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가 마음이 슬플 때

개인기도의 문을 열 때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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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기도의 문을 열 때2 (20220626 주일오전)
사무엘상 1:12–18 “그가 여호와 앞에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 엘리가 그의 입을 주목한즉 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움직이고 음성은 들리지 아니하므로 엘리는 그가 취한 줄로 생각한지라 엘리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 하니 한나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내 심정을 통한 것뿐이오니 당신의 여종을 악한 여자로 여기지 마옵소서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은 나의 원통함과 격분됨이 많기 때문이니이다 하는지라 엘리가 대답하여 이르되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이르되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근심 빛이 없더라”
녹취자: 조복령

I. 본문해설

인생에 있어서 힘든 것은 무엇이니 해도 슬픔이 제일일 것입니다. 가벼운 슬픔은 인생을 멈춰 서서 생각하게 만들고 세상의 헛됨을 직시하도록 만들어 주어 우리에게 때로는 쉼을 줍니다. 그러나 극도의 슬픔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고 삶의 의욕을 꺾어버리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엄습하는 큰 슬픔이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설 때, 그것은 우리의 피를 마르게 할 만큼 큰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셰익스피어는 로미오와 줄리엣 제3막 5장에서 로미오의 입을 빌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목마른 슬픔’이 우리의 피를 마시는구나. 이 대사는 영국의 당시 있었던 격언 중에 한 토막인 소위 ‘슬픔의 목마름’이라는 구절을 인용하여 이렇게 시로 읊은 것입니다. 여기서 피는 생명을 상징합니다. 슬픔은 게걸스러울 정도로 우리의 생명을 빨아 먹으며, 결국 우리에게 아무것도 남겨놓지 않는다는 슬픔의 비정함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석자 1 01:07
여기 오늘 그런 슬픔을 똑같이 겪었던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는 어떻게 했겠습니까? 그 여자는 모든 인간들이 겪는 극도의 슬픔 때문에 마음은 찢어지는 것 같았고, 심령은 혼란스러워졌고, 그의 정신은 파괴될 것 같았습니다. 그런 자신의 인내의 한계를 넘어서는 극단의 슬픔 앞에서 올바른 선택을 함으로써 오히려 그 슬픔을 통해 삶의 새 소망을 보았던 여자가 있습니다.

II. 그 여자가 마음이 슬플 때

참석자 2 01:40
그러면 도대체 그 여자는 마음이 슬플 때 어떻게 했겠습니까?

A. 마음의 고통.

참석자 2 01:51
제일 먼저 생각해 볼 것은 마음의 고통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주여 그렇지 아니 하니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삼상 1:15 이 여자는 너무나 엄습하는 그 슬픔과 고통의 넋이 나갔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의 집에 올라가서 오랜만에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아 놓게 되었습니다. 그의 삶의 호흡에 남은 기운까지도 끊어질 지경에 이르렀고, 오래간만에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아 놓자 그는 마음이 후련해졌습니다. 하나님 이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언어를 초월해서 홀로 입을 중얼거리며 하나님 앞에 묵상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늙은 세상의 눈에는 이 여자가 술을 먹고 성전에 올라온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힘이 없어서 무의식 중에 그렇게 말없이 지껄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 하고 말했습니다.
참석자 3 03:01
그때 대답했습니다. “내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고 대답한 말이 바로 이 말입니다. 결국 이것은 한나의 마음에 곧 고통이 얼마나 극에 달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는 이 구절을 히브리 성경에서는 “나는 영이 괴로운 여자다”라고 루하흐라는 단어를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단어는 여러 의미로 쓰이지만 집약해서 말하자면 인간의 마음에 가장 내밀한 곳에 있는 정신은 정수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이라고 많이 번역이 번역이 되었습니다. 그 영이 하나님과 관계를 갖는데 그 “영이 괴로운 여자다”라고 했습니다. 결국 이 여자는 자신의 고통과 슬픔이 얼마나 컸는지를 극단적인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삶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상황에 끌려가는 삶이 있고 상황을 끌고 가는 삶이 있습니다. 종종 아주 체구가 작고 어린 여성들이 큰 개를 끌고 산책 나오는 광경을 봅니다. 목줄을 당연히 채웠고, 가려는 손으로 개의 줄을 두 번 감아서 손목에 움켜 쥐었습니다. 그런데 이 개가 엄청 큽니다. 그런데 뭔 일인지 주인의 말을 안 듣는 것입니다. 주인은 천천히 걸어가자는 데 미친 듯이 뜁니다. 주인 그만 하자는데 이놈의 개는 계속 잡아당기면서 가는 것입니다. 결국 주인이 이 개를 통제 못합니다. 개가 뛰면 그 주인도 미친 듯이 뛰고, 개가 멈추면 주인도 멈추는 이상한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이게 결국 개 같은 상황이 자기를 끌고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생도 이렇게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매일 아침에 일어나서 밤까지 쉴 새 없이 상황과 싸우고 뭔가 자신에게 유리하게끔 상황을 전개하기 위해서 애쓰는 상황이 통제가 안 됩니다. 그리고 개 같은 상황에 계속 끌려다니는 것입니다. 한참을 끌려 다니다 보면 도대체 개가 사람이 지 개의 주인이 개인지 구별이 안 될 정도로 끌려다니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머리가 하얘지고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지금 삶이 혹시 이런 삶이 아닙니까? 매일 버릇 버르적거리고 무언가 일하지만 삶을 개선해 보려고 애쓰지만 왠지 나의 삶이 나의 통제를 벗어나서 개 같은 상황이 되고 아주 큰 개가 되어서 자기를 끌고 다닙니다. 그래서 결국 자신이 자신의 삶에 노예가 되어 버리고 만 처지에 있는 분들 없으니까 기도 안 하고 상황이 꼬인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국 이렇게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죽기 전까지는 이 괴로움이 계속될 것이고, 결국 삶은 어떠한 자유도 없고 매일매일 상황에 이끌려 다니느라고 자기의 계획도 잡을 수가 없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삶의 고삐를 놓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참석자 4 05:35
