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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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1세기 고린도시는 매우 부유한 도시였습니다. 해안으로는 동서를 이어주는 위치에 있었고 육지로는 복쪽과 남쪽을 이어주는 엄청난 지리적 이점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고린도시는 동서와 남북이 교차하는 명실상부 상업고 무역의 요충지였습니다. 바울이 사역할 무렵에는 고린도는 매우 번창한 국제적 무역도시였습니다.
그렇기에 고린도시는 동서남북으로 늘 여행객이 붐볐고 수많은 상인과 사업가들에게 큰돈을 벌 수 있는 기회의 땅이기도 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사방에서 몰려오다 보니 자연스럽게 자신의 도시나 나라 또는 지역에서 숭배하던 우상들도 자연스럽게 고린도시로 모이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대 올림픽 경기에 버금가 정도였던 이스트무스 경기는 고대 그리스의 3대 스포츠 축제 중 하나였습니다. 축제 중에는 참가자와 관람객뿐 아니라 전역에서 방문객들이 몰려왔습니다.
고린도시는 200년간 기능을 상실한 도시였지만 기원전 44년에 로마 공화정 말기 최고의 권력가였던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 새롭게 태어난 도시였습니다. 초기 정착민은 로마의 군인이나 로마의 해방 노예였으나 지리적 이점 때문에 수많은 무역상인과 사업가들로 넘쳐나게 되었습니다. 철저하게 도시의 체제와 법률은 로마양식을 따랐습니다. 고린도시는 천연요새 역할을 할 수 있는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후견인 제도 설명
이러한 고린도시에 한 가지 특이한 제도가 있었는데 바로 후견인 제도입니다. 이 후견인 제도가 오늘 본문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것입니다.
1)후견인과 의뢰인 설명
특별히 후견인은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와 위치에 있던 사람들이었고 그로 인해 사회적 자본과 기회를 누릴 수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반면 의뢰인은 사실상 누구나 의뢰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이 부족한 사회적 자본을 후견인으로부터 제공 받아 지금보다 더 성공하는 삶을 원한다면 누구나 의뢰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2)후견인과 의뢰인의 관계 설명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와 지위에 있는 후견인은 자신의 사회적 자본(돈, 일자리, 법적보호, 권력, 인맥 등)을 의뢰인에게 제공합니다. 그렇게 제공 받은 의뢰인은 동등한 사회적 자본이 아닌 다양 한 방식(공개적 칭찬, 정치적 지지, 요청을 들어줌, 수행원으로 동행 등)을 통해 명예를 돌려주었습니다. 당시 1세기는 돈보다 명예가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3)후견인과 의뢰인 서로가 얻는 것은?
후견인은 자신의 사회적 자본을 제공함으로서 명예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 명예는 사회적으로 더 높은 위치로 안내했으며 더 강한 권력과 영향력있는 사람과 연결될 수 있었습니다. 의뢰인은 후견인의 사회적 자본을 통해 엄청난 성공의 기회와 혜택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후견인이 사회적으로 높고 유명한 인물일 수록 그와 연결된 의뢰인은 사회적으로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는 기회와 더 큰 성공을 보장 받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 명예와 성공을 얻는 것은 제로섬 게임이었습니다. 누군가 명예를 얻으면 누군가는 반드시 잃어야 했습니다. 누군가가 성공했다면 반드시 누군가는 실패하거나 성공이 지연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명예를 얻기 위해 사회적으로 높이 올라가기 위해 또는 더 큰 성공을 얻기 위해 나와 경쟁이 되는 상대를 비방하고 망신을 주며 거짓소문을 퍼뜨리고 법정으로 데리고 가거나 경제적 피해를 주거나 정치적으로 제거하기도 했습니다.
4)교회의 문제와 연결
가장 큰 문제는 후견인 제도와 같은 세상적 기준과 가치가 교회 안으로 고스란히 들어와 십자가 복음보다 더 앞서 있었으며 교회의 가장 중심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교회의 내부 분열은 후견인 제도와 관련이 있습니다. 성도들은 온통 이 세상적 가치에 물들어 있었습니다, 그러한 성도들은 교회의 사역자를 자신의 후견인으로 인식했고 교회에서 더 높아지고 우월해지며 더 크고 많은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자신들이 보기에 유력한 사역자들을 앞으로 내세워 과도한 경쟁이 일어났습니다.
