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802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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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하는 자
실천하는 자
오늘의 말씀인 야고보서는 우리에게 참으로 어려움을 주는 본문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바로 야고보서의 대표적인 구절로 알려져 있는 2장 17절 말씀 때문인데요, 한번 읽어볼까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우리는 우리가 수차례 고백하는 ‘믿으면 구원받는다’라는 말씀과 해당 본문이 동일하게 성경 말씀이라는 것에 참 어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로마서 1장 17절 말씀과 같이 믿으면 의인이 된다는데, 야고보서를 읽으면서 마치 매번 실패하는 나 자신을 보면서 나는 사실 의인이 아닌건가? 라는 생각을 갖게 만들죠.
하지만 우리의 생각과 다르게 로마서 말씀과 야고보서의 말씀은 서로 충돌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두 말씀의 사이에서 우리는 더 큰 은혜를 누릴 수가 있는데요, 오늘 2장으로 나아가는 길목에 있는 오늘의 본문을 함께 살피면서, 우리 신앙에서 실천은 무엇인지를 함께 살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말씀 본문인 22절부터 살펴보면, 시작부터 우리의 마음을 조금 찌르는 듯한 느낌이 들게 됩니다.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어서 듣기만 하여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고 하죠.
시작부터 말씀을 행하는 자와 듣기만 하는 자가 나뉩니다.
딱 이 말씀만 들으면 자동으로 이런 생각이 들죠.
‘주일예배 때 말씀만 듣는 내가 듣기만 하는 자인가?’
과연 그럴까요? 계속 말씀을 살펴보죠.
23절과 24절을 보면,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자, 앞서 나온 말씀을 듣기만 하는 자가 어떤 모습인지를 보여줍니다.
어떤 자라고 하죠? 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보지만, 곧 잊어버린다는 겁니다.
왜 갑자기 거울이 나올까요? 이것은 야고보가 하나님의 말씀, 율법을 거울로 비유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말씀을 볼때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역시 나는 말씀을 잘 지키고 있어.’ 이런 생각이 드시나요? 그러면 정말 대단하신겁니다.
보통은 ‘에휴 난 이렇게 못하는데’ 이런 생각이 들게 될겁니다. 사실 그게 맞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말씀을 스스로 지킬 수 없는 죄인이기 때문이죠.
사도 바울도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결국 율법이라는 것은 우리가 열심히 보고 공부할 수록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만 해준다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서 거울을 보면 우리의 못난 모습들이 보이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이 뭐냐, 아침에 일어나서 거울을 보고, 못나 보일 때, 어떻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할까요? 그냥 못난 모습대로 외출하나요? 아니죠. 못난 모습을 고치려 한다는 것입니다.
25절에서 바로 그것을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통해서 나의 죄악된 모습을 발견했다면, 죄된 모습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의로운 모습대로 살기위한 행동이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앞에서 말한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라는 것이죠.
자. 그러면 우리는 어떤 결론을 맺을 수 있죠? 우리가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열심히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게 될겁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2장 17절 말씀처럼 행함이 없으면 그저 죽은 믿음, 말씀을 듣기만 하는 자가 되는 것이겠죠.
어떠신가요 여러분? 이 말씀에 동감이 되시나요?
사실 이렇게 말씀이 끝나버린다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좌절뿐입니다. 왜죠? 우리가 잘 알잖아요. 우리가 매번 시도만 하고 결국 돌아간다는 것을요.
맞습니다. 사실 우리는 우리가 잘 아는대로 그렇게 행동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평생 말씀을 행하는 자가 아니라 듣는 자로서 늘 죽은 믿음으로 살아가야 하는 걸까요?
아마 그건 아닐겁니다. 그러면 우린 도대체 어떻게 해야할까요?
바로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주님이 어떤분이신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께 불가능이란 것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그런데 그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고,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셨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죄로부터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아마 여러분들 너무 잘 아시는 말씀일거에요.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자유함을 얻었다고 말하는데, 이 자유함은 도대체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일까요?
글자 그래도 죄로부터죠. 우리가 더이상 죄에 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우리가 아까까지 잘 봤잖아요. 우리가 너무 죄에 매이는 현실을요.
그럼 도대체 뭐로부터 자유한 걸까요?
여기서 우리가 25절을 다시 한번 볼까요? 놀랍게도 25절 시작이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입니다.
이것도 좀 이상해요. 우리는 율법을 보면 죄를 깨닫는다고 했어요. 우리에게 율법은 우리를 옭아매는 쇠사슬과 같이 느껴지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어떻게 율법이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있을까요?
여기서 예수님이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이전까지 우리가 율법을 통해 우리의 죄를 보았던 것은, 우리가 온전치 못하여 스스로 말씀을 이룰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제 예수님께서 오셔서 모든 율법을 스스로 이루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이라는 것은 예수님을 통해 온전해졌습니다.
이전에는 지킬 수 없었지만, 이제는 예수님을 통해 말씀을 이룰 수가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율법이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아시겠나요? 아마 막 뒤죽박죽하실 수도 있어요. 자유롭다는 거야 아니라는거야?
그럼 하나씩 살펴보자구요.
우리는 지금 말씀을 정말 그대로 지킬 수 있나요? 없어요. 우리가 우리 모습 잘 알잖아요.
근데 말씀에서는 우리가 지킬 수 있다고 합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할까요?
예수님께서 계시기 때문이죠. 예수님께서 우리가 말씀을 지킬 수 있게 하십니다.