여러분의 삶은 크게 전개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큰 일을 하고 아주 크게 무엇인가 임무를 맡았다면 여러분의 삶은 굉장히 크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마음대로 못하는 상황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든지 간에 어쨌든 개 같은 상황에 주인이 개처럼 끌려다니는 상황이 돼서는 안 됩니다. 거의 말하자면 송아지만한 한 개가 사람을 끌고 달리고 사람은 개 줄에 매달려서 땅바닥에 질질 끌려다니면서 옷이 찢어지면서 달려가고 있다고 생각을 해 보십시오. 이게 삶입니까? 개를 없애버리는 것이 낫지 그게 무슨 삶입니까? 걔한테 끌려다닌 삶이 그게 삶입니까? 그게 주인입니까? 그러니까 삶의 고삐를 놓지 않는 일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건 여러분이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여러분이 직감적으로 알 것입니다. 아무리 상황이 크고 내가 어마어마한 일을 하고 있어도 삶의 고삐를 내 손에 틀어쥐고 내 마음 하나로 이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그런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석자 4 06:37
어마어마하게 큰 말을 기억해 보십시오. 바람을 가르듯이 기수가 말을 달리지만 한순간에 말에 재갈을 잡아 차면 말은 하늘로 솟구치면서 급정거를 합니다. 어떻게 가능한 것입니까? 자기의 최고는 비교도 안 되는 어마어마하게 힘이 세고 큰 말이지만 고삐를 자신이 쥐고 있고 자신이 주체성을 가지고 그 말을 통제하고 있기 때문에 통제가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이미 여러분 중에는 이런 삶의 고삐를 놓쳐버린 사람들이 많은 것입니다. 알량한 자유를 찾는답시고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고 자신의 안목에 좋은 대로 살다가 결국 이렇게 된 것입니다.
또 하나의 삶은 뭐냐 하면 상황을 끌고 나가는 삶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그것을 놓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을 확고하게 잡아주고 언제든지 아무리 상황이 커도 자신의 통제를 받게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이게 진정한 자연의 삶이고 주체의 삶입니다. 개가 산책할 때 미친 듯이 주인과 상관없이 달리려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걸 처음부터 못하게 해야 됩니다. 좀 심하게 얘기하면 미친 듯이 달려나가려고 하면 그걸 확 잡아당겨서 목에다 고통을 줘야 됩니다. 그래야 이렇게 하는 게 아니구나라고 나는 걸 깨닫게 해야 됩니다. 그리고 개를 따라서 주인이 산책하는 길이 아니라 주인을 따라서 개가 산책하는 길이라는 것을 아예 정신 속에 확 심어줘야 되는 것입니다.
참석자 5 08:04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개를 훈련시키는 장소가 우리 어렸을 때 집 옆에 있었습니다. 굉장히 넓은 개 훈련소였습니다. 개를 데리고 가면 반드시 어린 강아지만 오는 게 아닙니다. 때로는 꽤 큰 큰 개 더 옵니다. 그런데 일단 개 훈련사가 하는 일은 개와의 첫 대면입니다. 첫 대면에서 쏟는 듯한 눈빛으로 개를 제압합니다. 개도 훈련사에게 덤벼들어 꺾어보려고 하는 기세가 있는데, 그것을 때리지는 않더라도 채찍이나 냄새나는 걸로 위협을 가해서 꼼짝 못하게 꼬리를 내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개들은 막 짖고 난리를 치다가도 개의 장수가 나타나면 그 냄새를 맡고 모두 꼬리를 내리고 끙끙거립니다. 그게 계정수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런 무엇인가 카리스마를 풍겨서 첫 번 만남에서 개를 완전히 제압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야지만 훈련이 가능한 것입니다. 훈련사를 우습게 아는 개는 훈련이 안 되는 것입니다.
상황이 여러분을 우습게 보지 않도록 그것을 제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영적으로, 신앙적으로, 마음으로, 정신적으로 그것을 제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살아가면 여러분의 인생은 자유도 없고 개 같은 상황에 계속 끌려다니다가 끌려다니는 처지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생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살아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끌려다니는 것이고, 그 속의 고통은 점점 깊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황에 끌려가는 삶이 아니라 상황을 끌고 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상황에 끌려가는 삶은 끝이 없습니다. 미친 개가 달려가는데 무슨 목적지가 있어서 달려갑니까? 무슨 의미를 가지고 개가 달려갑니까? 그냥 충동을 받아서 달려가고 싶으니까 달려가는 것입니다. 주인은 아무 이유도 없이 가치도 없이 그냥 끌려가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산책입니까? 그게 무슨 개와 함께 산포하는 것입니까? 개의 종이 종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대해서 맺는 관계도 바로 이런 관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참석자 1 10:10
한나가 왜 이렇게 영이 괴로운 여자가 되었습니까? 정신이 고통받는 여자가 됐고, 마음이 괴로운 여자가 된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결국 자기 삶의 통제력을 잃어버렸습니다. 시집을 갔습니다. 애를 못 낳았습니다. 첩은 애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시댁의 관심은 첩에게 쏠렸습니다. 이제 그 첩에서 낳은 자식이 가문을 잃을 처지가 되었고, 자신은 설 곳이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남편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으나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자신의 집을 세우지 못했습니다. 여자의 위치는 그 당시에 아들에 의해서 결정이 되는데 결국 자신의 집을 세울 수 없었습니다. 결국 그 속에서 자신의 슬픔과 고통, 무시와 원통함과 격분됨을 누구한테 쏟아놓을 수도 없었습니다.아주 신앙도 없고 못된 여자 같았으면 아마 폭력을 행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엘가나에게 독촉을 해서 그 여자를 빈손으로 아이만 남겨놓고 쫓아 보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나는 그렇게 막 가는 여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인생은 오히려 막 가는 여자보다 더 힘들어졌습니다. 결국 상황은 통제가 되지 않고 현실은 개 같은 상황이 되어서 이 여자를 질질 끌고 다니고 피투성이가 된 것입니다. 그것이 고통이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견디면서 꽤 오랜 세월을 지내온 것입니다.