다른 누구보다 자신들이 앞서기 위해 다른 사역자나 성도들을 비방하며 깍아내리기를 서슴치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적인 관점으로 볼 때 가장 지혜로운 행동이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성도들이 생각했던 참된 지혜는 후견인 제도를 통해서 볼 수 있듯이 남들보다 더 영향력이 있고 사회적으로 더 높이 올라가며 더 우월해지고 모든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이었습니다.
5)후견인 제도를 통해서 본 세상의 지혜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생각했던 지혜는
지혜 = 자기 중심적인 선택과 결정
그래서 교회 안에는 이러한 슬로건들로 넘쳐나게 되었습니다.
인용구절: 고린도전서1:12
12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
그들이 내세우는 사역자들이 더 높아지고 더 많은 명예를 가져야만 그 사역자를 내세운 자신들이 교회 안에서 더 높아지며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1:10절에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편지로 호소합니다.
인용구절: 고린도전서1:10
1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십자가의 복음보다 세상적 가치를 더욱 앞세웠던 교회에 나타난 결과는 분열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세상적인 가치로 인해 잘못해석되었던 바울 자신의 역할과 사역들이 십자가보다 앞서지 못하도록 합니다.
인용구절: 고린도전서1:17
17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여기서 세례를 부정하거나 자신의 사역을 폄훼한 것이 아닙니다. 그 어떤 것도 십자가 보다 앞설 수 없다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가 정말로 경계하고 두려워 했던 것은 바울, 자신 전했던 복음 또한 후견인제도처럼 스스로를 높이고 더 큰 영향력을 얻으며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도구로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비추어질 것에 대한 우려였습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참 많은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분열, 음행, 소송, 결혼, 우상 제물, 예배, 은사 등 교회라고 말하기 부끄러울 정도로 수많은 분쟁과 싸움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을 통해 고린도교회의 모든 문제의 원인은 바로 십자가 부재에 있다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고린도전서의 가장 핵심이 되는 본문이며 고린도 교회에 나타났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이기도합니다. 특별히 바울은 고린도전서 1:10-17에서 나타났던 분열의 문제를 십자가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1.십자가에 시선을 고정하기
바울은 고린도전서 1:10-17에 나타났던 교회의 내부 분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십자가에 시선을 고정할 것을 요청합니다.
인용구절: 고전1:18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바울은 17절에 말의 지혜와 18절의 십자가의 도를 철저하게 대립시키며 대조합니다. 왜냐하면 무엇이 성도들에게 있어서 진정한 능력인지 설명하기 위함입니다. 바울은 이를 통해 세상의 지혜를 추구하다가 분열된 공동체를 하나로 모으고, 흐트러진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신앙의 태로를 올바르게 세우며, 흐려진 진리를 다시 상기시키기 위함입니다. 세상의 지혜와 십자가 이 둘 중에 정말로 너희를 구원한 능력이 무엇인지 성도들 스스로 돌아볼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한 것입니다.
성도들이 대조하면서 볼 수 있도록 17절과 18절 두 절을 나란히 새번역과 esv역본으로 함께 띄워주다.
17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복음을 전하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이 되지 않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18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할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사람인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17 For Christ did not send me to baptize but to preach the gospel, and not with words of eloquent wisdom, lest the cross of Christ be emptied of its power.
Christ the Wisdom and Power of God
18 For the word of the cross is folly to those who are perishing, but to us who are being saved it is the power of God.
바울 이런 지혜로운 장치를 통해 성도들 스스로를 돌아볼 뿐 아니라 실제로 그 구원의 능력이 무엇인지 확인하도록 성도들을 진리로 다가가게 합니다.
본문 18절에서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할 때 능력은 헬라어 두나미스 (δύναμις)로 힘, 권능, 능력을 이야기 합니다. 고린도전서에서 능력이라고 말하는 헬라어 두나미스는 항상 하나님의 주권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본문에서 능력, 두나미스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설명할 때 사용되는 단어 입니다.
