의 체면과 공동체의 명예를 훼손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적어도 당시 문화에서는 이웃의 요청을 외면하는 것이 큰 수치였기에, 그는 그 부끄러운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일어나 빵을 주었을 것입니다.
  지금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뜻은 분명합니다.
  불완전한 인간도 자신의 책임과 명예 때문에 이웃의 요청을 외면하지 않는다면, 하물며 선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의 기도를 외면하시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계속 귀찮게 해야 겨우 마음을 움직이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의 기도 횟수가 어느 정도 쌓여야 마지못해 응답하시는 분도 아닙니다. 기도의 확신은 우리가 얼마나 간절하게 기도했는지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기도했는지, 얼마나 아름다운 언어로 기도했는지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기도 응답의 확신은 하나님의 성품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하시고 신실하시며, 약속을 지키시는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 자체에 어떤 신비한 능력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설득하는 일이 아니라, 선하신 아버지를 신뢰하며 그분께 나아가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주기도문은 “아버지여”라는 부름으로 시작합니다. 우리가 기도회 때마다 고백하는 마태복음의 주기도문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는 부름으로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데서 출발한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먼저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와의 관계에서 출발합니다. 기도는 저 멀리 있는 신에게 우리의 소원을 알려주는 종교적인 행위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움직이기 위한 우리의 멋진 말재주가 아닙니다. 기도는 이미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께 자녀인 우리가 나아가는 것입니다.
  어린 자녀가 말을 잘해야 부모의 도움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문법에 맞게 말하지 못해도 되고, 울면서 이야기해도 됩니다.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설명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부모는 자녀의 말을 귀 기울여 듣습니다.
  저희 집에도 아직 말을 하지 못하는 아이가 있습니다. 자기 의사를 표현하는 것이라고는 “에~ 에~”라고 하거나, 짜증 내는 것밖에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제가 그 아이의 표현에 관심을 가지겠습니까, 가지지 않겠습니까? 관심을 가집니다. 무슨 말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에 에”거리면 가서 반응해 줍니다. 짜증내면 왜 짜증을 내는지 그 문제를 해결해 주려고 노력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이가 자신의 요구를 정확하게 표현했기 때문이 아니라, 제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그렇다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잘해서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들으십니다. 어떤 분들은 유창하게 기도하지 못하면 자신의 기도가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기도의 핵심은 말의 유창함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기도문의 멋진 말들로 평가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러 오셔서 기도할 말이 떠오르지 않으면, 그저 “하나님, 기도할 말을 입술에 주십시오”라고 하면서 기도하셔도 됩니다. 마음이 아프면 아프다고 기도하시면 됩니다. 지금 처한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으면 모르겠다고 솔직하게 고백하시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말보다 우리의 마음을 더 잘 아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제 우리에게 담대하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9절 말씀입니다.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십니까?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한 번 기도해 보고 아무런 변화가 없으면 포기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아버지께 나아가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가 계속 기도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까? 우리가 기도하면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하시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계속 기도하는 그 기도의 시간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를 변화시키시기 때문입니다.
  보통 우리가 처음에는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기도합니다. 하지만 기도하다 보면 내가 원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뜻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처음에는 상황을 바꾸어 달라고만 기도합니다. 하지만 기도하다 보면 그 상황 속에 있는 나를 먼저 변화시켜 달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하나님, 이것 좀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지만, 어느 순간 “하나님, 이것이 정말 제게 필요한 것인지 깨닫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하나님을 내 뜻에 맞추는 시간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지는 시간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 우리의 필요를 구하지 말라는 말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것이 언제나 우리에게 좋은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어떤 마음으로 응답하시는지를 부모와 자녀의 관계로 설명해 주십니다. 11절과 12절 말씀입니다.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자녀가 먹을 것을 구하는데, 해로운 것을 주는 아버지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13절에서 이 가르침의 핵심,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말씀해 주십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불완전한 부모도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어떻겠습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십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것과 우리가 생각하는 좋은 것이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이 잘 풀리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건강하고, 형편이 나아지고, 자녀가 성공하며, 계획한 일이 그대로 이루어지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런 것들도 하나님의 선물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것은 지금 당장 좋아 보여도 우리의 영혼을 해롭게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성공은 우리를 교만하게 만들 수 있고, 어떤 풍요는 하나님을 잊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간절히 열어 달라고 기도하는 그 문 너머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부모는 자녀가 해로운 것을 달라고 할 때 그것을 주지 않습니다. 자녀를 미워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하신다고 하면 언제나 “그래”라고 말씀하시는 것만 생각합니다. 내가 기도한 그대로 그 즉시 이루어주시는 것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응답에는 “그래”도 있고, “아니야”도 있으며, “기다려”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요청을 무시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무엇이 가장 좋은지를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서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예전에 SNS를 하다가 한 기독교 채널에서 서윤이라는 아이를 둔 엄마가 올린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하루는 글쓴이인 엄마가 자녀에게 간식으로 바나나를 먹이려고 준비했다고 합니다. 바나나를 먹이려고 하니 이전에 바나나 끝에는 농약 성분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나서 끝부분을 잘라서 아이에게 주었습니다. 그러자 아이가 갑자기 막 울기 시작한 것입니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 “왜 바나나를 다 주지 않고 조금만 주느냐”면서 계속 울었다는 것입니다. 엄마가 이유를 설명해 주었지만, 아이는 자신이 받을 것이 줄었다고 생각하며 계속 울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엄마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고 합니다. 