그런데 참았습니다. 그러니까 가정이 온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은 이 여자가 아이가 없다는 것이었는데 해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부인 나의 기세는 점점 등등해졌고, 자신을 깔보고 무시하는 것은 마치 종에게 하는 것 같은 처지가 되었습니다. 이 여자는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스스로의 부끄러움 때문에 결국 자존감은 한없이 낮아졌고, 삭히고 삭히고 삭퀴다가 결국 마음에 병든 여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게 우리의 고통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마지막 사건입니다.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하나님 없이 고통을 받고 그걸 참고 견디고 삭히고 미워하고 온통해야 하고 분노해야 하는 속에서 결국 상황은 큰 개같이 되어서 여러분을 질질 끌고 다니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그게 어떻게 삶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그것이 살아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참석자 2 12:28
인생이라는 것은 무슨 뜻인지 압니까? 인생은 사람 인자입니다. 흔히 우리들은 옛날에 알고 있기를 사람 인자는 이게 사람과 사람이 서로 기대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설을 많이 들었잖아요. 거짓말입니다. 정확하지 않는 것이고, 저도 옛날에 그렇게 얘기를 들었는데 사실이 아닙니다. 이게 옛날 글자를 보면 사람이 공경을 하고 있는 표시라고 합니다.
참석자 6 13:02
이게 뭐냐면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된 게 인자잖아 그게 이런 뜻으로 나타난 게 아니라 원래 글자가 사람이 이렇게 예의를 표하고 있는 장면을 그린 거라고 이렇게 사람이 이렇게 옷 이렇게 되어 있는 옷을 이렇게 들고 있는 그림을 이렇게 이제 표현 뭔가 공경하고 있는 거 그걸 한쪽 이 선이 옷자락이란 말씀이시죠? 두 사람이 이렇게 서로 한 사람 한 사람이 한 사람이 이렇게 옆에서 이렇게 있으니까 이제 이쪽이 하나의 글자가 되고 이렇게 손을 들고 여기 옷소매가 이렇게 있는 것이 하나의 글자가 되고 그래서 두 개가 이렇게 일자가 되는 원래는 이제 이렇게 이렇게 돼 있었는데 시간이 흐르
참석자 2 14:00
거기에서 인간의 본분을 찾아낸 것입니다. 그래서 인이라고 하는 한자의 글자가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늘을 향해 사람을 향해 마땅히 자기의 처지를 알고 공경할 줄 아는 그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런데 이 뒤에 나오는 생이라는 글자는 그냥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렇게 공경할 줄 아는 존재가 공경하면서도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면 결국 보십시오. 이 한나의 경우에 올바른 공경함도 없었고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살아 라는 이름을 가졌으나 사실은 죽은 자라고 하는 계시록의 말씀이 바로 생물학적인 생명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런 정신적이고 영적인 생명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살아 있습니까? 아니면 육신으로 살아 있으나 정신은 죽어 있습니까? 마음의 고통은 어떻습니까? 결국 그 마음의 고통을 어디서 해결합니까? 결국 이 여자는 이 마음의 깊은 고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 제사장에게 나는 영이 괴로운 여자입니다라고 고백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오. 여호와 앞에 내 신경을 통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는 이 엄습하면 죽음에 이를 것 같은 이 무서운 고통을 어떻게 극복하고 오히려 하나님 앞에 응답을 받은 기회로 삼았습니까?
참석자 3 15:42

B. 영혼을 쏟음

그 두 번째가 바로 영혼을 쏟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말 성경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내 심정을 통한 것뿐입니다. 왜 이렇게 번역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어 성경 성경에는 이렇게 되었습니다. ‘에포크 에트나 라아도나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직역을 하면 여호와 앞에 나의 영혼을 쏟아부었을 뿐입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결국 네패시라고 하는 이 영혼이라는 단어가 목숨, 마음, 저 정서 등등을 가리키기 때문에 약간 의역을 하자면 여호와 앞에 나의 마음을 물처럼 쏟아놓아 을 뿐입니다라고 한 것입니다. 이게 무슨 비유입니까? 여기에 물이 있습니다. 그리고 컵을 기울이고 있는 한 물은 컵에서 계속 쏟아지고 한 방울도 남지 않도록 모두 화분에 쏟아집니다. 이처럼 이렇게 자신의 영혼을 여호와 앞에 쏟아놓는다는 의미는 하나님께 마음이 기울어져 마음에 남거나 접힌 것이 없이 그분 앞에 모두 다 털어놓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제 그분 앞에 감출 것도 없고, 기도가 끝나도 마음에 남은 것이 있어서 마음을 괴롭게 할 수 없을 정도로 마음에 있는 모든 찌끼를 그분 앞에 물을 쏟듯이 다 쏟아놓은 놓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도의 가장 높은 경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 앞에 그분을 기쁘게 해드리는 기도의 한 형태입니다. 그래서 이 내 마음을 물같이 하나님 앞에 쏟아 놓으라 혹은 물같이 마음을 쏟아 놓았나이다라고 하는 이 고백이 바로 이 이런 기도의 정수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더 설명드리지 않아도 이 말이 무슨 뜻인지를 이런 기도를 드려본 사람들은 이미 감각적으로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럼 나는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 기도하셨습니까? 그런데 마음을 쏟는 마지막 기도는 언제였습니까? 마음의 단 한 방울의 근심과 걱정, 후회와 슬픔도 남지 않고 그분 앞에 모두 쏟아놓았기 때문에 이제 내 마음은 그분 앞에 연락되었고, 왕이신 하나님이 나의 심사를 모두 통촉 하셨도다라고 하는 그 시원함을 기도 속에서 느낀 적이 언제였습니까? 응답은 나중 문제이고, 우선 심정적으로 내 마음은 이제 남아 있는 것이 없어 내 마음은 당신 앞에 물같이 모두 쏟아 놓았으며, 이제 내 마음에는 거리끼는 것이나 혹은 내 마음이 당신 뒤에서 움켜지고 있는 하등의 것이 단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이 나의 전부이고, 이제 내 마음은 주님 앞에 모두 고하여졌나이다. 이런 기도를 드린 것이 언제였습니까?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내 심사를 통촉하시고
부르짖는 소리 들으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내가 주께 기도하니
주께서 내 소리 들으시리.