또한 여기서 말하는 능력은 단순히 말만 거창한 능력이거나 일어나지 않는 거짓된 능력이라거나 더 나아가 지킬 수 없는 허무맹랑한 능력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닌
“확실히 일어난 능력을 이야기 합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들에게 십자가가 너희를 구원한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호소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 능력을 고린도교회 모든 성도가 체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고린고교회 성도들이 십자가를 통해 경험했던 하나님의 능력은
바로 이전에 있던 곳에서 새로운 곳으로 옮겨지는 것 입니다.
성경에서 구원의 역사를 설명할 때 공통적인 패턴이 있는데
어둠에서 빛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전에는 진노의 자녀에서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로, 죄의 종에서 의의 종으로, 아담 안에서, 그리스도 안으로, 육신적인 삶에서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삶으로
이와 같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인 구원의 역사를 통해 확실하게 옮겨지는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바로 멸망에서 구원을 얻은 삶입니다. 바울이 말했던 십자가 곧 하나님의 능력은 그 어떤 세상 지혜로도 해내지 못했던 거듭난 자들이 맞이하게 될 구원의 새로운 시대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구원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살아갈 삶 가운데서로 오로지 십자가의 능력으로만 살아갈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본문 18절 하반절에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사실 한글로 된 이 하반절에는 현재진행형적인 표현을 식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원문과 영어 표현을 중심으로 제가 한글번역을 의역하자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말씀이 구원을 받는 중에 있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현재진행형을 품은 이 하반절의 뜻은 지금 구원이 끝난 것이 아닌 진행중에 있다는 표현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의 능력으로 시작된 구원이 오직 십자가의 능력으로만 진행될 것이고 오직 십자가의 능력으로만 그 구원이 완성된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의 이러한 설명을 통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자신들의 구원이 무엇으로부터 시작되었는지 또 그 구원을 이루기 위해 무엇을 붙잡아야 하는지 철저하게 깨닫게 되는 시간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인 십자가를 통해 거듭나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습니다. 그 시대 가운데 필요한 것은 세상적 가치와 능력 또는 지헤가 아닌 오직 십자가입니다.
오늘날 현대시대는 삶을 잘 살아내는 수많은 지혜와 능력들이 차고도 넘칩니다. 유명한 유튜버를 통해서, 좋은 저서를 통해서, 좋은 투자 정보를 통해서, 또는 지인들을 통해서 그 지혜와 능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결국 그런 모든 것들은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온전하게 해석되거나 바르게 사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믿음과 신앙은 그 모든 것들이 필요없고 다 버려야 한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보다 앞서야 하는 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능력인 십자가가 우선되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오로지 십자가를 통해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십자가가 기준이 되어야 하고 십자가와 맞지 않는 다면 과감하게 버리고 포기하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세상의 지혜와 능력으로 살아가는 삶이 아닌 오직 십자가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인생들이기 때문입니다.
2.세상 지혜를 미련하게 만드는 참된 지혜, 십자가
마르틴 행엘이 저술한 십자가 처형이라는 책에서 2세기 인물이었던 순교자 유스티아누스의 글을 통해 당시 사람들은 십자가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보여줍니다.
그들은 우리가 십자가에 처형된 인간을 세상의 창조주이자 영원불변 하시는 하나님의 다음 위치에 놓는 것을 미쳤다고 말한다. - 마르틴 행엘 십자가 처형 -
또 다른 글에서는 십자가의 달린 남자를 예배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의 기과함을 조롱하는 글을 소개한다.
