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찮음의 능력

사도행전 강해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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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찮음의 능력

본문: 사도행전 19장 11-12절

찬송: 399장 어린 양들아 두려워 말아라

말씀의 문을 열며

오늘 우리는 사도행전 19장 11-12절 말씀을 통하여 에베소 지역에서 일어난 매우 이례적이고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목격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의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성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며 복음을 담대히 전했습니다. 무더운 날씨 속에서도 생계를 스스로 유지하기 위하여 손수 가죽을 깁고 천막을 만들며 피땀 어린 노동의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손을 통하여 이례적이고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셨습니다.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땀을 닦을 때 사용하는 손수건이나 작업용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사람을 괴롭히던 악귀마저 쫓겨나가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손수건바울이 천막을 만들며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닦던 지극히 평범한 천조각이었습니다. 또한 앞치마바울이 가죽을 다루며 작업할 때 몸을 보호하기 위해 두르던 소박한 앞가리개에 불과했습니다. 그것들은 어떠한 종교적 신성함이나 신비한 능력을 자체적으로 가진 물건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그저 땀과 때에 찌든 보잘것없는 넝마 조각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에베소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께서 그 지극히 하찮은 일상의 물건들을 통로 삼아 병자를 고치시고 악귀를 무찌르는 경이로운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본문 11절에 기록된 '놀라운 능력'은 사도 바울로마서 1장 16절 에서 선포했던 '복음의 능력'과 동일한신학적 뿌리를 지니고 있습니다. 둘다 '뒤나미스'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힘과 권능을 뜻합니다. 복음의 능력은 거룩한 성전이나 신학적, 신앙적 담론 안에만 갇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날마다 땀 흘리며 수고하는 삶의 현장에서 지극히 평범하고 하찮은 도구를 통하여 눈으로 목격할 수 있는 가시적인 은혜로 드러납니다. 오늘 나눌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소박한 일상과 피땀 어린 수고가 하나님의 능력을 담아내는 거룩한 통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하찮은 삶을 쓰십니다.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그동안 뛰어난 언변으로 복음의 진수를 전했던 바울의 모습과 달리 치유와 축귀 역사를 하는 바울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오늘 이 본문에서 치유와 축귀의 역사를 일으키신 진정한 능력의 주체가 누구이신가를 정확히 분별해야 합니다. 본문 11절은 분명하게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라고 증언합니다. 이 놀라운 능력을 행하신 진정한 주체바울이나 땀수건 자체가 아니라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이셨습니다. 반면 행 19:13 부터 나오는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들은 자신들이 능력을 행하는 주체가 되려 하였고, 예수의 이름을 기계적인 주술 주문으로 이용하려다 악귀에게 제압당하여 큰 상처를 입고 벌거벗은 채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모시지 않고 자신들이 주체가 되려 할 때 아무런 능력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인생과 우리가 가진 모든 소유를 숫자 '0'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의로워지거나 구원에 이르고 영생을 취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세상의 어둠을 몰아낼 능력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쌓아 올린 지식이나 성취나 소유도 하나님 없는 자리에서는 모두 절망적인 숫자 0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수백 개의 0을 늘어놓아도 0은 여전히 0일 뿐이며 스스로 1을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땀을 닦던 땀수건도 그 자체로는 지극히 무가치한 숫자 0이었습니다.
사도행전 5장에 등장하는 베드로의 지나가는 그림자 사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림자는 빛이 가려져 생기는 허상에 불과하며 아무런 형체도 무게도 없는 지극히 하찮은 숫자 0의 상태입니다. 그림자 자체가 질병을 고치거나 악귀를 쫓아낼 신비한 힘을 가질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실체 없는 베드로의 그림자라는 무가치한 0을 통해서도 병자들을 고치시고 악귀를 쫓아내시는 이례적인 능력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스스로 아무런 가치나 능력을 만들어낼 수 없는 숫자 0과 같은 존재 앞에 숫자 '1'이신 하나님께서 능력의 주체로 연합하시는 순간 가공할 만한 은혜의 역사가 터져 나왔습니다. 무가치한 0 앞에 전능하신 1이 결합하는 순간 그 인생은 10이 되고 100이 되며 1000의 가치를 지닌 하나님의 능력의 통로로 변모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세상에서 지혜롭고 강한 자들 대신 보잘것없고 하찮은 0의 상태에 있는 우리를 통로 삼아 당신의 살아계심을 증언하십니다.

말씀 위에 삶을 세웁시다.

하나님께서 지극히 하찮은 삶의 도구들을 통하여 능력을 베풀어주신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눈앞의 기적에 마취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진리의 말씀 위에 반듯하게 세우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만약 베드로의 그림자나 바울의 땀수건으로 병 고침을 받은 에베소 사람들이 기적의 수단이나 물건 자체에 집착했다면 그들은 도리어 기적 때문에 하나님과 영영 멀어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과거 천부교의 박태선이나 예수중심교회 이초석과 같은 인물들 역시 능력의 주체이신 하나님보다 눈앞의 기적과 현상에 집착하다가 결국 교회를 어지럽히고 사이비 이단의 길로 빠지고 말았습니다. 손수건이나 그림자 같은 수단 자체를 우상화하는 것은 실체이신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미신적 태도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지극히 하찮은 물건을 통해서까지 이례적인 능력을 베풀어 주신 궁극적인 목적은 눈앞의 이적에 마취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진리 위에 반듯하게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육체의 질병이 고침을 받는 것도 대단히 귀한 은혜이지만 세월이 지나면 인간의 육체는 결국 쇠퇴하고 한계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육체의 치유보다 더 위대한 이례적인 능력은 우리의 비뚤어진 마음과 삶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반듯하게 정립되는 것입니다. 태초에 무질서와 혼돈 그 자체였던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아름다운 질서와 평화의 세상으로 바뀌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말씀은 무질서를 질서로 바꾸시며 무너진 우리 자신을 반듯하게 세우시는 가장 이례적인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삶의 중심에 바로 설 때, 우리의 지극히 소박한 일상에서도 거룩한 변화가 시작됩니다. 우리가 매일의 삶에서 눈에 보이는 신비나 기적만을 좇지 않고, 날마다 들려오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진리를 마음에 채울 때 우리의 영혼은 비로소 단단해집니다. 말씀의 기준에 나 자신을 비추어 보며 하루하루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그 순종의 걸음이야말로 세속의 탐욕과 불안을 이겨내는 참된 능력이 됩니다. 비록 보잘것없이 느껴지는 작은 일상일지라도 말씀이라는 튼튼한 반석 위에 세워진 신실함은 무너진 우리 삶의 자리를 아름답게 재건하고 우리를 세상을 살리는 빛으로 세워 줍니다.
눈에 보이는 기적이나 신비한 현상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날마다 말씀의 기준에 따라 자신을 정직하게 돌아보며 일상의 생각과 삶을 말씀 위에 반듯하게 세워나가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세상을 치유하고 영적 부흥을 일으키는 참된 제자의 삶입니다.

말씀의 문을 닫으며: 능력의 통로로 살아갑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세상의 눈으로 바라볼 때 우리 자신은 너무나 소박하고 연약한 숫자 0과 같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주체로 서실 때 우리의 하찮은 일상과 작은 수고조차도 하나님의 이례적인 역사를 드러내는 영광스러운 통로가 됩니다.
눈에 보이는 현상이나 수단에 매이지 마시고 오직 능력의 주체이신 하나님만을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날마다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각을 다스리고 습관을 바로잡아 일상의 모든 삶을 말씀 위에 반듯하게 세워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복음이 부흥하고 교회가 세워지는 이례적인 능력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중앙교회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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