참석자 4 18:21
이렇게 마음을 모두 쏘아 놓아서 이제는 내 마음이 시원하게 되었나이다. 이제 내 마음에 당신을 향해 감추어진 사정이 없사옵나이다. 이런 마음이 들 정도로 마음을 쏟아 놓은 때가 언제입니까? 물에 젖은 장작이 할 수 없이 불꽃을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불꽃보다는 더 많은 연기를 내면서 불 때는 사람의 눈에 눈물이 쏟아지도록 눈을 파고드는 그 장작처럼 그렇게 기도 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게 여러분의 삶의 상황이 개같이 된 이유이고, 여러분의 삶을 끌고 다니는 대신 여러분이 삶을 끌고 다니는 대신 그 개 같은 상황에 끌려다니는 불쌍한 처지가 된 이유가 바로 이렇게 마음을 쏟는 기도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삶의 자존감도 이 기도와 함께 사라졌고, 삶을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도 이 기도와 함께 같이 사라져 버렸으니 여러분은 젖은 집단을 태우는 것처럼 연기가 가득한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참석자 4 19:20
마음의 은혜의 심지는 꺼져가고 있고, 마지막까지 버티고 있었던 여러분의 자존심들은 상한 갈대가 되어서 부서져 버렸습니다. 아무 데도 의지할 데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나오지도 않습니다. 그분 앞에 나는 마음이 괴로운 사람입니다라고 고백하며 하나님께 위로를 받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쏟아놓지 않습니다. 마음을 물처럼 쏟아부어 그분께만 나의 사정을 아뢰리라. 왕이신 하나님 나의 사정을 통촉하여 주옵소서라고 하는 간구의 은혜가 사라졌습니다. 최선의 위로는 잠시 잠깐 세상의 낙에 빠져서 감각의 유혹에 처해서 잠시 슬픔을 잊어보는 것이니, 그런 극도의 고통을 겪는 사람이 마약의 힘으로써 잠시 현실을 잊어버린 것과 유사합니다. 깨고 나면 더 엄중한 현실, 망가진 육체가 자신의 눈앞에 클로즈업 되고, 그 절망은 또 다른 절망을 부르니 슬픔이 슬픔의 연이요 그의 마음은 야위어져 가기만 하는 것입니다. 결국 그것이 여러분의 삶입니다.
참석자 5 20:23
결국 그것이 여러분을 주체적으로 살지 못하게 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한 사람의 삶은 하나님을 공경하고 자신의 삶을 살아감으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공경하고 사람들을 향한 예의를 갖추게 만들고, 자기 자신의 인생의 존엄함을 깨달아 자기의 삶을 살아가게 해주는 데 이바지하는 것이 인생의 가치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삶에 의미를 부여, 이렇게 우리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살아갈 수 있게 해 주는 그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아십니까? 결국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는 우리의 머리나 엉덩이, 우리의 어깨, 우리 무릎이나 발에 쏟아부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은혜는 우리의 마음에 쏟아부어지는 것이니, 하나님 앞에 마음을 아 놓고 빈 마음이 된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은혜를 넘치게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은 너무나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예수님도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오 라고 말씀하셨고, 또 하나님의 사람 다윗도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고백했으니 넘치기 전에 그 마음에 빈 잔이 되었다는 것을 어찌 의심할 수 있겠습니까?
요즘은 소위 외설 문화가 판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한 30년 전에 생각할 수 없는 기준들이 영화에 도입되어서 이제는 뭘 외설이 외설도 아닙니다. 그런데 말이죠. 남자나 여자나 끊임없이 벗기려고 하지만 다 벗겨 놓으면 아름답지 않습니다. 순간적으로 아름다울지 모르지만 아름답지 않습니다. 원래 다 벗겨놓으면 그게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건 사실이 맞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는 결코 미를 느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옷을 입는 것입니다. 옷 입은 사람이 벗은 사람보다 더 아름다운 것 그리고 또 적당히 벗고 적당히 입어야 아름다운 것이지, 결국 이 벗음과 입음 이 둘 사이의 조화를 이루면서 인간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보여 보여가는 것입니다. 중동에 가면은 가면은 눈도 안 보여주고 여자들이 그 브라카를 이렇게 뒤집어 씁니다. 뭐가 아름답습니까? 돈 많은 사람들은 한 벌에 몇 천만 원짜리 옷을 입고 다닌다고 합니다. 그런데 눈에 하나도 안 들어옵니다. 어차피 시커멓고 시커멓고 여기에 망사 같은 것 하나 붙이고 눈만 이렇게 내 났는데 뭐가 예쁩니까? 모두 뒤집어 써도 안 예쁩니다. 다 벗어도 안 예쁩니다.