카이킬리우스에 따르면 그리스도인들은 병약한 망상들, 말하자면 노파들이 믿을 만한 미신을 맹신하게 하거나 모든 참된 종교를 파괴 시키는 몰상식하고 열광적인 미신을 따르고 있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에 처형된 사람을 예배한다는 사실은 그들의 신앙의 기괴함을 보여준다. - 마르틴 행엘, 십자가 처형 -
위에서 소개된 글을 보며 알 수 있듯이 당시 십자가는 매우 수치스럽고 두려운 것이며 불쾌했고 입에 올리기 역겨운 것이었습니다. 때로는 이 십자가 형벌이 누군가를 욕하거나 조롱할 때로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당시 십자가는 지금처럼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이라든가 감동을 준다든가 또는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어디 높은 곳에 세울 수 있는 상징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미련하고 미친 것이었으며 수치 그 자체였습니다. 말그대로 세상의 지혜를 추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걸림돌이었습니다
바울은 십자가를 최고의 지혜와 능력으로 여기지 않는 사람들이 겪는 딜레마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인용구절 고린도전서1:22-23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유대인들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보면서 분명히 나무에 달리는 것이 곧 하나님의 저주와 형벌이라고 말했던 신명기 21:22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당시 유대들은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할 수 있는 정치적 메시아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 메시아를 기대하면서 표적을 구했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나무에 달려 저주 받아 죽은 예수는 모순과 악몽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반대로 지혜를 최고로 여겼던 헬라인들에게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신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고린도전서 주석에서 이렇게 표현한다.
여기서 어리석음에 대한 바울의 말은 순전히 지적 결함이라든가 탁월한 지혜의 결핍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그 이상의 어떤 것이 포함되어 있는데, 정신 착란과 매우 비슷한 어떤 것을 의미한다. - NICNT 고린도전서 고든피 -
헬라인들에게 십자가의 달린 예수가 진정한 신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은 거의 정신병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당시 로마가 세운 고린도시에 살아가고 있었던 성도들에게 십자가는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요 아무리 자신을 구원한 능력이고 지혜라고 할지라도 쉽고 편하게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요
더군다나 앞서 설명했듯이 사회적으로 더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사람과 연결되도 성공할까 말까 하는데 십자가 처형으로 인해 사회에서 완전히 낙인찍혀 매장당한 범죄자를 믿고 따르며 예배하는 것이 최고의 지혜라고 한다면 얼마나 모순적이었을까요
그러나 바울은 이에 대해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단호하게 이야기 합니다.
인용구절: 고린도전서 1:21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바울은 여기서 엄청난 역설과 신비를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소개합니다. 바울은 참된 지혜와 능력은 고작 이 땅에서 썩어 없지는 성공만을 보장하지 않는다고 이야기 합니다. 또는 그러한 지혜는 결국 멸망당해 소멸하는 인간으로 시작하지 않는다고 설명합니다.
분명히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세상의 지혜에 눈이 멀어 세상 것을 움켜지고 그것이 더 화려하고 풍성한 삶으로 인도해줄 것이라는 착각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십자가는 이 세상을 넘어 영원을 보장하는 참된 지혜와 능력이라고 역설합니다. 그리고 세상이 알지 못한 그 구원의 신비가 한낱 쉬 사라지는 안개와 같은 인간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 된다는 것을 선포합니다.
사진 하나 보여주시겠어요 저 사진이 무려 10년전 사진입니다.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새벽예배 끝나고 곧바로 피켓을 들고 전도하러 나갔습니다. 저 때 제 꿈은 바로 너는 예수에 미쳤다는 소리를 듣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전도하던 지역이 원내동이었고 버스가 많이 지나가는 곳이었습니다. 버스에 탄 승객들이 저를 바로보는 눈 빛을 정말 잊을 수 가 없었습니다. 거의 정신병자나 미친놈으로 보고 있는게 느껴졌습니다.
그럼에도 즐겁고 행복했던 것은 바로 십자가의 능력으로 구원을 받은 저에게 무엇보다 참된 가치는 세상을 좀더 잘 살아갈 수 있는 지혜가 아닌 십자가를 중심으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당시에 전도를 나가지 않으면 될 만큼 뜨거움이 제 마음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참된 지혜와 능력은 바로 십자가에 달려 죽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우리가 박수 받을 인생이 보장되어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꿈과 비전을 보장 받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미래를 보장 받을 수 있다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세상이 가장 미련하다는 것을 가장 사랑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이 가장 가치있게 여기며 지혜롭다는 것을 도리어 버려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되시는 것은 바로 우리는 부르심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인용구절: 고린도전서 1:24-25
24 그러나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는, 유대 사람에게나 그리스 사람에게나, 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25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의 강함보다 더 강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