좋지 않은 것은 빼고, 좋은 것만 주고 싶은 엄마의 마음은 알지 못한 채, 적게 주는 것에 사로잡혀 실망하며 떼쓰는 모습이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는 자신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그럴 때가 많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것은 보지 못하고, 주지 않으신 것만 바라봅니다. 이미 받은 은혜보다 아직 얻지 못한 것을 더 크게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기 위해 닫으신 문 앞에서, 왜 이 문을 열어 주지 않으시냐고 원망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에는 끝이 잘린 바나나처럼 보여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임을 신뢰하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믿는 일이 언제나 쉬운 것은 아닙니다. 특별히 오랫동안 기도해도 응답이 보이지 않을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오랜 시간 자녀를 위해 기도했는데 달라지는 것이 없으면 답답합니다. 가족의 구원을 위해 몇 년을, 아니 평생을 기도했는데 열매가 보이지 않으면 “이게 맞는 것인가”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합니다. 질병의 회복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는데 병이 낫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성경에도 자신이 원했던 방식으로 응답받지 못한 믿음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잘 아시는 바울이 그랬습니다. 자신의 육체에 있는 가시가 떠나가게 해 달라고 세 번이나 간구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가시를 제거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 9절 말씀입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요청한 대로 가시를 제거해 주지는 않으셨지만, 그에게 꼭 필요한 은혜를 주셨습니다. 가시를 없애는 대신, 그 가시를 감당할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우리도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없애 달라고 기도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문제를 견딜 힘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환경을 바꾸어 달라고 기도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환경을 이겨낼 믿음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기도 응답을 내가 원한 결과를 얻는 것으로만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구한 것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설득하는 기술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을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믿음의 기도란 내가 구한 대로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응답을 받더라도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는 자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데서 그치지 않고,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선물까지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님을 통해 우리와 함께하시며, 자신을 우리에게 내어 주십니다.
  우리는 필요한 물질과 건강과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을 구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주십니다.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성령님을 통해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를 위로하시며, 그리스도를 닮아 가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장 큰 필요는 상황이 좋아지는 것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가장 큰 필요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아무리 형편이 좋아도 하나님이 없다면 참된 평안을 누릴 수 없습니다. 반대로 형편은 여전히 어렵지만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확신이 있으면 어떤 형편과 상황도 견디고 인내할 수 있습니다.
  저 역시 문제가 해결되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평안이 더 큰 응답이라는 사실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이전 사역지에 있을 때 개인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은 적이 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여러 방법을 찾아보았지만 해결되지 않았고,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정작 기도가 잘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기도가 되기 시작했고, 기도하는 가운데 마음에 평안이 찾아왔습니다. 여전히 상황은 해결되지 않았지만, 기도하는 가운데 말로 다 할 수 없는 하나님의 평안이 제 삶에 가득해졌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니 그 문제는 더 이상 저의 삶을 짓누르는 문제가 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그러니 기도를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응답이 더디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신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잘 정리된 말이 아니더라도 여러분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하나님께 아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는 기도의 제목들도 한 번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무엇을 가장 많이 구하고 있습니까? 혹시 우리의 잘됨과 성공만을 구하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보다 먼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합니다.
  우리의 필요를 구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나의 이름보다 하나님의 이름을, 나의 나라보다 하나님의 나라를, 나의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하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33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 그렇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채워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자녀가 세상에서 잘되기만을 기도하지 말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녀가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직장과 사업이 잘되기만을 구하지 말고 그 자리에서 정직하게 살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나의 욕망을 하나님께 관철하는 시간이 아니라, 나의 소원을 하나님의 뜻 아래에 내려놓는 시간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아십니다. 자녀인 우리가 아버지를 의지하여 말하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아무것도 숨길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염려와 필요를 하나님께 맡기며 기도하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귀찮게 해야 겨우 응답하시는 분도, 우리의 기도를 외면하시는 분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좋은 것을 주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며, 가장 좋은 때에 가장 좋은 방법으로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지금 우리의 눈에는 하나님의 응답이 더디게 보일 수 있습니다. 왜 이 문을 열어 주지 않으시는지 이해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이해해야만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것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뜻을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만큼은 의심할 수 없지 않습니까?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내어 주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을 아끼시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담대히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 선하신 아버지를 신뢰하며 구하고, 찾고, 두드리되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원하는 때보다 하나님의 때가 더 좋습니다. 우리가 생각한 방법보다 하나님의 방법이 더 지혜롭습니다. 우리가 구한 것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더 선합니다. 이 사실을 믿고 날마다 기도로 아버지께 나아가며,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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