결국 이것이 우리의 인간은 우주에 버려진 존재처럼 태어난 거다. 그리고 우리의 인간은 끊임없는 고통의 연속이다. 그리고 인간은 결국 죽기 마련이다. 인간은 결국 자기 자신의 존재의 의로움을 누구와도 나눌 수, 외로움을 누구와도 나눌 수 없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제가 인간의 외로움에 이유에 대해서 말씀드렸을 때, 설교 속에서 결국 인간이 외로운 것은 자기가 고유한 존재로 태어났기 때문에 외로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외로운 것은 내가 니가 아니기 때문에 고유한 존재로 태어났기 때문에 매우 외로운 것이 나의 그게 진심입니다. 그런데 그것만 가지고 인생을 생각한다는 것은 마치 인간의 아름다움을 탐구하기 위해서 옷을 모두 벗겨놓고 계속 들여다보는 보는 것 보는 거와 똑같은 것입니다. 지루하지 않습니까? 옷을 입어야 아름답습니다. 이 옷이 바로 의미입니다. 그 의미를 누구로부터 부여받았습니까? 그리고 우리는 그 의미를 끊임없이 다룬 것으로 부여, 다른 것으로 부여받으려고 애쓰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결국 그게 안 돼 안 됐습니다. 결국 우리에게 의미를 주시는 유일한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우리가 기독교 신앙을 가지는 이유입니다.
그러면 결국 그러면 결국 마음을 쏟아 놓았다는 이야기는 그 의미를 다른 데서 찾을 때 만족함이 없었던 한나가 결국 자신의 인생의 모든 고통과 울분을 하나님 앞에 모두 쏟아 놓으면서 자신의 인생의 고통의 문제를 여호와 앞에서 재해석했다는 뜻입니다. 그게 마음을 쏟을 때 일어나는 변화인 것입니다. 어느 날 마음의 슬픔과 고통을 짊어지고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살았습니다. 특별 작정 기도가 시작이 됐습니다. 그리고 반은 의무감으로 반은 원하는 마음으로 교회당에 나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신기하게 그날 기도가 됐습니다. 그리고 마음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러니까 통곡이 터져 나오고 자신의 마음을 모두 쏟아내었습니다. 자신의 고통이 쏟아져 나올 때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의 고통이 자신 속에 파고들었고, 예수와 하나 된 것 같은 된 가운데 자신의 마음의 사연들을 주 앞에 모두 토해 놓았습니다.
참석자 1 25:34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눈물로 범벅이 되었고, 심령에는 텅 빈 것처럼 그 모든 것들을 다 쏟아내었습니다. 신기하게 마음의 평안이 찾아왔습니다. 예배당을 걸어 나갑니다. 손수건으로 눈물을 피며 걸어 나갔습니다. 교회 바깥에는 바람이 붑니다. 산뜻한 바람을 얼굴에 느끼면서 길거리를 걸어 내려가는데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의 놀라운 사랑이 샘솟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자신의 삶의 고삐를 자신이 쥘 수 있을 것 같은 상황이 되고, 말같이 컸던 개 같은 상황은 아주 작아져서 이제는 고양이만한 상황이 되어 버려서 능히 자신으로부터 자신이 그걸 통제할 수 있겠다는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이게 결국 한나가 하나님의 집에서 마음을 쏟아 놓으며 경험한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갈 때 삶의 주체성이 해결되는 것입니다.
참석자 2 26:33
삶의 문제에 언젠 언제는 없겠습니다.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고 미래에도 있고 눈을 감는 마지막 순간까지 문제는 언제나 있기 마련입니다. 문제가 있는 것은 예전에도 알았고, 또 성령 충만할 때는 그 문제가 있어도 오히려 문제가 있기 때문에 삶의 고삐를 단단히 쥐고 그 삶에 대해서 우리가 주체성을 행사하며 살 수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이 어려움들은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을 드러내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들은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그것을 보면서 우리의 인생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마치 당구 때의 구슬을 맞으며 결국 공이 원하는 곳으로 가서 다른 공을 타격하며 올해 들어 집어넣는 것처럼 하나님이 자로 잰 것처럼 정확하게 내 인생을 인도하는 것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 마음이 마음을 주 앞에 모두 쏟아놓을 때 받는 밝은 빛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또 이 설교를 듣고 또 그저 잠깐 깨었다 일어나는 사람처럼 마음에 좀 위로를 받고 다시 옛날 생활로 돌아가겠습니까? 도대체 무엇을 누구를 위해서 그런 인생을 삽니까? 삶의 주인도 자기가 아니고 그렇다고 노예가 되는 보고 싶지도 않은데, 사실상 나는 아무 나도 알지 못하는 것에 노예가 되어서 미친 듯이 끌려가느니라고 결국 내 목에는 핏줄이 섰고, 그 개의 꽤 매어 있어야 할 줄 할 줄들이 내 목에 묶여 있어서 결국 내 목을 조이고 자유를 잃어버리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나와 기도를 하지 않아 아니면 그 삶의 상황은 개선이 되지 않습니다. 똑같은 상황이 반복되면서 지루한 인생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거기서 무슨 희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무슨 꿈을 꿀 수 있겠습니까? 비전의 말할 여유가 노예로 사는 사람에게 있을 수 있는 것 같아 있습니까? 노예는 비전이 있으면 고달픈 징벌이 그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노예는 노예 정신으로 살아가야만 신간이 편합니다. 노예 정신에는 비전이라는 건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주님에게 달렸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폭력이든 강압이든지 그리고 변덕이든지 아니면 미치고 하는 광기이든지 간에 무엇이 무엇이든지 간에 결국 주인에게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그에게 빚을 내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참석자 3 29:29
여러분 누구입니까? 여러분 인생의 노예입니까? 주인입니다. 개 같은 상황에 대해서 여러분이 통제력을 행사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개 같은 상황에 끌려다니고 있습니까? 한번 대답해 보십시오. 그리고 언제까지 그렇게 살겠습니까? 그리고 마지막에 여러분의 머리카락이 하얘져서 숨을 거 순간까지 이 상황이 계속된다면 그래도 여러분은 살아야 되겠다는 그 안에다가 도장을 찍겠습니까? 아니면 인생과 이혼을 하시겠습니까? 누구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마음을 하나가 쏟아놓기 전까지 그는 개 같은 상황에 노예처럼 끌려다녔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마음을 쏟아놓으면서 비로소 그는 이제 자신의 삶의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을 얻은 것입니다. 더욱이 이 기도는 마음으로 드린 기도였고 여호와 앞에 드린 기도였습니다. 어떤 기도는 여호와 뒤에서 드린, 어떤 기도는 앞에 여호와 뒤에서 드린 기도입니까? 아닙니다. 모두 여호와를 향해 드리는 기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모든 기도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기도는 아닙니다.