어떻게요? 우리 안에 보내신 존재가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성령님이시죠.
사실 우리가 믿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씀을 실천하지 못하는 것은, 아직 우리 안에 죄성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 의인이 되는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그 의인이라는 것은 그냥 선포일 뿐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아직 의인이 아닌데, 의인으로 쳐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겁니다. 혹시 법정 용어로 무죄와 무혐의의 차이가 뭔지 아시나요?
그 차이는 행동유무의 차이입니다. 해당하는 행동이 아예 없었다면 무혐의이고요, 해당하는 행동은 있었는데, 그것이 죄가 되지 않는다면 무죄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의인된 것은 우리가 의인이 아닌데, 그렇다고 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직 우리의 행동 가운데 죄악된 모습들이 드러나는 것이죠.
하지만 믿기 전과 이후가 다른 것은, 그 안에 성령께서 계시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의 죄악된 모습을 점차 지워나가실 것입니다.
지속적으로 말씀을 듣게 하시고, 나의 죄인됨을 깨닫게 하시고, 그래서 주님께 돌아가도록 하시고, 그것이 작심삼일로 끝나더라도 다시 또 돌아가도록 인도하시고, 이렇게 하시면서 점차점차 우리를 주님께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우리를 진정한 의인으로 만드실 것입니다. 그때가 언제냐? 바로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재림의 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비록 지속적으로 죄를 짓지만,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 하나님으로 인해 죄로 인한 죽음에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실패하고 할지라도 주님께서 다시 회복하게 하신다는 것이죠.
그래서 이제는 율법이 우리에게 자유를 줍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이루셨기에 우리가 말씀 그 자체에 매이지 않고 살 수 있기 때문이죠. 성령께서 우리를 결국에는 의인된 자리로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이죠.
저는 이 율법 이야기를 할 때, 어린아이 비유를 드는 것을 좋아하는데요,
우리 한번 생각해봅시다. 어린아이가 길을 걸어갑니다. 그런데 길 중앙에 구덩이도 있고, 가다가 돌부리도 있고 옆에는 낭떨어지까지 있는 그러한 길이에요.
그러면 그 아이의 입장에서 부모가 없이 걷는 것이 자유로울까요? 아니면 부모가 함께하고 걷는 것이 자유로울까요?
아마 후자라는 생각이 드실 것입니다. 왜죠? 우리가 생각하는 자유란 어떠한 제약없이 스스로 하고싶은 대로 할 수 있는 전자가 맞지 않나요?
그렇지 않죠. 후자의 상황이어야지만 아이가 위험하지 않게 하고싶은 것을 다 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길이 세상을 살아가는 삶이고, 어린아이가 우리이고, 부모가 바로 율법이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주님과 말씀이 있기에 우리는 우리 앞에 놓여진 삶을 자유롭게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우리를 보호해주실 주님을 믿고 당당히 걸어나갈 수 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이제 결론을 맺어봅시다. 왜 우리는 믿음이 있는데 행동하지 못할까요? 왜 말씀은 행동하지 않는 믿음을 죽은 믿음이라고 할까요?
그것은 간단합니다. 성령께서 함께하시는 진정한 믿음이 있는 자라면, 그 은혜를 누린 자라면, 당연히 행동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죠.
우리가 지금껏 생각했던 행함이란, 말씀을 지키기 위해 아둥바둥 노력하는 것을 행함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말씀이 말하는 행함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오셨기 때문에 우리는 행동으로 구원을 쟁취할 필요가 없거든요.
단지, 우리가 주님의 크신 은혜를 입었다면, 그 말할 수 없는 감격으로 인해 우리는 행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고, 주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고, 주님을 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하지 않으려 해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를 봐도 잘 알 수 있죠. 예레미야는 하도 나라 망한다는 이야기를 해서 핍박받으니까 하나님 말씀을 안전하고 싶어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발생하느냐?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는거에요. 이것이 진정한 말씀의 은혜를 입은 자의 모습입니다.
아마도 이곳에 오신 여러분들의 마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분명 이 시간에 다른 것을 할 수 있지만, 이 휴가를 노는 것에 쓸 수 있지만, 내가 이 선교를 오지 않으면 못견딜 것 같아서 이 자리에 오셨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아마 우리의 지난 선교기간 동안 그 은혜들을 더욱 깊이 누리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이번 선교기간 동안 누리신 은혜들이 그저 이 곳에서만 그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들이 한국에서 정말 내가 일본 안가면 못견딜 것 같아서 이 자리에 와서 선교를 했지만요, 주님은 또다시 그 불붙는 마음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어디에서요? 다시 돌아가는 우리의 삶에서 말입니다.
여러분, 주님이 우리를 이 일본 땅에 부르신 것은요, 우리를 통해 일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시게 하기 위함이지만요, 동시에 이 선교의 시간들을 통해 우리를 변화시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계획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그 계획은 또다시 여러분들을 통해 이제 여러분들의 삶의 터전으로 향해가고 있습니다.
우리 귀한 선교대원 여러분들, 받으신 은혜들을 각자의 삶에서 나누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이 말하는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의 모습입니다.
내가 의식해서 행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우리가 일본에서 행했던 선교들을 떠올릴 때마다, 그 은혜를 고백할 때마다 그것을 우리 삶에서 행하지 않으면 못견디도록 만드실 것입니다.
우리의 지난 선교의 시간들이, 그저 이 순간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전환점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찬양: 보내소서