오래간만에 큰 맘 먹고 기도하러 나왔습니다. 기도 숙제처럼 주어진 것도 있고 하도 기도하라고 목사님 설교를 하니까 기도하러 나왔습니다. 그런데도 대체 기도가 되지 않습니다. 눈을 감으면 온갖 상상들이 꽃들처럼 떠돌아다니고 정신은 말할 수도 알지도 못하는 곳으로 끌고 갑니다. 그리고 말은 나오는데 마음은 움직이지 않고 그런 씨름 한참 하고 있노라니 정신이 피곤해집니다. 그리고는 엎드렸는데 그만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깨어 일어난 자신을 보니까 너무 한심하고 답답해합니다. 두 마음이 싸웁니다. 때려치우고 집에 가자. 내 영혼이 왜 이럴까 내 기도의 문이 왜 막혔을까? 하나님 앞에 이럴수록 더 매달려 봐야 되지 않을까 두 마음이 싸웁니다. 어느 날은 이 마음이 이기고 어느 날은 저 마음이 이기기도 하는데, 어떤 날에는 결국 저 마음이 이겨서 때려치우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렇게 돌아가는 발걸음의 자유가 있습니까? 왜냐하면 거기는 기도의 문이 닫혔기 때문입니다. 개인 기도의 문이 닫혔기 때문에 그는 기도하는 모양을 취했지만 아무것도 기도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돌아오는 길에는 하나님을 향한 원망 같은 것도 있습니다. 기도가 안 되게 하신다면 나도 때려치겠습니다라는 마음을 가지고 갑니다. 결국 기도의 문이 다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의 웅변입니다. 기도에 있어서 하나님 의 침묵은 웅변입니다. 내가 기도 안 되는 이유를 생각해 보라. 어디서 떨어졌는지 기억하고 돌이키라 일러주시는 것입니다. 거기서 하나님과 씨름하는 사람은 기도의 문을 엽니다. 결국 마음이 쏟아집니다. 물처럼 쏟아지고 자신의 모든 것을 주님 앞에 내려놓고 그의 영혼은 주의 무게에서 벗어나 자유와 깃털 같은 영혼이 됩니다. 마음을 쏟는 기도가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에게 말하고 싶어 스펄전이 말했던 것과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기도가 됩니까? 그러면 기도하셔야 됩니다. 왜냐하면 항상 기도가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안 됩니까? 그럼 기도하셔야 됩니다. 그렇게 이렇게 기도하지 않으면 앞으로도 계속 기도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영혼의 위기라고 생각하고 기도의 문을 열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여러분이 개 같은 상황에 노예처럼 끌려다니지 않고 그 상황이 아무리 커도 그거를 움켜잡고 자신의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의 인생의 비전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고, 인생의 계획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고, 여러분의 소원을 자신의 인생에다가 비춰볼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마음을 쏟아넣는 기도로 이런 자유를 누리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 응답을 받음

참석자 4 32:54
마지막 세 번째입니다. 응답을 받았습니다. 간절한 기도에 대해서 응답해 주셨습니다. 당시 엘리는 말하자면 사사이자 제사장이었습니다. 엘리는 이 여자의 하는 말을 듣고 대답했습니다.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 하나님이 내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이것은 하나의 단순한 희망 사항이 아니라 일종의 제사장의 축복이었고, 선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대신한 어떤 의미에서 확정이었던 것입니다. 평안히 가라.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구약에서 생하던 아주 중요한 하나의 격언과 같은 것이고, 평안을 비는 인사였습니다. 평안히 가라 평안히 샬롬입니다. 이게 하나님과의 평화, 그 하나님과의 평화에서 비롯되는 사람과의 평화, 만물과의 평화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온전한 평화를 누리면서 그 평화 속에서 사람들과의 평화를 경험하고, 만물과의 평화를 경험하는 것이니,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 맛보는 최고의 정신적이고 영적이고 육체적인 인간관계 전체를 아우르는 진정한 질서의 안정감과 평안, 그리고 행복의 극치를 샬레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전에 고통을 당했지만 한나는 샬롬 속에서 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마음에는 원통함에 쌓였고, 격분함이 증대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엘과 나와의 관계까지 위협을 받을 지경에 이르게 되었고, 마음 착한 여자의 이 마음 속에서 브리나를 향한 말할 수 없는 미움과 원망이 고개를 들게 되었고, 이것이 샬롬이 무너진 가운데 있었으니 무엇인데 그에게 기쁘겠습니까? 마음이 즐거운 사람에게 아침에 지적이는 새는 노래하는 새이지만, 한밤을 뜬눈으로 세우며 고통받았던 사람에게는 아침에 지저기는 새는 우는 소리로 들리는 것입니다. 결국 만물과의 평화도 깨지고, 그는 자신의 육체와 정신의 관계도 깨진 가운데 부조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의 모습을 보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종식시킬 수 있었습니까?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은인나에 대한 미움으로 어금니럽게물며 밤을 지새워도 결국 이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 앞에 그 고통, 그 고통하는 마음을 안고 나와 그 심정을 하나님께 쏟아붓고 주님께 평안을 주시겠다는 응답을 받기 전까지 이 마음의 번민과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의 것도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결코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간절히 하나님께서 간절한 기도에 응답해 주심으로만 여러분이 진정으로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자유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가슴 뛰지 않습니까? 얽매어 있던 생활 해 보셨습니까? 여러분 혹시 비춰 보셨습니까? 그것도 악독한 사채업자한테 빚을 져보셨습니까? 이자는 끊임없이 늘어나고 수시로 찾아와 유리창을 깨고 협박을 하고 위협을 합니다. 급기야는 장기 적출을 위한 각서에 도장을 찍으라고 무시무시한 이야기까지 합니다. 그 사람에게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빚을 모두 갚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자유가 느껴집니까? 모든 부채에서 완전히 해결되어 이제는 더 이상 빚이 없는 것을 한번 상상해 보라. 이것입니다. 오늘 설교를 듣는 여러분, 인터넷에 있는 여러분 가운데도 영끌을 하셔서 부동산에 막차를 타시고, 또 코인에 투자하여서 결국 대부분을 다 날리고 대출만 남고 이자는 월급으로 갚아야 되는 상황에 놓여 있는 분들이 있으십니까? 난 그런 상황을 모릅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신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 부채를 모두 상환한 상태라면 그때의 그 느낌은 지금의 부자와는 비교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유의 개념입니다. 빚 때문에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선택할 수 없고, 내 마음대로 내 뜻대로 실행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빛에서 빛에서 모두 해방되고 나면 이제 스스로 나의 의지를 결정하고 내가 원하는 바를 할 수 있는 게 있습니다. 이게 자유입니다.
참석자 5 37:01
바로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아 놓기 전까지는 개인의 기도의 문을 열고 주님 앞에 자신의 심정을 토하여 놓기까지는 자신의 마음의 모든 고통이 끝날 끝나기까지는 그에게 절대로 자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는 이제 그렇게 자신의 마음을 쏟아 놓았으므로 자유를 누리게 되었으니 하나님이 첫째로 평화를 주신 것입니다.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습니다. 기도하는 동안에 아이가 태어난 것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습니다. 집에 가면 그 보기 싫은 부인, 나의 무시하는 눈빛과 마주해야 될 것이고, 그리고 그는 서럽도록 외롭게 그렇게 따돌림을 받은 채 외로운 외톨이의 삶을 살아야 될 것입니다. 근데 이상합니다. 그렇게 마음을 쏟는 기도 후에 평안이 주어졌습니다. 강물처럼 넘칩니다. 그 기쁨의 이유가 무엇인지 설명하라면 하나도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는 얼마 되지 않아서 엘가나와 동침하고 아이를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실 것이라고 하는 이 미래가 응답이 가져다주는 평안입니다. 그 평안 속에 응답을 주셨습니다. 성경에는 ‘가서 먹고’ 그랬습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집에 있는 동안 한 날은 식음을 전폐하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 기도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왜 기도를 안 하십니까? 문제가 많아서 결국 죽을 생각까지 할 정도 할 정도로까지 인생의 벼랑 끝에 내몰렸는데, 거기 떨어져 죽는 것보다는 그래도 기도하는 것이 훨씬 낫지 않습니까? 무엇으로 보이지, 무엇으로도 답이 보이지 않으면 금식을 선택하십시오. 오늘날 잃어버린 경건의 기술입니다. 금식을 선택하십시오. 조용히 하나님 앞에 약속하고, 그리고 나의 마음이 슬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입니다. 나는 마음이 슬픈 사람입니다. 기도에 응답해 주시지 않으시면 내가 살 수가 없습니다. 마음이 수치스럽고 고통이 온 마음에 넘쳐서 내 마음과 몸을 가눌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나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옵소서 특별히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그 특별한 기도 가운데 하나가 금식입니다. 그리고 마음의 모든 시선을 하나님 앞에 모으는 것입니다. 금식하면 기도를 더 많이 할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며칠이 지나고 나면 너무 기운이 없어서 기도를 못합니다.
참석자 1 39:31
그런데 좋은 점은 있는데 그게 하나님을 향한 집중입니다. 정신이 먹는 것 때문에 사람이 분주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먹지 않으니까 시간도 많이 남고, 그리고 먹지 않으니까 만지는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아니 배가 고픈데 무슨 만지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까? 색깔 그런 거 관심 없습니다. 다 금강산도 식후경입니다. 배부르고 나서 에너지가 있어야지만 예쁜 것도 보고 싶고 부드러운 것도 만지고 싶고 향기로운 것도 냄새 맡고 싶고 또 달콤한 것도 먹고 싶은 거지, 배가 고프면 다 필요 없는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정신이 감정과 감각의 소모를 절제한 가운데 하나님만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금식의 유익입니다. 그렇게 정신에 집중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집중해서 기도를 하나님 앞에 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한나도 이렇게 기도한 게 처음입니다. 이렇게 기도할 때까지 한나의 심령을 녹이시고 연단하신 이유는 이렇게 문제를 통해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위대한 인물 사무엘의 어머니가 될 심성으로 이 여자를 준비시키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릇을 먼저 만드시고 하나님의 뜻을 부으시지 뜻을 부어버리시고 그릇을 찾는 하나님은 아닙니다. 당연히 하나님은 우리를 먼저 빚으시고, 그릇이 준비되면 당신의 뜻을 부으십니다. 여러분이 문제 속에서 마음을 쏟아놓으며 하나님 앞에 기도해서 주님을 만나고, 마음이 준비되면 그 응답의 과정을 통해서 여러분의 그릇을 바꾸시고 바꾸신 그 위에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충만하게 부으십니다. 그때 여러분의 삶은 지금 생각하는 여러분의 삶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을 하나님이 계획하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한나는 가서 먹었다고 했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먹고 마시는 것을 폐하며 하나님 앞에 자신을 쏟아놓았던 것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성경 공부를 가르치고 기도회를 인도해 봐도 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음이 산지 사방으로 찢어진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성경 공부하러 나와서 죽도록 밤늦게까지 가르치는데 마음은 콩밭에 가 있습니다. 결국 성경 꼭 본다고 집에 가서 실컷 인터넷에 뒤지다가 새벽에 잠이 들어버리면 그게 거기서 무엇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해서는 결국 여러분은 죽은 영혼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집중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결국 그렇게 집중하고 응답을 받은 후에 어떤 결과가 왔습니까? 얼굴에 다시는 근심빛이 없더라. 아이가 생긴 것도 아니고, 부인나가 와서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빈 것도 아니고, 부인 나가 쫓겨난 것도 아니고 아무 상황도 바뀌지 않았는데 한나는 근심 빛이 사라졌습니다. 그냥 한 번 잠깐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영원히 사라졌습니다. 다시는 근심 빛이 없더라. 이게 하나님의 결정적 응답입니다. 마음에 놀라운 평화를 주시고 이제 더 이상 근심이 없는 것입니다. 나의 사정을 그분께 모두 아뢴 바에 되었고, 내 인생은 그분의 손에 붙잡혀 있고, 그분이 내 인생을 이끌고 인도할 것이니, 나는 그분께 나 자신을 맡기고 나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을 것이다 하는 신앙적인 낙관주의가 이 여자의 마음을 지배하게 된 것입니다.
참석자 2 42:59
사람들이 찾아와서 어깨를 두드리며 잘될 거야. 걱정하지 마. 너는 사랑스러운 사람이야. 그리고 네 인생은 잘 풀릴 거야. 솔직히 얘기해서 사탕 발림이 아닙니까. 그리고 그 사람은 가면 그만입니다. 내 인생을 살아낼 사람은 그 사람이 아니고 털끝만큼도 날 도와줄 수 없습니다. 니콜 키드만을 기억하십니까? 절세의 미녀인 배우입니다.제 생애에 봤던 가장 아름다운 배우 세 사람 안에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직접 보지 못했지만 키가 186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항상 10cm 힐을 신고 나타납니다. 정말 미인입니다. 그런데 어렸을 때 이야기를 고백합니다. 어렸을 때 혼자서 초등학교 때 학원인가 어디를 다니는데 너무 무섭고 힘들었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하는 말이 니키 너는 감당해야 해. 언제까지 너를 보호해 줄 수 없으니 너는 내 삶을 스스로 감당해야 된다. 자기에게 울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주체적인 인생을 사는 모든 사람들은 결국 모두 그 불안과 염려를 안고 삽니다. 결국 우리는 그 불안과 염려를 하나님 앞에 맡김으로써 해결해 받을 수 있는 특권을 주신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다시는 근심의 빛이 없었습니다. 그리고는 마음의 평안을 유지하고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을 향해 부르시고 계시는 하나님의 응답의 초청입니다. 그러니 한 번 이렇게 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오래간만에 먹고, 얼굴에 다시는 근심 빛이 없이 응답 을 받은 후에 자신만만하게 살아가는 하나의 이 모습은 원통함과 격분함으로 마음이 가득 찼어 머리를 벽에 어 오 싶을 정도로 괴로워하던 이전의 한나의 모습과는 얼마나 다른 모습인지 한번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III. 적용과 결론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렵니까? 오늘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준 교훈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에게 문제는 무엇입니까? 하나처럼 온통하고 격분을 하므로 마음이 번민한 적이 있게끔 만드는 문제가 무엇입니까? 여러분도 하나와 같이 마음이 괴로운 사람입니까? 그런데 왜 그처럼 마음을 쏟으며 기도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응답은 여러분에게 자유를 주고 결국 현실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주는데, 무엇 때문에 개 같은 상황에 노예처럼 끌려다니고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시 여러분의 자리를 찾고 그 상을 개로 만들어서 여러분이 끌고 다니는 사람이 되게끔 하나님 앞에 해결받는 길이 무엇입니까? 여러분 개인의 기도의 문을 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여러분의 심령을 쏟아놓고 어떤 일이 있어도 노예 정신을 현실을 극복하지 않기로 다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이고 나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고유의 자유가 있다. 그리고 이것을 무엇으로도 앗아갈 수 없으며, 나는 노예로 사느니 차라리 자유인으로 죽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기도의 문을 여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버려주신다면 그분은 당신에게 계시하는 성품과는 모순이 되는 행동을 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 그런 분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진실하게 자신을 계시해 주셨고, 우리는 그 하나님의 선포를 믿기 때문에 오늘도 우리는 주님 앞에 우리의 삶에 절체절명의 위기에서도 낙심하고 포기하는 대신 그분을 붙들 희망을 갖고 는 것입니다. 절망의 벼랑끝은 떨어지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절망과 벼랑 끝에서 우리에게 날개옷을 달아주시는 하나님을 만나라고 우리를 벼랑 끝에 세우는 것입니다. 거기서 주님을 부르짖고 이기라고 세워준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듣고 마음이 슬픈 여러분들이요. 다시 주님 안에서 마음을 쏟아붓는 기도로 희망을 찾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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